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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보노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플라보노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플라보노이드 기본골격 플라본 백본 (2-phenyl-1,4- benzopyrone)의 분자 구조 이소플라본 구조 네오플라보노이드 구조 플라보노이드(또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노랗다는 뜻의 라틴어 flavus에서 유래함)는 식물이나 균류의 이차대사산물의 일종이다. 화학적으로 플라보노이드는 두 개의 페닐 고리(A와 B)와 헤테로 사이클릭 고리(C)로 구성된 15개의 탄소 골격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탄소 구조는 C6-C3-C6으로 축약 될 수있다. IUPAC 명명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분류 될 수 있다.[1][2] 플라보노이드 또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 3-페닐 크로몬(3-페닐-1,4-벤조 피론) 구조로부터 유도된 이소플라보노이드 4-페닐 쿠마린(4-페닐-1,2-벤조 피론) 구조로부터 유도된 네오플라보노이드 위의 세 가지 플라보노이드는 모두 케톤 함유 화합물이며, 따라서 안토잔틴(플라본 및 플라보놀)이다. 이 화합물들이 최초로 바이오플라보노이드라고 불렸다. 플라보노이드 및 바이오플라보노이드라는 용어는, 정확하게는 플라바노이드(flavanoid)라고 불리는 비-케톤 폴리 하이드록시 폴리페놀 화합물을 가리키는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플라보노이드 백본의 3개의 사이클 또는 헤테로사이클은 일반적으로 고리 A, B, C로 불린다. 고리 A는 일반적으로 플로로글루시놀(phloroglucinol) 치환 패턴을 나타낸다. 목차 1 종류 1.1 안토잔틴 (Anthoxanthin) 1.2 플라바논 (Flavanone) 1.3 플라바노놀 (Flavanonol) 1.4 플라반 (Flavan) 1.5 안토시아니딘 (Anthocyanidin) 1.6 이소플라본 (isoflavone) 2 공급원이 되는 식품 2.1 파슬리 2.2 블루베리 2.3 홍차 2.4 감귤류 2.5 코코아 2.6 땅콩 3 연구 3.1 인 비트로 3.2 항산화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종류[편집] 5000 가지가 넘는 천연 플라보노이드가 다양한 식물로부터 확인되었다. 그 화합물들은 화학 구조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대개 다음 하위 그룹으로 나뉜다.(참고 자료:[3]) 안토잔틴 (Anthoxanthin)[편집] 플라본: 아피제닌의 구조 플라보놀: 쿼세틴의 구조 안토잔틴은 두 개의 군으로 나뉜다. [4]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본 Flavone 2-phenylchromen-4-one ✗ ✗ en:Luteolin, en:Apigenin, en:Tangeritin 플라보놀 Flavonol또는3-hydroxyflavone 3-hydroxy-2-phenylchromen-4-one ✓ ✗ en:Quercetin, en:Kaempferol, en:Myricetin, en:Fisetin, en:Galangin, en:Isorhamnetin, en:Pachypodol, en:Rhamnazin, en:Pyranoflavonols, en:Furanoflavonols, 플라바논 (Flavanone)[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바논입니다.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바논 Flavanone 2,3-dihydro-2-phenylchromen-4-one ✗ ✓ en:Hesperetin, en:Naringenin, en:Eriodictyol, en:Homoeriodictyol 플라바노놀 (Flavanonol)[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바노놀입니다.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바노놀 Flavanonol또는3-Hydroxyflavanone또는2,3-dihydroflavonol 3-hydroxy-2,3-dihydro-2-phenylchromen-4-one ✓ ✓ en:Taxifolin (또는 en:Dihydroquercetin), en:Dihydrokaempferol 플라반 (Flavan)[편집] 플라반의 구조 단위체: (+)-카테킨의 구조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반입니다. 기본골격 이름 en:Flavan-3-ol (flavanol) en:Flavan-4-ol en:Flavan-3,4-diol (leucoanthocyanidin) Flavan-3-ols (플라바놀) Flavan-3-ols은 2-페닐-3,4-디하이드로-2H-크로멘-3-올 골격을 사용한다. 예시: 카테킨 (C), en:Gallocatechin (GC), en:Catechin 3-gallate (Cg), en:Gallocatechin 3-gallate (GCg), 에피카테킨(카테킨 (EC)), en:Epigallocatechin (EGC), en:Epicatechin 3-gallate (ECg),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 (EGCg) en:Theaflavin 예시: en:Theaflavin-3-gallate, en:Theaflavin-3'-gallate, en:Theaflavin-3,3'-digallate en:Thearubigin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은 플라바놀의 중합체 또는 이합체, 삼합체, 올리고머의 형태이다 안토시아니딘 (Anthocyanidin)[편집] 안토시아니딘의 플라비리움 골격 안토사이아닌 안토시아니딘은 안토시아닌의 아글리콘(aglycone)이다. 기본 골격은 플라빌륨(2-페닐크로메닐륨) 이온이다. 예시: en:Cyanidin, en:Delphinidin, en:Malvidin, en:Pelargonidin, en:Peonidin, en:Petunidin 이소플라본 (isoflavone)[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소플라본입니다. 아이소플라본 공급원이 되는 식품[편집] 파슬리는 플라본 공급원이다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니딘의 공급원이 되는 식품이다. 그레이프푸르트를 포함한 귤속 과일에는 다양한 플라보노이드가 있다. 플라보노이드 (특히 카테킨, 플라바놀과 같은 플라노보이드는 "인간의 식이에서 가장 흔한 폴리페놀 화합물이며, 거의 모든 식물에 포함되어 있다.") [5] 쿼세틴과 같은 바이오플라보노이드는 플라보놀이라고도 불리며, 이 역시 많은 식물에 포함되어 있으나 양은 비교적 적다. 다른 활성 식물 화합물(예를 들면 알칼로이드)에 비해 플라보노이드는, 그 다양성 및 상대적으로 낮은 독성, 광범위한 분포는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의 식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보노이드 함량이 높은 식품은 파슬리 [6], 양파[6], 블루베리 및 딸기류, 홍차[6], 녹차 및 우롱차[6], 바나나, 모든 감귤류, 은행, 적포도주, 바다 갈매나무, 다크 초콜릿(코코아 함량 70 % 이상)등이 있다. 플라보노이드의 식이 공급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미국 농무부 플라보노이드 데이터베이스에서 얻을 수 있다. [6] 파슬리[편집] 파슬리, 날 것과 말린 것 모두 플라본을 포함한다.[6] 블루베리[편집]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니딘의 공급원이다.[6][7] 홍차[편집] 홍차는 플라바놀의 풍부한 공급원이다.[6] 감귤류[편집] 감귤류의 플라보노이드에는 헤스페리딘(flavanone hesperetin의 배당체), 쿼시트린, 플라보놀 쿼세틴의 두 가지 배당체인 루틴(rutin) 및 플라본 탠저리틴이 포함된다. 코코아[편집] 플라보노이드는 코코아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쓴 맛이 있기 때문에 초콜렛, 심지어는 다크 초콜릿에서도 종종 제거된다. [8] 밀크 초콜릿에도 플라보노이드가 함유되어 있지만 우유는 흡수를 방해 할 수 있다고 한다. [9][10] 그러나 이 결론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11] 땅콩[편집] 땅콩의 빨간 껍질에는 플라보노이드를 포함한 중요한 폴리 페놀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12] [13] 식품 플라본 플라보놀 플라바논 적 양파 0 4 - 100 0 파슬리, 날 것 24 - 634 8 - 10 0 백리향, 날 것 56 0 0 레몬 주스, 날 것 0 0 - 2 2 - 175 [14] 연구[편집] 개별 플라보노이드의 건강에 대한 잠재적인 긍정적 효과에 대해, 진행중인 연구가 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 식품 안전청(EFSA)은 플라보노이드에 대한 건강 유익 표시를 승인하지 않았고 플라보노이드를 의약품으로 승인하지도 않았다.[15][16][17] 게다가 몇몇 회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강 유익 표시에 대해 FDA로부터 주의를 받았다.[18][19][20][21] 인 비트로[편집] 플라보노이드는 인 비트로 연구에서 광범위한 생물학적 및 약리학적 활성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항알레르기,[22] 항염증,[22][23] 항산화 물질,[23] 항미생물(항균,[24][25] 항진균,[26][27] 항바이러스[26][27]), 암,[23][28] 설사 방지 활성 등이 있다.[29] 플라보노이드는 또한 DNA 회전효소를 억제하고[30][31] 인 비트로 연구에서 mixed-lineage leukemia(MLL) 유전자에서 DNA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2] 그러나 위의 사례의 대부분에서 인 비보 또는 후속 임상시험이 수행되지 않아 이러한 활동이 인체 건강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다. 더 깊이 조사 된 생물학적 및 약리학 적 활동은 아래에서 설명한다. 항산화[편집]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Linus Pauling Institute)와 유럽 식품 안전청(EFSA)의 연구에 따르면 플라보노이드는 인체에 흡수되기 어렵고(5% 미만), 흡수되는 물질의 대부분은 신속하게 대사되고 배설된다.[17][33][34] 이러한 결과는 플라보노이드가 가진 항산화 활성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며,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한 식품을 섭취한 후에 나타나는 혈액의 항산화 능력이 플라보노이드에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플라보노이드의 분해와 배설 활동으로 인한 요산의 생산 때문이다.[35] 같이 보기[편집] 피토케미컬 식물화학 이차대사산물 참고 자료[편집] ↑ McNaught, Alan D; Wilkinson, Andrew; IUPAC (1997), 〈IUPAC Compendium of Chemical Terminology〉, 《IUPAC Compendium of Chemical Terminology》 2판, Oxford: Blackwell Scientific, ISBN 0-9678550-9-8, doi:10.1351/goldbook.F02424 ↑ “The Gold Book”. 2009. ISBN 0-9678550-9-8. doi:10.1351/goldbook. 2012년 9월 16일에 확인함. |장=이 무시됨 (도움말) ↑ Ververidis F, Trantas E, Douglas C, Vollmer G, Kretzschmar G, Panopoulos N (October 2007). “Biotechnology of flavonoids and other phenylpropanoid-derived natural products. Part I: Chemical diversity, impacts on plant biology and human health”. 《Biotechnology Journal》 2 (10): 1214–34. PMID 17935117. doi:10.1002/biot.200700084. ↑ Isolation of a UDP-glucose: Flavonoid 5-O-glucosyltransferase gene and expression analysis of anthocyanin biosynthetic genes in herbaceous peony (Paeonia lactiflora Pall.). Da Qiu Zhao, Chen Xia Han, Jin Tao Ge and Jun Tao, Electronic Journal of Biotechnology, 15 November 2012, Volume 15, Number 6, doi 10.2225/vol15-issue6-fulltext-7 ↑ Spencer JP (2008). “Flavonoids: modulators of brain function?”. 《British Journal of Nutrition》 99: ES6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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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ekAlert!, Adapted from a news release issued by Oregon State University. vdeh식물성 색소의 종류베탈레인 베타시아닌 베타잔틴 엽록소 엽록소 a 엽록소 b 엽록소 c 엽록소 d 엽록소 f 커큐미노이드 비스데메톡시커큐민 데스메톡시커큐민 커큐민 플라보노이드 안토시아닌 안토시아니딘 안토크산틴 플라반 축합형 타닌 카로티노이드 카로틴 레티노이드 잔토필 기타 알로피코시아닌 피코시아닌 피코에리트린 피코에리트로시아닌 퀴논 잔토노이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플라보노이드&oldid=23977255" 분류: 영양영양학피토케미컬플라보노이드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장이 무시됨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umbaart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Тыва дыл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6일 (토) 15: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적 양파에 함유된 플라본은 몇일까요? |
플라보노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플라보노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플라보노이드 기본골격 플라본 백본 (2-phenyl-1,4- benzopyrone)의 분자 구조 이소플라본 구조 네오플라보노이드 구조 플라보노이드(또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노랗다는 뜻의 라틴어 flavus에서 유래함)는 식물이나 균류의 이차대사산물의 일종이다. 화학적으로 플라보노이드는 두 개의 페닐 고리(A와 B)와 헤테로 사이클릭 고리(C)로 구성된 15개의 탄소 골격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탄소 구조는 C6-C3-C6으로 축약 될 수있다. IUPAC 명명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분류 될 수 있다.[1][2] 플라보노이드 또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 3-페닐 크로몬(3-페닐-1,4-벤조 피론) 구조로부터 유도된 이소플라보노이드 4-페닐 쿠마린(4-페닐-1,2-벤조 피론) 구조로부터 유도된 네오플라보노이드 위의 세 가지 플라보노이드는 모두 케톤 함유 화합물이며, 따라서 안토잔틴(플라본 및 플라보놀)이다. 이 화합물들이 최초로 바이오플라보노이드라고 불렸다. 플라보노이드 및 바이오플라보노이드라는 용어는, 정확하게는 플라바노이드(flavanoid)라고 불리는 비-케톤 폴리 하이드록시 폴리페놀 화합물을 가리키는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플라보노이드 백본의 3개의 사이클 또는 헤테로사이클은 일반적으로 고리 A, B, C로 불린다. 고리 A는 일반적으로 플로로글루시놀(phloroglucinol) 치환 패턴을 나타낸다. 목차 1 종류 1.1 안토잔틴 (Anthoxanthin) 1.2 플라바논 (Flavanone) 1.3 플라바노놀 (Flavanonol) 1.4 플라반 (Flavan) 1.5 안토시아니딘 (Anthocyanidin) 1.6 이소플라본 (isoflavone) 2 공급원이 되는 식품 2.1 파슬리 2.2 블루베리 2.3 홍차 2.4 감귤류 2.5 코코아 2.6 땅콩 3 연구 3.1 인 비트로 3.2 항산화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종류[편집] 5000 가지가 넘는 천연 플라보노이드가 다양한 식물로부터 확인되었다. 그 화합물들은 화학 구조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대개 다음 하위 그룹으로 나뉜다.(참고 자료:[3]) 안토잔틴 (Anthoxanthin)[편집] 플라본: 아피제닌의 구조 플라보놀: 쿼세틴의 구조 안토잔틴은 두 개의 군으로 나뉜다. [4]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본 Flavone 2-phenylchromen-4-one ✗ ✗ en:Luteolin, en:Apigenin, en:Tangeritin 플라보놀 Flavonol또는3-hydroxyflavone 3-hydroxy-2-phenylchromen-4-one ✓ ✗ en:Quercetin, en:Kaempferol, en:Myricetin, en:Fisetin, en:Galangin, en:Isorhamnetin, en:Pachypodol, en:Rhamnazin, en:Pyranoflavonols, en:Furanoflavonols, 플라바논 (Flavanone)[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바논입니다.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바논 Flavanone 2,3-dihydro-2-phenylchromen-4-one ✗ ✓ en:Hesperetin, en:Naringenin, en:Eriodictyol, en:Homoeriodictyol 플라바노놀 (Flavanonol)[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바노놀입니다.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바노놀 Flavanonol또는3-Hydroxyflavanone또는2,3-dihydroflavonol 3-hydroxy-2,3-dihydro-2-phenylchromen-4-one ✓ ✓ en:Taxifolin (또는 en:Dihydroquercetin), en:Dihydrokaempferol 플라반 (Flavan)[편집] 플라반의 구조 단위체: (+)-카테킨의 구조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반입니다. 기본골격 이름 en:Flavan-3-ol (flavanol) en:Flavan-4-ol en:Flavan-3,4-diol (leucoanthocyanidin) Flavan-3-ols (플라바놀) Flavan-3-ols은 2-페닐-3,4-디하이드로-2H-크로멘-3-올 골격을 사용한다. 예시: 카테킨 (C), en:Gallocatechin (GC), en:Catechin 3-gallate (Cg), en:Gallocatechin 3-gallate (GCg), 에피카테킨(카테킨 (EC)), en:Epigallocatechin (EGC), en:Epicatechin 3-gallate (ECg),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 (EGCg) en:Theaflavin 예시: en:Theaflavin-3-gallate, en:Theaflavin-3'-gallate, en:Theaflavin-3,3'-digallate en:Thearubigin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은 플라바놀의 중합체 또는 이합체, 삼합체, 올리고머의 형태이다 안토시아니딘 (Anthocyanidin)[편집] 안토시아니딘의 플라비리움 골격 안토사이아닌 안토시아니딘은 안토시아닌의 아글리콘(aglycone)이다. 기본 골격은 플라빌륨(2-페닐크로메닐륨) 이온이다. 예시: en:Cyanidin, en:Delphinidin, en:Malvidin, en:Pelargonidin, en:Peonidin, en:Petunidin 이소플라본 (isoflavone)[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소플라본입니다. 아이소플라본 공급원이 되는 식품[편집] 파슬리는 플라본 공급원이다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니딘의 공급원이 되는 식품이다. 그레이프푸르트를 포함한 귤속 과일에는 다양한 플라보노이드가 있다. 플라보노이드 (특히 카테킨, 플라바놀과 같은 플라노보이드는 "인간의 식이에서 가장 흔한 폴리페놀 화합물이며, 거의 모든 식물에 포함되어 있다.") [5] 쿼세틴과 같은 바이오플라보노이드는 플라보놀이라고도 불리며, 이 역시 많은 식물에 포함되어 있으나 양은 비교적 적다. 다른 활성 식물 화합물(예를 들면 알칼로이드)에 비해 플라보노이드는, 그 다양성 및 상대적으로 낮은 독성, 광범위한 분포는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의 식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보노이드 함량이 높은 식품은 파슬리 [6], 양파[6], 블루베리 및 딸기류, 홍차[6], 녹차 및 우롱차[6], 바나나, 모든 감귤류, 은행, 적포도주, 바다 갈매나무, 다크 초콜릿(코코아 함량 70 % 이상)등이 있다. 플라보노이드의 식이 공급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미국 농무부 플라보노이드 데이터베이스에서 얻을 수 있다. [6] 파슬리[편집] 파슬리, 날 것과 말린 것 모두 플라본을 포함한다.[6] 블루베리[편집]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니딘의 공급원이다.[6][7] 홍차[편집] 홍차는 플라바놀의 풍부한 공급원이다.[6] 감귤류[편집] 감귤류의 플라보노이드에는 헤스페리딘(flavanone hesperetin의 배당체), 쿼시트린, 플라보놀 쿼세틴의 두 가지 배당체인 루틴(rutin) 및 플라본 탠저리틴이 포함된다. 코코아[편집] 플라보노이드는 코코아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쓴 맛이 있기 때문에 초콜렛, 심지어는 다크 초콜릿에서도 종종 제거된다. [8] 밀크 초콜릿에도 플라보노이드가 함유되어 있지만 우유는 흡수를 방해 할 수 있다고 한다. [9][10] 그러나 이 결론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11] 땅콩[편집] 땅콩의 빨간 껍질에는 플라보노이드를 포함한 중요한 폴리 페놀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12] [13] 식품 플라본 플라보놀 플라바논 적 양파 0 4 - 100 0 파슬리, 날 것 24 - 634 8 - 10 0 백리향, 날 것 56 0 0 레몬 주스, 날 것 0 0 - 2 2 - 175 [14] 연구[편집] 개별 플라보노이드의 건강에 대한 잠재적인 긍정적 효과에 대해, 진행중인 연구가 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 식품 안전청(EFSA)은 플라보노이드에 대한 건강 유익 표시를 승인하지 않았고 플라보노이드를 의약품으로 승인하지도 않았다.[15][16][17] 게다가 몇몇 회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강 유익 표시에 대해 FDA로부터 주의를 받았다.[18][19][20][21] 인 비트로[편집] 플라보노이드는 인 비트로 연구에서 광범위한 생물학적 및 약리학적 활성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항알레르기,[22] 항염증,[22][23] 항산화 물질,[23] 항미생물(항균,[24][25] 항진균,[26][27] 항바이러스[26][27]), 암,[23][28] 설사 방지 활성 등이 있다.[29] 플라보노이드는 또한 DNA 회전효소를 억제하고[30][31] 인 비트로 연구에서 mixed-lineage leukemia(MLL) 유전자에서 DNA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2] 그러나 위의 사례의 대부분에서 인 비보 또는 후속 임상시험이 수행되지 않아 이러한 활동이 인체 건강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다. 더 깊이 조사 된 생물학적 및 약리학 적 활동은 아래에서 설명한다. 항산화[편집]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Linus Pauling Institute)와 유럽 식품 안전청(EFSA)의 연구에 따르면 플라보노이드는 인체에 흡수되기 어렵고(5% 미만), 흡수되는 물질의 대부분은 신속하게 대사되고 배설된다.[17][33][34] 이러한 결과는 플라보노이드가 가진 항산화 활성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며,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한 식품을 섭취한 후에 나타나는 혈액의 항산화 능력이 플라보노이드에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플라보노이드의 분해와 배설 활동으로 인한 요산의 생산 때문이다.[35] 같이 보기[편집] 피토케미컬 식물화학 이차대사산물 참고 자료[편집] ↑ McNaught, Alan D; Wilkinson, Andrew; IUPAC (1997), 〈IUPAC Compendium of Chemical Terminology〉, 《IUPAC Compendium of Chemical Terminology》 2판, Oxford: Blackwell Scientific, ISBN 0-9678550-9-8, doi:10.1351/goldbook.F02424 ↑ “The Gold Book”.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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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청주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옥산면 (청주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玉山面 Oksan-myeon 면적 65.49 km2 인구 12,329명 (2017년 6월 30일) 인구밀도 188 명/km2 세대 5,282가구 (2017년 6월 30일) 법정리 15 행정리 43 반 154 면사무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옥산시내1길 43 홈페이지 옥산면사무소 옥산면(玉山面)은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설치된 면이다. 목차 1 개요 2 연혁 3 행정 구역 4 외부 링크 개요[편집] 옥산면은 청주시 흥덕구 북쪽에 위치하여 동남쪽은 금강 상류인 미호천이 가로지르고, 북서남쪽으로 천수천이 관통하고 있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오창과학단지가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오송생명과학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미호천변의 비교적 평야지역으로 미질이 뛰어난 벼농사를 비롯하여 방울토마토, 수박, 애호박, 오이 등 시설원예와 낙농이 일찍이 발달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풍요로운 농업면이며, 경부고속도로 및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청주역이 인접한 교통요충지로 앞으로 발전이 크게 기대되는 지역이다. 연혁[편집] 조선시대 청주군 서강외이하면(西江外二下面)(25개 리), 서강외이상면(西江外二上面)(18개 리), 북강외이면(北江外二面) 일부(백현리, 화산리 각 일부)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청주군 서강외이상면 옥산면 금계리, 동림리, 사정리, 수락리, 장남리, 장동리, 호죽리 청주군 서강외이하면 옥산면 가락리, 국사리, 남촌리, 덕촌리, 소로리, 신촌리, 오산리, 환희리 1914년 4월 1일 청주군 옥산면 1946년 6월 1일 청원군 옥산면 2014년 7월 1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15법정리) 행정 구역[편집] 법정리 행정리 비고 환희리 환희1리, 환희2리 장남리 장남리 호죽리 호죽1리, 호죽2리 장동리 장동리 오산리 오산1리~오산13리 면소재지 수락리 수락리 신촌리 신촌리 가락리 가락1리~가락10리 국사리 국사1리, 국사2리 금계리 금계리 남촌리 남촌리 덕촌리 덕촌1리, 덕촌2리, 덕촌3리 동림리 동림리 사정리 사정1리, 사정2리 소로리 소로1리, 소로2리 15리 43행정리 외부 링크[편집]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사무소 vdeh충청북도 청주시의 행정 구역 시청소재지: 상당구 중앙동 상당구 구청소재지: 남일면가덕면 남일면 낭성면 문의면 미원면 금천동 성안동 영운동 용담.명암.산성동 용암1동 용암2동 중앙동 탑대성동 서원구 구청소재지: 사직1동 남이면 현도면 모충동 분평동 사직1동 사직2동 사창동 산남동 성화.개신.죽림동 수곡1동 수곡2동 청원구 구청소재지: 우암동내수읍 오창읍 북이면 내덕1동 내덕2동 오근장동 우암동 율량·사천동 흥덕구 구청소재지: 복대1동오송읍 강내면 옥산면 가경동 강서1동 강서2동 복대1동 복대2동 봉명1동 봉명2.송정동 운천.신봉동 이 글은 충청북도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옥산면_(청주시)&oldid=19488457" 분류: 청주시의 행정 구역충청북도의 읍·면흥덕구숨은 분류: 충청북도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ebuanoSvensk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9월 2일 (토) 00: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옥산면에 있는 법정리는 어떤 게 있을까? |
옥산면 (청주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옥산면 (청주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玉山面 Oksan-myeon 면적 65.49 km2 인구 12,329명 (2017년 6월 30일) 인구밀도 188 명/km2 세대 5,282가구 (2017년 6월 30일) 법정리 15 행정리 43 반 154 면사무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옥산시내1길 43 홈페이지 옥산면사무소 옥산면(玉山面)은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설치된 면이다. 목차 1 개요 2 연혁 3 행정 구역 4 외부 링크 개요[편집] 옥산면은 청주시 흥덕구 북쪽에 위치하여 동남쪽은 금강 상류인 미호천이 가로지르고, 북서남쪽으로 천수천이 관통하고 있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오창과학단지가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오송생명과학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미호천변의 비교적 평야지역으로 미질이 뛰어난 벼농사를 비롯하여 방울토마토, 수박, 애호박, 오이 등 시설원예와 낙농이 일찍이 발달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풍요로운 농업면이며, 경부고속도로 및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청주역이 인접한 교통요충지로 앞으로 발전이 크게 기대되는 지역이다. 연혁[편집] 조선시대 청주군 서강외이하면(西江外二下面)(25개 리), 서강외이상면(西江外二上面)(18개 리), 북강외이면(北江外二面) 일부(백현리, 화산리 각 일부)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청주군 서강외이상면 옥산면 금계리, 동림리, 사정리, 수락리, 장남리, 장동리, 호죽리 청주군 서강외이하면 옥산면 가락리, 국사리, 남촌리, 덕촌리, 소로리, 신촌리, 오산리, 환희리 1914년 4월 1일 청주군 옥산면 1946년 6월 1일 청원군 옥산면 2014년 7월 1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15법정리) 행정 구역[편집] 법정리 행정리 비고 환희리 환희1리, 환희2리 장남리 장남리 호죽리 호죽1리, 호죽2리 장동리 장동리 오산리 오산1리~오산13리 면소재지 수락리 수락리 신촌리 신촌리 가락리 가락1리~가락10리 국사리 국사1리, 국사2리 금계리 금계리 남촌리 남촌리 덕촌리 덕촌1리, 덕촌2리, 덕촌3리 동림리 동림리 사정리 사정1리, 사정2리 소로리 소로1리, 소로2리 15리 43행정리 외부 링크[편집]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사무소 vdeh충청북도 청주시의 행정 구역 시청소재지: 상당구 중앙동 상당구 구청소재지: 남일면가덕면 남일면 낭성면 문의면 미원면 금천동 성안동 영운동 용담.명암.산성동 용암1동 용암2동 중앙동 탑대성동 서원구 구청소재지: 사직1동 남이면 현도면 모충동 분평동 사직1동 사직2동 사창동 산남동 성화.개신.죽림동 수곡1동 수곡2동 청원구 구청소재지: 우암동내수읍 오창읍 북이면 내덕1동 내덕2동 오근장동 우암동 율량·사천동 흥덕구 구청소재지: 복대1동오송읍 강내면 옥산면 가경동 강서1동 강서2동 복대1동 복대2동 봉명1동 봉명2.송정동 운천.신봉동 이 글은 충청북도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옥산면_(청주시)&oldid=19488457" 분류: 청주시의 행정 구역충청북도의 읍·면흥덕구숨은 분류: 충청북도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ebuanoSvensk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9월 2일 (토) 00: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청주군 서강외이상면은 어떤 신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을까? |
ExCF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CF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4년 4월) ExCF는 Dr. Gothick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누리꾼이 3CF의 계보를 이어 만든 대한민국의 만화 커뮤니티로, 회원은 약 2500명이다. 일반적으로는 회원 가입을 받지 않으나, 운영자가 원하는 경우 잠시 동안 회원가입을 받아줄 때도 있다. 제목의 Ex는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사용된 것이다. 3CF가 2003년을 기점으로 폐쇄되자, 2009년 기준으로 3CF에서 활동하던 Dr. Gothick이 사이트를 이어받아 ExCF를 현재 운영 중이다. 보노를 제외한 대부분의 3류만화 작가들이 이 사이트에 다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사이트는 비주기적으로 회원 가입을 받고 있으며, "공식 만화가"들이 작품을 올리는 "만화1", "만화2", "잡동사니" 게시판은 회원 가입 없이도 볼 수 있으나, "회원"들이 활동하는 공간인 "자유 게시판", "만화 게시판", "창작 게시판" 등은 회원 가입을 해야 내용을 볼 수 있어 운영이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로 알려진 "회원"들의 만화는 다른 회원들이 다른 장소에 올린 것이거나, 한 회원이 여러 곳에 올린 것이다. 또한 너무 많은 글들로 인한 트래픽 초과를 방지하기 위해 운영자인 Dr.Gothick은 1인당 하루에 자유게시판에 올릴 수 있는 글을 15개로 제한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할 경우 강제탈퇴를 시킨다. ExCF회원들 사이에서는 이를 고딕칼리버(고딕+엑스칼리버)라 부른다. 작성글 수가 1일 안에 15개가 넘어갈 경우 글 삭제 후 다시 작성하기(일명 밑장빼기라 부르며 이 경우 악질로 분류되어 재가입도 불가능하다.) 분란을 조장하는 정도가 심할 경우 목차 1 주요 회원 1.1 운영진 1.2 활동중인 공식 만화가 1.3 이말년 사건 2 주호민 작가와 활동 3 외부 링크 주요 회원[편집] 운영진[편집] Dr. Gothick 솔스 활동중인 공식 만화가[편집] Dr. Gothick Mr. 판당고 주호민 천극J군 니나노머신 개호주 홍차 비스트애니메 도자기월드 닥터지바고 피스이즈 이말년 사건[편집] 만화가 이말년이 ExCF에 가입신청을 하다가 9번 연속 거절당했다. 이렇게 되자 Dr.Gothick은 이말년의 아이디를 그대로 복사해서 가상의 아이디를 만들어놓고는 이말년에게 회원가입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주호민 작가와 활동[편집] ExCF 공식 만화가인 주호민 작가는 현재 제일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ExCF의 공식 만화가이다. 검지넷 스포츠투데이 에서 연재되던 만화 "짬" 은"상상공방"에서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현재 주호민 작가는 배트맨에 "스포쓰늬우스" 등을 연재하고 있으며, "짬"의 후속편인 "짬 시즌2-예비역들의 수다"와, 청년실업 등을 주제로 한 만화 "무한동력"은 최근 완결되어, 역시 "상상공방" 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현재 주호민은 네이버 웹툰에 불교의 세계관에서 바라본 사후세계, 한국 신화 내용을 다룬 "신과 함께"라는 만화를 3부작으로 "지옥편" "이승편" "신화편"으로 나뉘어 연재를 완결 시켰다. 외부 링크[편집] ExCF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xCF&oldid=23597263" 분류: 대한민국의 웹사이트인터넷 문화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4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1일 (목) 04: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주씨인 만화가는? |
교황 보니파시오 8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보니파시오 8세 임기 1294년 12월 24일 전임자 첼레스티노 5세후임자 베네딕토 11세개인정보출생이름 베네데토 가에타니출생 1235년 교황령 아나니선종 1303년 10월 11일 교황령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8세(라틴어: Bonifaciu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Bonifacio VIII, 1235년 ~ 1303년 10월 11일)는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이다. 본명은 베네데토 가에타니(이탈리아어: Benedetto Caetani)이다. 목차 1 이력 2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과 보니파시오 8세의 선출 3 교회법 4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 5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6 희년 7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8 필리프 4세와의 갈등 9 피랍과 죽음 10 각주 이력[편집] 베네데토는 1235년경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아나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교황령의 남작 집안인 가에타니 가문의 로프레도 가에타니이며, 모친은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조카딸인 에밀리아 파트라소 디 과르치노이다. 베네데토는 외삼촌 프라 레오나르도 파트라소의 후원을 받은 벨레트리의 작은형제회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1] 1252년 후원자이자 삼촌인 피에트로 가에타니가 움브리아 주에 있는 토디의 주교가 되자 베네데토는 그를 따라 토디로 가서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허락을 받고 자기 가족이 있는 아나니 대성당의 의전참사회원이 되었다. 1260년 삼촌 피에트로 가에타니는 그를 토디 대성당의 의전참사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베네데토는 또한 21개의 난로가 있는 시스마노 성이라는 작은 성을 소유하였다. 1264년 베네데토는 교회 법률가로 로마 교황청에 등용되었다. 그는 훗날 교황 마르티노 4세가 되는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의 비서로 프랑스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시몽 추기경은 1264년 4월 25일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청 대표 자격으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를 둘러싸고 앙주의 샤를과 협상하였다. 1264년 5월 1일 시몽 추기경은 자신의 임무를 위해 베네데토를 자신의 비서로 데려갔다. 1265년 2월 26일, 새로 즉위한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즉위 8일 만에 시몽 추기경에게 협상을 중단하고 즉시 프로방스로 가서 추가적인 지시를 받으라고 말했다. 같은 날, 클레멘스 4세는 샤를에게 그가 시칠리아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동의해야 하는 35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하는 한편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그의 아들 에드먼드에게도 친서를 보내 그들이 시칠리아 왕국을 소유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2] 더불어 그는 샤를을 위해 기금을 조성한 시에나 추기경에게 7천 파운드를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1265년 3월 20일 앙주의 샤를과의 협상을 더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시몽 추기경은 주교좌 성당과 그 밖의 자기 관구에서 성직자 다섯 명에게 성직록을 지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3] 이 때 베네데토 가에타니도 최소한 얼마 간 프랑스 성직록을 받았을 것이다. 1265년 4월 9일 교황 사절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가 선종했다고 해서 생전에 그가 부여한 특전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4] 만약 시몽 추기경이 교황 사절을 그만두었다면 그러한 선언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베네데토는 또한 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5세가 되는 오토보네 프레스키 추기경과 함께 잉글랜드로 동행하기도 했다. 오토보네 추기경과 동반한 또 다른 사람은 리에주 수석부제인 피아첸차의 테오발도로, 그는 에드워드 왕자의 벗으로 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가기도 했으며, 종국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 선출되었다.[5] 1265년 5월 4일 오토보네 추기경은 새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었다. 1265년 8월 29일 추기경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시몽 드 몽포르와 그의 아들 앙리가 그 달 초 있었던 이브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토보네 추기경은 1265년 10월까지 볼로뉴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는 헨리 3세에 국왕에 대항한 시몽 드 몽포르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일을 돕기 위해 1268년 7월까지 잉글랜드에 머물렀다. 한편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노샘프턴셔 주 토우스터에 있는 세인트 로렌스 성당의 주임 사제를 지냈다.[6][7] 베네데토가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후 8년 동안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시기는 1268년 11월 29일부터 1272년 2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교황직을 수락할 때까지 긴 사도좌 공석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그의 추기경들이 1273년 프랑스로 가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1270년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킨 시기이기도 했다. 교황과 일부 추기경들은 1275년 11월 말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10세는 아레초에서 성탄절을 지낸 후 1276년 1월 10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1276년 베네데토는 로마 교황청의 법률가로서 십일조 징수를 감독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1270년경 말에는 교황의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에 베네데토는 17개의 성직록을 축적하여 교황이 될 때까지 계속 유지하였다. 1281년 4월 12일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오르비에토에서 베네데토 가에타니를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하였다.[8] 1288년 그는 구엘프와 기벨린으로 나뉜 페루자와 폴리뇨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움브리아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9] 1289년 겨울, 그는 포르투갈의 주교 서임권 분쟁 때 교황 니콜라오 4세의 고문 중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291년 9월 22일[10]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를 산 마르티노 인 산 실베스트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시켰다.[11] 베네데토는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와 나폴리, 시칠리아, 아라곤 등과의 외교적 교섭에 나섰다.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과 보니파시오 8세의 선출[편집] 보니파시오 8세의 인장 1294년 12월 13일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나폴리에서 교황직에서 물러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1294년 당시 나폴리에 있었던 루카의 바르톨로메오는 베네데토 가에타니가 첼레스티노 5세에게 사임을 종용한 몇몇 추기경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12] 하지만 기록에도 있듯이 첼레스티노 5세는 전문가들과 상의 후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사임한 것으로, 베네데토는 어디까지나 단지 교황의 사임이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어쨌든,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좌에서 내려오면서 베네데토 가에타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보니파시오 8세가 되었다. 1294년 콘클라베는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하고 10일이 지난 12월 23일에 열렸다.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제정한 규정들에는 교황의 사임에 관한 것이 없었지만, 추기경들은 교황의 선종과 마찬가지로 교황이 사임하고 10일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당시 추기경 22명 전원이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한 장소이기도 한 나폴리의 카스텔누오보에 모일 수 있었다.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129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차 투표에서 그는 이미 교황으로 선출되기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과반수 표를 얻었다.[13] 그는 1295년 1월 23일 로마의 주교로 성성되었다.[14] 그는 즉시 교황청과 함께 로마로 돌아가 1295년 1월 23일 주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교황으로서 그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전임자 첼레스티노 5세를 페렌티노의 푸모네 성에 기거하도록 한 것이다. 첼레스티노 5세는 그곳에서 자기 수도회 수사 두 사람과 함께 81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지냈다. 또한 보니파시오 8세는 1303년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를 설립했다.[15] 교회법[편집] 교회법 분야에 있어서 보니파시오 8세는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교황의 권위로 《그레고리오 9세 칙령집》(Decretales Gregorii IX)을 반포했으나 이후 60년 동안 후임 교황들에 의해서도 수차례 칙령들이 반포되었다. 그래서 보니파시오 8세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칙령집이 필요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교회 법령집》(Regulæ Iuris)이라는 주요 법령들의 모음집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반포한 88여 개의 칙령을 포함한 역대 교황들의 칙령을 엮어 여섯 권의 책으로 출판하라고 지시했다.[16] 그리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교회 법령집 제6서》(Liber Sextus)이다.[17] 이 자료는 오늘날 교회법률가들 또는 교회법 학자들이 교회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법령집은 제6서의 말미에 나오는데,[18] 현재는 《옛 교회 법전》(Corpus Juris Canonici) 제5권 말미에 소개되고 있다.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편집] 1297년 자코포 콜론나 추기경이 오토네, 마테오, 란돌포 등 자기 형제들의 영지 상속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세 형제는 보니파시오 8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코포에서 자신들의 영지를 돌려주라고 명령해줄 것을 호소하며,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인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를 비롯하여 일부 마을을 교황에게 바쳤다. 자코포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코포와 그의 조카 피에트로 콜론나는 오히려 교황의 정지적 적들인 아라곤의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 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해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자코포 콜론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추기경단에게 쫓아내고 파문하였다. 이에 (교황과 손잡은 세 형제를 제외한) 콜론나 가문은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은 전례 없는 일이며, 그를 뒤이은 보니파시오 8세는 불법적으로 선출된 것이기에 그를 교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쟁은 결국 전투로 이어져, 그 해 9월 보니파시오 8세는 란돌포 콜론나를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가문인 콜론나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1298년 말에 들어서 란돌포는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그리고 그 밖의 마을을 점령했는데, 이 때 그는 순순히 항복하면 해치지 않는다는 보니파시오 8세의 확약을 믿고 평화롭게 항복한 그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단테는 몬테펠트로의 귀도가 조언한 대로 이를 약속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면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라고 비판했지만, 기벨린(황제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신용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되어 있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주교좌 성당을 제외한 나머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시타파팔레라는 새로운 도시가 팔레스트리나를 대체했다.[19] 시칠리아와 이탈리아[편집] 아라곤의 차이메 2세가 동생 프레데리코에게 시칠리아 왕위(트리나크리아 왕국, Regnu di Trinacria)를 물려주어 프레데리코는 시칠리아의 피디리쿠 2세로 즉위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그가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피디리쿠 2세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에 그를 파문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피디리쿠 2세와 시칠리아 백성 누구도 이에 동요하지 않았다.[20] 성무금지는 1302년 피디리쿠 2세와 카를로 2세를 각각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통치한다는 칼타벨로타 평화협정(Pace di Caltabellotta, Paci di Cataviddotta)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보니파시오 8세는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제노바에게 휴전할 것을 종용했으나 그들은 교황의 제안을 거절하고 3년 간 싸웠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구엘프 내 흑색당과 백색당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피렌체에도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1300년 야심 가득한 샤를 드 발루아 백작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였다. 샤를의 개입으로 흑색당에 의해 백색당 지도부가 전복되어 영구추방되었다. 희년[편집] 보니파시오 8세는 1300년 2월 22일에 교서 《Antiquorum habet》를 반포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희년에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사도 바오로의 성전을 순례하게 했다. 그의 희년 선포는 교회 안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로마인들 외에도 2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희년 행사에 참석했으며[21] 순례객 가운데는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도 끼어 있었다고들 말한다. 사실 단테 자신이 이 때의 희년에 참여한 것으로 묘사하지만[22] 확실치가 않다. 그 당시, 시내에서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가는 유일한 다리는 테베레 강을 가로지르는 산탄젤로 다리였다. 로마인들은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수많은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이 다리의 반을 갈라 각기 일방통행으로 만들었다.[23]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편집]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에게 폐위시켰는데, 존 발리올은 교황의 보호 아래 교황궁에 머무른다는 조건 아래 구속에서 물려났다.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 초반에 밀리던 스코틀랜드인들은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의 대영주 자격으로 나서서 보호해줄 것을 호소했다.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교황 칙서 《나는 안다, 아들아》(Scimus, Fili)를 통해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점령한 것을 비판했다. 교황은 이 칙서를 통해 에드워드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격을 즉시 중단하고 협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를 무시했다. 1301년 잉글랜드 남작들은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대영주로서의 권리를 부인하고 잉글랜드에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필리프 4세와의 갈등[편집]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을 중앙집권화 하려는 군주들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충돌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강화되어가는 왕권과 교회의 갈등은 특히나 1285년 필리프 4세의 권력 강화로 악화되었다. 프랑스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국민 국가로의 발전은 카페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필리프 4세는 최고의 시민 법률가들을 거느리고 법집행에 있어 성직자들의 참여를 전면 금지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에게도 과세하자 보니파시오 8세는 이에 맞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를 세금 문제에 대한 성직자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본 그는 1296년 2월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는 교황 칙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공표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발표로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 사실 교회 운영은 프랑스의 수입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교황을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놓으셨다”면서 강력히 항의하였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교회의 재산이 나라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고자 하였다.[24]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과 더불어 중동에 파병할 새 십자군 원정을 위한 기금을 모으던 교황 대리인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 9월 교황 칙서 《형언할 수 없는 사랑》(Ineffabilis amor)을 공표하여[25] 기본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성직자가 자원하여 세금을 낼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필요하면’이라는 표현은 왕이 언제든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 명령을 철회하고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사이의 분쟁을 조정할 중재자로 받아들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필리프 4세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불화는 다시 재개되어 필리프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반교황 움직임에 착수한 14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하였다. 분쟁은 필리프 4세의 측근과 교황 특사 베르나르 세세 간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1301년 필리프 4세는 베르나르 세세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한 후 감옥에 가둔 한편 나르본의 대주교 질 에슐랑을 구류하였다. 이에 격분한 보니파시오 8세는 1301년 12월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Ausculta Fili)를 공표하여 지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영적 군주인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말에 공손히 귀를 기울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필리프 4세 주최로 열린 궁정 재판에서 성직자가 판결받는 것은 위법적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교회 재산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프랑스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로마로 소집해 주교회의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26] 필리프 4세는 교황 칙서를 접한 후 교황 사절의 손에서 칙서를 잡아챈 다음 불 속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27] 1302년 2월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가 필리프 4세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2년 3월 4일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교황의 통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장 르무엔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보냈다.[28]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계획한 주교회의를 사전에 방해하기 위해 4월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삼부회에서 귀족, 성직자, 평민 세 신분 모두 로마에 왕과 왕의 세속적 권력을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편 45명의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필리프 4세의 금지령과 사유 재산 몰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1302년 10월 로마에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29] 주교회의가 끝난 후, 1302년 11월 18일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 칙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를 공표했다.[30] 《거룩한 하나의 교회》는 중세기의 세속적인 권한과 종교적인 권한을 상세히 나타낸 가장 유명한 칙서로서 교회의 일치와 속권에 의해 위협받는 일치, 군주에 대한 충성과 교황에 대한 순명 사이에서 지역 교회 주교들이 교계제도 안에서 취할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거룩한 하나의 교회》는 이전 교황들의 발표보다 세속의 군주들을 세우고 심판하는 교황의 권한을 보다 명백하게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내용은 ‘사람은 두 가지 면으로 살아간다. 하나는 영적인 면이고 다른 하는 세속적인 면이다. 세속적인 권력이 정도를 벗어나면 영적인 권력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요지로 되어 있으며, 교황의 재치권에는 영적인 권력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도 있으며, 왕들은 이 교황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다른 한편 교황은 장 르무엔 추기경을 필리프 4세에게 보내는 교황 특사로 임명하고 특별히 그에게 필리프 4세를 파문 상태에서 해제할 권한까지 부여하면서, 양자 간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31] 피랍과 죽음[편집] 아나니 사건을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회화. 1303년 4월 4일 성목요일, 교황은 프랑스 성직자들이 로마에 오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하였다.[32] 파문 대상에는 필리프 4세까지 포함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필리프 4세의 재상 기욤 드 노가레는 보니파시오 8세의 신상을 공격하면서 그를 이단자로 비난하고 공의회를 열어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03년 8월 15일 교황은 프랑스 왕국 신민들에 대한 필리프 4세의 통치권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필리프 4세가 로마의 교회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의 행동을 소상히 설명하기 전까지는 공석 중인 프랑스의 모든 교구장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을 모두 보류하기로 하였다.[33] 이리하여 프랑스는 무력으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였다. 1303년 9월 7일 기욤 드 노가레가 이끈 프랑스군과 시아라 콜론나가 당시 아나니의 교황궁에 있던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하였다.[34] 교황은 1303년 9월 8일 교황 칙서를 공표해 필리프 4세와 기욤 드 노가레를 파문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35] 기욤 드 노가레와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시오 8세를 만나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교황직을 사임할 것을 협박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굴복하지 않고 사임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대꾸하였다. 이에 시아라 콜론나가 보니파시오 8세의 뺨을 세게 철썩 때렸는데, 당시 73세였던 교황은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아나니 사건(Schiaffo di Anagni)이라고 부른다. 보니파시오 8세는 3일이 지나서야 풀려났으나 그로부터 한달 후에 선종하였다.[36] 단테는 이 사건을 《신곡》의 연옥 편에서 기록해 놓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대리자 안에서 포로가 되시고 모욕을 당하셨다’는 표현이다. 피렌체의 유명한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37] 시아라와 그 밖의 적들이 교황에게 와서 매우 상스러운 말로 조롱하면서 교황과 교황과 함께 있던 이들을 포박하였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왕을 위해 협상을 지휘한 노가레의 기욤은 교황에게 경멸하는 어투로 그를 론 강이 있는 리옹으로 끌고가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유죄 판결을 받게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 어느 누구도 교황의 몸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거리낌 없이 교황에게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을 구속하고 교황과 교회의 보물들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위대한 교황 보니파시오는 3일 동안 적들의 수중에 포로로 사로잡혀 고통과 수치심, 정신적 충격 속에서 지냈다. … 이에 분노한 아나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콜론나와 그의 무리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생포하였으며,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풀어주었다. … 보니파시오 교황은 즉시 교황청 관료들과 함께 아나니를 떠나 로마로 돌아가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비탄과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자기 손을 물어뜯는 생소한 병에 걸렸고, 결국 천주 강생 1303년 10월 12일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생전에 그가 지은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가까이 있는 화려한 경당에 명예롭게 안장되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보니파시오 8세는 10월 11일 추기경 여덟 명과 교황청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노자 성체를 영한 다음 선종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1605년 뜻하지 않게 발굴되었으며, 당시 교황청 공증인이자 바티칸 대성전의 기록 보관 담당자인 자코모 그리말디(1568-1623)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교황의 시신은 삼중으로 만든 나무관 속에 종려나무 가지 일곱 개와 함께 뉘어 있었는데, 시신 상태는 꽤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키가 굉장히 컸다고 한다. 시신을 통해 당시의 의복 상태를 알 수 있었는데, 긴 스타킹이 다리와 허벅지를 덮고 있었으며, 검은색 실크로 만든 수대와 수단, 교황용 두건이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영대와 제의, 반지, 보석으로 장식한 주교용 장갑도 착용하고 있었다.[38] 현재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커다란 대리석관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무덤 위에는 그의 이름(BONIFACIVS PAPA VIII)이 기명되어 있다.[39] 각주[편집] ↑ Tosti, p. 37, citing Teuli, History of Velletri, Book 2, chapter 5. ↑ 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543, nos. 19037-19039. ↑ Potthast, no. 19065. 본래 성직록을 지급하는 것은 교황의 권한이었다. ↑ Potthast, 19089. ↑ Francis Gasquet, Henry the Third and the English Church (London 1905), p. 414. ↑ George Baker, The History and Antiquities of the County of Northamptonshire Vol. III (London: J.B.Nicholas & Son 1836), pages 312-338 ↑ Tosti, p. 38, n. 15 ↑ “Cardinal Deaconry”. ↑ R. Morghen, "Una legazione di Benedetto Caetani nell'Umbria e la guerra tra Perugia e Foligno del 1288," Archivio della Società romana di storia patria, 52 (1929), pp. 485-490. ↑ Conrad Eubel, Hierarchia catholica medii aevi I edition altera (Monasterii 1913), pp. 10, 47, 52. ↑ “Cardinal Title”. ↑ 루카의 바르톨로메오: Odoricus Raynaldus [Rainald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Quartus [Volume XXIII] (Lucca: Leonardo Venturini 1749), sub anno 1294, p. 156: Dominus Benedictus cum aliquibus cardinalibus Caelestino persuasit ut officio cedat quia propter simplicitatem suam, licet sanctus vir, et vitae magni foret exempli, saepius adversis confundabantur ecclesiae in gratiis faciendis et circa regimen orbis. ↑ See the poem by Jacopo Stefaneschi, Subdeacon of the Holy Roman Church, who participated in the events: Ludovicus Antonius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Tomus Tertius (Milan 1723), 642. ↑ "Frater Hugo de Bidiliomo provincie Francie, magister fuit egregius in theologia et multum famosus in romana curia; qui actu lector existens apud Sanctam Sabinam, per papam Nicolaum quartum eiusdem ecclesie factus cardinalis" [16.V.1288]; postmodum per Celestinum papam [1294] est ordinatus in episcopum ostiensem (Cr Pg 3r). http://www.e-theca.net/emiliopanella/lector12.htm; 같이 보기 Bolgia, Claudia; McKitterick, McKitterick; Osborne, John (2011). 《Rome Across Time and Space: Cultural Transmission and the Exchange of Ideas, C.500-14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19217-0. , p. 275. ↑ Filippo Maria Renazzi, Storia dell' Universita degli studj di Roma, detto comunamente La Sapienza Volume I (Roma: Pagliarini 1803), pp. 56-69. ↑ Oswald J. Reichel, The Elements of Canon Law (London: Thomas Baker, 1889), p. 51. ↑ Liber Sextus Decretalium D. Bonifacii Papae VIII, suae integritate, una cum Clementinis et Extravagantibus restitutus (Francofurdi: Ioan. Wechelus 1586), pp. 1-272. ↑ Liber Sextus Decretalium D. Bonifacii Papae VIII (Francofurdi 1586), pp. 252-260. ↑ "The Bad Popes" by ER Chamberlin 1969, 1986 ISBN 0-88029-116-8 Chapter III "The Lord of Europe" page 102-104. ↑ Oestereich, Thomas. "Pope Boniface VIII."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2.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7. 2016년 3월 4일. ↑ 당시 로마 주민은 약 2만 명이었다. ↑ 단테, 신곡 연옥편 Ⅱ, 94~99 ↑ 박영식 요한 신부 (1999년 5월 30일). “대희년을 배웁시다 (9) 교황 보니파시오 8세부터 보니파시오 9세까지의 그리스도교 희년(1300~1390년)”. 가톨릭 신문. 1999년 5월 30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under year 1296, §17, pp. 188-189; under year 1300, §26, p. 272-273.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1296년, §24-32, pp. 193-196. ↑ François Guizot and Mme. Guizot de Witt,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1848 Volume I (New York 1885), p. 474. ↑ Catholic Encyclopedia. Tosti, History of Pope Boniface VIII, p. 335.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under year 1303, §33, p. 325-326. ↑ Joannes Dominicus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novissima edition, Tomus vicesimus quintus (Venetiis 1782), pp. 97-100.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under year 1302, §13-15, p. 303-304. ↑ Georges Digard (editor), Les Registres de Boniface VIII (Paris 1907), nos. 5041-5069. Cf. no. 5341 (13 April 1303), Pope Boniface's reply to Cardinal Jean's report. ↑ Georges Digard (editor), Les Registres de Boniface VIII (Paris 1907), no. 5345. ↑ Georges Digard (editor), Les Registres de Boniface VIII (Paris 1907), nos. 5386-5387 ↑ Giuseppe Marchetti Longhi, "Il palazzo di Bonifacio VIII in Anagni," Archivio della Società romana di storia patria 43 (1920), 379-410. The building still exists: http://www.palazzobonifacioviii.it/ ↑ A. Tomassetti, 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omus IV (Augustae Taurinorum 1859), pp. 170-174. The date of September 8 has caused much scholarly controversy. Chamberlain, E.R. 〈The Lord of Europe〉. 《The Bad Popes》. Barnes and Noble. 120쪽. Ian Mortimer: "Barriers to the Truth" History Today: 60:12: December 2010: 13 ↑ Reardon, Wendy. 《The Deaths of the Popes》. McFarland. 120쪽. ↑ Giovanni Villani, Historia universalis, Book VIII, chapter 65. R. E. Selfe and P. H. Wicksteed, Selections from the First Nine Books of the Croniche Fiorentine of Giovanni Villani (Westminster, 1898), pp. 346-350. ↑ Joannes Baptista Gattico, Acta Selecta Caeremonialia Sanctae Romanae Ecclesiae ex variis mss. codicibus et diariis saeculi xv. xvi. xvii. Tomus I (Romae 1753), p. 478-479. ↑ Reardon, Wendy. 《The Deaths of the Popes. Comprehensive Accounts Including Funeral, Burial Places and Epitaphs》. McFarland. 120–123쪽. 전임첼레스티노 5세 제193대 교황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후임베네딕토 11세 vdeh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1세기-4세기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세 에바리스토 알렉산데르 1세 식스토 1세 텔레스포로 히지노 비오 1세 아니체토 소테르 엘레우테리오 빅토르 1세 제피리노 갈리스토 1세 우르바노 1세 폰시아노 안테로 파비아노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스테파노 1세 식스토 2세 디오니시오 펠릭스 1세 에우티키아노 카이오 마르첼리노 마르첼로 1세 에우세비오 멜키아데 실베스테르 1세 마르코 율리오 1세 리베리오 다마소 1세 시리치오 아나스타시오 1세 5세기-8세기 인노첸시오 1세 조시모 보니파시오 1세 첼레스티노 1세 식스토 3세 레오 1세 힐라리오 심플리치오 펠릭스 3세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심마코 호르미스다 요한 1세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요한 2세 아가피토 1세 실베리오 비질리오 펠라지오 1세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보니파시오 3세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마르티노 1세 에우제니오 1세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아가토 레오 2세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 자카리아 스테파노 2세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레오 3세 9세기-12세기 스테파노 4세 파스칼 1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니콜라오 1세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하드리아노 3세 스테파노 5세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레오 5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란도 요한 10세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아가피토 2세 요한 12세 베네딕토 5세 레오 8세 요한 13세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실베스테르 2세 요한 17세 요한 18세 세르지오 4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베네딕토 9세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클레멘스 2세 베네딕토 9세 다마소 2세 레오 9세 빅토르 2세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알렉산데르 2세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호노리오 2세 인노첸시오 2세 첼레스티노 2세 루치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아나스타시오 4세 하드리아노 4세 알렉산데르 3세 루치오 3세 우르바노 3세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첼레스티노 3세 인노첸시오 3세 13세기-16세기 호노리오 3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인노첸시오 4세 알렉산데르 4세 우르바노 4세 클레멘스 4세 그레고리오 10세 인노첸시오 5세 하드리아노 5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 니콜라오 4세 첼레스티노 5세 보니파시오 8세 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5세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그레고리오 11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 마르티노 5세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클레멘스 8세 17세기-20세기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데르 7세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인노첸시오 11세 알렉산데르 8세 인노첸시오 12세 클레멘스 11세 인노첸시오 13세 베네딕토 13세 클레멘스 12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 클레멘스 14세 비오 6세 비오 7세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21세기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 목록 전거 통제 WorldCat VIAF: 23416912 LCCN: n79056773 ISNI: 0000 0001 2124 2007 GND: 118513257 SELIBR: 42043 SUDOC: 029716721 BNF: cb12128117z (데이터) ULAN: 500332133 NLA: 35863280 NKC: js20020115035 ICCU: IT\ICCU\RMLV\02112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교황_보니파시오_8세&oldid=24464999" 분류: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35년 태어남1303년 죽음13세기 교황13세기 이탈리아 사람14세기 교황14세기 이탈리아 사람가에타니가아나니 출신이탈리아 출신 교황시칠리아 만종 사건 관련자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Mìng-dĕ̤ng-ngṳ̄Corsu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客家語/Hak-kâ-ngî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atina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मराठी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2일 (토) 16: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콜론나 가문 사이의 갈등에 대한 내용은 뭐야? |
교황 보니파시오 8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보니파시오 8세 임기 1294년 12월 24일 전임자 첼레스티노 5세후임자 베네딕토 11세개인정보출생이름 베네데토 가에타니출생 1235년 교황령 아나니선종 1303년 10월 11일 교황령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8세(라틴어: Bonifaciu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Bonifacio VIII, 1235년 ~ 1303년 10월 11일)는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이다. 본명은 베네데토 가에타니(이탈리아어: Benedetto Caetani)이다. 목차 1 이력 2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과 보니파시오 8세의 선출 3 교회법 4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 5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6 희년 7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8 필리프 4세와의 갈등 9 피랍과 죽음 10 각주 이력[편집] 베네데토는 1235년경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아나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교황령의 남작 집안인 가에타니 가문의 로프레도 가에타니이며, 모친은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조카딸인 에밀리아 파트라소 디 과르치노이다. 베네데토는 외삼촌 프라 레오나르도 파트라소의 후원을 받은 벨레트리의 작은형제회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1] 1252년 후원자이자 삼촌인 피에트로 가에타니가 움브리아 주에 있는 토디의 주교가 되자 베네데토는 그를 따라 토디로 가서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허락을 받고 자기 가족이 있는 아나니 대성당의 의전참사회원이 되었다. 1260년 삼촌 피에트로 가에타니는 그를 토디 대성당의 의전참사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베네데토는 또한 21개의 난로가 있는 시스마노 성이라는 작은 성을 소유하였다. 1264년 베네데토는 교회 법률가로 로마 교황청에 등용되었다. 그는 훗날 교황 마르티노 4세가 되는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의 비서로 프랑스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시몽 추기경은 1264년 4월 25일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청 대표 자격으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를 둘러싸고 앙주의 샤를과 협상하였다. 1264년 5월 1일 시몽 추기경은 자신의 임무를 위해 베네데토를 자신의 비서로 데려갔다. 1265년 2월 26일, 새로 즉위한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즉위 8일 만에 시몽 추기경에게 협상을 중단하고 즉시 프로방스로 가서 추가적인 지시를 받으라고 말했다. 같은 날, 클레멘스 4세는 샤를에게 그가 시칠리아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동의해야 하는 35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하는 한편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그의 아들 에드먼드에게도 친서를 보내 그들이 시칠리아 왕국을 소유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2] 더불어 그는 샤를을 위해 기금을 조성한 시에나 추기경에게 7천 파운드를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1265년 3월 20일 앙주의 샤를과의 협상을 더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시몽 추기경은 주교좌 성당과 그 밖의 자기 관구에서 성직자 다섯 명에게 성직록을 지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3] 이 때 베네데토 가에타니도 최소한 얼마 간 프랑스 성직록을 받았을 것이다. 1265년 4월 9일 교황 사절 시몽 드 브리옹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가 선종했다고 해서 생전에 그가 부여한 특전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4] 만약 시몽 추기경이 교황 사절을 그만두었다면 그러한 선언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베네데토는 또한 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5세가 되는 오토보네 프레스키 추기경과 함께 잉글랜드로 동행하기도 했다. 오토보네 추기경과 동반한 또 다른 사람은 리에주 수석부제인 피아첸차의 테오발도로, 그는 에드워드 왕자의 벗으로 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가기도 했으며, 종국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 선출되었다.[5] 1265년 5월 4일 오토보네 추기경은 새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었다. 1265년 8월 29일 추기경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시몽 드 몽포르와 그의 아들 앙리가 그 달 초 있었던 이브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토보네 추기경은 1265년 10월까지 볼로뉴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는 헨리 3세에 국왕에 대항한 시몽 드 몽포르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일을 돕기 위해 1268년 7월까지 잉글랜드에 머물렀다. 한편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노샘프턴셔 주 토우스터에 있는 세인트 로렌스 성당의 주임 사제를 지냈다.[6][7] 베네데토가 잉글랜드에서 돌아온 후 8년 동안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시기는 1268년 11월 29일부터 1272년 2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교황직을 수락할 때까지 긴 사도좌 공석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그의 추기경들이 1273년 프랑스로 가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1270년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킨 시기이기도 했다. 교황과 일부 추기경들은 1275년 11월 말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10세는 아레초에서 성탄절을 지낸 후 1276년 1월 10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1276년 베네데토는 로마 교황청의 법률가로서 십일조 징수를 감독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1270년경 말에는 교황의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에 베네데토는 17개의 성직록을 축적하여 교황이 될 때까지 계속 유지하였다. 1281년 4월 12일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오르비에토에서 베네데토 가에타니를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하였다.[8] 1288년 그는 구엘프와 기벨린으로 나뉜 페루자와 폴리뇨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움브리아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9] 1289년 겨울, 그는 포르투갈의 주교 서임권 분쟁 때 교황 니콜라오 4세의 고문 중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291년 9월 22일[10]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를 산 마르티노 인 산 실베스트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시켰다.[11] 베네데토는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와 나폴리, 시칠리아, 아라곤 등과의 외교적 교섭에 나섰다.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과 보니파시오 8세의 선출[편집] 보니파시오 8세의 인장 1294년 12월 13일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나폴리에서 교황직에서 물러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1294년 당시 나폴리에 있었던 루카의 바르톨로메오는 베네데토 가에타니가 첼레스티노 5세에게 사임을 종용한 몇몇 추기경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12] 하지만 기록에도 있듯이 첼레스티노 5세는 전문가들과 상의 후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사임한 것으로, 베네데토는 어디까지나 단지 교황의 사임이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어쨌든,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좌에서 내려오면서 베네데토 가에타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보니파시오 8세가 되었다. 1294년 콘클라베는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하고 10일이 지난 12월 23일에 열렸다.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제정한 규정들에는 교황의 사임에 관한 것이 없었지만, 추기경들은 교황의 선종과 마찬가지로 교황이 사임하고 10일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당시 추기경 22명 전원이 첼레스티노 5세가 사임한 장소이기도 한 나폴리의 카스텔누오보에 모일 수 있었다. 베네데토 가에타니는 129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차 투표에서 그는 이미 교황으로 선출되기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과반수 표를 얻었다.[13] 그는 1295년 1월 23일 로마의 주교로 성성되었다.[14] 그는 즉시 교황청과 함께 로마로 돌아가 1295년 1월 23일 주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교황으로서 그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전임자 첼레스티노 5세를 페렌티노의 푸모네 성에 기거하도록 한 것이다. 첼레스티노 5세는 그곳에서 자기 수도회 수사 두 사람과 함께 81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지냈다. 또한 보니파시오 8세는 1303년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를 설립했다.[15] 교회법[편집] 교회법 분야에 있어서 보니파시오 8세는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교황의 권위로 《그레고리오 9세 칙령집》(Decretales Gregorii IX)을 반포했으나 이후 60년 동안 후임 교황들에 의해서도 수차례 칙령들이 반포되었다. 그래서 보니파시오 8세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칙령집이 필요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교회 법령집》(Regulæ Iuris)이라는 주요 법령들의 모음집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반포한 88여 개의 칙령을 포함한 역대 교황들의 칙령을 엮어 여섯 권의 책으로 출판하라고 지시했다.[16] 그리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교회 법령집 제6서》(Liber Sextus)이다.[17] 이 자료는 오늘날 교회법률가들 또는 교회법 학자들이 교회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법령집은 제6서의 말미에 나오는데,[18] 현재는 《옛 교회 법전》(Corpus Juris Canonici) 제5권 말미에 소개되고 있다.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편집] 1297년 자코포 콜론나 추기경이 오토네, 마테오, 란돌포 등 자기 형제들의 영지 상속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세 형제는 보니파시오 8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코포에서 자신들의 영지를 돌려주라고 명령해줄 것을 호소하며, 콜론나 가문의 근거지인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를 비롯하여 일부 마을을 교황에게 바쳤다. 자코포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코포와 그의 조카 피에트로 콜론나는 오히려 교황의 정지적 적들인 아라곤의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 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해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자코포 콜론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추기경단에게 쫓아내고 파문하였다. 이에 (교황과 손잡은 세 형제를 제외한) 콜론나 가문은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은 전례 없는 일이며, 그를 뒤이은 보니파시오 8세는 불법적으로 선출된 것이기에 그를 교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쟁은 결국 전투로 이어져, 그 해 9월 보니파시오 8세는 란돌포 콜론나를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가문인 콜론나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1298년 말에 들어서 란돌포는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그리고 그 밖의 마을을 점령했는데, 이 때 그는 순순히 항복하면 해치지 않는다는 보니파시오 8세의 확약을 믿고 평화롭게 항복한 그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단테는 몬테펠트로의 귀도가 조언한 대로 이를 약속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면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라고 비판했지만, 기벨린(황제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신용할 수 없는 상대로 인식되어 있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주교좌 성당을 제외한 나머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시타파팔레라는 새로운 도시가 팔레스트리나를 대체했다.[19] 시칠리아와 이탈리아[편집] 아라곤의 차이메 2세가 동생 프레데리코에게 시칠리아 왕위(트리나크리아 왕국, Regnu di Trinacria)를 물려주어 프레데리코는 시칠리아의 피디리쿠 2세로 즉위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그가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피디리쿠 2세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에 그를 파문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피디리쿠 2세와 시칠리아 백성 누구도 이에 동요하지 않았다.[20] 성무금지는 1302년 피디리쿠 2세와 카를로 2세를 각각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통치한다는 칼타벨로타 평화협정(Pace di Caltabellotta, Paci di Cataviddotta)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보니파시오 8세는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제노바에게 휴전할 것을 종용했으나 그들은 교황의 제안을 거절하고 3년 간 싸웠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구엘프 내 흑색당과 백색당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피렌체에도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1300년 야심 가득한 샤를 드 발루아 백작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였다. 샤를의 개입으로 흑색당에 의해 백색당 지도부가 전복되어 영구추방되었다. 희년[편집] 보니파시오 8세는 1300년 2월 22일에 교서 《Antiquorum habet》를 반포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희년에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사도 바오로의 성전을 순례하게 했다. 그의 희년 선포는 교회 안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로마인들 외에도 2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희년 행사에 참석했으며[21] 순례객 가운데는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도 끼어 있었다고들 말한다. 사실 단테 자신이 이 때의 희년에 참여한 것으로 묘사하지만[22] 확실치가 않다. 그 당시, 시내에서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가는 유일한 다리는 테베레 강을 가로지르는 산탄젤로 다리였다. 로마인들은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수많은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이 다리의 반을 갈라 각기 일방통행으로 만들었다.[23]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편집]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에게 폐위시켰는데, 존 발리올은 교황의 보호 아래 교황궁에 머무른다는 조건 아래 구속에서 물려났다.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 초반에 밀리던 스코틀랜드인들은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의 대영주 자격으로 나서서 보호해줄 것을 호소했다.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교황 칙서 《나는 안다, 아들아》(Scimus, Fili)를 통해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점령한 것을 비판했다. 교황은 이 칙서를 통해 에드워드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격을 즉시 중단하고 협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를 무시했다. 1301년 잉글랜드 남작들은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대영주로서의 권리를 부인하고 잉글랜드에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필리프 4세와의 갈등[편집]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을 중앙집권화 하려는 군주들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충돌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강화되어가는 왕권과 교회의 갈등은 특히나 1285년 필리프 4세의 권력 강화로 악화되었다. 프랑스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국민 국가로의 발전은 카페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필리프 4세는 최고의 시민 법률가들을 거느리고 법집행에 있어 성직자들의 참여를 전면 금지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에게도 과세하자 보니파시오 8세는 이에 맞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를 세금 문제에 대한 성직자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본 그는 1296년 2월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는 교황 칙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공표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발표로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 사실 교회 운영은 프랑스의 수입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교황을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놓으셨다”면서 강력히 항의하였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교회의 재산이 나라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고자 하였다.[24]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과 더불어 중동에 파병할 새 십자군 원정을 위한 기금을 모으던 교황 대리인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 9월 교황 칙서 《형언할 수 없는 사랑》(Ineffabilis amor)을 공표하여[25] 기본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성직자가 자원하여 세금을 낼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필요하면’이라는 표현은 왕이 언제든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 명령을 철회하고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사이의 분쟁을 조정할 중재자로 받아들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필리프 4세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불화는 다시 재개되어 필리프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반교황 움직임에 착수한 14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하였다. 분쟁은 필리프 4세의 측근과 교황 특사 베르나르 세세 간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1301년 필리프 4세는 베르나르 세세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한 후 감옥에 가둔 한편 나르본의 대주교 질 에슐랑을 구류하였다. 이에 격분한 보니파시오 8세는 1301년 12월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Ausculta Fili)를 공표하여 지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영적 군주인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말에 공손히 귀를 기울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필리프 4세 주최로 열린 궁정 재판에서 성직자가 판결받는 것은 위법적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교회 재산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프랑스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로마로 소집해 주교회의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26] 필리프 4세는 교황 칙서를 접한 후 교황 사절의 손에서 칙서를 잡아챈 다음 불 속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27] 1302년 2월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가 필리프 4세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2년 3월 4일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교황의 통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장 르무엔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보냈다.[28]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계획한 주교회의를 사전에 방해하기 위해 4월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삼부회에서 귀족, 성직자, 평민 세 신분 모두 로마에 왕과 왕의 세속적 권력을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편 45명의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필리프 4세의 금지령과 사유 재산 몰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1302년 10월 로마에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29] 주교회의가 끝난 후, 1302년 11월 18일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 칙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를 공표했다.[30] 《거룩한 하나의 교회》는 중세기의 세속적인 권한과 종교적인 권한을 상세히 나타낸 가장 유명한 칙서로서 교회의 일치와 속권에 의해 위협받는 일치, 군주에 대한 충성과 교황에 대한 순명 사이에서 지역 교회 주교들이 교계제도 안에서 취할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거룩한 하나의 교회》는 이전 교황들의 발표보다 세속의 군주들을 세우고 심판하는 교황의 권한을 보다 명백하게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내용은 ‘사람은 두 가지 면으로 살아간다. 하나는 영적인 면이고 다른 하는 세속적인 면이다. 세속적인 권력이 정도를 벗어나면 영적인 권력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요지로 되어 있으며, 교황의 재치권에는 영적인 권력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도 있으며, 왕들은 이 교황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다른 한편 교황은 장 르무엔 추기경을 필리프 4세에게 보내는 교황 특사로 임명하고 특별히 그에게 필리프 4세를 파문 상태에서 해제할 권한까지 부여하면서, 양자 간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31] 피랍과 죽음[편집] 아나니 사건을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회화. 1303년 4월 4일 성목요일, 교황은 프랑스 성직자들이 로마에 오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하였다.[32] 파문 대상에는 필리프 4세까지 포함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필리프 4세의 재상 기욤 드 노가레는 보니파시오 8세의 신상을 공격하면서 그를 이단자로 비난하고 공의회를 열어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03년 8월 15일 교황은 프랑스 왕국 신민들에 대한 필리프 4세의 통치권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필리프 4세가 로마의 교회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의 행동을 소상히 설명하기 전까지는 공석 중인 프랑스의 모든 교구장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을 모두 보류하기로 하였다.[33] 이리하여 프랑스는 무력으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였다. 1303년 9월 7일 기욤 드 노가레가 이끈 프랑스군과 시아라 콜론나가 당시 아나니의 교황궁에 있던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하였다.[34] 교황은 1303년 9월 8일 교황 칙서를 공표해 필리프 4세와 기욤 드 노가레를 파문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35] 기욤 드 노가레와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시오 8세를 만나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교황직을 사임할 것을 협박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굴복하지 않고 사임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대꾸하였다. 이에 시아라 콜론나가 보니파시오 8세의 뺨을 세게 철썩 때렸는데, 당시 73세였던 교황은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아나니 사건(Schiaffo di Anagni)이라고 부른다. 보니파시오 8세는 3일이 지나서야 풀려났으나 그로부터 한달 후에 선종하였다.[36] 단테는 이 사건을 《신곡》의 연옥 편에서 기록해 놓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대리자 안에서 포로가 되시고 모욕을 당하셨다’는 표현이다. 피렌체의 유명한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37] 시아라와 그 밖의 적들이 교황에게 와서 매우 상스러운 말로 조롱하면서 교황과 교황과 함께 있던 이들을 포박하였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왕을 위해 협상을 지휘한 노가레의 기욤은 교황에게 경멸하는 어투로 그를 론 강이 있는 리옹으로 끌고가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유죄 판결을 받게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 어느 누구도 교황의 몸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거리낌 없이 교황에게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을 구속하고 교황과 교회의 보물들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위대한 교황 보니파시오는 3일 동안 적들의 수중에 포로로 사로잡혀 고통과 수치심, 정신적 충격 속에서 지냈다. … 이에 분노한 아나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콜론나와 그의 무리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생포하였으며,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풀어주었다. … 보니파시오 교황은 즉시 교황청 관료들과 함께 아나니를 떠나 로마로 돌아가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비탄과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자기 손을 물어뜯는 생소한 병에 걸렸고, 결국 천주 강생 1303년 10월 12일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생전에 그가 지은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가까이 있는 화려한 경당에 명예롭게 안장되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보니파시오 8세는 10월 11일 추기경 여덟 명과 교황청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노자 성체를 영한 다음 선종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1605년 뜻하지 않게 발굴되었으며, 당시 교황청 공증인이자 바티칸 대성전의 기록 보관 담당자인 자코모 그리말디(1568-1623)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교황의 시신은 삼중으로 만든 나무관 속에 종려나무 가지 일곱 개와 함께 뉘어 있었는데, 시신 상태는 꽤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키가 굉장히 컸다고 한다. 시신을 통해 당시의 의복 상태를 알 수 있었는데, 긴 스타킹이 다리와 허벅지를 덮고 있었으며, 검은색 실크로 만든 수대와 수단, 교황용 두건이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영대와 제의, 반지, 보석으로 장식한 주교용 장갑도 착용하고 있었다.[38] 현재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커다란 대리석관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무덤 위에는 그의 이름(BONIFACIVS PAPA VIII)이 기명되어 있다.[39] 각주[편집] ↑ Tosti, p. 37, citing Teuli, History of Velletri, Book 2, chapter 5. ↑ 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543, nos. 19037-19039. ↑ Potthast, no. 19065. 본래 성직록을 지급하는 것은 교황의 권한이었다. ↑ Potthast, 19089. ↑ Francis Gasquet, Henry the Third and the English Church (London 1905), p. 414. ↑ George Baker, The History and Antiquities of the County of Northamptonshire Vol. III (London: J.B.Nicholas & Son 1836), pages 312-338 ↑ Tosti, p. 38, n. 15 ↑ “Cardinal Deaconry”. ↑ R. Morghen, "Una legazione di Benedetto Caetani nell'Umbria e la guerra tra Perugia e Foligno del 1288," Archivio della Società romana di storia patria, 52 (1929), pp. 485-490. ↑ Conrad Eubel, Hierarchia catholica medii aevi I edition altera (Monasterii 1913), pp. 10, 47, 52. ↑ “Cardinal Title”. ↑ 루카의 바르톨로메오: Odoricus Raynaldus [Rainald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Quartus [Volume XXIII] (Lucca: Leonardo Venturini 1749), sub anno 1294, p. 156: Dominus Benedictus cum aliquibus cardinalibus Caelestino persuasit ut officio cedat quia propter simplicitatem suam, licet sanctus vir, et vitae magni foret exempli, saepius adversis confundabantur ecclesiae in gratiis faciendis et circa regimen orbis. ↑ See the poem by Jacopo Stefaneschi, Subdeacon of the Holy Roman Church, who participated in the events: Ludovicus Antonius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Tomus Tertius (Milan 1723), 642. ↑ "Frater Hugo de Bidiliomo provincie Francie, magister fuit egregius in theologia et multum famosus in romana curia; qui actu lector existens apud Sanctam Sabinam, per papam Nicolaum quartum eiusdem ecclesie factus cardinalis" [16.V.1288]; postmodum per Celestinum papam [1294] est ordinatus in episcopum ostiensem (Cr Pg 3r). http://www.e-theca.net/emiliopanella/lector12.htm; 같이 보기 Bolgia, Claudia; McKitterick, McKitterick; Osborne, John (2011). 《Rome Across Time and Space: Cultural Transmission and the Exchange of Ideas, C.500-14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19217-0. , p. 275. ↑ Filippo Maria Renazzi, Storia dell' Universita degli studj di Roma, detto comunamente La Sapienza Volume I (Roma: Pagliarini 1803), pp. 56-69. ↑ Oswald J. Reichel, The Elements of Canon Law (London: Thomas Baker, 1889), p. 51. ↑ Liber Sextus Decretalium D. Bonifacii Papae VIII, suae integritate, una cum Clementinis et Extravagantibus restitutus (Francofurdi: Ioan. Wechelus 1586), pp. 1-272. ↑ Liber Sextus Decretalium D. Bonifacii Papae VIII (Francofurdi 1586), pp. 252-260. ↑ "The Bad Popes" by ER Chamberlin 1969, 1986 ISBN 0-88029-116-8 Chapter III "The Lord of Europe" page 102-104. ↑ Oestereich, Thomas. "Pope Boniface VIII."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2.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7. 2016년 3월 4일. ↑ 당시 로마 주민은 약 2만 명이었다. ↑ 단테, 신곡 연옥편 Ⅱ, 94~99 ↑ 박영식 요한 신부 (1999년 5월 30일). “대희년을 배웁시다 (9) 교황 보니파시오 8세부터 보니파시오 9세까지의 그리스도교 희년(1300~1390년)”. 가톨릭 신문. 1999년 5월 30일에 확인함.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access-date= (도움말)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under year 1296, §17, pp. 188-189; under year 1300, §26, p. 272-273.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1296년, §24-32, pp. 193-196. ↑ François Guizot and Mme. Guizot de Witt,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1848 Volume I (New York 1885), p. 474. ↑ Catholic Encyclopedia. Tosti, History of Pope Boniface VIII, p. 335.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under year 1303, §33, p. 325-326. ↑ Joannes Dominicus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novissima edition, Tomus vicesimus quintus (Venetiis 1782), pp. 97-100. ↑ A. Theiner (ed.),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23 (Bar-le-Duc 1871), under year 1302, §13-15, p. 303-304. ↑ Georges Digard (editor), Les Registres de Boniface VIII (Paris 1907), nos. 5041-5069. Cf. no. 5341 (13 April 1303), Pope Boniface's reply to Cardinal Jean's report. ↑ Georges Digard (editor), Les Registres de Boniface VIII (Paris 1907), no. 5345. ↑ Georges Digard (editor), Les Registres de Boniface VIII (Paris 1907), nos. 5386-5387 ↑ Giuseppe Marchetti Longhi, "Il palazzo di Bonifacio VIII in Anagni," Archivio della Società romana di storia patria 43 (1920), 379-410. The building still exists: http://www.palazzobonifacioviii.it/ ↑ A. Tomassetti, 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omus IV (Augustae Taurinorum 1859), pp. 170-174. The date of September 8 has caused much scholarly controversy. Chamberlain, E.R. 〈The Lord of Europe〉. 《The Bad Popes》. Barnes and Noble. 120쪽. Ian Mortimer: "Barriers to the Truth" History Today: 60:12: December 2010: 13 ↑ Reardon, Wendy. 《The Deaths of the Popes》. McFarland. 120쪽. ↑ Giovanni Villani, Historia universalis, Book VIII, chapter 65. R. E. Selfe and P. H. Wicksteed, Selections from the First Nine Books of the Croniche Fiorentine of Giovanni Villani (Westminster, 1898), pp. 346-350. ↑ Joannes Baptista Gattico, Acta Selecta Caeremonialia Sanctae Romanae Ecclesiae ex variis mss. codicibus et diariis saeculi xv. xvi. xvii. Tomus I (Romae 1753), p. 478-479. ↑ Reardon, Wendy. 《The Deaths of the Popes. Comprehensive Accounts Including Funeral, Burial Places and Epitaphs》. McFarland. 120–123쪽. 전임첼레스티노 5세 제193대 교황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후임베네딕토 11세 vdeh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1세기-4세기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세 에바리스토 알렉산데르 1세 식스토 1세 텔레스포로 히지노 비오 1세 아니체토 소테르 엘레우테리오 빅토르 1세 제피리노 갈리스토 1세 우르바노 1세 폰시아노 안테로 파비아노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스테파노 1세 식스토 2세 디오니시오 펠릭스 1세 에우티키아노 카이오 마르첼리노 마르첼로 1세 에우세비오 멜키아데 실베스테르 1세 마르코 율리오 1세 리베리오 다마소 1세 시리치오 아나스타시오 1세 5세기-8세기 인노첸시오 1세 조시모 보니파시오 1세 첼레스티노 1세 식스토 3세 레오 1세 힐라리오 심플리치오 펠릭스 3세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심마코 호르미스다 요한 1세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요한 2세 아가피토 1세 실베리오 비질리오 펠라지오 1세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보니파시오 3세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마르티노 1세 에우제니오 1세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아가토 레오 2세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 자카리아 스테파노 2세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레오 3세 9세기-12세기 스테파노 4세 파스칼 1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니콜라오 1세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하드리아노 3세 스테파노 5세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레오 5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란도 요한 10세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아가피토 2세 요한 12세 베네딕토 5세 레오 8세 요한 13세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실베스테르 2세 요한 17세 요한 18세 세르지오 4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베네딕토 9세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클레멘스 2세 베네딕토 9세 다마소 2세 레오 9세 빅토르 2세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알렉산데르 2세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호노리오 2세 인노첸시오 2세 첼레스티노 2세 루치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아나스타시오 4세 하드리아노 4세 알렉산데르 3세 루치오 3세 우르바노 3세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첼레스티노 3세 인노첸시오 3세 13세기-16세기 호노리오 3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인노첸시오 4세 알렉산데르 4세 우르바노 4세 클레멘스 4세 그레고리오 10세 인노첸시오 5세 하드리아노 5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 니콜라오 4세 첼레스티노 5세 보니파시오 8세 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5세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그레고리오 11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 마르티노 5세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클레멘스 8세 17세기-20세기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데르 7세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인노첸시오 11세 알렉산데르 8세 인노첸시오 12세 클레멘스 11세 인노첸시오 13세 베네딕토 13세 클레멘스 12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 클레멘스 14세 비오 6세 비오 7세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21세기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 목록 전거 통제 WorldCat VIAF: 23416912 LCCN: n79056773 ISNI: 0000 0001 2124 2007 GND: 118513257 SELIBR: 42043 SUDOC: 029716721 BNF: cb12128117z (데이터) ULAN: 500332133 NLA: 35863280 NKC: js20020115035 ICCU: IT\ICCU\RMLV\02112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교황_보니파시오_8세&oldid=24464999" 분류: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35년 태어남1303년 죽음13세기 교황13세기 이탈리아 사람14세기 교황14세기 이탈리아 사람가에타니가아나니 출신이탈리아 출신 교황시칠리아 만종 사건 관련자숨은 분류: 인용 오류 - 날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B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rezhonegCatalàMìng-dĕ̤ng-ngṳ̄Corsu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客家語/Hak-kâ-ngî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lokanoIdo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atinaLietuviųLatviešuMalagasyМакедонскиमराठी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cilian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2일 (토) 16: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234년 그레고리오 교황이 반포한 것은? |
애버딘 FC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애버딘 FC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애버딘 FC 전체 이름 Aberdeen Football Club 리그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창단 연도 1903년 4월 14일 회장 스튜어트 밀른 감독 데릭 매키니스 경기장 스코틀랜드 애버딘피토드리 스타디움 수용 인원 20,897[1] 2017-18 2위 홈 어웨이 애버딘 FC는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을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으로, 1903년에 창단되었다. 현재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해 있다. 목차 1 역사 1.1 전성기 1.2 최근 성적 2 우승 2.1 국내 2.2 유럽 대항전 3 각주 4 외부 링크 역사[편집] 전성기[편집] 애버딘은 과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팀을 맡았던 시절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3회 우승, 스코틀랜드 컵 4회 우승, UEFA컵위너스컵(82/83) 우승 등 여러 대회에서 총 10번의 우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누렸다. 최근 성적[편집] 2009-10시즌: 9위 2010-11시즌: 9위 2011-12시즌: 9위 2012-13시즌: 8위 2013-14시즌: 3위 우승[편집] 국내[편집] 스코틀랜드 리그[2] 우승 (4회): 1954–55, 1979–80, 1983–84, 1984–85 준우승: 17회 스코틀랜드 컵[2] 우승 (7회): 1946–47, 1969–7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9–90 준우승: 9회 스코틀랜드 리그 컵[2] 우승 (6회): 1955–56, 1976–77, 1985–86, 1989–90, 1995–96, 2013–14 준우승: 9회 유럽 대항전[편집] UEFA 컵위너스컵[2] 우승: 1982–83 UEFA 슈퍼컵[2] 우승: 1983 각주[편집] ↑ http://spfl.co.uk/clubs/aberdeen/ ↑ 가 나 다 라 마 “Honours”. 《Aberdeen FC》. 2018년 1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vdeh 스코틀랜드 프리미어십 (2016-17) 던디 레인저스 로스 카운티 머더웰 세인트 존스톤 셀틱 애버딘 인버네스 캘리도니언 시슬 킬마녹 파틱 시슬 하트 오브 미들로디언 vdehUEFA 컵위너스컵 우승팀1960년대 1960-61: 피오렌티나 1961-62: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62-63: 토트넘 홋스퍼 1963-64: 스포르팅 CP 1964-65: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965-66: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66-67: 바이에른 뮌헨 1967-68: 밀란 1968-69: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69-70: 맨체스터 시티 1970년대 1970-71: 첼시 1971-72: 레인저스 1972-73: 밀란 1973-74: 마그데부르크 1974-75: 디나모 키예프 1975-76: 안데를레흐트 1976-77: 함부르크 1977-78: 안데를레흐트 1978-79: 바르셀로나 1979-80: 발렌시아 1980년대 1980-81: 디나모 트빌리시 1981-82: 바르셀로나 1982-83: 애버딘 1983-84: 유벤투스 1984-85: 에버턴 1985-86: 디나모 키예프 1986-87: 아약스 1987-88: 메헬렌 1988-89: 바르셀로나 1989-90: 삼프도리아 1990년대 1990-9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1-92: 베르더 브레멘 1992-93: 파르마 1993-94: 아스널 1994-95: 레알 사라고사 1995-96: 파리 생제르맹 1996-97: 바르셀로나 1997-98: 첼시 1998-99: 라치오 vdehUEFA 슈퍼컵 우승팀챔피언스리그 대 컵위너스컵1970년대 1972: 아약스 1973: 아약스 1975: 디나모 키예프 1976: 안데를레흐트 1977: 리버풀 1978: 안데를레흐트 1979: 노팅엄 포리스트 1980년대 1980: 발렌시아 1982: 애스턴 빌라 1983: 애버딘 1984: 유벤투스 1986: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87: 포르투 1988: 메헬렌 1989: 밀란 1990년대 1990: 밀란 199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2: 바르셀로나 1993: 파르마 1994: 밀란 1995: 아약스 1996: 유벤투스 1997: 바르셀로나 1998: 첼시 1999: 라치오 챔피언스리그 대 유로파리그2000년대 2000: 갈라타사라이 2001: 리버풀 2002: 레알 마드리드 2003: 밀란 2004: 발렌시아 2005: 리버풀 2006: 세비야 2007: 밀란 2008: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2009: 바르셀로나 2010년대 201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1: 바르셀로나 2012: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3: 바이에른 뮌헨 2014: 레알 마드리드 2015: 바르셀로나 2016: 레알 마드리드 2017: 레알 마드리드 201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9: ? 이 글은 축구단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이 글은 스코틀랜드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애버딘_FC&oldid=24150978" 분류: 스코틀랜드의 축구단애버딘 FC강등된 적이 없는 축구단1903년 설립된 축구단숨은 분류: 축구단에 관한 토막글스코틀랜드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5일 (일) 11: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애버딘 FC가 우승을 6번, 준우승을 9번을 한 리그가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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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4일) 미라이 나가수Mirai Nagasu 2010년 모습출생 1993년 4월 16일(1993-04-16) (2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벨로거주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아르카디아국적 일본, 미국 나가수 미라이 일본어식 한자 표기: 長洲未来 가나 표기: ながす みらい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나가스 미라이 로마자: Mirai Nagasu 메달 기록 미국의 선수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동 2018 평창 단체 ISU 주니어 세계선수권 동 2008년 소피아 은 2007년 오버스트도르프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금 2007년 그단스크 미라이 에일린 나가스(영어: Mirai Aileen Nagasu, 1993년 4월 16일 ~ )는 미국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일본계 이민 2세로, 일본 이름은 나가스 미라이(일본어: 長洲未来)이다. 목차 1 기본정보 2 인물 3 경력 4 스케이팅 기술 5 프로그램 6 주요 대회 출전 경력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기본정보[편집] 생년월일[1]: 1993년 4월 16일(1993-04-16) (26세) 키: 157 cm 가족: 부모님 학력: 캘리포니아주 아카디아 시 아카디아 고교 2학년 재학 중 세계랭킹: 15위 소속사: IMG 코치: 카를린 웡 안무가: 로리 니콜 전지훈련지: 패서디나 피겨스케이팅클럽(Pasadena FSC) 취미: 독서, 요리, 쇼핑하기 ISU 공인 개인 최고 기록 쇼트프로그램: 73.40 (2016 CS 어텀 클래식) 프리스케이팅: 137.53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단체전) 총점: 194.95 (2017년 강릉 4대륙 선수권) 인물[편집]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군에서 일본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로스앤젤레스 군에서 초밥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이름 미라이는 '미래(未来)'를 일본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출생 당시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일본 국적 소지자였으므로, 그는 미국과 일본의 국적법에 따라 양 국가의 국적을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중국적을 원칙적으로 불허하나 출생에 의해 이중국적 사유가 생겼을 경우 22세까지는 이중국적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현재도 그는 미국과 일본의 이중국적 소지자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 대표로 선발되는 등 미국 국적을 택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에서는 일본어도 사용하는 등 아직도 일본과의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경력[편집] 2006-07시즌, 지역 예선에 통과하지 못하여 국제 무대 데뷔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2007년 1월에 출전한 주니어 미국 선수권에서, 이미 2006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했던 강력한 우승 후보인 캐롤라인 장을 누르고 1위의 자리에 올랐다. 2007-08시즌, 14세가 되어 첫 국제무대 데뷔인 ISU 주니어 그랑프리 미국 대회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1위를 차지했다. 쇼트 프로그램에는 김연아의 대표적인 기술이기도 한 이나바우어 + 더블악셀 점프를 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 출전한 주니어 그랑프리 크로아티아 대회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파이널 진출권을 획득했다. 파이널에서는 프리프로그램에서 다소 부진했으나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United States Figure Skating championships)에는 시니어로 참가했다. 나가스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3회전 러츠+3회전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켰고 종합 190점대를 기록하며 미국 피겨 사상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다. 2008년 3월에 개최된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서는 쇼트프로그램에서 모든 점프를 성공시키며 65.07점의 점수를 얻었다. 이 점수는 주니어와 시니어를 통틀어 2007-08시즌 중 가장 높은 쇼트프로그램 점수였다. 그러나 프리프로그램에서는 가장 자신있는 레이백 스핀(등을 뒤로 젖혀 도는 스핀)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점프도 실패하면서 동메달에 그쳤다. 2008-09시즌, 15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시니어 피겨그랑프리시리즈에 출전하게되는데 나가스가 배정받은 대회는 스케이트 아메리카와 NHK 트로피이다. 첫 참가대회인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는 쇼트 4위를 기록하여 좋은 출발을 보였고 프리에서 쇼트 5위였던 같은 미국대표인 레이첼 플랫에게 추월당해 김연아,나카노 유카리,안도 미키,레이첼 플랫에 이어 총점 5위를 기록하였다. 그랑프리 6차대회인 NHK트로피에서는 쇼트에서 8위, 프리에서 9위를 기록하여 합계 8위를 기록하였다. 2009-10시즌, 더욱 성장하여 두 차례 그랑프리 대회에서 각각 4위와 5위를 하였다. 이에 따라 2010년 시니어로 올라온 선수 중에서 기대받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각광받았다. 2010년 1월,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레이철 플랫에 이어 2위를 하여 동계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 자격을 얻었다. 올림픽 경기에서는 4위에 오르며 큰 돌풍을 일으켰다. 뒤이어 벌어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쇼트에서 1위에 오르며 큰 주목을 받았으나, 프리에서 몇 차례의 실수로 11위로 처져 합계 7위를 기록했다. 스케이팅 기술[편집] 2007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시상식(가운데가 나가스). 미라이 나가스는 2008년 미국 선수권에서 처음으로 3회전 러츠 + 3회전 토룹 의 컴비네이션 점프를 착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제빙상연맹(ISU)의 공인 대회에서는 3러츠+3토룹 점프를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나바우어를 한 후 3회전 살코 점프를 뛸 수 있으며, 2007-08시즌부터는 '이나바우어 상태에서 더블악셀 점프'를 하고 있다. 나가스는 3회전 러츠 점프의 도약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올바른 러츠 점프는 스케이트의 바깥쪽 엣지로 도약하여 점프를 해야 하지만, 나가스는 점프 직전에 스케이트의 안쪽 엣지로 바꾸고 점프를 하여 플러츠(Flutz)점프가 된다.[2] 그러나 2007년 5월, 국제빙상연맹(ISU)에서 강화된 규칙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점프를 엄격하게 단속한다는 규정이 수록되어, 2007-08시즌부터는 잘못된 에지의 러츠 점프에 감점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2007-08시즌에서는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서 '잘못된 점프 도약' 판정을 받았다. 스핀과 스파이럴에서는 특유의 유연성을 내세운 아름다운 포지션을 선보이고 있으며, 대부분이 레벨 4의 최고득점을 기록하고 있고 가산점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프로그램[편집] 시즌 쇼트 프로그램 프리 프로그램 갈라쇼 08-09 Pirates of the Caribbean - 캐리비안의 해적 OST 카르멘(Carmen) -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미정 07-08 I Got Rhythm - 조지 거쉰 코펠리아 - 레오 드리브 A Dream Is A Wish Your Heart Makes - Circle of Stars Don't Stop Me Now" - 퀸 06-07 Shout and Feel It - 베니 굿맨 American Quartet - 드보르자크 A Dream Is A Wish Your Heart Makes - Circle of Stars 주요 대회 출전 경력[편집] 대회/시즌 2006-2007 2007-2008 2008-2009 2009-2010 동계 올림픽 4 세계 선수권 7 미국 선수권 1 J. 1 5 2 컵 오브 차이나 5 스케이트 캐나다 4 NHK 트로피 8 스케이트 아메리카 5 주니어 세계선수권 2 3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1 주니어 그랑프리 크로아티아 1 주니어 그랑프리 미국 1 J. = 주니어(13세 이상) 같이 보기[편집] 김연아 윤예지 안도 미키 아사다 마오 캐롤라인 장 조아니 로셰트 카롤리나 코스트너 각주[편집] ↑ 아이스네트워크 사이트의 프로필 ↑ YouTube - Broadcast Yourself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미라이 나가스 공식 웹사이트 (영어) 미라이 나가스 - 국제 빙상 연맹 (영어) 미라이 나가스 - 미국 피겨 스케이팅 협회 (영어) 미라이 나가스 - 미국 올림픽 위원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라이_나가스&oldid=23864752" 분류: 199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일본계 미국인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캘리포니아주 출신미국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0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8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2018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미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메달리스트아케이디아 (캘리포니아주) 출신숨은 분류: 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글/2010년 1월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모든 글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Ænglisc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5일 (금) 16: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06-07 시즌에 마라이 나가스는 어느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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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4일) 미라이 나가수Mirai Nagasu 2010년 모습출생 1993년 4월 16일(1993-04-16) (2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벨로거주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아르카디아국적 일본, 미국 나가수 미라이 일본어식 한자 표기: 長洲未来 가나 표기: ながす みらい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나가스 미라이 로마자: Mirai Nagasu 메달 기록 미국의 선수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동 2018 평창 단체 ISU 주니어 세계선수권 동 2008년 소피아 은 2007년 오버스트도르프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금 2007년 그단스크 미라이 에일린 나가스(영어: Mirai Aileen Nagasu, 1993년 4월 16일 ~ )는 미국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일본계 이민 2세로, 일본 이름은 나가스 미라이(일본어: 長洲未来)이다. 목차 1 기본정보 2 인물 3 경력 4 스케이팅 기술 5 프로그램 6 주요 대회 출전 경력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기본정보[편집] 생년월일[1]: 1993년 4월 16일(1993-04-16) (26세) 키: 157 cm 가족: 부모님 학력: 캘리포니아주 아카디아 시 아카디아 고교 2학년 재학 중 세계랭킹: 15위 소속사: IMG 코치: 카를린 웡 안무가: 로리 니콜 전지훈련지: 패서디나 피겨스케이팅클럽(Pasadena FSC) 취미: 독서, 요리, 쇼핑하기 ISU 공인 개인 최고 기록 쇼트프로그램: 73.40 (2016 CS 어텀 클래식) 프리스케이팅: 137.53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단체전) 총점: 194.95 (2017년 강릉 4대륙 선수권) 인물[편집]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군에서 일본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로스앤젤레스 군에서 초밥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이름 미라이는 '미래(未来)'를 일본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출생 당시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일본 국적 소지자였으므로, 그는 미국과 일본의 국적법에 따라 양 국가의 국적을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중국적을 원칙적으로 불허하나 출생에 의해 이중국적 사유가 생겼을 경우 22세까지는 이중국적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현재도 그는 미국과 일본의 이중국적 소지자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 대표로 선발되는 등 미국 국적을 택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에서는 일본어도 사용하는 등 아직도 일본과의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경력[편집] 2006-07시즌, 지역 예선에 통과하지 못하여 국제 무대 데뷔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2007년 1월에 출전한 주니어 미국 선수권에서, 이미 2006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했던 강력한 우승 후보인 캐롤라인 장을 누르고 1위의 자리에 올랐다. 2007-08시즌, 14세가 되어 첫 국제무대 데뷔인 ISU 주니어 그랑프리 미국 대회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1위를 차지했다. 쇼트 프로그램에는 김연아의 대표적인 기술이기도 한 이나바우어 + 더블악셀 점프를 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 출전한 주니어 그랑프리 크로아티아 대회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파이널 진출권을 획득했다. 파이널에서는 프리프로그램에서 다소 부진했으나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United States Figure Skating championships)에는 시니어로 참가했다. 나가스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3회전 러츠+3회전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켰고 종합 190점대를 기록하며 미국 피겨 사상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다. 2008년 3월에 개최된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서는 쇼트프로그램에서 모든 점프를 성공시키며 65.07점의 점수를 얻었다. 이 점수는 주니어와 시니어를 통틀어 2007-08시즌 중 가장 높은 쇼트프로그램 점수였다. 그러나 프리프로그램에서는 가장 자신있는 레이백 스핀(등을 뒤로 젖혀 도는 스핀)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점프도 실패하면서 동메달에 그쳤다. 2008-09시즌, 15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시니어 피겨그랑프리시리즈에 출전하게되는데 나가스가 배정받은 대회는 스케이트 아메리카와 NHK 트로피이다. 첫 참가대회인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는 쇼트 4위를 기록하여 좋은 출발을 보였고 프리에서 쇼트 5위였던 같은 미국대표인 레이첼 플랫에게 추월당해 김연아,나카노 유카리,안도 미키,레이첼 플랫에 이어 총점 5위를 기록하였다. 그랑프리 6차대회인 NHK트로피에서는 쇼트에서 8위, 프리에서 9위를 기록하여 합계 8위를 기록하였다. 2009-10시즌, 더욱 성장하여 두 차례 그랑프리 대회에서 각각 4위와 5위를 하였다. 이에 따라 2010년 시니어로 올라온 선수 중에서 기대받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각광받았다. 2010년 1월,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레이철 플랫에 이어 2위를 하여 동계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 자격을 얻었다. 올림픽 경기에서는 4위에 오르며 큰 돌풍을 일으켰다. 뒤이어 벌어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쇼트에서 1위에 오르며 큰 주목을 받았으나, 프리에서 몇 차례의 실수로 11위로 처져 합계 7위를 기록했다. 스케이팅 기술[편집] 2007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시상식(가운데가 나가스). 미라이 나가스는 2008년 미국 선수권에서 처음으로 3회전 러츠 + 3회전 토룹 의 컴비네이션 점프를 착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제빙상연맹(ISU)의 공인 대회에서는 3러츠+3토룹 점프를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나바우어를 한 후 3회전 살코 점프를 뛸 수 있으며, 2007-08시즌부터는 '이나바우어 상태에서 더블악셀 점프'를 하고 있다. 나가스는 3회전 러츠 점프의 도약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올바른 러츠 점프는 스케이트의 바깥쪽 엣지로 도약하여 점프를 해야 하지만, 나가스는 점프 직전에 스케이트의 안쪽 엣지로 바꾸고 점프를 하여 플러츠(Flutz)점프가 된다.[2] 그러나 2007년 5월, 국제빙상연맹(ISU)에서 강화된 규칙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점프를 엄격하게 단속한다는 규정이 수록되어, 2007-08시즌부터는 잘못된 에지의 러츠 점프에 감점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2007-08시즌에서는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서 '잘못된 점프 도약' 판정을 받았다. 스핀과 스파이럴에서는 특유의 유연성을 내세운 아름다운 포지션을 선보이고 있으며, 대부분이 레벨 4의 최고득점을 기록하고 있고 가산점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프로그램[편집] 시즌 쇼트 프로그램 프리 프로그램 갈라쇼 08-09 Pirates of the Caribbean - 캐리비안의 해적 OST 카르멘(Carmen) -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미정 07-08 I Got Rhythm - 조지 거쉰 코펠리아 - 레오 드리브 A Dream Is A Wish Your Heart Makes - Circle of Stars Don't Stop Me Now" - 퀸 06-07 Shout and Feel It - 베니 굿맨 American Quartet - 드보르자크 A Dream Is A Wish Your Heart Makes - Circle of Stars 주요 대회 출전 경력[편집] 대회/시즌 2006-2007 2007-2008 2008-2009 2009-2010 동계 올림픽 4 세계 선수권 7 미국 선수권 1 J. 1 5 2 컵 오브 차이나 5 스케이트 캐나다 4 NHK 트로피 8 스케이트 아메리카 5 주니어 세계선수권 2 3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1 주니어 그랑프리 크로아티아 1 주니어 그랑프리 미국 1 J. = 주니어(13세 이상) 같이 보기[편집] 김연아 윤예지 안도 미키 아사다 마오 캐롤라인 장 조아니 로셰트 카롤리나 코스트너 각주[편집] ↑ 아이스네트워크 사이트의 프로필 ↑ YouTube - Broadcast Yourself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미라이 나가스 공식 웹사이트 (영어) 미라이 나가스 - 국제 빙상 연맹 (영어) 미라이 나가스 - 미국 피겨 스케이팅 협회 (영어) 미라이 나가스 - 미국 올림픽 위원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라이_나가스&oldid=23864752" 분류: 1993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일본계 미국인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캘리포니아주 출신미국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0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2018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2018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미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메달리스트아케이디아 (캘리포니아주) 출신숨은 분류: 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글/2010년 1월정확성에 논란이 있는 모든 글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Ænglisc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15일 (금) 16: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미라이 나가스가 07-08시즌에 쇼트 프로그램에 사용했던 노래의 제목은?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정치인이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아들에 대해서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894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919년의 에베르트. 독일국의 국가대통령 임기 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수상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 콘스탄틴 페렌바흐 요제프 비르트 빌헬름 쿠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전임 빌헬름 2세 후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제국의 국가수상 에베르트 내각 임기 1918년 11월 ~ 1919년 2월 11일 군주 빌헬름 2세 전임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후임 필리프 샤이데만 (국가총리)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 임기 1918년 11월 9일 ~ 1918년 11월 11일 전임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후임 파울 히르슈 신상정보 출생일 1871년 02월 04일(1871-02-04) 출생지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사망일 1925년 02월 28일 (54세) 사망지 독일국 베를린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배우자 루이제 에베르트 자녀 5명 종교 천주교 냉담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871년 2월 4일 ~ 1925년 2월 28일)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1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당수가 되었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주축이 된 스파르타쿠스단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통령이 되어 베르사유 평화 조약에 조인하였다. 그는 독일이 더 진보하려고 하면 무리해서 실패할 것이고 보수 세력이 더 옛날로 되돌릴 거라 주장했다. 저서로 <전쟁과 목적> 등이 있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또한 정치인으로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시대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초기 1.2 정치활동 1.2.1 사회민주당 정치활동 1.2.2 독일 혁명기(1918~1919)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1.2.3 바이마르 대통령 시절 2 역대 선거 결과 3 참고 자료 4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초기[편집] 1871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구 제조업을 배워 마구 제조업자로서 독일 전역을 돌아다녔다. 곧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노동조합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는 수정주의적이고 점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노동조합' 사회주의를 대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투쟁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독일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을 높여서 혁명을 안 일으키게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치활동[편집] 사회민주당 정치활동[편집] 1905년에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으며, 얼마간의 물질적인 자산과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는 당의 행정체제를 혁신하면서 타자기를 도입했고 당사수색을 염려해 갖추어놓고 있지 않던 서류함들을 구비했다. 1913년 아우구스트 베벨의 뒤를 이어 사회민주당의 당수가 된 그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1914년 8월 3일에는 정부의 전쟁충당금 지출을 지지하도록 사회민주당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민족주의적 감정이 국제주의적 이상보다 더 강했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 국가의 사회당들과 다르지 않았다. 에베르트가 이끄는 다수파 사회민주당은 조국의 전쟁정책을 무조건 지지했다. 사회민주당은 평화정책을 주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부에게 강제할 만한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면서 사회민주당의 전후정책도 붕괴되었다. 에베르트의 온건한 노선으로는 사회민주당을 오랫동안 장악할 수 없었다. 1917년 3월 당내의 좌파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분당하여 전쟁충당금 지출과 전쟁정책을 격렬히 비난했으며, 사회민주당에서 이탈한 또다른 분파는 독일 공산당(KPD)을 결성했다. 사회민주당에서 떨어져나간 좌파들이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동안 에베르트의 사회민주당은 독일에서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전쟁의 와중에서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민주당(이전의 진보당) 연합, 즉 흑(黑)-적(赤)-황(黃)의 연합으로 나타났으며, 그 이름은 1848년 자유주의 혁명 기(旗)의 색깔에서 비롯되었다. 에베르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은 신정부는 바이마르 헌법을 예고하는 광범위한 헌정개혁을 통해 1918년 10월에 조직되었다. 이 신정부는 막스 폰 바덴 공(公)과 흑-적-황 연합이 주도했다. 더이상 독일은 의회민주주의 개혁을 이루기 위한 어떠한 혁명도 필요하지 않았으며, 에베르트는 혁명의 발발을 막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는 후에 막스 폰 바덴 총리에게 "나는 혁명을 증오합니다. 그것은 죄악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18년 11월 혁명은 발생했고 그것은 공화국이나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출현시키려는 의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독일인에게 있어서 혁명은 단지 하나의 목표, 즉 평화일 뿐이었다. 옳든 그르든 독일 국민은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혁명기(1918~1919)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편집] 혁명은 휴전되기 3일 전에 일어났다. 베를린에서 혁명이 성공한 날인 11월 9일 총리인 막스 폰 바덴 공은 직권을 이용하여 에베르트에게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까지도 황제를 위한 섭정체제의 구성을 희망했던 그가 실제로 총리직을 수행한 것은 단 하루였다. 11월 10일 그는 혁명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대표를 중심으로 완전한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했다. 자칭 인민대표위원회는 노동자·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면서, 인민대표위원회가 독일과 독일 공화국을 대변한다고 주장했지만, 인민대표위원회는 사실 베를린에 있는 공장과 연대(聯隊)에서 다소 자의적으로 선출된 인사의 집합에 불과했다. 에베르트는 인민대표위원회와 노동자·병사위원회의 권력을 가능한 한 빨리 자유롭게 선출된 독일 의회에 이양시키기로 결심했다. 권력에 있어서 그는 사회주의 정권보다는 자유주의적인 연립정부가 형성되기를 희망했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흑-적-황 연합은 85% 득표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에베르트의 당 동료 필리프 샤이데만이 이끄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정부는 흑-적-황 연합 세력인 3당을 기초로 구성되었다. 또한 흑-적-황 연합은 독일의 신헌법, 즉 바이마르 헌법(신헌법의 명칭은 그것이 기초된 도시의 이름에서 따옴)을 제정했다. 에베르트는 흑-적-황 연합을 형성한 3당의 지지를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바이마르 대통령 시절[편집] 1923년 빌헬름 쿠노와 에베르트(오른쪽) 에베르트와 헌법학교수이며 바이마르 헌법의 기초자인 후고 프로이스는 지역정부가 연결되어있는 라이히 체제를 없에고 그러나 구(舊)독일 국가들(Länder)은 통일국가(Einheitsstaat)를 수립하려는 에베르트와 프로이스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프로이센은 계속해서 별개의 국가(land)로 남아 있었고 당시까지도 구독일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집단과 세력의 권력은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왜냐하면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있던 초기 몇 년 간 바이마르 공화국은 에베르트의 동료였던 좌파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항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공산주의와의 내전으로 그 힘을 소진했으므로 공화국의 영구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구독일 제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민주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에베르트와 그의 동료 구스타프 노스케 국방장관은 의용단(Freikorps)을 모집했다. 대부분 구독일 제국 군대의 장교로 구성된 의용단은 공산주의자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러한 진압은 공화국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에 구장교부대는 공화국 군대인 국방군(Reichswehr)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장교계급, 구관료, 엘베 강 동쪽의 토지귀족인 융커 계급 역시 혁명에서 살아 남았으며, 그들은 대토지와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20년 6월 6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1대 의회선거에서 흑-적-황 연합은 패배했고 이후 그 패배를 만회할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선거에서 참패한 후 사회민주당은 독일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할 수 없었고 그의 권력기반도 사라져버렸다. 사회민주당의 패배는 베르사유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였는데, 당시 에베르트를 포함한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독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거의 결과로 인해 흑-적-황 연합은 자신감을 상실했으며, 그것은 비록 독일의 국력과 안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첫 결과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항한 쿠데타로 나타났다. 카프 폭동(Kapp Putsch)으로 불리는 이 쿠데타는 1920년 3월 13일에 일어났는데 쿠데타의 주동자는 베르사유 평화조약에 의해 해체하기로 되어 있던 의용단과 국방군 내의 급진적인 민족주의자 집단이었다. 쿠데타의 리더인 지방관료 볼프강 카프는 군주제의 부활을 계획했다. 쿠데타는 며칠만에 진압되었으나 에베르트가 기대했던 군대와 사회민주당 간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정부는 거의 치명적인 위기를 맞았다. 1923년 1월 독일이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배상금 조항이 규정한 석탄 인도를 이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배상금 문제의 확실한 해결을 바라던 프랑스는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대부분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에베르트는 국민적 반대와 루르 지역의 총파업을 지지했으며, 그 결과 외국의 군사지배는 저지되었다. 그러나 파업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고, 인플레이션은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는 등 독일에는 심각한 사회적·정치적 위기가 초래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에른에서 거의 권력을 잡기에 이르렀다. 루르 총파업 전날 총리에 임명된 무소속 출신 빌헬름 쿠노는 에베르트가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이었지만 위기상황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쿠노의 뒤를 이은 중도우파 인민당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이 위기를 수습했다. 처음에 슈트레제만의 임명을 주저했던 에베르트는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나중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에베르트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민주당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슈트레제만의 우익화 경향을 옹호했다. 에베르트의 이러한 태도는 흑-적-황 연합의 해체를 가져왔고, 1923년 11월 슈트레제만 총리는 사임했다. 이로써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이후 몇년 동안 독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없애버린 셈이다. 독일의 통일은 유지되었다. 인플레이션은 화폐개혁을 통해 진정되었으며 배상금문제는 미국의 배상금감축 제안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 루르 지방의 군대 철수도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파 독일인들은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다. 1924년 12월 마그데부르크 배심재판의 판사들은 최소한의 합법적 견지에서 전쟁동안 에베르트의 행위, 즉 그가 군수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한 행위에 반역죄를 선고했다. 이 재판의 와중에 에베르트는 맹장염 치료를 소홀히 하여 1925년 2월 28일 사망하였고 자신의 고향인 하이델베르크에 안장됐다. 1925년 4월 26일에는 1차대전 중 타넨베르크 전투 대승의 주역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가 2차 결선투표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19년 선거 독일의 대통령 1대 독일 사회민주당 73.1% 277표 1위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독일어) 하이델베르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기념관 (독일어) 에베르트 재단 The Battle for Berlin 1918-1919 전임바덴 공자 막시밀리안 제21대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대신1918년 11월 9일 ~ 1918년 11월 11일 후임(프로이센 자유주 주총리)파울 히르슈 전임바덴 공자 막시밀리안 제9대 독일 제국 제국수상1918년 11월 12일 ~ 1919년 2월 13일 후임(독일국 국가수상)필리프 샤이데만 전임(독일 제국 황제)빌헬름 2세 제1대 독일 국가대통령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후임(권한대행)한스 루터 vdeh독일의 대통령 (목록)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한스 루터 발터 지몬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나치 독일 국가대통령 아돌프 히틀러(지도자 겸 국가수상) 카를 되니츠 동독 국가대통령/국가평의회 주석 (요하네스 디크만) 빌헬름 피크 (요하네스 디크만) 발터 울브리히트 (프리츠 에베르트) 빌리 슈토프 에리히 호네커 에곤 크렌츠 만프레트 게를라히 (자비네 베르크만폴) 독일 연방대통령 (카를 아르놀트) 테오도어 호이스 하인리히 뤼브케 구스타프 하이네만 발터 셸 카를 카르스텐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로만 헤어초크 요하네스 라우 호르스트 쾰러 (옌스 뵈른젠) 크리스티안 불프 (호르스트 제호퍼) 요아힘 가우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괄호)는 권한대행을 의미한다. vdeh인민대표평의회(1913년 11월 10일-1919년 2월 13일) 구성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주석, 수상, SPD) 후고 하제(주석, USPD) 필리프 샤이데만(SPD) 빌헬름 디트만(USPD) 에밀 바르트(USPD) 오토 란츠베르크(SPD) 구스타프 노스케(SPD) 루돌프 비셀(SPD) vdeh독일의 총리 (목록) 독일 제국 총리(1871–1918)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레오 폰 카프리비 백작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 베른하르트 폰 뷜로 후작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백작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혁명기(1918–1919)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1919–1933)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 콘스탄틴 페렌바흐 요제프 비르트 빌헬름 쿠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빌헬름 마르크스 한스 루터 빌헬름 마르크스 헤르만 뮐러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제3제국 총리(1945)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 독일민주공화국 각료평의회 의장(1949–1990) 오토 그로테볼 빌리 슈토프 호르스트 진더만 빌리 슈토프 한스 모드로프 로타르 더 메치에어 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1949–) 콘라트 아데나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빌리 브란트 발터 셸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앙겔라 메르켈 (괄호)는 권한대행을 의미한다. vdeh프로이센의 총리프로이센 왕국 (1701년–1918년) 요한 카지미르 콜베 폰 바텐베르크 하인리히 뤼디거 폰 일겐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그룸프코프 하인리히 폰 포데빌스 게오르크 디틀로프 폰 아르님보이첸부르크 카를 빌헬름 폰 핑켄슈타인 백작 프리드리히 안톤 폰 하이니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아르님 크리스티안 폰 하우크비츠 백작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후작 크리스티안 폰 하우크비츠 백작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메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후작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폰 운트 춤 슈타인 국가남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추 도나슐로비텐 백작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후작 오토 카를 프리드리히 폰 포스 카를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빌리히 운트 로툼 백작 루트비히 구스타프 폰 틸레 아돌프 하인리히 폰 아르님보이트첸부르크 백작 고트프리트 루돌프 캄프하우젠 루돌프 폰 아우어스발트 에른스트 폰 푸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백작 아달베르트 폰 란덴베르크 오토 테오도어 폰 만토이펠 남작 카를 안톤 폰 호엔촐레른 후작 아돌프 추 호엔로헤잉겔핑겐 후작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알브레히트 폰 론 백작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레오 폰 카프리비 백작 보토 추 오일렌부르크 백작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 베르나데트 폰 뷜로프 후작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백작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프로이센 자유주 (1918년–1933년) 파울 히어슈 오토 브라운 아담 슈테거발트 오토 브라운 빌헬름 마르크스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쿠데타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독일 제3제국프로이센 자유주 (1933년–1945년) 프란츠 폰 파펜 헤르만 괴링 vdeh독일 사회민주당 역대 지도부당주석SAP 빌헬름 한젠클레퍼 & 게오르크 빌헬름 하르트만 파울 징거 & 알빈 게리슈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 & 파울 징거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 & 후고 하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후고 하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필리프 샤이데만 헤르만 뮐러 & 오토 벨스 헤르만 뮐러 & 오토 벨스 & 아르투어 크리슈피엔 오토 벨스 & 아르투어 크리슈피엔 오토 벨스 & 아르투어 크리슈피엔 & 한스 포겔 오토 벨스 & 한스 포겔 한스 포겔 오토 그로테볼 쿠르트 슈마허 에리히 올렌하우어 빌리 브란트 한스요헨 포겔 비외른 엥홀름 요하네스 라우(임시) 루돌프 샤어핑 오스카어 라퐁텐 게르하르트 슈뢰더 프란츠 뮌테페링 마티아스 플라체크 쿠르트 베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임시) 프란츠 뮌테페링 지그마어 가브리엘 마르틴 슐츠 올라프 숄츠(임시) 안드레아 날레스 명예주석 빌리 브란트(1987년- †1992년) 연방사무지도자 한스위르겐 비슈네프스키 홀거 뵈르너 에곤 바어 페터 글로츠 안네 푸흐스 카를하인츠 블레싱 귄터 페르호이겐 프란츠 뮌테페링 오트마어 슈라이너 프란츠 뮌테페링(임시) 마티아스 마흐니히 프란츠요제프 레어슈멘제 카를요제프 바세르회펠 마르틴 고르홀트 카를요제프 바세르회펠 아스트리드 클루크 율리아네 자이페르트 난치 뵈흐닝 서기장 프란츠 뮌테페링 올라프 숄츠 클라우스 우베 베네터 후베르투스 하일 안드레아 날레스 야스민 파히미 카타리나 바를라이 후베르투스 하일 라르스 클링바일 vdeh사회민주주의전구체 인문주의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공상적 사회주의 노동조합주의 1848년 혁명 정통 마르크스주의 발달 수정주의 개량주의 점진주의 민주사회주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케인스주의 복지자본주의 제3의 길 근대 유럽사회주의 정책 대의민주주의 자유권 노동권 혼합경제 토지개혁 국유화 복지국가 공정무역 환경보호 세속주의 조직 사회민주당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유럽 사회당(PES) 진보동맹(PA) 국제노동조합연합(ITUC) 인물 가타야마 데쓰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펠리페 곤살레스 자와할랄 네루 구스타프 노스케 이그나치 다신스키 토미 더글러스 유진 데브스 에밀 뒤르켐 빌럼 드레이스 리카르도 라고스 페르디난트 라살 버트런드 러셀 존 러스킨 뢰네 레바이크 잭 레이턴 넬슨 만델라 램지 맥도널드 에보 모랄레스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 다비드 벤구리온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물로 베탕쿠르 줄피카르 알리 부토 빌리 브란트 얄마르 브란팅 그루 할렘 브룬틀란 루이 블랑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버니 샌더스 토르발 스타우닝 저신다 아던 오바페미 아올로오 요프 덴 아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뷜렌트 에제비트 타게 엘란데르 클레멘트 애틀리 다니엘 오르테가 장 조레스 장군매 카를 카우츠키 찰스 케네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제러미 코빈 빔 코크 주앙 쿨라르 베티노 크락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배이뇌 탄네르 노먼 토머스 올로프 팔메 로마노 프로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밥 호크 루돌프 힐퍼딩 상징 인터내셔널가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4820796 LCCN: n85297671 ISNI: 0000 0001 2276 830X GND: 118528610 SUDOC: 030817943 BNF: cb12215693p (데이터) NKC: jn20000700466 BNE: XX132132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드리히_에베르트&oldid=23308490" 분류: 1871년 태어남1925년 죽음독일의 대통령독일 제국의 국가수상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내무장관사회민주주의자독일 사회민주당 당원하이델베르크 출신바이마르 국민회의 제헌의원독일 11월 혁명 관련자프로이센의 총리숨은 분류: 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ragoné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Yorùbá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22일 (토) 17: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할 때의 정치활동이나 일화는 어떤 게 있어?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정치인이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아들에 대해서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894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919년의 에베르트. 독일국의 국가대통령 임기 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수상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 콘스탄틴 페렌바흐 요제프 비르트 빌헬름 쿠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전임 빌헬름 2세 후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제국의 국가수상 에베르트 내각 임기 1918년 11월 ~ 1919년 2월 11일 군주 빌헬름 2세 전임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후임 필리프 샤이데만 (국가총리)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 임기 1918년 11월 9일 ~ 1918년 11월 11일 전임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후임 파울 히르슈 신상정보 출생일 1871년 02월 04일(1871-02-04) 출생지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사망일 1925년 02월 28일 (54세) 사망지 독일국 베를린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배우자 루이제 에베르트 자녀 5명 종교 천주교 냉담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871년 2월 4일 ~ 1925년 2월 28일)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1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당수가 되었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주축이 된 스파르타쿠스단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을 무너뜨리고 대통령이 되어 베르사유 평화 조약에 조인하였다. 그는 독일이 더 진보하려고 하면 무리해서 실패할 것이고 보수 세력이 더 옛날로 되돌릴 거라 주장했다. 저서로 <전쟁과 목적> 등이 있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또한 정치인으로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시대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초기 1.2 정치활동 1.2.1 사회민주당 정치활동 1.2.2 독일 혁명기(1918~1919)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1.2.3 바이마르 대통령 시절 2 역대 선거 결과 3 참고 자료 4 외부 링크 생애[편집] 생애초기[편집] 1871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구 제조업을 배워 마구 제조업자로서 독일 전역을 돌아다녔다. 곧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노동조합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는 수정주의적이고 점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노동조합' 사회주의를 대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투쟁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독일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을 높여서 혁명을 안 일으키게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치활동[편집] 사회민주당 정치활동[편집] 1905년에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으며, 얼마간의 물질적인 자산과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는 당의 행정체제를 혁신하면서 타자기를 도입했고 당사수색을 염려해 갖추어놓고 있지 않던 서류함들을 구비했다. 1913년 아우구스트 베벨의 뒤를 이어 사회민주당의 당수가 된 그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1914년 8월 3일에는 정부의 전쟁충당금 지출을 지지하도록 사회민주당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민족주의적 감정이 국제주의적 이상보다 더 강했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 국가의 사회당들과 다르지 않았다. 에베르트가 이끄는 다수파 사회민주당은 조국의 전쟁정책을 무조건 지지했다. 사회민주당은 평화정책을 주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부에게 강제할 만한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면서 사회민주당의 전후정책도 붕괴되었다. 에베르트의 온건한 노선으로는 사회민주당을 오랫동안 장악할 수 없었다. 1917년 3월 당내의 좌파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분당하여 전쟁충당금 지출과 전쟁정책을 격렬히 비난했으며, 사회민주당에서 이탈한 또다른 분파는 독일 공산당(KPD)을 결성했다. 사회민주당에서 떨어져나간 좌파들이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동안 에베르트의 사회민주당은 독일에서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전쟁의 와중에서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민주당(이전의 진보당) 연합, 즉 흑(黑)-적(赤)-황(黃)의 연합으로 나타났으며, 그 이름은 1848년 자유주의 혁명 기(旗)의 색깔에서 비롯되었다. 에베르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은 신정부는 바이마르 헌법을 예고하는 광범위한 헌정개혁을 통해 1918년 10월에 조직되었다. 이 신정부는 막스 폰 바덴 공(公)과 흑-적-황 연합이 주도했다. 더이상 독일은 의회민주주의 개혁을 이루기 위한 어떠한 혁명도 필요하지 않았으며, 에베르트는 혁명의 발발을 막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는 후에 막스 폰 바덴 총리에게 "나는 혁명을 증오합니다. 그것은 죄악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18년 11월 혁명은 발생했고 그것은 공화국이나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출현시키려는 의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독일인에게 있어서 혁명은 단지 하나의 목표, 즉 평화일 뿐이었다. 옳든 그르든 독일 국민은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혁명기(1918~1919)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편집] 혁명은 휴전되기 3일 전에 일어났다. 베를린에서 혁명이 성공한 날인 11월 9일 총리인 막스 폰 바덴 공은 직권을 이용하여 에베르트에게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까지도 황제를 위한 섭정체제의 구성을 희망했던 그가 실제로 총리직을 수행한 것은 단 하루였다. 11월 10일 그는 혁명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대표를 중심으로 완전한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했다. 자칭 인민대표위원회는 노동자·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면서, 인민대표위원회가 독일과 독일 공화국을 대변한다고 주장했지만, 인민대표위원회는 사실 베를린에 있는 공장과 연대(聯隊)에서 다소 자의적으로 선출된 인사의 집합에 불과했다. 에베르트는 인민대표위원회와 노동자·병사위원회의 권력을 가능한 한 빨리 자유롭게 선출된 독일 의회에 이양시키기로 결심했다. 권력에 있어서 그는 사회주의 정권보다는 자유주의적인 연립정부가 형성되기를 희망했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흑-적-황 연합은 85% 득표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에베르트의 당 동료 필리프 샤이데만이 이끄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정부는 흑-적-황 연합 세력인 3당을 기초로 구성되었다. 또한 흑-적-황 연합은 독일의 신헌법, 즉 바이마르 헌법(신헌법의 명칭은 그것이 기초된 도시의 이름에서 따옴)을 제정했다. 에베르트는 흑-적-황 연합을 형성한 3당의 지지를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바이마르 대통령 시절[편집] 1923년 빌헬름 쿠노와 에베르트(오른쪽) 에베르트와 헌법학교수이며 바이마르 헌법의 기초자인 후고 프로이스는 지역정부가 연결되어있는 라이히 체제를 없에고 그러나 구(舊)독일 국가들(Länder)은 통일국가(Einheitsstaat)를 수립하려는 에베르트와 프로이스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프로이센은 계속해서 별개의 국가(land)로 남아 있었고 당시까지도 구독일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집단과 세력의 권력은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왜냐하면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있던 초기 몇 년 간 바이마르 공화국은 에베르트의 동료였던 좌파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항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공산주의와의 내전으로 그 힘을 소진했으므로 공화국의 영구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구독일 제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민주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에베르트와 그의 동료 구스타프 노스케 국방장관은 의용단(Freikorps)을 모집했다. 대부분 구독일 제국 군대의 장교로 구성된 의용단은 공산주의자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러한 진압은 공화국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에 구장교부대는 공화국 군대인 국방군(Reichswehr)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장교계급, 구관료, 엘베 강 동쪽의 토지귀족인 융커 계급 역시 혁명에서 살아 남았으며, 그들은 대토지와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20년 6월 6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1대 의회선거에서 흑-적-황 연합은 패배했고 이후 그 패배를 만회할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선거에서 참패한 후 사회민주당은 독일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할 수 없었고 그의 권력기반도 사라져버렸다. 사회민주당의 패배는 베르사유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였는데, 당시 에베르트를 포함한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독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거의 결과로 인해 흑-적-황 연합은 자신감을 상실했으며, 그것은 비록 독일의 국력과 안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첫 결과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항한 쿠데타로 나타났다. 카프 폭동(Kapp Putsch)으로 불리는 이 쿠데타는 1920년 3월 13일에 일어났는데 쿠데타의 주동자는 베르사유 평화조약에 의해 해체하기로 되어 있던 의용단과 국방군 내의 급진적인 민족주의자 집단이었다. 쿠데타의 리더인 지방관료 볼프강 카프는 군주제의 부활을 계획했다. 쿠데타는 며칠만에 진압되었으나 에베르트가 기대했던 군대와 사회민주당 간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정부는 거의 치명적인 위기를 맞았다. 1923년 1월 독일이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배상금 조항이 규정한 석탄 인도를 이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배상금 문제의 확실한 해결을 바라던 프랑스는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대부분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에베르트는 국민적 반대와 루르 지역의 총파업을 지지했으며, 그 결과 외국의 군사지배는 저지되었다. 그러나 파업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고, 인플레이션은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는 등 독일에는 심각한 사회적·정치적 위기가 초래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에른에서 거의 권력을 잡기에 이르렀다. 루르 총파업 전날 총리에 임명된 무소속 출신 빌헬름 쿠노는 에베르트가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이었지만 위기상황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쿠노의 뒤를 이은 중도우파 인민당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이 위기를 수습했다. 처음에 슈트레제만의 임명을 주저했던 에베르트는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나중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에베르트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민주당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슈트레제만의 우익화 경향을 옹호했다. 에베르트의 이러한 태도는 흑-적-황 연합의 해체를 가져왔고, 1923년 11월 슈트레제만 총리는 사임했다. 이로써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이후 몇년 동안 독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없애버린 셈이다. 독일의 통일은 유지되었다. 인플레이션은 화폐개혁을 통해 진정되었으며 배상금문제는 미국의 배상금감축 제안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 루르 지방의 군대 철수도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파 독일인들은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다. 1924년 12월 마그데부르크 배심재판의 판사들은 최소한의 합법적 견지에서 전쟁동안 에베르트의 행위, 즉 그가 군수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한 행위에 반역죄를 선고했다. 이 재판의 와중에 에베르트는 맹장염 치료를 소홀히 하여 1925년 2월 28일 사망하였고 자신의 고향인 하이델베르크에 안장됐다. 1925년 4월 26일에는 1차대전 중 타넨베르크 전투 대승의 주역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가 2차 결선투표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19년 선거 독일의 대통령 1대 독일 사회민주당 73.1% 277표 1위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독일어) 하이델베르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기념관 (독일어) 에베르트 재단 The Battle for Berlin 1918-1919 전임바덴 공자 막시밀리안 제21대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대신1918년 11월 9일 ~ 1918년 11월 11일 후임(프로이센 자유주 주총리)파울 히르슈 전임바덴 공자 막시밀리안 제9대 독일 제국 제국수상1918년 11월 12일 ~ 1919년 2월 13일 후임(독일국 국가수상)필리프 샤이데만 전임(독일 제국 황제)빌헬름 2세 제1대 독일 국가대통령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후임(권한대행)한스 루터 vdeh독일의 대통령 (목록)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한스 루터 발터 지몬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나치 독일 국가대통령 아돌프 히틀러(지도자 겸 국가수상) 카를 되니츠 동독 국가대통령/국가평의회 주석 (요하네스 디크만) 빌헬름 피크 (요하네스 디크만) 발터 울브리히트 (프리츠 에베르트) 빌리 슈토프 에리히 호네커 에곤 크렌츠 만프레트 게를라히 (자비네 베르크만폴) 독일 연방대통령 (카를 아르놀트) 테오도어 호이스 하인리히 뤼브케 구스타프 하이네만 발터 셸 카를 카르스텐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로만 헤어초크 요하네스 라우 호르스트 쾰러 (옌스 뵈른젠) 크리스티안 불프 (호르스트 제호퍼) 요아힘 가우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괄호)는 권한대행을 의미한다. vdeh인민대표평의회(1913년 11월 10일-1919년 2월 13일) 구성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주석, 수상, SPD) 후고 하제(주석, USPD) 필리프 샤이데만(SPD) 빌헬름 디트만(USPD) 에밀 바르트(USPD) 오토 란츠베르크(SPD) 구스타프 노스케(SPD) 루돌프 비셀(SPD) vdeh독일의 총리 (목록) 독일 제국 총리(1871–1918)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레오 폰 카프리비 백작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 베른하르트 폰 뷜로 후작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백작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혁명기(1918–1919)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1919–1933)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 콘스탄틴 페렌바흐 요제프 비르트 빌헬름 쿠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빌헬름 마르크스 한스 루터 빌헬름 마르크스 헤르만 뮐러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제3제국 총리(1945)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 독일민주공화국 각료평의회 의장(1949–1990) 오토 그로테볼 빌리 슈토프 호르스트 진더만 빌리 슈토프 한스 모드로프 로타르 더 메치에어 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1949–) 콘라트 아데나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빌리 브란트 발터 셸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앙겔라 메르켈 (괄호)는 권한대행을 의미한다. vdeh프로이센의 총리프로이센 왕국 (1701년–1918년) 요한 카지미르 콜베 폰 바텐베르크 하인리히 뤼디거 폰 일겐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그룸프코프 하인리히 폰 포데빌스 게오르크 디틀로프 폰 아르님보이첸부르크 카를 빌헬름 폰 핑켄슈타인 백작 프리드리히 안톤 폰 하이니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아르님 크리스티안 폰 하우크비츠 백작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후작 크리스티안 폰 하우크비츠 백작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메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후작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폰 운트 춤 슈타인 국가남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추 도나슐로비텐 백작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후작 오토 카를 프리드리히 폰 포스 카를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빌리히 운트 로툼 백작 루트비히 구스타프 폰 틸레 아돌프 하인리히 폰 아르님보이트첸부르크 백작 고트프리트 루돌프 캄프하우젠 루돌프 폰 아우어스발트 에른스트 폰 푸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백작 아달베르트 폰 란덴베르크 오토 테오도어 폰 만토이펠 남작 카를 안톤 폰 호엔촐레른 후작 아돌프 추 호엔로헤잉겔핑겐 후작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알브레히트 폰 론 백작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레오 폰 카프리비 백작 보토 추 오일렌부르크 백작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 베르나데트 폰 뷜로프 후작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백작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프로이센 자유주 (1918년–1933년) 파울 히어슈 오토 브라운 아담 슈테거발트 오토 브라운 빌헬름 마르크스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쿠데타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독일 제3제국프로이센 자유주 (1933년–1945년) 프란츠 폰 파펜 헤르만 괴링 vdeh독일 사회민주당 역대 지도부당주석SAP 빌헬름 한젠클레퍼 & 게오르크 빌헬름 하르트만 파울 징거 & 알빈 게리슈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 & 파울 징거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 & 후고 하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후고 하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필리프 샤이데만 헤르만 뮐러 & 오토 벨스 헤르만 뮐러 & 오토 벨스 & 아르투어 크리슈피엔 오토 벨스 & 아르투어 크리슈피엔 오토 벨스 & 아르투어 크리슈피엔 & 한스 포겔 오토 벨스 & 한스 포겔 한스 포겔 오토 그로테볼 쿠르트 슈마허 에리히 올렌하우어 빌리 브란트 한스요헨 포겔 비외른 엥홀름 요하네스 라우(임시) 루돌프 샤어핑 오스카어 라퐁텐 게르하르트 슈뢰더 프란츠 뮌테페링 마티아스 플라체크 쿠르트 베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임시) 프란츠 뮌테페링 지그마어 가브리엘 마르틴 슐츠 올라프 숄츠(임시) 안드레아 날레스 명예주석 빌리 브란트(1987년- †1992년) 연방사무지도자 한스위르겐 비슈네프스키 홀거 뵈르너 에곤 바어 페터 글로츠 안네 푸흐스 카를하인츠 블레싱 귄터 페르호이겐 프란츠 뮌테페링 오트마어 슈라이너 프란츠 뮌테페링(임시) 마티아스 마흐니히 프란츠요제프 레어슈멘제 카를요제프 바세르회펠 마르틴 고르홀트 카를요제프 바세르회펠 아스트리드 클루크 율리아네 자이페르트 난치 뵈흐닝 서기장 프란츠 뮌테페링 올라프 숄츠 클라우스 우베 베네터 후베르투스 하일 안드레아 날레스 야스민 파히미 카타리나 바를라이 후베르투스 하일 라르스 클링바일 vdeh사회민주주의전구체 인문주의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공상적 사회주의 노동조합주의 1848년 혁명 정통 마르크스주의 발달 수정주의 개량주의 점진주의 민주사회주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케인스주의 복지자본주의 제3의 길 근대 유럽사회주의 정책 대의민주주의 자유권 노동권 혼합경제 토지개혁 국유화 복지국가 공정무역 환경보호 세속주의 조직 사회민주당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유럽 사회당(PES) 진보동맹(PA) 국제노동조합연합(ITUC) 인물 가타야마 데쓰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펠리페 곤살레스 자와할랄 네루 구스타프 노스케 이그나치 다신스키 토미 더글러스 유진 데브스 에밀 뒤르켐 빌럼 드레이스 리카르도 라고스 페르디난트 라살 버트런드 러셀 존 러스킨 뢰네 레바이크 잭 레이턴 넬슨 만델라 램지 맥도널드 에보 모랄레스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 다비드 벤구리온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물로 베탕쿠르 줄피카르 알리 부토 빌리 브란트 얄마르 브란팅 그루 할렘 브룬틀란 루이 블랑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버니 샌더스 토르발 스타우닝 저신다 아던 오바페미 아올로오 요프 덴 아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뷜렌트 에제비트 타게 엘란데르 클레멘트 애틀리 다니엘 오르테가 장 조레스 장군매 카를 카우츠키 찰스 케네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제러미 코빈 빔 코크 주앙 쿨라르 베티노 크락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배이뇌 탄네르 노먼 토머스 올로프 팔메 로마노 프로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밥 호크 루돌프 힐퍼딩 상징 인터내셔널가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4820796 LCCN: n85297671 ISNI: 0000 0001 2276 830X GND: 118528610 SUDOC: 030817943 BNF: cb12215693p (데이터) NKC: jn20000700466 BNE: XX132132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리드리히_에베르트&oldid=23308490" 분류: 1871년 태어남1925년 죽음독일의 대통령독일 제국의 국가수상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내무장관사회민주주의자독일 사회민주당 당원하이델베르크 출신바이마르 국민회의 제헌의원독일 11월 혁명 관련자프로이센의 총리숨은 분류: 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ragoné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Hornjoserbsce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do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پنجابیپښتوPortuguêsRuna Simi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Српск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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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문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문고(申聞鼓)는 1402년(태종 2년) 특수청원(特殊請願)·상소(上訴)를 위하여 대궐 밖 문루(門樓)에 달았던 북이다. 목차 1 개설 2 제도의 운영 3 변천 4 각주 개설[편집] 조선에서는 상소·고발의 제도는 법제화되어 있었으나 신문고는 그 최후의 항고(抗告) 시설로 임금의 직속인 의금부 당직청(當直廳)에서 주관, 북을 치는 자의 소리를 임금이 직접 듣고 처리하도록 하였다. 즉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 주장관(主掌官),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여 사헌부에 고소하고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 신문고를 두드리게 하였는데, 이는 형식상 조선에서 민의상달(民意上達)의 대표적인 제도였다. 제도의 운영[편집] 그러나 신문고의 사용에는 제한이 있어서 이서(吏胥)·복예(僕隸)가 그의 상관을 고발하거나 품관(品官)·향리(鄕吏)·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혹은 남을 사주(使嗾)하여 고발케 하는 자는 오히려 벌을 주었으며 오직 종사(宗社)에 관계되거나 불법으로 살인하는 자 및 자기에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서 소원을 받아들였다. 신문고의 설치는 조선 초 관리들의 권리 남용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한편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일까지 신문고를 사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그 후 신문고 사용의 제한을 엄격히 하여 《속대전》에 따르면 사건사(四件事)[1]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토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문고의 이용은 주로 서울의 관리들에게만 한정되었으며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일반 상인(常人)이나 노비 또는 지방 관민에게는 효용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문고의 효용은 민의창달에 결부하였다기보다 조선 초기에 특수한 신분층에 은총을 주고 한편으로는 관료의 발호(跋扈)를 억제하는 데 성과가 있었다. 변천[편집] 그 후 연산군 때부터 오랫동안 신문고 제도가 폐지되었으나 1771년(영조 47년) 11월에 다시 설치하고 병조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각주[편집] ↑ 자신에 관한 일, 부자에 관한 일, 적첩(嫡妾)에 관한 일, 양천(良賤)에 관한 일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문고&oldid=19234144" 분류: 조선조선의 정치조선의 문화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8월 7일 (월) 05: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실제로 신문고는 누구에게만 한정되었을까? |
최한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한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해정 최한수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한수 崔漢秀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47년 6월 25일(1947-06-25) (72세)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충청남도 예산학력 건국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직업 정치학자 정치평론가 저술가 정치가 대학 교수 번역가 前 아나운서 前 방송 기자경력 서울 여의도연구원 정책고문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배우자 이춘욱자녀 슬하 4녀종교 천주교(세례명: 이시도로)정당 무소속 최한수(崔漢秀, 1947년 6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대학 교수, 정치학자, 정치평론가, 저술가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아호(雅號)는 해정(海井)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경력 4 저술 4.1 저서 4.2 번역서 4.3 논문 5 출연작 5.1 텔레비전 프로그램 5.2 라디오 프로그램 6 수상 7 역대 선거 결과 8 참고 자료 생애[편집]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성장하였다. 1973년 CBS 기독교방송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하였으며 2년 후 1975년 CBS 기독교방송 기자로 전향하였고 5년 후 1980년에는 CBS 기독교방송에서 퇴사와 동시에 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기자로 이적 입사하였으며 3년 후 1983년 2월에는 KBS 한국방송공사 기자 직위에서 퇴임하였다. 이후 프리랜서 저술가와 정치학자 겸 정치평론가와 정치가 겸 대학 교수로 활약을 하였으며 그 와중에 서울 송파에서 새누리당 전신인 신한국당 및 한나라당 후보로 제15대 및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두번에 걸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정무특보, 그리고 무소속 이회창 대통령후보 정무특보, 이명박대통령경선후보특보, 박근혜 대선후보특보를 역임했다. 이회창 총재와 자유선진당을 창당하면서 창당조직팀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서울 여의도연구원 정책고문 겸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학력[편집] 1960년 예산국민학교 졸업 1963년 경북중학교 졸업 1966년 홍성고등학교 졸업 1973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197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88년 미국 코네티컷 주립 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과 정치학 석사 1993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정치학 박사 경력[편집] 1973년 CBS 기독교방송 아나운서 1975년 CBS 기독교방송 기자 전향 1980년 CBS 기독교방송 기자 직위 퇴임 1980년 KBS 한국방송공사 기자 이적 1983년 KBS 한국방송공사 기자 직위 퇴임 1983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2012년 퇴임) 1986년 미국 코네티컷 주립 대학교 객원교수(1988년 이임) 1988년 건국대학교 건대신문 편집위원장(1990년 퇴임) 1989년 동아정경연구회 부이사장(1990년 동아정경연구회 이사장 승진) 1990년 경찰대학교 강사(1995년 퇴임) 1990년 동아정경연구회 이사장(1995년 퇴임) 1991년 기독교방송 객원해설위원(1994년 퇴임) 1992년 한국정치학회 상무이사(1993년 퇴임) 1993년 한국여성개발원 강사(1995년 퇴임) 1994년 한국정치학회 이사(1995년 퇴임) 1994년 한국방송공사 금요칼럼 담당 1994년 의회정치연구회 총무이사(1999년 퇴임) 1994년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이사(2003년 퇴임) 1994년 건국대학교 학생처 처장(1995년 퇴임) 1994년 정무장관실 정책자문위원(1995년 퇴임) 1995년 여성정책심의실무위원회 민간위원(1996년 퇴임) 1995년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1995년 이임) 1995년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교육홍보분과위원회 간사(1996년 퇴임) 1995년 다리지 편집위원(1996년 퇴임) 1996년 신한국당 서울송파병지구당 위원장(1997년 이임) 1996년 신한국당 상임위원(1997년 퇴임) 1996년 서울 송파시민포럼 의장(2000년 퇴임) 1997년 한나라당 정치개혁특별위원회자문단장(1997년 이임) 1997년 한나라당 상임위원(2002년 전임) 1998년 건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2000년 퇴임) 1998년 건국대학교 정치행정학부 부장(1998년 이임) 1998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학장(1998년 이임) 1999년 한국정치학회 상임이사(2000년 퇴임) 1999년 한국자유총연맹 민주시민교육센터 특강위원(2003년 퇴임) 1999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학장(2000년 퇴임) 1999년 건국대학교 국제대학원 원장(2000년 퇴임) 1999년 한나라당 이회창총재특별보좌역(2002년 퇴임) 2000년 한나라당 서울 송파을지구당 위원장(2001년 퇴임) 2001년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원장(2002년 퇴임) 2002년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위원(2002년 이임)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정부특보및 미디어대책위원회 팀장(2002년 퇴임) 2007년 무소속 이회창 대통령 후보 특보 2008년 자유선진당 창당조직단 단장 2008년 자유선진당 전략기획위원회 위원장 2008년 자유선진당 전임위원(2011년 퇴임) 2011년 선진통일당 전임위원(2012년 퇴임) 2012년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2012년 새누리당 특임위원(2013년 퇴임) 2012년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 특보(2013년 퇴임) 여의도연구원 정책고문 저술[편집] 저서[편집] 현대 비교정치 이데올로기,현학서관,1990 미국 정당정치론(역),현학서관,1990 Modern Political Parties,1990 현대정당론,을유문화사,1993 정치학 연구 방법론,대왕사,1993 현실 정치와 교과서 정치,도서출판 대정진,1994 민주주의와 민주정치,대왕사,1994 한국정치의 새 도전,도서출판 대정진,1995 어느 정치학교수의 산과 삶의 언어들,도서출판 신유,1996 한국 선거정치론,대왕사,1996 한국 정당정치론,법문사,1996 한국의 정치,대왕사,1997 여성과 정치(공저),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1997 한국정치의 이해,건국대 출판부,1999 한국 정당정치 변동론,세명서관,1999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체제관리 방안(공저),1999 현대사회와 여론(공저),건국대출판부,2000 자유와 평등-민주주의의 이상과 조건,동명사,2003 대통령 수상 준대통령-국가의 권력구조, 인간사랑, 2007 한국민주주의의 대전환,명인문화사, 2011 종교의 정치학, 명인문화사, 2012 인간석가모니와 신의 불교, 씨 아이 알, 2013 번역서[편집] 사춘기자녀에 대한 부모의 헛사랑과 참사랑 미국정당정치론, 신유 ,1994 현대비교정치이데올로기, 신유, 1994 논문[편집] A Review of the Political Party,건국대학술지,1989 정당체계에 관한 소고,현대사회,1989 한국정당의 기능적 특성,사상과 정책,1990 정치적 반대와 야당,현대사회,1991 지방의회 의원의 태도 및 활동에 관한 연구,건국대 사회과학 제17집,1993 세계화시대의 권력구조,한국정치학회,1994 한국 여.야 정당의 갈등배경에 관한 일고,건국대학술지,1994 6.27지방선거의 평가,한국정치학회,1995 한국 정당의 합당에 관한 연구-합당과 선거시기 및 정당세력을 중심으로,건국대 사회과학논총 제3집(통권22호),1998 출연작[편집] 텔레비전 프로그램[편집] 2015년 EBS 《신년 특집 토론 대한민국 교육을 말한다》 라디오 프로그램[편집] 2015년 EBS FM 《EBS 책 읽는 라디오 낭독 시리즈》 수상[편집] 1995년 정무장관실 여성신문사 주최 평등부부상 특별상 2012년 대한민국 근정포장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5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송파구 병) 15대 신한국당 31.95% 29,586표 2위 낙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서울 송파구 을) 16대 한나라당 41.58% 51,920표 2위 낙선 참고 자료[편집] Daum 인물정보 - 최한수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조인스 인물정보 - 최한수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네이버 인물정보 - 최한수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최한수&oldid=24324800" 분류: 1947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예산군 출신해주 최씨대한민국의 기자대한민국의 정치학자1973년 데뷔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프리랜서 아나운서대한민국의 저술가대한민국의 번역가예산초등학교 동문경운중학교 (대구) 동문홍성고등학교 동문건국대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건국대학교 대학원 동문건국대학교 교수숭실대학교 교수경찰대학 교수신한국당 당원선진통일당의 정치인옛 자유한국당의 정치인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불교 이탈자21세기 대한민국 사람개신교도 이탈자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9일 (수) 23:3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최한수가 졸업한 중학교는 어디인가? |
정이품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이품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은 속리 정이품송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보은 속리 정이품송(報恩 俗離 正二品松)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종목 천연기념물 제103호 (1962년 12월 7일 지정)수량 1주소유 건설부 외위치 보은 속리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17-3번지좌표 북위 36° 31′ 3″ 동경 127° 48′ 55″ / 북위 36.51750° 동경 127.81528° / 36.51750; 127.81528좌표: 북위 36° 31′ 3″ 동경 127° 48′ 55″ / 북위 36.51750° 동경 127.81528° / 36.51750; 127.81528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보은 속리 정이품송(報恩 俗離 正二品松)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있는 소나무이다. 1962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03호 '속리의 정이품송'(俗離의 正二品松)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목차 1 개요 2 참고 도서 3 같이 보기 4 각주 5 참고 자료 개요[편집]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참고 도서[편집] 문화재청, 《문화재이야기여행 천연기념물 100선》, pp126~130, 2016-03-31 같이 보기[편집] 소나무 각주[편집] ↑ 문화재청고시제2008-30호 Archived 2017년 9월 21일 - 웨이백 머신,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 명승) 지정명칭 변경》, 문화재청장, 관보 제16730호, 17-46면, 2008-04-15 참고 자료[편집] 정이품송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정이품송&oldid=22210944" 분류: 충청북도의 천연기념물보은군의 문화재유명한 소나무조선 세조속리산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Bahasa Indonesia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5일 (수) 01: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80년대 정이품송을 솔잎혹파리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설치한 것은 무엇인가? |
상호작용은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상호작용은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NGC 3169 (왼쪽) 와 NGC 3166 (오른쪽) 은 두 구성원 각각 중력적 영향으로 서로를 뒤틀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가까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라 실라 천문대의 MPG/ESO 2.2 미터 망원경에 의해 촬영되었다. 상호작용은하(相互作用銀河, interacting galaxy)[1]는 서로의 중력장 내에 위치하여 섭동을 야기하는 은하다. 작은 상호작용의 예로는 주인은하의 나선팔에 대한 위성은하의 섭동이 있다. 큰 상호작용의 예로는 은하충돌이 있다. 목차 1 위성은하와 상호작용 2 은하간 충돌 3 은하 잡아먹기 4 은하 학대 5 주목할 만한 상호작용 은하 6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의 충돌 7 같이 보기 8 참조 9 외부 링크 위성은하와 상호작용[편집] 위성은하와 상호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은하는 흔하다. 위성은하의 중력은 주인은하의 나선팔을 끌어 당긴다. 또 주인은하의 내부로 침투할 수도 있다(예를 들면 궁수자리 왜소 타원 은하). 이 경우는 미미한 별의 형성을 야기할 수 있다. 은하간 충돌[편집] 충돌하는 은하는 은하 진화에서 흔하다. 은하의 내부는 물질의 분포가 매우 듬성듬성하기 때문에, 은하간 충돌은 엄밀히 말하면 보통의 의미에서의 충돌이 아니라 중력 상호작용이다. 충돌은 병합을 불러온다. 병합의 경우는 충돌 후에 계속되는 이동을 할만큼 충분한 운동량을 가지지 못하는 두 은하가 충돌할 때 발생한다. 또, 서로 물러났다 서로를 통과함을 반복한 후에 결국 합쳐져 하나의 은하를 형성할 수도 있다. 충돌하는 은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매우 크다면, 그 은하는 병합 후에도 대체로 온전하게 남을 것이다. 따라서 작은 은하가 뜯겨져 나가가고 거대한 은하의 일부가 될 동안 거대한 은하는 이전과 거의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관통은 통과 후에 두 은하의 물질과 모양을 대체적으로 유지하여 병합보다는 은하의 모양의 변화가 덜하다. 현재 컴퓨터를 통해 중력, 가스 손실, 별 형성과 피드백을 포함하는 현실적인 물리현상을 이용한 은하간 충돌에 대한 모의 실험이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 운동마찰은 궤도의 초기 상대 에너지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 충돌 할지, 하지 않을지 결정되는 두 은하를 감속시킨다. 모의 실험된 은하의 충돌에 관한 라이브러리는 파리 천문대의 웹사이트 GALMER 에서 찾을 수 있다.[2] 은하쌍 Zw I 136.[3] ESO 576-69는 과거에 나선 은하의 핵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4] 소용돌이 은하와 그 위성 은하인 불규칙 은하 NGC 5195 생쥐 은하 미디어 재생 이 시뮬레이션은 거대한 블랙홀을 품고 있는 두 나선 은하의 충돌을 보여준다. 은하 잡아먹기[편집] 은하 잡아먹기(galactic canibalism)는 거대한 은하가 동반은하와 조석에 의한 중력 상호작용을 통해 동반은하를 병합하여, 더 크고 흔히 불규칙한 은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둘 이상 은하의 중력적 병합의 가장 흔한 결과는 하나의 불규칙 은하이다. 타원은하 역시 그 결과가 될 수 있긴 하다. 우리은하와 대마젤란 은하 및 소마젤란 은하는 은하 잡아먹기가 현재 이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왜소은하로부터 활꼴을 그리며 우리은하로 중력에 의해 이끌리는 수소의 흐름이 이 이론의 증거로 간주된다. 은하 학대[편집] 은하 학대(galaxy harassment)는 은하가 높은 상대속도로 움직이고 은하단의 은하의 개수밀도가 높기 때문에 은하단 내에서 다른 계와의 잦은 근접으로 시달리고 있는, 처녀자리 은하단이나 머리털자리 은하단과 같은 부유은하단 내에서 발생하는 어두운 은하와 밝은 은하 사이의 상호작용의 한 유형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러한 상호작용은 영향을 받는 계를 불안정한 막대나선은하로 변화시키고 뒤이어 폭발적 항성생성을 초래하며, 더 많은 접근이 일어나면 각운동량의 손실과 가스의 가열을 야기한다. 그 결과는 어두운 나선은하의 왜소구형은하 및 왜소타원은하로의 변화이다.[5] 이 가설의 증거는 처녀자리 은하단의 조기형 왜소은하에 대한 연구와 이와 같은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한 원반계였음을 시사하는 원반과 나선팔과 같은 그들의 구조의 발견이 있다.[6] 주목할 만한 상호작용 은하[편집] 이름 형태 거리(백만 광년) 등급 설명 우리은하와 LMC 및 SMC SBc/SB(s)m/SB(s)m pec 0 주인은하와 위성은하의 상호작용 소용돌이 은하 (M51) SAc (SB0-a) 37 +8.4 주인은하와 위성은하의 상호작용 NGC 2207과 IC 2163 SAc/SAbc 114 +11 은하충돌의 첫 번째 단계를 거치고 있는 두 은하 생쥐 은하 (IC 819/20) S0/SB(s)ab 300 +13.5 은하충돌의 두 번째 단계를 거치고 있는 두 은하 NGC 1097 SB(s)bc (E6) 45 +9.5 주인은하와 위성은하의 상호작용 더듬이 은하 (NGC 4038/9) SAc/SBm 45 +10.3 은하충돌의 세 번째 단계를 거치고 있는 두 은하 NGC 520 S 100 +11.3 은하충돌의 세 번째 단계를 거치고 있는 두 은하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의 충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 은하의 충돌입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약 45억 년 후에 충돌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충돌로 두 나선은하의 병합으로 타원은하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8] 또는 거대한 원반은하일 수도 있다.[9] 같이 보기[편집] 은하 조석 은하 병합 NGC 7318 소용돌이 은하 참조[편집] ↑ 한국천문학회 편, 《천문학용어집》 222쪽 좌단 28째줄 ↑ GALMER 2010년 3월 27일 ↑ “은하 수프”. 《이번 주의 ESA/허블 사진》. 2014년 8월 18일에 확인함. ↑ “은하충돌의 지저분한 결과”. 《ESA/Hubble Picture of the Week》. 2013년 5월 29일에 확인함. ↑ 은하 학대 ↑ 밝은 조기형 왜소은하에 숨겨진 나선팔과 막대 특징에 대한 많은 증거 ↑ Hazel Muir, "태양과 지구를 '쫓아내는' 은하 병합," 뉴사이언티스트 2007년 5월 4일 Archived 2008년 10월 10일 - 웨이백 머신 ↑ 천문학, 2008년 6월호, 28쪽, Abraham Loeb와 T.J.Cox ↑ Junko Ueda 등. “병합 잔해 내의 차가운 분자가스. I. 분자 가스 원반의 형성”. 《The Astrophysical Journal Supplement Series》 214 (1). doi:10.1088/0067-0049/214/1/1. 외부 링크[편집] 은하충돌 은하 잡아먹기 은하충돌 시뮬레이션 GALMER: 은하 병합 시뮬레이션 vdeh은하형태 원반은하 왜소은하 왜소타원 왜소불규칙 왜소구형 왜소나선 타원은하 불규칙은하 막대 렌즈형은하 막대 정상 고리은하 극고리 나선은하 막대 양털 거대구조 중간 마젤란 정상 cD은하 구조 초대질량 블랙홀 팽대부 막대부 원반 얇은 원반 두꺼운 원반 나선팔 은하헤일로 암흑 물질 헤일로 원시은하 활동은하 상대론적 제트 LINER 전파은하 세이퍼트 은하 블레이자 BL OVV 퀘이사 활발은하 LAE LIRG 폭발적 항성생성 은하 BCD 완두 상호작용 성류 상호작용은하 병합 폭발적 항성생성 은하 위성은하 은하군 및 은하단 BCG 화석은하군 초은하단 은하 필라멘트 낱은하 공동 은하 거시공동 은하조석 목록 가까운 은하 퀘이사 나선은하 같이 보기 암흑은하 희미한 청색은하 은하의 형성 및 진화 은하간 먼지 은하간 항성 은하간 여행 분류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상호작용은하&oldid=23026066" 분류: 상호작용은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हिन्दी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ëtzebuergeschLatviešu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lovenčina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5일 (목) 18: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은하의 충돌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납니까? |
기아 리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아 리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기아 리오(Kia Rio)는 기아자동차에서 프라이드와 아벨라의 통합 후속 차종으로 출시한 소형차이다. 하지만, 출시 된 지 20년이 된 요즘 보기가 힘들어졌다. 목차 1 1세대(BC) 1.1 리오(1999년 11월~2002년 8월) 1.1.1 제원 1.1.2 리오 1.2 리오 SF(2002년 8월~2005년 4월) 1.2.1 제원 1.2.2 리오 SF 2 각주 3 외부 링크 1세대(BC)[편집] 리오(1999년 11월~2002년 8월)[편집] 1996년 9월에 컨셉트를 잡고, 이듬해인 1997년 2월에 프로젝트 명 B-Ⅲ로 개발에 들어가 총 33개월의 개발 기간 동안 1,100억 원의 연구 개발 및 부품 구매비와 1,800억원의 투자 비용이 든 큰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총 241대의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테스트를 거쳤고,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만큼 많은 차량을 벤치마킹했다. 세단은 엣지 스타일, 스테이션 왜건은 크로스오버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1999년 11월 8일에 소하리 공장에서 열린 보도 발표회 때 언론에 노출되었고, 이틀 후인 11월 10일에 첫 선을 보였다. 기존의 프라이드와 아벨라가 기아, 포드, 마쓰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리오는 기아가 독자 개발하여 프라이드나 아벨라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강조한 21세기적인 디자인으로 탈바꿈하였으나, 어정쩡한 디자인과 준중형차 수요의 증가에 따라 전작인 프라이드 만큼의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차명인 리오는 스페인어로 활기차다, 역동적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디 타입은 세단과 스테이션 왜건 등 2가지이며, 스테이션 왜건은 RX-V라는 서브 네임이 달렸다. 엔진은 1.3ℓ SOHC, 1.5ℓ SOHC, 1.5ℓ DOHC 등 3가지가 있었고, 2001년에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가 주관한 대한민국 소형차의 충돌 테스트에서 현대 베르나, 대우 라노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1] 제원[편집] 리오[편집] 기아 리오(4도어) 정측면 기아 리오(4도어) 후측면 전장(mm) : 4,215 전폭(mm) : 1,675 전고(mm) : 1,440 축거(mm) : 2,410 윤거(전, mm) : 1,430 윤거(후, mm) : 1,435 승차정원 : 5명 변속기 : 수동 5단/자동 4단 구분 1.3ℓ SOHC 1.5ℓ SOHC 1.5ℓ DOHC 엔진 형식 A3E A5E A5D 연료 가솔린 가솔린 가솔린 배기량(cc) 1,343 1,493 1,493 최고출력(ps/rpm) 84/5,500 95/5,500(이후 88/5,500으로 변경) 108/6,000(이후 99/5,800으로 변경) 최대토크(kg*m/rpm) 12.1/3,000 13.8/3,000(이후 13.0/3,000으로 변경) 14.3/4,500(이후 13.8/4,500으로 변경) 연비(km/l) 17.8(수동)/15.7(자동) 16.9(수동)/14.5(자동) 16.2(수동)/14.4(자동) 기아 리오 RX-V(5도어) 정측면 기아 리오 RX-V(5도어) 후측면 리오 SF(2002년 8월~2005년 4월)[편집] 2002년 8월 6일에는 페이스 리프트를 거친 리오 SF가 출시되었다. 서브 네임인 SF는 미래 지향적인 소형차라는 의미(Science Fiction)와 소형차 중 최고의 안전성이 있다는 의미(Safety First)를 갖고 있다.[2] 번호판의 위치는 범퍼에서 트렁크로 옮겨졌다. 리오 SF의 스테이션 왜건은 RX-V라는 서브 네임 없이 그냥 5도어로 불렸다. 기존보다 개선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판매가 부진하였다. 2004년 4월 12일에는 2005년형이 출시되었다. 2005년 4월에 후속 차종인 뉴 프라이드가 출시되어 단종되었으나, 현재까지 프라이드의 수출명은 리오이다. 제원[편집] 리오 SF[편집] 기아 리오 SF(4도어) 정측면 기아 리오 SF(4도어) 후측면 전장(mm) : 4,240 전폭(mm) : 1,680 전고(mm) : 1,435 축거(mm) : 2,410 윤거(전, mm) : 1,430 윤거(후, mm) : 1,435 승차정원 : 5명 변속기 : 수동 5단/자동 4단 구분 1.3ℓ SOHC 1.5ℓ SOHC 1.5ℓ DOHC 엔진 형식 A3E A5E A5D 연료 가솔린 가솔린 가솔린 배기량(cc) 1,343 1,493 1,493 최고출력(ps/rpm) 84/5,500 88/5,500 99/5,800 최대토크(kg*m/rpm) 12.1/3,000 13.0/3,000 13.8/4,500 연비(km/l) 17.8(수동)/15.7(자동)(이후 15.4(수동)/13.2(자동)으로 변경) 16.9(수동)/14.5(자동)(이후 14.4(수동)/12.3(자동)으로 변경) 16.2(수동)/14.4(자동)(이후 14.0(수동)/12.3(자동)으로 변경) 기아 리오 SF(5도어) 정측면 기아 리오 SF(5도어) 후측면 각주[편집] ↑ 기아 리오 '안전도 1위' 동아일보, 2001년 9월 5일 ↑ 기아車, 소형세단 '리오 SF' 출시 한국경제신문, 2002년 8월 6일 외부 링크[편집] 기아자동차 대한민국 홈페이지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기아 리오 vdeh기아자동차승용차 비스토 모닝(* 피칸토) 프라이드( * 리오) 아벨라 브리사 캐피탈 세피아 슈마 스펙트라 콩코드 크레도스 파크타운 K 시리즈(K2(중국용) K3(* 쎄라토 포르테) K4(중국용) K5(* 옵티마 로체) K7(* 카덴자) 스팅어 K9(* K900 쿠오리스)) 포텐샤 엔터프라이즈 오피러스(* 아만티) 엘란 씨드(유럽용) 피아트 132 푸조 604 머큐리 세이블 링컨 컨티넨탈 RV 쏘울 카렌스(X-트렉 * 론도) 카스타(* 조이스) 카니발(* 세도나) 스포티지(* KX5) 록스타 레토나 쏘렌토 스토닉 KX7(중국용) 모하비(* 보레고) KX3(중국용) 벤가(유럽용) 레이(한국 전용) 니로 상용차 타우너 베스타 토픽 프레지오 봉고 세레스 타이탄 트레이드 복사 라이노 파맥스 그랜토 콤비 코스모스 AM버스 그랜버드 브리사 픽업 삼륜자동차 K-360 T-600 T-1500 T-2000 그 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KIA 타이거즈* 표시는 수출명 vdeh기아차의 흐름, 1970년~ Type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0 1 2 3 4 5 6 7 8 9 경차 비스토(현대 아토스 프라임) 모닝/뉴 모닝 올 뉴 모닝/더 뉴 모닝 올 뉴 모닝 레이/더 뉴 레이 소형차 피아트 124 브리사 프라이드 아벨라 리오/리오 SF 뉴 프라이드 올 뉴 프라이드/더 뉴 프라이드 기아 K2 준중형차 씨드 씨드 세피아/뉴 세피아 세피아 Ⅱ/스펙트라슈마/스펙트라 윙 쎄라토/뉴 쎄라토 포르테 K3/더 뉴 K3 올 뉴 K3 캐피탈 중형차 K4 피아트 132 콩코드 크레도스/크레도스 Ⅱ파크타운 옵티마/옵티마 리갈 로체/로체 어드밴스/로체 이노베이션 K5/더 뉴 K5 K5/더 뉴 K5 스팅어 준대형차 포텐샤/뉴 포텐샤 K7/더 뉴 K7 올 뉴 K7/K7 프리미어 대형차 머큐리 세이블 머큐리 세이블 푸조 604 링컨 컨티넨탈/타운카 엔터프라이즈 오피러스/뉴 오피러스/오피러스 프리미엄 K9/더 뉴 K9 더 K9 로드스터 엘란 CUV 벤가/벤가 크로스오버 쏘울 올 뉴 쏘울/더 뉴 쏘울 쏘울 부스터 프레임 SUV 록스타/록스타 R2 레토나 스포티지 쏘렌토/뉴 쏘렌토 모하비/더 뉴 모하비/모하비 픽업 모노코크 SUV KX3 니로/더 뉴 니로 스토닉 뉴 스포티지 스포티지 R/더 뉴 스포티지 R 더 SUV 스포티지/스포티지 더 볼드 쏘렌토 R/뉴 쏘렌토 R 올 뉴 쏘렌토/더 뉴 쏘렌토/쏘렌토 더 마스터 미니밴 카렌스/카렌스 Ⅱ/X-트렉 뉴 카렌스 올 뉴 카렌스/더 뉴 카렌스 카스타 카니발/카니발 Ⅱ 그랜드 카니발카니발(현대 엔투리지) 올 뉴 카니발/더 뉴 카니발 경상용차 타우너 승합차 봉고 프레지오/봉고Ⅲ 베스타/하이 베스타/뉴 베스타 AC/AV버스 토픽/토픽J2/하이토픽 준중형 버스 콤비/뉴 콤비/슈퍼 콤비/파워 콤비 중형 버스 코스모스/뉴 코스모스 준대형 버스 AB버스 AM버스 대형 버스 B버스 AM버스 그랜버드 뉴 그랜버드 소형 트럭 봉고/파워 봉고 와이드 봉고/봉고 J2 봉고 프런티어/뉴 봉고 봉고 Ⅲ 세레스 준중형 트럭 타이탄 트레이드 파맥스(현대 e-마이티) 중형 트럭 복사 와이드 복사 라이노 뉴 라이노 준대형 트럭 KB900/940 AM트럭 그랜토 대형 트럭 KB900/940 AM트럭 그랜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기아_리오&oldid=24101715" 분류: 기아자동차의 차종세단스테이션 왜건전륜구동소형 승용차1990년대 자동차2000년대 자동차2000년 도입된 자동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5일 (목) 21:0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프로젝트 이름이 B-lll 이고 총33개월의 개발기간을 가진 이 프로젝트는 몇년 몇월에 시작하였는가? |
에티오피아 항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티오피아 항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티오피아 항공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잉 777-200LR IATA ICAO 항공사 콜사인 ET ETH ETHIOPIAN 창립일 1945년 12월 21일 운항개시일 1946년 4월 8일 허브 공항 볼레 국제공항 동맹체 스타 얼라이언스 상용고객우대제도 ShebaMiles VIP 라운지 Cloud Nine LoungeShebaMiles Lounge 보유 항공기 68 취항지 수 87 본사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 핵심 인물 Addisu Legesse (Chairman of the Board) Tewolde Gebremariam (CEO) Kassim Geressu (CFO) Mesfin Tassew (COO) 모기업 에티오피아 정부 자회사 아스카이 항공 (40%) 웹사이트 http://www.ethiopianairlines.com 에티오피아 항공(영어: Ethiopian Airlines)은 에티오피아의 항공 회사이자 스타 얼라이언스의 멤버로 허브 공항은 볼레 국제공항이다. 목차 1 역사 2 운항 노선 2.1 코드쉐어 협정 3 보유 기종 3.1 현재 보유중인 기종 3.2 퇴역 기종 4 각주 5 사건 및 사고 6 사진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45년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미국의 항공사인 트랜스월드 항공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세웠다. TAAG앙골라항공, 남아프리카 항공과 함께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서 수익을 내는 몇 안 되는 항공사로 알려져 있다. 1946년 4월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에 첫 운항을 했다. 1958년 프랑크푸르트로 장거리 운항을 시작한 후 1963년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취항했다. 1998년 대서양 횡단 항로를 개설했다. 2011년 항공 동맹인 스타 얼라이언스의 회원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스타 얼라이언스는 1997년 시작된 항공 동맹으로 루프트한자, 싱가포르 항공, 스칸디나비아 항공, 아시아나항공, 유나이티드 항공, US 에어웨이즈, 에어캐나다, 에어 뉴질랜드 등 주요 회원사들이 일제히 가입했으며 또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으로 화물 운송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2013년 6월 19일에 취항했다.[1] 2014년 8월부터 인천발 홍콩 경유 아디스아바바행에 보잉 787 드림라이너를 투입 중이며, 에어 인디아에 이어 2번째로 대한민국 정기편에 선보였다. 운항 노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에티오피아 항공의 운항 노선입니다. 2017년 10월 기준으로 에티오피아 항공은 다음과 같은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코드쉐어 협정[편집] 에티오피아 항공은 다음과 같은 항공사와 코드쉐어를 하고 있으며 * 표시는 스타 얼라이언스 회원에 해당된다. ASKY 항공 LAM 모잠비크 항공 TAP 포르투갈 (스타 얼라이언스) 남아프리카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루프트한자 (스타 얼라이언스) 르완다 항공 브뤼셀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사우디아 항공 (스카이팀) 스칸디나비아 항공(스타 얼라이언스) 싱가포르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아비앙카 브라질 (스타 얼라이언스) 아시아나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에어 인디아 (스타 얼라이언스) 오만 항공 오스트리아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유나이티드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이집트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전일본공수 (스타 얼라이언스) 중국국제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쿠웨이트 항공 터키 항공 (스타 얼라이언스) 보유 기종[편집] 현재 보유중인 기종[편집] 2019년 4월 기준으로 에티오피아 항공은 다음과 같은 기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평균 기령은 9.2년이다.[2]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유 기종 기종 대수 주문 옵션 승객 비고 P Y 합계 에어버스 A350-900 11 13 0 30 318 348 2016년부터 순차적으로 도입[3] 보잉 737-700 7 0 0 16 102 118 보잉 737-800 16[4] 0[5] 0 16 138 154 보잉 737 MAX 8 4 25 0 16 144 160 2018년부터 순차적으로 도입 보잉 767-300ER 6 0 0 24 208 232 1대는 스타 얼라이언스 특별도장 적용2017년부터 순차적으로 퇴역 예정 대체 항공기: 보잉 787-8 드림라이너 211 235 213 237 보잉 777-200LR 6 0 0 34 287 321 보잉 777-300ER 4[6] 0 0 34 365 399 보잉 787-8 19[7] 0[8] 2 24 246 270 1대는 스타 얼라이언스 특별도장 적용 보잉 787-9 4 4 0 30 285 315 봄바디어 대쉬 8 Q400 24 9 0 7 60 67 7 64 71 0 78 78 에티오피아 카고의 보유 기종 보잉 737-800PCF 2 0 0 화물 보잉 777F 9 1[9] 0 화물 합계 109 45 2 퇴역 기종[편집] 에티오피아 항공의 퇴역 기종 기종 대수 도입 년도 퇴역 년도 대체 기종 비고 ATR-42-300 2 1988년 2000년 보잉 737-700 현재 예비용으로 저장 1 1996년 1997년 에어 보츠와나에 매각 보잉 737 MAX 8 1 2018년 2019년 대체 기종 없음 ET302편으로 이륙 직후 추락 보잉 707-300B 5 1958년 1982년 보잉 757-200 보잉 720 8 1960년 1980년 보잉 757-200 보잉 727-200 4 1973년 1989년 보잉 737-200 보잉 737-200 3 1987년 2008년 보잉 737 Next Generation 보잉 737-400F 1 2013년 2015년 보잉 757-200PCF 보잉 757-200 10 1991년 2018년 보잉 737 Next Generation 1 퇴역 후 화물기로 개조, 에티오피아 항공 카고에 편입 보잉 757-200PCF 2 1990년 2019년 보잉 737-800BCF 보잉 767-200ER 2 1984년 2007년 보잉 767-300ER 1 1987년 1996년 공중납치 후, 연료부족으로 해상불시착, 파괴 더글러스 DC-3 7 불명 불명 더글러스 DC-6 더글러스 DC-6 6 불명 불명 콘베어 240 콘베어 240 3 불명 불명 포커 50 포커 50 8 1996년 2014년 보잉 737 Next Generation 록히드 L-100-30H 2 1991년 2000년 보잉 737-400F 록히드 C-130 허큘리스의 민수용 버전 맥도넬더글러스 MD-11 1 2006년 2006년 임차 기종 월드 에어웨이즈 임차 운항 맥도넬더글러스 MD-11F 2 2009년 2015년 보잉 777F 보잉에 매각 각주[편집] ↑ “Ethiopian to Start Flights to Seoul” (보도 자료). Ethiopian Airlines. 2013년 5월 7일. 2013년 5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Ethiopian Airlines Current Fleet”. Ethiopian Airlines. 2014년 5월 8일에 보존된 문서. 2014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Ethiopian Airlines confirma a Airbus un pedido de 12 aviones A350 XWB por más de 1.900 millones” [Ethiopian Airlines confirms an order to Airbus for 12 A350 XWB aircraft in a deal worth more than € 1,900 million]. 《finanzas.com》 (스페인어). Noticias EUROPAPRESS. 2009년 11월 16일. 2012년 6월 30일에 보존된 문서. 2011년 2월 20일에 확인함. ↑ “Ethiopian Orders Ten 737-800s” (보도 자료). Ethiopian Airlines. 2010년 1월 21일. 2014년 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Flint, Perry; Karp, Aaron (2010년 1월 21일). “Ethiopian orders 10 737-800s, launches West African airline”. Air Transport World. 2011년 1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6월 24일에 확인함. ↑ “Ethiopian Leases Two New Boeing 777- 300ERs from Air Lease Corporation” (보도 자료). Ethiopian Airlines. 2013년 4월 22일. 2013년 4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Walker, Karen (2012년 3월 27일). “JAL takes delivery of its first 787s”. Air Transport World. 2012년 7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9월 21일에 확인함. All Nippon Airways (ANA) was the first airline to take delivery of the 787 in October. ↑ “Ethiopian's first 787 arrives at Addis Ababa”. 2012년 8월 19일.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출처= (도움말) ↑ “Ethiopian Receives Africas First Boeing 777 Freighter” (보도 자료). Ethiopian Airlines. 2012년 9월 19일. 2012년 9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9월 20일에 확인함. 사건 및 사고[편집] 199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이륙한 보잉 767-200ER 기종의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 항공기가 3명의 에티오피아 반정부 테러범들에게 납치당했다. 당시 이 항공기는 케냐 나이로비를 향하고 있었으며 연료도 나이로비까지 갈 수 있을 만큼의 양만 탑재한 상태였으나 테러범들은 연료가 부족하다는 기장의 말을 무시하고 호주로 갈 것을 요구했고 에티오피아 항공에서 제작한 기내 안내책자에 기재된 해당 기종 최대 비행 가능 시간을 이유로 들어, 호주까지 충분히 비행이 가능하다며 밀어붙였다.당시 이 항공기는 나이로비까지만 갈 수 있는 약 2시간 분량의 연료만 탑재하고 있었으나 테러범들은 호주까지 충분히 비행이 가능하다며 근거로 든 해당 기종의 최대가능 비행시간을 당시 항공기에 탑재된 연료로 비행 가능한 시간으로 착각한 것이다.결국 연료가 바닥난 항공기는 코모로 제도에 비상 착수를 시도했고 추락하는 순간 충격으로 인해 기체가 세 토막으로 부서졌다.이 사고로 탑승객 175명 가운데 125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대부분이 패닉 상태에 빠진 채 기장의 경고를 무시하고 미리 구명조끼를 부풀렸다가 부서진 기체에 들어찬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익사했으며 테러범들은 당시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던 탓에 추락 시 가해진 충격으로 사망했다. 2010년 에티오피아 항공 409편 보잉 737-800 항공기가 지중해에 추락하면서 탑승객 90명 가운데 82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9년 에티오피아 항공 302편 보잉 737 MAX 8 항공기가 이륙 6분만에 추락 하여 전원 사망 하였다. 사진[편집]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잉 737-700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잉 767-300ER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잉 777-200LR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잉 777-300ER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잉 787-8 에티오피아 항공의 봄바디어 대쉬 8 Q400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에티오피아 항공 에티오피아 항공 홈페이지 에티오피아 항공의 보유 기종 vdeh스타얼라이언스창립 회원 루프트한자 스칸디나비아 항공 에어 캐나다 유나이티드 항공 타이 항공 일반 회원 LOT 폴란드 항공 TAP 포르투갈 남아프리카 항공 브뤼셀 항공 선전 항공 스위스 국제항공 싱가포르 항공 아드리아 항공 아비앙카 항공 아시아나항공 에게 항공 에바 항공 에어 뉴질랜드 에어 인디아 에티오피아 항공 오스트리아 항공 이집트 항공 전일본공수 중국국제항공 코파 항공 크로아티아 항공 터키 항공 연결 회원 올림픽 에어 준야오 항공 제휴 회원 ANA 윙스 PGA 익스프레스 남아프리카 익스프레스 라우다 항공 루프트한자 리저널 아비앙카 니카라과 아비앙카 브라질 아비앙카 엘살바도르 아비앙카 온두라스 아비앙카 코스타리카 아비앙카 페루 에어 뉴질랜드 링크 에어링크 에어재팬 에어 캐나다 익스프레스 오스트리아 아처 항공 유나이티드 익스프레스 이집트 에어 익스프레스 재즈 항공 코파 항공 콜롬비아 타이 스마일 항공 터키 항공 카고 포르투갈리아 헬리콜 항공 과거 회원 BMI TAM 항공 TAM 파라과이 US 에어웨이스 셔틀 US 에어웨이스 US 에어웨이스 익스프레스 PLA 항공 멕시카나 항공 바리그 브라질 항공 블루원 상하이 항공 스위스 글로벌 항공 스팬에어 앤셋 오스트레일리아 콘티넨털 항공 vdeh 에티오피아의 항공사 아브레드 에어 아비시니안 플라이트 서비스 에티오피아 국민항공 에티오피아 항공 트랜스네이션 항공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티오피아_항공&oldid=24514369" 분류: 스타 얼라이언스에티오피아 항공국영 항공사1945년 설립에티오피아의 항공사IATA 회원에티오피아의 공기업숨은 분류: CS1 - 스페인어 인용 (es)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አማርኛالعربية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ietuvių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2일 (화) 16: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에티오피아 항공의 첫 운항지는 이집트의 어느 도시입니까? |
한수 (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수 (후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2년 9월) 한수(韓遂, ? ~ 215년)는 중국 후한 말 관서 일대의 세력가로 자는 문약(文約)이며 양주 금성군 사람이다. 종사 시절 양주의 난에 휘말려 타의로 반군에 가담하였고 정부의 현상을 피하고자 개명하였다. 본명은 한약(韓約)이었다. 이후 주도적으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관중십장 중 한 명이라 일컬어졌으며 중앙 정부와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조에게 토벌당해 목숨을 잃었다. 목차 1 변장ㆍ한수의 난 2 이각과의 대립 3 조조와의 대립 4 삼국지연의 5 각주 변장ㆍ한수의 난[편집] 광화 7년(184년), 서량의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켜 호(胡)족인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변장과 한수를 끌어들여 군사들을 지휘하게 했고, 호강교위 영징(伶徵)과 금성태수 진의(陳懿)를 죽였다. 중평 2년(185년) 8월 조정에서는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변장과 한수를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동탁이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한수는 변장과 함께 유중(楡中)으로 달아났다. 장온은 탕구장군(盪寇將軍) 주신에게 이들을 쫓게 했다. 당시 주신의 부장이었던 손견은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고 했으나 주신은 듣지 않고 유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수와 변장이 거꾸로 토벌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주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모두 죽이고 중평 4년(187년) 10만 명을 거느려 농서를 공격했다.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에게 항복했다. 양주자사 경비(耿鄙)는 한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적도(狄道)에서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한수는 한양태수 부섭과 싸워 그를 죽였다. 한수의 세력이 커지자 경비의 부장이던 마등은 한수에게 가담하였다. 한수와 마등은 적도 사람 왕국(王國)을 자신들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은 황보숭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황보숭이 반란군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자, 한수는 왕국을 참수한 뒤 머리와 몸을 멀리 이격시켜서 버렸다. 이후 반란군의 인물들이 서로 다투면서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이각과의 대립[편집] 이후 조정에서 동탁이 권력을 잡았다. 동탁에게 반발한 제후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공격하자, 동탁은 낙양을 내주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동탁은 자기에게 반발하는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 한수와 마등에게 장안으로 와 도와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초평 3년(192년) 한수와 마등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동탁은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하고 이각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각은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마등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하고 서량으로 돌려보냈다. 흥평 원년(194년) 마등은 이각에게 식량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려 했다. 한수는 마등과 이각을 중재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마등과 합세하여 장안을 공격했다. 조정 신하들은 한수와 마등에게 사람을 보내 장안성 안에서 내응하겠다고 전했다. 이각이 곽사·번조와 조카 이리(李利)를 내보내 서량군을 공격하자 한수와 마등은 패배하여 서량으로 물러났다. 한수는 자신을 뒤쫓던 번조에게 동향인이라는 점을 들어 말로써 그를 설득시켰고, 번조는 곧 돌아갔다, 번조는 이 일로 이각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각은 서량군에게 내응하려던 자들을 죽이고 조정을 움직여 한수와 마등을 사면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고 한수를 안항장군(安降將軍), 마등을 안적장군(安狄將軍)으로 삼았다. 조조와의 대립[편집] 건안 13년(208년) 한수는 의형제까지 맺었던 마등과 사이가 나빠져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종요를 보내 둘을 화해하게 하고,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맏아들 마초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했다. 마등은 떠나길 원치 않았으나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업으로 갔다. 건안 15년(210년), 작년에 옹주자사 한단상을 죽인 무위태수 장맹을 공격했고, 장맹이 거느린 관민들까지 한수에게 붙어 오히려 장맹을 공격하여 장맹은 자결했다. 건안 16년(211년), 조조가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사를 주고 한중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익주와 서량에서는 불안해 했는데, 특히 서량에서는 조조가 서량을 정벌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한수는 마초 등 서량의 장수들과 함께 거병하여 10만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공격했다. 서량군은 순조롭게 진군하여 장안과 동관을 점령했으나 동관 전투에서 조조는 한수와 마초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기 위해 한수와 만난 자리에서 옛 일만을 이야기할 뿐 전쟁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마초가 한수에게 대화의 내용을 묻자, 한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초는 한수가 거짓말한다고 여기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 조조는 일부러 많은 부분을 고쳐 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본 마초는 한수가 조조와 내통한 내용을 숨기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서량군의 내부 결속이 무너졌다. 기회를 잡은 조조가 총공격해 오자, 한수와 마초는 대패하고 서량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서량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212년 마등과 마등의 삼족을 죽였다. 건안 19년(214년),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는 달아났다. 이후 하후연이 한수 휘하 군사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長離)의 강족을 공격하자 한수는 군사를 보내 강족을 돕게 했다. 그러나 하후연은 이들을 격파하고 흥국(興國)의 저(氐)족까지 항복시켰다.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직접 저족 공격에 나선 후 항복시켜 상황이 불리해지자, 한수는 그 해 여름에 서량의 장수 국연과 장석(蔣石)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이는 70여 세였다.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군이 이각을 공격한 것이 헌제의 밀조를 받은 한수와 마등이 진서장군과 정서장군의 직책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훗날 마초와 함께 조조와 싸울 때, 마초가 자기를 의심하자 한수는 조조에게 귀부하고 부하 장수들과 함께 마초를 죽일 것을 논의했으나, 이를 알아차린 마초에 의해 왼팔을 잘렸다. 조조는 한수를 서량후(西涼侯)에 임명했다. 또한, 211년에 40세라고 기술되어 있어, 생년이 172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각주[편집] vdeh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군주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수_(후한)&oldid=23887311" 분류: 2세기 태어남215년 죽음후한의 장군한수와 주변 인물마등과 주변 인물살해된 사람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2년 9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Français日本語Portuguê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0일 (수) 12: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왕국은 누구한테 죽었어? |
한수 (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수 (후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2년 9월) 한수(韓遂, ? ~ 215년)는 중국 후한 말 관서 일대의 세력가로 자는 문약(文約)이며 양주 금성군 사람이다. 종사 시절 양주의 난에 휘말려 타의로 반군에 가담하였고 정부의 현상을 피하고자 개명하였다. 본명은 한약(韓約)이었다. 이후 주도적으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관중십장 중 한 명이라 일컬어졌으며 중앙 정부와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조에게 토벌당해 목숨을 잃었다. 목차 1 변장ㆍ한수의 난 2 이각과의 대립 3 조조와의 대립 4 삼국지연의 5 각주 변장ㆍ한수의 난[편집] 광화 7년(184년), 서량의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켜 호(胡)족인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변장과 한수를 끌어들여 군사들을 지휘하게 했고, 호강교위 영징(伶徵)과 금성태수 진의(陳懿)를 죽였다. 중평 2년(185년) 8월 조정에서는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변장과 한수를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동탁이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한수는 변장과 함께 유중(楡中)으로 달아났다. 장온은 탕구장군(盪寇將軍) 주신에게 이들을 쫓게 했다. 당시 주신의 부장이었던 손견은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고 했으나 주신은 듣지 않고 유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수와 변장이 거꾸로 토벌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주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모두 죽이고 중평 4년(187년) 10만 명을 거느려 농서를 공격했다.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에게 항복했다. 양주자사 경비(耿鄙)는 한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적도(狄道)에서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한수는 한양태수 부섭과 싸워 그를 죽였다. 한수의 세력이 커지자 경비의 부장이던 마등은 한수에게 가담하였다. 한수와 마등은 적도 사람 왕국(王國)을 자신들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은 황보숭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황보숭이 반란군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자, 한수는 왕국을 참수한 뒤 머리와 몸을 멀리 이격시켜서 버렸다. 이후 반란군의 인물들이 서로 다투면서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이각과의 대립[편집] 이후 조정에서 동탁이 권력을 잡았다. 동탁에게 반발한 제후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공격하자, 동탁은 낙양을 내주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동탁은 자기에게 반발하는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 한수와 마등에게 장안으로 와 도와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초평 3년(192년) 한수와 마등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동탁은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하고 이각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각은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마등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하고 서량으로 돌려보냈다. 흥평 원년(194년) 마등은 이각에게 식량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려 했다. 한수는 마등과 이각을 중재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마등과 합세하여 장안을 공격했다. 조정 신하들은 한수와 마등에게 사람을 보내 장안성 안에서 내응하겠다고 전했다. 이각이 곽사·번조와 조카 이리(李利)를 내보내 서량군을 공격하자 한수와 마등은 패배하여 서량으로 물러났다. 한수는 자신을 뒤쫓던 번조에게 동향인이라는 점을 들어 말로써 그를 설득시켰고, 번조는 곧 돌아갔다, 번조는 이 일로 이각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각은 서량군에게 내응하려던 자들을 죽이고 조정을 움직여 한수와 마등을 사면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고 한수를 안항장군(安降將軍), 마등을 안적장군(安狄將軍)으로 삼았다. 조조와의 대립[편집] 건안 13년(208년) 한수는 의형제까지 맺었던 마등과 사이가 나빠져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종요를 보내 둘을 화해하게 하고,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맏아들 마초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했다. 마등은 떠나길 원치 않았으나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업으로 갔다. 건안 15년(210년), 작년에 옹주자사 한단상을 죽인 무위태수 장맹을 공격했고, 장맹이 거느린 관민들까지 한수에게 붙어 오히려 장맹을 공격하여 장맹은 자결했다. 건안 16년(211년), 조조가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사를 주고 한중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익주와 서량에서는 불안해 했는데, 특히 서량에서는 조조가 서량을 정벌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한수는 마초 등 서량의 장수들과 함께 거병하여 10만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공격했다. 서량군은 순조롭게 진군하여 장안과 동관을 점령했으나 동관 전투에서 조조는 한수와 마초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기 위해 한수와 만난 자리에서 옛 일만을 이야기할 뿐 전쟁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마초가 한수에게 대화의 내용을 묻자, 한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초는 한수가 거짓말한다고 여기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 조조는 일부러 많은 부분을 고쳐 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본 마초는 한수가 조조와 내통한 내용을 숨기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서량군의 내부 결속이 무너졌다. 기회를 잡은 조조가 총공격해 오자, 한수와 마초는 대패하고 서량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서량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212년 마등과 마등의 삼족을 죽였다. 건안 19년(214년),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는 달아났다. 이후 하후연이 한수 휘하 군사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長離)의 강족을 공격하자 한수는 군사를 보내 강족을 돕게 했다. 그러나 하후연은 이들을 격파하고 흥국(興國)의 저(氐)족까지 항복시켰다.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직접 저족 공격에 나선 후 항복시켜 상황이 불리해지자, 한수는 그 해 여름에 서량의 장수 국연과 장석(蔣石)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이는 70여 세였다.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군이 이각을 공격한 것이 헌제의 밀조를 받은 한수와 마등이 진서장군과 정서장군의 직책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훗날 마초와 함께 조조와 싸울 때, 마초가 자기를 의심하자 한수는 조조에게 귀부하고 부하 장수들과 함께 마초를 죽일 것을 논의했으나, 이를 알아차린 마초에 의해 왼팔을 잘렸다. 조조는 한수를 서량후(西涼侯)에 임명했다. 또한, 211년에 40세라고 기술되어 있어, 생년이 172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각주[편집] vdeh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군주한 영제 소제 헌제 위 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촉 유비 유선 오 손견 손책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진 사마염 기타 공손연 공손찬 도겸 동탁 마등 여포 원소 원술 유언 유장 유표 장각 장로 한수 참모 문관한 공융 교현 양표 왕윤 채옹 위 가후 곽가 곽회 동소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순욱 순유 양수 왕랑 왕숙 유엽 정욱 종요 종회 진군 화흠 촉 간옹 동윤 등지 마량 마속 미축 방통 법정 비의 손건 양의 유파 이적 장완 제갈량 진지 오 감택 고옹 노숙 반준 보즐 여범 우번 육손 장굉 장소 장제 제갈각 제갈근 주유 진 가충 순욱 장화 진수 기타 곽도 괴량 괴월 봉기 심배 이유 장송 저수 전풍 진궁 채모 허유 무장한 노식 동승 주준 하진 황보숭 위 가규 등애 방덕 만총 서황 손례 악진 우금 이전 장합 장료 전예 전위 조인 조진 조창 조홍 조휴 하후돈 하후연 학소 허저 촉 강유 관우 관평 마대 마초 엄안 오의 왕평 요화 위연 이엄 장비 장익 조운 주창 진도 하후패 황권 황충 오 감녕 능통 미방 반장 서성 육항 여몽 장흠 전종 정보 정봉 제갈정 주치 주태 주환 진무 태사자 하제 한당 황개 진 두예 문앙 문호 석포 양호 왕준 기타 고순 곽사 기령 맹달 문추 안량 양봉 이각 장임 제갈탄 화웅 여인한 당희 동태후 하태후 초선 헌목황후 위 견황후 곽귀인 양휘유 왕원희 장춘화 하후휘 촉 감부인 미부인 목황후 황월영 오 대교 소교 보연사 손노반 손부인 오부인 진 양염 양지 기타 채부인 채염 축융부인 비한족 가비능(선비) 구력거(오환) 답돈(오환) 동천왕(고구려) 맹획(남만) 어부라(흉노) 히미코(일본) 기타 관로 남화노선 사마휘 예형 우길 좌자 화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수_(후한)&oldid=23887311" 분류: 2세기 태어남215년 죽음후한의 장군한수와 주변 인물마등과 주변 인물살해된 사람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2년 9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Français日本語Portuguê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Tiếng Việt吴语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3월 20일 (수) 12: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동탁을 살해한 인물은 누구일까? |
MADE (빅뱅의 음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ADE (빅뱅의 음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일본에서 발매한 동명의 음반에 대해서는 MADE SERIES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MADE빅뱅의 정규 음반발매일 2016년 12월 13일녹음 2015~2016년장르 K-pop, Hip-hop, 댄스 팝, R&B, 어쿠스틱포맷 CD, 디지털 다운로드언어 한국어레이블 YG 엔터테인먼트, 지니뮤직프로듀서 양현석, G-DRAGON빅뱅 연표 Alive(2012) MADE(2016) 《MADE》(한국어: 메이드)는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빅뱅의 한국 세 번째 정규 음반이다. 이 음반은 8년 만에 나오는 정규 음반이기도 하다. 2016년 12월 13일에 발매 하였다. 목차 1 음반 소개 2 발매 배경 3 평가 4 상업적 성과 5 수상 및 기록 6 트랙 리스트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음반 소개[편집] 이 음반은 2015년 5월부터 2015년 8월까지 매월 1일에 출시 된 'M', 'A', 'D', 'E' ('E'는 8월 5일에 발매 되었다.)으로 구성 된 단일 싱글 앨범들을 모아 'MADE'라는 정규 앨범으로 발매 되었다.[1] 발매 배경[편집] 2015년 4월 17일, YG 엔터테인먼트는 첫 티저 이미지를 공개하며 빅뱅의 컴백을 알렸다.[2] 이후, 빅뱅의 월드 투어 BIGBANG MADE TOUR 2015 개최를 발표하였다.[3] YG 엔터테인먼트는 빅뱅의 'MADE 시리즈: M' 타이틀 곡의 티저를 발표했다.[4] 5월 26일과 27일에 YG 엔터테인먼트는 빅뱅의 'MADE 시리즈: A'의 타이틀 곡 "뱅뱅뱅 (BANG BANG BANG)"과[5] "WE LIKE 2 PARTY"의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다.[6] 6월 26일과 27일, YG 엔터테인먼트는 세 번째 'MADE 시리즈: D'의 타이틀 곡 "If You"와 "맨정신"의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으며, 뮤직 비디오는 "맨정신"만이 제작 되었다.[7][8] 네 번째 시리즈 'MADE 시리즈: E'는 당초 8월 1일에 발매 될 예정이였지만, 빅뱅의 월드 투어 스케줄으로 8월 5일에 발매가 변경되었다.[9] 또한 이 싱글에 수록 된 두 곡은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와 GD&TOP이 지난 2010년에 이어 5년만에 발표하는 유닛 신곡 "쩔어"가 수록 되었다.[10] 8월 18일, YG 엔터테인먼트는 언론을 통해 “지난 4개월 동안 《MADE》 시리즈 앨범을 발표하며 쉴 틈 없이 달려온 빅뱅이 9월 1일 예정돼 있던 정규 앨범 발표를 잠시 연기한다. 빅뱅 멤버들 역시 정규앨범인만큼 좀 더 완성도 있는 앨범을 위해 추가로 신곡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와 국내 방송 활동을 위해 약 3주간 비워놓은 9월 스케줄을 멤버들의 재충전과 함께 추가 신곡 작업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라고 발표했다.[11][12][13] 평가[편집] 2018년 1월 기준, 빅뱅의 MADE 앨범의 뮤직 비디오 7편은 유투브에서 총 8억 7천만 뷰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14][15] 또한 중국의 유명 비디오 사이트인 유쿠(Youku)와 QQ 뮤직에서는 총합 700만 뷰를 기록했다.[16] 상업적 성과[편집] M, A과 D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M은 발매 이후, 이틀만에 130,000장을 판매해 가온 차트 (4월)에서 최고 3위를 차지했고, 한국에서는 총 134,000장과 중국에서는 총 400,000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17] 두 달간 이 싱글은 미국에서의 추가적인 디지털 판매량 17,000 카피가 더해져 각각 988,321(Loser)와 828,966 (BAE BAE)를 기록했다.[18] 현재까지 합계로는 M은 세계적으로 240만 카피를 판매했다. 또한 A 는 6월에 93,504 카피가 더해져, 중국에서는 600,000 카피 이상을 기록했다. 이 싱글은 각각 720,691 (뱅뱅뱅 (BANG BANG BANG))과 543,676 (WE LIKE 2 PARTY)를 기록했으며, 미국에서는 18,000 카피를 기록했다. 현재까지 합계로는 A은 세계적으로 200만 이상의 카피를 판매했다. 세 번째 싱글 D는 2주간 홀로 중국에서 800,000 카피를 판매였고,[19] "If You"는 308,120 카피를 기록했다. "맨정신"는 한국에서 276,180 카피를 기록했다. D는 합계 140만 이상을 판매했다. 첫 싱글부터 세 장의 싱글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580만 카피가 판매 되었다. 9월 27일 기준으로, 이 싱글 프로젝트의 뮤직 비디오는 유튜브에서 265백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9월 12일 기준으로 중국에서 이 네 장의 싱글은 350만 이상의 디지털 음원을 판매했으며,[20] 한국에서는 410,000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고,[21][22][23][24] 싱글로만 730만의 디지털 음원을 판매했으며, 4개월여만에 전 세계에서 1,000만 이상의 디지털 음원 판매 기록을 세웠다. 수상 및 기록[편집] 상(주최) 부분 랭크 참고 미국 퓨즈 2014 가장 기대되는 여름 앨범 25 선정 [25] 2015 가장 기대되는 가을 앨범 35 선정 [26] 트랙 리스트[편집] MADE The Full Album # 제목작사작곡편곡 재생 시간 1. 에라 모르겠다 (FXXK IT)Teddy, G-Dragon, T.O.PTeddy, G-Dragon, R.TeeTeddy, R.Tee 03:52 2. LAST DANCE G-Dragon, T.O.P, 태양G-Dragon, 전용준서원진, 24 04:40 3. GIRLFRIEND Teddy, G-Dragon, T.O.PTeddy, G-Dragon, Choice37Teddy, Choice37 03:49 4.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 (LET'S NOT FALL IN LOVE)Teddy, G-DragonTeddy, G-DragonTeddy 3:32 5. Loser Teddy, T.O.P, G-DragonTeddy, 태양Teddy 3:39 6. BAE BAE G-Dragon, Teddy, T.O.PTeddy, G-Dragon, T.O.PTeddy 2:49 7. 뱅뱅뱅 (BANG BANG BANG) Teddy, G-Dragon, T.O.PTeddy, G-DragonTeddy 3:40 8. 맨정신 (SOBER)Teddy, G-Dragon, T.O.PTeddy, Choice37, G-DragonTeddy, Choice37 3:57 9. IF YOU G-DragonG-Dragon, P.K, Dee.PP.K, Dee.P 4:24 10. 쩔어 (GD&T.O.P) (ZUTTER)G-Dragon, Teddy, T.O.PTeddy, G-Dragon, T.O.PTeddy 3:14 11. We Like 2 Party Teddy, Kush, G-Dragon, T.O.PTeddy, Kush, 서원진, G-DragonTeddy, Kush 3:16 같이 보기[편집] M A D E 각주[편집] ↑ “BIGBANG Comes Back on May 1, Release of New Songs for Five Consecutive Months?”. 《YGLife》. 2015년 4월 1일에 확인함. ↑ “Big Bang announce comeback project, 'MADE SERIES', kicking off with two songs, 'Loser' and 'Bae Bae'!”. 《Allkpop》. Allkpop. 2015년 5월 7일에 확인함. ↑ “Big Bang leave fans in a frenzy with theatrical trailer for 'MADE' tour + YGE explains the meaning behind the album title”. 《Allkpop》. Allkpop. 2015년 5월 7일에 확인함. ↑ “BIGBANG – MADE SERIES [M]”. 《YGLife》. 2015년 4월 25일에 확인함. ↑ “BIGBANG Teases First June Release with Poster for "뱅뱅뱅 (Bang Bang Bang)"”. 《Soompi》. 2015년 5월 26일에 확인함. ↑ “Big Bang say 'We Like 2 Party' in their next poster for second monthly comeback project!”. 《Allkpop》. 2015년 5월 27일에 확인함. ↑ YG 엔터테인먼트. “BIGBANG – MADE SERIES D ‘IF YOU’”. 《YG LIFE》. 2015년 6월 26일에 확인함. ↑ YG Entertainment. “BIGBANG – MADE SERIES D ‘맨정신’”. 《YG LIFE》. 2015년 6월 27일에 확인함. ↑ YG 엔터테인먼트. “[Issue IS] Why does BIGBANG release August’s new album on the 5 not on the 1 of the month?”. 《YG LIFE》. 2015년 6월 24일에 확인함. ↑ YG 엔터테인먼트. “BIGBANG unveiled credit of "E" album… Created by TEDDY, GD, and T.O.P”. 《YG LIFE》. 2015년 8월 4일에 확인함. ↑ “BIGBANG postpones 'MADE' Album Release Date; Boy Band Working on Next Album?”.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2015년 8월 19일에 확인함. ↑ “YG "빅뱅, 9월 정규앨범 발매연기…재충전 시간 갖기로"”. 스포츠조선. 2015년 8월 18일. ↑ “빅뱅, 9월 앨범 연기 하기로 결정..'재충전+추가 작업'”. 일간스포츠. 2015년 8월 18일. ↑ “중간점검 2015 핫뮤비 : 빅뱅 7편 2억3000만뷰 돌파”. 엑스포츠뉴스. 2015년 9월 6일. ↑ OSEN (2015년 9월 5일). “[뮤직톡톡]빅뱅, MV 조회수 독보적 1위… 'K팝 왕좌'”. ↑ “BIGBANG breaks records worldwide with "MADE" album series”. Naver. 2015년 7월 14일. 2015년 7월 14일에 확인함. ↑ “BigBang《M》(5.1)数字专辑 QQ音乐独家首发 - QQ音乐”. 《QQ music》. y.qq.com. 2015년 5월 1일. 2015년 7월 7일에 확인함. ↑ “BIGBANG Occupy Top Two Slots on World Digital Songs Chart”. 《Billboard》. Billboard. 2015년 5월 8일. 2015년 5월 9일에 확인함. ↑ “QQ音乐数字专辑--MADE SERIES 《D》”. 《QQ music》. y.qq.com. 2015년 6월 30일. 2015년 7월 10일에 확인함. ↑ “QQ音乐数字专辑--MADE SERIES 《E》”. 《QQ music》. y.qq.com. 2015년 8월 1일. 2015년 8월 28일에 확인함. ↑ “Gaon Comprehensive Sales 2015 First Half (6/2015)”. Gaon. ↑ “[Special IS] BIGBANG Interim Evaluation① Music, straight-A report card”. yg-life.com. ↑ “Gaon Monthly Chart - July”. 《Hanteo Chart》. hanteo.com. 2015년 8월 6일. 2015년 8월 6일에 확인함. ↑ “Gaon Monthly Chart - August”. 《Hanteo Chart》. hanteo.com. 2015년 9월 10일. 2015년 9월 12일에 확인함. ↑ “25 Most Anticipated 2014 Summer Albums”. fuse. 2014년 5월 12일. 2015년 7월 15일에 확인함. ↑ “35 Most Anticipated 2015 Fall Albums”. fuse. 2015년 8월 26일. 2015년 9월 1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YG 엔터테인먼트 (일본어) 빅뱅 일본 공식 웹사이트 뮤직 비디오 LOSER 뮤직비디오 - 유튜브 BAE BAE 뮤직비디오 - 유튜브 BANG BANG BANG 뮤직비디오 - 유튜브 WE LIKE 2 PARTY 뮤직비디오 - 유튜브 맨정신 (SOBER) 뮤직비디오 - 유튜브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 (LET'S NOT FALL IN LOVE) 뮤직비디오 - 유튜브 GD&T.O.P - 쩔어 (ZUTTER) 뮤직비디오 - 유튜브 에라 모르겠다 (FXXK IT) 뮤직비디오 - 유튜브 LAST DANCE 뮤직비디오 - 유튜브 vdeh빅뱅 G-Dragon T.O.P. 태양 대성 승리 정규 음반대한민국 BIGBANG Vol.1 Remember MADE 일본 NUMBER 1 BIGBANG BIGBANG 2 ALIVE MADE SERIES EP대한민국 Always Hot Issue Stand Up BIGBANG MINI 4 Alive 일본 For The World With U 스페셜에디션대한민국 빅뱅 스페셜에디션 STILL ALIVE 일본 ALIVE -MONSTER EDITION- Special Final in Dome Memorial Collection 컴필레이션 음반 Asia Best 2006-2009 The Ultimate The Best Of BIGBANG The Best Of BIGBANG 2006-2014 라이브 음반대한민국 The Real Vol.1 Live Concert The Great Vol.2 Live Concert 2009 BIGSHOW Live Album 2010 BIGSHOW Live Album 2011 BIGSHOW Live Album 2012 BIGBANG Alive Tour Live Album 2013 BIGBANG Alive Tour Live Album : The Final In Seoul 2014 BIGBANG +α in Seoul 일본 Love & Hope Tour 2011 Live Album 콘서트 투어대한민국 1st Live Concert - The R.E.A.L The G.R.E.A.T Want You Tour BIG SHOW 2009 BIG SHOW 2010 BIG SHOW 2011 일본 Stand Up Tour ELECTRIC LOVE TOUR 2010 BIGBANG Presents Love & Hope Tour 2011 Japan Dome Tour + Big Bang+α BIGBANG JAPAN DOME TOUR 2014 ~ 2015 “X” 세계 Global Warning Tour BIGBANG ALIVE GALAXY TOUR 2012 BIGBANG MADE World Tour BIGBANG10 THE CONCERT : 0.TO.10 유닛 GD&TOP GD X TAEYANG 관련 방송 리얼다큐 빅뱅 BIGBANG TV 같이 보기 YG 엔터테인먼트 양현석 공식색:유니버스 블루 팬클럽:V.I.P 싱글 목록 음반 목록 음반 외 활동 콘서트 투어 목록 솔로 콘서트 투어 목록 수상 및 후보 목록 분류 위키공용 vdeh빅뱅의 싱글한국BIGBANG Vol.1 BIGBANG BigBang Is V.I.P Bigbang 03 Always 거짓말 Hot Issue 마지막 인사 Remember 붉은 노을 Stand Up 하루하루 천국 BIGBANG MINI 4 Tonight Love Song Stupid Liar ALIVE Blue Fantastic Baby Bad Boy Monster MADE M "Loser" "BAE BAE" A "BANG BANG BANG" "We Like 2 Party" D "IF YOU" "맨정신" E "쩔어"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 일본For the World How Gee With U With U Number 1 Number 1 BIGBANG My Heaven 가라가라 고!! BIGBANG 2 코에오키카세떼 Tell Me Goodbye Beautiful Hangover 콜라보레이션 싱글 FILA Limited Edition with BIGBANG So Fresh, So Cool Lollipop Lollipop Part 2 승리의 함성 (The Shouts Of Reds Part 2) OST 할렐루야 친구 vdeh2017년 가온 앨범 차트 1위 음반1-4주 MADE (1주) Limitless (2주) Don't Say No (3주) 도깨비 OST Pack 1 (4주) 5-8주 Rookie (5주) The First (6주) YOU NEVER WALK ALONE (7주) TWICEcoaster : LANE 2 (8주) 9-12주 My Voice (9주) THE AWAKENING (10주) FLIGHT LOG : ARRIVAL (11주) CAN YOU FEEL IT? (12주) 13-16주 FLIGHT LOG : ARRIVAL (13주) My Voice (Deluxe Edition) (14주) HIGH FIVE (15주) MISS THIS KISS (16주) 17-20주 Palette (17주) 지금, 우리 (18주) THE 20TH ANNIVERSARY (19주) SIGNAL (20주) 21-24주 Al1 (21, 23주) Dream Part.01 (22주) Be ordinary (24주) 25-28주 SHINE FOREVER (25주) Pink Up (26주) STAR;DOM (27주) The Red Summer (28주) 29-32주 The War (Korean Ver.) (29, 30, 31주) 1X1=1 (TO BE ONE) (32주) 33-36주 1X1=1 (TO BE ONE) (33, 34주) Whisper (35주) The Power of Music (Korean Ver.) (36주) 37-40주 The Power of Music (Korean Ver.) (37주) LOVE YOURSELF 承 'Her' (38주) Rollin' (39주) 41-44주 W. HERE (41주) LOVE YOURSELF 承 'Her' (42주) 7 for 7 (43주) twicetagram (44주) 45-48주 EEN, AGE (45주) 1-1=0 (NOTHING WITHOUT YOU) (46주) Be ordinary (47주) PLAY (PAUSE Ver.) (48주) 49-52주 7 for 7 (49주) Merry & Happy (50주) THE CODE (51주) Universe (52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ADE_(빅뱅의_음반)&oldid=23749844" 분류: 2017년 가온 앨범 차트 1위 음반빅뱅의 음반YG 엔터테인먼트 음반지니뮤직 음반2015년 음반2016년 음반숨은 분류: 한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Bahasa MelayuPolskiPortuguês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2일 (금) 07: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빅뱅의 앨범 MADE 시리즈에는 어떤 곡들이 수록되어 있을까 |
MADE (빅뱅의 음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ADE (빅뱅의 음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일본에서 발매한 동명의 음반에 대해서는 MADE SERIES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MADE빅뱅의 정규 음반발매일 2016년 12월 13일녹음 2015~2016년장르 K-pop, Hip-hop, 댄스 팝, R&B, 어쿠스틱포맷 CD, 디지털 다운로드언어 한국어레이블 YG 엔터테인먼트, 지니뮤직프로듀서 양현석, G-DRAGON빅뱅 연표 Alive(2012) MADE(2016) 《MADE》(한국어: 메이드)는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빅뱅의 한국 세 번째 정규 음반이다. 이 음반은 8년 만에 나오는 정규 음반이기도 하다. 2016년 12월 13일에 발매 하였다. 목차 1 음반 소개 2 발매 배경 3 평가 4 상업적 성과 5 수상 및 기록 6 트랙 리스트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음반 소개[편집] 이 음반은 2015년 5월부터 2015년 8월까지 매월 1일에 출시 된 'M', 'A', 'D', 'E' ('E'는 8월 5일에 발매 되었다.)으로 구성 된 단일 싱글 앨범들을 모아 'MADE'라는 정규 앨범으로 발매 되었다.[1] 발매 배경[편집] 2015년 4월 17일, YG 엔터테인먼트는 첫 티저 이미지를 공개하며 빅뱅의 컴백을 알렸다.[2] 이후, 빅뱅의 월드 투어 BIGBANG MADE TOUR 2015 개최를 발표하였다.[3] YG 엔터테인먼트는 빅뱅의 'MADE 시리즈: M' 타이틀 곡의 티저를 발표했다.[4] 5월 26일과 27일에 YG 엔터테인먼트는 빅뱅의 'MADE 시리즈: A'의 타이틀 곡 "뱅뱅뱅 (BANG BANG BANG)"과[5] "WE LIKE 2 PARTY"의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다.[6] 6월 26일과 27일, YG 엔터테인먼트는 세 번째 'MADE 시리즈: D'의 타이틀 곡 "If You"와 "맨정신"의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으며, 뮤직 비디오는 "맨정신"만이 제작 되었다.[7][8] 네 번째 시리즈 'MADE 시리즈: E'는 당초 8월 1일에 발매 될 예정이였지만, 빅뱅의 월드 투어 스케줄으로 8월 5일에 발매가 변경되었다.[9] 또한 이 싱글에 수록 된 두 곡은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와 GD&TOP이 지난 2010년에 이어 5년만에 발표하는 유닛 신곡 "쩔어"가 수록 되었다.[10] 8월 18일, YG 엔터테인먼트는 언론을 통해 “지난 4개월 동안 《MADE》 시리즈 앨범을 발표하며 쉴 틈 없이 달려온 빅뱅이 9월 1일 예정돼 있던 정규 앨범 발표를 잠시 연기한다. 빅뱅 멤버들 역시 정규앨범인만큼 좀 더 완성도 있는 앨범을 위해 추가로 신곡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와 국내 방송 활동을 위해 약 3주간 비워놓은 9월 스케줄을 멤버들의 재충전과 함께 추가 신곡 작업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라고 발표했다.[11][12][13] 평가[편집] 2018년 1월 기준, 빅뱅의 MADE 앨범의 뮤직 비디오 7편은 유투브에서 총 8억 7천만 뷰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14][15] 또한 중국의 유명 비디오 사이트인 유쿠(Youku)와 QQ 뮤직에서는 총합 700만 뷰를 기록했다.[16] 상업적 성과[편집] M, A과 D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M은 발매 이후, 이틀만에 130,000장을 판매해 가온 차트 (4월)에서 최고 3위를 차지했고, 한국에서는 총 134,000장과 중국에서는 총 400,000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17] 두 달간 이 싱글은 미국에서의 추가적인 디지털 판매량 17,000 카피가 더해져 각각 988,321(Loser)와 828,966 (BAE BAE)를 기록했다.[18] 현재까지 합계로는 M은 세계적으로 240만 카피를 판매했다. 또한 A 는 6월에 93,504 카피가 더해져, 중국에서는 600,000 카피 이상을 기록했다. 이 싱글은 각각 720,691 (뱅뱅뱅 (BANG BANG BANG))과 543,676 (WE LIKE 2 PARTY)를 기록했으며, 미국에서는 18,000 카피를 기록했다. 현재까지 합계로는 A은 세계적으로 200만 이상의 카피를 판매했다. 세 번째 싱글 D는 2주간 홀로 중국에서 800,000 카피를 판매였고,[19] "If You"는 308,120 카피를 기록했다. "맨정신"는 한국에서 276,180 카피를 기록했다. D는 합계 140만 이상을 판매했다. 첫 싱글부터 세 장의 싱글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580만 카피가 판매 되었다. 9월 27일 기준으로, 이 싱글 프로젝트의 뮤직 비디오는 유튜브에서 265백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9월 12일 기준으로 중국에서 이 네 장의 싱글은 350만 이상의 디지털 음원을 판매했으며,[20] 한국에서는 410,000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고,[21][22][23][24] 싱글로만 730만의 디지털 음원을 판매했으며, 4개월여만에 전 세계에서 1,000만 이상의 디지털 음원 판매 기록을 세웠다. 수상 및 기록[편집] 상(주최) 부분 랭크 참고 미국 퓨즈 2014 가장 기대되는 여름 앨범 25 선정 [25] 2015 가장 기대되는 가을 앨범 35 선정 [26] 트랙 리스트[편집] MADE The Full Album # 제목작사작곡편곡 재생 시간 1. 에라 모르겠다 (FXXK IT)Teddy, G-Dragon, T.O.PTeddy, G-Dragon, R.TeeTeddy, R.Tee 03:52 2. LAST DANCE G-Dragon, T.O.P, 태양G-Dragon, 전용준서원진, 24 04:40 3. GIRLFRIEND Teddy, G-Dragon, T.O.PTeddy, G-Dragon, Choice37Teddy, Choice37 03:49 4.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 (LET'S NOT FALL IN LOVE)Teddy, G-DragonTeddy, G-DragonTeddy 3:32 5. Loser Teddy, T.O.P, G-DragonTeddy, 태양Teddy 3:39 6. BAE BAE G-Dragon, Teddy, T.O.PTeddy, G-Dragon, T.O.PTeddy 2:49 7. 뱅뱅뱅 (BANG BANG BANG) Teddy, G-Dragon, T.O.PTeddy, G-DragonTeddy 3:40 8. 맨정신 (SOBER)Teddy, G-Dragon, T.O.PTeddy, Choice37, G-DragonTeddy, Choice37 3:57 9. IF YOU G-DragonG-Dragon, P.K, Dee.PP.K, Dee.P 4:24 10. 쩔어 (GD&T.O.P) (ZUTTER)G-Dragon, Teddy, T.O.PTeddy, G-Dragon, T.O.PTeddy 3:14 11. We Like 2 Party Teddy, Kush, G-Dragon, T.O.PTeddy, Kush, 서원진, G-DragonTeddy, Kush 3:16 같이 보기[편집] M A D E 각주[편집] ↑ “BIGBANG Comes Back on May 1, Release of New Songs for Five Consecutive Months?”. 《YGLife》. 2015년 4월 1일에 확인함. ↑ “Big Bang announce comeback project, 'MADE SERIES', kicking off with two songs, 'Loser' and 'Bae Bae'!”. 《Allkpop》. Allkpop. 2015년 5월 7일에 확인함. ↑ “Big Bang leave fans in a frenzy with theatrical trailer for 'MADE' tour + YGE explains the meaning behind the album title”. 《Allkpop》. Allkpop. 2015년 5월 7일에 확인함. ↑ “BIGBANG – MADE SERIES [M]”. 《YGLife》. 2015년 4월 25일에 확인함. ↑ “BIGBANG Teases First June Release with Poster for "뱅뱅뱅 (Bang Bang Bang)"”. 《Soompi》. 2015년 5월 26일에 확인함. ↑ “Big Bang say 'We Like 2 Party' in their next poster for second monthly comeback project!”. 《Allkpop》. 2015년 5월 27일에 확인함. ↑ YG 엔터테인먼트. “BIGBANG – MADE SERIES D ‘IF YOU’”. 《YG LIFE》. 2015년 6월 26일에 확인함. ↑ YG Entertainment. “BIGBANG – MADE SERIES D ‘맨정신’”. 《YG LIFE》. 2015년 6월 27일에 확인함. ↑ YG 엔터테인먼트. “[Issue IS] Why does BIGBANG release August’s new album on the 5 not on the 1 of the month?”. 《YG LIFE》. 2015년 6월 24일에 확인함. ↑ YG 엔터테인먼트. “BIGBANG unveiled credit of "E" album… Created by TEDDY, GD, and T.O.P”. 《YG LIFE》. 2015년 8월 4일에 확인함. ↑ “BIGBANG postpones 'MADE' Album Release Date; Boy Band Working on Next Album?”.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2015년 8월 19일에 확인함. ↑ “YG "빅뱅, 9월 정규앨범 발매연기…재충전 시간 갖기로"”. 스포츠조선. 2015년 8월 18일. ↑ “빅뱅, 9월 앨범 연기 하기로 결정..'재충전+추가 작업'”. 일간스포츠. 2015년 8월 18일. ↑ “중간점검 2015 핫뮤비 : 빅뱅 7편 2억3000만뷰 돌파”. 엑스포츠뉴스. 2015년 9월 6일. ↑ OSEN (2015년 9월 5일). “[뮤직톡톡]빅뱅, MV 조회수 독보적 1위… 'K팝 왕좌'”. ↑ “BIGBANG breaks records worldwide with "MADE" album series”. Naver. 2015년 7월 14일. 2015년 7월 14일에 확인함. ↑ “BigBang《M》(5.1)数字专辑 QQ音乐独家首发 - QQ音乐”. 《QQ music》. y.qq.com. 2015년 5월 1일. 2015년 7월 7일에 확인함. ↑ “BIGBANG Occupy Top Two Slots on World Digital Songs Chart”. 《Billboard》. Billboard. 2015년 5월 8일. 2015년 5월 9일에 확인함. ↑ “QQ音乐数字专辑--MADE SERIES 《D》”. 《QQ music》. y.qq.com. 2015년 6월 30일. 2015년 7월 10일에 확인함. ↑ “QQ音乐数字专辑--MADE SERIES 《E》”. 《QQ music》. y.qq.com. 2015년 8월 1일. 2015년 8월 28일에 확인함. ↑ “Gaon Comprehensive Sales 2015 First Half (6/2015)”. Gaon. ↑ “[Special IS] BIGBANG Interim Evaluation① Music, straight-A report card”. yg-life.com. ↑ “Gaon Monthly Chart - July”. 《Hanteo Chart》. hanteo.com. 2015년 8월 6일. 2015년 8월 6일에 확인함. ↑ “Gaon Monthly Chart - August”. 《Hanteo Chart》. hanteo.com. 2015년 9월 10일. 2015년 9월 12일에 확인함. ↑ “25 Most Anticipated 2014 Summer Albums”. fuse. 2014년 5월 12일. 2015년 7월 15일에 확인함. ↑ “35 Most Anticipated 2015 Fall Albums”. fuse. 2015년 8월 26일. 2015년 9월 1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공식 웹사이트 YG 엔터테인먼트 (일본어) 빅뱅 일본 공식 웹사이트 뮤직 비디오 LOSER 뮤직비디오 - 유튜브 BAE BAE 뮤직비디오 - 유튜브 BANG BANG BANG 뮤직비디오 - 유튜브 WE LIKE 2 PARTY 뮤직비디오 - 유튜브 맨정신 (SOBER) 뮤직비디오 - 유튜브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 (LET'S NOT FALL IN LOVE) 뮤직비디오 - 유튜브 GD&T.O.P - 쩔어 (ZUTTER) 뮤직비디오 - 유튜브 에라 모르겠다 (FXXK IT) 뮤직비디오 - 유튜브 LAST DANCE 뮤직비디오 - 유튜브 vdeh빅뱅 G-Dragon T.O.P. 태양 대성 승리 정규 음반대한민국 BIGBANG Vol.1 Remember MADE 일본 NUMBER 1 BIGBANG BIGBANG 2 ALIVE MADE SERIES EP대한민국 Always Hot Issue Stand Up BIGBANG MINI 4 Alive 일본 For The World With U 스페셜에디션대한민국 빅뱅 스페셜에디션 STILL ALIVE 일본 ALIVE -MONSTER EDITION- Special Final in Dome Memorial Collection 컴필레이션 음반 Asia Best 2006-2009 The Ultimate The Best Of BIGBANG The Best Of BIGBANG 2006-2014 라이브 음반대한민국 The Real Vol.1 Live Concert The Great Vol.2 Live Concert 2009 BIGSHOW Live Album 2010 BIGSHOW Live Album 2011 BIGSHOW Live Album 2012 BIGBANG Alive Tour Live Album 2013 BIGBANG Alive Tour Live Album : The Final In Seoul 2014 BIGBANG +α in Seoul 일본 Love & Hope Tour 2011 Live Album 콘서트 투어대한민국 1st Live Concert - The R.E.A.L The G.R.E.A.T Want You Tour BIG SHOW 2009 BIG SHOW 2010 BIG SHOW 2011 일본 Stand Up Tour ELECTRIC LOVE TOUR 2010 BIGBANG Presents Love & Hope Tour 2011 Japan Dome Tour + Big Bang+α BIGBANG JAPAN DOME TOUR 2014 ~ 2015 “X” 세계 Global Warning Tour BIGBANG ALIVE GALAXY TOUR 2012 BIGBANG MADE World Tour BIGBANG10 THE CONCERT : 0.TO.10 유닛 GD&TOP GD X TAEYANG 관련 방송 리얼다큐 빅뱅 BIGBANG TV 같이 보기 YG 엔터테인먼트 양현석 공식색:유니버스 블루 팬클럽:V.I.P 싱글 목록 음반 목록 음반 외 활동 콘서트 투어 목록 솔로 콘서트 투어 목록 수상 및 후보 목록 분류 위키공용 vdeh빅뱅의 싱글한국BIGBANG Vol.1 BIGBANG BigBang Is V.I.P Bigbang 03 Always 거짓말 Hot Issue 마지막 인사 Remember 붉은 노을 Stand Up 하루하루 천국 BIGBANG MINI 4 Tonight Love Song Stupid Liar ALIVE Blue Fantastic Baby Bad Boy Monster MADE M "Loser" "BAE BAE" A "BANG BANG BANG" "We Like 2 Party" D "IF YOU" "맨정신" E "쩔어" "우리 사랑하지 말아요" 일본For the World How Gee With U With U Number 1 Number 1 BIGBANG My Heaven 가라가라 고!! BIGBANG 2 코에오키카세떼 Tell Me Goodbye Beautiful Hangover 콜라보레이션 싱글 FILA Limited Edition with BIGBANG So Fresh, So Cool Lollipop Lollipop Part 2 승리의 함성 (The Shouts Of Reds Part 2) OST 할렐루야 친구 vdeh2017년 가온 앨범 차트 1위 음반1-4주 MADE (1주) Limitless (2주) Don't Say No (3주) 도깨비 OST Pack 1 (4주) 5-8주 Rookie (5주) The First (6주) YOU NEVER WALK ALONE (7주) TWICEcoaster : LANE 2 (8주) 9-12주 My Voice (9주) THE AWAKENING (10주) FLIGHT LOG : ARRIVAL (11주) CAN YOU FEEL IT? (12주) 13-16주 FLIGHT LOG : ARRIVAL (13주) My Voice (Deluxe Edition) (14주) HIGH FIVE (15주) MISS THIS KISS (16주) 17-20주 Palette (17주) 지금, 우리 (18주) THE 20TH ANNIVERSARY (19주) SIGNAL (20주) 21-24주 Al1 (21, 23주) Dream Part.01 (22주) Be ordinary (24주) 25-28주 SHINE FOREVER (25주) Pink Up (26주) STAR;DOM (27주) The Red Summer (28주) 29-32주 The War (Korean Ver.) (29, 30, 31주) 1X1=1 (TO BE ONE) (32주) 33-36주 1X1=1 (TO BE ONE) (33, 34주) Whisper (35주) The Power of Music (Korean Ver.) (36주) 37-40주 The Power of Music (Korean Ver.) (37주) LOVE YOURSELF 承 'Her' (38주) Rollin' (39주) 41-44주 W. HERE (41주) LOVE YOURSELF 承 'Her' (42주) 7 for 7 (43주) twicetagram (44주) 45-48주 EEN, AGE (45주) 1-1=0 (NOTHING WITHOUT YOU) (46주) Be ordinary (47주) PLAY (PAUSE Ver.) (48주) 49-52주 7 for 7 (49주) Merry & Happy (50주) THE CODE (51주) Universe (52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ADE_(빅뱅의_음반)&oldid=23749844" 분류: 2017년 가온 앨범 차트 1위 음반빅뱅의 음반YG 엔터테인먼트 음반지니뮤직 음반2015년 음반2016년 음반숨은 분류: 한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Bahasa MelayuPolskiPortuguês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22일 (금) 07: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made는 몇 장의 카피를 기록했나요 |
바다의 날 (일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다의 날 (일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바다의 날공식이름 海の日(うみのひ우미노히)다른이름 바다 기념일(海の記念日)장소 일본형태 공휴일중요도 바다 은혜에 감사, 해양국인 일본의 번영을 기원날짜 7월 셋째 월요일2018년 7월 16일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2019년 7월 15일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2020년 7월 20일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2021년 7월 19일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빈도 해마다행사 기념식, 축하행사관련 산의 날・강의 날 일본의 공휴일 설날 (정월): 1월 1일 성인의 날: 1월 2째 월요일 건국기념의 날: 2월 11일 천황탄생일: 2월 23일 춘분의 날: 춘분 쇼와의 날: 4월 29일 헌법기념일: 5월 3일 녹색의 날: 5월 4일 어린이날: 5월 5일 바다의 날: 7월 3째 월요일 경로의 날: 9월 3째 월요일 추분의 날: 추분 체육의 날: 10월 2째 월요일 문화의 날: 11월 3일 근로감사의 날: 11월 23일 골든위크국민의 휴일대체휴일제도해피 먼데이 제도 바다의 날(일본어: 海の日)은 1995년에 제정된 일본의 공휴일로 하루 동안 쉰다. 제정 초기에는 7월 20일이 바다의 날이었으나 축일법 개정(해피 먼데이 제도)에 의해 2004년부터 7월 셋째 주 월요일로 바뀌었다.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축일법)에서는 '바다의 은혜에 감사 하는 동시에 해양국 일본의 번영을 기원한다'라고 취지를 명시해 두고 있다. 국토교통성의 문서의 기술등에 의하면 '세계의 여러 국가 중에 '바다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한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고 한다. 목차 1 바다 기념일 2 개정된 축일법 시행 이전의 바다의 날 3 개정된 축일법 시행 이후의 바다의 날 4 바다와 접하지 않은 현의 대응 5 관련항목 바다 기념일[편집] 공휴일로 제정되기 이전에는 바다 기념일(일본어: 海の記念日)이라고 하는 기념일이었다. 바다 기념일은 1876년에 메이지 천황이 도호쿠 지방을 순시할 때 군함이 아닌 등대 순시 기선인 '메이지마루'를 타고 항해를 하고 7월 20일에 요코하마 항에 귀항한 것을 계기로 1941년에 체신대신인 무라다 쇼조가 제의해서 제정되었다. 메이지마루는 이후에 도쿄상선학교 (현재의 도쿄 해양대학)의 연습함으로 사용되며 현재는 도쿄 해양대학의 엣추지마 캠퍼스에서 보존하고 있다. 개정된 축일법 시행 이전의 바다의 날[편집]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일요일:1997년, 2003년 월요일:1998년 화요일:1999년 수요일:없음 목요일:2000년 금요일:2001년 토요일:1996년, 2002년 개정된 축일법 시행 이후의 바다의 날[편집] 2004년부터 2050년까지의 예정을 기록. (괄호안은 예정) 7월 15일 - (2013년, 2019년, 2024년, 2030년, 2041년, 2047년) 7월 16일 - 2007년, (2012년, 2018년, 2029년, 2035년, 2040년, 2046년) 7월 17일 - 2006년, (2017년, 2023년, 2028년, 2034년, 2045년) 7월 18일 - 2005년, 2011년, (2016년, 2022년, 2033년, 2039년, 2044년、2050년) 7월 19일 - 2004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2년, 2038년, 2049년) 7월 20일 - 2009년, (2015년, 2020년, 2026년, 2037년, 2043년, 2048년) 7월 21일 - 2008년, (2014년, 2025년, 2031년, 2036년, 2042년) 바다와 접하지 않은 현의 대응[편집] 나라현에서는 7월 셋째 주 월요일을 '산의 날・강의 날'(山の日・川の日)로 하는 것이 조례에 있다. 관련항목[편집] 바다 페스타 - 바다의 날의 의의를 재확인하기 위한 기념식전등을 실시. 등대 기념일 - 바다의 날과 같이 바다에 관한 기념일 해군보안청 - 바다의 날에 각종 축하행사를 행함. 등대 - 참관등대에서는 바다의 날에 각종 축하행사를 행함. 해군 기념일 - 5월 27일, 1945년에 폐지. 오잔컵 경주 - 바다의 날 탄생을 기념해서 1996년에 경정의 SG에 신설된 경주. 오오쓰 비와코 둔치 음악제 - e-radio가 바다의 날에 개최하는 야외 라이브이벤트. ap bank fes - 시즈오카현 가케가와 시의 야마하 리조트 쓰마고이에서 개최되는 야외 페스티벌. 2005년부터 매년 바다의 날을 포함해서 3일간 열림. 전국수산・해양고등학교 범선 경주 대회 - 바다의 날에 개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바다의_날_(일본)&oldid=24091234" 분류: 일본의 공휴일7월바다7월의 기념일환경 기념일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فارسیFrançaisעבריתBahasa Indonesia日本語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3일 (화) 16: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04년 이후 2050년까지 바다의 날은 언제인가? |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 하빌랜드 알바트로스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 1938년 9월 핫필드에서 시험비행중인 시작기 G-AEVV종류 4발 프로펠러 여객기첫 비행 1937년 5월 20일현황 생산 종료주요 사용자 제국항공영국해외항공생산 시기 1937년 ~ 1939년 생산 대수 7대시작기 2기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de Havilland DH.91 Albatross)는 1930년대 말 개발된 영국의 4발 피스톤 엔진 여객기이다. 총 7기의 항공기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조되었다. 목차 1 개발과정 2 운용실적 3 제작기 4 성능(여객기형) 5 운영주체 6 출전 개발과정[편집] 본 기체는 항공성 시방서 36/35에 의해 개발이 결정된 대서양 횡단을 위한 우편기로, 항공성은 454kg(1000lb)의 우편물을 싣고 64km/h(40mph)의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4,023km(2,500mi)를 비행할 수 있는 우편수송기의 개발에 참여할 회사를 모집하였다. 드 하빌랜드 사가 이것에 응하였으며 1936년 아서 에르네스트 해그(Arthur Ernest Hagg)에 의해 설계되었다. 본 기체는 합판-발사목-합판 샌드위치 공법을 동체의 제작에 사용한 기체로, 이 공법은 후일 드 하빌랜드 모스키토 경폭격기의 제작에 이어진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공냉식 엔진의 냉각기로, 엔진마운트를 두른 공기의 흐름이 이상적으로 흐르도록 설계되었다.[1] . 주익은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수상에 불시착할 시 어느 정도의 부력을 가질 수 있게 설계되었다. 프로펠러는 2엽을 채용했다. 시작기는 1937년 5월 20일 초도비행했으며 두 번째 시작기는 적재중량 시험 중 파손되어 수리를 받았다. 이후 시작기는 제국항공에 의해 우편기로 사용되었다. 한편 이 우편기를 22인승의 여객기로 활용하는 계획이 입안되었다. 우편기로 제조된 시작기와의 차이점은 창문의 수와 플랩이었는데, 스플릿 플랩을 슬롯트 플랩으로 교체하였다. 총 5기의 여객기 형태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조되어 인도되었다. 운용실적[편집] BOAC 소속의 알바트로스, 1941년경 브리스톨 공항에서 제국항공의 관례에 따라, 항공기들은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처음으로 이름이 붙여진 항공기의 이름에 따라, 이 기종은 프로비셔(Frobisher) 형 여객기로도 지칭되었다. 선박업계에서 유래한 이 관습은 전후에도 BOAC와 BEA에 이어졌다. 처음으로 인도된 여객기 형태의 기체는 1938년 10월 제국항공에 인도된 프로비셔였다. 총 5기의 여객기형 DH.91이 제국항공에 인도되어 런던 크로이돈 공항에서 파리, 브뤼셀, 취리히에 취항하였다. 시험비행 종료 후에는 시작기 2기도 제국항공에 인도되어 장거리 우편기로 운용되었다. 여객기형들이 모두 인도되어 제대로 운용된 기간은 1939년 여름까지였으며 2시간짜리 런던 크로이던 공항 - 파리 르 브루제 공항 노선에 취항한 것이 전부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은 이들의 장거리 비행능력과 고속성을 이용해 영국과 아이슬란드간의 운송작전에 사용하려 하였다. 이에 우편기형 2기를 징발해 1940년 9월부터 271비행대에서 운용하였으나 프레스윅과 레이캬비크 구간 운행 중 두 기체 모두 착륙사고로 망실하였다.[2] 5기의 여객기형은 1940년 9월부터 BOAC에 승계되어 브리스톨-리스본과 브리스톨-섀넌 간 노선에 운용되었다.[2] 1기는 1940년 독일군의 공습으로 상실하였으며,[4] 다른 1기는 1940년 연료배관의 문제로 불시착해 파괴되었으며 다른 한 기는 1943년 섀논 근방에 추락해 파괴되었다. 일련의 추락사고들이 발생하자 이는 주익의 합판구조 약화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판단되어 잔존기 2기 역시 비슷한 문제의 사고를 겪을 것과 예비부품의 부족을 염려하여 1943년 9월 폐기되었다.[5] 제작기[편집] 패러데이(Faraday) 우편기형으로 1939년 8월 G-AEVV의 등록번호를 받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다. 이후 BOAC가 승계하였으며 1940년 영국 공군 제 271 비행대에 AX903번을 부여받아 수송기로 운용되었다. 1941년 8월 11일 레이캬비크에 착륙 중 파괴되었다.[6][7] 프랭클린(Franklin) 우편기형으로 BOAC에 인도되었으며 등록번호는 G-AEVW이다. 역시 271비행대에 AX904번을 부여받아 운용되었으나 1942년 4월 7일 착륙 중 랜딩기어 파손으로 파괴되었다.[6][8] 프로비셔(Frobisher)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I였다. 1938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으며 1940년 12월 20일 독일이 윗처치 공항을 공습하여 파괴되었다.[6][9] 팰콘(Falcon)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J. 제국항공에 1938년 인도되어 1943년 9월 폐기되었다.[6][10] 포르투나(Fortuna)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K. 제국항공에 1939년 인도되었으며 1943년 7월 16일 섀논 공항에 착륙 중 불시착해 폐기되었다.[6][11] 핑갈(Fingal)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L. 1939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으며 글로스터셔에서 1940년 6월 불시착해 폐기되었다.[6][12] 피오나(Fiona)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M. 1939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으며 1943년 9월 폐기되었다.[6][13] 성능(여객기형)[편집] 정보의 출처: British Civil Aircraft since 1919[14]일반 특성 승무원: 4 (기장,부조종사,무전기사,스튜어드) 용량: 22명 길이: 71 ft 6 in (21.80 m) 날개폭: 105 ft 0 in (32.01 m) 높이: 22 ft 3 in (6.78 m) 날개면적: 1,078 ft² (100.2 m²) 공허중량: 21,230 lb (9,650 kg) 탑재중량: 29,500 lb (13,380 kg) 엔진: 4× 드 하빌랜드 집시 12엔진 12기통 피스톤 엔진, 525 hp (392 kW) 각각 성능 최대속도: 195 kn (225 mph, 362 km/h) 순항속도: 183 kn (210 mph, 338 km/h) 항속거리: 904 nmi, (1,040 mi, 1,675 km. 우편기형은 5,311km) 상승한도: 17,900 ft (5,455 m) 상승률: 700 ft/min (3.5 m/s) 날개하중: 27 lb/ft² (134 kg/m²) 출력대중량비: 0.07 hp/lb (120 W/kg) 운영주체[편집] 영국 제국항공, 이후 보유기체 전량을 BOAC가 승계받음. 영국 공군 제271 비행대가 BOAC에서 우편기형 2기를 징발해 운용함. 출전[편집] ↑ "Cooling System for Plane Engines Uses Air Piped from Wings" Popular Science, September 1938, drawing of cooling system ↑ 가 나 Moss Air Pictorial, September 1964, p. 292. ↑ Moss Air Pictorial, September 1964, p. 293. ↑ P.W.Moss의 조사는 이 기체는 BOAC 내 불량직원의 방화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함.[3] ↑ Moss Air Pictorial, September 1964, p. 294.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Jackson 1973, pp 472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EVV”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EVW”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I”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J”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K”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L”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M”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Jackson 1973, p.15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드_하빌랜드_91_알바트로스&oldid=24200446" 분류: 항공기여객기1937년 첫 비행한 항공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FryskItaliano日本語Norsk nynorskNorskPolskiSvenskaТоҷикӣ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3: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36년 개발된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를 설계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드 하빌랜드 알바트로스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 1938년 9월 핫필드에서 시험비행중인 시작기 G-AEVV종류 4발 프로펠러 여객기첫 비행 1937년 5월 20일현황 생산 종료주요 사용자 제국항공영국해외항공생산 시기 1937년 ~ 1939년 생산 대수 7대시작기 2기 드 하빌랜드 91 알바트로스(de Havilland DH.91 Albatross)는 1930년대 말 개발된 영국의 4발 피스톤 엔진 여객기이다. 총 7기의 항공기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조되었다. 목차 1 개발과정 2 운용실적 3 제작기 4 성능(여객기형) 5 운영주체 6 출전 개발과정[편집] 본 기체는 항공성 시방서 36/35에 의해 개발이 결정된 대서양 횡단을 위한 우편기로, 항공성은 454kg(1000lb)의 우편물을 싣고 64km/h(40mph)의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4,023km(2,500mi)를 비행할 수 있는 우편수송기의 개발에 참여할 회사를 모집하였다. 드 하빌랜드 사가 이것에 응하였으며 1936년 아서 에르네스트 해그(Arthur Ernest Hagg)에 의해 설계되었다. 본 기체는 합판-발사목-합판 샌드위치 공법을 동체의 제작에 사용한 기체로, 이 공법은 후일 드 하빌랜드 모스키토 경폭격기의 제작에 이어진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공냉식 엔진의 냉각기로, 엔진마운트를 두른 공기의 흐름이 이상적으로 흐르도록 설계되었다.[1] . 주익은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수상에 불시착할 시 어느 정도의 부력을 가질 수 있게 설계되었다. 프로펠러는 2엽을 채용했다. 시작기는 1937년 5월 20일 초도비행했으며 두 번째 시작기는 적재중량 시험 중 파손되어 수리를 받았다. 이후 시작기는 제국항공에 의해 우편기로 사용되었다. 한편 이 우편기를 22인승의 여객기로 활용하는 계획이 입안되었다. 우편기로 제조된 시작기와의 차이점은 창문의 수와 플랩이었는데, 스플릿 플랩을 슬롯트 플랩으로 교체하였다. 총 5기의 여객기 형태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제조되어 인도되었다. 운용실적[편집] BOAC 소속의 알바트로스, 1941년경 브리스톨 공항에서 제국항공의 관례에 따라, 항공기들은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처음으로 이름이 붙여진 항공기의 이름에 따라, 이 기종은 프로비셔(Frobisher) 형 여객기로도 지칭되었다. 선박업계에서 유래한 이 관습은 전후에도 BOAC와 BEA에 이어졌다. 처음으로 인도된 여객기 형태의 기체는 1938년 10월 제국항공에 인도된 프로비셔였다. 총 5기의 여객기형 DH.91이 제국항공에 인도되어 런던 크로이돈 공항에서 파리, 브뤼셀, 취리히에 취항하였다. 시험비행 종료 후에는 시작기 2기도 제국항공에 인도되어 장거리 우편기로 운용되었다. 여객기형들이 모두 인도되어 제대로 운용된 기간은 1939년 여름까지였으며 2시간짜리 런던 크로이던 공항 - 파리 르 브루제 공항 노선에 취항한 것이 전부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은 이들의 장거리 비행능력과 고속성을 이용해 영국과 아이슬란드간의 운송작전에 사용하려 하였다. 이에 우편기형 2기를 징발해 1940년 9월부터 271비행대에서 운용하였으나 프레스윅과 레이캬비크 구간 운행 중 두 기체 모두 착륙사고로 망실하였다.[2] 5기의 여객기형은 1940년 9월부터 BOAC에 승계되어 브리스톨-리스본과 브리스톨-섀넌 간 노선에 운용되었다.[2] 1기는 1940년 독일군의 공습으로 상실하였으며,[4] 다른 1기는 1940년 연료배관의 문제로 불시착해 파괴되었으며 다른 한 기는 1943년 섀논 근방에 추락해 파괴되었다. 일련의 추락사고들이 발생하자 이는 주익의 합판구조 약화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판단되어 잔존기 2기 역시 비슷한 문제의 사고를 겪을 것과 예비부품의 부족을 염려하여 1943년 9월 폐기되었다.[5] 제작기[편집] 패러데이(Faraday) 우편기형으로 1939년 8월 G-AEVV의 등록번호를 받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다. 이후 BOAC가 승계하였으며 1940년 영국 공군 제 271 비행대에 AX903번을 부여받아 수송기로 운용되었다. 1941년 8월 11일 레이캬비크에 착륙 중 파괴되었다.[6][7] 프랭클린(Franklin) 우편기형으로 BOAC에 인도되었으며 등록번호는 G-AEVW이다. 역시 271비행대에 AX904번을 부여받아 운용되었으나 1942년 4월 7일 착륙 중 랜딩기어 파손으로 파괴되었다.[6][8] 프로비셔(Frobisher)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I였다. 1938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으며 1940년 12월 20일 독일이 윗처치 공항을 공습하여 파괴되었다.[6][9] 팰콘(Falcon)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J. 제국항공에 1938년 인도되어 1943년 9월 폐기되었다.[6][10] 포르투나(Fortuna)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K. 제국항공에 1939년 인도되었으며 1943년 7월 16일 섀논 공항에 착륙 중 불시착해 폐기되었다.[6][11] 핑갈(Fingal)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L. 1939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으며 글로스터셔에서 1940년 6월 불시착해 폐기되었다.[6][12] 피오나(Fiona) 여객기형으로 등록번호는 G-AFDM. 1939년 제국항공에 인도되었으며 1943년 9월 폐기되었다.[6][13] 성능(여객기형)[편집] 정보의 출처: British Civil Aircraft since 1919[14]일반 특성 승무원: 4 (기장,부조종사,무전기사,스튜어드) 용량: 22명 길이: 71 ft 6 in (21.80 m) 날개폭: 105 ft 0 in (32.01 m) 높이: 22 ft 3 in (6.78 m) 날개면적: 1,078 ft² (100.2 m²) 공허중량: 21,230 lb (9,650 kg) 탑재중량: 29,500 lb (13,380 kg) 엔진: 4× 드 하빌랜드 집시 12엔진 12기통 피스톤 엔진, 525 hp (392 kW) 각각 성능 최대속도: 195 kn (225 mph, 362 km/h) 순항속도: 183 kn (210 mph, 338 km/h) 항속거리: 904 nmi, (1,040 mi, 1,675 km. 우편기형은 5,311km) 상승한도: 17,900 ft (5,455 m) 상승률: 700 ft/min (3.5 m/s) 날개하중: 27 lb/ft² (134 kg/m²) 출력대중량비: 0.07 hp/lb (120 W/kg) 운영주체[편집] 영국 제국항공, 이후 보유기체 전량을 BOAC가 승계받음. 영국 공군 제271 비행대가 BOAC에서 우편기형 2기를 징발해 운용함. 출전[편집] ↑ "Cooling System for Plane Engines Uses Air Piped from Wings" Popular Science, September 1938, drawing of cooling system ↑ 가 나 Moss Air Pictorial, September 1964, p. 292. ↑ Moss Air Pictorial, September 1964, p. 293. ↑ P.W.Moss의 조사는 이 기체는 BOAC 내 불량직원의 방화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함.[3] ↑ Moss Air Pictorial, September 1964, p. 294.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Jackson 1973, pp 472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EVV”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EVW”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I”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J”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K”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L”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Civil Aviation Authority Registration Entry for G-AFDM” (PDF). 2011년 6월 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8일에 확인함. ↑ Jackson 1973, p.15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드_하빌랜드_91_알바트로스&oldid=24200446" 분류: 항공기여객기1937년 첫 비행한 항공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FryskItaliano日本語Norsk nynorskNorskPolskiSvenskaТоҷикӣ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3: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핑갈의 등록번호가 뭐야? |
발레교습소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발레교습소 (영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발레 교습소Flying Boys 감독 변영주 제작 김미희 각본 신혜은 원작 신혜은 출연 윤계상, 김민정 촬영 성승택 편집 박곡지 음악 조영욱 제작사 좋은영화 배급사 CJ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2004년 12월 3일 시간 105분 《발레 교습소》(Flying Boys)는 변영주 감독, 윤계상, 김민정 주연의 2004년 한국 영화이다. 12월 3일 개봉하였다. 목차 1 캐스팅 1.1 주요 인물 1.2 그 외 인물들 2 외부 링크 캐스팅[편집] 주요 인물[편집] 윤계상 - 강민재 역 김민정 - 황보수진 역 그 외 인물들[편집] 도지원 - 양정숙 역 온주완 - 이창섭 역 이준기 - 장동완 역 김동욱 - 김기태 역 강도한 - 엄종석 역 박그리나 - 차승언 역 이정섭 - 배도일 역 조한희 - 오향자 역 진유영 - 강동석 역 백종헌 - 김현성 역 차회숙 - 민재 모 역 엄옥란 - 민재 이모 역 정동숙 - 수진 모 역 최용선 - 수진 부 역 이은 - 지나 역 유소희 - 소영 역 정보훈 - 형미 역 권혁풍 - 동완 부 역 홍석연 - 검도반 강사 역 이미도 - 문제 학생 역 최보광 - 108호 여자 역 이종원 - 헬스 남자 역 (특별출연) 이수인 - 민재 담임 역 (특별출연) 김갑수 - 감독 교사 역 (특별출연) 외부 링크[편집] 발레 교습소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발레교습소_(영화)&oldid=23426323" 분류: 2004년 영화대한민국의 로맨스 영화대한민국의 드라마 영화대한민국의 영화 작품드라마 영화한국어 영화 작품대한민국의 십대 영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6일 (일) 19: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영화 <발레교습소>에서 108호 여자 역으로 출연한 배우는? |
임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임연林衍 출생일 ? 출생지 충청북도 진천(忠淸北道 鎭川) 사망일 1270년 사망지 강도(江島) 종교 불교(佛敎) 가문 진천(鎭川) 정당 무소속 배우자 ? 자녀 임유간(林惟幹)임유무(林惟茂)임유인(林惟栶)임유거(林惟柜)임유제(林惟提) 복무 기간 1234년~1270년 최종 계급 무신(武神)권신(權臣)정치가(政治家) 교정도감(敎定都監) 임연(林衍, 1215년?~1270년)은 고려 후기의 무신(武臣), 권신(權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진천(鎭川). 1268년부터 1270년까지 2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목차 1 생애 2 가계 3 임연이 등장한 작품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6 각주 생애[편집] 1231년 임연은 제1차 고려-몽골 전쟁 때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고려의 대장군인 송언상이 고향 땅인 진천으로 오게 되었으며 진짜 전쟁처럼 지휘를 하며 놀고 있었다. 대장군 송언상이 이를 보고 비범하게 여겨 그에 의해 개경으로 가 그의 종이 되었고 또한 학문과 무예를 배웠으나 그가 병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홀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1234년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후에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우, 최항을 섬겼으며 김준을 따르면서 양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1258년(고종 45년) 류경,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1268년에는 김준을 죽였으며, 원종을 폐하여 영종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과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에서 귀국하기 전에 출륙환도(出陸還都)와 권신의 제거를 약속했다. 원종이 몽골병과 함께 귀국하려 하자, 임연은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어 백성의 해도입거(海島入居)를 명하고, 몽골에 항전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1270년 등창으로 죽었다. 차남 임유무가 뒤를 이었다. 가계[편집] 장남 : 임유간(林惟幹) 차남 : 임유무(林惟茂 1248 ~ 1270) 삼남 : 임유인(林惟栶 1252 ~ 1270) 사남 : 임유거(林惟柜) 오남 : 임유제(林惟提) 임연이 등장한 작품[편집] 《무신》(MBC, 2012년~2012년, 배우:안재모) 같이 보기[편집] 고려 원종 대몽항쟁 김준 최우 최항 최의 임유무 참고 자료[편집]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웅진닷컴 ISBN 8901047535 각주[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몽골과의 항쟁〉"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임김준 제10대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1268년 ~ 1270년 후임임유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임연&oldid=24046394" 분류: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고려의 무신한국의 섭정무신정권쿠빌라이 칸진천 임씨병사한 사람1215년 태어남1270년 죽음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7일 (수) 00: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임연이 대정이 된 년도는 언제일까? |
정방폭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방폭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 西歸浦 正房瀑布) 대한민국의 명승 종목 명승 제43호 (2008년 8월 8일 지정)면적 10,529m2위치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칠십리로 156-8 (서귀동)좌표 북위 33° 14′ 48″ 동경 126° 34′ 17″ / 북위 33.24667° 동경 126.57139° / 33.24667; 126.57139좌표: 북위 33° 14′ 48″ 동경 126° 34′ 17″ / 북위 33.24667° 동경 126.57139° / 33.24667; 126.57139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정방폭포(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해지)종목 기념물 제44호 (1995년 8월 26일 지정) (2008년 8월 8일 해지)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정방폭포(正房瀑布)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심가에서 1.5km 동남쪽에 있는 폭포이다. 2008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목차 1 개요 2 갤러리 3 제주도의 폭포 4 같이 보기 5 각주 개요[편집] 한라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애이리내의 남쪽 하단에 발달한 폭포이다.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로, 세계적으로도 자메이카의 던리버폭포 정도만이 잘 알려져 있는 희귀한 형태의 폭포이다.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해안 절벽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20여 미터의 물줄기가 남쪽 바다의 푸르른 해안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며,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 등과 함께 제주도를 대표하는 폭포로 알려져 있다.[1] 조선 숙종 28년(1702년) 11월 5일, 제주 목사 이형상은 배를 타고 정방폭포를 둘러보았는데 이때의 일이 '정방탐승'이라는 제목으로 《탐라순력도》에 실려 있다. 그림의 부기에는 정방폭포의 길이 80여 척, 너비 5척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정방연은 정의현에서 서쪽 60리에 있으며 폭포 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고 밑으로 바다가 있어 폭포가 바다에 곧장 떨어지는 것이 가히 제일명구라고 적고 있다. 4.3사건 당시 학살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1948년 음력 10월 24일과 11월 22일, 12월 14일, 12월 24일, 12월 28일 등 여섯 차례의 학살이 정방폭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1949년 1월 22일 인근 안덕면 동광리, 상창리 주민 등 80여 명이 토벌대에 의해 정방폭포 위의 담배공장에서 학살당했고, 살해된 주민들의 시체는 이곳 정방폭포 아래로 흘려 보냈다고 한다.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은 이때 동광리 주민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이다. 갤러리[편집] 정방폭포 파노라마 제주도의 폭포[편집]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 정방폭포 엉또폭포 소정방폭포 같이 보기[편집]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 2013년 대한민국의 영화 각주[편집] ↑ 문화재청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정방폭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정방폭포&oldid=24134559" 분류: 대한민국의 폭포제주특별자치도의 명승서귀포시의 문화재서귀포시의 지리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일 (목) 00: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였던 이형상이 지은 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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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4° 47′ 30″ 동경 126° 25′ 18″ / 북위 34.791804° 동경 126.421679° / 34.791804; 126.421679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설립일 2009년 4월 6일 소재지 전라남도 목포시 남농로 136 직원 수 72명[1] 상급기관 대한민국 문화재청 웹사이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공식 웹사이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國立海洋文化財硏究所,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Maritime Cultural Heritage)는 해양유물의 조사·연구·보존 및 전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소속기관이다. 2009년 4월 6일 발족하였으며, 전라남도 목포시 남농로 136에 위치하고 있다. 소장은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임기제공무원으로 보한다.[2] 목차 1 설립 배경 2 직무 3 연혁 4 조직 4.1 소장 5 시설 5.1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본관) 5.2 보존처리소 (별관) 5.3 태안보존처리시설 6 각주 7 외부 링크 설립 배경[편집] 1980년 신안 해저 유물발굴 이후 해양유물 관련 박물관 건립 필요성에 따라 계획이 잡히게 됐으며 1993년 현재의 자리에 준공되면서 1994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國立海洋遺物殿示館)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황해안에서 발견되는 고선박 및 유물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감당하면서 규모를 확장하고 있다. 전시관 내부에는 신안인근에서 발견됐다하며 붙여진 신안선의 거대 모형을 중심으로 전시물이 진열되어 있으며 대개의 유물은 12세기 초 고려청자의 원산이었던 강진을 거쳐 중국으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면서 남은 유적들이다.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에서 인양한 고려항해선, 진도군 벽파진에서 인양된 세계 최대의 통나무배 등도 보존처리되어 있다.[3] 비단 해양유적 뿐 아니라 그림, 서예 등 다양한 분야의 유적을 기획전시로 선보이고 있으며 바다문화학교를 운영하여 20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박물관 교육을 하는 한편 방학 중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바다교육을 문화재청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4] 2003년 목포시와 관련 인사들이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박물관 승격 문제를 건의했고 이후에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중앙부처간 이견으로 2007년 초부터 난관에 봉착해 박물관 승격에 차질이 발생했다. 2007년 9월 승격이 결정됐으나 이름은 변하지 않고 기존에 같이 쓰이던 이름인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그대로 쓰게 됐다.[5] 2008년 태안반도를 지나다 침몰한 배의 유적 공개를 '고려청자 보물선-강진, 태안'이라는 이름으로 개최했다.[6] 2009년 4월 27일 그동안의 전시교육 기능을 유지하면서 수중문화재 조사연구 기능에 보다 중점을 두기 위하여 기관 명칭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변경하였다. 직무[편집] 해양문화재[7]의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제도 및 정책 연구 해양문화재에 관한 조사·연구 및 보존·복원 해양문화재에 관한 과학적 조사기법 및 보존·복원기술 개발 해양문화재의 전시·교육 및 홍보 해양문화재 전시·연구 관련 국내·외 교류·협력 그 밖에 해양연구소 운영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사업 연혁[편집] 1980년 05월 01일: 신안해저 인양유물의 과학적 보존과 복원전담기구로 설립계획 작성. 1981년 08월 25일: 문화재연구소 부설 "목포보존처리장" 개설. 1981년 08월 28일: 신안해저 인양 목재유물 인수 및 보존처리. 1984년 05월 01일: 완도해저 인양 목선 인수 및 보존처리. 1986년 10월 05일: 월정교지 출토 구조물 인수 및 보존처리. 1990년 01월 03일: 문화재연구소 소속으로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 설치.[8] 1991년 10월 05일: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 청사 준공. 1993년 12월 28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준공. 1994년 05월 04일: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개편.[9] 1994년 12월 14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개관. 1995년 11월 22일: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으로 변경.[10] 2005년 08월: 안좌도 금산 한선 발굴. 2005년 11월: 보령 원산도 해저유물 발굴. 2006년 09월: 신안선 발굴 30주년 기념 특별전. 2006년 11월: 수중발굴 전용선박 취항 "씨뮤즈호". 2006년 12월: 안산 대부도 한선 발굴. 2007년 07월: 태안대섬 고려청자보물선 발굴. 2008년 07월: 태안마도 해저유물발굴. 2008년 12월: 어린이해양문화체험관 개관. 2009년 04월 27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개편.[11] 2016년 03월 01일: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12] 조직[편집] 소장[편집] 기획운영과[13] 수중발굴과[14] 해양유물연구과[14] 전시홍보과[14][15] 서해문화재과[14][16] 시설[편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본관)[편집] 대지 위치/면적: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8번지 외3필지 / 20,075m2(6,083평) 건축 연면적: 8,307m2(2,517평) 구 조: 지상2층 지하1층 시설내용: 상설전시 4실, 기획전시 1실, 어린이해양문화체험관 1실 등 보존처리소 (별관)[편집] 대지 위치/면적: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37번지 외 16필지 / 6,602m2(2,001평) 건축 연면적: 1,652m2 (500평) 시설내용: 문화재 보존 및 연구시설 건 물 6동: 1,204m2 (364평) 가건물 2동: 190m2 (58평) 탈염장 2동: 258m2 (78평) 태안보존처리시설[편집] 대지 위치/면적: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456번지 / 5,291m2(1,600평) 건축 연면적: 392m2 (118평) 시설내용: 문화재 보존 및 연구시설 탈염장 1동: 182m2(55평) 관리동 7동: 210m2(63평) 각주[편집] ↑ 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별표15의2 및 별표17제3호 ↑ 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제20조의7제1항 ↑ 임현각 (편집.). 《전국여행 슈퍼정보》 초판. 서울: (주)교학사. 117쪽.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초판발행일자= (도움말)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 ↑ 박희송 (2007년 3월 13일). “제16기 바다문화학교 운영…100명 선착순 모집”. 《뉴시스》. 2009년 3월 3일에 확인함. ↑ “[전남]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박물관 승격 '빨간불'”. 《데일리안》. 2007년 3월 6일. 2009년 3월 3일에 확인함. ↑ 형민우 (2008년 6월 23일). “깊은 잠에서 깨어난 천년의 '비색'”. 《연합뉴스》. 2009년 3월 3일에 확인함. ↑ 수중유물, 해양민속 등 포함. ↑ 대통령령 제12896호 ↑ 대통령령 제14251호 ↑ 대통령령 제14809호 ↑ 대통령령 제21407호 ↑ 대통령령 제26800호 ↑ 서기관·기술서기관·행정사무관·임업사무관 또는 시설사무관으로 보한다. ↑ 가 나 다 라 서기관 또는 학예연구관으로 보한다. ↑ 임기제공무원으로 보할 수 있다. ↑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제31조제1항에 따른 평가대상 조직으로 평가기간은 2019년 6월 30일까지다. 외부 링크[편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공식 웹사이트 vdeh 대한민국 문화재청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검찰청 병무청 방사청 경찰청 소방청 문화재청 농진청 산림청 특허청 기상청 행복청 새만금청 해경청 본청 소속 청장 차장 국립고궁박물관 현충사관리소 음봉분소 칠백의총관리소 만인의총관리소 국립무형유산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대한민국의 문화재청 소속 위원회 목록)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 전통문화교육원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창덕궁관리소 덕수궁관리소 창경궁관리소 종묘관리소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동부지구관리소 중부지구관리소 서부지구관리소 산하 공공기관 한국문화재재단 소관기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무형문화유산국제정보네트워킹센터 문화유산국민신탁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은 차관급 예우(특2호봉)를 받는다. vdeh 대한민국의 국립 박물관 국립 공립 사립 대학 국가정보원 안보전시관 (서울 서초구) 국토교통부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경기 수원시)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박물관 (경남 진주시) 기획재정부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 (대전 유성구) 농림축산식품부한국마사회 말박물관 (경기 과천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국립중앙과학관(대전 유성구) 국립과천과학관 (경기 과천시) 국립어린이과학관 (서울 종로구) 국립광주과학관 (광주 북구) 국립대구과학관 (대구 달성군) 국립부산과학관 (부산 기장군)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대전 유성구)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우주과학관 (전남 고흥시) 문화체육관광부 국립민속박물관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경기 과천시, 서울 종로구, 서울 중구, 충북 청주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 종로구) 국립한글박물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국립춘천박물관 (강원 춘천시) 국립청주박물관 (충북 청주시) 국립공주박물관 (충남 공주시) 국립부여박물관 (충남 부여군) 국립대구박물관 (대구 수성구) 국립경주박물관 (경북 경주시) 국립김해박물관 (경남 김해시) 국립진주박물관 (경남 진주시)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북구) 국립전주박물관 (전북 전주시) 국립익산박물관 (전북 익산시) 국립나주박물관 (전남 나주시) 국립제주박물관 (제주 제주시)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서울 중구) 여성가족부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국립여성사전시관 (경기 고양시) 지식경제부서울중앙우체국 우표박물관 (서울 중구)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 우정박물관 (충남 천안시) 해양수산부 국립해양박물관 (부산 영도구) 경찰청 경찰박물관 (서울 종로구) 관세청서울본부세관 관세박물관 (서울 강남구) 국세청서울지방국세청 조세박물관 (서울 종로구) 농촌진흥청국립농업과학원 잠사과학박물관 (경기 수원시) 산림청국립수목원 산림박물관 (경기 포천시) 그 외 국립등대박물관 (경북 포항시 · 항로표지기술협회) 독립기념관 (충남 천안시 · 국가보훈처) 전쟁기념관(서울 용산구 · 전쟁기념사업회) 제주항공우주박물관(제주 서귀포시 ·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철도박물관(경기 의왕시 · 한국철도공사) 한국체육박물관(서울 노원구 · 대한체육회) 화폐박물관(서울 중구 · 한국은행) 국립박물관문화재단 vdeh 책임운영기관소속책임운영기관조사연구형 기관조사 및 품질관리형 기관 국립종자원 화학물질안전원 국토지리정보원 항공교통본부 국립해양측위정보원 경인지방통계청 동북지방통계청 호남지방통계청 동남지방통계청 충청지방통계청 항공기상청 연구형 기관 국립재난안전연구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국립생물자원관 국립수산과학원 통계개발원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 국립산림과학원 국립수목원 국립기상과학원 교육훈련형 기관 국립국제교육원 통일교육원 한국농수산대학 해양수산인재개발원 관세국경관리연수원 문화형 기관 국립중앙과학관 국립과천과학관 국방홍보원 국립중앙극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궁능유적본부 의료형 기관 국립정신건강센터 국립나주병원 국립부곡병원 국립춘천병원 국립공주병원 국립마산병원 국립목포병원 국립재활원 경찰병원 시설관리형 기관 해양경찰정비창 국방전산정보원 국가정보자원관리원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 기타 유형의 기관 고용노동부고객상담센터 국세상담센터 중앙책임운영기관 특허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oldid=24123143" 분류: 2009년 설립대한민국 문화재청목포시 소재의 관공서책임운영기관전라남도의 박물관대한민국의 연구소숨은 분류: 인용 오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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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유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흥무대왕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김유신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유신金庾信 1926년에 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 생애 건복(建福) 12년(595년) ~ 문무왕 13년(673년) 8월 18일 (79세) 시대 신라 중고기(7세기) 시호 개국공(開國公),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 관직 관등: 태대각간, 직책: 대장군, 양하도총관, 봉상정경(당) 주군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가문 가락(김해) 김씨, 신김씨(新金氏) 정당 무소속 부모 아버지: 김서현, 어머니: 만명부인 배우자 영모 부인, 지소 부인 자녀 삼광(三光), 원술(元述), 원정(元貞), 장이(長耳), 원망(元望), 군승(軍勝) 등과 네 명의 딸 친척 김흠순(아우) 사당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울산 은월사(隱月祠), 군위 효령사, 양산 취서사(鷲棲祠), 진주 남악사(南岳祠), 광주(光州) 장렬사(壯烈祠), 전주 완산사, 부안 보령원(保寧院), 부여 부풍사(扶風祠), 정읍 태흥사(泰興祠), 진천 길상사(吉祥祠), 강릉 화부산사(花浮山祠), 화성(華城) 금산사(金山祠)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당나라군을 물리치며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관창,사다함 과함께신라의3대화랑이다 목차 1 출생 2 생애 2.1 유년기 2.2 청년기 2.2.1 낭비성 전투 2.2.2 김춘추와의 만남 2.2.3 백제와의 전쟁 2.2.4 비담의 난 2.3 장년기 2.4 노년기 2.4.1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 2.4.2 고구려의 멸망 2.4.3 나당전쟁 2.5 사망 3 행적 및 업적 4 인물 5 평가 6 묘소·사당 7 전설 7.1 출생 전설 7.2 김유신의 검(사인검/四寅劍) 7.3 백제의 공주와 작원성(鵲院城) 7.4 김유신의 원령 7.5 당교(唐橋) 7.6 기타 8 가계 8.1 선대 8.2 부인과 후손 8.3 형제 9 김유신이 등장한 작품 9.1 드라마 9.2 영화 9.3 소설 9.4 역사 평전 9.5 만화 10 함께 보기 11 각주 11.1 내용주 11.2 참조주 12 외부 링크 출생[편집] 《삼국사기》열전에 따르면, 그는 금관국(金官國)을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 손이라고 한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은 법흥왕(法興王)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무력(武力)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聖王)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서현(舒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냈다. 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野合)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禮記)》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庾)', '진(辰)'과 발음이 비슷한 '신(信)'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1][주해 1]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그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유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花郞)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다. 그는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청년기[편집] 낭비성 전투[편집] 건복 46년, 진평왕 51년(629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김유신이 군중에서 갖고 있던 직책은 《삼국사기》본기에는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下)에 중당(仲幢)이라는 부대명이 있지만, 이것이 설치된 것은 문무왕 11년(671년)의 일이다.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고취된 신라군은 다시 용기를 얻어 진격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고 한다. 김춘추와의 만남[편집] 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波珍湌) 김용춘(金龍春)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金春秋)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정월 오기일(烏忌日)[주해 2],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仁平)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주변)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그는 춘추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에 군사 1만(열전에는 3천)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해 출동 기일에 대한 칙허를 받아냈으며, 신라에 간첩으로 와있던 승려 덕창(德昌)의 보고를 접한 고구려 조정은 전쟁 방지를 위해 춘추를 석방해 무사히 풀려났다. 백제와의 전쟁[편집]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백제의 장군인 계백(階伯)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비담의 난[편집]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염종(廉宗) 등이 일으킨 반란(비담의 난)에서[주해 3] 명활성에 들어간 반란군과 맞서 유신은 춘추와 함께 월성에 설치된 진영에 주둔하며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할 징조다!”라고 말하여 반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이에 김유신은 몰래 허수아비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보낸 뒤,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란군이 동요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비담을 쳐서 9족을 모두 죽였다. 그 사이 선덕여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勝蔓)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었다. 장년기[편집]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데 성공했다. 승세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해에 당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춘추는 당의 황제로부터 원병 파병의 약속을 얻어내고, 아들 한 명을 당의 황제 옆에 남겨두어 숙위하게 한 뒤 귀국하고 있다.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殷相)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노년기[편집]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편집] 남산에 있는 김유신의 동상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閼川)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의 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가을 9월에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智炤)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 훗날의 문무왕)과 장군 김진주(金眞珠) ·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타고 당병이 주둔하는 덕물도로 갔고, 이곳에서 당병은 뱃길, 신라군은 땅으로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해 백제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 벌판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 가까스로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당초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드는 소정방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전에 당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태도로 맞서 끝내 소정방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고종으로부터 현지에서의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소정방이 유신과 김인문(金仁問) · 김양도(金良圖) 세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식읍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리만 상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곡한 말로 거절하고 있다.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병력만을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겸하며 통일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고구려의 멸망[편집] 당은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공격의 후방 기지로 삼는 동시에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땅 전역에서 시작된 흥복운동으로 그 계획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귀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지휘하는 백제 흥복군은 당병이 주둔하던 사비성을 포위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신라군은 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끊어진 사비성의 당병에게 소금과 간장을 보내주기에 급급했다. 한편 사비성이 함락된 해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해 칠중성(七重城)에서 성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고, 이듬해인 무열왕 8년(661년) 5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해 20일 동안 전투를 치르고서야 퇴각하고 있다. 9월에 신라와 당 사이의 주요 연락거점 한가운데에 위치해 백제군의 점거하에 있던 옹산성(瓮山城)이 함락되었고, 당병과의 연합작전 계획에 따라 신라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면책특권을 주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 · 김진복(金眞服) ·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진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신의 나이는 68세였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타고 건넜고 이에 모든 장병들이 따라서 강을 건넜다. 유신은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군이 도착했음을 소정방은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元曉)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친 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퇴각했다. 유신의 명령으로 당의 진영에 갔던 양도 등은 따로 군사 8백 명과 함께 뱃길로 귀국했는데, 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는 등의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수만 명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다시 추격해오자, 유신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해 패퇴시켰으며,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선발대로 뽑아 보냈던 열기와 구근에게 미리 급찬을 준 뒤, 문무왕에게 그들의 공로를 논하며 급찬보다 높은 사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백제 흥복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이 전권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재차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청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663년,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과 유신 등의 네 장수들이 이끄는 육군이 서로 육지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에 당 고종이 보낸 사신 양동벽(梁冬碧) · 임지고(任智高) 등이 유신을 문안하여, 그에게 봉상정경(奉常正卿) ·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라는 당의 관직을 주었다. 666년에는 맏아들인 대아찬(大阿飡) 삼광(三光)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당에 불려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서 고종을 숙위하게 되었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문무왕이 원정을 나가고 유신은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대신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김인문과 유신의 아우인 흠순(欽純)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월 26일에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다. 한편 이 날, 왜(倭)에서는 덴지 천황(天智天皇)의 근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신라의 사신인 사훼급찬(沙喙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에게 김유신에게 선물할 배 한 척을 호벤(法弁)·신비쓰(秦筆) 두 사문을 시켜 전달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2]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예전 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정에 봉사하며 세운 공과 유신이 그간 이룬 일들을 신료들 앞에서 술회하며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림과 동시에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유신의 요좌들에게도 모두 1등급씩 위계를 올려주고 있다. 당 고종 또한 김유신에게 조서(詔書)를 주었는데, 그 실물은 유신의 5세손 때까지 보전되다 실전되었다고 한다.[3] 이후 병으로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에는 참여하지는 못하고, 다만 왕실과 군사의 원로로서 왕에게 여러 차례 전략 수립에 대해 자문을 맡았다. 나당전쟁[편집]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통치할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미 당은 백제 흥복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664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고 문무왕을 호출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이는 당의 괴뢰정권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와 맞서게 하려는 것으로 신라에 의한 평양 이남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비열홀을 신라로부터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는 등, 당은 서서히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 다음으로 신라를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유신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병을 습격해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다져 나갔다. 고구려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은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벌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그만 대패하였다. 신라의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이 전투에 유신의 아들로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원술(元述)이 살아오자 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집안의 가풍을 더럽힌 죄'라 하여 법으로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원술을 사면했으나, 이후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여 이후 유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편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하자는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각지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웅진도독부 소속 당의 병졸들을 9월에 돌려보내고 사죄문의 형식을 담은 표문과 많은 물품을 당에 바쳤다. 사망[편집]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4] 라는 《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기일은 7월 1일, 향년 79세였다. 《삼국사기》열전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이 병을 얻기 한 달 전,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유신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를 지켜주던 음병(陰兵)이 내 복이 다함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김유신 자신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興德王, 《삼국유사》는 경명왕) 10년(835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5] 행적 및 업적[편집] 표시된 날짜는 서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력이다. 신라의 고유 연호를 쓰던 시기는 모두 연호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왕의 재위년도로 표기하였다. 왕대 및 연호 서기 날짜(음력) 내용 출처 건복(建福) 12년 595년 미상 태어남(1세) 《삼국사기》 건복 26년 609년 미상 화랑이 되어 용화낭도를 이끌게 됨(15세) 《삼국사기》본기 건복 28년 611년 미상 중악에 들어가 수도함(17세) 《삼국사기》본기 건복 29년 612년 미상 검술을 닦아 국선이 됨(18세) 《삼국유사》 건복 46년 629년 8월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여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킴(35세) 《삼국사기》본기 인평(仁平) 9년 642년 8월 백제 의자왕이 쳐들어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유신의 매제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이 모두 사망하다. 《삼국사기》본기 겨울? 압량주도독이 됨. 원병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다 억류된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모음(48세)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인평 11년 644년 9월 소판 관등에 오름. 상장군으로서 백제의 가혜성 등 일곱 성을 차지하고 가혜진을 열다(50세) 《삼국사기》본기 인평 12년 645년 정월 매리포성을 공격한 백제의 대군을 다시 상주장군으로서 나아가 격퇴하고 2천 명을 베다. 《삼국사기》본기 3월 왕명으로 백제를 치러 나가다.(50세) 《삼국사기》본기 인평 16년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여왕의 부덕을 빌미로 난을 일으키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정월 8일 선덕여왕이 사망하다. 《삼국사기》본기 정월 17일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고 그 9족을 주살하다. 《삼국사기》본기 10월 무산성 등 3성을 쳐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하다.(53세)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태화(太和) 원년 648년 3월 백제의 좌평 의직이 서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요거성 등 10성을 약탈하다. 《삼국사기》본기 4월 압량주군주로서 대야성을 공격, 반격하는 백제군을 옥문곡까지 유인하여 급습해 이기고 포로로 잡은 백제의 장수를 송환하는 대가로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반환받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백제의 악성 등 12성을 쳐서 함락시킴. 이찬 관등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이 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백제의 진례성 등 아홉 성을 공격. 《삼국사기》김유신열전 태화 2년 649년 8월 석토성 등지로 쳐들어온 백제의 장군 은상과의 전투에서 아군 진영에 침입한 간첩을 역이용하는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다.(54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진덕여왕 4년[주해 4] 650년 6월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소식이 사신을 통해 당나라에 알려지다.(55세) 《삼국사기》본기 진덕여왕 8년, 태종 무열왕 원년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승하하다. 화백회의에서 군신들을 설득해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다.(60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삼국유사》 태종 무열왕 2년 655년 8월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3개 성을 쳐부수다. 《삼국사기》신라본기,백제본기 9월 백제 땅에 들어가 백제의 도비천성을 함락시키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백제에 포로로 끌려가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던 전 굴압현령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접촉, 백제의 주요 정보를 빼내는데 성공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태종 무열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지조(智照)를 아내로 맞이하다.(61세) 《삼국사기》본기 태종 무열왕 7년 660년 정월 상대등 금강(金剛)의 사망으로 그 후임으로서 상대등이 되다. 《삼국사기》본기 3월 당 고종이 보낸 장수 소정방이 신라의 왕자 김인문과 함께 13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다. 《삼국사기》본기 5월 26일 태종 무열왕과 다른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다. 《삼국사기》본기 6월 18일 남천정에 이르다. 《삼국사기》본기 6월 21일 왕명으로 태자 법민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회견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9일 태자 법민과 함께 신라군을 지휘,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 군사를 격파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11일?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는 소정방에게 맞서 그가 물러나게 만들다. 《삼국사기》본기 7월 12일 진군을 늦추는 소정방을 독려하며 네 길로 나누어 소부리 벌판으로 진격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13일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태자 융과 좌평 사택천복 등을 포로로 잡다. 《삼국사기》본기 7월 18일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다.(백제 멸망) 《삼국사기》본기 8월 2일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다. 백제 땅을 들며 회유하려는 소정방의 꾐을 물리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알 수 없음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를 치려는 당나라군에 맞설 계획을 왕에게 진언하다.(66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9월 3일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족과 신료, 백성을 데리고 뱃길로 당나라로 돌아가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태종 무열왕 8년, 문무왕 원년 661년 6월 태종 무열왕 승하, 태자 법민이 즉위하여 문무왕이 되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김인문과 김유돈이 고구려를 칠 원병을 내라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전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17일 고구려 원정군의 대장군으로 임명되다. 《삼국사기》본기 8월 시이곡정(始飴谷停)에서 웅진의 당나라군으로부터 식량 보급 요청을 전해 듣다. 《삼국사기》본기 9월 19일 왕명을 받들어 웅현정(熊峴停)에 여러 총관들과 모여 서약하다. 《삼국사기》본기 9월 25일 백제 흥복군이 점령하고 있는 옹산성을 포위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9월 27일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으로 가는 군량 수송로를 뚫는데 성공, 이때 검을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 10월 29일 당나라의 조문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 서라벌로 돌아오다. 《삼국사기》본기 11월? 소정방이 보내온 당나라의 함자도총관 유덕민과 신라의 대감 문천이 평양을 포위한 당군에 군량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해오자, 유신 스스로 자원하여 평양으로 갈 것을 진언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12월 10일 부장군 김인문, 김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병사를 인솔하고 식량을 실어 고구려로 들어가다.(67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2년 662년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샛길로 산양 땅에 이르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2월 1일 평양과 가까운 장새에서 휘하의 보기감 열기 · 구근 등을 소정방에게 보내 신라군이 왔음을 알리게 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2월 6일 양오에 진을 치고 김인문과 김양도를 보내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준 뒤, 당군이 철수하자 곧 퇴각.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피해 표하를 건넌 뒤 반격하여 고구려군 1만 명을 전사시키고 그만큼의 병장기를 얻음. 이 공으로 본피궁의 토지와 노비, 보물을 은상으로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3년 663년 8월 13일 장수로서 문무왕을 따라 당군과 함께 백제 흥복군의 거점인 두솔성(주류성)을 쳐서 함락시키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11월 20일 백제 흥복군을 진압한 공적으로 토지 5백 결을 하사받다.(69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4년 664년 정월 자신의 고령을 들어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대신 궤장과 안석을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 3월 백제의 잔당들이 사비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5년 665년 미상 당 고종이 그를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로 봉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6년 666년 미상 당 고종이 아들인 아찬(본기에는 나마) 김삼광에게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직을 내림. 김삼광이 김천존의 아들 한림과 함께 숙위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7년 667년 가을 8월 고구려 원정군의 일원으로서 왕을 따라 장군의 자격으로 서울을 출발하다. 《삼국사기》본기 겨울 11월 11일 장새에서 당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에 군사를 돌리다. 《삼국사기》본기 문무왕 8년 668년 6월 21일 고구려 원정군의 최고 총사령관인 대당대총관에 임명(단 풍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머물렀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9월 26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키다(고구려 멸망).덴지 천황의 근신인 나가토미노 가마타리로부터 배 한 척을 선물받다. 《삼국사기》본기,《구당서》및 《일본서기》 10월 22일 태대서발한(태대각간)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하사받고, 수레나 지팡이와 더불어 대궐에 오를 때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9년 669년 겨울? 말 기르는 목장 6곳을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 문무왕 12년 672년 7월 고구려 흥복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이 석문(石門) 벌판에서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에 패하다. 당군에 맞서 방어전을 펼칠 것을 진언하면서, 비장으로서 참전했으면서 살아남은 아들 원술의 처형을 요청하지만 허락되지 않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13년 673년 7월 1일 자신의 집에서 사망. 향년 79세.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인물[편집] 유신의 인물상은 대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것이 전부다. 유년시절의 일화로 유명한 것은 《파한집》(破閑集)에 수록된 것으로, 소년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까지 내버린 채 돌아왔다. 사후 그녀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주해 5] 가치관 같은 것을 보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별이 왕궁인 월성에 떨어진 것에 기세가 오른 반군을 상대로 놀라 어쩔줄 모르는 여왕과 신료들을 향해 "길함과 불길함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1] 이라며 일축하는 개명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백강까지 도착한 당군 장수 소정방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장군의 진영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원수(元首)가 해를 입을 징조'라 하여 겁먹고 상륙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소정방은 그제서야 의구심을 풀고 군사를 백강에 상륙시켜 전투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6] 다만 이 기록은 소정방이 백강에서 상륙하기 직전 김유신은 백강이 아니라 황산벌에 있었다는 시간적 모순이 생겨, 후대 사람들이 김유신을 부각시키고 일부러 소정방의 용렬함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거나 비슷한 사건이 전투 초기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온 김유신이지만, 황산벌 전투로 약속 기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기일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죄를 주려 한다. 아무 죄도 없이 나는 이따위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당병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7] 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소정방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당병이 아직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그들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그들과 싸울 계책을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신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8][주해 6] 라 말하여,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원술에 대해 "왕명을 어기고 가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3] 라 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실제로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훗날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 무열왕계 독재의 강화와 함께 그의 자손이 신라 정계로부터 냉대받으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3][주해 7] 《삼국사기》속의 일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다만 그의 전술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대체로 칭찬보다는 비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골품이나 신분, 관례보다는 능력과 공적을 중시해, 662년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병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데에 공을 세운 휘하의 열기 · 구근에게 사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며,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왕의 지적에 "벼슬은 공적을 담는 그릇으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주해 8] 라는 말로 기어이 두 사람의 관등 수여를 관철시키고 있다. 평가[편집] 이미 신라 당대부터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으로 숭앙받았다.[주해 9]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 알려진 문무왕과 함께 김유신은 33천의 하나가 되어 신라를 진호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현신(賢臣) 위징(魏徵)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것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6][9]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설총과 더불어 그를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세웠으며,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무왕과 그 신료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문무왕은 그의 조부 때부터 신라 조정에 봉사해 온 일을 들며,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으니, 공의 일가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3] 며 김유신의 공적을 추켜세우면서 관직과 은상을 올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신하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구근(仇近) 구근은 열기와 함께 김유신의 명으로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으로 김유신의 추천을 받아 사찬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파진찬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경(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는데, 원정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구근이 일을 게을리 한다며 곤장을 치자, 구근은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께서는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으시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셨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소.”라며 억울해했고, 원정은 이 말에 평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10] 윤관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은 평소 김유신을 존경했으며, 여진 정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이라 여름이었는데도 강물이 얼어붙어 군사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니,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11] 다만 이것이 언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김부식 《삼국사기》열전 말미에서 김부식은 유신의 재능뿐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믿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공업을 이루었다며 신라 조정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는 한편으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잊혀질뻔 했는데 김유신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사대부는 물론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다며,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보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인용된 사론에서는 유신을 두고 "충분(忠憤)한 마음과 영위(英偉)한 지략을 기울여 통일의 공을 이루고 위(位)는 장상(將相)을 겸하여, 몸소 국가의 안위를 도맡아 20여 년 동안 우뚝 국가의 장성(長城)"이 된,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적당한 때를 얻어 그 큰 공을 이룬 자"라 평가하며, "어려움을 두루 겪으면서 국사를 위하여 몸을 바쳐 공명과 충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전하였으니, 유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비길 만한 데가 드물다"고 호평하면서도[12],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것에 대해서는 고대 주(周)의 성왕(成王)이 숙부이자 재상이었던 주공(周公)의 제사를 천자의 그것과 준하게 한 일을 들어, 아무리 공이 크다고는 하지만 "신하로서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군신의 명분을 문란하게 만든" 처사라 비판하고 있다.[5] 부정적 평가로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5천 군사의 계백과 맞서 싸웠으나 계백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군사의 수가 10배인 김유신의 신라군이 계백의 결사대와의 전투에서 오래 지체하면서 백제군 총합의 2배인 1만에 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유신이 계백에게 패배한 전투였다는 평가도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답보 상태에 빠진 대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화랑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볼모로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어린 화랑을 희생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었고 우세한 군세를 이용한 다양한 전술 구사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며 김유신이 뛰어난 지략가라는 미사여구는 과장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백제 정벌은 당나라가 주도했고 고구려는 순전히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정권다툼으로 인한 내부의 분열로 자멸한 측면이 있으며 당나라와의 전장에 김유신은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구려의 군력 자체는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둘 정도로 당나라보다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의 아들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자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은 공정한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추종자들이 미화한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더군다나 김유신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 고구려의 멸망 자체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한 것인 데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마자 바로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건국해서 고구려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는 발해가 차지했다는 점으로 보면 김유신은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했다고 봐야 옳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김유신이 왕가의 외척이 되기 위해 그의 누이들을 이용했다는 점을 들어, 출세의 수단으로 가족을 이용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묘소·사당[편집] 김유신장군묘으로 가는 흥무문 정면사진 김유신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지사 북쪽 봉우리에 있고 부(府)와는 서쪽으로 4리 거리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쪽 서악리(西岳里)라 기록되었다. 김유신의 것이라 전하는 묘소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에 있는데 이것이 진짜 김유신의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자세한 것은 김유신묘 항목을 참조할 것). 이 묘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국가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로 주석(柱石)을 세우고 거기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을 새기는 것은 신라에서는 왕의 무덤에만 허락된 것이었다. 김유신의 묘가 지금과 같은 왕릉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아마도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덤 면적은 14,143m2이다. 경주시 위치한 김유신장군의 무덤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의 무덤 앞에는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해 새긴 비석이 세워졌는데,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설인선(薛因宣)이 그 비문을 지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비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임하필기》에는 그의 묘비가 경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으며, 경주부사를 지냈던 홍양호가 그 묘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다가 20년 뒤에 이서구(李書九)가 금석첩(金石帖) 속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탁본한 것 몇 장을 발견했는데, 필법이 구양순체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존하는 무덤 앞의 비석은 후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하나에는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다른 하나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새겨져 있는데, 비석을 새길 당시 그가 흥덕왕으로부터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묘(墓)」라 적었다가 나중에야 그 글자 위를 덮고 다시 「능(陵)」자로 고쳐 새겼다. 하지만 비석의 원래 재질과 글자를 메워넣은 재료의 재질이 서로 달라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능」이라는 글자 뒤에 가려진 「묘」자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우고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년에 정비되었으며, 뒷산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탯줄을 이 산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경주에는 명종 18년(1561년)에 당시의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靜舍)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과 1610년에 걸쳐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새로 지었고, 인조 원년(1623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고 지금의 서악서원(西岳書院)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에 더해 최치원과 설총을 더 배향하게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전설[편집] 출생 전설[편집]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국선이 되었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모의하던 중에 백석이란 낭도로부터 적국을 염탐하고 오자는 제의를 받아 밤에 길을 가던 중, 고개 위에서 우연히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을 즈음 유신으로부터 밤길의 목적을 듣고 여자들은 잠시 백석을 여기 두고 숲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유신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들은 신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유신에게 백석은 적국의 사람으로 유신을 꾀어 적지로 데려가려 한다며 경고한 뒤 사라졌다. 골화관에 이르러 유신은 백석에게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온 뒤, 백석을 잡아 문초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석의 말은 이러했다. 백석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에서 국경의 강물이 역류하는 괴변이 생기자 고구려의 왕은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은 「왕비가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점괘를 내놓았고, 노한 왕비는 왕에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다른 것으로 시험해보아 맞지 않으면 추남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왕은 쥐 한 마리를 상자에 숨겨놓고 추남에게 상자에 든 것을 맞히게 했는데, 추남은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숫자는 한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라고 대답했다. 결국 처형당하게 된 추남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왕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추남의 점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날 밤 고구려왕은 처형당한 추남이 신라 김서현의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추남이 신라에서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판단한 고구려왕과 그 신하들은 백석을 시켜 유신을 꾀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백석을 처형한 뒤 자신을 구해준 세 신들에게 제사지내어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세 신은 실은 내림·혈례·골화 세 지역의 신으로,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제사에서 시조묘나 종묘 다음으로 격이 높은 대사(大祀)로서 우대하였다. 김유신의 검(사인검/四寅劍)[편집] 김유신의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서라벌 중악(中嶽)에서 선인을 만나 신비로운 비법을 전수받고, 기도 수행하다 별의 정기가 서린 보검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는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17세의 유신이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머문지 나흘째 되는 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귀한 집의 자제가 어째서 여기에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유신이 노인의 이름을 묻자 노인은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 없이 인연을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 유신은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처음에는 묵묵히 말이 없던 난승은 유신이 여러 번 간청하자 그제야 신비한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유신에게 비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니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난승과 유신은 작별하였다. 그가 2리쯤 갔을 때 유신이 쫓아가 바라보니, 난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산 위에는 오색의 찬란한 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건복 29년(612년) 유신은 다시 한 번 보검을 가지고 혼자서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중악에서 했던 것처럼 향을 피우며 하늘을 향해 보검에 빛을 드리우고 신령을 내려줄 것을 기도했다. 사흘째 되는 밤,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었다. 이후 김유신의 검은 별의 정기를 품은 영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의 단석산에는 마치 칼로 잘라낸 듯 표면이 반듯반듯한 바위가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현지의 전승은 그것이 유신이 이곳에서 검술 수련을 하며 바위를 잘랐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강릉에서 행해지는 강릉단오제는 김유신의 검이 명주(溟州) 남쪽의 선지사라는 절에서 90일 만에 주조되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 유신의 검은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13] 이 검을 가지고 유신은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고 죽은 뒤 명주 대관령의 산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단석산뿐 아니라 인근의 여러 산과 계곡, 동굴 등지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곳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백제의 공주와 작원성(鵲院城)[편집] 경주시 건천읍에는 작원성, 또는 작성(鵲城)이라는 토성이 남아 있는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성의 이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백제를 공격할 당시 김유신이 서라벌 왕궁에서 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백제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자, 둔갑술에 능하여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싸우는 자용병기(自勇兵器)라는 신비한 무기를 부릴 줄 알았던 공주가 왕을 안심시키고자 자청해서 까치로 변신하여 이곳으로 날아왔다. 서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가 대장기 끝에 앉아 울자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해 진중(陳中)이 크게 어수선해졌는데, 김유신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겨누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만 변신이 풀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이 성의 이름을 까치 작(鵲) 자를 써서 작성, 또는 작원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유신의 원령[편집] 전(傳) 미추왕릉 《삼국유사》 미추왕죽엽군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14년(779년) 4월에 김유신의 무덤 위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김유신이 여러 병사를 거느리고 미추왕(味鄒王)의 능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 안에서 탄식하고 통곡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살아서 평생 어지러운 것을 구제하였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죽어 혼백이 되었어도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에서 구제하려는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는데, 지난 경술년(770년)에[주해 10] 내 자손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나라의 왕과 신하, 그 누구도 더 이상 나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더 이상 이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으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김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무덤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즉 미추왕)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전처럼 힘써 주기 바라노라.」 라고 대답했고, 똑같은 요청을 세 번이나 더 했지만 세 번 모두 거절당하자 김유신의 혼령은 다시 돌아갔다. 이것은 김유신의 영혼이 후손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해한 나머지, 신라 왕실(김씨)의 시조인 미추왕에게 항의하며 호소한 것이었다. 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대신(大臣)인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사죄하게 하고, 김유신이 생전에 평양을 함락시킨 뒤 복을 빌기 위해 세웠던 절인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당교(唐橋)[편집] 한국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과 문경시의 경계에 위치한 모전천이라는 강에는 당교(唐橋)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가 있었는데, 《삼국유사》는 《신라고전》(三國遺事)이라는 문헌을 인용해, 당군의 총관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나서도 돌아가지 않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품고 있자 이를 눈치챈 김유신이 이곳 당교에 당의 병사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베푸는 척 짐주(짐새 독을 넣은 술)를 먹여 독살해 파묻었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다만 이 전설에 대해서는 이를 수록한 일연 자신도 의문을 제기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기타[편집]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밀교승 밀본과 관련해서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인용된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다섯 설화 가운데 「노옹화구(老翁化狗)」와 「죽통미녀(竹桶美女)」는 김유신이 등장하는 설화이다. 가계[편집] 김유신은 외고조부인 신라 진흥왕과는 이중 삼중의 인척관계였는데, 외할아버지 숙흘종의 백부이자 외할아버지로서 외종증조부이자 외고조부이기도 했다. 그의 할머니 박씨의 언니 보도부인의 남편은 진흥왕의 손자로 진평왕은 그의 대이모부이기도 했고, 매제 태종무열왕의 종증조부이기도 했다. 선대[편집] 증조부 : 김구해(金仇亥)[주해 11] 증조모 : 계화부인(桂花夫人, 생몰년 미상) 조부 : 김무력[주해 12] 외조모: 사도왕후 박씨(思道王后 朴氏, ? ~ 614년 2월)는 신라 진흥왕의 왕후로, 동륜태자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 김서현(金舒玄)[주해 13] 어머니 : 만명부인(萬明夫人) - 숙흘종의 딸 부인과 후손[편집] 첫 번째부인 : 영모부인(英毛 夫人) - 하종의 딸. 별칭은 재매부인이다. 장남 : 김삼광(金三光) - 관등은 이찬.(정사에는 두번째 정실부인 지소부인의 첫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서는 영모부인 소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손자 : 김윤중(金允中) 관등은 대아찬. 성덕왕이 윤문 등 세 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당병과 함께 발해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큰 눈이 와서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손자 : 김윤문(金允文) 장녀 : 진광부인 - 김흠돌의 아내. 차녀 : 신광부인 - 문무왕의 후궁. 삼녀 : 작광부인 - 보로전군의 아내. 사녀 : 영광부인 - 반굴의 아내. 부인 : 유모부인 - 하종의 딸. 영모 부인과 자매지간,14대 풍월주 호림공과 혼인하였다. 조카&부인 : 지소부인 - 무열왕과 문명왕후 소생으로 외조카. 차남 : 김원술(金元述) - 관등은 소판.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뒤 숨어지냈다. 삼남 : 김원정(金元貞) - 관등은 해간(海干). 현손 : 김암(金巖) 사남 : 김장이(金長耳) - 관등은 대아찬. 오남 : 김원망(金元望) - 관등은 대아찬. 부인 : 천관 부인 육남 : 김군승(金郡承) 또는 김시득(金施得) 형제[편집] 남동생 : 김흠순(金欽純) 조카 : 김반굴 - 김유신의 딸인 영광부인과 결혼하여 형제끼리 사돈 사이임. 여동생 : 영창부인(永昌夫人) 김보희(金寶姬) - 무열왕의 3째 부인,2계비,2왕후 매제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 신라 29대 왕 여동생 :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金文姬) - 훗날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에게 시집가서 문무왕을 낳음. 계비이자 왕후이다. 조카 : 문무왕(文武王) 김법민(金法敏) - 신라 30대 왕. 조카 : 김인문 (金仁文) 조카며느리 : 자의왕후 김씨 (慈義王后 金氏) - 김선품(金善品)의 딸. 여동생 : 김정희 - 김흠돌의 어머니. 김유신이 등장한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KBS 드라마 《삼국기》 (1992년~1993년, 서인석) SBS 드라마 《연개소문》 (2006년~2007년, 윤승원, 이종수, 이다윗) MBC 드라마 《선덕여왕》 (2009년, 엄태웅, 이현우) MBC 드라마 《계백》 (2011년, 박성웅) KBS 드라마 《대왕의 꿈》 (2012년~2013년, 김유석, 노영학) 영화[편집] 《천관녀》 (1963년, 역: 김진규) 《황산벌》 (2003년, 역: 정진영) 《평양성》 (2011년, 역: 정진영) 소설[편집] 《김유신》 윤승한 《삼한지》 김정산 《김유신의 머리일까》 차무진 《고구려》(전6권) 정수인 《문무》(전3권) 장태우 《여황선덕》(전2권) 제성욱 《계백의 칼》(전2권) 황운성 《선덕여왕》 정진영 《천년전쟁》(전2권) 역사 평전[편집]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글 황윤 그림 손광산 만화[편집] 《천관녀》(글: 박윤후, 그림: 조미현) 《사라사》(글, 그림: 류량) 《데자부》봄편(글: 윤인완, 그림: 양경일) 함께 보기[편집] 경주 김유신묘 태종 무열왕 삼국 통일 황산벌 전투 화랑도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중국 북주의 문장가이자 관인이었던 유신(庾信)과도 이름이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 해는 구체적으로 몇 년도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문무왕이 태어난 626년에서 멀지 않은 이전 시점으로 여겨진다. ↑ 당시 신라 왕실에 선덕여왕을 계승할 수 있는 근친 왕족은 성골인 여왕의 사촌 승만 공주와, 진골이지만 6촌인 김춘추밖에 없었고, 그들을 제외한다면, 방계 진골 귀족인 비담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 이때부터 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오늘날에는 천관녀가 기녀가 아니라는 이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천관'이라는 이름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무녀를 뜻한다는 것이다. ↑ 단재 신채호는 이에 대해 김유신이 당병의 야욕을 눈치채고 신라쪽에서 먼저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당을 선제공격하자고 요청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삼국유사》권제1, 기이1 미추왕죽엽군조에도 이것이 기재되어 있다. ↑ 《삼국사기》권제47, 열전7 열기(裂起). 당시 열기는 신라군 내의 보기감(步騎監)을 맡고 있었는데, 보기감은 신라에서 군사감(軍師監)과 함께 사지에서 나마(奈麻)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맡던 관직으로(《삼국사기》직관지), 급찬이나 사찬으로 오른다는 것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 경영학자 예종석은 김유신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장군으로 평가하였다. 신라의 장군들은 화랑 반굴과 관창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 그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들도 국방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김유신도 이러한 신념에 따라 식량을 운반하는 위험한 일을 자원하였으며, 아들 원술이 석문벌 싸움에서 끝까지 싸우지 않고 도주한 것을 미워하여 절연하였다는 것이다. 살림지식총서《노블리스 오블리주》/예종석 옮김/살림 ↑ 신라 혜공왕 6년. 이 해 가을 8월에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 구해왕 혹은 구형왕은 금관가야(가락국)의 마지막 왕이다. ↑ 김유신의 할머니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근년에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는 성을 박씨, 법흥왕의 비였던 보도부인 박씨의 누이동생이라 했다. ↑ 필사본 《화랑세기》는 법흥왕비 보도부인의 이종조카라고 했다. 참조주[편집] ↑ 가 나 《삼국사기》권제41, 열전1 김유신 상(上) ↑ 《일본서기》권27, 덴지키(天智紀) 7년(668) ↑ 가 나 다 라 《삼국사기》권제43, 열전3 김유신 하(下). ↑ 《시경》대아(大雅)편 '탕(蕩)'. ↑ 가 나 《동사강목》권제5상(上), 을묘 【흥덕왕 10년, 당 문종 태화 9년】 ↑ 가 나 《삼국유사》권제1, 기이2 태종춘추공. ↑ 《삼국사기》권제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11일조. ↑ 《삼국사기》권제42, 열전2 김유신 중(中). ↑ 《삼국사》권제8, 신라본기8 신문왕 12년(692년) ↑ 《삼국사기》권제47, 열전7 구근 ↑ 《고려사》권96, 열전제9 제신(諸臣) 윤관조 「尹公, 事業傑然, 嘗慕庾信氏之爲人曰 '庾信, 六月冰河, 以渡三軍, 此無他, 至誠而已. 予亦何人哉?'」 ↑ 《동사강목》제4하(下), 문무왕 13년(673년). ↑ 《성소부부고》권14, 문부(文部)11 대령산신찬(大領山神讚) · 병서(幷序)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김유신 한국 포털 역사 포털 네이버 캐스트 - 김유신 김유신: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임호림공 제15대 풍월주 후임보종공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유신&oldid=24544823" 분류: 595년 태어남673년 죽음화랑한국의 장군가야의 왕족가야 김수로왕신라의 왕족진천군 출신신라의 무신신라의 정치인자유 연애한국의 추존왕병사한 사람김해 김씨무속의 신각간김유신여당전쟁 관련자신라의 불교 신자태종무열왕문무왕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کوردیEnglishEspañolفارسی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онголNorsk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ไทยУкраїнська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8일 (월) 18: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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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김유신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유신金庾信 1926년에 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 생애 건복(建福) 12년(595년) ~ 문무왕 13년(673년) 8월 18일 (79세) 시대 신라 중고기(7세기) 시호 개국공(開國公),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 관직 관등: 태대각간, 직책: 대장군, 양하도총관, 봉상정경(당) 주군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가문 가락(김해) 김씨, 신김씨(新金氏) 정당 무소속 부모 아버지: 김서현, 어머니: 만명부인 배우자 영모 부인, 지소 부인 자녀 삼광(三光), 원술(元述), 원정(元貞), 장이(長耳), 원망(元望), 군승(軍勝) 등과 네 명의 딸 친척 김흠순(아우) 사당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울산 은월사(隱月祠), 군위 효령사, 양산 취서사(鷲棲祠), 진주 남악사(南岳祠), 광주(光州) 장렬사(壯烈祠), 전주 완산사, 부안 보령원(保寧院), 부여 부풍사(扶風祠), 정읍 태흥사(泰興祠), 진천 길상사(吉祥祠), 강릉 화부산사(花浮山祠), 화성(華城) 금산사(金山祠)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당나라군을 물리치며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관창,사다함 과함께신라의3대화랑이다 목차 1 출생 2 생애 2.1 유년기 2.2 청년기 2.2.1 낭비성 전투 2.2.2 김춘추와의 만남 2.2.3 백제와의 전쟁 2.2.4 비담의 난 2.3 장년기 2.4 노년기 2.4.1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 2.4.2 고구려의 멸망 2.4.3 나당전쟁 2.5 사망 3 행적 및 업적 4 인물 5 평가 6 묘소·사당 7 전설 7.1 출생 전설 7.2 김유신의 검(사인검/四寅劍) 7.3 백제의 공주와 작원성(鵲院城) 7.4 김유신의 원령 7.5 당교(唐橋) 7.6 기타 8 가계 8.1 선대 8.2 부인과 후손 8.3 형제 9 김유신이 등장한 작품 9.1 드라마 9.2 영화 9.3 소설 9.4 역사 평전 9.5 만화 10 함께 보기 11 각주 11.1 내용주 11.2 참조주 12 외부 링크 출생[편집] 《삼국사기》열전에 따르면, 그는 금관국(金官國)을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 손이라고 한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은 법흥왕(法興王)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무력(武力)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聖王)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서현(舒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냈다. 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野合)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禮記)》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庾)', '진(辰)'과 발음이 비슷한 '신(信)'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1][주해 1]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그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유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花郞)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다. 그는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청년기[편집] 낭비성 전투[편집] 건복 46년, 진평왕 51년(629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김유신이 군중에서 갖고 있던 직책은 《삼국사기》본기에는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下)에 중당(仲幢)이라는 부대명이 있지만, 이것이 설치된 것은 문무왕 11년(671년)의 일이다.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고취된 신라군은 다시 용기를 얻어 진격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고 한다. 김춘추와의 만남[편집] 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波珍湌) 김용춘(金龍春)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金春秋)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정월 오기일(烏忌日)[주해 2],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仁平)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주변)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그는 춘추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에 군사 1만(열전에는 3천)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해 출동 기일에 대한 칙허를 받아냈으며, 신라에 간첩으로 와있던 승려 덕창(德昌)의 보고를 접한 고구려 조정은 전쟁 방지를 위해 춘추를 석방해 무사히 풀려났다. 백제와의 전쟁[편집]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백제의 장군인 계백(階伯)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비담의 난[편집]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염종(廉宗) 등이 일으킨 반란(비담의 난)에서[주해 3] 명활성에 들어간 반란군과 맞서 유신은 춘추와 함께 월성에 설치된 진영에 주둔하며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할 징조다!”라고 말하여 반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이에 김유신은 몰래 허수아비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보낸 뒤,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란군이 동요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비담을 쳐서 9족을 모두 죽였다. 그 사이 선덕여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勝蔓)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었다. 장년기[편집]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데 성공했다. 승세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해에 당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춘추는 당의 황제로부터 원병 파병의 약속을 얻어내고, 아들 한 명을 당의 황제 옆에 남겨두어 숙위하게 한 뒤 귀국하고 있다.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殷相)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노년기[편집]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편집] 남산에 있는 김유신의 동상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閼川)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의 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가을 9월에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智炤)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 훗날의 문무왕)과 장군 김진주(金眞珠) ·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타고 당병이 주둔하는 덕물도로 갔고, 이곳에서 당병은 뱃길, 신라군은 땅으로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해 백제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 벌판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 가까스로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당초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드는 소정방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전에 당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태도로 맞서 끝내 소정방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고종으로부터 현지에서의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소정방이 유신과 김인문(金仁問) · 김양도(金良圖) 세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식읍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리만 상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곡한 말로 거절하고 있다.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병력만을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겸하며 통일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고구려의 멸망[편집] 당은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공격의 후방 기지로 삼는 동시에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땅 전역에서 시작된 흥복운동으로 그 계획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귀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지휘하는 백제 흥복군은 당병이 주둔하던 사비성을 포위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신라군은 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끊어진 사비성의 당병에게 소금과 간장을 보내주기에 급급했다. 한편 사비성이 함락된 해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해 칠중성(七重城)에서 성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고, 이듬해인 무열왕 8년(661년) 5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해 20일 동안 전투를 치르고서야 퇴각하고 있다. 9월에 신라와 당 사이의 주요 연락거점 한가운데에 위치해 백제군의 점거하에 있던 옹산성(瓮山城)이 함락되었고, 당병과의 연합작전 계획에 따라 신라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면책특권을 주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 · 김진복(金眞服) ·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진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신의 나이는 68세였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타고 건넜고 이에 모든 장병들이 따라서 강을 건넜다. 유신은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군이 도착했음을 소정방은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元曉)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친 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퇴각했다. 유신의 명령으로 당의 진영에 갔던 양도 등은 따로 군사 8백 명과 함께 뱃길로 귀국했는데, 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는 등의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수만 명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다시 추격해오자, 유신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해 패퇴시켰으며,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선발대로 뽑아 보냈던 열기와 구근에게 미리 급찬을 준 뒤, 문무왕에게 그들의 공로를 논하며 급찬보다 높은 사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백제 흥복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이 전권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재차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청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663년,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과 유신 등의 네 장수들이 이끄는 육군이 서로 육지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에 당 고종이 보낸 사신 양동벽(梁冬碧) · 임지고(任智高) 등이 유신을 문안하여, 그에게 봉상정경(奉常正卿) ·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라는 당의 관직을 주었다. 666년에는 맏아들인 대아찬(大阿飡) 삼광(三光)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당에 불려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서 고종을 숙위하게 되었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문무왕이 원정을 나가고 유신은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대신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김인문과 유신의 아우인 흠순(欽純)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월 26일에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다. 한편 이 날, 왜(倭)에서는 덴지 천황(天智天皇)의 근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신라의 사신인 사훼급찬(沙喙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에게 김유신에게 선물할 배 한 척을 호벤(法弁)·신비쓰(秦筆) 두 사문을 시켜 전달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2]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예전 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정에 봉사하며 세운 공과 유신이 그간 이룬 일들을 신료들 앞에서 술회하며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림과 동시에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유신의 요좌들에게도 모두 1등급씩 위계를 올려주고 있다. 당 고종 또한 김유신에게 조서(詔書)를 주었는데, 그 실물은 유신의 5세손 때까지 보전되다 실전되었다고 한다.[3] 이후 병으로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에는 참여하지는 못하고, 다만 왕실과 군사의 원로로서 왕에게 여러 차례 전략 수립에 대해 자문을 맡았다. 나당전쟁[편집]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통치할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미 당은 백제 흥복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664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고 문무왕을 호출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이는 당의 괴뢰정권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와 맞서게 하려는 것으로 신라에 의한 평양 이남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비열홀을 신라로부터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는 등, 당은 서서히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 다음으로 신라를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유신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병을 습격해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다져 나갔다. 고구려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은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벌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그만 대패하였다. 신라의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이 전투에 유신의 아들로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원술(元述)이 살아오자 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집안의 가풍을 더럽힌 죄'라 하여 법으로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원술을 사면했으나, 이후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여 이후 유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편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하자는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각지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웅진도독부 소속 당의 병졸들을 9월에 돌려보내고 사죄문의 형식을 담은 표문과 많은 물품을 당에 바쳤다. 사망[편집]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4] 라는 《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기일은 7월 1일, 향년 79세였다. 《삼국사기》열전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이 병을 얻기 한 달 전,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유신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를 지켜주던 음병(陰兵)이 내 복이 다함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김유신 자신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興德王, 《삼국유사》는 경명왕) 10년(835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5] 행적 및 업적[편집] 표시된 날짜는 서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력이다. 신라의 고유 연호를 쓰던 시기는 모두 연호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왕의 재위년도로 표기하였다. 왕대 및 연호 서기 날짜(음력) 내용 출처 건복(建福) 12년 595년 미상 태어남(1세) 《삼국사기》 건복 26년 609년 미상 화랑이 되어 용화낭도를 이끌게 됨(15세) 《삼국사기》본기 건복 28년 611년 미상 중악에 들어가 수도함(17세) 《삼국사기》본기 건복 29년 612년 미상 검술을 닦아 국선이 됨(18세) 《삼국유사》 건복 46년 629년 8월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여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킴(35세) 《삼국사기》본기 인평(仁平) 9년 642년 8월 백제 의자왕이 쳐들어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유신의 매제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이 모두 사망하다. 《삼국사기》본기 겨울? 압량주도독이 됨. 원병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다 억류된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모음(48세)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인평 11년 644년 9월 소판 관등에 오름. 상장군으로서 백제의 가혜성 등 일곱 성을 차지하고 가혜진을 열다(50세) 《삼국사기》본기 인평 12년 645년 정월 매리포성을 공격한 백제의 대군을 다시 상주장군으로서 나아가 격퇴하고 2천 명을 베다. 《삼국사기》본기 3월 왕명으로 백제를 치러 나가다.(50세) 《삼국사기》본기 인평 16년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여왕의 부덕을 빌미로 난을 일으키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정월 8일 선덕여왕이 사망하다. 《삼국사기》본기 정월 17일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고 그 9족을 주살하다. 《삼국사기》본기 10월 무산성 등 3성을 쳐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하다.(53세)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태화(太和) 원년 648년 3월 백제의 좌평 의직이 서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요거성 등 10성을 약탈하다. 《삼국사기》본기 4월 압량주군주로서 대야성을 공격, 반격하는 백제군을 옥문곡까지 유인하여 급습해 이기고 포로로 잡은 백제의 장수를 송환하는 대가로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반환받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백제의 악성 등 12성을 쳐서 함락시킴. 이찬 관등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이 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백제의 진례성 등 아홉 성을 공격. 《삼국사기》김유신열전 태화 2년 649년 8월 석토성 등지로 쳐들어온 백제의 장군 은상과의 전투에서 아군 진영에 침입한 간첩을 역이용하는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다.(54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진덕여왕 4년[주해 4] 650년 6월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소식이 사신을 통해 당나라에 알려지다.(55세) 《삼국사기》본기 진덕여왕 8년, 태종 무열왕 원년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승하하다. 화백회의에서 군신들을 설득해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다.(60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삼국유사》 태종 무열왕 2년 655년 8월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3개 성을 쳐부수다. 《삼국사기》신라본기,백제본기 9월 백제 땅에 들어가 백제의 도비천성을 함락시키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백제에 포로로 끌려가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던 전 굴압현령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접촉, 백제의 주요 정보를 빼내는데 성공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미상 태종 무열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지조(智照)를 아내로 맞이하다.(61세) 《삼국사기》본기 태종 무열왕 7년 660년 정월 상대등 금강(金剛)의 사망으로 그 후임으로서 상대등이 되다. 《삼국사기》본기 3월 당 고종이 보낸 장수 소정방이 신라의 왕자 김인문과 함께 13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다. 《삼국사기》본기 5월 26일 태종 무열왕과 다른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다. 《삼국사기》본기 6월 18일 남천정에 이르다. 《삼국사기》본기 6월 21일 왕명으로 태자 법민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회견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9일 태자 법민과 함께 신라군을 지휘,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 군사를 격파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11일?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는 소정방에게 맞서 그가 물러나게 만들다. 《삼국사기》본기 7월 12일 진군을 늦추는 소정방을 독려하며 네 길로 나누어 소부리 벌판으로 진격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13일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태자 융과 좌평 사택천복 등을 포로로 잡다. 《삼국사기》본기 7월 18일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다.(백제 멸망) 《삼국사기》본기 8월 2일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다. 백제 땅을 들며 회유하려는 소정방의 꾐을 물리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알 수 없음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를 치려는 당나라군에 맞설 계획을 왕에게 진언하다.(66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9월 3일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족과 신료, 백성을 데리고 뱃길로 당나라로 돌아가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태종 무열왕 8년, 문무왕 원년 661년 6월 태종 무열왕 승하, 태자 법민이 즉위하여 문무왕이 되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김인문과 김유돈이 고구려를 칠 원병을 내라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전하다. 《삼국사기》본기 7월 17일 고구려 원정군의 대장군으로 임명되다. 《삼국사기》본기 8월 시이곡정(始飴谷停)에서 웅진의 당나라군으로부터 식량 보급 요청을 전해 듣다. 《삼국사기》본기 9월 19일 왕명을 받들어 웅현정(熊峴停)에 여러 총관들과 모여 서약하다. 《삼국사기》본기 9월 25일 백제 흥복군이 점령하고 있는 옹산성을 포위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9월 27일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으로 가는 군량 수송로를 뚫는데 성공, 이때 검을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 10월 29일 당나라의 조문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 서라벌로 돌아오다. 《삼국사기》본기 11월? 소정방이 보내온 당나라의 함자도총관 유덕민과 신라의 대감 문천이 평양을 포위한 당군에 군량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해오자, 유신 스스로 자원하여 평양으로 갈 것을 진언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12월 10일 부장군 김인문, 김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병사를 인솔하고 식량을 실어 고구려로 들어가다.(67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2년 662년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샛길로 산양 땅에 이르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2월 1일 평양과 가까운 장새에서 휘하의 보기감 열기 · 구근 등을 소정방에게 보내 신라군이 왔음을 알리게 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2월 6일 양오에 진을 치고 김인문과 김양도를 보내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준 뒤, 당군이 철수하자 곧 퇴각.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피해 표하를 건넌 뒤 반격하여 고구려군 1만 명을 전사시키고 그만큼의 병장기를 얻음. 이 공으로 본피궁의 토지와 노비, 보물을 은상으로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3년 663년 8월 13일 장수로서 문무왕을 따라 당군과 함께 백제 흥복군의 거점인 두솔성(주류성)을 쳐서 함락시키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11월 20일 백제 흥복군을 진압한 공적으로 토지 5백 결을 하사받다.(69세)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4년 664년 정월 자신의 고령을 들어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대신 궤장과 안석을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 3월 백제의 잔당들이 사비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5년 665년 미상 당 고종이 그를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로 봉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6년 666년 미상 당 고종이 아들인 아찬(본기에는 나마) 김삼광에게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직을 내림. 김삼광이 김천존의 아들 한림과 함께 숙위하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 문무왕 7년 667년 가을 8월 고구려 원정군의 일원으로서 왕을 따라 장군의 자격으로 서울을 출발하다. 《삼국사기》본기 겨울 11월 11일 장새에서 당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에 군사를 돌리다. 《삼국사기》본기 문무왕 8년 668년 6월 21일 고구려 원정군의 최고 총사령관인 대당대총관에 임명(단 풍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머물렀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9월 26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키다(고구려 멸망).덴지 천황의 근신인 나가토미노 가마타리로부터 배 한 척을 선물받다. 《삼국사기》본기,《구당서》및 《일본서기》 10월 22일 태대서발한(태대각간)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하사받고, 수레나 지팡이와 더불어 대궐에 오를 때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9년 669년 겨울? 말 기르는 목장 6곳을 하사받다. 《삼국사기》본기 문무왕 12년 672년 7월 고구려 흥복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이 석문(石門) 벌판에서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에 패하다. 당군에 맞서 방어전을 펼칠 것을 진언하면서, 비장으로서 참전했으면서 살아남은 아들 원술의 처형을 요청하지만 허락되지 않다.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문무왕 13년 673년 7월 1일 자신의 집에서 사망. 향년 79세. 《삼국사기》본기,김유신열전 인물[편집] 유신의 인물상은 대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것이 전부다. 유년시절의 일화로 유명한 것은 《파한집》(破閑集)에 수록된 것으로, 소년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까지 내버린 채 돌아왔다. 사후 그녀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주해 5] 가치관 같은 것을 보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별이 왕궁인 월성에 떨어진 것에 기세가 오른 반군을 상대로 놀라 어쩔줄 모르는 여왕과 신료들을 향해 "길함과 불길함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1] 이라며 일축하는 개명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백강까지 도착한 당군 장수 소정방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장군의 진영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원수(元首)가 해를 입을 징조'라 하여 겁먹고 상륙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소정방은 그제서야 의구심을 풀고 군사를 백강에 상륙시켜 전투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6] 다만 이 기록은 소정방이 백강에서 상륙하기 직전 김유신은 백강이 아니라 황산벌에 있었다는 시간적 모순이 생겨, 후대 사람들이 김유신을 부각시키고 일부러 소정방의 용렬함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거나 비슷한 사건이 전투 초기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온 김유신이지만, 황산벌 전투로 약속 기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기일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죄를 주려 한다. 아무 죄도 없이 나는 이따위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당병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7] 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소정방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당병이 아직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그들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그들과 싸울 계책을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신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8][주해 6] 라 말하여,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원술에 대해 "왕명을 어기고 가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3] 라 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실제로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훗날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 무열왕계 독재의 강화와 함께 그의 자손이 신라 정계로부터 냉대받으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3][주해 7] 《삼국사기》속의 일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다만 그의 전술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대체로 칭찬보다는 비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골품이나 신분, 관례보다는 능력과 공적을 중시해, 662년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병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데에 공을 세운 휘하의 열기 · 구근에게 사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며,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왕의 지적에 "벼슬은 공적을 담는 그릇으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주해 8] 라는 말로 기어이 두 사람의 관등 수여를 관철시키고 있다. 평가[편집] 이미 신라 당대부터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으로 숭앙받았다.[주해 9]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 알려진 문무왕과 함께 김유신은 33천의 하나가 되어 신라를 진호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현신(賢臣) 위징(魏徵)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것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6][9]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설총과 더불어 그를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세웠으며,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무왕과 그 신료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문무왕은 그의 조부 때부터 신라 조정에 봉사해 온 일을 들며,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으니, 공의 일가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3] 며 김유신의 공적을 추켜세우면서 관직과 은상을 올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신하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구근(仇近) 구근은 열기와 함께 김유신의 명으로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으로 김유신의 추천을 받아 사찬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파진찬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경(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는데, 원정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구근이 일을 게을리 한다며 곤장을 치자, 구근은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께서는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으시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셨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소.”라며 억울해했고, 원정은 이 말에 평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10] 윤관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은 평소 김유신을 존경했으며, 여진 정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이라 여름이었는데도 강물이 얼어붙어 군사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니,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11] 다만 이것이 언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김부식 《삼국사기》열전 말미에서 김부식은 유신의 재능뿐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믿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공업을 이루었다며 신라 조정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는 한편으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잊혀질뻔 했는데 김유신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사대부는 물론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다며,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보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인용된 사론에서는 유신을 두고 "충분(忠憤)한 마음과 영위(英偉)한 지략을 기울여 통일의 공을 이루고 위(位)는 장상(將相)을 겸하여, 몸소 국가의 안위를 도맡아 20여 년 동안 우뚝 국가의 장성(長城)"이 된,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적당한 때를 얻어 그 큰 공을 이룬 자"라 평가하며, "어려움을 두루 겪으면서 국사를 위하여 몸을 바쳐 공명과 충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전하였으니, 유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비길 만한 데가 드물다"고 호평하면서도[12], 흥덕왕이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것에 대해서는 고대 주(周)의 성왕(成王)이 숙부이자 재상이었던 주공(周公)의 제사를 천자의 그것과 준하게 한 일을 들어, 아무리 공이 크다고는 하지만 "신하로서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군신의 명분을 문란하게 만든" 처사라 비판하고 있다.[5] 부정적 평가로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5천 군사의 계백과 맞서 싸웠으나 계백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군사의 수가 10배인 김유신의 신라군이 계백의 결사대와의 전투에서 오래 지체하면서 백제군 총합의 2배인 1만에 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유신이 계백에게 패배한 전투였다는 평가도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답보 상태에 빠진 대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화랑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볼모로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어린 화랑을 희생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었고 우세한 군세를 이용한 다양한 전술 구사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며 김유신이 뛰어난 지략가라는 미사여구는 과장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백제 정벌은 당나라가 주도했고 고구려는 순전히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정권다툼으로 인한 내부의 분열로 자멸한 측면이 있으며 당나라와의 전장에 김유신은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구려의 군력 자체는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둘 정도로 당나라보다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의 아들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자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은 공정한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추종자들이 미화한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더군다나 김유신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 고구려의 멸망 자체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한 것인 데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마자 바로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건국해서 고구려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는 발해가 차지했다는 점으로 보면 김유신은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했다고 봐야 옳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김유신이 왕가의 외척이 되기 위해 그의 누이들을 이용했다는 점을 들어, 출세의 수단으로 가족을 이용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묘소·사당[편집] 김유신장군묘으로 가는 흥무문 정면사진 김유신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지사 북쪽 봉우리에 있고 부(府)와는 서쪽으로 4리 거리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쪽 서악리(西岳里)라 기록되었다. 김유신의 것이라 전하는 묘소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에 있는데 이것이 진짜 김유신의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자세한 것은 김유신묘 항목을 참조할 것). 이 묘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국가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로 주석(柱石)을 세우고 거기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을 새기는 것은 신라에서는 왕의 무덤에만 허락된 것이었다. 김유신의 묘가 지금과 같은 왕릉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아마도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덤 면적은 14,143m2이다. 경주시 위치한 김유신장군의 무덤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의 무덤 앞에는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해 새긴 비석이 세워졌는데,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설인선(薛因宣)이 그 비문을 지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비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임하필기》에는 그의 묘비가 경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으며, 경주부사를 지냈던 홍양호가 그 묘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다가 20년 뒤에 이서구(李書九)가 금석첩(金石帖) 속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탁본한 것 몇 장을 발견했는데, 필법이 구양순체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존하는 무덤 앞의 비석은 후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하나에는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다른 하나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새겨져 있는데, 비석을 새길 당시 그가 흥덕왕으로부터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묘(墓)」라 적었다가 나중에야 그 글자 위를 덮고 다시 「능(陵)」자로 고쳐 새겼다. 하지만 비석의 원래 재질과 글자를 메워넣은 재료의 재질이 서로 달라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능」이라는 글자 뒤에 가려진 「묘」자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우고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년에 정비되었으며, 뒷산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탯줄을 이 산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경주에는 명종 18년(1561년)에 당시의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靜舍)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과 1610년에 걸쳐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새로 지었고, 인조 원년(1623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고 지금의 서악서원(西岳書院)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에 더해 최치원과 설총을 더 배향하게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전설[편집] 출생 전설[편집]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국선이 되었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모의하던 중에 백석이란 낭도로부터 적국을 염탐하고 오자는 제의를 받아 밤에 길을 가던 중, 고개 위에서 우연히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을 즈음 유신으로부터 밤길의 목적을 듣고 여자들은 잠시 백석을 여기 두고 숲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유신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들은 신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유신에게 백석은 적국의 사람으로 유신을 꾀어 적지로 데려가려 한다며 경고한 뒤 사라졌다. 골화관에 이르러 유신은 백석에게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온 뒤, 백석을 잡아 문초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석의 말은 이러했다. 백석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에서 국경의 강물이 역류하는 괴변이 생기자 고구려의 왕은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은 「왕비가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점괘를 내놓았고, 노한 왕비는 왕에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다른 것으로 시험해보아 맞지 않으면 추남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왕은 쥐 한 마리를 상자에 숨겨놓고 추남에게 상자에 든 것을 맞히게 했는데, 추남은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숫자는 한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라고 대답했다. 결국 처형당하게 된 추남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왕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추남의 점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날 밤 고구려왕은 처형당한 추남이 신라 김서현의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추남이 신라에서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판단한 고구려왕과 그 신하들은 백석을 시켜 유신을 꾀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백석을 처형한 뒤 자신을 구해준 세 신들에게 제사지내어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세 신은 실은 내림·혈례·골화 세 지역의 신으로,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제사에서 시조묘나 종묘 다음으로 격이 높은 대사(大祀)로서 우대하였다. 김유신의 검(사인검/四寅劍)[편집] 김유신의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서라벌 중악(中嶽)에서 선인을 만나 신비로운 비법을 전수받고, 기도 수행하다 별의 정기가 서린 보검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는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17세의 유신이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머문지 나흘째 되는 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귀한 집의 자제가 어째서 여기에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유신이 노인의 이름을 묻자 노인은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 없이 인연을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 유신은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처음에는 묵묵히 말이 없던 난승은 유신이 여러 번 간청하자 그제야 신비한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유신에게 비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니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난승과 유신은 작별하였다. 그가 2리쯤 갔을 때 유신이 쫓아가 바라보니, 난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산 위에는 오색의 찬란한 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건복 29년(612년) 유신은 다시 한 번 보검을 가지고 혼자서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중악에서 했던 것처럼 향을 피우며 하늘을 향해 보검에 빛을 드리우고 신령을 내려줄 것을 기도했다. 사흘째 되는 밤,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었다. 이후 김유신의 검은 별의 정기를 품은 영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의 단석산에는 마치 칼로 잘라낸 듯 표면이 반듯반듯한 바위가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현지의 전승은 그것이 유신이 이곳에서 검술 수련을 하며 바위를 잘랐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강릉에서 행해지는 강릉단오제는 김유신의 검이 명주(溟州) 남쪽의 선지사라는 절에서 90일 만에 주조되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 유신의 검은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13] 이 검을 가지고 유신은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고 죽은 뒤 명주 대관령의 산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단석산뿐 아니라 인근의 여러 산과 계곡, 동굴 등지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곳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백제의 공주와 작원성(鵲院城)[편집] 경주시 건천읍에는 작원성, 또는 작성(鵲城)이라는 토성이 남아 있는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성의 이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백제를 공격할 당시 김유신이 서라벌 왕궁에서 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백제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자, 둔갑술에 능하여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싸우는 자용병기(自勇兵器)라는 신비한 무기를 부릴 줄 알았던 공주가 왕을 안심시키고자 자청해서 까치로 변신하여 이곳으로 날아왔다. 서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가 대장기 끝에 앉아 울자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해 진중(陳中)이 크게 어수선해졌는데, 김유신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겨누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만 변신이 풀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이 성의 이름을 까치 작(鵲) 자를 써서 작성, 또는 작원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유신의 원령[편집] 전(傳) 미추왕릉 《삼국유사》 미추왕죽엽군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14년(779년) 4월에 김유신의 무덤 위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김유신이 여러 병사를 거느리고 미추왕(味鄒王)의 능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 안에서 탄식하고 통곡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살아서 평생 어지러운 것을 구제하였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죽어 혼백이 되었어도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에서 구제하려는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는데, 지난 경술년(770년)에[주해 10] 내 자손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나라의 왕과 신하, 그 누구도 더 이상 나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더 이상 이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으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김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무덤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즉 미추왕)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전처럼 힘써 주기 바라노라.」 라고 대답했고, 똑같은 요청을 세 번이나 더 했지만 세 번 모두 거절당하자 김유신의 혼령은 다시 돌아갔다. 이것은 김유신의 영혼이 후손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해한 나머지, 신라 왕실(김씨)의 시조인 미추왕에게 항의하며 호소한 것이었다. 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대신(大臣)인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사죄하게 하고, 김유신이 생전에 평양을 함락시킨 뒤 복을 빌기 위해 세웠던 절인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당교(唐橋)[편집] 한국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과 문경시의 경계에 위치한 모전천이라는 강에는 당교(唐橋)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가 있었는데, 《삼국유사》는 《신라고전》(三國遺事)이라는 문헌을 인용해, 당군의 총관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나서도 돌아가지 않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품고 있자 이를 눈치챈 김유신이 이곳 당교에 당의 병사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베푸는 척 짐주(짐새 독을 넣은 술)를 먹여 독살해 파묻었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다만 이 전설에 대해서는 이를 수록한 일연 자신도 의문을 제기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기타[편집]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밀교승 밀본과 관련해서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인용된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다섯 설화 가운데 「노옹화구(老翁化狗)」와 「죽통미녀(竹桶美女)」는 김유신이 등장하는 설화이다. 가계[편집] 김유신은 외고조부인 신라 진흥왕과는 이중 삼중의 인척관계였는데, 외할아버지 숙흘종의 백부이자 외할아버지로서 외종증조부이자 외고조부이기도 했다. 그의 할머니 박씨의 언니 보도부인의 남편은 진흥왕의 손자로 진평왕은 그의 대이모부이기도 했고, 매제 태종무열왕의 종증조부이기도 했다. 선대[편집] 증조부 : 김구해(金仇亥)[주해 11] 증조모 : 계화부인(桂花夫人, 생몰년 미상) 조부 : 김무력[주해 12] 외조모: 사도왕후 박씨(思道王后 朴氏, ? ~ 614년 2월)는 신라 진흥왕의 왕후로, 동륜태자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 김서현(金舒玄)[주해 13] 어머니 : 만명부인(萬明夫人) - 숙흘종의 딸 부인과 후손[편집] 첫 번째부인 : 영모부인(英毛 夫人) - 하종의 딸. 별칭은 재매부인이다. 장남 : 김삼광(金三光) - 관등은 이찬.(정사에는 두번째 정실부인 지소부인의 첫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서는 영모부인 소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손자 : 김윤중(金允中) 관등은 대아찬. 성덕왕이 윤문 등 세 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당병과 함께 발해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큰 눈이 와서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손자 : 김윤문(金允文) 장녀 : 진광부인 - 김흠돌의 아내. 차녀 : 신광부인 - 문무왕의 후궁. 삼녀 : 작광부인 - 보로전군의 아내. 사녀 : 영광부인 - 반굴의 아내. 부인 : 유모부인 - 하종의 딸. 영모 부인과 자매지간,14대 풍월주 호림공과 혼인하였다. 조카&부인 : 지소부인 - 무열왕과 문명왕후 소생으로 외조카. 차남 : 김원술(金元述) - 관등은 소판.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뒤 숨어지냈다. 삼남 : 김원정(金元貞) - 관등은 해간(海干). 현손 : 김암(金巖) 사남 : 김장이(金長耳) - 관등은 대아찬. 오남 : 김원망(金元望) - 관등은 대아찬. 부인 : 천관 부인 육남 : 김군승(金郡承) 또는 김시득(金施得) 형제[편집] 남동생 : 김흠순(金欽純) 조카 : 김반굴 - 김유신의 딸인 영광부인과 결혼하여 형제끼리 사돈 사이임. 여동생 : 영창부인(永昌夫人) 김보희(金寶姬) - 무열왕의 3째 부인,2계비,2왕후 매제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 신라 29대 왕 여동생 :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金文姬) - 훗날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에게 시집가서 문무왕을 낳음. 계비이자 왕후이다. 조카 : 문무왕(文武王) 김법민(金法敏) - 신라 30대 왕. 조카 : 김인문 (金仁文) 조카며느리 : 자의왕후 김씨 (慈義王后 金氏) - 김선품(金善品)의 딸. 여동생 : 김정희 - 김흠돌의 어머니. 김유신이 등장한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KBS 드라마 《삼국기》 (1992년~1993년, 서인석) SBS 드라마 《연개소문》 (2006년~2007년, 윤승원, 이종수, 이다윗) MBC 드라마 《선덕여왕》 (2009년, 엄태웅, 이현우) MBC 드라마 《계백》 (2011년, 박성웅) KBS 드라마 《대왕의 꿈》 (2012년~2013년, 김유석, 노영학) 영화[편집] 《천관녀》 (1963년, 역: 김진규) 《황산벌》 (2003년, 역: 정진영) 《평양성》 (2011년, 역: 정진영) 소설[편집] 《김유신》 윤승한 《삼한지》 김정산 《김유신의 머리일까》 차무진 《고구려》(전6권) 정수인 《문무》(전3권) 장태우 《여황선덕》(전2권) 제성욱 《계백의 칼》(전2권) 황운성 《선덕여왕》 정진영 《천년전쟁》(전2권) 역사 평전[편집]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글 황윤 그림 손광산 만화[편집] 《천관녀》(글: 박윤후, 그림: 조미현) 《사라사》(글, 그림: 류량) 《데자부》봄편(글: 윤인완, 그림: 양경일) 함께 보기[편집] 경주 김유신묘 태종 무열왕 삼국 통일 황산벌 전투 화랑도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중국 북주의 문장가이자 관인이었던 유신(庾信)과도 이름이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 해는 구체적으로 몇 년도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문무왕이 태어난 626년에서 멀지 않은 이전 시점으로 여겨진다. ↑ 당시 신라 왕실에 선덕여왕을 계승할 수 있는 근친 왕족은 성골인 여왕의 사촌 승만 공주와, 진골이지만 6촌인 김춘추밖에 없었고, 그들을 제외한다면, 방계 진골 귀족인 비담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 이때부터 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오늘날에는 천관녀가 기녀가 아니라는 이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천관'이라는 이름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무녀를 뜻한다는 것이다. ↑ 단재 신채호는 이에 대해 김유신이 당병의 야욕을 눈치채고 신라쪽에서 먼저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당을 선제공격하자고 요청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삼국유사》권제1, 기이1 미추왕죽엽군조에도 이것이 기재되어 있다. ↑ 《삼국사기》권제47, 열전7 열기(裂起). 당시 열기는 신라군 내의 보기감(步騎監)을 맡고 있었는데, 보기감은 신라에서 군사감(軍師監)과 함께 사지에서 나마(奈麻)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맡던 관직으로(《삼국사기》직관지), 급찬이나 사찬으로 오른다는 것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 경영학자 예종석은 김유신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장군으로 평가하였다. 신라의 장군들은 화랑 반굴과 관창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 그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들도 국방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김유신도 이러한 신념에 따라 식량을 운반하는 위험한 일을 자원하였으며, 아들 원술이 석문벌 싸움에서 끝까지 싸우지 않고 도주한 것을 미워하여 절연하였다는 것이다. 살림지식총서《노블리스 오블리주》/예종석 옮김/살림 ↑ 신라 혜공왕 6년. 이 해 가을 8월에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 구해왕 혹은 구형왕은 금관가야(가락국)의 마지막 왕이다. ↑ 김유신의 할머니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근년에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는 성을 박씨, 법흥왕의 비였던 보도부인 박씨의 누이동생이라 했다. ↑ 필사본 《화랑세기》는 법흥왕비 보도부인의 이종조카라고 했다. 참조주[편집] ↑ 가 나 《삼국사기》권제41, 열전1 김유신 상(上) ↑ 《일본서기》권27, 덴지키(天智紀) 7년(668) ↑ 가 나 다 라 《삼국사기》권제43, 열전3 김유신 하(下). ↑ 《시경》대아(大雅)편 '탕(蕩)'. ↑ 가 나 《동사강목》권제5상(上), 을묘 【흥덕왕 10년, 당 문종 태화 9년】 ↑ 가 나 《삼국유사》권제1, 기이2 태종춘추공. ↑ 《삼국사기》권제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11일조. ↑ 《삼국사기》권제42, 열전2 김유신 중(中). ↑ 《삼국사》권제8, 신라본기8 신문왕 12년(692년) ↑ 《삼국사기》권제47, 열전7 구근 ↑ 《고려사》권96, 열전제9 제신(諸臣) 윤관조 「尹公, 事業傑然, 嘗慕庾信氏之爲人曰 '庾信, 六月冰河, 以渡三軍, 此無他, 至誠而已. 予亦何人哉?'」 ↑ 《동사강목》제4하(下), 문무왕 13년(673년). ↑ 《성소부부고》권14, 문부(文部)11 대령산신찬(大領山神讚) · 병서(幷序)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김유신 한국 포털 역사 포털 네이버 캐스트 - 김유신 김유신: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임호림공 제15대 풍월주 후임보종공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유신&oldid=24544823" 분류: 595년 태어남673년 죽음화랑한국의 장군가야의 왕족가야 김수로왕신라의 왕족진천군 출신신라의 무신신라의 정치인자유 연애한국의 추존왕병사한 사람김해 김씨무속의 신각간김유신여당전쟁 관련자신라의 불교 신자태종무열왕문무왕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کوردیEnglishEspañolفارسی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МонголNorsk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ไทยУкраїнська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8일 (월) 18: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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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1868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인영 (1868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인영(李麟榮, 1868년 9월 23일~1909년 9월 20일)은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아호는 중남(中南). 목차 1 생애 2 사후 3 같이 보기 4 참고자료 생애[편집]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여 유학을 익히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여주를 기반으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무력으로는 관군과 일본군을 당하기 힘들었고,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은 의병대를 해체하고 문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0년 후인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또다시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1907년 이미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대를 조직한 이은찬의 권유로 그는 관동창의대장을 맡으며 다시 격문을 뿌리고 거병하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지역에 의병 활동이 산개됨에 따라 이들 의병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의병 조직은 한성부로 진공할 계획을 세우고 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을 구성했다. 허위와 함께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총대장에 올랐다. 그의 휘하로 모여든 의병의 숫자는 약 8천여 명가량이었으며 허위, 민긍호, 이강년 등 유명한 의병장들이 함께 했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결사대원을 선발하고 격문을 외국 영사관에 전달한 뒤 양주에서부터 서울 진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패퇴하여 서울 탈환에 실패한 직후인 1월 28일,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하여 총대장에서 사임했다. 그는 이후 가명을 쓰면서 숨어 지냈고, 허위가 대신 지휘를 맡은 연합군은 관군에게 섬멸되어 허위는 사형을 당했다. 3년상을 치르며 은신하던 이인영도 1909년 6월 7일 충청북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서도 일본 천황과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곧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 동생 이은영도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독립 운동가이다. 같이 보기[편집] 13도 창의군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목록 참고자료[편집]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네이버 캐스트, 1993년 경상북도 이지홈, 자랑스런 경북인 - 이인영 오영섭,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2), 도서출판선인. 2007년 - 제3부 한말 고종세력과 연합의병장의 관계 vdeh1993년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 1월 최익현 2월 조만식 3월 황병길 4월 노백린 5월 조명하 6월 윤세주 7월 나철 8월 남자현 9월 이인영 10월 이장녕 11월 정인보 12월 오동진 vdeh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강기동 권동진 권병덕 김동삼 김상옥 김성수 김완규 김익상 김지섭 나석주 나용환 나인협 남상덕 남자현 노백린 민긍호 민종식 박동완 박승환 박은식 박준승 백용성 신규식 신돌석 신채호 신홍식 양기탁 양전백 양한묵 연기우 오세창 유여대 유인석 이갑성 이동녕 이명룡 이범윤 이봉창 이상설 이상재 이위종 이은찬 이인영 이재명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장인환 전명운 전해산 조성환 지청천 최성모 편강렬 홍기조 홍범도 홍병기 문태수 신석구 이범석 정환직 진성 당계요 배설 송교인 여천민 임삼 호한민 황흥 우빈 손과 주가화 이승희 주시경 김하락 장건상 김붕준 박열 안재홍 오화영 유동열 윤기섭 조완구 김병조 문창범 박용만 이동휘 채상덕 최석순 구춘선 김경천 여운형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인영_(1868년)&oldid=21892447" 분류: 1868년 태어남1909년 죽음교수형된 사람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한말 의병장13도 창의군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7월 28일 (토) 14:2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을미사변이 발생한 해는? |
김생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생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생기(金生基, 1947년 2월 6일 ~ )는 전라북도 정읍시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장이다. 본관은 도강이며, 전라북도 정읍시 출신이다. 목차 1 학력 2 생애 3 역대 선거 결과 4 외부 링크 학력[편집] 정읍 감곡초등학교 졸업 전주북중학교 졸업 전주신흥고등학교 졸업 전북대학교 농화학과 졸업 생애[편집] 2004 ~ 2006년 제17대 국회의장 정무수석 비서관 2007년 3월 ~ 2009년 제17대 대한석유협회 회장 2010년 7월 ~ 2014년 6월 제6대 전라북도 정읍시장 2014년 7월 ~ 2017년 12월 제7대 전라북도 정읍시장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지방 선거 5대 시장 전북 정읍시 열린우리당 19,024 표 31.77% 2위 낙선 민선 4기 지방 선거 6대 시장 전북 정읍시 민주당 24,866 표 39.38% 1위 초선, 민선 5기 지방 선거 7대 시장 전북 정읍시 새정치민주연합 29,799 표 49.81% 1위 재선, 민선 6기 외부 링크[편집] 전임강광 제6·7대 전라북도 정읍시장(민선)2010년 7월 1일 ~ 2017년 12월 22일 후임(권한대행)김용만 유진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생기&oldid=24134502" 분류: 1947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정읍시 출신도강 김씨감곡초등학교 (전북) 동문전주북중학교 동문전주신흥고등학교 동문전북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정읍시장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2일 (목) 00: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생기가 5대 지방선거에서 얻은 표수는 총 몇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