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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공작 필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든버러 공작 필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든버러 공작 필립 에든버러 공작 필립(2015년) 지위 영국 여왕 부군 (영국 군주 배우자) 재위 1952년 2월 3일 ~ 전임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에든버러 공작 재위 1947년 11월 20일 ~ 전임자 앨프레드 이름 휘 필립 마운트배튼 신상정보 출생일 1921년 6월 10일(1921-06-10) (98세) 출생지 그리스 왕국 케르키라 가문 글뤽스부르크 가 부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 모친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 배우자 엘리자베스 2세 자녀 웨일스 공 찰스프린세스 로열 앤요크 공작 앤드루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종교 영국 성공회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The Duke of Edinburgh, Philip Mountbatten, 1921년 6월 10일 ~ ) 또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그리스어: Πρίγκιπας Φίλιππο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프링기파스 필리포스 티스 엘라다스 케 티스 다니아스[*])는 영국과 그리스의 왕족으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다. 또한 예비역 영국 해군 중령 예편한 그는 덴마크의 왕족이기도 하다. 본래 그리스와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왕자였던 필립은 결혼한 직후에 그 위계를 포기했지만 그의 문장에 포함된 그리스의 국기(푸른 바탕에 하얀 십자가)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엘리자베스와 약혼한 동시에 그는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로 공표되었으며, 1947년 11월 20일, 그는 국왕 조지 6세의 상속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였다. 조지 6세는 필립 공에게 결혼 전에는 전하라는 호칭을, 결혼 초기에는 에든버러 공작과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1957년,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립에게 영국의 왕자 작위를 주었다. 영국 시민권을 얻음에 영국 국민이 된 필립 공의 성은 외가인 바텐베르크가를 영어로 번역한 마운트배튼으로 지어졌다. 한편 필립 공이 하노버의 소피아의 후손으로서 1705년 소피아 귀화법에 따라 원래부터 영국 국민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졌다.[1] 그의 친할머니 올가 왕비의 외5대조모가 조지 2세의 딸이었다. 또한 부계로는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인 알렉산드라가 필립의 증대고모 할머니가 된다. 필립은 왕실에서의 직책에 더하여 에든버러 공작 어워드와 세계 자연보호 기금 등을 포함한 많은 단체의 후원자이자 2010년까지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이었고[2],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56년에 남극 제도를 방문하고나서부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대중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반 세기 동안 이 내용을 주제로 포괄적인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스의 왕족이기도 한 필립은 오랫동안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으며, 영국과 영국 연방의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하였다. 2011년 12월 심장에 관상 동맥경화가 발생하여 90세의 나이로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2012년 6월,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행사가 템즈 강에서 진행되었다. 91세의 고령인 필립 공은 약 두 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배 위에 서 있었던 후유증(급성 방광염)으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어, 나머지 축하행사에는 불참하게 되었다. 80대까지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필립 공은 90대에 접어들며 기력이 떨어져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96세를 맞은 2017년 5월 4일, 영국 왕실과 정부는 필립 공이 왕실 일가의 공식 업무를 가을부터 중단한다고 밝혔다. 목차 1 생애 1.1 초기 삶 1.2 영국군 활동 1.3 결혼 1.4 부군 2 직함과 칭호, 문장 2.1 직함과 칭호 2.2 문장 3 기타 3.1 논란 4 자녀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는 1921년 6월 10일에 이오니아 해에 있는 코르푸 섬의 빌라 몬 레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왕국의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와 올가 왕비의 넷째 아들인 안드레아스 왕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초대 밀퍼드헤이번 후작 루이스 마운트배튼(과거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과 헤센다름슈타트의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이다. 필립의 어머니인 앨리스 공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테네에 있는 유대인 은신처를 보호하며 인생 마지막을 그리스 정교회의 수녀로 살다 갔다. 또한, 그녀는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제2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과 제1대 마운트배튼오브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누이이기도 하다. 필립은 그리스의 왕족이었지만 본래 덴마크-스웨덴의 혈통으로, 필립의 고조부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4대손이기도 하다. 할머니 쪽으로는 할머니 올가의 외가 쪽으로 조지 2세의 후손이 된다. 필립은 태어난 지 며칠 지나서 코르푸 섬 하도코스에 있는 파라이오 프로우리오에 있는 성 게오르기오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공녀는 코르푸 섬에 있는 대저택에서 18개월간 지냈다. 당시 그리스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격변기에 놓여 있었으며, 왕정이 곧 전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22년 9월 22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혁명 재판소는 왕의 동생인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때마침 운좋게도 영국의 조지 5세가 영국 해군 소속 함선 HMS 칼립소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자, 필립의 가족은 오렌지 상자로 만든 집에 숨어 안전하게 운송되었다. 필립에게는 네 명의 누나들(그녀들 모두 독일인 왕자들과 결혼했음)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들보다 오래 살았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 (1905–1981); 제8대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작 고트프리드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테오도라 (1906–1969); 바덴의 마르크그라프 베르톨트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체칠리아 (1911–1937); 게오르크 도나투스 폰 헤센다름슈타트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소피아 (1914–2001); 헤센 카셀의 크리스토프와 결혼하였으나, 1943년에 공작이 재해사고로 사망하자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결혼함. 1937년 필립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비극이 일어났다. 필립의 누나 체칠리아와 그녀의 남편 게오르그 도나투스, 시어머니 엘레오노레 그리고 두 어린 아들 알렉산더와 루드비히가 벨기에 오스텐더에서 일어난 사베나 항공기 추락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필립은 다름슈타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영국군 활동[편집] 1939년에 고든스톤으로 이사한 필립은 1940년 다트머스 해군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다음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다. 해군 사관후보생이 된 필립은 전함 HMS 라밀리즈에 타 6개월을 인도양에서 보냈다. 1941년 1월, 지중해 함대에 배치된 전함 HMS 밸리언트에 탄 필립은 크레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마타판 해협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리스 십자 훈장을 받았다. 또한, 1941년에는 HMS 엠프리스 오브 러시아 수송군의 보일러 연료를 지피는 것을 도왔던 적도 있었다. 1942년 7월에는 해군 중위로 승진하여 V&W급 수뢰 구축함 HMS 월러스에서 근무하면서 호위와 호송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7월 16일에 대위로 진급한 데 이어서, 1942년 10월에는 소형선의 부장이 되었다(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소형선 부장으로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젊은 축에 속했음). 1943년 7월에는 HMS 월러스를 타고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지원하였다. 그 후 필립은 영국 태평양 함대의 제27 구축함대 소속인 새 구축함 HMS 웰프의 소형선 부장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HMS 웰프는 도쿄만에 정박해 있었다. 1946년 1월에 그는 배를 타고 영국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년간 필립은 부사관 학교와 그리니치 해군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필립은 수년간 캐나다 연대에서 가장 오래된 캐나다 보병 연대의 명예 연대장이었다. 영국 연방의 유일한 연대로 존속하고 있는 이 연대는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서거한 군주들의 기장(記章)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필립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명예 육군 원수이기도 하다. 1953년 1월 15일, 영국군의 육군 원수 자리에 오른 그는 1년 후인 1954년 4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육군 원수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급은 어디까지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으로서의 순수한 의전용에 불과하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DF)에 명령을 내리거나 할 수 없고,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 조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한 예로서, 지금까지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의 부대 열병식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필립은 1965년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어 영국 아일랜드 경기병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으며, 1993년 여왕 직속 경기병과의 연대 통합으로 영국 경기병이 생길 때까지 그 자리를 보전하였다. 2002년 왕대비가 서거하자 그는 영국 경기병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다. 2011년 6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는 남편 필립 공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해 자신이 맡고 있던 명예 해군사령관 직위를 남편에게 넘겼다. 여왕의 이러한 결정은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잘 나가던 현역 군인이었던 남편이 자신을 외조하기 위해 전역했던 점 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영연방왕국의 왕실 HM 엘리자베스 2세HRH 에든버러 공작 필립 HRH 웨일스 공 찰스HRH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 HRH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HRH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 HRH 케임브리지 공자 조지 HRH 케임브리지 공녀 샬럿 HRH 케임브리지 공자 루이스 HRH 서식스 공작 해리HRH 서식스 공작부인 메건 아치 마운트배튼윈저 HRH 요크 공작 앤드루 HRH 요크 공녀 베아트리스 HRH 요크 공녀 유제니 HRH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HRH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세번 자작 제임스 레이디 루이즈 윈저 HRH 프린세스 로열 앤 HRH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HRH 글로스터 공작부인 비아지트 HRH 켄트 공작 에드워드HRH 켄트 공작부인 캐서린 HRH 켄트 공자 마이클HRH 켄트의 마이클 공자빈 HRH 켄트 공녀 알렉산드라 v • d • e • h 결혼[편집] 1939년에 조지 6세 부부가 브리타니아 해군 사관학교를 시찰하는 동안, 필립은 조지 6세의 두 딸을 즐겁게 해주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그때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나게 되었다. 만남 이후 필립을 좋아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영국 해군에 입대한 동안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7년이 지난 후, 필립은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필립은 왕족이라는 유산(왕족 출신)과 이미 정립된 왕족으로서의 의무 경험 덕분에 미래의 여왕에게 가장 적합한 남편감으로 여겨졌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필립에게 그리스 왕실과 덴마크 왕실에서의 칭호와 동시에 그리스 왕실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포기하고, 그리스 정교회에서 영국 성공회로 회심할 것을 재촉하였으며, 1947년 3월 18일까지 모든 작업이 끝나 필립은 영국 국적을 취득 받았다. 그 후에 필립은 어머니의 성인 바텐베르크를 그대로 영어로 직역한 마운트배튼으로 성씨를 바꾸었다. 결혼식 전날에 조지 6세는 필립에게 전하라는 호칭을 주었으며, 결혼식 당일 아침인 1947년 11월 20일에 필립은 에든버러 공,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이 되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으며, BBC에 의해 방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나치와 관련 있는 독일인 왕자들과 결혼한 세 누이를 비롯한 필립의 독일인 친척들은 불청객으로 낙인 찍혀 초대받지 못하였다. 버크셔 주의 윈저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왕실 칭호를 버린 필립의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불청객 신분에서 제외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부부는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동안 맏아들 찰스와 딸 앤을 낳았다. 필립은 해군으로 계속 일하고 싶어 했지만, 그 꿈도 장래에 자신이 영국 여왕의 부군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필립은 신혼을 마치고 다시 해군에 복귀하여, 지중해 함대의 구축함 HMS 체커즈의 부장으로서 1949년에 몰타에 배치되었다. 1950년, 필립은 해군 소령으로 승진하여 슬루프형 포함(砲艦) HMS 매그파이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1952년 초에는 부함장으로 다시 승진하였다. 조지 6세의 건강이 좋지 않자,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작은 1951년 11월 4일에 영국 추밀원을 통해 왕의 대리로 임명받은 후, 캐나다의 연안 지방을 순방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아프리카 전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국 연방을 순방하였다. 2월 6일, 두 사람이 케냐에 머물러 있을 때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서거하였다. 그에 따라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는 먼 친척간이기도 했다. 그의 조부 요르요스 1세의 누나 알렉산드라는 영국왕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왕비였고, 조지 5세의 모후였다.[3] 부군[편집]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왕실 명칭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양에서는 아내가 으레 원래 성씨를 남편의 성씨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필립 공의 작은외숙인 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엘리자베스 2세 역시 필립 공과 결혼하였으니 그의 성씨를 따라 왕실의 명칭도 마운트배튼 왕가(House of Mountbatten)로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인 대왕대비 테크의 메리는 이를 듣고, 손녀에게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통지한 다음 왕실의 명칭은 변함없이 윈저 왕가라는 성명서를 공표하라고 조언하였다. 1952년, 필립은 영국 해군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공군 원수의 직함을 받았다. 또한, 그는 영국 해병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모든 군인의 통수권자가 된 덕분에 방위군 총사령관보다 지위가 높은 여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옛 선왕들과 함께 확립된 전통이다. 필립 공은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영국을 방문한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맞이하며, 외국 순방 때도 동행한다. 필립 공은 종종 국내외에서 여왕을 대신해서 약속을 잡기도 한다. 또한, 필립 공은 각종 단체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1956년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에든버러 공 어워드를 수여하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라.”라고 말하였다. 그의 계획은 현재 전 세계에서 100여 개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한, 그는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이기도 하다. 1956-1957년, 필립은 거리가 먼 영국 연방의 섬들을 시찰하고자 HMY 브리타니아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였다. 200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50주년 때, 필립 공은 아내인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그녀를 곁에서 보필해야 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대해 영국 하원의장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직함과 칭호, 문장[편집] 직함과 칭호[편집]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1921년 6월 10일~1947년 3월 18일)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 (1947년 3월 18일~1947년 11월 19일) 필립 마운트배튼 경, KG (1947년 11월 19일~1947년 11월 20일) 에든버러 공작, KG (1947년 11월 20일~1951년 11월 3일) 에든버러 공작, KG, PC (1951년 11월 4일~1952년 4월 20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PC (1952년 4월 21일~1953년 5월 21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GBE, PC (1953년 5월 22일~1968년 6월 9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PC (1968년 6월 10일~1981년 11월 14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QSO, PC (1981년 11월 15일~1988년 6월 12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AC, QSO, PC (1988년 6월 13일~) 현재 필립 공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직함과 칭호는 다음과 같다: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가장 고귀한 가터 훈장의 기사, 가장 고대의 전사이자 가장 고귀한 시슬 훈장 수훈자, 대영 제국 훈장 기사단장, 오더 오브 메리트 회원, 여왕의 서비스 훈장 컴페니언 엑스트라,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컴패니언, 컴패니언 로거후 대훈장 추장, 여왕 폐하의 가장 품격 있는 추밀원 의원, 캐나다 여왕 추밀원 의원 필립 왕자. 문장[편집] 에든버러 공 필립의 문장 에든버러 공 필립의 깃발 필립 공의 전용 개인 문장은 1947년 11월 19일에 만들어졌다. 다른 왕족들의 문장과는 달리, 필립 공의 문장은 마치 남자들이 아내들의 문장과 칭호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영국의 왕실 문장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부계에서 전해진 그리스와 덴마크 그리고 모계로부터 이어져 온 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과 에든버러 시, 그의 공작 신분을 나타내는 요소들을 특징으로 삼았다. 방패는 열십자로 4등분 하였다. 왼쪽 위에는 덴마크의 국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란색 배경 위에 오른쪽 앞다리를 들고 왼쪽을 향해 걷는 자세를 취한 푸른 사자 세 마리와 아홉 개의 붉은 하트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 위에는 그리스의 국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푸른색을 바탕으로 한 하얀 십자가가 있다. 왼쪽 아래에는 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얀색 배경 위에 검은색 줄 두 개가 세로로 그어져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에든버러 시의 문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검은색과 붉은색이 들어간 성 한 채가 있다. 방패의 왼편에는 덴마크 왕실의 문장인 미개인이 있으며, 오른편에는 공작의 해군 경력을 암시하는 해군 영관(榮冠)과 함께 공작의 모자를 목 둘레에 고리처럼 두른(목걸이를 단) 황금빛 사자(영국의 전통적인 상징물)가 있다. 방패 밑에는 God is my help (하느님은 나의 도우심)이란 표어가 있으며, 방패 뒤에는 가터 훈장의 표어인 Honi soit qui mal y pense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가 있다. 필립 공의 문장 깃발은 그의 전용 군기 문양으로 사용한다. 기타[편집] 그는 스페인의 왕비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와도 친척 관계이다. 필립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이며, 그 아들들인 요르요스 2세, 파블로스 형제의 숙부이다. 소피아는 필립의 사촌인 파블로스의 딸로, 오촌 종질녀가 된다. 할머니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의 친정 어머니 엘리자베스를 통해서, 조지 2세의 후손이 된다. 한편 필립의 할머니 올가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딸로, 니콜라이 1세에게는 외4대손이 된다. 1985년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자격으로 방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받았다. 논란[편집] 필립은 온갖 망언을 일삼아 많은 사람을 찌푸리게 했다. 1984년 케냐 방문 당시 현지 여성에게 여자 맞냐고 물어본 실례를 범했고, 1986년 중국인들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2015년 7월에는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빨리 찍으라고 욕설을 하는 등 인종차별적, 비하적인 망언을 많이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자녀[편집] 사진 이름 생일 사망 기타 웨일스 공 찰스 1948년 11월 14일(1948-11-14) (70세) 생존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와 결혼, 슬하 2남.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와 재혼, 자녀 없음. 프린세스 로열 앤 1950년 8월 15일(1950-08-15) (68세) 생존 마크 필립스와 결혼, 슬하 1남 1녀 티머시 로런스와 재혼, 자녀 없음 요크 공작 앤드루 1960년 2월 19일(1960-02-19) (59세) 생존 요크 공작부인 세라와 결혼, 슬하 2녀, 이혼.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964년 3월 10일(1964-03-10) (55세) 생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와 결혼, 슬하 1남 1녀. 같이 보기[편집] 엘리자베스 2세 웨일스 공 찰스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각주[편집] ↑ Sophia → George I → George II → Anne, Princess Royal → Princess Carolina of Orange-Nassau →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 Amalie, Duchess of Altenburg - Grand Duchess Elisabeth Josifovna - Olga, Queen of Greece, 그리스의 왕비 올가(1851~1926)가 필립의 친할머니이다. ↑ http://www.ed.ac.uk/about/people/officials/chancellor ↑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알렉산드라 영국왕비-조지 5세-조지 6세-엘리자베스 2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그리스의 요르요스 1세-안드레아스-필립 마운트배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에든버러 공작 필립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영어) 에든버러 공 필립의 프로필 (영어) 에든버러 공 어워드 (영어) 에든버러 공 필립의 문장 전임앨프레드 에든버러 공작1947년 11월 20일 ~ 후임현직 전임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영국 여왕 부군1952년 2월 3일 ~ 후임현직 vdeh현재의 군주 배우자아프리카 마세나테 모하토 세이소(영어판) 랄라 살마(영어판) 아시아 사레하(영어판) 마사코 라니아 사비카(영어판) 제선 페마 아지자(영어판) 수티다 유럽 필립 실비아 마리 소냐 마리아 테레사 샤를린 막시마 마틸드 레티시아 아메리카 필립 오세아니아 필립 나나시파우(영어판) vdeh그리스의 왕자 목록1세대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왕자 니콜라스 왕자 안드레아스 왕자 크리스토퍼 왕자 2세대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 1세 페트로스 왕자 에든버러 공작 필립* 미카일 왕자 3세대 콘스탄티노스 2세 4세대 파블로스 왕세자 니콜라오스 왕자 필리포스 왕자 5세대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 왕자 아힐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 오디세스키몬 왕자 아리스티디스스타보로스 왕자 * 그리스 왕자 칭호를 포기함 vdeh영국의 왕자 목록1세대 조지 2세 2세대 웨일스 공 프레더릭 조지 윌리엄 왕자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3세대 조지 3세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에드워드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 윌리엄 헨리 컴벌랜드와 스트래선의 공작 헨리 프레더릭 왕자 4세대 조지 4세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켄트와 스트래선의 공작 에드워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서식스 공작 아우구스투스 프레더릭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퍼스 옥타비우스 왕자 앨프레드 왕자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5세대 앨버트 공* 게오르크 5세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6세대 에드워드 7세 알프레트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7세대 클래런스와 에이번데일의 공작 앨버트 빅터 조지 5세 알렉산더 존 왕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세자 알프레트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코넛 공자 아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 크리스티안 왕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8세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 존 왕자 요한 레오폴트 왕자^ 휴베르투스 왕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 ^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알라스테어 윈저^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9세대 에든버러 공작 필립* * 글로스터 공자 윌리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켄트 공작 에드워드 켄트 공자 마이클 10세대 웨일스 공 찰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1세대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세번 자작 제임스 12세대 케임브리지 공자 조지 케임브리지 공자 루이스 * 출생 당시는 영국의 왕자가 아니었지만, 여왕과의 혼인에 의하여 왕자가 됨* * 출생 당시는 영국의 왕자가 아니었지만, 영국의 왕자 작위를 수여받음^ 출생 당시에는 영국의 왕자였지만, 후에 영국의 왕자 작위를 박탈당함^^ 왕자 지위를 받을 수 있지만 거부함 vdeh에든버러 공작 HRH 에든버러 공작 필립프레더릭 (1726-1751) 조지 3세 (1751-1760) 윌리엄 헨리 (1764-1805) 윌리엄 프레더릭 (1805-1834) 알프레트 (1866-1900)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05148586 LCCN: n80016941 ISNI: 0000 0001 0930 1502 GND: 118742140 SUDOC: 028299914 BNF: cb12016357w (데이터) BIBSYS: 90075250 뮤직브레인즈: 3fbae1b3-4982-4287-8f34-de4b7c8b60df NLA: 35420683 NKC: xx003148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든버러_공작_필립&oldid=24270402" 분류: 192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영국의 왕족영국의 교육자영국의 환경 운동가영국의 성공회교도영국의 추밀 고문관영국 육군 원수영국 왕립해군 원수영국 왕립공군 원수해군경에든버러 공작왕립학회 석학회원그리스의 왕자덴마크의 왕자특급 대십자 연방공로십자장 수훈자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케르키라섬 출신덴마크계 영국인독일계 영국인러시아계 영국인그리스계 영국인덴마크계 그리스인영국으로 귀화한 사람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윈저가바텐베르크가그리스 글뤽스부르크 가마운트배튼윈저가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그리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제거된 임시링크를 포함하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1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직함과 칭호의 변천사는 뭐야? |
에든버러 공작 필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든버러 공작 필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든버러 공작 필립 에든버러 공작 필립(2015년) 지위 영국 여왕 부군 (영국 군주 배우자) 재위 1952년 2월 3일 ~ 전임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에든버러 공작 재위 1947년 11월 20일 ~ 전임자 앨프레드 이름 휘 필립 마운트배튼 신상정보 출생일 1921년 6월 10일(1921-06-10) (98세) 출생지 그리스 왕국 케르키라 가문 글뤽스부르크 가 부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 모친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 배우자 엘리자베스 2세 자녀 웨일스 공 찰스프린세스 로열 앤요크 공작 앤드루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종교 영국 성공회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The Duke of Edinburgh, Philip Mountbatten, 1921년 6월 10일 ~ ) 또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그리스어: Πρίγκιπας Φίλιππο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프링기파스 필리포스 티스 엘라다스 케 티스 다니아스[*])는 영국과 그리스의 왕족으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다. 또한 예비역 영국 해군 중령 예편한 그는 덴마크의 왕족이기도 하다. 본래 그리스와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왕자였던 필립은 결혼한 직후에 그 위계를 포기했지만 그의 문장에 포함된 그리스의 국기(푸른 바탕에 하얀 십자가)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엘리자베스와 약혼한 동시에 그는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로 공표되었으며, 1947년 11월 20일, 그는 국왕 조지 6세의 상속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였다. 조지 6세는 필립 공에게 결혼 전에는 전하라는 호칭을, 결혼 초기에는 에든버러 공작과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1957년,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립에게 영국의 왕자 작위를 주었다. 영국 시민권을 얻음에 영국 국민이 된 필립 공의 성은 외가인 바텐베르크가를 영어로 번역한 마운트배튼으로 지어졌다. 한편 필립 공이 하노버의 소피아의 후손으로서 1705년 소피아 귀화법에 따라 원래부터 영국 국민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졌다.[1] 그의 친할머니 올가 왕비의 외5대조모가 조지 2세의 딸이었다. 또한 부계로는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인 알렉산드라가 필립의 증대고모 할머니가 된다. 필립은 왕실에서의 직책에 더하여 에든버러 공작 어워드와 세계 자연보호 기금 등을 포함한 많은 단체의 후원자이자 2010년까지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이었고[2],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56년에 남극 제도를 방문하고나서부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대중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반 세기 동안 이 내용을 주제로 포괄적인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스의 왕족이기도 한 필립은 오랫동안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으며, 영국과 영국 연방의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하였다. 2011년 12월 심장에 관상 동맥경화가 발생하여 90세의 나이로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2012년 6월,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행사가 템즈 강에서 진행되었다. 91세의 고령인 필립 공은 약 두 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배 위에 서 있었던 후유증(급성 방광염)으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어, 나머지 축하행사에는 불참하게 되었다. 80대까지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필립 공은 90대에 접어들며 기력이 떨어져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96세를 맞은 2017년 5월 4일, 영국 왕실과 정부는 필립 공이 왕실 일가의 공식 업무를 가을부터 중단한다고 밝혔다. 목차 1 생애 1.1 초기 삶 1.2 영국군 활동 1.3 결혼 1.4 부군 2 직함과 칭호, 문장 2.1 직함과 칭호 2.2 문장 3 기타 3.1 논란 4 자녀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는 1921년 6월 10일에 이오니아 해에 있는 코르푸 섬의 빌라 몬 레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왕국의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와 올가 왕비의 넷째 아들인 안드레아스 왕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초대 밀퍼드헤이번 후작 루이스 마운트배튼(과거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과 헤센다름슈타트의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이다. 필립의 어머니인 앨리스 공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테네에 있는 유대인 은신처를 보호하며 인생 마지막을 그리스 정교회의 수녀로 살다 갔다. 또한, 그녀는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제2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과 제1대 마운트배튼오브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누이이기도 하다. 필립은 그리스의 왕족이었지만 본래 덴마크-스웨덴의 혈통으로, 필립의 고조부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4대손이기도 하다. 할머니 쪽으로는 할머니 올가의 외가 쪽으로 조지 2세의 후손이 된다. 필립은 태어난 지 며칠 지나서 코르푸 섬 하도코스에 있는 파라이오 프로우리오에 있는 성 게오르기오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공녀는 코르푸 섬에 있는 대저택에서 18개월간 지냈다. 당시 그리스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격변기에 놓여 있었으며, 왕정이 곧 전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22년 9월 22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혁명 재판소는 왕의 동생인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때마침 운좋게도 영국의 조지 5세가 영국 해군 소속 함선 HMS 칼립소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자, 필립의 가족은 오렌지 상자로 만든 집에 숨어 안전하게 운송되었다. 필립에게는 네 명의 누나들(그녀들 모두 독일인 왕자들과 결혼했음)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들보다 오래 살았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 (1905–1981); 제8대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작 고트프리드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테오도라 (1906–1969); 바덴의 마르크그라프 베르톨트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체칠리아 (1911–1937); 게오르크 도나투스 폰 헤센다름슈타트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소피아 (1914–2001); 헤센 카셀의 크리스토프와 결혼하였으나, 1943년에 공작이 재해사고로 사망하자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결혼함. 1937년 필립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비극이 일어났다. 필립의 누나 체칠리아와 그녀의 남편 게오르그 도나투스, 시어머니 엘레오노레 그리고 두 어린 아들 알렉산더와 루드비히가 벨기에 오스텐더에서 일어난 사베나 항공기 추락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필립은 다름슈타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영국군 활동[편집] 1939년에 고든스톤으로 이사한 필립은 1940년 다트머스 해군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다음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다. 해군 사관후보생이 된 필립은 전함 HMS 라밀리즈에 타 6개월을 인도양에서 보냈다. 1941년 1월, 지중해 함대에 배치된 전함 HMS 밸리언트에 탄 필립은 크레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마타판 해협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리스 십자 훈장을 받았다. 또한, 1941년에는 HMS 엠프리스 오브 러시아 수송군의 보일러 연료를 지피는 것을 도왔던 적도 있었다. 1942년 7월에는 해군 중위로 승진하여 V&W급 수뢰 구축함 HMS 월러스에서 근무하면서 호위와 호송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7월 16일에 대위로 진급한 데 이어서, 1942년 10월에는 소형선의 부장이 되었다(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소형선 부장으로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젊은 축에 속했음). 1943년 7월에는 HMS 월러스를 타고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지원하였다. 그 후 필립은 영국 태평양 함대의 제27 구축함대 소속인 새 구축함 HMS 웰프의 소형선 부장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HMS 웰프는 도쿄만에 정박해 있었다. 1946년 1월에 그는 배를 타고 영국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년간 필립은 부사관 학교와 그리니치 해군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필립은 수년간 캐나다 연대에서 가장 오래된 캐나다 보병 연대의 명예 연대장이었다. 영국 연방의 유일한 연대로 존속하고 있는 이 연대는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서거한 군주들의 기장(記章)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필립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명예 육군 원수이기도 하다. 1953년 1월 15일, 영국군의 육군 원수 자리에 오른 그는 1년 후인 1954년 4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육군 원수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급은 어디까지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으로서의 순수한 의전용에 불과하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DF)에 명령을 내리거나 할 수 없고,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 조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한 예로서, 지금까지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의 부대 열병식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필립은 1965년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어 영국 아일랜드 경기병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으며, 1993년 여왕 직속 경기병과의 연대 통합으로 영국 경기병이 생길 때까지 그 자리를 보전하였다. 2002년 왕대비가 서거하자 그는 영국 경기병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다. 2011년 6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는 남편 필립 공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해 자신이 맡고 있던 명예 해군사령관 직위를 남편에게 넘겼다. 여왕의 이러한 결정은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잘 나가던 현역 군인이었던 남편이 자신을 외조하기 위해 전역했던 점 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영연방왕국의 왕실 HM 엘리자베스 2세HRH 에든버러 공작 필립 HRH 웨일스 공 찰스HRH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 HRH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HRH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 HRH 케임브리지 공자 조지 HRH 케임브리지 공녀 샬럿 HRH 케임브리지 공자 루이스 HRH 서식스 공작 해리HRH 서식스 공작부인 메건 아치 마운트배튼윈저 HRH 요크 공작 앤드루 HRH 요크 공녀 베아트리스 HRH 요크 공녀 유제니 HRH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HRH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세번 자작 제임스 레이디 루이즈 윈저 HRH 프린세스 로열 앤 HRH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HRH 글로스터 공작부인 비아지트 HRH 켄트 공작 에드워드HRH 켄트 공작부인 캐서린 HRH 켄트 공자 마이클HRH 켄트의 마이클 공자빈 HRH 켄트 공녀 알렉산드라 v • d • e • h 결혼[편집] 1939년에 조지 6세 부부가 브리타니아 해군 사관학교를 시찰하는 동안, 필립은 조지 6세의 두 딸을 즐겁게 해주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그때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나게 되었다. 만남 이후 필립을 좋아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영국 해군에 입대한 동안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7년이 지난 후, 필립은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필립은 왕족이라는 유산(왕족 출신)과 이미 정립된 왕족으로서의 의무 경험 덕분에 미래의 여왕에게 가장 적합한 남편감으로 여겨졌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필립에게 그리스 왕실과 덴마크 왕실에서의 칭호와 동시에 그리스 왕실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포기하고, 그리스 정교회에서 영국 성공회로 회심할 것을 재촉하였으며, 1947년 3월 18일까지 모든 작업이 끝나 필립은 영국 국적을 취득 받았다. 그 후에 필립은 어머니의 성인 바텐베르크를 그대로 영어로 직역한 마운트배튼으로 성씨를 바꾸었다. 결혼식 전날에 조지 6세는 필립에게 전하라는 호칭을 주었으며, 결혼식 당일 아침인 1947년 11월 20일에 필립은 에든버러 공,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이 되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으며, BBC에 의해 방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나치와 관련 있는 독일인 왕자들과 결혼한 세 누이를 비롯한 필립의 독일인 친척들은 불청객으로 낙인 찍혀 초대받지 못하였다. 버크셔 주의 윈저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왕실 칭호를 버린 필립의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불청객 신분에서 제외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부부는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동안 맏아들 찰스와 딸 앤을 낳았다. 필립은 해군으로 계속 일하고 싶어 했지만, 그 꿈도 장래에 자신이 영국 여왕의 부군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필립은 신혼을 마치고 다시 해군에 복귀하여, 지중해 함대의 구축함 HMS 체커즈의 부장으로서 1949년에 몰타에 배치되었다. 1950년, 필립은 해군 소령으로 승진하여 슬루프형 포함(砲艦) HMS 매그파이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1952년 초에는 부함장으로 다시 승진하였다. 조지 6세의 건강이 좋지 않자,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작은 1951년 11월 4일에 영국 추밀원을 통해 왕의 대리로 임명받은 후, 캐나다의 연안 지방을 순방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아프리카 전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국 연방을 순방하였다. 2월 6일, 두 사람이 케냐에 머물러 있을 때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서거하였다. 그에 따라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는 먼 친척간이기도 했다. 그의 조부 요르요스 1세의 누나 알렉산드라는 영국왕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왕비였고, 조지 5세의 모후였다.[3] 부군[편집]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왕실 명칭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양에서는 아내가 으레 원래 성씨를 남편의 성씨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필립 공의 작은외숙인 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엘리자베스 2세 역시 필립 공과 결혼하였으니 그의 성씨를 따라 왕실의 명칭도 마운트배튼 왕가(House of Mountbatten)로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인 대왕대비 테크의 메리는 이를 듣고, 손녀에게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통지한 다음 왕실의 명칭은 변함없이 윈저 왕가라는 성명서를 공표하라고 조언하였다. 1952년, 필립은 영국 해군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공군 원수의 직함을 받았다. 또한, 그는 영국 해병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모든 군인의 통수권자가 된 덕분에 방위군 총사령관보다 지위가 높은 여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옛 선왕들과 함께 확립된 전통이다. 필립 공은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영국을 방문한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맞이하며, 외국 순방 때도 동행한다. 필립 공은 종종 국내외에서 여왕을 대신해서 약속을 잡기도 한다. 또한, 필립 공은 각종 단체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1956년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에든버러 공 어워드를 수여하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라.”라고 말하였다. 그의 계획은 현재 전 세계에서 100여 개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한, 그는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이기도 하다. 1956-1957년, 필립은 거리가 먼 영국 연방의 섬들을 시찰하고자 HMY 브리타니아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였다. 200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50주년 때, 필립 공은 아내인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그녀를 곁에서 보필해야 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대해 영국 하원의장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직함과 칭호, 문장[편집] 직함과 칭호[편집]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1921년 6월 10일~1947년 3월 18일)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 (1947년 3월 18일~1947년 11월 19일) 필립 마운트배튼 경, KG (1947년 11월 19일~1947년 11월 20일) 에든버러 공작, KG (1947년 11월 20일~1951년 11월 3일) 에든버러 공작, KG, PC (1951년 11월 4일~1952년 4월 20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PC (1952년 4월 21일~1953년 5월 21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GBE, PC (1953년 5월 22일~1968년 6월 9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PC (1968년 6월 10일~1981년 11월 14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QSO, PC (1981년 11월 15일~1988년 6월 12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AC, QSO, PC (1988년 6월 13일~) 현재 필립 공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직함과 칭호는 다음과 같다: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가장 고귀한 가터 훈장의 기사, 가장 고대의 전사이자 가장 고귀한 시슬 훈장 수훈자, 대영 제국 훈장 기사단장, 오더 오브 메리트 회원, 여왕의 서비스 훈장 컴페니언 엑스트라,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컴패니언, 컴패니언 로거후 대훈장 추장, 여왕 폐하의 가장 품격 있는 추밀원 의원, 캐나다 여왕 추밀원 의원 필립 왕자. 문장[편집] 에든버러 공 필립의 문장 에든버러 공 필립의 깃발 필립 공의 전용 개인 문장은 1947년 11월 19일에 만들어졌다. 다른 왕족들의 문장과는 달리, 필립 공의 문장은 마치 남자들이 아내들의 문장과 칭호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영국의 왕실 문장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부계에서 전해진 그리스와 덴마크 그리고 모계로부터 이어져 온 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과 에든버러 시, 그의 공작 신분을 나타내는 요소들을 특징으로 삼았다. 방패는 열십자로 4등분 하였다. 왼쪽 위에는 덴마크의 국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란색 배경 위에 오른쪽 앞다리를 들고 왼쪽을 향해 걷는 자세를 취한 푸른 사자 세 마리와 아홉 개의 붉은 하트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 위에는 그리스의 국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푸른색을 바탕으로 한 하얀 십자가가 있다. 왼쪽 아래에는 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얀색 배경 위에 검은색 줄 두 개가 세로로 그어져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에든버러 시의 문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검은색과 붉은색이 들어간 성 한 채가 있다. 방패의 왼편에는 덴마크 왕실의 문장인 미개인이 있으며, 오른편에는 공작의 해군 경력을 암시하는 해군 영관(榮冠)과 함께 공작의 모자를 목 둘레에 고리처럼 두른(목걸이를 단) 황금빛 사자(영국의 전통적인 상징물)가 있다. 방패 밑에는 God is my help (하느님은 나의 도우심)이란 표어가 있으며, 방패 뒤에는 가터 훈장의 표어인 Honi soit qui mal y pense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가 있다. 필립 공의 문장 깃발은 그의 전용 군기 문양으로 사용한다. 기타[편집] 그는 스페인의 왕비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와도 친척 관계이다. 필립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이며, 그 아들들인 요르요스 2세, 파블로스 형제의 숙부이다. 소피아는 필립의 사촌인 파블로스의 딸로, 오촌 종질녀가 된다. 할머니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의 친정 어머니 엘리자베스를 통해서, 조지 2세의 후손이 된다. 한편 필립의 할머니 올가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딸로, 니콜라이 1세에게는 외4대손이 된다. 1985년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자격으로 방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받았다. 논란[편집] 필립은 온갖 망언을 일삼아 많은 사람을 찌푸리게 했다. 1984년 케냐 방문 당시 현지 여성에게 여자 맞냐고 물어본 실례를 범했고, 1986년 중국인들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2015년 7월에는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빨리 찍으라고 욕설을 하는 등 인종차별적, 비하적인 망언을 많이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자녀[편집] 사진 이름 생일 사망 기타 웨일스 공 찰스 1948년 11월 14일(1948-11-14) (70세) 생존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와 결혼, 슬하 2남.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와 재혼, 자녀 없음. 프린세스 로열 앤 1950년 8월 15일(1950-08-15) (68세) 생존 마크 필립스와 결혼, 슬하 1남 1녀 티머시 로런스와 재혼, 자녀 없음 요크 공작 앤드루 1960년 2월 19일(1960-02-19) (59세) 생존 요크 공작부인 세라와 결혼, 슬하 2녀, 이혼.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964년 3월 10일(1964-03-10) (55세) 생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와 결혼, 슬하 1남 1녀. 같이 보기[편집] 엘리자베스 2세 웨일스 공 찰스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각주[편집] ↑ Sophia → George I → George II → Anne, Princess Royal → Princess Carolina of Orange-Nassau →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 Amalie, Duchess of Altenburg - Grand Duchess Elisabeth Josifovna - Olga, Queen of Greece, 그리스의 왕비 올가(1851~1926)가 필립의 친할머니이다. ↑ http://www.ed.ac.uk/about/people/officials/chancellor ↑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알렉산드라 영국왕비-조지 5세-조지 6세-엘리자베스 2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그리스의 요르요스 1세-안드레아스-필립 마운트배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에든버러 공작 필립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영어) 에든버러 공 필립의 프로필 (영어) 에든버러 공 어워드 (영어) 에든버러 공 필립의 문장 전임앨프레드 에든버러 공작1947년 11월 20일 ~ 후임현직 전임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영국 여왕 부군1952년 2월 3일 ~ 후임현직 vdeh현재의 군주 배우자아프리카 마세나테 모하토 세이소(영어판) 랄라 살마(영어판) 아시아 사레하(영어판) 마사코 라니아 사비카(영어판) 제선 페마 아지자(영어판) 수티다 유럽 필립 실비아 마리 소냐 마리아 테레사 샤를린 막시마 마틸드 레티시아 아메리카 필립 오세아니아 필립 나나시파우(영어판) vdeh그리스의 왕자 목록1세대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왕자 니콜라스 왕자 안드레아스 왕자 크리스토퍼 왕자 2세대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 1세 페트로스 왕자 에든버러 공작 필립* 미카일 왕자 3세대 콘스탄티노스 2세 4세대 파블로스 왕세자 니콜라오스 왕자 필리포스 왕자 5세대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 왕자 아힐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 오디세스키몬 왕자 아리스티디스스타보로스 왕자 * 그리스 왕자 칭호를 포기함 vdeh영국의 왕자 목록1세대 조지 2세 2세대 웨일스 공 프레더릭 조지 윌리엄 왕자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3세대 조지 3세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에드워드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 윌리엄 헨리 컴벌랜드와 스트래선의 공작 헨리 프레더릭 왕자 4세대 조지 4세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켄트와 스트래선의 공작 에드워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서식스 공작 아우구스투스 프레더릭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퍼스 옥타비우스 왕자 앨프레드 왕자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5세대 앨버트 공* 게오르크 5세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6세대 에드워드 7세 알프레트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7세대 클래런스와 에이번데일의 공작 앨버트 빅터 조지 5세 알렉산더 존 왕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세자 알프레트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코넛 공자 아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 크리스티안 왕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8세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 존 왕자 요한 레오폴트 왕자^ 휴베르투스 왕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 ^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알라스테어 윈저^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9세대 에든버러 공작 필립* * 글로스터 공자 윌리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켄트 공작 에드워드 켄트 공자 마이클 10세대 웨일스 공 찰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1세대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세번 자작 제임스 12세대 케임브리지 공자 조지 케임브리지 공자 루이스 * 출생 당시는 영국의 왕자가 아니었지만, 여왕과의 혼인에 의하여 왕자가 됨* * 출생 당시는 영국의 왕자가 아니었지만, 영국의 왕자 작위를 수여받음^ 출생 당시에는 영국의 왕자였지만, 후에 영국의 왕자 작위를 박탈당함^^ 왕자 지위를 받을 수 있지만 거부함 vdeh에든버러 공작 HRH 에든버러 공작 필립프레더릭 (1726-1751) 조지 3세 (1751-1760) 윌리엄 헨리 (1764-1805) 윌리엄 프레더릭 (1805-1834) 알프레트 (1866-1900)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05148586 LCCN: n80016941 ISNI: 0000 0001 0930 1502 GND: 118742140 SUDOC: 028299914 BNF: cb12016357w (데이터) BIBSYS: 90075250 뮤직브레인즈: 3fbae1b3-4982-4287-8f34-de4b7c8b60df NLA: 35420683 NKC: xx003148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든버러_공작_필립&oldid=24270402" 분류: 192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영국의 왕족영국의 교육자영국의 환경 운동가영국의 성공회교도영국의 추밀 고문관영국 육군 원수영국 왕립해군 원수영국 왕립공군 원수해군경에든버러 공작왕립학회 석학회원그리스의 왕자덴마크의 왕자특급 대십자 연방공로십자장 수훈자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케르키라섬 출신덴마크계 영국인독일계 영국인러시아계 영국인그리스계 영국인덴마크계 그리스인영국으로 귀화한 사람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윈저가바텐베르크가그리스 글뤽스부르크 가마운트배튼윈저가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그리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제거된 임시링크를 포함하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1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은 누구였어? |
에든버러 공작 필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에든버러 공작 필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에든버러 공작 필립 에든버러 공작 필립(2015년) 지위 영국 여왕 부군 (영국 군주 배우자) 재위 1952년 2월 3일 ~ 전임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에든버러 공작 재위 1947년 11월 20일 ~ 전임자 앨프레드 이름 휘 필립 마운트배튼 신상정보 출생일 1921년 6월 10일(1921-06-10) (98세) 출생지 그리스 왕국 케르키라 가문 글뤽스부르크 가 부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 모친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 배우자 엘리자베스 2세 자녀 웨일스 공 찰스프린세스 로열 앤요크 공작 앤드루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종교 영국 성공회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The Duke of Edinburgh, Philip Mountbatten, 1921년 6월 10일 ~ ) 또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그리스어: Πρίγκιπας Φίλιππο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프링기파스 필리포스 티스 엘라다스 케 티스 다니아스[*])는 영국과 그리스의 왕족으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다. 또한 예비역 영국 해군 중령 예편한 그는 덴마크의 왕족이기도 하다. 본래 그리스와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왕자였던 필립은 결혼한 직후에 그 위계를 포기했지만 그의 문장에 포함된 그리스의 국기(푸른 바탕에 하얀 십자가)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엘리자베스와 약혼한 동시에 그는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로 공표되었으며, 1947년 11월 20일, 그는 국왕 조지 6세의 상속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였다. 조지 6세는 필립 공에게 결혼 전에는 전하라는 호칭을, 결혼 초기에는 에든버러 공작과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1957년,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립에게 영국의 왕자 작위를 주었다. 영국 시민권을 얻음에 영국 국민이 된 필립 공의 성은 외가인 바텐베르크가를 영어로 번역한 마운트배튼으로 지어졌다. 한편 필립 공이 하노버의 소피아의 후손으로서 1705년 소피아 귀화법에 따라 원래부터 영국 국민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졌다.[1] 그의 친할머니 올가 왕비의 외5대조모가 조지 2세의 딸이었다. 또한 부계로는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인 알렉산드라가 필립의 증대고모 할머니가 된다. 필립은 왕실에서의 직책에 더하여 에든버러 공작 어워드와 세계 자연보호 기금 등을 포함한 많은 단체의 후원자이자 2010년까지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이었고[2],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56년에 남극 제도를 방문하고나서부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대중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반 세기 동안 이 내용을 주제로 포괄적인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스의 왕족이기도 한 필립은 오랫동안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으며, 영국과 영국 연방의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하였다. 2011년 12월 심장에 관상 동맥경화가 발생하여 90세의 나이로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2012년 6월,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행사가 템즈 강에서 진행되었다. 91세의 고령인 필립 공은 약 두 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배 위에 서 있었던 후유증(급성 방광염)으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게 되어, 나머지 축하행사에는 불참하게 되었다. 80대까지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필립 공은 90대에 접어들며 기력이 떨어져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96세를 맞은 2017년 5월 4일, 영국 왕실과 정부는 필립 공이 왕실 일가의 공식 업무를 가을부터 중단한다고 밝혔다. 목차 1 생애 1.1 초기 삶 1.2 영국군 활동 1.3 결혼 1.4 부군 2 직함과 칭호, 문장 2.1 직함과 칭호 2.2 문장 3 기타 3.1 논란 4 자녀 5 같이 보기 6 각주 7 외부 링크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는 1921년 6월 10일에 이오니아 해에 있는 코르푸 섬의 빌라 몬 레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왕국의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와 올가 왕비의 넷째 아들인 안드레아스 왕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초대 밀퍼드헤이번 후작 루이스 마운트배튼(과거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과 헤센다름슈타트의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이다. 필립의 어머니인 앨리스 공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테네에 있는 유대인 은신처를 보호하며 인생 마지막을 그리스 정교회의 수녀로 살다 갔다. 또한, 그녀는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제2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과 제1대 마운트배튼오브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누이이기도 하다. 필립은 그리스의 왕족이었지만 본래 덴마크-스웨덴의 혈통으로, 필립의 고조부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4대손이기도 하다. 할머니 쪽으로는 할머니 올가의 외가 쪽으로 조지 2세의 후손이 된다. 필립은 태어난 지 며칠 지나서 코르푸 섬 하도코스에 있는 파라이오 프로우리오에 있는 성 게오르기오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공녀는 코르푸 섬에 있는 대저택에서 18개월간 지냈다. 당시 그리스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격변기에 놓여 있었으며, 왕정이 곧 전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22년 9월 22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혁명 재판소는 왕의 동생인 안드레아스 왕자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때마침 운좋게도 영국의 조지 5세가 영국 해군 소속 함선 HMS 칼립소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자, 필립의 가족은 오렌지 상자로 만든 집에 숨어 안전하게 운송되었다. 필립에게는 네 명의 누나들(그녀들 모두 독일인 왕자들과 결혼했음)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들보다 오래 살았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마르가리타 (1905–1981); 제8대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작 고트프리드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테오도라 (1906–1969); 바덴의 마르크그라프 베르톨트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체칠리아 (1911–1937); 게오르크 도나투스 폰 헤센다름슈타트와 결혼함.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소피아 (1914–2001); 헤센 카셀의 크리스토프와 결혼하였으나, 1943년에 공작이 재해사고로 사망하자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결혼함. 1937년 필립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비극이 일어났다. 필립의 누나 체칠리아와 그녀의 남편 게오르그 도나투스, 시어머니 엘레오노레 그리고 두 어린 아들 알렉산더와 루드비히가 벨기에 오스텐더에서 일어난 사베나 항공기 추락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필립은 다름슈타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영국군 활동[편집] 1939년에 고든스톤으로 이사한 필립은 1940년 다트머스 해군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다음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다. 해군 사관후보생이 된 필립은 전함 HMS 라밀리즈에 타 6개월을 인도양에서 보냈다. 1941년 1월, 지중해 함대에 배치된 전함 HMS 밸리언트에 탄 필립은 크레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마타판 해협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리스 십자 훈장을 받았다. 또한, 1941년에는 HMS 엠프리스 오브 러시아 수송군의 보일러 연료를 지피는 것을 도왔던 적도 있었다. 1942년 7월에는 해군 중위로 승진하여 V&W급 수뢰 구축함 HMS 월러스에서 근무하면서 호위와 호송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2년 7월 16일에 대위로 진급한 데 이어서, 1942년 10월에는 소형선의 부장이 되었다(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소형선 부장으로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젊은 축에 속했음). 1943년 7월에는 HMS 월러스를 타고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지원하였다. 그 후 필립은 영국 태평양 함대의 제27 구축함대 소속인 새 구축함 HMS 웰프의 소형선 부장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HMS 웰프는 도쿄만에 정박해 있었다. 1946년 1월에 그는 배를 타고 영국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년간 필립은 부사관 학교와 그리니치 해군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필립은 수년간 캐나다 연대에서 가장 오래된 캐나다 보병 연대의 명예 연대장이었다. 영국 연방의 유일한 연대로 존속하고 있는 이 연대는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서거한 군주들의 기장(記章)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필립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명예 육군 원수이기도 하다. 1953년 1월 15일, 영국군의 육군 원수 자리에 오른 그는 1년 후인 1954년 4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육군 원수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급은 어디까지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으로서의 순수한 의전용에 불과하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DF)에 명령을 내리거나 할 수 없고,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 조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한 예로서, 지금까지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의 부대 열병식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필립은 1965년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어 영국 아일랜드 경기병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으며, 1993년 여왕 직속 경기병과의 연대 통합으로 영국 경기병이 생길 때까지 그 자리를 보전하였다. 2002년 왕대비가 서거하자 그는 영국 경기병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다. 2011년 6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는 남편 필립 공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해 자신이 맡고 있던 명예 해군사령관 직위를 남편에게 넘겼다. 여왕의 이러한 결정은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잘 나가던 현역 군인이었던 남편이 자신을 외조하기 위해 전역했던 점 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영연방왕국의 왕실 HM 엘리자베스 2세HRH 에든버러 공작 필립 HRH 웨일스 공 찰스HRH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 HRH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HRH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 HRH 케임브리지 공자 조지 HRH 케임브리지 공녀 샬럿 HRH 케임브리지 공자 루이스 HRH 서식스 공작 해리HRH 서식스 공작부인 메건 아치 마운트배튼윈저 HRH 요크 공작 앤드루 HRH 요크 공녀 베아트리스 HRH 요크 공녀 유제니 HRH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HRH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세번 자작 제임스 레이디 루이즈 윈저 HRH 프린세스 로열 앤 HRH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HRH 글로스터 공작부인 비아지트 HRH 켄트 공작 에드워드HRH 켄트 공작부인 캐서린 HRH 켄트 공자 마이클HRH 켄트의 마이클 공자빈 HRH 켄트 공녀 알렉산드라 v • d • e • h 결혼[편집] 1939년에 조지 6세 부부가 브리타니아 해군 사관학교를 시찰하는 동안, 필립은 조지 6세의 두 딸을 즐겁게 해주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그때 엘리자베스 공주를 만나게 되었다. 만남 이후 필립을 좋아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영국 해군에 입대한 동안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7년이 지난 후, 필립은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필립은 왕족이라는 유산(왕족 출신)과 이미 정립된 왕족으로서의 의무 경험 덕분에 미래의 여왕에게 가장 적합한 남편감으로 여겨졌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필립에게 그리스 왕실과 덴마크 왕실에서의 칭호와 동시에 그리스 왕실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포기하고, 그리스 정교회에서 영국 성공회로 회심할 것을 재촉하였으며, 1947년 3월 18일까지 모든 작업이 끝나 필립은 영국 국적을 취득 받았다. 그 후에 필립은 어머니의 성인 바텐베르크를 그대로 영어로 직역한 마운트배튼으로 성씨를 바꾸었다. 결혼식 전날에 조지 6세는 필립에게 전하라는 호칭을 주었으며, 결혼식 당일 아침인 1947년 11월 20일에 필립은 에든버러 공,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이 되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으며, BBC에 의해 방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나치와 관련 있는 독일인 왕자들과 결혼한 세 누이를 비롯한 필립의 독일인 친척들은 불청객으로 낙인 찍혀 초대받지 못하였다. 버크셔 주의 윈저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왕실 칭호를 버린 필립의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불청객 신분에서 제외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부부는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동안 맏아들 찰스와 딸 앤을 낳았다. 필립은 해군으로 계속 일하고 싶어 했지만, 그 꿈도 장래에 자신이 영국 여왕의 부군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필립은 신혼을 마치고 다시 해군에 복귀하여, 지중해 함대의 구축함 HMS 체커즈의 부장으로서 1949년에 몰타에 배치되었다. 1950년, 필립은 해군 소령으로 승진하여 슬루프형 포함(砲艦) HMS 매그파이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1952년 초에는 부함장으로 다시 승진하였다. 조지 6세의 건강이 좋지 않자,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작은 1951년 11월 4일에 영국 추밀원을 통해 왕의 대리로 임명받은 후, 캐나다의 연안 지방을 순방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아프리카 전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국 연방을 순방하였다. 2월 6일, 두 사람이 케냐에 머물러 있을 때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서거하였다. 그에 따라 엘리자베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는 먼 친척간이기도 했다. 그의 조부 요르요스 1세의 누나 알렉산드라는 영국왕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왕비였고, 조지 5세의 모후였다.[3] 부군[편집]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왕실 명칭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양에서는 아내가 으레 원래 성씨를 남편의 성씨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필립 공의 작은외숙인 버마 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엘리자베스 2세 역시 필립 공과 결혼하였으니 그의 성씨를 따라 왕실의 명칭도 마운트배튼 왕가(House of Mountbatten)로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인 대왕대비 테크의 메리는 이를 듣고, 손녀에게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통지한 다음 왕실의 명칭은 변함없이 윈저 왕가라는 성명서를 공표하라고 조언하였다. 1952년, 필립은 영국 해군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공군 원수의 직함을 받았다. 또한, 그는 영국 해병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모든 군인의 통수권자가 된 덕분에 방위군 총사령관보다 지위가 높은 여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옛 선왕들과 함께 확립된 전통이다. 필립 공은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영국을 방문한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맞이하며, 외국 순방 때도 동행한다. 필립 공은 종종 국내외에서 여왕을 대신해서 약속을 잡기도 한다. 또한, 필립 공은 각종 단체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1956년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에든버러 공 어워드를 수여하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라.”라고 말하였다. 그의 계획은 현재 전 세계에서 100여 개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한, 그는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이기도 하다. 1956-1957년, 필립은 거리가 먼 영국 연방의 섬들을 시찰하고자 HMY 브리타니아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였다. 200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50주년 때, 필립 공은 아내인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그녀를 곁에서 보필해야 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대해 영국 하원의장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직함과 칭호, 문장[편집] 직함과 칭호[편집]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1921년 6월 10일~1947년 3월 18일)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 (1947년 3월 18일~1947년 11월 19일) 필립 마운트배튼 경, KG (1947년 11월 19일~1947년 11월 20일) 에든버러 공작, KG (1947년 11월 20일~1951년 11월 3일) 에든버러 공작, KG, PC (1951년 11월 4일~1952년 4월 20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PC (1952년 4월 21일~1953년 5월 21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GBE, PC (1953년 5월 22일~1968년 6월 9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PC (1968년 6월 10일~1981년 11월 14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QSO, PC (1981년 11월 15일~1988년 6월 12일) 에든버러 공작, KG, KT, OM, GBE, AC, QSO, PC (1988년 6월 13일~) 현재 필립 공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직함과 칭호는 다음과 같다: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가장 고귀한 가터 훈장의 기사, 가장 고대의 전사이자 가장 고귀한 시슬 훈장 수훈자, 대영 제국 훈장 기사단장, 오더 오브 메리트 회원, 여왕의 서비스 훈장 컴페니언 엑스트라,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컴패니언, 컴패니언 로거후 대훈장 추장, 여왕 폐하의 가장 품격 있는 추밀원 의원, 캐나다 여왕 추밀원 의원 필립 왕자. 문장[편집] 에든버러 공 필립의 문장 에든버러 공 필립의 깃발 필립 공의 전용 개인 문장은 1947년 11월 19일에 만들어졌다. 다른 왕족들의 문장과는 달리, 필립 공의 문장은 마치 남자들이 아내들의 문장과 칭호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영국의 왕실 문장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부계에서 전해진 그리스와 덴마크 그리고 모계로부터 이어져 온 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과 에든버러 시, 그의 공작 신분을 나타내는 요소들을 특징으로 삼았다. 방패는 열십자로 4등분 하였다. 왼쪽 위에는 덴마크의 국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란색 배경 위에 오른쪽 앞다리를 들고 왼쪽을 향해 걷는 자세를 취한 푸른 사자 세 마리와 아홉 개의 붉은 하트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 위에는 그리스의 국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푸른색을 바탕으로 한 하얀 십자가가 있다. 왼쪽 아래에는 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얀색 배경 위에 검은색 줄 두 개가 세로로 그어져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에든버러 시의 문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검은색과 붉은색이 들어간 성 한 채가 있다. 방패의 왼편에는 덴마크 왕실의 문장인 미개인이 있으며, 오른편에는 공작의 해군 경력을 암시하는 해군 영관(榮冠)과 함께 공작의 모자를 목 둘레에 고리처럼 두른(목걸이를 단) 황금빛 사자(영국의 전통적인 상징물)가 있다. 방패 밑에는 God is my help (하느님은 나의 도우심)이란 표어가 있으며, 방패 뒤에는 가터 훈장의 표어인 Honi soit qui mal y pense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가 있다. 필립 공의 문장 깃발은 그의 전용 군기 문양으로 사용한다. 기타[편집] 그는 스페인의 왕비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와도 친척 관계이다. 필립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이며, 그 아들들인 요르요스 2세, 파블로스 형제의 숙부이다. 소피아는 필립의 사촌인 파블로스의 딸로, 오촌 종질녀가 된다. 할머니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의 친정 어머니 엘리자베스를 통해서, 조지 2세의 후손이 된다. 한편 필립의 할머니 올가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딸로, 니콜라이 1세에게는 외4대손이 된다. 1985년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자격으로 방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받았다. 논란[편집] 필립은 온갖 망언을 일삼아 많은 사람을 찌푸리게 했다. 1984년 케냐 방문 당시 현지 여성에게 여자 맞냐고 물어본 실례를 범했고, 1986년 중국인들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2015년 7월에는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빨리 찍으라고 욕설을 하는 등 인종차별적, 비하적인 망언을 많이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자녀[편집] 사진 이름 생일 사망 기타 웨일스 공 찰스 1948년 11월 14일(1948-11-14) (70세) 생존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와 결혼, 슬하 2남. 콘월 공작부인 커밀라와 재혼, 자녀 없음. 프린세스 로열 앤 1950년 8월 15일(1950-08-15) (68세) 생존 마크 필립스와 결혼, 슬하 1남 1녀 티머시 로런스와 재혼, 자녀 없음 요크 공작 앤드루 1960년 2월 19일(1960-02-19) (59세) 생존 요크 공작부인 세라와 결혼, 슬하 2녀, 이혼.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964년 3월 10일(1964-03-10) (55세) 생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와 결혼, 슬하 1남 1녀. 같이 보기[편집] 엘리자베스 2세 웨일스 공 찰스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각주[편집] ↑ Sophia → George I → George II → Anne, Princess Royal → Princess Carolina of Orange-Nassau →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 Amalie, Duchess of Altenburg - Grand Duchess Elisabeth Josifovna - Olga, Queen of Greece, 그리스의 왕비 올가(1851~1926)가 필립의 친할머니이다. ↑ http://www.ed.ac.uk/about/people/officials/chancellor ↑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알렉산드라 영국왕비-조지 5세-조지 6세-엘리자베스 2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그리스의 요르요스 1세-안드레아스-필립 마운트배튼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에든버러 공작 필립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영어) 에든버러 공 필립의 프로필 (영어) 에든버러 공 어워드 (영어) 에든버러 공 필립의 문장 전임앨프레드 에든버러 공작1947년 11월 20일 ~ 후임현직 전임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영국 여왕 부군1952년 2월 3일 ~ 후임현직 vdeh현재의 군주 배우자아프리카 마세나테 모하토 세이소(영어판) 랄라 살마(영어판) 아시아 사레하(영어판) 마사코 라니아 사비카(영어판) 제선 페마 아지자(영어판) 수티다 유럽 필립 실비아 마리 소냐 마리아 테레사 샤를린 막시마 마틸드 레티시아 아메리카 필립 오세아니아 필립 나나시파우(영어판) vdeh그리스의 왕자 목록1세대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왕자 니콜라스 왕자 안드레아스 왕자 크리스토퍼 왕자 2세대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 1세 페트로스 왕자 에든버러 공작 필립* 미카일 왕자 3세대 콘스탄티노스 2세 4세대 파블로스 왕세자 니콜라오스 왕자 필리포스 왕자 5세대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 왕자 아힐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 오디세스키몬 왕자 아리스티디스스타보로스 왕자 * 그리스 왕자 칭호를 포기함 vdeh영국의 왕자 목록1세대 조지 2세 2세대 웨일스 공 프레더릭 조지 윌리엄 왕자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3세대 조지 3세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에드워드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 윌리엄 헨리 컴벌랜드와 스트래선의 공작 헨리 프레더릭 왕자 4세대 조지 4세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켄트와 스트래선의 공작 에드워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서식스 공작 아우구스투스 프레더릭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퍼스 옥타비우스 왕자 앨프레드 왕자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5세대 앨버트 공* 게오르크 5세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6세대 에드워드 7세 알프레트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7세대 클래런스와 에이번데일의 공작 앨버트 빅터 조지 5세 알렉산더 존 왕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세자 알프레트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코넛 공자 아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 크리스티안 왕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8세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 존 왕자 요한 레오폴트 왕자^ 휴베르투스 왕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 ^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알라스테어 윈저^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9세대 에든버러 공작 필립* * 글로스터 공자 윌리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켄트 공작 에드워드 켄트 공자 마이클 10세대 웨일스 공 찰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11세대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세번 자작 제임스 12세대 케임브리지 공자 조지 케임브리지 공자 루이스 * 출생 당시는 영국의 왕자가 아니었지만, 여왕과의 혼인에 의하여 왕자가 됨* * 출생 당시는 영국의 왕자가 아니었지만, 영국의 왕자 작위를 수여받음^ 출생 당시에는 영국의 왕자였지만, 후에 영국의 왕자 작위를 박탈당함^^ 왕자 지위를 받을 수 있지만 거부함 vdeh에든버러 공작 HRH 에든버러 공작 필립프레더릭 (1726-1751) 조지 3세 (1751-1760) 윌리엄 헨리 (1764-1805) 윌리엄 프레더릭 (1805-1834) 알프레트 (1866-1900)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05148586 LCCN: n80016941 ISNI: 0000 0001 0930 1502 GND: 118742140 SUDOC: 028299914 BNF: cb12016357w (데이터) BIBSYS: 90075250 뮤직브레인즈: 3fbae1b3-4982-4287-8f34-de4b7c8b60df NLA: 35420683 NKC: xx003148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에든버러_공작_필립&oldid=24270402" 분류: 192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영국의 왕족영국의 교육자영국의 환경 운동가영국의 성공회교도영국의 추밀 고문관영국 육군 원수영국 왕립해군 원수영국 왕립공군 원수해군경에든버러 공작왕립학회 석학회원그리스의 왕자덴마크의 왕자특급 대십자 연방공로십자장 수훈자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케르키라섬 출신덴마크계 영국인독일계 영국인러시아계 영국인그리스계 영국인덴마크계 그리스인영국으로 귀화한 사람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윈저가바텐베르크가그리스 글뤽스부르크 가마운트배튼윈저가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그리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제거된 임시링크를 포함하는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cèhAfrikaansالعربية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Bikol Central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àidhlig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Lëtzebuergesch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吴语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4일 (금) 1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애든버러의 공작 필립 공의 개인문장이 만들어진 년도는 언제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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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테네리페 공항 참사 개요 발생일시 1977년 3월 27일 발생유형 활주로 상의 항공기 간 충돌 발생원인 목적지 공항의 폭탄 폭발로 인해 회항, 이륙 중 자욱한 안개로 인해 조종 혼란 및 관제 혼선으로 인한 복합적 요인 활주로 충돌 발생장소 테네리페 노르테 공항 비행 내용 기종 팬암기: 보잉 747-121KLM기: 보잉 747-206B 소속 팬아메리칸 월드 항공KLM 네덜란드 항공 IATA 항공편 번호 {{{IATA 항공편 번호}}} ICAO 항공편 번호 {{{ICAO 항공편 번호}}} 호출부호 {{{호출부호}}} 등록번호 N736PAPH-BUF 출발지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 경유지 팬암기: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목적지 그란 카나리아 공항 탑승승객 팬암(380) + KLM(234) = 614명 승무원 팬암(16) + KLM(14) = 30명 피해 내용 사망자 583명 사망(KLM기 전원 사망, 팬암기 335명 사망) 부상자 61명 생존자 61명 사고의 전체상 로스 로데오 공항의 주 활주로의 양쪽에서 팬암기(청색)와 KLM기(하늘색)이 접근해 충돌했다(빨간 별모양). 짙은 안개때문에 관제탑(동색)은 2대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테네리페 공항 참사(영어: Tenerife airport disaster)는 1977년 3월 27일 17시 6분(현지시각)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 섬의 노르테 공항에서 택싱 중이던 팬아메리칸 항공의 1736편과 이륙 중이던 KLM 네덜란드 항공의 4805편 보잉 747 항공기 2대가 활주로 상에서 충돌,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한 전원 사망한 대참사로, 세계 역사상 최악의 항공참사로 기록되었다. 대부분의 항공 사고가 자연 재해나 인재 등 단일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과는 달리, 이 사고는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일어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목차 1 테러에 의한 공항 폐쇄 2 충돌에 이르는 과정 2.1 연료 보급 2.2 유도로 와 기상상황 2.3 의사소통의 문제 2.4 충돌 3 조사 및 원인 3.1 전체적인 원인 3.2 부분적인 원인 4 대책 4.1 항공규칙 개정 4.2 CRM의 도입 4.3 신공항의 건설 5 각주 6 참고 문헌 7 외부 링크 테러에 의한 공항 폐쇄[편집] 테네리페 참사 추모비 클리퍼 빅터(Clipper Victor)로 명명된 팬암 1736편은 보잉사에서 1969년 제작한 747-121로써 등록기호는 N736PA였다. 이 항공기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경유한 상태였다. 한편 라인(Rijn)으로 명명된 KLM 4805편은 보잉사에서 1971년 제작한 747-206B였으며, 등록기호는 PH-BUF였다. 이 항공기는 사고 4시간 전,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국제공항을 이륙한 상태였다. 이들 항공기들의 최종 목적지는 당시 대서양의 리조트로 각광받던 그란 카나리아 섬의 라스 팔마스 공항이었다. 최종 목적지에 다가가던 도중, 팬암기과 KLM기는 라스 팔마스 공항이 카나리아 제도 분리독립파 조직의 폭탄테러 예고전화로 임시폐쇄되었다는 소식을 통고받았다. 팬암기는 공항폐쇄가 길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연료도 충분히 남아있었기에 착륙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라스팔마스 공항 상공에서 선회대기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이윽고 다른 여객기와 마찬가지로 테네리페 섬의 로스 로데오 공항에 다이버트(divert;임시착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KLM기 또한 로스 로데오 공항으로 회항하시를 받게 된다. 1개의 활주로와 1개의 평행유도로, 여러 개의 유도로를 가지고 있던 지방공항인 로스 로데오 공항은 KLM기가 착륙한 시점에서 주 에이프런(주기장;駐機場)의 평행유도로상에까지 다른 비행기가 주기하고 있는 상태여서 관제탑은 평행유도로단부의 이륙대기장소에 주기를 명령했다. 약 30분 후에 착륙한 팬암기도 이 이륙대기장소의 KLM기 뒤로 다른 3대와 더불어 주기했다. 평행유도로가 꽉찼기 때문에 이륙하는 비행기는 활주로를 이동하여 이륙위치에까지 역주하여 이동할 필요가 생겼다. 충돌에 이르는 과정[편집] 연료 보급[편집] 라스 팔마스 공항(그랜드 카나리아섬)의 터미널에리어 로스 로데오 공항(테네리페섬)의 터미널에리어 주 활주로 1개를 갖춘 소규모 공항이었다. 팬암기 착륙 약 2시간 후, 라스 팔마스 공항에 대한 폭탄테러 예고전화가 허위로 판명되면서 각 항공기에 공항폐쇄는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였다. 승객을 기내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대기하던 팬암기는 이륙위치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으나 이동할 수 없었는데, 승객을 기내 밖으로 내려놓았던 KLM기의 기장 야코프 벨드하위전 판 잔턴(Jacob Veldhuyzen van Zanten)이 승객의 재소집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해 급유를 결정하였고, 라스팔마스 공항 재개 소식 5분 전부터 연료보급차가 급유를 시작하면서 KLM기가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KLM기의 연료보급을 본 팬암기는 무선으로 직접 KLM기에게 급유 예상 소요시간을 물어보았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35분 정도]라는 회답을 받았다. 타 비행기들은 보잉 747보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KLM기 옆을 지나서 이륙할 수 있었지만, 팬암기는 기장 빅터 그러브스(Victor Grubbs)의 요청 아래 부조종사와 기관사 2명이 밖에서 날개 간 거리를 실측한 결과 아슬아슬하여 KLM기를 비켜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급유가 끝나면서 KLM기가 먼저 엔진을 시동하여 택싱을 개시하였고, 몇 분 후 팬암기도 그 뒤를 따랐다. 유도로 와 기상상황[편집] 활주로를 역주하여 끝까지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은 KLM기와, KLM기를 쫓아 같은 활주로를 역주하다 C3 출구로 활주로를 빠져나와 평행유도로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은 팬암기는 관제탑의 지시 아래 이동하고 있었는데, 도중 안개가 끼면서 1000피트로 시야가 좁아져 관제탑에서 활주로의 상황을 주시할 수 없게 되었다. KLM기는 활주로를 역주하여 끝까지 이동, 그 자리에서 180도 회전[1] 후 항공교통관제관(ATC)에게서 관제승인(ATC 클리어런스)을 기다렸다. 팬암기 또한 C3 출구에 도착하였는데, 이 출구를 나오기 위해서는 왼쪽으로 135도 회전을 해야했었고, 좁은 활주로에서 보잉 747기가 이러한 급회전을 하는 것이 불가능[2] 하다고 생각해 45도 회전만 하면 되는 C4 출구로 향하면서 활주로를 계속 나아가게 되었다 (테네리페 ATC는 짙은 안개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의사소통의 문제[편집] 테네리페 관제탑은 KLM기에게 관제승인을 내렸다. 관제승인은 아직 이륙의 스탠바이라는 뜻이기에 이륙을 시작하라는 승인은 아니었지만, KLM기는 이것을 이륙허가로 받아들였다. 판 잔턴 기장은 브레이크를 해제하고 부조종사는 네덜란드식 영어로 "We are at take off"(이륙위치에 있습니다)라고 한 후 곧 "We are taking off"(이륙하겠습니다) 라고 회답을 했다. 관제탑은 듣지못한 메시지에 혼란스러워하며, KLM기에게 그 장소에 대기하라고 답했다. [O.K..(약 2초간 무응답)이륙을 준비하라. 우리가 부를 때까지 대기하라(OK,....Stand by for take off. I will call you)라고 했으나, 여기서 이어진 2초간의 무응답상태가 후에 문제가 되었다. 팬암기는 이 양쪽이 보내는 통신내용을 듣고 즉시 불안감을 느끼고, [안돼! 이쪽은 아직 활주로 위를 택싱중이다.(No, we are still taxiing down the runway)]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팬암의 무선송신은 위 기록의 2초간의 무응답상태의 직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KLM기에서는 [OK!]라는 한마디만을 들었고, 그 후는 혼신을 나타내는 스킬음으로써 기록되지 않았다. 2초간의 무응답상태로 인해 ATC의 송신은 끝난것으로 판단한 팬암기는 송신을 시도했으나, ATC는 아직 송신버튼을 누르고 있었기에 혼신이 생겼다. 거기에 ATC와 팬암기 양쪽은 이 혼신이 생긴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로 인해 팬암기는 [경고가 KLM기와 ATC 양쪽에 알려졌다], ATC는 [KLM기는 이륙위치에서 대기중이다], KLM기는 [OK] 이 한마디를 [이륙허가가 나왔다]라고 각자 확신해, 실제로 KLM기는 스로틀을 전개하여 이륙활주를 개시했다. 안개때문에 KLM기는 팬암기의 보잉747기가 아직 활주로상에서 자신들의 방향으로 이동중인 것을 보지 못했다. 더해서 관제탑에서는 어느 항공기도 보이지 않았고, 더욱 나쁜일은 이 활주로에는 지상관제 레이다는 설치되었지만 작동하고 있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다만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찬스가 딱 1번 있었다. 위 기록된 교신이 끝난 3초후에 다시 ATC는 팬암기에게 [활주로를 비웠는지 보고하라(Report the runway clear)]라고 부르자, 팬암기도 [OK, 우리가 활주로를 비우면 보고하겠다.(OK, we'll report when we're clear)]라고 회답했다. 이 수신내용은 KLM기에서도 똑똑하게 들었다. 이것을 들었던 KLM기의 기관사는 팬암기가 활주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고후에 회수된 KLM기의 CVR(콕핏보이스레코더)에서는 다음의 대화가 녹음되어 남아있었다. KLM기관사: 아직 활주로가 비워지지 않았는데? KLM기장: 무슨 소리냐? KLM기관사: 아직 팬암기가 활주로를 비우지 않았다. KLM기장/부조종사: (강한 어조로) 괜찮다. 무엇보다 판 잔턴은 상사일 뿐만 아니라, KLM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파일럿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에 기관사는 무겁게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충돌[편집] 최후의 순간 팬암기(청색)는 전방 왼쪽의 4번출구로 회피하려 했다. 팬암기를 확인한 KLM기는 속도를 높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속하여 이륙을 빨리하는 대처 방법밖에는 없었다. 충돌은 팬암기 위로 KLM기가 덮치는 형태로 일어났다. KLM기에게 경고를 주었다고 생각한 팬암기 조종실에서는 기장이 [Let's get the hell right out of here.], 기관사는 [Yeah ... he's anxious, isn't he?)], [After he's held us up for all this time - now he's in a rush.)]란 대화를 나누면서 활주로의 C4출구에 들어가려던 그 순간 기장이 KLM기의 착륙등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다. [저 저거...저것봐. 이런 저 개자식이 오고 있잖아!((There he is! Look at him! Goddamn ... that son of a bitch is coming!)]라고 말하는 동시에 [Get off! Get off! Get off!)]라고 말하는 부조종사의 목소리도 기록되었다. 충돌 10초전 팬암기의 조종사들은 출력을 전개하여 C4출구를 향해 급속히 좌측으로 턴을 시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시간이 없었기에 기수를 45도 정도로 돌린 것이 전부였다. 한편 KLM기는 이 속도가 바로 [V1(이륙 결심 속도)]을 초과한 것이기에 정지제동은 할 수 없었고, 또한 [VR(기수를 올릴 수 있는 속도)]에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강인하게 기수를 올리는 조작을 취했으나, 동체를 활주로에서 20m정도 띄우는 것에 불과했다. 겨우 띄웠던 KLM기의 동체하부는 활주로상에서 좌측으로 회전중이던 팬암기의 기체상부에 엎어지는 형태로 충돌해 조종석 바로 뒤인 팬암기의 퍼스트클래스 라운지부분을 분쇄하고, 충돌지점에서 150m 미끄러진 후 기체가 추락해 활주로를 활활 불태웠다. 동체상부를 완전히 파괴당한 팬암기는 그 장소에서 떨어져 대폭발을 일으켰다. 모든기의 승객 614명은 동체의 변형이 너무 심각해 탈출할 수도 없어 전원이 사망했다. 원인은 충돌시에 흘려진 연료에 의한 폭발과 화재였다. 조사 및 원인[편집] 스페인, 네덜란드, 미국에서 파견된 70명 이상의 항공 사고 조사관, 양쪽 항공기의 운영사인 팬 아메리칸 항공과 KLM이 사고조사에 들어갔다. 사고가 KLM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스페인 측 조사결과와 복잡한 원인에 의해 벌어진 것이라는 네덜란드 측 조사결과가 대립하였으나, 후에 네덜란드 측이 공평한 조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체적인 원인[편집] 사고 당시 파일럿과 관제탑 사이의 오해 및 잘못된 가정. CVR을 듣고 벌어진 조사에서 테네리페 관제탑이 KLM기는 활주로 끝에 정지하여 이륙허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 KLM기 파일럿은 이륙허가가 나왔다고 확신한 것을 알았다. 부분적인 원인[편집] 각각의 원인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도 의론이 있으나, 총합한 결론은 전체적인 원인 아래 아래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발생해 사고가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팬암기 기장이 아직 활주로에 있다는 보고가 있을 당시, KLM기 기장이 이륙을 중단하지 않은 사실. 팬암기가 이미 활주로를 이동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KLM항공기관사의 질문에 KLM기장이 아직 이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거부한 일 눌러야만 되는 무선음성. KLM부조종사 및 관제관이 표준이 아닌 용어("We're at take off"와 "O.K")를 교신으로 사용한 것. 팬암기가 지시받은 C3출구를 통해 활주로를 나가지 않은 일. 대책[편집] 항공규칙 개정[편집] 사고 이후, 비행기 및 국제항공규칙에 대한 전면적인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국제 항공에 관련된 조직은 표준화된 용어를 사용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CRM의 도입[편집] 사고 이후 항공업계에 CRM(Crew Resources Management, 인적자원관리)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그룹 맴버 간의 엄격한 상하관계가 그룹 간의 의사소통 및 정보교환을 방해하는 것을 보완,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상호간의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CRM은 항공회사의 기초적인 안전관리방식과 훈련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신공항의 건설[편집] 테네리페 섬의 북부인 로스 로데오와 그 주변 지역에 짙은 안개가 잦게 발생하고 이것이 사고로 이어지자, 섬 남부에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게 되었다. 새 공항인 레이나 소피아 공항이 완공되면서 로스 로데오 공항의 국제선 업무가 이관되었고, 로스 로데오 공항은 카나리아 제도 내의 섬과 스페인 본토로의 비행에 사용되고 있다. 각주[편집] ↑ 항공용어로는 지상에서의 방향전환을 턴 백이라 불리는데, 보잉 747기 같은 대형기가 좁은 활주로에서 회전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작업이었다 ↑ KLM는 사고 이후 독자적으로 실험을 감행, 보잉 747기가 이 각도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참고 문헌[편집] 『機長の真実』 デヴィッド・ビーティー / 小西進(訳)講談社 2002年 ISBN 4-06-211119-5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테네리페 공항 참사 Final reports from Spanish authorities and commentary from Dutch authorities (영어) "KLM, B-747, PH-BUF and Pan Am, B-747, N736, collision at Tenerife Airport, Spain, on 27 March 1977." () - Subsecretaría de Aviación Civil, Spain. Distributed by ICAO circular - With comments from the Netherlands Aviation Safety Board in English (ES) "A-102/1977 y A-103/1977 Accidente Ocurrido el 27 de Marzo de 1977 a las Aeronaves Boeing 747, Matrícula PH-BUF de K.L.M. y Aeronave Boeing 747, matrícula N736PA de PANAM en el Aeropuerto de los Rodeos, Tenerife (Islas Canarias)." - Hosted by the Civil Aviation Accident and Incident Investigation Commission (영어) Comments fromNetherlands Aviation Safety Board () (NL) Comments fromNetherlands Aviation Safety Board () (영어) Final report and comments from the Netherlands Aviation Safety Board 프로젝트 테네리페(네덜란드어, 영어), 링크 중에 사고 보고서도 있다 vdeh20세기의 항공 사고1960년대 이전1960년 이전 힌덴부르크 참사('37) 수페르가 항공 참사('49) 일본항공 301편('52년) 영국해외항공 781편 추락 사고('54) 뮌헨 비행기 참사('58) 창랑호 납북 사건('58) U-2기 사건('60) 1961~1970년 영국해외항공 911편 추락 사고('66) 엘알 이스라엘 항공 426편('68) EC-121 격추 사건('69) 대한항공 YS-11기('69) 일본항공 351편('70) 1970년대1971~1977년 야트 항공 367편('72) 캐세이퍼시픽 항공 700Z편('72) 터키 항공 981편 추락 사고('74) 더블 식스 트라제디('76) 테네리페 참사('77) 일본항공 472편('77) 루프트한자 181편('77) 1978~1980년 대한항공 902편('78) 아메리칸 항공 191편('79) 에어뉴질랜드 901편('79) 드니프로제르진시크 공중 충돌 사고('79) 대한항공 015편('80) 사우디아항공 163편('80) 1980년대 전반1981~1985년 일본항공 350편('82) 영국항공 9편('82) 대한항공 007편('83) 에어 인디아 182편('85) 델타 항공 191편('85) 일본항공 123편('85) 이스턴 항공 980편('85) 1980년대 후반1986~1990년 남아프리카 항공 295편('87) 대한항공 858편('87) 알로하 항공 243편('88) 이란 항공 655편('88) 팬암 항공 103편('88) 유나이티드 항공 811편('89) 대한항공 803편('89) 영국항공 5390편('90) 1990년대1991~1993년 타이 항공 311편('92) 파키스탄 국제항공 268편('92) 엘알 이스라엘 항공 1862편('92) 마르틴에어 495편('92)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공기 참사('93) 중국남방항공 3943편 아시아나항공 733편('93) 1994~1996년 대한항공 2033편('94) 아에로플로트 593편 추락 사고('94)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94) 필리핀 항공 434편('94) 에어프랑스 8969편('94) 아메리칸 항공 965편('95) 1996년 에어아프리카 충돌 사고('96) 트랜스월드 항공 800편('96) 차르키다드리 상공 공중 충돌('96)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96) 페루항공 603편('96) 1997~2000년 중국남방항공 3456편('97) 대한항공 801편('97) 베트남 항공 815편('97) 타이항공 261편('98) 대한항공 8702편('98) 스위스 항공 111편('98) 대한항공 1533편('99) 대한항공 6316편('99) 아메리칸 항공 1420편('99) 유니 항공 873편 ('99) 이집트 항공 990편('99) 대한항공 8509편('99) 에어프랑스 4590편('00) 2001년 이후의 항공 사고는 21세기의 항공 사고 목록 틀을 참고하십시오. 굵은 글씨는 탑승객 전원 사망 또는 500명 이상 사망 사고를 말합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테네리페_공항_참사&oldid=24525752" 분류: 1977년 스페인1977년 네덜란드1977년 항공 사고스페인에서 일어난 항공 사고항공기 지상 충돌 사고안개로 인한 항공 사고조종사 실수로 인한 항공 사고항공 관제 실수로 인한 항공 사고KLM의 항공 사고팬아메리칸 항공의 항공 사고보잉 747 기종의 항공 사고테네리페섬의 교통1977년 3월카나리아 제도의 역사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2년 3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العربية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5일 (금) 01: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테네리페 공핟 참사 당시 사고 비행기의 승객은 몇 명이었을까? |
휘경공업고등학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휘경공업고등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7° 35′ 07″ 동경 127° 04′ 12″ / 북위 37.5852156° 동경 127.0700007° / 37.5852156; 127.0700007 휘경공업고등학교徽慶工業高等學校Hwigyeong Technical High School 교훈 성실하고 예절바른 사람이 되자 개교 1998년 설립형태 공립 교장 추교수 교감 서정업 국가 대한민국 위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겸재로 21 (휘경동) 학생 수 603 명 (2018년 5월 1일 기준) 교직원 수 115 명 (2018년 5월 1일 기준) 상징 교목: 느티나무, 교화: 장미 관할관청 서울특별시교육청 웹사이트 http://www.hgt.hs.kr 휘경공업고등학교(徽慶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1] 목차 1 학교 연혁 2 설치 학과 3 학교 동문 4 참고 자료 5 각주 6 외부 링크 학교 연혁[편집] 1997년 12월 20일 : 휘경공업고등학교 설립 인가(6개과 14학급). 금형설계과, 전자기계과, 중기과, 전기과, 전자과, 지적정보과 1998년 3월 1일 : 초대 노기완 교장 취임 1998년 3월 2일 : 제1회 입학식(신입생 700명) 1998년 7월 2일 : 개교식 2001년 2월 14일 : 제1회 졸업식(졸업생 629명) 2011년 8월 1일 : 학칙변경 (학과명 변경 금형디자인과를 자동차금형과로, 메카트로닉스과를 자동차생산과로, 디지털전기제어과를 전기제어과로, 디지털정보전자과를 디지털전자과로, 부동산지적정보과를 건설교통과로) 2015년 9월 1일 : 제7대 추교수 교장 취임 2018년 2월 9일 : 제18회 졸업식(졸업생 245명) 2018년 3월 2일 : 제21회 입학식(입학생 147명) 이 목록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이 편집하여 채워 주세요. 설치 학과[편집] 컴퓨터응용기계과 기계설비과 전기제어과 자동차과 디지털전자과 자동차금형과 건설교통과 자동차생산과 학교 동문[편집] 분류:휘경공업고등학교 동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참고 자료[편집] 휘경공업고등학교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학교알리미 각주[편집] ↑ 서울특별시의회 (2016년 3월 1일). “서울특별시립학교 설치조례 별표3”.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법제처. 2016년 7월 3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휘경공업고등학교 홈페이지 vdeh 서울특별시의 고등학교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강남구 개포고 경기고 경기여고 국악고 단국공고 단대부고 대진디자인고 서울로봇고 서울세종고 수도전기공고 숙명여고 압구정고 영동고 은광여고 중동고 중산고 중대부고 진선여고 청담고 풍문고 현대고 휘문고 강동구 강동고 강일고 광문고 동북고 둔촌고 명일여고 배재고 상일미디어고 상일여고 서울컨벤션고 선사고 성덕고 한영고 한영외고 강북구 미양고 삼각산고 성암국제무역고 신일고 영훈고 창문여고 혜화여고 강서구 강서공고 경복비즈니스고 경복여고 공항고 대일고 덕원여고 덕원예고 동양고 등촌고 마포고 명덕고 명덕여고 명덕외고 서울항공비즈니스고 세현고 수명고 신정여상 영등포공고 영일고 한광고 한서고 화곡고 화곡보건경영고 관악구 광신고 광신정보산업고 구암고 남강고 당곡고 미림여고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삼성고 서울관광고 서울문영여고 서울미술고 서울여상 성보고 신림고 영락고 영락의료과학고 인헌고 광진구 건대부고 광남고 광양고 대원고 대원여고 대원외고 동대부여고 선화예고 자양고 구로구 경인고 고척고 구로고 구일고 구현고 덕일전자공고 서서울생활과학고 서울공연예고 세종과고 신도림고 예림디자인고 오류고 우신고 유한공고 금천구 금천고 독산고 동일여고 동일여상 문일고 전통예고 노원구 경기기계공고 광운전자공고 노원고 대진고 대진여고 동산정보산업고 미래산업과학고 불암고 상계고 상명고 서라벌고 서울아이티고 수락고 염광고 염광여자메디텍고 영신간호비즈니스고 영신여고 용화여고 월계고 인덕공고 재현고 청원고 청원여고 한국삼육고 혜성여고 도봉구 누원고 도봉고 서울문화고 서울외고 선덕고 세그루패션디자인고 자운고 정의여고 창동고 효문고 동대문구 경희고 경희여고 대광고 동대부고 정화여상 청량고 해성국제컨벤션고 해성여고 휘경공고 휘경여고 휘봉고 동작구 경문고 동작고 서울공고 성남고 수도여고 숭의여고 영등포고 마포구 경성고 광성고 상암고 서울디자인고 서울여고 숭문고 한세사이버보안고 홍대부여고 홍익디자인고 서대문구 가재울고 명지고 이대부고 인창고 중앙여고 한성고 한성과고 서초구 동덕여고 반포고 상문고 서문여고 서울고 서울전자고 서초고 세화고 세화여고 양재고 언남고 성동구 경일고 금호고 덕수고 도선고 무학여고 서울방송고 성수고 성수공고 한대부고 성북구 경동고 계성고 고대부고 고명경영고 대일외고 동구마케팅고 서울사대부고 서울도시과학기술고 석관고 성신여고 용문고 한성여고 홍대부고 송파구 가락고 문정고 문현고 방산고 배명고 보성고 보인고 서울체고 송파공고 영동일고 영파여고 오금고 일신여상 잠신고 잠실고 잠실여고 잠일고 정신여고 창덕여고 양천구 강서고 광영고 광영여고 금옥여고 대일관광고 목동고 백암고 서울금융고 서울영상고 신목고 신서고 양정고 양천고 진명여고 한가람고 영등포구 관악고 대영고 선유고 여의도고 여의도여고 영등포여고 영신고 장훈고 한강미디어고 용산구 배문고 보성여고 서울디지텍고 선린인터넷고 성심여고 신광여고 오산고 용산고 용산공고 중경고 은평구 대성고 동명여고 동명여자정보산업고 선일여고 선일이비즈니스고 선정고 선정국제관광고 세명컴퓨터고 숭실고 신도고 신진과학기술고 예일디자인고 예일여고 은평고 은평메디텍고 진관고 충암고 하나고 종로구 경기상고 경복고 경신고 대동세무고 대신고 덕성여고 동성고 배화여고 상명사대부여고 서울과고 서울국제고 서울예고 서일국제경영고 중앙고 중구 경기여상 대경상고 리라아트고 성동고 성동공고 성동글로벌경영고 이화여고 이화여자외고 장충고 한양공고 환일고 중랑구 면목고 송곡고 송곡관광고 송곡여고 신현고 원묵고 이대병설미디어고 중화고 태릉고 혜원여고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휘경공업고등학교&oldid=23582028" 분류: 서울특별시의 공립 고등학교서울 동대문구의 고등학교1998년 개교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0일 (수) 06:3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휘경공고에서 건설과 관련된 학과는? |
벽성대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벽성대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벽성대학Byuksung College표어 인재육성, 흥국부민 종류 전문대학존재했던 기간 1994년 11월 17일~2014년 2월 28일 (2014-02-28)총장 유재경학교법인 학교법인 충렬학원학생 수 980명국가 대한민국위치 본교캠퍼스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유강3길 133완주캠퍼스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완주로 387-5 벽성대학의 위치 벽성대학(碧城大學, Byuksung College)은 대한민국의 폐교된 전문대학이다. 모태는 1955년 추포 류충렬 박사가 세운 인천소년수양원이며, 1994년 11월 17일 "인재육성, 흥국부민"이라는 이념 하에 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1995년 3월 14일에 개교하여, 2014년 2월 28일에 폐교되었다. 목차 1 연혁 2 교육편제 3 폐교 4 각주 5 외부 링크 연혁[편집] 1955년 2월 19일 : 인천소년수양원 개원 1955년 12월 16일 : 인천직업소년학교로 교명 변경. 1966년 11월 19일 : 학교법인 인광성학원 설립인가. 1994년 11월 17일 : 벽성전문대학 설립 인가.(정원 640명) 당시 설치학과 : 자동차과, 전자과, 전자계산과, 사무자동화과, 건축과, 건설안전과, 공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과 1995년 3월 14일 : 벽성전문대학 개교 및 입학식. 1995년 10월 26일 : 주간 2개과 증설.(정보통신과, 아동복지과) (정원 800명) 1997년 2월 20일 : 제1회 전문학사 학위수여식. 1997년 10월 31일 : 주간 3개과 증설.(방송매체과, 토목과, 영어통역과) 일부 학과 증원. (정원 1280명) 1998년 5월 1일 : 벽성대학으로 교명 변경. 1999년 11월 15일 : 정원감축 및 13개 학과를 4개 계열 5개 학과로 계열화 및 학과명 변경. (정원 1160명) 2000년 11월 2일 : 정원감축 및 계열·학과를 5개 계열 4개 학과로 변경. (정원 1140명) 2002년 10월 10일 : 피부미용과, 치위생과 개설. (정원 1140명) 2003년 8월 30일 : 정원감축 및 6개 학과 개설.(호텔조리과, 유아교육과, 아동미술과, 아동미디어과, 케어복지과, 부동산경영과) (정원 1100명) 2004년 8월 30일 : 광고영상과, 의료행정과 신설. (정원 1100명) 2005년 6월 3일 : 완주군에 제2캠퍼스 준공. 2005년 8월 30일 : 4개 학과 폐과 (인테리어디자인과, 광고영상과, 의료행정과, 아동미디어과) 및 정원감축. (정원 980명) 2006년 9월 27일 : 군특수가상현실과, 사회복지경영과 신설. (정원 980명) 2007년 8월 1일 : 조경과 신설. (정원 980명) 2010년 :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학자금대출 최소대출대학[1] 2011년 :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2] 2013년 : 교육부 선정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및 경영부실대학[3] 2013년 2월 28일 : 교육과학기술부에 의해 강제 폐교 명령[4] 2014년 2월 28일 : 학교 폐교 교육편제[편집] 이 목록은 벽성대학이 폐교되기 직전인 2014년 기준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이다. 건축과 토목환경과 조경과 유아교육과 아동복지과 사회복지상담과 사회복지경영과 부동산행정과 뷰티건강복지과 발효식품과 치위생과 폐교[편집] 2011년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된 중대한 부정·비리 사항에 대해 시정조치를 내렸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감사 이후에도 불법 학위를 수여해 학교폐쇄 방침을 확정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벽성대는 학교폐쇄 명령 예고(7월 중), 청문(8월 중), 학교폐쇄 명령 및 2013학년도 학생모집정지 처분(2013년 8월 31일)의 순서로 학교폐쇄가 진행됐다. 학교폐쇄 후 재학생들은 인근 전문대학의 동일·유사학과로 특별 편입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벽성대학 퇴출이 확정되면서 2012년 2월 29일에 폐교한 명신대학교, 성화대학, 같은 해 8월에 폐교한 건동대학교에 이어서 이명박 정부 들어 네 번째 퇴출 대학이 되면서 2014년 2월 28일에 폐교됐다. 각주[편집] ↑ 학자금 대출 제한받는 하위30개 대학 어디?, 경향신문, 2010년 9월 7일 작성. ↑ 정부, 43개 사립대학 재정지원 제한, 연합뉴스, 2011년 9월 5일 작성. ↑ 35개 사립대 재정지원제한·9개대 국가장학금도 제한, 연합뉴스, 2013년 8월 29일 작성. ↑ 교육과학기술부공고 제2012-510호, 2012년 9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벽성대학 홈페이지 vdeh대한민국의 없어진 고등교육기관통합으로 폐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가천의과학대학교|가천길대학|경원대학교|경원전문대학(가천대학교) 공주문화대학|천안공업대학|예산농업전문대학(공주대학교) 국학대학|우석대학교|고려대학교 병설보건대학(고려대학교) 경남간호전문대학|통영수산전문대학(경상대학교) 경희간호대학|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동양의과대학(경희대학교) 대구대학|청구대학(영남대학교) 동명대학|동명정보대학교(동명대학교) 부산공업대학교|부산수산대학교(부경대학교)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수도공과대학|홍익공업전문대학(홍익대학교) 신흥대학교|한북대학교(신한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적십자간호대학(중앙대학교) 청주과학대학|충주대학교|한국철도대학(한국교통대학교) 제주산업정보대학|탐라대학교(제주국제대학교) 대구사범학교|대구의학전문학교|상주대학교(경북대학교)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성신여자대학교) 군산수산전문대학(군산대학교) 동우대학(경동대학교) 밀양대학교(부산대학교) 삼척대학교(강원대학교) 삼육의명대학(삼육대학교) 서울보건대학(을지대학교) 성심여자대학교(가톨릭대학교) 성심외국어대학(영산대학교) 수도침례신학교(침례신학대학교) 여수대학교(전남대학교) 우송공업대학(우송대학교) 원주대학(강릉원주대학교) 익산대학(전북대학교) 인천전문대학(인천대학교) 제주교육대학교(제주대학교) 한국정보통신대학교(KAIST) 효성여자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폐교 경성제국대학(1946) 대전사범학교(1963) 광주예술대학교(2000) 세무대학(2001) 아시아대학교(2008) 건동대학교(2012) 명신대학교(2012) 선교청대학교(2012) 성화대학(2012) 경북외국어대학교(2013)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2014) 벽성대학(2014) 한민학교(2014) 인제대학원대학교(2015) 대구외국어대학교(2018) 대구미래대학교(2018) 서남대학교(2018) 한중대학교(201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벽성대학&oldid=24512227" 분류: 1995년 개교2014년 폐교대한민국의 없어진 대학교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2일 (화) 04: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벽성대학에는 어떤 학위 과정이 있나요? |
벽성대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벽성대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벽성대학Byuksung College표어 인재육성, 흥국부민 종류 전문대학존재했던 기간 1994년 11월 17일~2014년 2월 28일 (2014-02-28)총장 유재경학교법인 학교법인 충렬학원학생 수 980명국가 대한민국위치 본교캠퍼스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유강3길 133완주캠퍼스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완주로 387-5 벽성대학의 위치 벽성대학(碧城大學, Byuksung College)은 대한민국의 폐교된 전문대학이다. 모태는 1955년 추포 류충렬 박사가 세운 인천소년수양원이며, 1994년 11월 17일 "인재육성, 흥국부민"이라는 이념 하에 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1995년 3월 14일에 개교하여, 2014년 2월 28일에 폐교되었다. 목차 1 연혁 2 교육편제 3 폐교 4 각주 5 외부 링크 연혁[편집] 1955년 2월 19일 : 인천소년수양원 개원 1955년 12월 16일 : 인천직업소년학교로 교명 변경. 1966년 11월 19일 : 학교법인 인광성학원 설립인가. 1994년 11월 17일 : 벽성전문대학 설립 인가.(정원 640명) 당시 설치학과 : 자동차과, 전자과, 전자계산과, 사무자동화과, 건축과, 건설안전과, 공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과 1995년 3월 14일 : 벽성전문대학 개교 및 입학식. 1995년 10월 26일 : 주간 2개과 증설.(정보통신과, 아동복지과) (정원 800명) 1997년 2월 20일 : 제1회 전문학사 학위수여식. 1997년 10월 31일 : 주간 3개과 증설.(방송매체과, 토목과, 영어통역과) 일부 학과 증원. (정원 1280명) 1998년 5월 1일 : 벽성대학으로 교명 변경. 1999년 11월 15일 : 정원감축 및 13개 학과를 4개 계열 5개 학과로 계열화 및 학과명 변경. (정원 1160명) 2000년 11월 2일 : 정원감축 및 계열·학과를 5개 계열 4개 학과로 변경. (정원 1140명) 2002년 10월 10일 : 피부미용과, 치위생과 개설. (정원 1140명) 2003년 8월 30일 : 정원감축 및 6개 학과 개설.(호텔조리과, 유아교육과, 아동미술과, 아동미디어과, 케어복지과, 부동산경영과) (정원 1100명) 2004년 8월 30일 : 광고영상과, 의료행정과 신설. (정원 1100명) 2005년 6월 3일 : 완주군에 제2캠퍼스 준공. 2005년 8월 30일 : 4개 학과 폐과 (인테리어디자인과, 광고영상과, 의료행정과, 아동미디어과) 및 정원감축. (정원 980명) 2006년 9월 27일 : 군특수가상현실과, 사회복지경영과 신설. (정원 980명) 2007년 8월 1일 : 조경과 신설. (정원 980명) 2010년 :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학자금대출 최소대출대학[1] 2011년 :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2] 2013년 : 교육부 선정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및 경영부실대학[3] 2013년 2월 28일 : 교육과학기술부에 의해 강제 폐교 명령[4] 2014년 2월 28일 : 학교 폐교 교육편제[편집] 이 목록은 벽성대학이 폐교되기 직전인 2014년 기준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이다. 건축과 토목환경과 조경과 유아교육과 아동복지과 사회복지상담과 사회복지경영과 부동산행정과 뷰티건강복지과 발효식품과 치위생과 폐교[편집] 2011년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된 중대한 부정·비리 사항에 대해 시정조치를 내렸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감사 이후에도 불법 학위를 수여해 학교폐쇄 방침을 확정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벽성대는 학교폐쇄 명령 예고(7월 중), 청문(8월 중), 학교폐쇄 명령 및 2013학년도 학생모집정지 처분(2013년 8월 31일)의 순서로 학교폐쇄가 진행됐다. 학교폐쇄 후 재학생들은 인근 전문대학의 동일·유사학과로 특별 편입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벽성대학 퇴출이 확정되면서 2012년 2월 29일에 폐교한 명신대학교, 성화대학, 같은 해 8월에 폐교한 건동대학교에 이어서 이명박 정부 들어 네 번째 퇴출 대학이 되면서 2014년 2월 28일에 폐교됐다. 각주[편집] ↑ 학자금 대출 제한받는 하위30개 대학 어디?, 경향신문, 2010년 9월 7일 작성. ↑ 정부, 43개 사립대학 재정지원 제한, 연합뉴스, 2011년 9월 5일 작성. ↑ 35개 사립대 재정지원제한·9개대 국가장학금도 제한, 연합뉴스, 2013년 8월 29일 작성. ↑ 교육과학기술부공고 제2012-510호, 2012년 9월 28일. 외부 링크[편집] 벽성대학 홈페이지 vdeh대한민국의 없어진 고등교육기관통합으로 폐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가천의과학대학교|가천길대학|경원대학교|경원전문대학(가천대학교) 공주문화대학|천안공업대학|예산농업전문대학(공주대학교) 국학대학|우석대학교|고려대학교 병설보건대학(고려대학교) 경남간호전문대학|통영수산전문대학(경상대학교) 경희간호대학|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동양의과대학(경희대학교) 대구대학|청구대학(영남대학교) 동명대학|동명정보대학교(동명대학교) 부산공업대학교|부산수산대학교(부경대학교)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수도공과대학|홍익공업전문대학(홍익대학교) 신흥대학교|한북대학교(신한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적십자간호대학(중앙대학교) 청주과학대학|충주대학교|한국철도대학(한국교통대학교) 제주산업정보대학|탐라대학교(제주국제대학교) 대구사범학교|대구의학전문학교|상주대학교(경북대학교)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성신여자대학교) 군산수산전문대학(군산대학교) 동우대학(경동대학교) 밀양대학교(부산대학교) 삼척대학교(강원대학교) 삼육의명대학(삼육대학교) 서울보건대학(을지대학교) 성심여자대학교(가톨릭대학교) 성심외국어대학(영산대학교) 수도침례신학교(침례신학대학교) 여수대학교(전남대학교) 우송공업대학(우송대학교) 원주대학(강릉원주대학교) 익산대학(전북대학교) 인천전문대학(인천대학교) 제주교육대학교(제주대학교) 한국정보통신대학교(KAIST) 효성여자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폐교 경성제국대학(1946) 대전사범학교(1963) 광주예술대학교(2000) 세무대학(2001) 아시아대학교(2008) 건동대학교(2012) 명신대학교(2012) 선교청대학교(2012) 성화대학(2012) 경북외국어대학교(2013)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2014) 벽성대학(2014) 한민학교(2014) 인제대학원대학교(2015) 대구외국어대학교(2018) 대구미래대학교(2018) 서남대학교(2018) 한중대학교(201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벽성대학&oldid=24512227" 분류: 1995년 개교2014년 폐교대한민국의 없어진 대학교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2일 (화) 04: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벽성대학의 제2캠퍼스는 어느 지역에 준공되었습니까? |
이대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대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대 역명판 외선순환(신촌 방면) 승강장 모습 개괄 관할 기관 서울교통공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 지하180 개업일 1984년 5월 22일 역 번호 241 승강장 구조 1면 2선(섬식) 노선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 기점 46.0 km ■ 서울 지하철 2호선 ← 신촌 (0.8 km) 아현 →(0.9 km) 이대역(梨大驛)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과 서대문구 대현동에 걸쳐 있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지하철역이다. 인근에 이화여자대학교 정문이 있어 역명이 제정되었다. 이 역은 리모델링 작업으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상징인 배꽃(梨花)이 역 구내에 그려져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옆길로 경의·중앙선 신촌역과 연계된다. 목차 1 역사 2 역 구조 2.1 승강장 3 역 주변 4 이용객 변동 5 인접한 역 6 각주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83년 6월 30일 : 이대역으로 역명 결정[1] 1984년 5월 22일 :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 ~ 을지로입구 구간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출구 7개) 2005년 12월 15일 : 경사형 엘리베이터 설치 2006년 4월 30일 : 승강장 스크린도어 설치 2007년 2월 9일 : 역사 리모델링 공사 끝 역 구조[편집] 승강장은 1면 2선의 섬식 승강장이며,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출구는 6개다. 이 역은 주변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대합실과 승강장 간 심도 차이가 크고, 구조상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승강장[편집] 신촌 ↑ | 내외 | ↓ 아현 외선 순환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 · 홍대입구 · 합정 · 당산 · 영등포구청 · 신도림 방면 내선 순환 시청 · 을지로입구 · 을지로3가 · 신당 · 성수 · 건대입구 방면 역 주변[편집] 신촌우체국 경의·중앙선 신촌역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이대부속초등학교 이대부속중학교 이대부속고등학교 이대사회복지관 서울특별시 서부교육지원청 서울대신초등학교 서울북성초등학교 북아현시민아파트 숭문중학교 숭문고등학교 서강대학교 (후문) 한서초등학교 대흥동행정복지센터 신촌동행정복지센터 대현동럭키아파트 이용객 변동[편집] 노선 일평균 인원수 (명/일) 각주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호선 승차 30,881 31,261 30,450 28,040 27,302 25,592 24,358 24,349 24,276 24,851 [2] 하차 31,399 32,637 31,715 29,156 28,301 26,177 24,926 24,842 24,397 25,407 승하차 62,279 63,898 62,165 57,196 55,604 51,768 49,285 49,191 48,674 50,258 노선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호선 승차 24,196 24,168 23,991 24,096 24,974 23,093 21,969 20,163 19,969 하차 24,874 25,010 24,882 25,118 26,018 24,356 23,362 21,413 21,174 승하차 49,070 49,178 48,873 49,214 50,992 47,449 45,331 41,576 41,143 인접한 역[편집]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순환선 240 신촌외선 순환 ■ 서울 지하철 2호선 242 아현내선 순환 각주[편집] ↑ 서울특별시고시 제326호, 1983년 6월 30일. ↑ 서울교통공사 > 알림마당 > 자료실 외부 링크[편집] 이대역 소개 (서울교통공사 사이버 스테이션 홈페이지) vdeh서울 지하철 2호선을지로순환선시청 - 을지로입구 - 을지로3가 - 을지로4가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신당 - 상왕십리 - 왕십리 - 한양대 - 뚝섬 - 성수 - 건대입구 - 구의 - 강변 - 잠실나루 - 잠실 - 잠실새내 - 종합운동장 - 삼성 - 선릉 - 역삼 - 강남 - 교대 - 서초 - 방배 - 사당 - 낙성대 - 서울대입구 - 봉천 - 신림 - 신대방 - 구로디지털단지 - 대림 - 신도림 - 문래 - 영등포구청 - 당산 - 합정 - 홍대입구 - 신촌 - 이대 - 아현 - 충정로 - 시청성수지선성수 - 용답 - 신답 - 용두 - 신설동신정지선신도림 - 도림천 - 양천구청 - 신정네거리 - 까치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대역&oldid=24186522" 분류: 서울 지하철 2호선서울 마포구의 전철역서울 서대문구의 전철역1984년 개업한 철도역숨은 분류: 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MagyarItaliano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5: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10년 이대역에서 승하차하는 하루 평균 인원은 몇 명일까? |
강춘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춘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강춘남(康春男, 1955년 7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전직 부산광역시 동구의원이다. 목차 1 학력 1.1 비학위 수료 2 경력 3 수상 4 역대 선거 결과 학력[편집] 수성초등학교 졸업 비학위 수료[편집] 미국 델라웨어 대학교 행정관료 및 지방자치 행정실무자 교육 수료 국내 지방자치 행정 실무자 교육 수료 부경대학교 자치행정 수료 경력[편집] 태권도 무덕관 경회체육관 운영 1989.11.27 태권도 공인 5단 보유 국제라이온스 309 B지구 광복라이온스 활동 대한민국 팔각회 동구지부 활동 제2대 ~ 제8대 수정3동 청년회장·8통장 겸입 수정3동 청년회 수석고문 수정3동 새마을청년회고문 수정3동 청년회 상임고문 (주)덕암건설 상무이사 수정3동 새마을금고 부이사장·대출심의 위원장 수정3동 무료 봉사센터 민원실장·변호사 자문위촉 수정3동 장학회 심의위원 주민자치위원회 임원 동구 생활체육회 상임이사 수정2동 청년회 고문 박정희·육영수를 좋아하는 모임(박.정.모)수석 부회장 수정2동 주민자치위원회 고문 동부산경찰서 밀양파출소 자율방범대장 고문 수정동 경로당 후원회 임원 동일페인트 동구대리점 기술이사 2010.07 ~ 2014.06 제6대 부산광역시 동구의회 의원 2012.07 ~ 2014.06 제6대 부산광역시 동구의회 후반기 사회도시위원회 위원 수상[편집] 부산지역발전 우수논문상 수상 부산광역시장·경찰청장·구청장·경창서장·표창·감사장 십수회 수상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회 지방 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수정제3동 선거구) 2대 (민선 1기) 무소속 20.93% 1,286표 3위 낙선 제2회 지방 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수정제3동 선거구) 3대 (민선 2기) 무소속 28.25% 1,259표 2위 낙선 6·5 재보궐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수정제2동·수정제3동 선거구) 4대 (민선 3기) 무소속 44.4% 1,930표 2위 낙선 제4회 지방 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동구 나선거구) 5대 (민선 4기) 무소속 13.64% 1,473표 3위 낙선 4·25 재보궐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동구 나선거구) 5대 (민선 4기) 무소속 48.58% 2,062표 2위 낙선 제5회 지방 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동구 나선거구) 6대 (민선 5기) 무소속 28.09% 2,665표 2위 제6회 지방 선거 부산광역시 동구의원(동구 나선거구) 7대 (민선 6기) 무소속 11.49% 1,184표 5위 낙선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강춘남&oldid=24346076" 분류: 1955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수성초등학교 (부산) 동문델라웨어 대학교부경대학교 동문대한민국의 지방의회의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00: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강춘남이 태권도 5단을 딴 년도는? |
김혜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혜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혜연기본 정보예명 김나현출생 1971년 3월 28일(1971-03-28) (48세)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직업 가수장르 트로트활동 시기 1992년 ~ 현재 배우자 고영륜가족 슬하 2남 2녀학력 인천전문대학 체육학과 졸업종교 불교소속사 루체엔터테인먼트 대표곡 서울 대전 대구 부산 1994년 서울 평양 반나절 1994년 간큰 남자 1995년 예쁜 여우 1997년 더 늦기 전에 1998년 유일한 사람 2000년 화난 여자 2003년 유리구두 2004년 토요일 밤에 2007년 참아주세요 2008년 소문난 사랑 2009년 한방이야! 2010년 마지막은 나와 함께 2011년 최고다 당신 2014년 아싸! 내 사랑 2016년 고장 난 눈물샘 2018년 김혜연(金蕙妍, 1971년 3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경력 4 발표 앨범 4.1 참여 앨범 5 주요 수상경력 6 방송 7 홍보대사 생애[편집] 학창시절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대학에 진학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1991년에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꼽는 노래자랑 프로그램 KBS1 《전국노래자랑 - 인천광역시 편》에 참가하여 인기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작사가 서판석의 소속사에 소속되어 김나현이라는 예명으로 《꿈 속에서도 먼 그대》를 발표하면서 댄스 가수로 공식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남성미를 느끼게 하는 강한 록 사운드의 창법을 구사해 주목을 받으며 호소력 짙은 창법으로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그래서 1993년에 《바보같은 여자》를 발표하면서 댄스 가수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였다. 김혜연이 트로트 가수로 전향할 때는 정통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정통 트로트가 아닌 댄스 트로트를 시도하여 신세대 트로트 가수로 이목을 집중시키며 트로트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트로트 가수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김혜연은 본격적으로 1994년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발표하였다. 그 중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은 발표와 동시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 곡이 실린 앨범이 당시 10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김혜연이라는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으로 1990년 대 초반, 각종 인기차트에서 상위권을 섭렵하면서 각종 행사, 무대에 러브콜이 들어올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이외에 데뷔 초창기에는 본인의 히트곡이 포함된 "감각 디스코 테이프", "디스코 메들리", "간큰 남자 시리즈" 로 약 60~200만장의 앨범판매 기록을 세워 화제를 모았다. 1995년에는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실상이 담겨 있는 곡 〈간 큰 남자〉를 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는 신인 가수로 각광을 받았다. 1997년에 발표한 〈예쁜 여우〉는 재미있는 노랫말과 랩이 가미된 독특한 리듬과 멜로디로 인기를 얻어 정통 트로트에서 댄스 트로트 성향이 많이 띄는 곡을 주로 불렀다. 이를 통해 젊은 여성 가수라는 점과 댄스 트로트를 주로 불러 신세대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를 접목시켜 인기를 모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2000년에는 《Best 2000》앨범에 수록된 〈유일한 사람〉이 히트하면서 꾸준히 인지도를 높이며 2003년, 남편과 아내의 실생활의 내용이 담긴 가사와 빠른 리듬의 트로트 〈화난 여자〉로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여자가수상을 수상하였고 2005년, 정통 트로트 성향이 돋보인 〈유리구두〉로 SBS 가요대전 트로트부분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을 수상하며 댄스 트로트 원조에서 트로트 여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근 2007년에 발표한 곡이자 파워풀한 가창력과 댄스가 돋보인 〈토요일 밤에〉는 뮤직 비디오로도 제작되었으며 노래방 애창곡으로 선정되어 널리 불리고 있다. 2008년에는 KBS2 《1박2일 시즌 1》에서 메들리 앨범에 수록되었던 〈참아주세요 (일명: 뱀이다)〉가 기상송으로 쓰이면서 여러 세대층들로부터 많이 불리자 새롭게 편곡하여 활동하며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불혹을 넘긴 2011년에는 《스타 부부쇼 자기야》 에서 넷째를 임신했다고 밝혔고 이듬해 12월 초에 넷째를 출산하였다. 학력[편집] 1990년 인천여자고등학교 졸업 1992년 인천전문대학 체육학과 졸업 경력[편집] 2009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초빙교수 발표 앨범[편집] 연도 제목 1992년 《꿈 속에도 먼 그대》 1993년 《김혜연 1》 1994년 《김혜연 2》 1995년 《아버지/ 신세대 사랑법》 1995년 《김혜연 3》 1996년 《김혜연 쉿!》 1997년 《김혜연 베스트》 1999년 《김혜연 Best 1 》 2002년 《Essay #9》 2003년 《그 사람 그 사랑》 2004년 《김혜연 Best 2》 2006년 《飛上 2006》 2007년 《토요일 밤에》 2008년 《Kim Hye Yeon 2008》 2009년 《Voice From A Heart》 2010년 《The Best Of Best Kim Hye Yeon 1991~2011》 2013년 《최고다 김혜연 Best Of The Best》 2016년 《Queen Of Queen》 2018년 《The Story of My Music》 참여 앨범[편집] 1996년 설운도 옴니버스 《추억의 대전 바닷가》 2017년 오정태 싱글 앨범 《갑질이야》 주요 수상경력[편집] 1990년 KBS 전국노래자랑 인기상 2003년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여자가수상 2004년 제6회 한국예술실연자대상 공로상 2004년 SBS 가요대전 트로트부분상 2004년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여자성인가수상 2012년 제7회 대한민국나눔대상시상식 국회국방위원장상 2014년 MBC 가요베스트 프로듀서상 2016년 제14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여자 가수부문 대상 2016년 제14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여자 가수부문 대상 2017년 베스트가요쇼 대축제 10대 가수상 2017년 2017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대상 바른연예인상 2018년 MBC 가요베스트 대제전 공연문화상 방송[편집] KBS2 ~ KBS1 《가족오락관》 게스트 다수 출연 KBS1 《전국노래자랑》, 《가요무대》 초대가수 다수 출연 KNN 《쑈! TV유랑극단》 초대가수 다수 출연 ubs 《전국 톱 10 가요쇼》 초대가수 다수 출연 MBC 《MBC가요베스트》 초대가수 다수 출연 JTBC 《유자식 상팔자》 KBS2 《출발드림팀 시즌 2》 게스트 출연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MBC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 발리에서 온 발리걸 채널A 《행복한 아침》- 게스트 출연 홍보대사[편집] 2013년 제5대 한국모유수유 홍보대사 2013년 가정폭력 예방 홍보대사 2010년 속초세무서 홍보대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혜연&oldid=24362580" 분류: 1971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대한민국의 여자 육상 선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작사가1992년 데뷔대한민국의 불교 신자인천여자고등학교 동문인천전문대학 동문인천광역시 출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19: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혜연은 <김혜연 2>앨범을 몇 년도에 공개하였는가? |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6° 38′ 17″ 동경 127° 19′ 55″ / 북위 36.637987° 동경 127.331878° / 36.637987; 127.331878 식품의약품안전처 설립일 2013년 3월 23일 설립 근거 「정부조직법」 제25조제1항[1] 전신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생명2로 187 직원 수 602명[2] 예산 세입: 246억 9200만 원[3][4] 세출: 5110억 2700만 원[5][6] 모토 안전한 식의약, 건강한 국민, 행복한 사회 처장 이의경 차장 최성락 상급기관 국무총리 산하기관 소속기관 7 웹사이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웹사이트 식품의약품안전처(食品醫藥品安全處, Ministry of Food and Drug Safety, 약칭: 식약처, MFDS[7])는 식품[8]·건강기능식품·의약품·마약류·화장품·의약외품·의료기기 등의 안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9] 2013년 3월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을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생명2로 187에 위치하고 있다. 처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10]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11]으로 보한다. 목차 1 소관 사무 2 역사 2.1 연혁 3 조직 3.1 처장 3.2 차장 3.3 소속기관 3.4 소속 위원회 4 정원 5 재정 6 논란 및 비판 6.1 식품행정 일원화 논란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소관 사무[편집] 식품[12]·건강기능식품·의약품·마약류·화장품·의약외품·의료기기 등의 안전에 관한 사무 역사[편집] 정부수립 당시 식품과 의약품에 관한 사무는 보건부의 소관사무에 속했다. 방역국에 위생과와 약정국을 두어 식료위생과 약품에 관한 사무를 분장토록 했으며, 1955년에는 보건사회부의 소관사무로 바뀌었다. 당초 위생과는 식품과 관련해서 식료위생만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환경위생, 식품제조 위생 등 소관사항이 늘어났으며 1967년에는 위생과를 환경위생과와 식품위생과로 분리하였다가 1970년에는 차관 직속 위생관리관실로 승격시켰다. 1973년에는 위생국으로 개편했다가 1994년에는 식품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식품국으로 개편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는 식품의약품관리청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불량식품 추방은 정부가 국민과 약속한 것이며 식의약품의 안정성 확보는 삶의 질 향상과 관련있는 당면한 과제이므로 현행 식품위생관리 체계를 대폭 개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작은정부를 표방하고 있지만 개혁적 차원에서 새로운 청을 만들기로 했음을 밝혔다.[13] 이후 1996년 4월 부정·불량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안전관리체계를 확보하고 일원화하기 위해 복지부 산하에 식품의약품안전본부를 독립기구로 설치했다. 이는 식의약품의 안전은 국민보건의 기초이지만 아직 관리체계가 기초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에 전담 기구를 발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4] 또한 복지부 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산하기구로 출범했지만 내년 상반기 중에 독립된 외청으로 확대 개편한 뒤 미국 식품의약국(FDA)처럼 권위를 지닌 기구로 성장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15] FDA 수준의 식약청 설립 모형은 1998년에 실현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에 인수위원회는 FDA를 본뜬 식약청의 기본모형을 제시했는데 "선진국에서도 국민건강 보호차원에서 식품관리업무를 농림부서에서 보건부서로 전환하거나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추세"라며 승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6] 2월 28일 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안전관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신설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권한과 지위 외에도 조직도 '신속, 효율, 책임'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FDA를 벤치마킹했다. 기술행정과 기술심사 조직이 양분되어 협조가 되지 않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기능통합형센터 방식을 본떠 본부·팀제로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17]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판 FDA'는 등장하지 못했다. 발암물질 향어, 기생충알 김치 등 잇따른 식품안전사고가 발생했지만 생산·제조·섭취에 이르는 식품에 대한 광범위한 업무가 복지부, 해수부, 농림부 등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일원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 9월에는 1급 실·국장회의를 열어 식품안전 관리문제 일원화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한국판 FDA의 설립은 장기과제로 돌려버렸다.[18] 이렇듯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독자적으로 일원화 방안에 나서기도 했다. 정책회의를 열어 8개 부처로 분리된 식품관리 안전업무를 복지부와 식약청으로 일원화하고 분석·평가·관리를 위한 인력과 예산의 확대를 추진키로 했다.[19] 이에 2006년 3월 국무총리실은 다시 식품안전 행정업무 일원화에 나서 식품안전 관리·감독 업무를 담당하는 식품안전처를 신설하고 기존의 식약청은 복지부 산하 약품관리본부로 개편하는 안을 추진하기로 밝혔다.[20] 하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던 중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두고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반대로 식약청 개편은 무위로 돌아갔다.[21][22]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에서 '점진적으로 식품안전까지 포함한 식품행정 일원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작은정부를 지향하며 식약청을 농림부에 흡수하려는 기존의 안을 철회하고 사실상 조직 존속을 결정했다.[23] 하지만 대부처·대국주의에 따라 기존의 본부·팀제는 국·과제로 변경되었다.[24]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총리 소속 식약처로 위상이 높아져 승격이 이루어졌다. 이는 '먹을거리 안전관리 일원화'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이며 이에 발맞춰 예산과 인력도 늘어나게 되었다.[25] 연혁[편집] 1998년 02월 28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일부 소관사무를 이관받아 외청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을 설치.[26] 1999년 05월 24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식품·의약품의 안전관련 기능 중 일부를 이관받음.[27] 2008년 02월 29일: 보건복지가족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28] 2010년 03월 19일: 보건복지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29] 2013년 03월 23일: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농축수산물 위생안전에 관한 사무를, 보건복지부로부터 식품·의약품 안전정책에 관한 사무를 이관받아 국무총리 직속 식품의약품안전처로 개편.[30] 조직[편집] 처장[편집] 대변인실[31][32] 차장[편집] 운영지원과[31] 감사담당관[31][32] 위해사범중앙조사단[31] 기획조정관실[33] 기획재정담당관실[31] 혁신행정담당관실[31] 규제개혁법무담당관실[31] 국제협력담당관실[31][32] 정보화통계담당관실[31][32] 고객지원담당관실[31] 비상안전담당관실[34] 소비자위해예방국[33][32] 소비자위해예방정책과[31] 소통협력과[31] 위해정보과[31] 통합식품정보서비스과[31][35] 검사제도과[31] 식품안전정책국[33] 식품안전정책과[31] 식품안전관리과[31] 식품안전표시인증과[31] 건강기능식품정책과[36] 주류안전정책과[31] 식품기준기획관실[33] 식품기준과[36] 유해물질기준과[37] 첨가물기준과[36] 수입식품안전정책국[33] 수입식품정책과[31] 현지실사과[31] 수입검사관리과[31] 수입유통안전과[31] 식품소비안전국[33][32] 식생활영양안전정책과[31] 농축수산물정책과[31] 농축수산물안전과[31] 식중독예방과[31] 의약품안전국[33][32] 의약품정책과[31] 의약품관리과[31] 마약관리과[38][39] 의약품품질과[31] 임상제도과[31] 의약품허가특허관리과[31] 의약품안전평가과[38] 바이오생약국[33] 바이오의약품정책과[31] 바이오의약품품질관리과[31] 한약정책과[31][32] 화장품정책과[31] 의약외품정책과[31] 의료기기안전국[33] 의료기기정책과[31] 의료기기관리과[31] 의료기기안전평가과[31] 소속기관[편집]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광주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소속 위원회[편집]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소속 위원회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원[편집]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으며, 이 중 정원에서 1명(6급 1명)은 농림축산식품부, 1명(6급 1명)은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으로 각각 충원한다.[2] 총계 602명 정무직 계 1명 처장 1명 일반직 계 601명 고위공무원단 10명 3급 이하 5급 이상 190명[40] 6급 이하 401명[41] 재정[편집] 총수입·총지출 기준 2019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4][6]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246억 9200만 원 +2.75%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600만 원 순증 합계 246억 9800만 원 +2.78%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식품의약안전 5041억 3300만 원 +7.9%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식품의약안전 44억 8000만 원 +9.5%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업·농촌 24억 1400만 원 -4.62% 합계 5110억 2700만 원 +7.71% 논란 및 비판[편집] 식품행정 일원화 논란[편집]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에 대해 식약처가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에 연유하여 식품안전행정의 일원화 요구가 거세졌다. 식약처가 식품안전관리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식품의 생산과 유통·소비를 식약처와 농식품부가 각각 관할하는 이중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식약처는 2013년 설립될 당시 식품 위생과 안전관리 업무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조직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 농식품부와 농민단체의 반발로 이원화 체제가 되었고 식품안전의 유기적 관리가 어려워진 것이다. 살충제 파동 당시에는 국무총리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도록 교통정리가 이루어졌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먹거리 안전을 보장해야 할 식품안전관리 일원화 제도의 허점을 드러낸 것"이라며 전반적인 보완을 주문했고, 한국소비자연맹도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창구를 일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42] 이에 대해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은 일원화 문제보다는 제대로 된 판단이 중요하다며 "식약처와 정보·인적 공유를 해 나가겠다"고 밝혔고 류영진 식약처장도 동의하면서 사실상 일원화에 반대했다.[43] 식약처의 전신인 식약청 역시 식품행정업무에 대한 일원화 논란이 있었다. 새우깡 생쥐머리 사건과 2008년 중국산 유제품 멜라민 오염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관리 체계가 농식품부와 이원화되어 있어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식품 안전 관리를 위해 식품행정업무 일원화를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큰 공감을 얻었었다. 하지만 장태평 당시 농식품부 장관과 윤여표 당시 식약청장은 "식품산업 관련은 농식품부가, 식품안전 관련은 식약청이 담당하는 것이 맞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44][45] 하지만 한국처럼 먹거리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식품안전에 대한 전문적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함께 「식품안전기본법」에 의하면 식품안전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국무총리이므로 주요 정책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총리 산하 식품안전정책위원회의 역할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한 특별사법경찰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내 식품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어 유명무실한 수입 원산지 표시 위반 단속 등 단속 권한을 강화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46] 식약처와 농식품부의 권한 다툼은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져 제대로 된 해결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이 식약처를 폐지하고 국민 먹거리 안전업무를 농식품부로 일원화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 정치권에서도 논의가 이어졌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서조차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와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 사이에서 상반된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며, 식약처와 농식품부는 집권여당을 등에 업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47][48] 같이 보기[편집]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 차장 각주[편집] ↑ 식품 및 의약품의 안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둔다. ↑ 가 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2 및 별표7 ↑ 2019년 총수입 기준 ↑ 가 나 기획재정부 열린재정 > 세입/수입 예산편성현황(총수입, 순계) ↑ 2019년 총지출 기준 ↑ 가 나 기획재정부 열린재정 > 세출/수출 예산편성현황(총지출, 순계) ↑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2015년 9월 15일). “정부조직 영어명칭에 관한 규칙 - 중앙행정기관의 약칭과 영어명칭”.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법제처. 2017년 2월 5일에 확인함. ↑ 농수산물 및 그 가공품, 축산물 및 주류를 포함한다. ↑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제3조 ↑ 정부조직법 제25조제2항 및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2 ↑ 정부조직법 제25조제2항 및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제2조 ↑ 농수산물 및 그 가공품, 축산물 및 주류를 포함한다. ↑ “식품·의약품관리청 내년 신설(종합)”. 《연합뉴스》 (서울). 1995년 5월 11일.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식·의약품관리 완벽하게”. 《동아일보》. 1996년 3월 14일.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최병국 (1996년 4월 4일). “식품·의약품안전본부 출범”.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채삼석 (1998년 1월 7일). “한국형 FDA 독립외청 설치 구체화”.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창욱 (2005년 5월 29일). “식약청 '美FDA 방식'으로 조직 전면 개편”.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김광호; 김재중 (2005년 10월 28일). “'한국판 FDA' 설립 물건너가나”. 《경향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전인철; 안만호 (2005년 11월 3일). “식품관리체계 바꾼다… 업무 일원화·식약청인력 300명 증원 추진”. 《파이낸셜뉴스》.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장세훈 (2006년 3월 2일). “'식품안전처' 신설키로”. 《서울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윤철규 (2006년 12월 14일). “식품안전처 신설, 현 정권에서 논의는 사실상 끝?”. 《뉴시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정철; 문수인 (2006년 12월 18일). “식품안전처 설립 무산되나”. 《매일경제》.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하채림 (2008년 1월 16일). “<조직개편 표정> 식품의약품안전청”.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3월 10일). “식약청 국체제로 조직개편”.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호경 (2013년 3월 25일). “식약처, '식품안전관리 일원화' 맞춰 조직 개편”.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법률 제5529호 ↑ 법률 제5982호 ↑ 법률 제8852호 ↑ 법률 제9932호 ↑ 법률 제11690호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어 저 처 커 터 퍼 허 고 노 도 로 모 보 소 오 조 초 코 토 부이사관·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으로 보한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임기제공무원으로 보할 수 있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보건연구관 또는 공업연구관으로 보한다. ↑ 임기제 서기관으로 보한다. ↑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제31조제1항에 따른 평가대상 조직으로 평가기간은 2020년 4월 26일까지다. ↑ 가 나 다 기술서기관·보건연구관 또는 공업연구관으로 보한다. ↑ 기술서기관 또는 보건연구관으로 보한다. ↑ 가 나 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으로 보한다. ↑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제31조제1항에 따른 평가대상 조직으로 평가기간은 2020년 2월 28일까지다. ↑ 한시정원 2명 포함. ↑ 시간선택제채용공무원 2.0명 포함. ↑ 정열 (2017년 8월 20일). “[살충제 계란 과제] 식품안전관리 컨트롤타워 필요… "창구 일원화해야"”.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변해정 (2017년 8월 22일).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 부처 일원화 반대… "식약처와 협업이 더 중요"”. 《뉴시스》 (세종).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10월 6일). “복지위, "식품행정 일원화 시급" 주문”.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4월 16일). “윤여표 식약청장, "식품행정 일원화는 안돼"”.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안종주 (2017년 9월 22일). “식약처, 식품 단속 권한 가져야”. 《프레시안》.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영래 (2017년 9월 18일). “황주홍 "국민 먹거리 안전업무 농식품부로 일원화"”. 《뉴스1》 (무안).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김상영 (2018년 1월 29일). “농식품부·식약처 업무 다툼, 정치권으로…”. 《농민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웹사이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블로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페이스북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련 항목vdeh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국가보훈처 인사혁신처 법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본부 소속 처장 차장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소속 위원회 목록)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강릉수입식품검사소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자성대수입식품검사소 신선대수입식품검사소 양산수입식품검사소 신항수입식품검사소 통영수입식품검사소 감천항수입식품검사소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시험분석센터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의왕수입식품검사소 광주수입식품검사소 인천국제공항수입식품검사소 평택수입식품검사소 인천항수입식품검사소 용인수입식품검사소 김포수입식품검사소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시험분석센터 광주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광양수입식품검사소 군산수입식품검사소 산하 공공기관 식품안전정보원 의료기기정보기술지원센터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 소관기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 한국식품산업협회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vdeh 대한민국 행정부 (조직도) 국무회의 국무위원 정부위원 대통령 감사원 국가정보원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방송통신위원회 국가안전보장회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국민경제자문회의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국가보훈처 인사혁신처 법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행정각부 기획재정부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검찰청 국방부 병무청 방위사업청 행정안전부 경찰청 소방청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진흥청 산림청 산업통상자원부 특허청 보건복지부 환경부 기상청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국토교통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새만금개발청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중소벤처기업부 기획재정부 장관,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를 겸직한다. /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정부 소속이 아닌 법률상 독립기관이다. 전거 통제 WorldCat LCCN: no2001079426 ISNI: 0000 0000 8818 903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_식품의약품안전처&oldid=24452836" 분류: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2013년 설립청주시 소재의 관공서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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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6° 38′ 17″ 동경 127° 19′ 55″ / 북위 36.637987° 동경 127.331878° / 36.637987; 127.331878 식품의약품안전처 설립일 2013년 3월 23일 설립 근거 「정부조직법」 제25조제1항[1] 전신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생명2로 187 직원 수 602명[2] 예산 세입: 246억 9200만 원[3][4] 세출: 5110억 2700만 원[5][6] 모토 안전한 식의약, 건강한 국민, 행복한 사회 처장 이의경 차장 최성락 상급기관 국무총리 산하기관 소속기관 7 웹사이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웹사이트 식품의약품안전처(食品醫藥品安全處, Ministry of Food and Drug Safety, 약칭: 식약처, MFDS[7])는 식품[8]·건강기능식품·의약품·마약류·화장품·의약외품·의료기기 등의 안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9] 2013년 3월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을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생명2로 187에 위치하고 있다. 처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10]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11]으로 보한다. 목차 1 소관 사무 2 역사 2.1 연혁 3 조직 3.1 처장 3.2 차장 3.3 소속기관 3.4 소속 위원회 4 정원 5 재정 6 논란 및 비판 6.1 식품행정 일원화 논란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소관 사무[편집] 식품[12]·건강기능식품·의약품·마약류·화장품·의약외품·의료기기 등의 안전에 관한 사무 역사[편집] 정부수립 당시 식품과 의약품에 관한 사무는 보건부의 소관사무에 속했다. 방역국에 위생과와 약정국을 두어 식료위생과 약품에 관한 사무를 분장토록 했으며, 1955년에는 보건사회부의 소관사무로 바뀌었다. 당초 위생과는 식품과 관련해서 식료위생만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환경위생, 식품제조 위생 등 소관사항이 늘어났으며 1967년에는 위생과를 환경위생과와 식품위생과로 분리하였다가 1970년에는 차관 직속 위생관리관실로 승격시켰다. 1973년에는 위생국으로 개편했다가 1994년에는 식품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식품국으로 개편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는 식품의약품관리청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불량식품 추방은 정부가 국민과 약속한 것이며 식의약품의 안정성 확보는 삶의 질 향상과 관련있는 당면한 과제이므로 현행 식품위생관리 체계를 대폭 개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작은정부를 표방하고 있지만 개혁적 차원에서 새로운 청을 만들기로 했음을 밝혔다.[13] 이후 1996년 4월 부정·불량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안전관리체계를 확보하고 일원화하기 위해 복지부 산하에 식품의약품안전본부를 독립기구로 설치했다. 이는 식의약품의 안전은 국민보건의 기초이지만 아직 관리체계가 기초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에 전담 기구를 발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4] 또한 복지부 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산하기구로 출범했지만 내년 상반기 중에 독립된 외청으로 확대 개편한 뒤 미국 식품의약국(FDA)처럼 권위를 지닌 기구로 성장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15] FDA 수준의 식약청 설립 모형은 1998년에 실현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에 인수위원회는 FDA를 본뜬 식약청의 기본모형을 제시했는데 "선진국에서도 국민건강 보호차원에서 식품관리업무를 농림부서에서 보건부서로 전환하거나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추세"라며 승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6] 2월 28일 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안전관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신설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권한과 지위 외에도 조직도 '신속, 효율, 책임'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FDA를 벤치마킹했다. 기술행정과 기술심사 조직이 양분되어 협조가 되지 않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기능통합형센터 방식을 본떠 본부·팀제로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17]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판 FDA'는 등장하지 못했다. 발암물질 향어, 기생충알 김치 등 잇따른 식품안전사고가 발생했지만 생산·제조·섭취에 이르는 식품에 대한 광범위한 업무가 복지부, 해수부, 농림부 등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일원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 9월에는 1급 실·국장회의를 열어 식품안전 관리문제 일원화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한국판 FDA의 설립은 장기과제로 돌려버렸다.[18] 이렇듯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독자적으로 일원화 방안에 나서기도 했다. 정책회의를 열어 8개 부처로 분리된 식품관리 안전업무를 복지부와 식약청으로 일원화하고 분석·평가·관리를 위한 인력과 예산의 확대를 추진키로 했다.[19] 이에 2006년 3월 국무총리실은 다시 식품안전 행정업무 일원화에 나서 식품안전 관리·감독 업무를 담당하는 식품안전처를 신설하고 기존의 식약청은 복지부 산하 약품관리본부로 개편하는 안을 추진하기로 밝혔다.[20] 하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던 중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두고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반대로 식약청 개편은 무위로 돌아갔다.[21][22]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에서 '점진적으로 식품안전까지 포함한 식품행정 일원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작은정부를 지향하며 식약청을 농림부에 흡수하려는 기존의 안을 철회하고 사실상 조직 존속을 결정했다.[23] 하지만 대부처·대국주의에 따라 기존의 본부·팀제는 국·과제로 변경되었다.[24]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총리 소속 식약처로 위상이 높아져 승격이 이루어졌다. 이는 '먹을거리 안전관리 일원화'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이며 이에 발맞춰 예산과 인력도 늘어나게 되었다.[25] 연혁[편집] 1998년 02월 28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일부 소관사무를 이관받아 외청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을 설치.[26] 1999년 05월 24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식품·의약품의 안전관련 기능 중 일부를 이관받음.[27] 2008년 02월 29일: 보건복지가족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28] 2010년 03월 19일: 보건복지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29] 2013년 03월 23일: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농축수산물 위생안전에 관한 사무를, 보건복지부로부터 식품·의약품 안전정책에 관한 사무를 이관받아 국무총리 직속 식품의약품안전처로 개편.[30] 조직[편집] 처장[편집] 대변인실[31][32] 차장[편집] 운영지원과[31] 감사담당관[31][32] 위해사범중앙조사단[31] 기획조정관실[33] 기획재정담당관실[31] 혁신행정담당관실[31] 규제개혁법무담당관실[31] 국제협력담당관실[31][32] 정보화통계담당관실[31][32] 고객지원담당관실[31] 비상안전담당관실[34] 소비자위해예방국[33][32] 소비자위해예방정책과[31] 소통협력과[31] 위해정보과[31] 통합식품정보서비스과[31][35] 검사제도과[31] 식품안전정책국[33] 식품안전정책과[31] 식품안전관리과[31] 식품안전표시인증과[31] 건강기능식품정책과[36] 주류안전정책과[31] 식품기준기획관실[33] 식품기준과[36] 유해물질기준과[37] 첨가물기준과[36] 수입식품안전정책국[33] 수입식품정책과[31] 현지실사과[31] 수입검사관리과[31] 수입유통안전과[31] 식품소비안전국[33][32] 식생활영양안전정책과[31] 농축수산물정책과[31] 농축수산물안전과[31] 식중독예방과[31] 의약품안전국[33][32] 의약품정책과[31] 의약품관리과[31] 마약관리과[38][39] 의약품품질과[31] 임상제도과[31] 의약품허가특허관리과[31] 의약품안전평가과[38] 바이오생약국[33] 바이오의약품정책과[31] 바이오의약품품질관리과[31] 한약정책과[31][32] 화장품정책과[31] 의약외품정책과[31] 의료기기안전국[33] 의료기기정책과[31] 의료기기관리과[31] 의료기기안전평가과[31] 소속기관[편집]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광주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소속 위원회[편집]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소속 위원회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원[편집]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으며, 이 중 정원에서 1명(6급 1명)은 농림축산식품부, 1명(6급 1명)은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으로 각각 충원한다.[2] 총계 602명 정무직 계 1명 처장 1명 일반직 계 601명 고위공무원단 10명 3급 이하 5급 이상 190명[40] 6급 이하 401명[41] 재정[편집] 총수입·총지출 기준 2019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4][6]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246억 9200만 원 +2.75%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600만 원 순증 합계 246억 9800만 원 +2.78%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식품의약안전 5041억 3300만 원 +7.9%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식품의약안전 44억 8000만 원 +9.5%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업·농촌 24억 1400만 원 -4.62% 합계 5110억 2700만 원 +7.71% 논란 및 비판[편집] 식품행정 일원화 논란[편집]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에 대해 식약처가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에 연유하여 식품안전행정의 일원화 요구가 거세졌다. 식약처가 식품안전관리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식품의 생산과 유통·소비를 식약처와 농식품부가 각각 관할하는 이중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식약처는 2013년 설립될 당시 식품 위생과 안전관리 업무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조직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 농식품부와 농민단체의 반발로 이원화 체제가 되었고 식품안전의 유기적 관리가 어려워진 것이다. 살충제 파동 당시에는 국무총리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도록 교통정리가 이루어졌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먹거리 안전을 보장해야 할 식품안전관리 일원화 제도의 허점을 드러낸 것"이라며 전반적인 보완을 주문했고, 한국소비자연맹도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창구를 일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42] 이에 대해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은 일원화 문제보다는 제대로 된 판단이 중요하다며 "식약처와 정보·인적 공유를 해 나가겠다"고 밝혔고 류영진 식약처장도 동의하면서 사실상 일원화에 반대했다.[43] 식약처의 전신인 식약청 역시 식품행정업무에 대한 일원화 논란이 있었다. 새우깡 생쥐머리 사건과 2008년 중국산 유제품 멜라민 오염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관리 체계가 농식품부와 이원화되어 있어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식품 안전 관리를 위해 식품행정업무 일원화를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큰 공감을 얻었었다. 하지만 장태평 당시 농식품부 장관과 윤여표 당시 식약청장은 "식품산업 관련은 농식품부가, 식품안전 관련은 식약청이 담당하는 것이 맞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44][45] 하지만 한국처럼 먹거리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식품안전에 대한 전문적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함께 「식품안전기본법」에 의하면 식품안전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국무총리이므로 주요 정책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총리 산하 식품안전정책위원회의 역할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한 특별사법경찰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내 식품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어 유명무실한 수입 원산지 표시 위반 단속 등 단속 권한을 강화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46] 식약처와 농식품부의 권한 다툼은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져 제대로 된 해결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이 식약처를 폐지하고 국민 먹거리 안전업무를 농식품부로 일원화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 정치권에서도 논의가 이어졌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서조차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와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 사이에서 상반된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며, 식약처와 농식품부는 집권여당을 등에 업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47][48] 같이 보기[편집]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 차장 각주[편집] ↑ 식품 및 의약품의 안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둔다. ↑ 가 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2 및 별표7 ↑ 2019년 총수입 기준 ↑ 가 나 기획재정부 열린재정 > 세입/수입 예산편성현황(총수입, 순계) ↑ 2019년 총지출 기준 ↑ 가 나 기획재정부 열린재정 > 세출/수출 예산편성현황(총지출, 순계) ↑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2015년 9월 15일). “정부조직 영어명칭에 관한 규칙 - 중앙행정기관의 약칭과 영어명칭”.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법제처. 2017년 2월 5일에 확인함. ↑ 농수산물 및 그 가공품, 축산물 및 주류를 포함한다. ↑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제3조 ↑ 정부조직법 제25조제2항 및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2 ↑ 정부조직법 제25조제2항 및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제2조 ↑ 농수산물 및 그 가공품, 축산물 및 주류를 포함한다. ↑ “식품·의약품관리청 내년 신설(종합)”. 《연합뉴스》 (서울). 1995년 5월 11일.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식·의약품관리 완벽하게”. 《동아일보》. 1996년 3월 14일.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최병국 (1996년 4월 4일). “식품·의약품안전본부 출범”.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채삼석 (1998년 1월 7일). “한국형 FDA 독립외청 설치 구체화”.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창욱 (2005년 5월 29일). “식약청 '美FDA 방식'으로 조직 전면 개편”.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김광호; 김재중 (2005년 10월 28일). “'한국판 FDA' 설립 물건너가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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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한다. ↑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제31조제1항에 따른 평가대상 조직으로 평가기간은 2020년 2월 28일까지다. ↑ 한시정원 2명 포함. ↑ 시간선택제채용공무원 2.0명 포함. ↑ 정열 (2017년 8월 20일). “[살충제 계란 과제] 식품안전관리 컨트롤타워 필요… "창구 일원화해야"”.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변해정 (2017년 8월 22일).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 부처 일원화 반대… "식약처와 협업이 더 중요"”. 《뉴시스》 (세종).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10월 6일). “복지위, "식품행정 일원화 시급" 주문”.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4월 16일). “윤여표 식약청장, "식품행정 일원화는 안돼"”.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안종주 (2017년 9월 22일). “식약처, 식품 단속 권한 가져야”. 《프레시안》.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영래 (2017년 9월 18일). “황주홍 "국민 먹거리 안전업무 농식품부로 일원화"”. 《뉴스1》 (무안).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김상영 (2018년 1월 29일). “농식품부·식약처 업무 다툼, 정치권으로…”. 《농민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웹사이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블로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페이스북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련 항목vdeh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국가보훈처 인사혁신처 법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본부 소속 처장 차장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소속 위원회 목록)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강릉수입식품검사소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자성대수입식품검사소 신선대수입식품검사소 양산수입식품검사소 신항수입식품검사소 통영수입식품검사소 감천항수입식품검사소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시험분석센터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의왕수입식품검사소 광주수입식품검사소 인천국제공항수입식품검사소 평택수입식품검사소 인천항수입식품검사소 용인수입식품검사소 김포수입식품검사소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시험분석센터 광주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광양수입식품검사소 군산수입식품검사소 산하 공공기관 식품안전정보원 의료기기정보기술지원센터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 소관기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 한국식품산업협회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vdeh 대한민국 행정부 (조직도) 국무회의 국무위원 정부위원 대통령 감사원 국가정보원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방송통신위원회 국가안전보장회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국민경제자문회의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국가보훈처 인사혁신처 법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행정각부 기획재정부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검찰청 국방부 병무청 방위사업청 행정안전부 경찰청 소방청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진흥청 산림청 산업통상자원부 특허청 보건복지부 환경부 기상청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국토교통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새만금개발청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중소벤처기업부 기획재정부 장관,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를 겸직한다. / 국가인권위원회는 행정부 소속이 아닌 법률상 독립기관이다. 전거 통제 WorldCat LCCN: no2001079426 ISNI: 0000 0000 8818 903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_식품의약품안전처&oldid=24452836" 분류: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2013년 설립청주시 소재의 관공서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0일 (목) 00:3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2019년 재정 규모 관련 정보는 어떻게 돼? |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6° 38′ 17″ 동경 127° 19′ 55″ / 북위 36.637987° 동경 127.331878° / 36.637987; 127.331878 식품의약품안전처 설립일 2013년 3월 23일 설립 근거 「정부조직법」 제25조제1항[1] 전신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생명2로 187 직원 수 602명[2] 예산 세입: 246억 9200만 원[3][4] 세출: 5110억 2700만 원[5][6] 모토 안전한 식의약, 건강한 국민, 행복한 사회 처장 이의경 차장 최성락 상급기관 국무총리 산하기관 소속기관 7 웹사이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웹사이트 식품의약품안전처(食品醫藥品安全處, Ministry of Food and Drug Safety, 약칭: 식약처, MFDS[7])는 식품[8]·건강기능식품·의약품·마약류·화장품·의약외품·의료기기 등의 안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9] 2013년 3월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을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생명2로 187에 위치하고 있다. 처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10]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11]으로 보한다. 목차 1 소관 사무 2 역사 2.1 연혁 3 조직 3.1 처장 3.2 차장 3.3 소속기관 3.4 소속 위원회 4 정원 5 재정 6 논란 및 비판 6.1 식품행정 일원화 논란 7 같이 보기 8 각주 9 외부 링크 소관 사무[편집] 식품[12]·건강기능식품·의약품·마약류·화장품·의약외품·의료기기 등의 안전에 관한 사무 역사[편집] 정부수립 당시 식품과 의약품에 관한 사무는 보건부의 소관사무에 속했다. 방역국에 위생과와 약정국을 두어 식료위생과 약품에 관한 사무를 분장토록 했으며, 1955년에는 보건사회부의 소관사무로 바뀌었다. 당초 위생과는 식품과 관련해서 식료위생만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환경위생, 식품제조 위생 등 소관사항이 늘어났으며 1967년에는 위생과를 환경위생과와 식품위생과로 분리하였다가 1970년에는 차관 직속 위생관리관실로 승격시켰다. 1973년에는 위생국으로 개편했다가 1994년에는 식품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식품국으로 개편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는 식품의약품관리청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불량식품 추방은 정부가 국민과 약속한 것이며 식의약품의 안정성 확보는 삶의 질 향상과 관련있는 당면한 과제이므로 현행 식품위생관리 체계를 대폭 개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작은정부를 표방하고 있지만 개혁적 차원에서 새로운 청을 만들기로 했음을 밝혔다.[13] 이후 1996년 4월 부정·불량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안전관리체계를 확보하고 일원화하기 위해 복지부 산하에 식품의약품안전본부를 독립기구로 설치했다. 이는 식의약품의 안전은 국민보건의 기초이지만 아직 관리체계가 기초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에 전담 기구를 발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4] 또한 복지부 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산하기구로 출범했지만 내년 상반기 중에 독립된 외청으로 확대 개편한 뒤 미국 식품의약국(FDA)처럼 권위를 지닌 기구로 성장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15] FDA 수준의 식약청 설립 모형은 1998년에 실현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에 인수위원회는 FDA를 본뜬 식약청의 기본모형을 제시했는데 "선진국에서도 국민건강 보호차원에서 식품관리업무를 농림부서에서 보건부서로 전환하거나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추세"라며 승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6] 2월 28일 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안전관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신설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권한과 지위 외에도 조직도 '신속, 효율, 책임'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FDA를 벤치마킹했다. 기술행정과 기술심사 조직이 양분되어 협조가 되지 않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기능통합형센터 방식을 본떠 본부·팀제로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17]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판 FDA'는 등장하지 못했다. 발암물질 향어, 기생충알 김치 등 잇따른 식품안전사고가 발생했지만 생산·제조·섭취에 이르는 식품에 대한 광범위한 업무가 복지부, 해수부, 농림부 등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일원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 9월에는 1급 실·국장회의를 열어 식품안전 관리문제 일원화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한국판 FDA의 설립은 장기과제로 돌려버렸다.[18] 이렇듯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독자적으로 일원화 방안에 나서기도 했다. 정책회의를 열어 8개 부처로 분리된 식품관리 안전업무를 복지부와 식약청으로 일원화하고 분석·평가·관리를 위한 인력과 예산의 확대를 추진키로 했다.[19] 이에 2006년 3월 국무총리실은 다시 식품안전 행정업무 일원화에 나서 식품안전 관리·감독 업무를 담당하는 식품안전처를 신설하고 기존의 식약청은 복지부 산하 약품관리본부로 개편하는 안을 추진하기로 밝혔다.[20] 하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던 중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두고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반대로 식약청 개편은 무위로 돌아갔다.[21][22]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에서 '점진적으로 식품안전까지 포함한 식품행정 일원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작은정부를 지향하며 식약청을 농림부에 흡수하려는 기존의 안을 철회하고 사실상 조직 존속을 결정했다.[23] 하지만 대부처·대국주의에 따라 기존의 본부·팀제는 국·과제로 변경되었다.[24]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총리 소속 식약처로 위상이 높아져 승격이 이루어졌다. 이는 '먹을거리 안전관리 일원화'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이며 이에 발맞춰 예산과 인력도 늘어나게 되었다.[25] 연혁[편집] 1998년 02월 28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일부 소관사무를 이관받아 외청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을 설치.[26] 1999년 05월 24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식품·의약품의 안전관련 기능 중 일부를 이관받음.[27] 2008년 02월 29일: 보건복지가족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28] 2010년 03월 19일: 보건복지부의 외청으로 소속 변경.[29] 2013년 03월 23일: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농축수산물 위생안전에 관한 사무를, 보건복지부로부터 식품·의약품 안전정책에 관한 사무를 이관받아 국무총리 직속 식품의약품안전처로 개편.[30] 조직[편집] 처장[편집] 대변인실[31][32] 차장[편집] 운영지원과[31] 감사담당관[31][32] 위해사범중앙조사단[31] 기획조정관실[33] 기획재정담당관실[31] 혁신행정담당관실[31] 규제개혁법무담당관실[31] 국제협력담당관실[31][32] 정보화통계담당관실[31][32] 고객지원담당관실[31] 비상안전담당관실[34] 소비자위해예방국[33][32] 소비자위해예방정책과[31] 소통협력과[31] 위해정보과[31] 통합식품정보서비스과[31][35] 검사제도과[31] 식품안전정책국[33] 식품안전정책과[31] 식품안전관리과[31] 식품안전표시인증과[31] 건강기능식품정책과[36] 주류안전정책과[31] 식품기준기획관실[33] 식품기준과[36] 유해물질기준과[37] 첨가물기준과[36] 수입식품안전정책국[33] 수입식품정책과[31] 현지실사과[31] 수입검사관리과[31] 수입유통안전과[31] 식품소비안전국[33][32] 식생활영양안전정책과[31] 농축수산물정책과[31] 농축수산물안전과[31] 식중독예방과[31] 의약품안전국[33][32] 의약품정책과[31] 의약품관리과[31] 마약관리과[38][39] 의약품품질과[31] 임상제도과[31] 의약품허가특허관리과[31] 의약품안전평가과[38] 바이오생약국[33] 바이오의약품정책과[31] 바이오의약품품질관리과[31] 한약정책과[31][32] 화장품정책과[31] 의약외품정책과[31] 의료기기안전국[33] 의료기기정책과[31] 의료기기관리과[31] 의료기기안전평가과[31] 소속기관[편집]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광주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소속 위원회[편집]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소속 위원회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원[편집]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으며, 이 중 정원에서 1명(6급 1명)은 농림축산식품부, 1명(6급 1명)은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으로 각각 충원한다.[2] 총계 602명 정무직 계 1명 처장 1명 일반직 계 601명 고위공무원단 10명 3급 이하 5급 이상 190명[40] 6급 이하 401명[41] 재정[편집] 총수입·총지출 기준 2019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4][6]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246억 9200만 원 +2.75%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600만 원 순증 합계 246억 9800만 원 +2.78% 구분 2019년 예산 작년 대비 증감 일반회계 식품의약안전 5041억 3300만 원 +7.9%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식품의약안전 44억 8000만 원 +9.5%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업·농촌 24억 1400만 원 -4.62% 합계 5110억 2700만 원 +7.71% 논란 및 비판[편집] 식품행정 일원화 논란[편집]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에 대해 식약처가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에 연유하여 식품안전행정의 일원화 요구가 거세졌다. 식약처가 식품안전관리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식품의 생산과 유통·소비를 식약처와 농식품부가 각각 관할하는 이중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식약처는 2013년 설립될 당시 식품 위생과 안전관리 업무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조직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 농식품부와 농민단체의 반발로 이원화 체제가 되었고 식품안전의 유기적 관리가 어려워진 것이다. 살충제 파동 당시에는 국무총리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도록 교통정리가 이루어졌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먹거리 안전을 보장해야 할 식품안전관리 일원화 제도의 허점을 드러낸 것"이라며 전반적인 보완을 주문했고, 한국소비자연맹도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창구를 일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42] 이에 대해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은 일원화 문제보다는 제대로 된 판단이 중요하다며 "식약처와 정보·인적 공유를 해 나가겠다"고 밝혔고 류영진 식약처장도 동의하면서 사실상 일원화에 반대했다.[43] 식약처의 전신인 식약청 역시 식품행정업무에 대한 일원화 논란이 있었다. 새우깡 생쥐머리 사건과 2008년 중국산 유제품 멜라민 오염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관리 체계가 농식품부와 이원화되어 있어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식품 안전 관리를 위해 식품행정업무 일원화를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큰 공감을 얻었었다. 하지만 장태평 당시 농식품부 장관과 윤여표 당시 식약청장은 "식품산업 관련은 농식품부가, 식품안전 관련은 식약청이 담당하는 것이 맞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44][45] 하지만 한국처럼 먹거리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식품안전에 대한 전문적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함께 「식품안전기본법」에 의하면 식품안전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국무총리이므로 주요 정책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총리 산하 식품안전정책위원회의 역할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한 특별사법경찰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내 식품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어 유명무실한 수입 원산지 표시 위반 단속 등 단속 권한을 강화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46] 식약처와 농식품부의 권한 다툼은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져 제대로 된 해결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이 식약처를 폐지하고 국민 먹거리 안전업무를 농식품부로 일원화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 정치권에서도 논의가 이어졌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서조차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와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 사이에서 상반된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며, 식약처와 농식품부는 집권여당을 등에 업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47][48] 같이 보기[편집]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 차장 각주[편집] ↑ 식품 및 의약품의 안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둔다. ↑ 가 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2 및 별표7 ↑ 2019년 총수입 기준 ↑ 가 나 기획재정부 열린재정 > 세입/수입 예산편성현황(총수입, 순계) ↑ 2019년 총지출 기준 ↑ 가 나 기획재정부 열린재정 > 세출/수출 예산편성현황(총지출, 순계) ↑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2015년 9월 15일). “정부조직 영어명칭에 관한 규칙 - 중앙행정기관의 약칭과 영어명칭”.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법제처. 2017년 2월 5일에 확인함. ↑ 농수산물 및 그 가공품, 축산물 및 주류를 포함한다. ↑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제3조 ↑ 정부조직법 제25조제2항 및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별표2 ↑ 정부조직법 제25조제2항 및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제2조 ↑ 농수산물 및 그 가공품, 축산물 및 주류를 포함한다. ↑ “식품·의약품관리청 내년 신설(종합)”. 《연합뉴스》 (서울). 1995년 5월 11일.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식·의약품관리 완벽하게”. 《동아일보》. 1996년 3월 14일.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최병국 (1996년 4월 4일). “식품·의약품안전본부 출범”.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채삼석 (1998년 1월 7일). “한국형 FDA 독립외청 설치 구체화”.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창욱 (2005년 5월 29일). “식약청 '美FDA 방식'으로 조직 전면 개편”.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김광호; 김재중 (2005년 10월 28일). “'한국판 FDA' 설립 물건너가나”. 《경향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전인철; 안만호 (2005년 11월 3일). “식품관리체계 바꾼다… 업무 일원화·식약청인력 300명 증원 추진”. 《파이낸셜뉴스》.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장세훈 (2006년 3월 2일). “'식품안전처' 신설키로”. 《서울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윤철규 (2006년 12월 14일). “식품안전처 신설, 현 정권에서 논의는 사실상 끝?”. 《뉴시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정철; 문수인 (2006년 12월 18일). “식품안전처 설립 무산되나”. 《매일경제》.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하채림 (2008년 1월 16일). “<조직개편 표정> 식품의약품안전청”.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3월 10일). “식약청 국체제로 조직개편”.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호경 (2013년 3월 25일). “식약처, '식품안전관리 일원화' 맞춰 조직 개편”.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법률 제5529호 ↑ 법률 제5982호 ↑ 법률 제8852호 ↑ 법률 제9932호 ↑ 법률 제11690호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어 저 처 커 터 퍼 허 고 노 도 로 모 보 소 오 조 초 코 토 부이사관·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으로 보한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임기제공무원으로 보할 수 있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보건연구관 또는 공업연구관으로 보한다. ↑ 임기제 서기관으로 보한다. ↑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제31조제1항에 따른 평가대상 조직으로 평가기간은 2020년 4월 26일까지다. ↑ 가 나 다 기술서기관·보건연구관 또는 공업연구관으로 보한다. ↑ 기술서기관 또는 보건연구관으로 보한다. ↑ 가 나 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으로 보한다. ↑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제31조제1항에 따른 평가대상 조직으로 평가기간은 2020년 2월 28일까지다. ↑ 한시정원 2명 포함. ↑ 시간선택제채용공무원 2.0명 포함. ↑ 정열 (2017년 8월 20일). “[살충제 계란 과제] 식품안전관리 컨트롤타워 필요… "창구 일원화해야"”. 《연합뉴스》 (서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변해정 (2017년 8월 22일).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 부처 일원화 반대… "식약처와 협업이 더 중요"”. 《뉴시스》 (세종).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10월 6일). “복지위, "식품행정 일원화 시급" 주문”.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신수영 (2008년 4월 16일). “윤여표 식약청장, "식품행정 일원화는 안돼"”. 《머니투데이》.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안종주 (2017년 9월 22일). “식약처, 식품 단속 권한 가져야”. 《프레시안》.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박영래 (2017년 9월 18일). “황주홍 "국민 먹거리 안전업무 농식품부로 일원화"”. 《뉴스1》 (무안).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 김상영 (2018년 1월 29일). “농식품부·식약처 업무 다툼, 정치권으로…”. 《농민신문》. 2018년 4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웹사이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공식 블로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 페이스북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련 항목vdeh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국가보훈처 인사혁신처 법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본부 소속 처장 차장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소속 위원회 목록)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강릉수입식품검사소 부산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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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나방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솔나방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솔나방과 생물 분류 계: 동물계 문: 절지동물문 강: 곤충강 목: 나비목 상과: 솔나방상과 과: 솔나방과(Lasiocampidae)Harris, 1841 학명 Dendrolimus spectabilis 속 본문 참조 솔나방과는 곤충강 나비목의 한 과로, 세계적으로 150속에 약 2000여 종이 속해 있다. 목차 1 솔나방 2 송충이 3 각주 4 참고 자료 솔나방[편집] 솔나방과에 속하며 학명은 Dendrolimus spectabilis 이다.[1] 날개를 편 길이는 수컷이 4 ~ 5cm, 암컷이 6 ~ 8cm이다. 앞날개에는 흰 띠가 3개 있는데, 중앙의 띠는 톱니모양이고 바깥가장자리 띠의 외측에는 흑갈색 무늬가 있다. 성충은 아주 작고 앞날개의 얼룩무늬가 불명료하다.[1] 연 1회 여름에 우화(羽化)하는데 2회 발생하는 것도 있다. 야행성으로 불빛에 잘 날아들며 정지할 때는 날개를 지붕모양으로 접는다.[1] 송충이[편집] 솔나방의 유충은 소나무·해송 외에도 낙엽송의 잎을 먹는 송충이다.[1] 송충이는 완전히 자라면 몸길이가 7cm에 달한다. 등쪽 면은 은백색으로 자흑색 털이 드물게 나며 가운데와 뒷가슴마디의 등쪽 면에는 띠모양으로 바늘모양의 독침털이 빽빽이 나 있다. 사람이 이 털에 찔리면 피부 통증과 염증을 일으킨다.[1] 여름에 산란되어 부화한 유충은 가을이 되면 가지에서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와 뿌리 등에 잠복하여 월동하고 봄에 다시 나무로 올라가 잎을 먹으며, 6월 무렵 완전히 자라 번데기가 된다.[1] 송충이는 한국·일본·사할린 등지에서 소나무에 피해를 주어 해충으로 분류된다. 효과적인 송충이의 구제법으로는 기온이 그다지 내려가지 않는 초가을에 소나무의 줄기에 짚 등을 띠모양으로 감아 두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하면 월동하기 위해 내려온 약령유충(若齡幼蟲)이 그 속에 들어가는데, 이를 봄에 태운다.[1] 천적으로는 딱정벌레목 딱정벌레과에 속한 육식성 곤충인 딱정벌레가 있는데, 파브르가 《곤충기》에서 도축업자에 비유할 정도로 무서운 천적이다. 그외 송충이의 알에 기생하는 송충알벌도 송충이의 천적이다.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생물I·동물·인체/동물의 분류/절지동물/곤충류/나비목/솔나방, 《글로벌 세계 대백과》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솔나방과&oldid=21237089" 분류: 솔나방상과나비목곤충숨은 분류: 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Cebuano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Hrvatski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ietuviųNederlandsNorskDiné bizaad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5월 10일 (목) 23: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송충이가 자라서 성체가 되면 어떤 곤충이될까? |
국가법령정보센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가법령정보센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국가법령정보센터주소 http://www.law.go.kr/main.html표어 신뢰할 수 있는 법제처영리여부 비영리사이트 종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회원 가입 선택사용 언어 한국어, 영어콘텐츠 라이선스 저작권 없음[1] 소유자 대한민국 법제처시작일 2010년 1월 5일 (9년 전)(2010-01-05)현재 상태 운영 중 ↑ 대한민국 국회. “저작권법 제7조”.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 법제처. 2018년 6월 21일에 확인함. 국가법령정보센터는 법령/조약, 행정규칙, 자치법규, 판례, 행정심판 재결례 및 법령해석 등 모든 법령정보의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법제처에서 구축하여 서비스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2010년 1월 5일에 오픈하였다. 목차 1 연혁 1.1 기반 구축 단계 1.2 통합 구축 단계 2 같이 보기 3 외부 링크 연혁[편집] 기반 구축 단계[편집] 1998년 대한민국 현형법령 데이터베이스 구축 1999년 ~ 2000년 : 정부수립이후 2000년까지 공포된 모든 법령을 공포일 기준으로 법령본문을 제작하여 연혁법령 데이터베이스 구축 2004년 ~ 2005년 : 대한제국 수립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까지 공포된 근대법령 데이터베이스 구축(조선총독부령 일부, 미군정법령 등) 2005년 ~ 2006년 : 대한민국 현행법령에 포함된 모든 별표서식을 아래한글(*.hwp) 문서로 제작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 통합 구축 단계[편집] 2009년 법령, 행정규칙, 자치법규 등을 통합 구축 및 연계 서비스할 수 있는 국가법령정보시스템 개발 2010년 국가법령정보센터 서비스 시작 2010년 상하위법비교표(3단비교), 신구법비교표(2단비교) 등 서비스 2010년 앱 서비스(스마트폰으로 법령, 판례 등) 2010년 ~ 2011년 : 부·처·청·위원회, 국회, 대법원 등의 훈령·예규, 고시 등 중앙부처의 모든 행정규칙 통합 구축 2010년 법령정보 식별주소 개발 및 서비스, 법령정보 인쇄 서비스 2010년 법령정보 업데이트에 소요되는 기간을 공포 당일로 단축 2011년 법령용어, 전자법령집, 영문법령 등 서비스 2011년 국가법령정보 특허 출원 및 특허권 획득(2건) 2011년 법령정보 서비스 방식을 공포일 기준에서 시행일 기준으로 변환(시행예정조문 서비스 등 가능) 2012년 법령체계도, 판례체계도 등 서비스 2012년 법령정보 정확성 검사 시스템 개발 및 및 법령정보 업데이트 기능 개선 2013년 법령정보 지식검색 서비스 2016년 법령-조례 조문단위 연계 서비스 같이 보기[편집] 정부입법지원센터 외부 링크[편집]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안드로이드폰 아이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가법령정보센터&oldid=24046838" 분류: 대한민국 법제처2010년 설립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17일 (수) 01: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국가법령정센터의 서비스가 정식으로 시작되게 된 것은 몇 년도의 일인가? |
훈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훈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훈독(訓讀)이란 외국어 문자를 받아들일 때, 그 외국어 문자에 해당하는 자언어의 낱말로 풀어 읽는 것을 말한다. 주로 문자와 발음 사이의 연관관계가 희박한 표어 문자에서 훈독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석독(釋讀) 또는 한자의 새김이라고 하였다. 목차 1 각 언어별 훈독 1.1 수메르 쐐기문자→아카드어 1.2 한자→한국어 1.3 한자→일본어 1.3.1 숙자훈 1.3.2 의훈(義訓) 1.3.2.1 희훈(戲訓) 1.3.3 국훈(國訓) 1.4 외래어의 훈독 2 중국어의 훈독 2.1 대만어 2.2 광둥어 2.3 상하이어 3 함께 읽기 각 언어별 훈독[편집] 수메르 쐐기문자→아카드어[편집] 알려진 역사상 최초로 훈독이란 방식을 이용한 것은 아카드인들이다.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인들의 쐐기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수메르어 쐐기 문자의 의미에 해당하는 아카드어의 단어를 읽기도움자를 이용하여 훈독하였다. 한자→한국어[편집] 중국에서 수입된 한자는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이두, 향찰, 구결 등 다양한 표기방식을 탄생시켰다. 이를 통틀어 차자(借字)표기라고 하며, 크게 음차, 훈차, 훈음차의 3종류로 나뉜다. 음차는 한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한자의 음만을 빌어 한국어를 표기하는 것을 음차라고 한다. 훈차란 그 한자의 한국어 뜻에 해당하는 훈음(訓音)으로 그 글자를 읽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훈음차(訓音借)란 한자의 훈음을 이용하되, 그 의미와 관계없이 훈음을 음차로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어의 경우, 음절구조가 복잡하고 차자표기가 한문과의 경쟁에서 밀려 도태되었다. 이두만이 지방관리 등에 의한 공문서 등에 조선 말기까지 살아남았다. 훈차의 예: 사람→人; 서울→京; 가라/나라/말→韓國語; 봄/여름/가을/겨울→春夏秋冬; 동/서/남/북→東南西北; 해/달/불/물/나무/쇠/흙→日月火水木金土 훈음차의 예: 쇠은구리/쇠/주석→金銀銅鐵錫; 끓일통(湯桶, ゆとう): 석별전자→三星電子 중기사(重箱, じゅうばこ): 일본말→日本語 음차의 예: 사람→事覽 한자→일본어[편집] 한자가 일본에 전해진 뒤에, 한자는 일찍부터 일본어 표기에 쓰였다. 고지키와 만엽집 등이 만요가나로 쓰여 있으며, 일본어의 음절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수의 한자만으로 충분히 일본어를 나타낼 수 있었다. 한자의 뜻에 대응하는 일본어는 와쿤(和訓、倭訓)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한자에 대한 새김이 일정하지 않았다가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한자에 대응하는 일본어의 훈독이 고정되었다. 모든 한자가 음과 훈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화(菊)와 같이, 원래 일본에 없었던 사물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한자는 보통 "음"으로만 쓰이며, 반대로 중국에 없고 일본에는 있는 사물이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국자(고쿠지)는 대부분 훈만 있다. 일본어 한자는 음독도 오음(백제음이라고도 함), 한음, 당음 등 서로 다른 시기에 전래된 한자음을 반영하는 독법이 있고, 훈도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수십 가지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주 쓰이는 중요한 한자는 뜻이 여러가지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흔히 훈이 가장 많은 한자로 드는 것이 生이다. 숙자훈[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쥬쿠지쿤입니다. 숙자훈(熟字訓)이란 한자 한 자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의 한자로 어떤 낱말의 개념을 나타내고, 대신 읽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일본 고유어로 읽어주는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단어, 특히 체언의 경우 오랫동안 한자로 표기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습관이 남은 것이다. 예: 梅雨, 五月雨, 大人, 昨日 등. 의훈(義訓)[편집] 의훈이란 정식훈독이 아니라 문맥상의 뜻이나 개인의 의도, 취향에 따라 넓게 풀이한 훈독을 말한다. 일찍이 만엽집에서 벌써 널리 쓰였으며, 오늘날에도 일본어 문장에서 글쓴이가 특수한 효과를 노릴 때 종종 쓰고 있다. 暖: '따뜻하다'라는 의미의 한자에서 따뜻한 계절→봄이라는 유추에서 봄을 뜻하는 하루라고 훈독하였다. 同じ地球に生まれたの: 한자는 지구라고 쓰고, 별을 뜻하는 호시로 훈독하여 가사의 운율을 맞추었다. 희훈(戲訓)[편집] 희훈이란 의훈의 한 갈래로 말장난이나 수수께끼에 가까운 훈독이다. 역시, 만엽집등 오래된 문헌부터 그 용례가 보인다. 山上復有山(산위에 다시 산이 있다)→山위에 다시 山이 있으니까 出→ いづ((해가)뜨다) 馬聲(말의 울음소리→い) 蜂音(벌이 우는 소리→ぶ) 국훈(國訓)[편집] 국훈이란 한자의 본래 의미(중국어상 의미)가 아니라 일본 독자의 훈이 붙은 것을 말한다.예를 들어 鮎은 중국어로는 메기를 뜻하는 한자지만, 일본어에서는 은어를 뜻하는 아유(あゆ)로 읽는다. 외래어의 훈독[편집] 외래어를 한자에 맞춰 훈독하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에는 꽤 널리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가타카나로 쓴다. 頁 米 哩 弗 숙자훈 麥酒 煙草 중국어의 훈독[편집] 보통화 이외의 중국어(방언)에서도 훈독과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전승되는 규범 한자음과 계속 변화하는 실제 한자음이 너무 달라지거나, 표준어에 없는 낱말을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쓰인다. 대만어[편집] 중국어 방언 가운데 이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대만어이다. 대만 가요중 훈독하는 법을 모르면 읽을 수 없는 한자가 많다. 대응한자가 없는 경우 到 - 훈 kau3,음 tau3,to3 此 - 훈 chit4,음 chhu2 的 - 훈 e0,음 tek4 飮 - 훈 lim5,음 im2 본래는 다른 한자를 쓰는 경우 香 - 훈 phang1,음 hiang1,hiong1,hiuN1 (본자는「芳」) 勿 - 훈 mai3,음 but8 (본자는 「莫」과「愛를 합친 것) 광둥어[편집] 광둥어는 훈독 대신 별도의 방언자를 만들기 때문에, 대만어보다는 훈독이 훨씬 적다. 凹 - 훈 nap1,음 aau3,wa1 孖 - 훈 ma1,음 ji1 熨 - 훈 tong3,음 wan6,wat1(본자는「燙」) 상하이어[편집] 二로 표기하고 兩이라 읽는 유사훈독현상이 보인다. 二 - 훈 liang3,음 el3,nyi3 (본자는「兩」) 함께 읽기[편집] 읽기도움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훈독&oldid=20731535" 분류: 언어학숨은 분류: 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Malagasy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文言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2월 12일 (월) 20: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
훈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훈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훈독(訓讀)이란 외국어 문자를 받아들일 때, 그 외국어 문자에 해당하는 자언어의 낱말로 풀어 읽는 것을 말한다. 주로 문자와 발음 사이의 연관관계가 희박한 표어 문자에서 훈독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석독(釋讀) 또는 한자의 새김이라고 하였다. 목차 1 각 언어별 훈독 1.1 수메르 쐐기문자→아카드어 1.2 한자→한국어 1.3 한자→일본어 1.3.1 숙자훈 1.3.2 의훈(義訓) 1.3.2.1 희훈(戲訓) 1.3.3 국훈(國訓) 1.4 외래어의 훈독 2 중국어의 훈독 2.1 대만어 2.2 광둥어 2.3 상하이어 3 함께 읽기 각 언어별 훈독[편집] 수메르 쐐기문자→아카드어[편집] 알려진 역사상 최초로 훈독이란 방식을 이용한 것은 아카드인들이다.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인들의 쐐기 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수메르어 쐐기 문자의 의미에 해당하는 아카드어의 단어를 읽기도움자를 이용하여 훈독하였다. 한자→한국어[편집] 중국에서 수입된 한자는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이두, 향찰, 구결 등 다양한 표기방식을 탄생시켰다. 이를 통틀어 차자(借字)표기라고 하며, 크게 음차, 훈차, 훈음차의 3종류로 나뉜다. 음차는 한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한자의 음만을 빌어 한국어를 표기하는 것을 음차라고 한다. 훈차란 그 한자의 한국어 뜻에 해당하는 훈음(訓音)으로 그 글자를 읽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훈음차(訓音借)란 한자의 훈음을 이용하되, 그 의미와 관계없이 훈음을 음차로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어의 경우, 음절구조가 복잡하고 차자표기가 한문과의 경쟁에서 밀려 도태되었다. 이두만이 지방관리 등에 의한 공문서 등에 조선 말기까지 살아남았다. 훈차의 예: 사람→人; 서울→京; 가라/나라/말→韓國語; 봄/여름/가을/겨울→春夏秋冬; 동/서/남/북→東南西北; 해/달/불/물/나무/쇠/흙→日月火水木金土 훈음차의 예: 쇠은구리/쇠/주석→金銀銅鐵錫; 끓일통(湯桶, ゆとう): 석별전자→三星電子 중기사(重箱, じゅうばこ): 일본말→日本語 음차의 예: 사람→事覽 한자→일본어[편집] 한자가 일본에 전해진 뒤에, 한자는 일찍부터 일본어 표기에 쓰였다. 고지키와 만엽집 등이 만요가나로 쓰여 있으며, 일본어의 음절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수의 한자만으로 충분히 일본어를 나타낼 수 있었다. 한자의 뜻에 대응하는 일본어는 와쿤(和訓、倭訓)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한자에 대한 새김이 일정하지 않았다가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한자에 대응하는 일본어의 훈독이 고정되었다. 모든 한자가 음과 훈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화(菊)와 같이, 원래 일본에 없었던 사물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한자는 보통 "음"으로만 쓰이며, 반대로 중국에 없고 일본에는 있는 사물이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국자(고쿠지)는 대부분 훈만 있다. 일본어 한자는 음독도 오음(백제음이라고도 함), 한음, 당음 등 서로 다른 시기에 전래된 한자음을 반영하는 독법이 있고, 훈도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수십 가지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주 쓰이는 중요한 한자는 뜻이 여러가지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흔히 훈이 가장 많은 한자로 드는 것이 生이다. 숙자훈[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쥬쿠지쿤입니다. 숙자훈(熟字訓)이란 한자 한 자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의 한자로 어떤 낱말의 개념을 나타내고, 대신 읽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일본 고유어로 읽어주는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단어, 특히 체언의 경우 오랫동안 한자로 표기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습관이 남은 것이다. 예: 梅雨, 五月雨, 大人, 昨日 등. 의훈(義訓)[편집] 의훈이란 정식훈독이 아니라 문맥상의 뜻이나 개인의 의도, 취향에 따라 넓게 풀이한 훈독을 말한다. 일찍이 만엽집에서 벌써 널리 쓰였으며, 오늘날에도 일본어 문장에서 글쓴이가 특수한 효과를 노릴 때 종종 쓰고 있다. 暖: '따뜻하다'라는 의미의 한자에서 따뜻한 계절→봄이라는 유추에서 봄을 뜻하는 하루라고 훈독하였다. 同じ地球に生まれたの: 한자는 지구라고 쓰고, 별을 뜻하는 호시로 훈독하여 가사의 운율을 맞추었다. 희훈(戲訓)[편집] 희훈이란 의훈의 한 갈래로 말장난이나 수수께끼에 가까운 훈독이다. 역시, 만엽집등 오래된 문헌부터 그 용례가 보인다. 山上復有山(산위에 다시 산이 있다)→山위에 다시 山이 있으니까 出→ いづ((해가)뜨다) 馬聲(말의 울음소리→い) 蜂音(벌이 우는 소리→ぶ) 국훈(國訓)[편집] 국훈이란 한자의 본래 의미(중국어상 의미)가 아니라 일본 독자의 훈이 붙은 것을 말한다.예를 들어 鮎은 중국어로는 메기를 뜻하는 한자지만, 일본어에서는 은어를 뜻하는 아유(あゆ)로 읽는다. 외래어의 훈독[편집] 외래어를 한자에 맞춰 훈독하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에는 꽤 널리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가타카나로 쓴다. 頁 米 哩 弗 숙자훈 麥酒 煙草 중국어의 훈독[편집] 보통화 이외의 중국어(방언)에서도 훈독과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전승되는 규범 한자음과 계속 변화하는 실제 한자음이 너무 달라지거나, 표준어에 없는 낱말을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쓰인다. 대만어[편집] 중국어 방언 가운데 이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대만어이다. 대만 가요중 훈독하는 법을 모르면 읽을 수 없는 한자가 많다. 대응한자가 없는 경우 到 - 훈 kau3,음 tau3,to3 此 - 훈 chit4,음 chhu2 的 - 훈 e0,음 tek4 飮 - 훈 lim5,음 im2 본래는 다른 한자를 쓰는 경우 香 - 훈 phang1,음 hiang1,hiong1,hiuN1 (본자는「芳」) 勿 - 훈 mai3,음 but8 (본자는 「莫」과「愛를 합친 것) 광둥어[편집] 광둥어는 훈독 대신 별도의 방언자를 만들기 때문에, 대만어보다는 훈독이 훨씬 적다. 凹 - 훈 nap1,음 aau3,wa1 孖 - 훈 ma1,음 ji1 熨 - 훈 tong3,음 wan6,wat1(본자는「燙」) 상하이어[편집] 二로 표기하고 兩이라 읽는 유사훈독현상이 보인다. 二 - 훈 liang3,음 el3,nyi3 (본자는「兩」) 함께 읽기[편집] 읽기도움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훈독&oldid=20731535" 분류: 언어학숨은 분류: 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Malagasy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文言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2월 12일 (월) 20: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일본어의 훈독이 정해진건 어떤 시대인가? |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榮州 紹修書院 講學堂) 대한민국의 보물 종목 보물 제1403호 (2004년 4월 6일 지정)수량 1동시대 조선시대소유 소수서원위치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내죽리)좌표 북위 36° 55′ 32″ 동경 128° 34′ 48″ / 북위 36.92556° 동경 128.58000° / 36.92556; 128.58000좌표: 북위 36° 55′ 32″ 동경 128° 34′ 48″ / 북위 36.92556° 동경 128.58000° / 36.92556; 128.58000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榮州 紹修書院 講學堂)은 경상북도 영주시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2004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었다.[1] 목차 1 개요 2 같이 보기 3 각주 4 참고 자료 개요[편집]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cm, 높이 8.5cm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紹修書院)'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 기단 3면(정면, 우측, 좌 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소수서원 각주[편집] ↑ 문화재청고시제2004-20호,《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5662호, 221면, 2004-04-06 참고 자료[편집]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영주_소수서원_강학당&oldid=20389624" 분류: 경상북도의 보물영주시의 문화재영주시의 건축물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월 8일 (월) 22: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강학당 내부대청에 걸린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은 누가 썼어? |
경대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대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경대수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58년 3월 18일(1958-03-18) (61세)대한민국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거주지 대한민국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본관 청주학력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법학 석사직업 법조인(검사 → 변호사)경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제1,2차장검사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대검찰청 마약·조직범죄부장 배우자 안승화자녀 경민우, 경효정군복무 육군 중위 전역종교 천주교(세례명: 바오로)소속위원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의원 선수 2의원 대수 19·20정당 자유한국당지역구 충북 증평군·진천군·음성군당내 직책 인권위원장국회 직책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간사 경대수(慶大秀, 1958년 3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제19·20대 국회의원이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의정 활동 4 논란 4.1 아들 병역면제 논란 4.2 IDS홀딩스 연루 의혹 4.3 정책자료집 표절 발간 5 역대 선거 결과 6 각주 7 외부 링크 학력[편집] 장풍초등학교 청주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법학석사 경력[편집] 육군 중위 전역(군 법무관) 법무부 보호과장 2004년 6월 ~ 2005년 4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제1,2차장검사 2005년 4월 ~ 2006년 2월: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2006년 2월 ~ 2006년 10월: 대검찰청 마약조직범죄부장 (검사장) 경대수법률사무소 변호사 한나라당 증평, 진천, 괴산, 음성군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한나라당 충북도당 위원장 새누리당 충북도당 위원장 의정 활동[편집]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제19대 국회의원 (충북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 2012년 7월 ~ 2014년 5월: 제19대 국회 전반기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2012년 7월: 제19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13년 3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 전 ~ 후반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2012년 6월 ~ 2015년 7월: 새누리당 중앙윤리위원회 위원장 2015년 7월 ~ 2016년 7월: 새누리당 충북도당 위원장 2016년 5월 30일 ~ : 제20대 국회의원 (충북 증평군·진천군·음성군) 2016년 6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간사 2016년 7월 ~ 2017년 2월: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2016년 9월 ~ 2017년 2월: 새누리당 인권위원회 위원장 2017년 2월 ~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2017년 2월: 자유한국당 인권위원회 위원장 2017년 6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17년 9월 ~ 2018년 6월 : 자유한국당 북핵위기대응특별위원회 위원 2017년 10월 : 자유한국당 정치보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 2018년 7월 ~ : 제 20대 국회 후반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간사 2018년 12월 ~ : 자유한국당 충북도당 증평군·진천군·음성군 당협위원회 위원장 2018년 12월 ~ : 자유한국당 정책조정위원회 제5정조정위원회(국토·농해수) 위원장 논란[편집] 아들 병역면제 논란[편집]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 청문회에서 이낙연 후보의 불성실한 자료제출을 지적하며 "아들의 어깨 탈골 CT ·MRI사진과 건강보험심의위원회 핵심 자료, 위장전입과 관련 아들의 주민등록 등본 초본, 부동산 취득과 관련 실거래 내역 및 가격 자료, 경찰청 과태료 현황, 선거법 위반과 관련한 자료, 배우자의 그림 판매 실적 자료 등을 이날 정오까지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며 "역대 국무총리 후보자가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1][2] 그러나 '몸이 아프다'며 병역면제 판정을 받은 국회의원 아들 중 경대수 의원의 장남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경대수의원의 장남 군 면제 사유는 질병으로 질병사유는 미공개로 되어있었다. 이로 인하여 본인 아들 병역문제부터 해명하라는 여론의 비난을 받자 아들의 병역문제는 간질이라고 해명하고 "해당 질병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간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서였다"며 "아들이 다른 사회인과 똑같이 살아가길 원했다"고 설명했다.[3][4] IDS홀딩스 연루 의혹[편집] 사기업체 IDS홀딩와 연루 의혹이 있다. IDS홀딩스는 홍콩 FX마진거래에 투자하겠다며 1만2076명으로부터 1조960억 원을 가로챈 다단계 금융사기 업체로 경대수 의원과의 연관성을 의심받고 있다. 2014년 3월 IDS홀딩스의 전신인 IDS아카데미 창립 7주년 기념 영상에 새누리당 경대수 의원이 포함됐다. 경 의원은 영상에서 약 13초에 걸쳐 “IDS아카데미 창립 7주년을 맞이해서 회장님과 대표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IDS아카데미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경 의원은 축하인사를 남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회장님과 대표님’을 직접 언급하며 눈길을 끌었다. 검찰 출신 정치인이 직접 나서 창립 기념일을 축하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은 경대수 의원의 IDS홀딩스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이 되고 있으며 관련 의혹의 중심에는 경대수 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조성재 변호사가 자리한다. IDS홀딩스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광평 조성재 변호사는 지난 2007년부터 5년간 경대수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로 근무하다 경대수 의원이 지난 2012년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보좌관으로 발탁됐다으며 2014년 6월까지 2년 정도 경대수 의원의 보좌관으로 재직하다 돌연 변호사로 복귀했다. 이 시기는 김성훈 IDS홀딩스 대표가 검찰에 수사를 받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조 변호사는 2014년 7월부터 IDS홀딩스를 변호하기 시작했고 법률 자문까지 참여했다. IDS 홀딩스 피해자 연합은 IDS 홀딩스 홍보영상에 등장한 경대수 의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경 의원의 처신으로 피해가 커졌다"면서 경 의원의 사과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관련 의혹에 대하여 경대수 의원실 관계자는 “경대수 의원과 IDS홀딩스와 전혀 관계가 없다. 세간에서 제기된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조성재 변호사가 그만둔 이유는 개인적인 사정이었지 IDS홀딩스 소송 때문이 아니다”라며 “해당 영상은 고향인 괴산 동네 선배가 부탁한 내용으로 건네 받은 문구를 그저 읽었을 뿐이다. 해당 동네 선배의 신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단순 축하 메시지가 아닌 ‘회장님과 대표님’을 직접 언급한 이유 역시 그냥 적힌 대로 읽었던 것뿐이다”고 밝혔다.[5][6][7][8][9] 정책자료집 표절 발간[편집] 2012년, 2013년, 2015년 세 차례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총서, 농림축산식품부 용역보고서, 산림청 발표자료를 인용이나 출처 표기없이 베껴 정책자료집 발간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10]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4·29재보궐 18대 국회의원 충북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 한나라당 22.077 표 29.6% 2위 낙선 총선 19대 국회의원 충북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 새누리당 51,471 표 53.66% 1위 초선 총선 20대 국회의원 충북 증평군·진천군·음성군 새누리당 41,053 표 45.1% 1위 재선 각주[편집] ↑ “[이낙연 청문회]경대수 ‘자료 제출’ 압박에 누리꾼 “경대수 장남 軍 면제, 사유 미공개?” : 뉴스 : 동아닷컴”. 《동아닷컴》. 2017년 5월 24일.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경대수 아들도 병역 면제? 질병사유는 미공개했으면서 이낙연 후보 아들에 "병역면제 제출"”. 《전자신문 etnews》. 2017년 5월 24일.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청문회 '문자 폭탄' 경대수, "아들 군면제 사유는 간질"”. 《한국일보》.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경대수 “아들 병역면제, 간질 때문…편견 있어 밝히지 않았다” 해명 : 뉴스 : 동아닷컴”. 《동아닷컴》. 2017년 5월 25일.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경대수 의원 축하 동영상 IDS홀딩스 사태와 관련 있나 없나”. 2016년 9월 30일.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쿠키영상] ‘누가 누굴 청문해?’ 경대수, 이낙연 총리후보자에 자료제출 압박하다 역풍…“IDS홀딩스 의혹은 또 뭐죠?””.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IDS홀딩스와 새누리당은 대체 무슨 관계? - 미디어스”.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IDS홀딩스 피해자, "경대수 징계해야" - 미디어스”.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역풍 곤욕' 경대수 의원, 'IDS 홀딩스' 개입 의혹 추궁 이어져 - 한국스포츠경제”. 《한국스포츠경제》. 2017년 5월 24일.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박중석 (2017년 10월 16일). “[국회개혁] 경대수.조경태, ‘출처표기’ 요구한 연구보고서 무단 복제”. 《뉴스타파》. 외부 링크[편집] 경대수 - 대한민국헌정회 공식 홈페이지 전 임 정범구 제19대 국회의원(충북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새누리당 후 임 (증평군·진천군·음성군)경대수(보은군·옥천군·영동군·괴산군)박덕흠 전 임 (증평군·진천군·음성군·괴산군)경대수 제20대 국회의원(충북 증평군·진천군·음성군) 2016년 5월 30일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후 임 (현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경대수&oldid=24389048" 분류: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195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청주 경씨괴산군 출신장풍초등학교 동문청주중학교 동문경동고등학교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동문대한민국 육군 중위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대한민국의 변호사자유한국당 당원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6월 6일 (목) 18: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경대수 의원의 장남이 군 면제를 받은 원인이 된 병명은 무엇이었습니까? |
올드 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올드 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올드 펌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셀틱과 레인저스 서포터들 올드 펌 경기 (2008년) 올드 펌(영어: Old Firm, "오랜 동료"라는 뜻)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인 셀틱과 레인저스 간의 라이벌 경기를 가리킨다. 목차 1 개요 2 라이벌 의식 3 경기장 4 상대 전적 5 외부 링크 개요[편집] 셀틱과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축구 클럽으로 손꼽히며 양 팀의 우승 횟수 합계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97회, 스코틀랜드 컵 우승 68회, 스코틀랜드 리그 컵 우승 41회에 달한다. 한때 셀틱과 레인저스의 패권에 도전했던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80년대 초반 당시의 애버딘과 던디 유나이티드가 있었다. 그러나 1985-86 시즌 이후부터는 셀틱과 레인저스가 거의 매 시즌마다 리그 우승과 준우승을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셀틱과 레인저스 간에 벌어진 경기 수는 총 400경기 이상에 달하며 양 팀간의 상대 전적은 레인저스 승리 159경기, 셀틱 승리 144경기, 무승부 96경기이다. 이들 클럽은 통상적으로 리그와 컵 대회를 포함해 총 4차례 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셀틱과 레인저스 모두 글래스고 인근에 서포터가 많은 편이지만 스코틀랜드와 전 세계 각 도시마다 서포터가 있다. 양 팀간의 경기에서 창출되는 스코틀랜드의 경제 효과는 120,000,000 영국 파운드에 달한다. 라이벌 의식[편집] 셀틱과 레인저스는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 간의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셀틱 서포터들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반감 때문에 양 팀 서포터 사이에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셀틱 서포터들은 경기 때마다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들지만 반대로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영국의 국기를 흔든다. 경기장[편집] 셀틱 셀틱 레인저스 레인저스 셀틱 파크 아이브록스 스타디움 수용인원: 60,832명 수용인원: 50,987명 상대 전적[편집] 대회 경기 수 레인저스 승리 무승부 셀틱 승리 스코틀랜드 리그 304 119 85 100 스코틀랜드 컵 48 16 9 23 스코틀랜드 리그컵 47 24 2 21 합계 400 159 96 144 주석: 리그 통계는 1904-05 시즌 챔피언 플레이오프 경기(셀틱이 2-1로 승리함)를 포함한다. 1888년부터 1999년까지의 통계는 RSSSF 참조; 그 외의 통계는 Soccerbase 참조.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올드 펌 Head-to-head results Soccerbase The Old Firm, The Scotsman vdeh축구 더비지역더비그리스현재 쌍두수리 더비 아테네 더비 영원한 적들의 더비 올림피아코스-PAOK 라이벌전 대한민국현재 강릉정기전 경인 더비 동해안 더비 수원 더비 계작살 슈퍼매치 미니 지지대 더비 연고전·고연전 오리지날 클라시코 서울 더비 카포전·포카전 호남 더비 깃발 더비 과거 경평대항축구전 동대문 더비 독일현재 노르트 더비 레비어 더비 뮌헨 더비 데어 클라시커 미국현재 뉴욕 더비, 로스앤젤레스 더비 스코틀랜드현재 올드 펌 스페인현재 데르비 바르셀루니 엘 데르비 마드릴레뇨 엘 클라시코 아르헨티나현재 로사리오 클라시코 수페르클라시코 클라시코 데 아베야네다 클라시코 플라텐세 이탈리아현재 데르비 델 솔레 데르비 델라 란테르나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 데르비 디탈리아 잉글랜드현재 노스웨스트 더비 런던 더비 동 서 남 북 맨체스터 더비 머지사이드 더비 타인 위어 더비 타인 티스 더비 버밍엄 더비 터키현재 크탈라르 아라스 데르비 프랑스현재 르 클라시크 파리 더비 국가 더비 한반도 더비 한일전 공한증 대한민국-이란 축구 라이벌전 이 글은 축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올드_펌&oldid=22893390" 분류: 스코틀랜드의 축구 더비셀틱 FC레인저스 FC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축구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Català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uskaraSuomiFrançaisGàidhlig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1일 (수) 23: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셀틱과 레인저스는 어느 나라의 축구 클럽인가? |
응우옌민찌엣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응우옌민찌엣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4년 1월) 전 국가 주석 응우옌민찌엣 응우옌민찌엣(베트남어: Nguyễn Minh Triết, 1942년 10월 8일 ~ )은 베트남의 정치가. 제7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주석이다. 목차 1 생애 1.1 정치 활동 1.2 베트남 노동당 활동 1.3 국가 주석 선출 생애[편집] 정치 활동[편집] 1942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대에 빈즈엉 성 벤캇 지구에서 태어났다. 사이공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1960년 반 남베트남 정부 학생 시위과 관여하게 되어, 반 정부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후, 사이공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1965년 3월 30일 베트남 노동당(현재 베트남 공산당)의 남부 조직에 입당하였다. 1974년부터 1976년에 걸쳐 응우옌아이꾹 당 고급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베트남 통일 후, 남부 출신자로서는 드물게 간부급까지 올랐고 1991년 6월 베트남 공산당 제7회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12월에는 남부에 있는 손베이성의 당위원회 비서로 임명되었다. 성당위원회서기 재임중에 농업이 기간산업을 성을 중심으로, 외국 투자를 유치했다. 1992년에 소집된 제9기 국회 이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2010년 기준, 4선). 베트남 노동당 활동[편집] 1996년 7월 제8회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게 재선되었다. 1997년 1월 호치민시당위원회 부서기에 임명되었다. 12월 제8기 당중앙위원회 제4회 총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당내 서열 제 19위가 되어, 당 중앙 대중 동원 위원장으로 임명된다. 2000년 1월 6일에는 호치민시당위원회 비서로 취임하였다. 이 때 그는 조직범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개최해, 암흑가의 거물이라고 칭해진 남깜등을 체포했다. 2001년 4월 제9회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재선되어 당내 서열 제 4위가 된다. 이 당대회에서는 판반카이 총리의 경질이 의제에 올라, 응우옌민찌엣을 후임으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많아졌다.그러나, 남부 출신인 보반끼엣 전 정부수상등이 판반카이의 경질을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판반카이는 계속 정부수상직을 수행했고, 응우옌민찌엣의 정부수상 취임은 실현되지 않았다. 2006년 4월에 개최된 제10회 당대회에서 다시 정치국원, 당내 서열 제 4위가 된다. 이 당대회에서는 농득마인 총비서에 대해 관리의 부패에 책임을 묻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었다. 총비서 재선을 목표로 하는 농득마인에 대해, 반대파는 응우옌민찌엣을 후보를 삼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에 의한 자유 선거로 총비서를 선출하게 되었다. 중앙위원회의 비밀 투표에서는 응우옌민찌엣이 득표를 많이 획득했다고 하는 소문이 한때 흘렀지만, 실제로는 찌엣은 선거 직전에 후보를 사퇴하여, 농득마인이 총비서에 재임되었다. 응우옌민찌엣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2006년 11월 7일 베트남을 방문한 부시 미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 한 응우옌민찌엣 부부 국가 주석 선출[편집] 동년 5월 16일부터 6월 29일까지 개최된 제 11기 국회 제 9회 회의인 6월 27일 정식으로 국가 주석에게 선출되었다. 취임 직후의 기자 회견에서 그는, 내정의 과제로서 당, 정부내에서 만연하는 부패 척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외교 분야에서는 "미국, 중국과의 우호와 경제 관계를 강화하고 싶다."라고 말한바 있다. 11월에 하노이에서 개최된 제18회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 회의(APEC) 정상회의에서는 호스트 역할도 맡았다. 다음 해 7월, 제12기 국회 제 1회 회의에서 국가 주석에게 재선되었다. 덧붙여 베트남의 국가주석은 의례적인 국가원수이며, 베트남의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는 총비서로, 정부의 통괄은 수상이 실시하지만, 농득마잉 총비서가 제10회 당대회에서 정치적 위신을 저하하여, 정치의 결정권은 응우옌민찌엣 국가주석, 응우옌떤중 정부수상, 쯔엉떤상 당비서국 상임 비서등 3명이 장악 하고 있다라는 견해가 있다. 2007년 11월에 일본을 방문하였다. 2011년 7월 25일 국가주석을 퇴임했다. 전임아피싯 웨차치와 제15대 ASEAN 의장2010년 후임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vdeh베트남의 국가 원수북베트남 (1945년 ~ 1976년) 호찌민 똔득탕 남베트남 (1946 ~ 1976년)코친차이나 공화국 (1946년 ~ 1948년) 응우옌반틴 응우옌반쑤언 레반호악 응우옌반쑤언 중앙 정부 (1948년 ~ 1949년) 응우옌반쑤언 베트남국 (1949년 ~ 1955년) 보대 황제 응오딘지엠* 베트남 공화국 (1955년 ~ 1975년)총통 응오딘지엠 즈엉반민 × 응우옌카인 × 즈엉반민 × 응우옌카인 × 즈엉반민 × 판칵스우 × 응우옌반티에우 × 쩐반흐엉 × 즈엉반민 × 남베트남 공화국 (1975 ~ 76년) 응우옌흐우토 베트남 (1976년 ~) 똔득탕 응우옌흐우토* 쯔엉찐 보찌꽁 레득아인 쩐득르엉 응우옌민찌엣 쯔엉떤상 쩐다이꽝 당티응옥틴* 응우옌푸쫑 * 권한 대행 × 군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응우옌민찌엣&oldid=23562871" 분류: 194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빈즈엉성 출신베트남의 국가 원수중국계 베트남인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1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IlokanoIdo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Runa Simi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吴语ייִדיש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9일 (화) 01: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응우옌민찌엣의 노동당원 활동 약력은 어떻게됩니까? |
응우옌민찌엣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응우옌민찌엣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4년 1월) 전 국가 주석 응우옌민찌엣 응우옌민찌엣(베트남어: Nguyễn Minh Triết, 1942년 10월 8일 ~ )은 베트남의 정치가. 제7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주석이다. 목차 1 생애 1.1 정치 활동 1.2 베트남 노동당 활동 1.3 국가 주석 선출 생애[편집] 정치 활동[편집] 1942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대에 빈즈엉 성 벤캇 지구에서 태어났다. 사이공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1960년 반 남베트남 정부 학생 시위과 관여하게 되어, 반 정부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후, 사이공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1965년 3월 30일 베트남 노동당(현재 베트남 공산당)의 남부 조직에 입당하였다. 1974년부터 1976년에 걸쳐 응우옌아이꾹 당 고급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베트남 통일 후, 남부 출신자로서는 드물게 간부급까지 올랐고 1991년 6월 베트남 공산당 제7회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12월에는 남부에 있는 손베이성의 당위원회 비서로 임명되었다. 성당위원회서기 재임중에 농업이 기간산업을 성을 중심으로, 외국 투자를 유치했다. 1992년에 소집된 제9기 국회 이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2010년 기준, 4선). 베트남 노동당 활동[편집] 1996년 7월 제8회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게 재선되었다. 1997년 1월 호치민시당위원회 부서기에 임명되었다. 12월 제8기 당중앙위원회 제4회 총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당내 서열 제 19위가 되어, 당 중앙 대중 동원 위원장으로 임명된다. 2000년 1월 6일에는 호치민시당위원회 비서로 취임하였다. 이 때 그는 조직범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개최해, 암흑가의 거물이라고 칭해진 남깜등을 체포했다. 2001년 4월 제9회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재선되어 당내 서열 제 4위가 된다. 이 당대회에서는 판반카이 총리의 경질이 의제에 올라, 응우옌민찌엣을 후임으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많아졌다.그러나, 남부 출신인 보반끼엣 전 정부수상등이 판반카이의 경질을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판반카이는 계속 정부수상직을 수행했고, 응우옌민찌엣의 정부수상 취임은 실현되지 않았다. 2006년 4월에 개최된 제10회 당대회에서 다시 정치국원, 당내 서열 제 4위가 된다. 이 당대회에서는 농득마인 총비서에 대해 관리의 부패에 책임을 묻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었다. 총비서 재선을 목표로 하는 농득마인에 대해, 반대파는 응우옌민찌엣을 후보를 삼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에 의한 자유 선거로 총비서를 선출하게 되었다. 중앙위원회의 비밀 투표에서는 응우옌민찌엣이 득표를 많이 획득했다고 하는 소문이 한때 흘렀지만, 실제로는 찌엣은 선거 직전에 후보를 사퇴하여, 농득마인이 총비서에 재임되었다. 응우옌민찌엣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2006년 11월 7일 베트남을 방문한 부시 미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 한 응우옌민찌엣 부부 국가 주석 선출[편집] 동년 5월 16일부터 6월 29일까지 개최된 제 11기 국회 제 9회 회의인 6월 27일 정식으로 국가 주석에게 선출되었다. 취임 직후의 기자 회견에서 그는, 내정의 과제로서 당, 정부내에서 만연하는 부패 척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외교 분야에서는 "미국, 중국과의 우호와 경제 관계를 강화하고 싶다."라고 말한바 있다. 11월에 하노이에서 개최된 제18회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 회의(APEC) 정상회의에서는 호스트 역할도 맡았다. 다음 해 7월, 제12기 국회 제 1회 회의에서 국가 주석에게 재선되었다. 덧붙여 베트남의 국가주석은 의례적인 국가원수이며, 베트남의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는 총비서로, 정부의 통괄은 수상이 실시하지만, 농득마잉 총비서가 제10회 당대회에서 정치적 위신을 저하하여, 정치의 결정권은 응우옌민찌엣 국가주석, 응우옌떤중 정부수상, 쯔엉떤상 당비서국 상임 비서등 3명이 장악 하고 있다라는 견해가 있다. 2007년 11월에 일본을 방문하였다. 2011년 7월 25일 국가주석을 퇴임했다. 전임아피싯 웨차치와 제15대 ASEAN 의장2010년 후임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vdeh베트남의 국가 원수북베트남 (1945년 ~ 1976년) 호찌민 똔득탕 남베트남 (1946 ~ 1976년)코친차이나 공화국 (1946년 ~ 1948년) 응우옌반틴 응우옌반쑤언 레반호악 응우옌반쑤언 중앙 정부 (1948년 ~ 1949년) 응우옌반쑤언 베트남국 (1949년 ~ 1955년) 보대 황제 응오딘지엠* 베트남 공화국 (1955년 ~ 1975년)총통 응오딘지엠 즈엉반민 × 응우옌카인 × 즈엉반민 × 응우옌카인 × 즈엉반민 × 판칵스우 × 응우옌반티에우 × 쩐반흐엉 × 즈엉반민 × 남베트남 공화국 (1975 ~ 76년) 응우옌흐우토 베트남 (1976년 ~) 똔득탕 응우옌흐우토* 쯔엉찐 보찌꽁 레득아인 쩐득르엉 응우옌민찌엣 쯔엉떤상 쩐다이꽝 당티응옥틴* 응우옌푸쫑 * 권한 대행 × 군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응우옌민찌엣&oldid=23562871" 분류: 1942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빈즈엉성 출신베트남의 국가 원수중국계 베트남인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1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베트남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Bahasa IndonesiaIlokanoIdoItaliano日本語Lietuvių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Runa Simi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Winaray吴语ייִדישYorùbá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9일 (화) 01: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정치가로써의 응우옌민찌엣은 어떤 사람이야? |
쿠치키 뱌쿠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치키 뱌쿠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쿠치키 뱌쿠야성우 오키아유 료타로 / 김민석프로필 성별 남자국적 일본직업 사신(6번대 대장)관련인 쿠치키 루키아,쿠치키 긴레이,쿠치키 소쥰 쿠치키 뱌쿠야(일본어: 朽木白哉)는 블리치의 등장인물이다. 목차 1 프로필 2 도구 3 기술 4 개요 5 기타 사항 프로필[편집] 신장 : 180 cm 체중 : 64 kg 생일 : 1월 31일 취미 : 한밤의 산책 특기 : 서예 좋아하는 음식 : 매운 것, 도라지 싫어하는 음식 : 단 것 휴일 보내는 법 : 4대 귀족 집회 참가 및 독서, 서예를 하면서 조용하게 보냄 가족 관계 . 祖父 -쿠치키 긴레이 . 父 - 故쿠치키 소준 . 妻 - 故쿠치키 히사나 . 妹 - 쿠치키 루키아 경력 . 현(現) 소울 소사이어티 호정 13대 6번대 대장 . 현(現) 4대 귀족 쿠치키 가 28대 당주 참백도 : 천본앵(千本櫻 센본-자쿠라) 시해(始解) : 해방하면 검신이 1000송이의 벚꽃잎으로 변해 아름답게 흩어진다. 1000송이의 벚꽃은 그 한 송이 한 송이가 전부 다 날카롭게 연마된 칼날이며 벚꽃들이 아름답게 흩날리는 순간 상대는 무참하게 1000개의 칼날에 의해 베인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천본앵이 닿지 않는 구역인 뱌쿠야를 중심으로 전방 85 cm 가량의 무상권(無狀權)이 있다. 참백도 시해 언령 : "흩날려라, 천본앵(千本櫻)" 만해(卍解) : 천본앵경엄(千本櫻景嚴) 만해 능력 : 검신이 지면으로 향하도록 천본앵을 쥔 다음 그대로 지면에 떨어뜨리면서 발동. 검이 지면 속으로 파문을 일으키면서 고요히 들어가면 그 다음 순간 뱌쿠야의 좌우에 거대한 1000자루의 검들이 일렬종대(一列縱隊)로 늘어선채 솟아오른다. 그 1000자루의 검 하나하나가 다시 1000송이의 벚꽃 칼날로 변해 수 억송이의 벚꽃 칼날이 상대를 습격한다. 사각전무(死角全無)와 공방일체(攻防一體)의 완벽한 전방위공격을 자랑하며 손으로 조종하면 그 속력은 2배가 된다. 하지만 무상권이 존재한다. 참백도 실체화 : 보라색의 천으로 된 옷에 금빛 테로 이루어진 붉은 갑주를 착용하고 있으며 벚꽃 잎을 형상화한 장식이 달린 금빛으로 장식된 붉은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 신비주의 전략인지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회묘와 비매가 얼굴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을 엿봤지만 목욕 중에도 절대 안 벗는다.) 성격은 어릴 적 뱌쿠야를 닮아 다혈질이며 참을성이 없다. 일본의 사무라이 같은 형상이다. 도구[편집] 은백풍화사(銀白風花沙) 대대로 쿠치키 家의 당주만이 걸치는 것이 허락된 순백의 목도리 소울 소사이어티에서 유명한 제작자인 '제 3대 츠지시로 쿠로에몬'의 작품이며 이 목도리 1장으로 저택 10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견성겸(牽星箝) 귀족 가문들의 일원만이 착용하는 것이 허락된 머리카락 고정틀 기술[편집] 섬화(閃花) 뱌쿠야의 독자적인 검술 회전을 건 특수한 순보로 순식간에 상대의 등 뒤로 돌아가 재빨리 사신의 급소인 쇄결(鎖結)과 백수(魄睡)를 베어버리는 기술 은밀보법 사풍의 3번 - 공선(隱謐步法 四楓3番 - 空禪) 뱌쿠야가 어렸을 적에 요루이치에게 배운 순보 중에서도 은밀보법에 해당되는 초고속의 순보 항경 천본앵경엄(吭景 千本櫻景嚴) 만해 상태인 천본앵경엄의 수 억송이의 꽃잎들로 상대를 완벽하게 가둔 다음 그 안에서 꽃잎들이 모든 방향에서 상대를베는 기술 섬경 천본앵경엄(殲景 千本櫻景嚴) 천본앵경엄의 꽃잎 하나하나를 전부 검으로 바꿔 그 검들이 자신과 상대를 원형으로 포진하면서 나타난다. 방어를 버리고 오로지 적을 말살시키는 데에만 중점을 둔 천본앵의 최종 형태이며 뱌쿠야가 자기 스스로 전력을 다해 베어버리겠다고 인정한 상대에게만 보여주는 형태(이치고가 2번째이며 1번째는 불명) 억 자루의 칼날이 상대를 전부 습격하지는 않고, 상대와 싸우는 도중 뱌쿠야가 허를 찌르거나 아니면 연속공격을 할 때 검을 하나씩 불러들여 사용하는 식이다.그러나 원형을 둘러싼 모든검들이 상대를 베는 일은 없다. 섬경 천본앵경엄 오의 일교천인화 섬경 상태의 억 자루의 검이 한꺼번에 적을 베는 기술이다. 천본앵경엄 종경 백제검(千本櫻景嚴 終景 白帝劍) 천본앵경엄의 마지막 형태 천본앵경엄으로 인해 만들어진 검들을 전부 모아 하나의 힘으로 응축시켜 강력한 힘을 지닌 일격을 날리는 기술 뱌쿠야의 최종 공격이며 뱌쿠야가 상대를 완전히 말살시키겠다는 의도를 보였을 때만 사용한다. 개요[편집] 4대 귀족 중 하나인 쿠치키 가문의 현 28대 당주. 역대 최강으로 꼽히고 현 호정 13대 대장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1명 55년 전에 루콘 가에서 루키아의 친언니인 히사나와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사나를 아내로 삼는다. 하지만 5년이 채 흐르지 못하고 히사나는 병으로 죽고 그 다음해에 히사나의 유언대로 친동생인 루키아를 발견해 루키아를 양녀로 거둬 자신의 여동생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때 부모의 묘 앞에서 두 번 다시는 쿠치키 가의 규칙을 어기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으며 그 때문에 루키아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스스로 한 약속으로 인해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루키아의 처형이 결정되었을 때도 마음속으로는 히사나의 유언과 부모님에게 한 약속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괴로워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치고와의 싸움에서 결국 마음의 고민이 풀리고 루키아의 처형이 무산되자 마음속으로 깊게 안도한다. 그 후에는 나름대로 루키아에게 애정표현도 하고 있는 중 어린 시절에는 냉정침착하고 시크한 지금과는 달리 굉장히 다혈질에 감정적인 성격이었으며 그 성격으로 인해 요루이치에게 많이 놀림당했었다. 현재는 알게 모르게 시스터 콤플렉스 성향을 내비치고 있으며 친남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적감각은 루키아와 비슷하게 뭔가 2% 부족한 엉성한 느낌이 많이 닮아있다. 성십자 기사단(퀸시)의 공격으로 만해를 뺏긴채 사망한 듯 하였으나 최근 연재분인 529화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 뒤, 이치고 일행과 영왕궁에 갔다 오고, 시해가 거의 만해처럼 진화하여 자신의 만해를 되찾는다. 천년혈전이 끝난 후 루키아는 렌지와 결혼하여서 렌지의 상관이자 매부가 된다. 기타 사항[편집] 뱌쿠야의 집인 쿠치키 家의 저택은 소울 소사이어티 내에서도 광대한 부지에 세워져 있으며 뱌쿠야의 방 앞에는 뱌쿠야를 위한 강이 흐를 정도로 엄청나게 넓다. 쿠치키 저택에 들어와 바로 보이는 정원 역시 이름모를 꽃들과 나무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연못에는 대대로 당주가 기르고 있는 유서 깊은 잉어도 살고 있다. 이 잉어는 통상 잉어의 3배 정도의 크기이며 전신의 비늘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굉장히 희귀한 잉어이다. 최근에 야치루가 우키타케 문병 선물이랍시고 10마리였던 잉어를 한밤중에 몰래 6마리나 훔쳐가 우키타케의 집인 우건당(雨乾堂)의 연못에 풀어버렸기 때문에 현재는 잉어가 4마리밖에 없으며 야치루가 훔쳐간 것을 모르는 저택의 사용인들 사이에는 <쿠치키 家의 불가사의>로도 유명하다. 최근에 우키타케가 "연못에 잉어가 늘어났지 뭐야!"라고 자랑을 하지만 정작 뱌쿠야 본인은 짜증낸다. vdeh블리치미디어 전개미디어 전개 블리치 (만화) 블리치 (애니메이션) 극장판 1기 2기 3기 4기 실사 영화 게임 Bleach: Blade Battlers Bleach: Heat the Soul Bleach: Soul Carnival SEGA×BLEACH 프로젝트 Bleach: The Blade of Fate Bleach: Dark Souls Bleach: 해방된 야망 Bleach: The 3rd Phantom Bleach: Soul Resurrección 기타 라디오 뮤지컬 등장인물·세계관주요 인물 쿠로사키 이치고 쿠치키 루키아 이노우에 오리히메 사도 야스토라 이시다 우류 아바라이 렌지 호정 13대 쿠치키 뱌쿠야 히츠가야 토시로 이치마루 긴 자라키 켄파치 쿠로츠치 마유리 아이젠 소스케 우라하라 키스케 아란칼 우르키오라 쉬퍼 그림죠 재거잭 세계관 호로 퀸시 귀도 바운트 바이자드 참백도 가라쿠라 정 웨코문드 소울 소사이어티 우라하라 상점 기타 쿠보 타이토 블리치 트레이딩 카드 게임 전거 통제 뮤직브레인즈: 940e32c7-c1b5-4110-9359-18d00817b428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쿠치키_뱌쿠야&oldid=22914367" 분류: 블리치의 등장인물가공의 일본의 검객가공의 남자가공의 귀족호정 13대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anskEnglishEspañol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Bahasa Melayu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hqipไทย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일 (금) 23: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쿠치키 가문은 4대 귀족 중 하나인데 쿠치키 뱌쿠야는 몇 대 당주인가? |
비트볼 뮤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트볼 뮤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트볼 뮤직Beatball Records 형태 주식회사 산업 분야 음반 제작 및 공연 기획 창립 2002년 국가 대한민국 본사 소재지 대한민국서울특별시 핵심 인물 이봉수 (대표) 웹사이트 www.beatballrecords.com 비트볼 레코드(Beatball Records)는 2002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인디 음반사이다. 국내 음악인 발굴과 해외 음반 라이선스 및 60-70년대 팝 재발매 등 다양한 음악을 한국시장에 소개, 유통하고 있으며 소속 음악인들의 공연 기획과 마케팅도 맡고 있다.[1] 목차 1 소속 음악인 1.1 과거 소속 음악인 2 각주 3 외부 링크 소속 음악인[편집] 기린 룩앤리슨 무키무키만만수 서교그룹사운드 과거 소속 음악인[편집] 네눈밖이나무밑쑤시기 (2004년 해체) 라이너스의 담요 몽구스 서울전자음악단 얄개들 (2013년 10월 해체) 줄리아 하트 퓨어킴 플레이걸 핑크엘리펀트 각주[편집] ↑ 김민규, 박준흠 (2008년 7월 9일). “한국의 인디레이블 ① 비트볼 레코드 - 눅눅한 기분 날리는 유머와 위트”. 경향신문. 외부 링크[편집] 공식사이트 이 글은 음악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트볼_뮤직&oldid=21145485" 분류: 대한민국의 음반사2002년 설립숨은 분류: 음악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4월 23일 (월) 10: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트볼 뮤직 소속 음악인이었다가 2013년 10월 해체된 가수는? |
인격장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격장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격장애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격장애 ICD-10 F60 ICD-9 301.9 DSM-5 301.0 301.20~301.9 MeSH D010554 인격장애(人格障碍, 영어: personality disorder) 또는 성격장애(性格障碍)는 습관, 성격, 사고방식 등이 사회적 기준에서 지속적이게 극단적으로 벗어나서 사회 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장애를 가리킨다. 대부분 상황에서 변함없이 나타난다. 청소년기 또는 성인기 초기에 발생하며 환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1] 목차 1 특징 1.1 진단기준 2 원인 3 유형 3.1 A군, 기이형 3.1.1 편집성 인격장애 3.1.2 분열형 인격장애 3.1.3 분열성 인격장애 3.2 B군, 극장형 3.2.1 반사회성 인격장애 3.2.2 경계선 인격장애 3.2.3 자기애성 인격장애 3.2.4 연극성 인격장애 3.3 C군, 불안형 3.3.1 회피성 인격장애 3.3.2 의존성 인격장애 3.3.3 강박성 인격장애 4 기타 5 치료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문헌 특징[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5월 13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인격이라는 인간이 갖는 인격장애는 불안, 대인관계에서의 부적응, 타인을 괴롭히는 경향, 자기중심적인 인간관계 중 몇 가지를 나타낸다. 이러한 특징들은 상당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도 비교적 고정적이며,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인격장애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경우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고 자기애 성향의 경우는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 하고 장점을 과장하는 측면, 편집증적 인격 장애의 경우는 자신이 매우 정직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에게 자기 보고형 검사를 하는 경우 아무 효과가 없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2] 진단기준[편집] DSM-IV-TR에서 언급하는 인격 장애의 진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사회의 기대에서 현저히 벗어난 내적 경험과 행동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탈이 다음 사항의 2가지 이상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인지(자신, 타인, 사건의 지각과 해석 방식) 정동(정서반응의 범위, 강도, 가변성, 적절성) 대인관계 기능 충동 조절 일탈이 개인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개인적인 고통, 사회적 환경에 대한 적의 등이 나타난다. 일탈의 패턴이 변하지 않고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고[3] 발병 시기는 적어도 청소년기나 성인기 초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인기 이후에 발생하는 인격 장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4] 일탈이 다른 정신 장애의 증상이나 결과때문이 아니다. 일탈이 뇌병변이나 뇌손상때문이 아니다. 세계 보건 기구(WHO)에서 정의하는 인격 장애는 DSM에서의 인격 장애와 다소 차이가 있는데 WHO 국제질병분류체계(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10, 1992)에서는 성인기에 두 가지 인격 장애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충격적 경험에 따른 이차적 성격 변화, 심각한 정신 장애에서 기인하는 이차적 성격 변화)[4] 인격 장애는 다른 질병과 구분하는 것이 헷갈리는 경우도 있고(예를 들어 사회공포증과 회피성 인격장애) 한 사람에게서 두 가지 인격 장애가 나타나는 등 진단이 어려울 수 있다.[5] 노년기에 내원한 환자를 진단하는 경우는 더욱 까다롭다. 증상이 청소년기 또는 초기 성인기부터 지속되어 온 것인지 판단을 내릴만한 확실한 평가 도구들이 2002년 기준으로 아직은 개발되어있지 않다.[3] 원인[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5월 13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 등이 뇌의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뇌의 기능과 구조에 문제가 발생하여 인격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유형[편집]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IV에서는 3개의 부류로 나뉘는 10가지의 인격장애를 제시하였다. 편람은 또한 이러한 10가지 장애와 맞지 않는 인격장애의 행동양식(Personality Disorder NOS)을 포함하고 있다. A군, 기이형[편집] 편집성 인격장애[편집] 편집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성 인격장애는 타인에게 부당한 의심을 과도하게 갖는 경우로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남들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늘 긴장하며 타인에게 질투심도 심하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광범위한 불신과 의심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4가지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충분한 근거 없이 타인들이 자신을 착취, 상해 또는 속인다고 의심한다. 친구나 동료의 성실성이나 신용에 대한 부당한 의심에 집착한다. 정보가 자신에게 악의적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두려움으로 터놓고 얘기하기를 꺼린다. 온정적인 말이나 사건을 자신을 폄하하려거나 위협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지속적으로 원한을 품는다. (모욕, 상해, 경멸을 용서하지 않음) 제3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행동이나 상황도 자신의 성격이나 평판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즉각적으로 화를 내며 대응하거나 반격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배우자나 성적 파트너의 정절에 대해 반복적으로 의심한다. B. 조현증, 정신증 양상이 있는 기분 장애 또는 기타 정신증 장애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분열형 인격장애[편집] 분열형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분열형 인격장애는 사회적 고립, 마술적 사고, 피해의식, 관계 망상, 착각 등의 특징으로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보인다. 조현증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정도는 덜 하며, 정신병적이 아닌 경우에 해당된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사회성 및 대인관계 결핍의 광범위한 양상이 인지 또는 지각 왜곡과 행동의 기이함뿐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서의 심각한 불편감 및 감소된 능력으로, 초기 성인기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관계망상적 사고 - 분명한 관계망상은 제외한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하위문화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기이한 믿음이나 마술적 사고(예 : 미신, 천리안에 대한 믿음, 텔레파시나 육감, 아동이나 청소년에게서 보이는 기이한 환상이나 집착) 신체적 착각을 포함한 유별난 지각 경험 기이한 사고와 언어 (예 : 모호하고 우회적이고 은유적이고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거나 혹은 상동증적인 사고와 언어) 의심이나 편집증적인 사고 부적절하거나 메마른 정동 기이하고 엉뚱하거나 특이한 행동이나 외모 직계 가족 외에는 가까운 친구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보다는 편집증적인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는, 친밀해져도 줄어들지 않는 과도한 사회적 불안. B. 조현증, 정신증 양상이 있는 기분 장애 또는 기타 정신증 장애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분열성 인격장애[편집] 분열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분열성 인격장애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며 활동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등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힘들어 비정상적인 외톨이처럼 보인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고 대인관계 상황에서 감정 표현이 제한되는 특성이 성인기 초기부터 생활 전반에 나타나며, 다음 중 4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포함하여 친밀한 관계를 바라지도 즐기지도 않는다. 거의 항상 혼자 하는 활동을 선택한다. 타인과 성 경험을 갖는 일에 거의 흥미가 없다. 흥미를 갖는 활동이 거의 없다. 직계 가족 외에는 가까운 친구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타인의 칭찬이나 비평에 무관심해 보인다. 정서적 냉담, 이탈 또는 단조로운 정동을 보인다. B. 조현증, 정신증 양상이 있는 기분 장애 또는 기타 정신증 장애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B군, 극장형[편집] 반사회성 인격장애[편집] 반사회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타인들을 속이고, 범죄 행위를 하는 데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착취적이며 지나친 야망과 우월한 태도를 보여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며 감정 기복이 심하다. 또한 환경에 대한 비난을 많이 하고 15세 이상이 되어서 보이는 특징이 있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무시하는 패턴이 15세 이후로 전반적으로 나타나며 다음의 특성 중 3개 이상을 충족시킨다. 법에서 정한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지 않으며 구속당할만한 행동을 반복함 개인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한 반복적인 거짓말, 가명 사용 또는 타인을 속이는 사기 행동 충동적이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못함 빈번한 육체적 싸움이나 폭력에서 드러나는 호전성과 공격성 자신이나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는 무모성 꾸준하게 직업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무책임성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학대하거나 절도 행위를 하고도 무관심하거나 합리화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책의 결여 B. 적어도 18세 이상에게 진단한다. C. 15세 이상에 품행 장애를 나타낸 증거가 있어야 한다. D. 반사회적 행동이 조현증 또는 조증 삽화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경계선 인격장애[편집] 경계선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계선 인격장애는 기분이나 감정 기복이 심하며 권태, 공허함을 주로 느낀다. 또한 주체성에도 혼란을 가지고 있으며 정서가 강렬하고 쉽게 변화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자제력의 상실과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한 문제행동을 자주 보인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대인관계, 자기상, 정동에서의 불안정성과 심한 충동성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특징적 양상은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난다. 다음 중 5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실제적이거나 가상적인 유기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 5번 기준에서 말하는 자살 또는 자해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가 교차하여 반복되는 불안정하고 강렬한 대인관계 양식 정체감 혼란 : 심각하게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자기상 또는 자기 지각 자신에게 손상을 줄 수 있는 충동성이 적어도 2가지 영역에서 나타남 (예 : 낭비, 성관계, 물질 남용, 무모한 운전, 폭식) 반복적인 자살 행동, 자살 시늉, 자살하겠다는 위협, 혹은 자해 행동 현저한 기분 변화에 따른 정동의 불안정성 (예 : 대체로 수 시간 지속되며 드물게는 수일간 지속되기도 하는 간헐적인 심한 불쾌감, 성마름, 불안) 만성적인 공허감 부적절하고 심한 분노, 혹은 분노 조절의 어려움 스트레스에 따른 일시적인 망상적 사고, 혹은 심한 해리 증상 자기애성 인격장애[편집] 자기애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절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남들의 평가에 굉장히 집착한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를 향한 공격성을 보이기도 하며 대체로 헌신적이지 못하며 주로 예술가형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 칭찬에 대한 욕구, 그리고 감정이입의 결여와 같은 광범위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이 있음 (예 :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함, 뒷받침될만한 성취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인정받고자 함) 끝없는 성공, 권력, 탁월성, 아름다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해서 다른 특별하거나 상류층인 사람 또는 기관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런 사람들과만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다.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특권의식 즉 특별대우를 받을 것에 대한 불합리한 기대감이나,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특별대우나 복종을 바라는 불합리한 기대감을 가진다. 대인관계가 착취적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즉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감정 또는 욕구와 같은 선상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종종 타인들을 시기하거나, 타인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거만하고 방자한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 연극성 인격장애[편집] 연극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연극성 인격장애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며 행동이 매우 극적이며 주의를 끄는 행동을 많이 한다. 또, 감정적인 표현이나 피상적인 묘사나 부사를 남발하는 등 언어 사용에 특징이 있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과도한 정서성과 주목에 대한 추구의 만연한 패턴이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다양한 맥락에서 나타난다. 다음 중 5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자신이 중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닌 상황에서 불편해한다.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종종 부적절한 성적 유혹이나 도발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감정이 빨리 변하며 감정 표현이 피상적이다. 신체의 매력을 이용하여 관심을 끌려고 한다. 과도하게 인상주의적이면서 세부적인 것은 결여된 언어 양식을 보인다. 자기 극화, 연극성, 그리고 과장된 정서 표현을 드러낸다. 피암시성이 강하다. 즉,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관계를 실제보다 더 친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C군, 불안형[편집] 회피성 인격장애[편집] 회피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회피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거절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며, 이로 인해 사회적 상황에서의 억제를 보여 남들에게 은둔형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향성과 불안한 증세는 그들을 더욱 은둔형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자존심이 낮으며 사회공포증도 많이 나타난다. DSM-IV-TR에선 일반화된 유형의 사회공포증을 진단할 땐 회피성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것을 반드시 고려하라고 되어 있다. DSM-IV-TR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사회활동의 제한, 부적절감,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 대한 과민성과 같은 광범위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4가지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비판, 비난 또는 거절이 두려워 중요한 대인 접촉을 포함한 직업 활동을 회피한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창피를 당하거나 조롱을 받을까 두려워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으려 한다.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을 받거나 거절당하는 것에 집착한다. 부적절감 때문에 새로운 대인관계적 상황에서는 억제되어 있다. 자신을 사회적으로 어리석고 개인적으로 매력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 비하여 열등한 것으로 여긴다. 당황하게 될까봐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거나 새로운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지나치게 주저한다. 의존성 인격장애[편집] 의존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의존성 인격장애는 내향성과 불안한 증세라는 면에선 회피성 성격 장애와 비슷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모든 행동과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타인의 보살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자처해서 하는 모습을 보인다. DSM - 4 - 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보살핌을 받으려는 과도하고 만연된 욕구로 인해서 복종적이고 매달리는 행동과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나며, 성인 초기에 시작되고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며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과도한 정도의 조언이나 확신이 없이는 매일매일의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자기 인생의 매우 중요한 영역까지도 대신 책임져줄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지지와 승인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여 타인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한다. (주의 : 보복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은 포함되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수행하기 어렵다. 동기나 활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능력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보살핌과 지지를 받기 위하여 불쾌한 행동까지도 자청해서 한다. 스스로 잘해나갈 수 없다는 과도한 두려움으로 인해 혼자 있으면 불편한 감정이나 무력감을 느낀다. 어떤 친밀한 관계가 끝났을 때 보살핌과 지지를 얻기 위해 곧바로 또 다른 관계를 찾는다.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현실적으로 집착한다. 강박성 인격장애[편집] 강박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강박성 인격장애는 세부 사항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어진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자신과 타인을 지나치게 불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박 장애와는 달리 그 심상이 자기에게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대상이 한 범위로 한정되어 있지도 않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융통성, 개방성, 효율성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정리정돈에 몰두하고, 완벽주의적이며, 마음을 통제하고 대인관계를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전반적인 행동 양식이 나타난다. 성인기 초기에 시작되며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난다. 다음 가운데 4개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사소한 세부사항, 규칙, 목록, 순서, 시간 계획이나 형식에 집착하여 일의 큰 흐름을 잃고 만다. 완벽주의로 인하여 일을 완수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예 : 자신의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다) 여가 활동과 우정을 나눌 시간을 배제하면서까지 지나치게 일과 생산성에 몰두한다. 일에 대한 몰두가 명백한 경제적 필요 때문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덕, 윤리, 또는 가치 문제에서 문화적 또는 종교적 배경으로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다. 감상적인 가치조차 없을 때라도 닳아빠지거나 무가치한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 타인이 자신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에 타인에게 일을 맡기거나 같이 일하는 것을 꺼려한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돈을 쓰는 데 인색하다. 돈은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여 축적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경직성과 완고함을 보인다. 기타[편집] 혼재성 인격장애(Mixed personality disorders)는 여러 인격장애의 특성을 보이지만, 보다 특정한 진단을 붙일 만한 뚜렷한 증상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치료[편집] 인격 장애의 치료는 보통 어렵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호전 또한 기대할 수 없다.[3] 같이 보기[편집] 망상 피해망상 부정망상 관계망상 빙의망상 과대망상 추적망상 조현증(정신분열병) - 편집성 인격장애(PPD)와 유사하나, 환청과 환각 등이 추가로 동반된다 불안 불안 장애 가정폭력(DV) 아동학대 동물학대 각주[편집] ↑ Steven K. Huprich 2010, 18쪽. ↑ Steven K. Huprich 2010, 21쪽. ↑ 가 나 다 Steven K. Huprich 2010, 20쪽. ↑ 가 나 Steven K. Huprich 2010, 19쪽. ↑ Steven K. Huprich 2010, 8-9쪽. 참고 문헌[편집] Steven K. Huprich (2010). 《성격장애 로샤평가》. 학지사. ISBN 978896330266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격장애&oldid=24458905" 분류: 성격인격장애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5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Հայերեն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atinaLietuviųLatviešuمازِرونی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ardu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1일 (금) 09: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어떤 행태를 보입니까? |
인격장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격장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격장애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인격장애 ICD-10 F60 ICD-9 301.9 DSM-5 301.0 301.20~301.9 MeSH D010554 인격장애(人格障碍, 영어: personality disorder) 또는 성격장애(性格障碍)는 습관, 성격, 사고방식 등이 사회적 기준에서 지속적이게 극단적으로 벗어나서 사회 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장애를 가리킨다. 대부분 상황에서 변함없이 나타난다. 청소년기 또는 성인기 초기에 발생하며 환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1] 목차 1 특징 1.1 진단기준 2 원인 3 유형 3.1 A군, 기이형 3.1.1 편집성 인격장애 3.1.2 분열형 인격장애 3.1.3 분열성 인격장애 3.2 B군, 극장형 3.2.1 반사회성 인격장애 3.2.2 경계선 인격장애 3.2.3 자기애성 인격장애 3.2.4 연극성 인격장애 3.3 C군, 불안형 3.3.1 회피성 인격장애 3.3.2 의존성 인격장애 3.3.3 강박성 인격장애 4 기타 5 치료 6 같이 보기 7 각주 8 참고 문헌 특징[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5월 13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인격이라는 인간이 갖는 인격장애는 불안, 대인관계에서의 부적응, 타인을 괴롭히는 경향, 자기중심적인 인간관계 중 몇 가지를 나타낸다. 이러한 특징들은 상당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도 비교적 고정적이며,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인격장애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경우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고 자기애 성향의 경우는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 하고 장점을 과장하는 측면, 편집증적 인격 장애의 경우는 자신이 매우 정직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에게 자기 보고형 검사를 하는 경우 아무 효과가 없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2] 진단기준[편집] DSM-IV-TR에서 언급하는 인격 장애의 진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사회의 기대에서 현저히 벗어난 내적 경험과 행동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탈이 다음 사항의 2가지 이상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인지(자신, 타인, 사건의 지각과 해석 방식) 정동(정서반응의 범위, 강도, 가변성, 적절성) 대인관계 기능 충동 조절 일탈이 개인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개인적인 고통, 사회적 환경에 대한 적의 등이 나타난다. 일탈의 패턴이 변하지 않고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고[3] 발병 시기는 적어도 청소년기나 성인기 초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인기 이후에 발생하는 인격 장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4] 일탈이 다른 정신 장애의 증상이나 결과때문이 아니다. 일탈이 뇌병변이나 뇌손상때문이 아니다. 세계 보건 기구(WHO)에서 정의하는 인격 장애는 DSM에서의 인격 장애와 다소 차이가 있는데 WHO 국제질병분류체계(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10, 1992)에서는 성인기에 두 가지 인격 장애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충격적 경험에 따른 이차적 성격 변화, 심각한 정신 장애에서 기인하는 이차적 성격 변화)[4] 인격 장애는 다른 질병과 구분하는 것이 헷갈리는 경우도 있고(예를 들어 사회공포증과 회피성 인격장애) 한 사람에게서 두 가지 인격 장애가 나타나는 등 진단이 어려울 수 있다.[5] 노년기에 내원한 환자를 진단하는 경우는 더욱 까다롭다. 증상이 청소년기 또는 초기 성인기부터 지속되어 온 것인지 판단을 내릴만한 확실한 평가 도구들이 2002년 기준으로 아직은 개발되어있지 않다.[3] 원인[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5월 13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 등이 뇌의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뇌의 기능과 구조에 문제가 발생하여 인격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유형[편집]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IV에서는 3개의 부류로 나뉘는 10가지의 인격장애를 제시하였다. 편람은 또한 이러한 10가지 장애와 맞지 않는 인격장애의 행동양식(Personality Disorder NOS)을 포함하고 있다. A군, 기이형[편집] 편집성 인격장애[편집] 편집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성 인격장애는 타인에게 부당한 의심을 과도하게 갖는 경우로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남들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늘 긴장하며 타인에게 질투심도 심하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광범위한 불신과 의심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4가지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충분한 근거 없이 타인들이 자신을 착취, 상해 또는 속인다고 의심한다. 친구나 동료의 성실성이나 신용에 대한 부당한 의심에 집착한다. 정보가 자신에게 악의적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두려움으로 터놓고 얘기하기를 꺼린다. 온정적인 말이나 사건을 자신을 폄하하려거나 위협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지속적으로 원한을 품는다. (모욕, 상해, 경멸을 용서하지 않음) 제3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행동이나 상황도 자신의 성격이나 평판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즉각적으로 화를 내며 대응하거나 반격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배우자나 성적 파트너의 정절에 대해 반복적으로 의심한다. B. 조현증, 정신증 양상이 있는 기분 장애 또는 기타 정신증 장애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분열형 인격장애[편집] 분열형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분열형 인격장애는 사회적 고립, 마술적 사고, 피해의식, 관계 망상, 착각 등의 특징으로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보인다. 조현증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정도는 덜 하며, 정신병적이 아닌 경우에 해당된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사회성 및 대인관계 결핍의 광범위한 양상이 인지 또는 지각 왜곡과 행동의 기이함뿐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서의 심각한 불편감 및 감소된 능력으로, 초기 성인기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관계망상적 사고 - 분명한 관계망상은 제외한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하위문화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기이한 믿음이나 마술적 사고(예 : 미신, 천리안에 대한 믿음, 텔레파시나 육감, 아동이나 청소년에게서 보이는 기이한 환상이나 집착) 신체적 착각을 포함한 유별난 지각 경험 기이한 사고와 언어 (예 : 모호하고 우회적이고 은유적이고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거나 혹은 상동증적인 사고와 언어) 의심이나 편집증적인 사고 부적절하거나 메마른 정동 기이하고 엉뚱하거나 특이한 행동이나 외모 직계 가족 외에는 가까운 친구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보다는 편집증적인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는, 친밀해져도 줄어들지 않는 과도한 사회적 불안. B. 조현증, 정신증 양상이 있는 기분 장애 또는 기타 정신증 장애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분열성 인격장애[편집] 분열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분열성 인격장애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며 활동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등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힘들어 비정상적인 외톨이처럼 보인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고 대인관계 상황에서 감정 표현이 제한되는 특성이 성인기 초기부터 생활 전반에 나타나며, 다음 중 4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포함하여 친밀한 관계를 바라지도 즐기지도 않는다. 거의 항상 혼자 하는 활동을 선택한다. 타인과 성 경험을 갖는 일에 거의 흥미가 없다. 흥미를 갖는 활동이 거의 없다. 직계 가족 외에는 가까운 친구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타인의 칭찬이나 비평에 무관심해 보인다. 정서적 냉담, 이탈 또는 단조로운 정동을 보인다. B. 조현증, 정신증 양상이 있는 기분 장애 또는 기타 정신증 장애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B군, 극장형[편집] 반사회성 인격장애[편집] 반사회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타인들을 속이고, 범죄 행위를 하는 데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착취적이며 지나친 야망과 우월한 태도를 보여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며 감정 기복이 심하다. 또한 환경에 대한 비난을 많이 하고 15세 이상이 되어서 보이는 특징이 있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무시하는 패턴이 15세 이후로 전반적으로 나타나며 다음의 특성 중 3개 이상을 충족시킨다. 법에서 정한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지 않으며 구속당할만한 행동을 반복함 개인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한 반복적인 거짓말, 가명 사용 또는 타인을 속이는 사기 행동 충동적이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못함 빈번한 육체적 싸움이나 폭력에서 드러나는 호전성과 공격성 자신이나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는 무모성 꾸준하게 직업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무책임성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학대하거나 절도 행위를 하고도 무관심하거나 합리화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책의 결여 B. 적어도 18세 이상에게 진단한다. C. 15세 이상에 품행 장애를 나타낸 증거가 있어야 한다. D. 반사회적 행동이 조현증 또는 조증 삽화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경계선 인격장애[편집] 경계선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계선 인격장애는 기분이나 감정 기복이 심하며 권태, 공허함을 주로 느낀다. 또한 주체성에도 혼란을 가지고 있으며 정서가 강렬하고 쉽게 변화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자제력의 상실과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한 문제행동을 자주 보인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대인관계, 자기상, 정동에서의 불안정성과 심한 충동성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특징적 양상은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난다. 다음 중 5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실제적이거나 가상적인 유기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 5번 기준에서 말하는 자살 또는 자해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가 교차하여 반복되는 불안정하고 강렬한 대인관계 양식 정체감 혼란 : 심각하게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자기상 또는 자기 지각 자신에게 손상을 줄 수 있는 충동성이 적어도 2가지 영역에서 나타남 (예 : 낭비, 성관계, 물질 남용, 무모한 운전, 폭식) 반복적인 자살 행동, 자살 시늉, 자살하겠다는 위협, 혹은 자해 행동 현저한 기분 변화에 따른 정동의 불안정성 (예 : 대체로 수 시간 지속되며 드물게는 수일간 지속되기도 하는 간헐적인 심한 불쾌감, 성마름, 불안) 만성적인 공허감 부적절하고 심한 분노, 혹은 분노 조절의 어려움 스트레스에 따른 일시적인 망상적 사고, 혹은 심한 해리 증상 자기애성 인격장애[편집] 자기애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절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남들의 평가에 굉장히 집착한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를 향한 공격성을 보이기도 하며 대체로 헌신적이지 못하며 주로 예술가형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 칭찬에 대한 욕구, 그리고 감정이입의 결여와 같은 광범위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이 있음 (예 :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함, 뒷받침될만한 성취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인정받고자 함) 끝없는 성공, 권력, 탁월성, 아름다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해서 다른 특별하거나 상류층인 사람 또는 기관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런 사람들과만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다.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특권의식 즉 특별대우를 받을 것에 대한 불합리한 기대감이나,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특별대우나 복종을 바라는 불합리한 기대감을 가진다. 대인관계가 착취적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즉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감정 또는 욕구와 같은 선상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종종 타인들을 시기하거나, 타인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거만하고 방자한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 연극성 인격장애[편집] 연극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연극성 인격장애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며 행동이 매우 극적이며 주의를 끄는 행동을 많이 한다. 또, 감정적인 표현이나 피상적인 묘사나 부사를 남발하는 등 언어 사용에 특징이 있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과도한 정서성과 주목에 대한 추구의 만연한 패턴이 성인기 초기에 시작하여 다양한 맥락에서 나타난다. 다음 중 5가지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자신이 중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닌 상황에서 불편해한다.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종종 부적절한 성적 유혹이나 도발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감정이 빨리 변하며 감정 표현이 피상적이다. 신체의 매력을 이용하여 관심을 끌려고 한다. 과도하게 인상주의적이면서 세부적인 것은 결여된 언어 양식을 보인다. 자기 극화, 연극성, 그리고 과장된 정서 표현을 드러낸다. 피암시성이 강하다. 즉,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관계를 실제보다 더 친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C군, 불안형[편집] 회피성 인격장애[편집] 회피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회피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거절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며, 이로 인해 사회적 상황에서의 억제를 보여 남들에게 은둔형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향성과 불안한 증세는 그들을 더욱 은둔형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자존심이 낮으며 사회공포증도 많이 나타난다. DSM-IV-TR에선 일반화된 유형의 사회공포증을 진단할 땐 회피성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것을 반드시 고려하라고 되어 있다. DSM-IV-TR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사회활동의 제한, 부적절감,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 대한 과민성과 같은 광범위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4가지 이상의 항목으로 나타난다. 비판, 비난 또는 거절이 두려워 중요한 대인 접촉을 포함한 직업 활동을 회피한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창피를 당하거나 조롱을 받을까 두려워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으려 한다.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을 받거나 거절당하는 것에 집착한다. 부적절감 때문에 새로운 대인관계적 상황에서는 억제되어 있다. 자신을 사회적으로 어리석고 개인적으로 매력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 비하여 열등한 것으로 여긴다. 당황하게 될까봐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거나 새로운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지나치게 주저한다. 의존성 인격장애[편집] 의존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의존성 인격장애는 내향성과 불안한 증세라는 면에선 회피성 성격 장애와 비슷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모든 행동과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타인의 보살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자처해서 하는 모습을 보인다. DSM - 4 - 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보살핌을 받으려는 과도하고 만연된 욕구로 인해서 복종적이고 매달리는 행동과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나며, 성인 초기에 시작되고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며 다음 중 5개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과도한 정도의 조언이나 확신이 없이는 매일매일의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자기 인생의 매우 중요한 영역까지도 대신 책임져줄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지지와 승인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여 타인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한다. (주의 : 보복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은 포함되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수행하기 어렵다. 동기나 활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능력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보살핌과 지지를 받기 위하여 불쾌한 행동까지도 자청해서 한다. 스스로 잘해나갈 수 없다는 과도한 두려움으로 인해 혼자 있으면 불편한 감정이나 무력감을 느낀다. 어떤 친밀한 관계가 끝났을 때 보살핌과 지지를 얻기 위해 곧바로 또 다른 관계를 찾는다.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현실적으로 집착한다. 강박성 인격장애[편집] 강박성 인격장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강박성 인격장애는 세부 사항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어진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자신과 타인을 지나치게 불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박 장애와는 달리 그 심상이 자기에게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대상이 한 범위로 한정되어 있지도 않다. DSM-IV-TR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융통성, 개방성, 효율성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정리정돈에 몰두하고, 완벽주의적이며, 마음을 통제하고 대인관계를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전반적인 행동 양식이 나타난다. 성인기 초기에 시작되며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난다. 다음 가운데 4개 이상의 항목을 충족시킨다. 사소한 세부사항, 규칙, 목록, 순서, 시간 계획이나 형식에 집착하여 일의 큰 흐름을 잃고 만다. 완벽주의로 인하여 일을 완수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예 : 자신의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다) 여가 활동과 우정을 나눌 시간을 배제하면서까지 지나치게 일과 생산성에 몰두한다. 일에 대한 몰두가 명백한 경제적 필요 때문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덕, 윤리, 또는 가치 문제에서 문화적 또는 종교적 배경으로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다. 감상적인 가치조차 없을 때라도 닳아빠지거나 무가치한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 타인이 자신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에 타인에게 일을 맡기거나 같이 일하는 것을 꺼려한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돈을 쓰는 데 인색하다. 돈은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여 축적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경직성과 완고함을 보인다. 기타[편집] 혼재성 인격장애(Mixed personality disorders)는 여러 인격장애의 특성을 보이지만, 보다 특정한 진단을 붙일 만한 뚜렷한 증상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치료[편집] 인격 장애의 치료는 보통 어렵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호전 또한 기대할 수 없다.[3] 같이 보기[편집] 망상 피해망상 부정망상 관계망상 빙의망상 과대망상 추적망상 조현증(정신분열병) - 편집성 인격장애(PPD)와 유사하나, 환청과 환각 등이 추가로 동반된다 불안 불안 장애 가정폭력(DV) 아동학대 동물학대 각주[편집] ↑ Steven K. Huprich 2010, 18쪽. ↑ Steven K. Huprich 2010, 21쪽. ↑ 가 나 다 Steven K. Huprich 2010, 20쪽. ↑ 가 나 Steven K. Huprich 2010, 19쪽. ↑ Steven K. Huprich 2010, 8-9쪽. 참고 문헌[편집] Steven K. Huprich (2010). 《성격장애 로샤평가》. 학지사. ISBN 978896330266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격장애&oldid=24458905" 분류: 성격인격장애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5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문단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हिन्दीՀայերեն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КыргызчаLatinaLietuviųLatviešuمازِرونی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arduScots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oomaalig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1일 (금) 09: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분열성 인격장애에 대한 특징은 무엇인가? |
검은 여교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검은 여교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검은 여교사 黒の女教師 장르 텔레비전 드라마 방송 국가 일본 방송 채널 TBS 방송 기간 2012년 7월 20일 ~ 9월 21일 방송 시간 금요일 22:00 ~ 22:54 방송 분량 54분 방송 횟수 10회 연출 이시이 야스하루 오카모토 싱고 가와시마 류타로 극본 야마시타 도모히로 오바야시 에리코 요시자와 도모코 이케다 나쓰코 출연자 에이쿠라 나나 마쓰무라 호쿠토 지바 유다이 오노 이토 기무라 후미노 미쓰이시 켄 이치카와 미카코 고바야시 사토미 외 음성 스테레오 방송 자막 문자 다중 방송 외부 링크 홈페이지 검은 여교사(일본어: 黒の女教師)는 2012년 7월 20일부터 9월 21일까지 방영되었던 일본 TBS에서 매주 금요일 밤 10시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에이쿠라 나나 주연이며 배역으로서는 교사 역을 처음으로 맡은 드라마이다. 고등학교를 무대로 만연한 여러가지 문제를, '과외수업'으로 칭해서, 터무니없는 금액과 교환으로 법을 범하는 일도 해결하려고 하는 3명의 여교사 트리오의 활약과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폭력, 협박, 납치, 파괴 공작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교사의 의기투합과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을 함께 그린 서스펜스 드라마이자 학원물이다. 목차 1 등장 인물 1.1 도립 국문관 고교 1.1.1 검은 여교사 1.1.2 교직원 1.1.3 3학년 D반 학생들 1.2 협력자 1.3 그 외 1.4 게스트 1.4.1 제 1 화 1.4.2 제 2 화 1.4.3 제 3 화 1.4.4 제 4 화 1.4.5 제 5 화 1.4.6 제 6 화 1.4.7 제 7 화 1.4.8 제 8 화 2 방송일 및 부제 3 주제가 4 관련 항목 5 외부 링크 등장 인물[편집] 도립 국문관 고교[편집] 검은 여교사[편집] 타카쿠라 유코 - 에이쿠라 나나 생물 담당 교사. 3학년 D반 부담임인 한 편 3학년 전체의 진로 지도 담당. 스미레 ․ 아야와 함께 '과외수업'을 실행한다. 대상자에게 특기인 일격필살 권법의 하나로 뒤집어 써, '어리석은 것!'이라고 불러, 악행을 행했던 것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 인과가 되돌아오는 것을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배우지 않았어?' 라고 깨우쳐 정의의 제재를 더한다. 사생활로서는 스미레나 아야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많아, 수영이 취미이다. 수업 종료 벨이 울렸던 시점에서 교사의 직책은 없어지고, 그 후는 학생과 깊게 상관이 없는 '차임 투 차임'이라고 하는 생각의 방법을 중시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시간 외 활동은 유료야…'라고 하는 말로 학생들에게 '과외수업'을 설명하고 있다. '과외수업'에 필요한 금액은, 인물이나 시간, 상황에 의해서 변한다, 또한, 금액 대신에 물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야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단을 묻지 않고, 항상 냉담하고 상대가 반론하지 않는 어조를 가진 소유자다. 장신 단려인 얼굴로, 진로 지도에서는 정확한 손발을 발군하지만, 타인과 깊이 깊이 관여하지 않는 자세 때문인지, 학생의 평판은 좋지 않다. 또한, 훗타의 이동 후는 교장의 상담 역할도 하고 있다. 과거에 인연이 있는 나가시마 미즈호 집에 가끔 시간을 만들어 방문하고 있지만, 매회 만나는 것도 없이 되돌려 보내지고 있다. 예전에는, 현재의 하루카와 같이, 밝고 긍정적인 교사였지만, 아오이의 사후,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던 쇼크로 웃음을 잃었다. 우치다 스미레 - 이치카와 미카코 고전 담당. 3학년 C반 담임. 온화한 성격인 미인 교사로 수업은 알기 쉽고, 학생의 인기도 높다. 한 편으로 '밝고 삐뚤어진 성격'으로 동료에게 평가되는 경우로, 잠깐 괴짜로 취급당하고 있다. 유코 ․ 아야와 함께 '과외수업'을 실행하며, 컴퓨터를 사용했던 정보 누설이나 양동 등의 정보 공작이 특기지만, 상황에 의해, 직접, 제재 대상자로의 더러운 일을 담당한다. 세이린 여고 시절에 가와이와 교제하고 있었다. 불꽃 대회 당일에 자신을 찾아줄까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놓친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다른 그녀에게 연락하고 있던 것을 목격해 헤어졌다. 그 이유로부터, 이혼 남성(에노키 타카아키)과 떨어지지 않고 있다. 후지이 아야 - 코바야시 사토미 미술교사. 예술가 기질의 여성으로 항상 살랑살랑해서 마이 페이스한 성격이다. 독창적인 가치관을 가진 소유자로, 세속적인 상식이 통용하지 않는다. 인간 관찰은 날카로워 일부의 학생에게 팬이 있다. 유코 ․ 스미레와 함께 '과외수업'을 실시하며, 주로 제재 대상자의 관계자와 접촉해, 제재 대상자를 얕보거나, 진실한 본성을 알게하기 위한 공작이나 준비를 담당한다. 구매부에서 점심밥을 구매하려던 하루카에게 자신의 주먹밥을 반으로 나눠주는 등, 3명 중에서는 가장 인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스미레와는 동료. 유코의 과거를 알고 있다. 예전 유화의 세계에서는 유명했지만, 그 이유에 의해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쿄코와 아이로부터의 의뢰에 의한 ‘과외수업’ 이후, 다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교직원[편집] 아오야기 하루카 : 키무라 후미노 현대 문학 담당의 신임 교사. 3학년 D반 담임 겸 배구부 부고문. 유코 등이 실시하고 있는 철저하게 상대를 때려 눕히는 '과외수업'에 반발하는 한편, 자신도 첫 임금 전액과 교환으로 '과외수업'에 의해서 구하기 위해, 완전 부정 못하고 있다. OL 경영자로 교사로 하는 직업을 성직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꿈꾸기 십상인 성격을 가진 소유자로 이상과 현실의 갭에 곤혹한다. 학생을 구하려고 분주하는 것도 유코로의 대항심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일이 많아, 학생들의 신용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오우치 후쿠코 : 트린들 레이나 구매부 직원. 할머니가 만들었던 '후쿠코의 합격 결말'이 인기 메뉴이지만, 자신이 만들었던 신작 주먹밥에 대한 콘도와 에노키도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차분한 것 같은 관찰하는 안목은 날카롭다. 콘도 츠요시 : 모로 모로오카 영어 담당 교사. 3학년 A반 담임 겸 3학년 주임. 배구부 고문. 후쿠코의 팬. 무사 안일주의자로 학생의 인기는 별로이지만, 배구부의 지도는 열혈로 부원의 신뢰도 두텁다. 문제가 많은 3학년 D반의 감시역으로서 부교장에게 일일이 상세하게 보고할 때, 부담임인 유코에게 의혹을 향하고 있다. 주정인 일을 부끄러워서 자숙하고 있었지만, 류미코의 계략에 몹시 취해 체육창고에서 날뛰어 그녀에게 상처를 입게했다고 해서, 일시 자택 근신했다. 그러나, 상완이두근장두근염의 치료로 통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 에노키도 슈헤이 : 스즈키 료헤이 세계사 담당 교사. 3학년 B반 담임. 후쿠코의 팬. 요즘 드문 정도의 선량한 생각을 가진 소유자로 신임 교사인 하루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매우 속기 쉬운 성격이지만 본인에게 자각은 없다. 콘도와 함께 행동하는 일이 많다. 훗타 마나부 : 미츠이시 켄 부교장. 학교를 그림자에게 좌지우지하는 흑막으로 평가한다. 학생보다도 학교의 이익을 우선한다. 학교의 평가나 자기 어필할 때, 에이카가 일으켰던 오가와에 대한 문제를 넉넉히 덮어, 정학처분 했던 때, 그녀의 꿈을 현실도피로 혹평했다. 유의 의뢰를 받았던 유코 일행의 손에 에이카와 같은 행위를 교육위원회에서 목격되어, 교장 승진 면접에 실패해, 타 학교로 이동했다. 유코로부터는 '궤변을 말해 학생에게 이상적이지 않고 나쁜 길을 가르친 교사'라고 불린다. 세리자와 케이코 : 미나미 카호 교장. 훗타로부터의 보고를 받았던 때의 '좋지 않을까요'가 입버릇. '부교장이 말하는대로'로 평가함에도, 진상은 불명. 학교 내의 문제가 능숙하게 처리되었던 때에 훗타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아오이의 죽음의 진실을 은폐했던 흑막으로, 그것을 알았던 유코 일행이나 토시오, 게다가 하루카나 3-D의 학생들을 학교로부터 추방하게 하는 등 이상의 교육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수단도 꺼리지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미라이'가 집단 괴롭힘으로 자살했던 과거의 잘못을 돌려주기 위해서, 이상의 교육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유코로부터는 '교육의 현상으로 시선을 돌려, 교사로부터 열의를 빼앗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불린다. 3학년 D반 학생들[편집] 토다 토시오 : 마츠무라 호쿠토 (쟈니스 주니어) 도립 나카메구로 고교에서 온 전학생. 1995년 1월 31일 출생. 혈액형 B형. 단정한 얼굴을 가진 소유자지만, 전학 첫날에 시험 문제가 들었던 USB 메모리의 분실 소란으로 모치즈키 일행에게 말썽을 일으켜, 반 내에서는 고립하고 있다. 유코 일행의 '과외수업'에 눈치 채고있는 마디가 있어, 유코에게 교제를 강요해 '검은 여교사'들을 미행한다고 하는 스토커 행동을 보이고 있다. 전학 이전에도 유코와는 만났던 일이 있는 것 같아, 유코의 과거를 일부 알고 있는 듯한 발언이나, '검은 여교사'의 목적을 찾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어, 스스로 지원해서 훗타를 표적으로 했던 '과외수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자신과 유코가 키스했던 현장을 목격했던 에이카에게 접근해, 마음이 있을 것 같은 기색도 보이고 있다. 문화제에서는 제비뽑기로 3학년 D반이 출점하는 카페의 준비 위원으로 선택되어, 큰소리 칠때에는 무슨 일도 없었다는 듯해서 반의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리오와 같은 맨션에 살고 있지만, 삼자대면에는 하나로 출석해 '우리는 남의 가정과는 달라'라고 말하고 있어, 공과 사 모두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그 후 모치즈키가 알아냈던 긴급 연락 카드에 의해, 이름이 '토시오'인 것이나 부모가 이혼했던 일이 알게 된다. 그의 정체는, 미즈노 아오이의 남동생. 유코 일행이 누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해, 복수를 다짐하기 위해서 에이카를 이용해, 아스카의 이름으로 중상하는 메일을 에이카에게 송신하거나, 아오이의 이름으로 미즈호의 집이나 학교에 비방중상이나 '과외수업'의 내막을 폭로하는 FAX를 보냈었다. 유코로부터는 '사람의 기분을 이용했던 쓰레기'라고 불리지만, 권법의 하나를 주고 받아, 유코 일행을 규탄해서 근신으로 몰아넣는다. 게다가 미즈호를 누나가 죽었던 현장으로 데려가 죽이려고 했지만, 그녀로부터 누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어, 뉘우친다. 모치즈키 료헤이 : 치바 유다이 3학년 D반의 그림자 리더격. 대병원의 후계자 아들로 진학처에 의학부를 강제당하고 있다.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과묵, 뭔가를 생각하는 있는 본성은 친구에게 조차 깨닫게 하지 않았다. USB 메모리의 분실 소란으로 토시오의 밀고에 의해 정학처분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에이카와 사귀고 있었지만, 그것은 2명 밖의 비밀로 하고 있다. 화를 잘 내어, 이즈카에게 상처를 입힌 원인을 만들었지만, 합의금을 받았던 아버지(토야마 토시야)로부터의 지시로 사죄하게 되었다. 이즈카에게 그 죄악감에 이용되어서 돈을 강청되었던 뒤, 에이카를 꺼냄에 공갈된 결과, 그에게의 폭행영상을 흘려보내 퇴학처분을 받았지만, 야스다와 타치바나가 문화제 카페의 매상을 사용해서 '과외수업'을 외뢰했던 때, 정학처분에서 벗어났다. 동료나 친구를 아무래도 좋으면 생각하고 있었지만, 에이카가 직접 만든 부적을 소중히 가지고 있었던 것부터, 유코로부터 '진짜는 본심을 입으로 하는 것이 무서운 것뿐'이라고 지적하여, '과외수업'후, 이즈카에게 사죄의 말을 전했다. 정학이 풀렸던 후, 에이카로부터 이별을 고하게 된다. 그 후 그녀에게 접근한 토시오를 의심스럽게 생각해, 그의 신변을 조사하기 위해 끈질기게 항상 따라다니는 행위를 규탄한다. 시모무라 아스카 : 오노 이토 에이카의 그룹으로 소속한 여학생. 마음이 끌리는, 일제한 성격을 가진 소유자. 성적은 좋지 않다. 귀여운 얼굴로 남자로부터 인기있지만, 대부분 곧바로 상대를 거절하기 위해 '사살의 아스카'라는 별명을 가진다. 오이카와와 금단의 사랑으로 떨어지지만, 그의 계략에 의해서 자주퇴학으로 몰아넣고 만다. 스토커 취급과 퇴학 처분의 취소를 요구해, 오이카와에게 선물할 예정이었던 넥타이 금액과 동료의 금액 5만엔으로 거래해 유코 일행에게 '과외수업'을 의뢰한다. '과외수업'후, '교사와 교제했던 자기자신도 공범자'라고 깨우쳤다. 문화제에서는 제비뽑기로 3학년 D반이 출점하는 카페의 준비 멤버로 선택되어, 준비에 관련되는 가운데 협심이 있는 모치즈키에게 딴 생각으로 다가가지만, 응원하는 말을 했던 에이카가 그를 교제했던 것을 알아, 배신했던 기분으로부터 시오리 일행과 함께 에이카와 거리를 둔다. 스기모토 준페이 : 니시이 유키토 (D2) 성적 우수에 노력가인 한편으로, 섬세하며 겁쟁이이다. 장래, 외교관이 되고 싶은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조치 대학 영어과의 지정 학교 추천을 지망한다. 고이카에게 3년간 짝사랑 중이지만, 기분을 전해준 것이 못하고 있다. 안과 리코의 계략에 의해서 치한의 누명을 덮어씌워, 위자료 10만엔을 협박당했던 것으로 학교에서 폭로되는 등,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안 일행에게 요구당했던 같은 금액의 금전과 거래해서 유코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먼저 유가 '과외수업'을 의뢰하고 있었다(후에 돈은 전액 반환하고 있다). '과외수업'후, '진짜 자신과 마주 봐야한다'라고 깨우쳤다. 수업 노트는 항상 2권 가지고 있어, 1년의 시간에 유에게 주거나, 시험 전에 야스다나 타치바나에게 빌려주고 있다. 마츠모토 시오리 : 츠치야 타오 에이카의 그룹에 소속한 여학생. 성적 우수에 약삭 빠르다. 모자 가정으로 아버지로부터의 양육비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스즈키 히로미)가 부업을 해 가계를 지지하고 있지만, 가난한 상황은 변하지 않고, 학원에서는 다니지 않고 통신 교육을 수강하고 있다.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밖에 생각되지 않게 허세를 부려, 수수한 여자아이로부터 지금의 유행에 탔던 여자아이로 고교 데뷔를 완수했다. 어머니에게는 가라오케 점이라면서 속여 걸즈바에서 알바하고 있었지만, 타치바나나 하루카에게 발견되었던 것으로 탈의실의 도둑촬영을 인터넷에 카와이에게 협박당해, 고급 비밀 살롱에서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알바를 여러 번 그만두게 하려 했었던 타치바나에게 구출되어, 맡겨졌던 50만엔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돈 2000엔 나머지와 스마트 폰(걸즈 바로서의 수입으로 구입)을 유코 일행에게 건네서 '과외수업'을 의뢰한다(후에 50만엔은 타치바나에게 반환했다). 사립 대학의 추천 입시를 지망하고 있었지만, '과외수업'후는, 동경 대학으로 지망 변경했다. 야스다 슌스케 : 야마자키 켄토 모치즈키의 그룹에 소속한 남학생. USB 메모리 분실 소동으로 토시오의 밀고에 의해 정학처분 받았지만, 본래는 성적 우수이자 배구부의 에이스. 가정 내 불화 및 어머니가 결정했던 동경 대학 수험이나 배구부의 에이스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중압에 고뇌한다. 어머니의 지배로부터 빠져나가고 싶다고 하는 생각부터, 새 신발 구입에 충당할 예정이던 2만엔을 건네 유코 일행에게 '과외수업'을 의뢰한다. '과외수업'후는 배구부에 복귀한다. 야마기시 리오 : 타케토미 세이카 솔직한 소녀. 명문 여대의 추천 입학이 유력시되고 있다. 교제하고 있던 스도에게 탈법 허브를 팔아 치우기 위해 여고생의 네트워크로 이용해, 버려지고 싶지 않던 생각으로부터 그의 요구에 따르고 있었다. 반 내에서는 밝게 행동하고 있지만, 실제는 고립하고 있다. '과외수업'에 의해서, 나쁜 길로부터 유코 일행에게 구출되어, 반의 고리에도 더해지고 있다. 사에키 에이카 : 히로세 아리스 3학년 D반의 중심적인 여자 리더격으로 얼굴이 꽤 눈에 띄는 존재이다. 성격은 차분하지만 높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 토시오가 유코와 입맞춤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해버려, 토시오와 그녀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유코에게 토시오와의 관계를 캐묻지만, 능숙하게 주고 받아져버린다. 중학교 시절은 야구부의 매니저로, 그 때부터 야구부원이었던 모치즈키와 사귀고 있었지만, 그 이유로부터 그 사실을 반 친구에게 덮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제에 들어갔던 이즈카의 말에 의해 그것을 폭로한다. 모치즈키의 문제가 해결된 후, 아스카의 기분을 가질수 있어 놀았다고 오해되었던 것부터 반 친구나 그룹으로부터도 고립하고 있다. 추천 입시에서 향하던 도중,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던 오가와를 도와줬던 것으로, 장애를 받게 된다. 시험은 합격했지만, 유에게 책임을 넘겨 전가해 정학시켰다고 오해받아 그러나 반 내에서 고립은 깊어져, 등교하지 않게 된다. 고립을 느꼈던 곳으로 토시오가 접근했던 곳으로 끌려가지만, 유코 일행의 '과외수업'에 의해서, 그의 복수로 이용되었던 것을 알게 된다. 쿠리하라 케이타 : 타이가 모치즈키의 그룹에 소속해 미덥지 못한 남학생. 오이카와와 교제한 아스카의 일을 걱정하고 있다. 노마 카오루 : 스기사키 하나 리오의 소꿉친구로 수수한 여학생. 감수성이 강하고 친구들 생각의 온화한 성격이지만 반 내에서는 친한 친구가 없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굳이 통신판매로 구입했던 탈법 허브를 흡입해서 쓰러져, 정학 처분을 받았다. 성적 우수로 동경 대학을 지망하고 있다. 미시마 쿄코 : 후지와라 레이코 리오의 그룹에 속하는 여학생. 어머니(니시야마 마유코)의 사후, 어머니의 친구인 카나에의 개별 레슨을 받아, 음악의 길에 진학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작곡 콩쿨에서는 언제나 2위로, 그 장래의 선택은 정당한가 불안하게 느끼고 있어, 유코로부터도 사립대 문과 계열로의 진로 변경을 권하고 있다. 어머니와의 기억이 있는 허밍을 더해 작곡했던 '트와일라잇 존'을 플라티나 주니어 음악제에 응모해 금상을 수상했지만, 라이벌인 아이가 '트와일라잇 존'을 도작했던 의혹(눈앞에서부터 취소)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이가 행방 불명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게다가 아이의 어머니인 카나에가 '트와일라잇 존'을 도작해, 제46회 고교생 아시아 작곡 콩쿨에 응모해서 딸에게 금상을 수상했던 것으로, 수상 사퇴를 카나에에게 재촉하게 된다. 1회분 레슨료와 거래해 유코 일행에게 '과외수업'을 의뢰한다. '과외수업'에 의해서 도작의 의혹이 풀어져, 다시 금상수상을 확정해, 고교 졸업후는 파리에 4년간 유학하는 일이 결정된다. '과외수업'후도 유코에게는 사립대 문과 계열로의 진로변경을 요구하지 않고, 후지이의 지지도 있어, 유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다치바나 사토시 : 카토오노 다이코 모치즈키 그룹에 속하는 남학생. USB 메모리 분실소동으로 토시오의 밀고에 의해 정학처분을 받았다. 아버지는 미도리 은행의 상사로 유복한 가정이기 때문에, 중학생 시절에 파시리에 사용하고 있어, 시오리와 같은 고교에 데뷔했던 과거를 가진다. 시오리가 걸즈 바에서 일하고 있는 곳을 목격한 이후, 몇번도 알바를 그만두게 하려 하지만 실패로 끝났다. 유코로부터 가르쳐주었던 고급 비밀살롱에 타고 들어와 시오리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카와이의 부하에게 쫓겨 도망쳐 장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그녀를 도망쳐, 유코에게 '과외수업'을 의뢰하게 한 50만엔을 시오리에게 맡긴다. 그 후, 카와이의 부하에게 폭행을 당했던 때, '과외수업'으로 왔던 유코 일행에게 구출되었다. '과외수업'후에, 시오리로부터 50만엔을 돌려주어 그녀와 서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관계가 되었다. 우메하라 유 : 나카죠 아야미 과묵하고 항상 얌전한 여학생. 특정으로 친한 친구는 없는 경우지만, 사려깊고 상냥한 소녀. 스기모토가 3학년 D반의 학생들에게 치한 의혹을 추궁받았을 때, 그의 결백을 믿는 유일한 친구다. 1학년 때 병으로 결석했던 때, 누구에게도 노트를 빌려주라고 말하지 못해, 수업에 대해서 가지 않았던 자신에게 영어 노트를 주었던 스기모토에게 감사해, 궁지를 구하려고, 그의 대역으로 유코 일행에게 10만엔을 지불해 '과외수업'을 의뢰한다. 스미레는 '(넉넉한 자신은) 자각하지 않지만 진짜 좋은 여자'라고 칭찬하고 있다. 잡지에서 독자모델로서 기재되었던 것으로 정학 처분을 받아, 그것으로 틈 타 훗타에 의해서 에이카의 죄를 덮어씌웠다. 다시 훗타에게 자신의 꿈을 모욕하였는데 배를 차서, 훗타가 피해자 · 오가와에게 합의금으로서 가져 꺼낸 것과 같은 금액의 돈으로 다시 '과외수업'을 의뢰했다. 결과 자신으로의 혐의는 어두웠지만, 본의 아니게도 에이카를 한층 더 고립에 몰아넣게 한다. 키쿠치 노조미 : 후지와라 카오루 이즈카에게 인연을 접촉해, 협박당하고 있는 때에 모치즈키에게 도와준다. 그와 같은 반 일때부터 처음 말했던 동료였지만, 그 일로 매우 감사해, 모치즈키가 반 중에서 규탄하고 있던 때에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감쌌다. 문화제에서는 3학년 D반이 출점하는 카페의 리더가 되었다. 사카구치 마나부 : 오카야마 아마네 타카기 미즈키 : 사카타 리카코 에이카의 그룹에 속하는 보이시한 여학생으로 남자 친구가 있다. 후련하고 있어 남녀 불문하고, 인기가 있다. 한편, 어둠에 가려진 반 친구의 나쁜 말을 말하는 일이 많아, 에이카와 모치즈키의 교제를 발각했던 때, 직접, 에이카 본인에게 나쁜 말을 단언하고 있었다. 카와노 야요이 : 사야 외관으로는 화려한 여학생. 문화제에서 복권 거래로 3학년 D반이 출점하는 카페의 실행 위원으로 선택되었다. 미도리가와 후카 : 시노하라 츠구미 소에지마 소이치로 : 나가에 유키 반 내에서는 비교적으로의 학생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는, 시원스런 스포츠맨. 미우라 카즈키 : 핫토리 히로타카 쿠로키 타츠키 : 스즈키 아키토 이노우에 켄타로 : 고모리 마요 하라다 케이고 : 와키 타카시 미술부원. 반 전원의 이안화가 완성하고 있으면 말한다. 미츠하시 타쿠토 : 카이토 이소무라 류타 : 스즈키 류노스케 오노 치나츠 : 오노 아스카 카노 마리 : 무라사키 마야 에이카의 그룹에 속하는 여학생. 화려한 그룹 내에서는 약간 수수하다. 나카타니 마유 : 테라야마 아오이 조용한 문학 소녀. 이차 소설이 좋아한다. 이와사키 유이 : 쿠노 미즈키 가사가 특기인 어린 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가정적인 여학생. 협력자[편집] 노구치 타로 : 스루가 타로 신출귀몰의 지역경찰관. 순사. 경찰관의 직권을 이용해, 시간 벌기를 위해 직무 질문을 시작하여, 감시 카메라 영상이나 개인 정보의 수집등으로 '과외수업'을 도와, 한 몫을 하고 있다. 그 외[편집] 나가시마 미즈호 : 나카니시 미호 도립 국문관 고교의 졸업생. 전 여자 배구부. 밝은 성격으로 반의 중심적 존재였다. 친구였던 아오이의 사후, 쇼크로부터 히키코모리로 벗어나지 않아, 아오이의 이름으로 FAX를 건네, 같은 남성을 좋아했던 아오이를 죽음으로 몰았던 죄의 의식을 느끼고 있다. 유코가 시간을 내서 자택을 방문하지만 매회 거부해, 만나는 것도 없고, 되돌려지고 있다. 과거에 유코와 무엇인가의 인연이 있다. 미즈노 아오이 : 우에마 미오 토시오의 누나. 도립 국문관 고교에 재학하고 있던 학생으로 전 여자 배구부. 내향성으로 틀어박힌 사안의 성격. 친구였던 미즈호와 같이 남성을 좋아하고 있는 것부터, 배구부를 퇴부해서 은둔형 외톨이가 되지만, 2주 후에 학교의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한다. 미즈호의 모친 : 아사쿠라 준코 '너는 배신자다'라고 쓰여진 중상의 전단을 눈으로 했던 미즈호가 행사했던 것에, 동료나 친구의 존재가 미즈호를 몰아붙였던 유코로부터 건네었던 여자 배구부원의 기서를 빼돌려, 두번 다시 집에 오지마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아오이의 이름으로 FAX가 왔던 때에는 유코에게 집으로 불리어, 그것을 알게 된다. 게스트[편집] 제 1 화[편집] 스도 타츠야 : 사오토메 타이치 리오의 남자친구, 가이세이 대학 학생. Cafe&Bar 블랙베리 점주. 현역으로 사법시험을 받고 있어, 대 변호사 사무소의 내정이 결정되었다. 뒤로는 자신을 이견 편을 칭해, 리오를 포함했던 여고생들을 사용해, 탈법 허브로 막벌이를 하고 있었다. 유코의 계략에 여기까지의 소행을 변호사 사무소나 인터넷에 폭로된 뒤, 유코로부터 권법의 하나를 당해 '법으로 빠져나갈 구멍에 매달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불린다. 폭로에 의해서 사회적 지위는 실추돼 체포, 절망의 늪에 빠져버린다. 스도 나츠미 : 미키 호노카 타츠야의 여동생. 도내의 학교에 다니는 고교생. 유코의 계략으로 다쓰야가 취급하는 탈법 허브로 손을 내버린다. 중독환자로써 오빠와 같이 체포된다. BLACK berry 점원 : 키타무라 료 타쓰야의 그녀 : 타카하시 마도카 뉴스 앵커 : 요시다 아키요 (TBS 아나운서) 탈법 허브에 취했던 소년의 괴한 사건을 전달한다. 제 2 화[편집] 오이카와 아츠시 - 카시와바라 슈지 아스카의 남자친구. 도립 국문관 고교 사회과 선생. 수험이나 진로지도에 열심으로 여학생으로부터 인기가 있다. 아스카와 교제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서, 자작연출의 계략으로 아스카를 스토커로 만들어내, 자퇴로 몰아넣었다. 아스카의 의뢰를 받았던 유코의 손에 의해, 다시 취직예정이었던 슈에이 학원 경영자의 나가미 신시에게 본성을 드러내어, 마지막은 음행조례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유코로부터는 '자신의 지위를 위해 학생을 배반한 쓰레기'라고 불린다. 나가미 카나 : 하라다 나츠키 오이카와의 약혼자. 슈에이 학원 사무원. 공개수업의 위성 중계로 오이카와의 본성을 알게 되자, 이별을 통보한다. 나가미 세이지 : 카노 류 슈에이 학원 이사장. 가나의 아버지. 공개수업의 위성 중계로 오이카와의 본성을 알게 되자, 분노를 드러낸다. 학생 : 사사키 모에 오이카와에게 교무실로 불러내어, 작은 시험에서 컨닝 행위를 주의한다. 아스카의 모친 : 츠키야마 마유미 교육위원회 위원장 : 코다마 라이신 형사 : 칸자키 코이치로 오이카와가 사는 맨션의 관리인 : 마스다 나오히로 (TBS 아나운서) 제 3 화[편집] 안 : 쿠도 아야노 / 리코 : 니시노 마미 사립 슈토쿠 여자 고등학교 학생. 전차 안에서 치한 피해자를 가장해, 가해자로 지칭한 남자로부터 거액의 함구료를 강제로 빼앗고 있었다. 유코 일행의 손으로 피해자의 가족에게 범죄의 순간을 보는 것부터, 학교를 퇴학에 몰려, 경찰에 체포되었다. 유코로부터는 '정당한 인간을 빠뜨린 거짓말쟁이'로 불린다. 전 상사 회사원의 아내 : 히로나카 마키 / 은행원 애인 : 우노 마리에) 안 일행에게 치한 사기의 피해를 받았던 남자들의 가족이나 관계자. 유코 일행의 '과외 수업'으로 전세 노선 버스에 승차해, 안 일행의 악행을 추궁한다. 제 4 화[편집] 야스다 류미코 - 키무라 미도리코 야스다의 어머니. (구 성씨 : 요시다.) PTA 회장으로서 배구부의 보호자회 회장. 자신의 가치관을 아들을 포함했던 주변의 인간에게 밀어붙이는 도깨비 부모. 세상에 대한 체면을 신경 쓴 나머지, 미조구치 일가의 양복점을 도산으로 몰아 넣어, 콘도를 상해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어 낸 뒤, 배구부의 결승 진출을 사퇴당한 요인을 만들었다. 유코 일행의 손으로 가정 사정이나 여기까지의 사업을 PTA 총회에서 폭로되어, PTA 회장을 사임했다. 도립 와카미야 고교 시대에는 뛰어난 공격수로, 국민 체육대회 도쿄 도 예선대회에서 득점왕이 된 유명한 선수였지만, 상처 때문에 배구를 그만두어, 공부 부족때문에 시험에도 실패했다고 한 과거를 가진다. 유코로부터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 지는 시합을 계속해, 실패를 아들의 탓으로 했던 비겁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야스다 코이치 : 진보 사토시 야스다의 아버지. 일류 기업인 야마히시 산업에 근무했다가 정리해고되어, 현재는 경비 일을 하고 있다. 미조구치 켄타 : 오쿠무라 히데토 국문관 고교 1학년. 배구부의 에이스 포지션을 야스다로부터 빼앗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왔지만, 그 상황이 재밌지 않는 유미코는 PTA를 이용해서, 켄타의 부친이 운영하는 양복점을 제복 지정 판매점으로부터 제외해서 도산으로 몰아넣어, 배구를 계속하는 것을 곤란하게 시켰다. 그러나 도 대회의 준결승 당일, 사합 회장에 들어와 배구를 계속하고 싶어도 신청해, 야스다와 도중 교대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배구부 보호자 회원 : 마츠야마 히사코, 모리사와 사나에, 츠노다 후미 아라이 병원의 간호사 : 후루야 유미 (TBS 아나운서) 제 5 화[편집] 카와이 가구야 : 카토 토라노스케 스미레의 고교시절 전 남자친구로 최종학력은 고졸. 걸즈 바 · Fireworks를 경영하는 한 편, 뒤에는 출장 걸즈 바를 칭해서 매춘목적의 고급비밀 살롱을 경영하고 있다. 취직빙하기였기 때문에, 걸즈 바의 경영 이전은 백수였다. 다치바나나 하루카에게 알바했던 일이 들켜 몰래 탈의실을 도촬했던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협박해, 무리하게 따라갔던 고급비밀 살롱에서 나가이의 상대를 하도록 강요한다. 몰래 의뢰를 받았던 유코 일행의 손에 의해서 자신의 컴퓨터에 보존되어 있던 사진이나 동영상을 증거로 나가이를 강청했던 일로 되어버렸기 때문, 나가이의 백에 붙어있던 인간으로부터의 보복을 당해, 교도소로 들어가는 몸의 안전을 지키는 노구치에 의해 체포되었다. 유코로부터는 '자신의 태만을 시대의 탓으로 해, 반칙승을 했던 실격자'라고 불린다. 나가이 히로시 : 스기무라 타이조 유명한 교육평론가로, 주된 저서는 '여유를 벗어러, 이제야말로 동대'. 가와이가 경영하는 고급비밀 살롱의 VIP 고객. 가와이의 컴퓨터에서 보존되어 있던 사진이나 동영상을 삭제하는 거래를 가와이의 비밀을 자칭했던 아야에게 걸어, 가와이의 계좌 1천만엔을 입금했다. 백에는 사회 이면의 인간이 붙어 있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카와이의 부하 : 이시다 마사시, 야마가미 요시타카 Fireworks의 손님 : 오미야노 마츠 몰래 miumiu의 배포를 선물한다. Fireworks의 소년 : 사토 코이치 고교생 : 오미 요이치로, 아라이 마사키 중학교 시절, 다치바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도립 국문관 고교와는 다른 고교로 진학했다. 가라오케 점원 : 하타노 타카미츠, 츠노다 후미 제 6 화[편집] 이시카와 카나에 : 스기타 카오루 코난 음악대학 교수. 남편과는 이혼하고 있다. 쿄코의 엄마와는 친구로, 사후 양부모가 되어, 개별 레슨을 하고 있다. 쿄코가 작곡했던 '트와일라잇 존'을 딸 · 아이의 작품으로서 고교생 아시아 작곡 콩쿨에 응모해, 코쿄에게 표절 의혹을 씌운다. 유코 일행의 '과외수업'에 의해서, 자신의 곡을 콩쿨에서 응모한 아이에게 대역으로 수상받았던 일이나 레슨 때, 아이에게 학대하고 있었던 일이 판명되어, 아동학대방지법 위반과 상해 용의로 체포되었다. 유코로부터는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고 단념해, 꿈을 마지막까지 관철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바꿔치기했던 어리석은 것'이라고 불린다. 이시카와 아이 : 코이케 레나 도립 국문관 고교 3학년 B반. 카나에의 딸. 쿄코의 소꿉친구. 카나에가 작곡했던 곡을 자신의 곡으로서 응모해, 작곡 콩쿠르에 수상하기 전, 카나에로부터 학대에 가까운 레슨을 받고 있었다. 카나에가 쿄코가 작곡했던 '트와일라잇 존'을 표절했던 것을 알아, 더 이상 엄마의 대역이 되었던 것에 싫증이 나 음악과 엄마를 버리기 위해, 여기까지의 콩쿠르 상금 30만엔으로 교환해, 유코 일행에게 '과외수업'을 의뢰하고 있었다. 의뢰 후는 아버지의 것으로 자신을 대고있다. 고교생 아시아 작곡 콩쿨 스탭 : 나카지마 타이스케 제 7 화[편집] 이즈카 나오키 : 노무라 슈헤이 모치즈키 · 에이카와는 중학교 시절에 야구부의 동료였다. 고등학교는 퇴학하고 있어, 사기 그룹의 멤버로서 활동하고 있다. 야구부 시합에서 상대 선수가 데드볼로 일어났던 난투극에 막으려 할 때, 오른팔을 다쳐 선수생명을 중단했다. 모치즈키의 아버지가 냈던 배상금으로 상처를 치료해, 현재는 오토바이를 운전하기 까지로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모치즈키에게는 돈을 강청하는 구실로 하기 때문에 함구하고 있어, 여전히 오른팔이 부자연스러운 것과 같은 속임수를 하고 있다. 키쿠치에게 인연을 트집잡아 공갈하고 있던 때, 우연히 재회했던 모치즈키로부터 돈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고, 에이카에게 위해를 더해 협박해서 자신을 때리듯이 발송, 모치즈키를 퇴학으로 몰아넣는다. 그의 몸을 걱정했던 야스다와 타치바나로부터의 의뢰를 받았던 유코 일행의 손에 의해서 악행이 밝히게 되자, 사기와 공갈의 용의로 체포되었다. 유코로부터는 '동료 의식을 방패로 해서, 사람의 약점에 이용하는 최악인 남자'라고 불린다. 사기 그룹의 리더 : 타키토 켄이치 가출하고 있던 이즈카를 도와, 사기에 가담하고 있다. 미즈호의 어머니 : 아사쿠라 준코 '너는 배신자다'라고 쓰였던 중상의 빌라를 눈으로 했던 미즈호가 날뛰었던 것을 눈앞으로 해, 동료나 친구의 존재가 미즈호를 추적했을 뿐이라서, 유코로부터 건넸던 여자 배구부원의 기서를 되밀쳐,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고 보고한다. 제 8 화[편집] 오가와 : 시나가와 토오루 심장발작을 일으켜 기겁했던 노부코에게 발을 헛디뎌, 괴로워 하던 곳을 에이카에게 버려졌다. 'SETA☆LIFE'에 게재되었던 에이카의 기사를 보면서, 그녀로부터의 사죄를 구해 학교에 쳐들어가지만, 자택을 방문했던 훗타로부터 목격했던 것은 에이카는 아니고 유라고 불어넣어, 일방적으로 합의금을 건넸다. 그 후, 유의 자택을 향해, 훗타에게 합의금을 돌려주도록 들이대지만, 유코 일행의 '과외수업'에 의해서 아야로부터 진실을 들어, 교장 승진 시험의 면접 회장에서 훗타를 규탄한다. 전 고교교사이며, 교사의 부패를 한탄하고 있었다. 교육장 : 코바야시 타카시 유코 일행의 '과외수업'에 의해, 괴로워 하고 있는 체를 하고 있었던 노구치를 버리는 훗타의 행동을 목격해, 교장 승진 시험의 면접 회장에서 사람을 버리는 인간은 교사인 자격이 없다고 단죄한다. 노부코 : 시라하네 유리 타운 정보지 'SEAT☆LIFE'의 기자를 하고 있는 부귀. 괴로워 하고 있던 곳을 에이카에게 도와준 것으로, 지면에 소개기사를 게재했던 것으로 학교 측에 전달했다. 교장 승진 시험의 면접관 : 사토 아사히 방송일 및 부제[편집] 각화 방송일 부제 각본 연출 시청률 제 1 화 2012년 7월 20일 필살!! 학원 드라마!! 다크 히로인 탄생 야마시타 도모히로 오바야시 리에코 요시자와 도모코 오카모토 싱고 12.9% 제 2 화 2012년 7월 27일 교사와의 금단의 사랑! 오로키 마마도 대추천!! 요시자와 도모코 10.4% 제 3 화 2012년 8월 3일 치한 사기~ 필살 학원 바보!를 넘어뜨린다 오바야시 리에코 이시이 야스히루 8.8% 제 4 화 2012년 8월 10일 괴물 엄마 시험인가 부활동인가? 엄마가 바보로!! 이케다 나츠코 가와시마 류타로 9.4% 제 5 화 2012년 8월 17일 불꽃의 사랑! 도찰범에게 바보!! 교사의 과거 요시자와 도모코 오카모토 싱고 10.4% 제 6 화 2012년 8월 24일 친자식의 사랑!? 폭력 · 음대 여교수에게 어리석은 것 오바야시 리에코 이시이 야스히루 9.9% 제 7 화 2012년 8월 31일 사랑인가 우정인가? 공갈로 바보!! 여교사의 수수께끼 이케다 나츠코 가와시마 류타로 9.8% 제 8 화 2012년 9월 7일 최종회~ 교사의 비밀, 부교장의 사랑에 어리석음 후지이 키요미 쓰보타 후미 오카모토 싱고 9.8% 제 9 화 2012년 9월 14일 최종회, 죽은 자로부터의 FAX, 어리석은 것은 여교사다? 키스의 덫 오바야시 리에코 이시이 야스히루 9.2% 제 10 화 2012년 9월 21일 안녕 검은 여교사 어리석은 것의 수수께끼가 밝혀지는 눈물의 이별! 요시자와 도모코 오카모토 싱고 8.0% 평균 시청률 9.9% 시청률은 간토 지구 · 비디오 리서치 사의 조사에 한함 주제가[편집] UVERworld 'THE OVER' 관련 항목[편집] TBS 금요일 드라마 외부 링크[편집] TBS 금요일 드라마 '검은 여교사' 공식 웹사이트 TBS 금요 드라마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한번 더 너에게, 프로포즈(2012.4.20 ~ 2012.6.22) 검은 여교사(2012.7.20 ~ 2012.9.21) 오오쿠~탄생[아리고토·이에미츠 편](2012.10.12 ~ 2012.12.14) vdehTBS 금요드라마1989년 ~ 1994년1989년 《비보다 상냥하게》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 1990년 《추억에 변할 때까지》 《유혹》 《도시의 숲》 《남자에 대해서》 1991년 《고르지 않은 사과들 III》 《그래도 집을 샀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들》 《내일이 있으니까》 1992년 《어른의 선택》 《사랑은 어때》 《계속 네가 좋았어》 《십년애》 1993년 《고교교사 (1993년)》 《나는 추녀였어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철저하게 사랑은...》 1994년 《언제나 마음에 태양을》 《적령기》 《인간 실격: 내가 만약 죽는다면》 《내가 그녀에게, 빚을 진 이유.》 1995년 ~ 1999년1995년 《흔들리는 마음》 《6월의 신부》 《사랑한다고 말해줘》 《미성년》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이 문구를 삭 1996년 《사랑이란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 《너를 만나고 나서》 《유리 조각들》 《협주곡》 1997년 《당신의 인생의 시간》 《고르지 않은 사과들 IV》 《마지막 사랑》 《파랑새》 1998년 《성자의 행진》 《해후》 《랑데부》 《안돼요!》 1999년 《케이조쿠》 《주말혼》 《독신생활》 《아름다운 사람》 2000년 ~ 2004년2000년 《금요일의 연인들에게》 《QUIZ》 《Friends》 《한여름의 메리 크리스마스》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2001년 《스트로베리 온 더 쇼트케이크》 《옛 남자》 《세계에서 가장 더운 여름》 《사랑을 몇 년간 쉬셨습니까》 2002년 《키사라즈 캐츠아이》 《꿈의 캘리포니아》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 《엄마의 유전자》 2003년 《고교교사 (2003년)》 《블랙잭에게 안부를》 《스탠드 업!!》 《양키 모교로 돌아오다》 2004년 《아내는 요술쟁이》 《홈 드라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3학년 B반 킨파치선생 시즌7》 2005년 ~ 2009년2005년 《타이거 & 드래곤》 《드래곤 사쿠라》 《꽃보다 남자》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2006년 《야왕 ~YAOH~》 《쿠로사기》 《태양의 노래》 《세일러복과 기관총》 《웃기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 2007년 《꽃보다 남자 2(리턴즈)》 《특급 타나카3호》 《야마다 타로 이야기》 《가희》 2008년 《에디슨의 어머니》 《Around40~주문이 많은 여자들∼》 《마왕》 《유성의 인연》 2009년 《러브 셔플》 《스마일》 《오르트로스의 개》 《독신》 2010년 ~ 2014년2010년 《엽기인걸 스나코》 《건달군과 안경양》 《자만형사》 《SPEC~경시청 공안부 공안 제5과 미상 사건 특별 대책계 사건부~》 이 문구를 삭제하지 2011년 《LADY~마지막 범죄 프로파일~》 《태어나다.》 《미남이시네요》 《전업주부탐정~나는 그림자》 2012년 《연애 니트~잊고 있던 사랑을 시작하는 방법》 《한번 더 너에게, 프로포즈》 《검은 여교사》 《오오쿠~탄생[아리고토·이에미츠 편]》 2013년 《야행관람차》 《TAKE FIVE~우리는 사랑을 훔칠 수 있을까~》 《될 대로 되겠지.》 《쿠로코치》 2014년 《밤의 선생님》 《앨리스의 가시》 《가족 사냥》 《N을 위하여》 2015년 ~ 2019년2015년 《우로보로스~이 사랑이야말로, 정의.》 《앨저넌에게 꽃을》 《오모테산도 고교 합창부!》 《코우노도리》(시즌 1) 2016년 《나를 보내지 마》 《저 결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신의 혀를 가진 남자》 《모래탑~너무 잘 아는 이웃》 2017년 《하극상 수험》 《리버스》 《헬로 네즈미》 《코우노도리》(시즌 2) 2018년 《언내츄럴》 《당신은 돌아갈 집이있다》 《치어 댄스》 《대연애~나를 잊지 너와》 2019년 《메종 드 폴리스》 《인 핸드》 《나기의 휴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검은_여교사&oldid=20832752" 분류: 2012년 드라마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교사를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일본의 서스펜스 드라마일본의 액션 드라마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2월 27일 (화) 17: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검은 여교사 제 3화의 부제는? |
CNO 순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CNO 순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1CNO순환의 개념도 여러 핵융합 반응의 온도에 따른 효율 변화 비교 CNO 순환(CNO cycle, 문화어: 탄소질소산소순환)은 항성이 수소를 헬륨으로 변환시키는 핵융합 과정으로서 밝혀진 두 기작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 pp-연쇄반응과 달리 CNO 순환은 촉매순환이다. 이론적 모형에 따르면 CNO 순환은 질량이 태양의 1.3배 이상인 무거운 별들에서 우세한 에너지원이다.[1] 한편 태양급 질량 또는 그 이하 질량의 항성에서는 pp-연쇄반응이 우세하다. 이 차이는 두 반응의 온도 의존성 차이에서 기인한다. pp-연쇄반응은 4 × 106 K (= 4 메가켈빈) 언저리에서 시작되어[2] 작은 별들의 에너지원으로서 우세해진다. 반면 CNO 순환은 15 × 106 K (= 15 메가켈빈) 언저리에서 시작되지만 온도가 높아짐에 따라 에너지 출력이 급격하게 커진다.[1] 17 × 106 K (= 17 메가켈빈) 정도의 온도가 되면 CNO 순환이 pp-연쇄반응보다 우세한 에너지원이 된다(우측 그래프 참조).[3] 우리 태양의 중심핵 온도는 15.7 × 106 K으로, pp-연쇄반응과 CNO 순환반응이 모두 일어나지만 태양핵에서 생산되는 헬륨-4 중 CNO 순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의 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제1CNO는 1938년에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4] 1939년에 한스 베테가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5] CNO 순환에서는 4회의 양성자 융합이 발생하는데, 이때 탄소, 질소, 산소 동위원소들을 촉매로 사용한다. 알파입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전자 2개와 전자 중성미자 2개가 필요하다. CNO 순환의 세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촉매 경로가 존재하지만 모든 CNO 순환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알짜 결과를 얻는다. 4 11H + 2 e− → 42He + 2 e+ + 2 e− + 2 νe + 3 γ + 24.7 MeV → 42He + 2 νe + 3 γ + 26.7 MeV 양전자는 생성된 즉시 전자-양전자 쌍소멸을 일으켜 감마선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한다. 중성미자는 약간의 에너지를 가지고 항성을 탈출한다. 하나의 원자핵이 끝없는 순환 구조 속에서 탄소, 질소, 산소가 되기를 반복한다. 목차 1 저온 CNO 순환 1.1 제1CNO 1.2 제2CNO 1.3 제3CNO 1.4 제4CNO 2 고온 CNO 순환 2.1 제1HCNO 2.2 제2HCNO 2.3 제3HCNO 3 각주 저온 CNO 순환[편집] 항성 내부의 전형적 환경에서는 CNO 순환에 의한 수소의 촉매반응이 양성자 포획에 의해 제한된다. 특히 방사성 동위원소의 베타 감쇠 시간척도가 핵융합 시간척도보다 빠르다. 걸리는 시간이 긴 만큼 저온 CNO 순환은 수소를 헬륨으로 느리게 전환시키며, 항성이 오랜 세월동안 잠잠히 평형상태를 유지하도록 한다. 제1CNO[편집] 최초로 제안된 촉매순환반응으로서 CN 순환(탄소질소순환) 또는 발견자들의 이름을 따 베테-바이츠제커 순환이라고 한다. 명칭의 CNO에서 O가 빠진 이유는 이 과정에서는 산소의 안정한 동위원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테의 처음 계산 결과는 CN 순환이 태양의 주요 에너지원이라고 나왔는데, 당시에는 질소가 태양의 구성성분의 10%를 차지한다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5] 현재 알려진 태양의 질소 비율은 0.5% 이하이다. 오늘날 CN 순환은 보다 큰 CNO 핵융합 네트워크의 첫 부분으로 여겨진다. 제1CNO 순환의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126C→137N→136C→147N→158O→157N→126C:[6] 126C + 11H → 137N + γ + 1.95 MeV 137N → 136C + e+ + νe + 1.20 MeV (반감기 9.965 분[7]) 136C + 11H → 147N + γ + 7.54 MeV 147N + 11H → 158O + γ + 7.35 MeV 158O → 157N + e+ + νe + 1.73 MeV (반감기 122.24 초[7]) 157N + 11H → 126C + 42He + 4.96 MeV 첫 반응에서 사용된 탄소-12 원자핵이 마지막 반응에서 다시 생성된다. 방출된 양전자 2개가 주변 전자 2개와 쌍소멸하면서 추가적으로 2.04 MeV를 더 내놓아 제1CNO 순환 1번으로 방출되는 에너지 총량은 26.73 MeV이다. 일부 문헌에 따라 저자들이 양전자 쌍소멸 에너지를 베타 감쇠 Q값에 포함시키고 쌍소멸로 방출되는 같은 양의 에너지를 무시하여 독자에게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모든 값은 원자질량평가 2003년판에 따라 계산하였다.[8] 제1CNO의 제한반응(가장 느린 반응)은 147N의 양성자 포획 반응이다. 2006년 항성 에너지의 실험적 측정이 하향되어 구상성단의 나이가 10억 년 전후로 교정되었다.[9] 운동량이 보존됨에도 불구하고 베타 감쇠로 방출되는 중성미자의 에너지는 단일하게 정해지지 않고 범위값을 갖는다. 양전자와 중성미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방출하거나 어느 한 쪽이 에너지를 다 가져가거나 그 사이 어디거나 간에 Q값 에너지가 사용된다면 운동량을 공유할 수 있다. 전자나 중성미자가 만들어내는 운동량은 상대적으로 훨씬 무거운 딸원자핵에 유의미한 반동을 일으키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작다. 때문에 생성된 물질의 운동에너지로의 기여분은 무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질소-13의 감쇠로 방출되는 중성미자 에너지는 0 - 1.20 MeV, 산소-15의 감쇠로 방출되는 중성미자 에너지는 0 - 1.73 MeV이다. 이런 식으로 중성미자에 의해 빠져나가는 총 에너지는 평균적으로 약 1.7 MeV이며, 광도, 즉 빛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나머지 25 MeV이다.[10] 제2CNO[편집] 제1CNO와 거의 같으나 마지막 반응에서 157N가 탄소-12와 알파선을 만들어내지 않고 대신 산소-16과 광자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157N → 168O → 179F → 178O → 147N → 158O → 157N 157N + 11H → 168O + γ + 12.13 MeV 168O + 11H → 179F + γ + 0.60 MeV 179F → 178O + e+ + νe + 2.76 MeV (반감기 64.49 초) 178O + 11H → 147N + 42He + 1.19 MeV 147N + 11H → 158O + γ + 7.35 MeV 158O → 157N + e+ + νe + 2.75 MeV (반감기 122.24 초) 기본 CNO에 촉매로서 관여하는 탄소, 질소, 산소와 마찬가지로 제2CNO의 두 번째 루프에서 생산된 플루오린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 최종 결과에서는 사라지므로 항성 내부에 누적되지 않는다. 제3CNO[편집] 제3CNO는 질량이 큰 항성들에서만 유의미하다. 제2CNO의 네 번째 루프에서 질소-14와 알파선 대신 플루오린-18과 감마선이 생성된다.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178O→189F→188O→157N→168O→179F→178O: 178O + 11H → 189F + γ + 5.61 MeV 189F → 188O + e+ + νe + 1.656 MeV (반감기 109.771 분) 188O + 11H → 157N + 42He + 3.98 MeV 157N + 11H → 168O + γ + 12.13 MeV 168O + 11H → 179F + γ + 0.60 MeV 179F → 178O + e+ + νe + 2.76 MeV (반감기 64.49 초) 제4CNO[편집] 양성자가 원자핵과 반응하여 알파선(= 헬륨 원자핵 42He)이 방출된다. 제3CNO와 마찬가지로 제4CNO도 질량이 큰 항성에서만 유의미하다. 제3CNO의 세 번째 루프에서 질소-15와 알파선 대신 플루오린-19와 감마선이 생성된다.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199F→168O→179F→178O→189F→188O→199F: 199F + 11H → 168O + 42He + 8.114 MeV 168O + 11H → 179F + γ + 0.60 MeV 179F → 178O + e+ + νe + 2.76 MeV (반감기 64.49 초) 178O + 11H → 189F + γ + 5.61 MeV 189F → 188O + e+ + νe + 1.656 MeV (반감기 109.771 분) 188O + 11H → 199F + γ + 7.994 MeV 고온 CNO 순환[편집] 항성 내부보다 고온 고압인 환경, 예컨대 신성이나 엑스선 폭발원에서는 양성자 포획 속도가 베타 감쇠 속도를 앞질러서 양성자 적하선까지 밀어붙이며 불타오른다. 여기서 기본적 아이디어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베타 감쇠를 일으키기도 전에 양성자를 포획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핵융합 방법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제1HCNO[편집] 제1CNO와 제1HCNO 사이의 차이점은 137N이 감쇠를 일으키지 않고 양성자를 포획한다는 것이다.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126C→137N→148O→147N→158O→157N→126C: 126C + 11H → 137N + γ + 1.95 MeV 137N + 11H → 148O + γ + 4.63 MeV 148O → 147N + e+ + νe + 5.14 MeV (반감기 70.641 초) 147N + 11H → 158O + γ + 7.35 MeV 158O → 157N + e+ + νe + 2.75 MeV (반감기 122.24 초) 157N + 11H → 126C + 42He + 4.96 MeV 제2HCNO[편집] 제2CNO와 제2HCNO 사이의 차이점은 179F가 감쇠하지 않고 양성자를 포획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네온이 형성되고 네온은 다시 189F로 변한다.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157N→168O→179F→1810Ne→189F→158O→157N: 157N + 11H → 168O + γ + 12.13 MeV 168O + 11H → 179F + γ + 0.60 MeV 179F + 11H → 1810Ne + γ + 3.92 MeV 1810Ne → 189F + e+ + νe + 4.44 MeV (반감기 1.672 초) 189F + 11H → 158O + 42He + 2.88 MeV 158O → 157N + e+ + νe + 2.75 MeV (반감기 122.24 초) 제3HCNO[편집] 제2HCNO의 5번째 루프에서 189F가 양성자 하나를 포획하여 질량이 커지고 이후 제4CNO와 같은 기작으로 헬륨을 생산한다. 촉매 원소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189F→1910Ne→199F→168O→179F→1810Ne→189F: 189F + 11H → 1910Ne + γ + 6.41 MeV 1910Ne → 199F + e+ + νe + 3.32 MeV (반감기 17.22 초) 199F + 11H → 168O + 42He + 8.11 MeV 168O + 11H → 179F + γ + 0.60 MeV 179F + 11H → 1810Ne + γ + 3.92 MeV 1810Ne → 189F + e+ + νe + 4.44 MeV (반감기 1.672 초) 각주[편집] ↑ 가 나 Salaris, Maurizio; Cassisi, Santi (2005), Evolution of stars and stellar populations, John Wiley and Sons, 119–121쪽, ISBN 0-470-09220-3 ↑ Rei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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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3-411-14172-7. vdeh핵과정방사성 붕괴 과정핵자를 방출하는 붕괴 알파 붕괴 뭉치 방출 중성자 방출 양성자 방출 자발 핵분열 광붕괴 여러가지 베타 붕괴 베타 붕괴 양전자 방출 전자 포획 이중 베타 붕괴 이중 전자 포획 동일 원자핵의 다른 상태로의 전이 감마 붕괴 이성질핵 전이 내부 전환 핵합성핵융합 과정 양성자-양성자 연쇄 CNO 순환 삼중알파과정 탄소 연소 과정 네온 연소 과정 산소 연소 과정 규소 연소 과정 중성자 포획 R과정 S과정 양성자 포획 P과정 Rp과정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CNO_순환&oldid=23426843" 분류: 핵융합항성물리학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বাংলা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Hrvatski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LietuviųമലയാളംBahasa Melayu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6일 (일) 20:5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1CNO 순환에서 13 6C가 변화하여 생기는 원소는 무엇인가? |
수원 백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원 백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원 백씨(水原 白氏) 수원 백씨의 종문 관향 경기도 수원시 시조 백우경(白宇經) 주요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백천장(白天藏) 주요 인물 백인걸, 백시구, 백남신, 백용성, 백낙원, 백낙삼, 백인기, 백윤화, 백낙준, 백인제, 백남운, 백낙승, 백한성, 백기만, 백두진, 백선엽, 백인엽, 백남준, 백승탁, 백일섭, 백성운, 백성현, 백군기, 백재현, 백원우, 백종원, 백주은, 백지연, 백승주, 백인호, 백하람, 백지현,백인화,백채림, 백승재, 백수현 인구(2015년) 354,428명 수원 백씨(水原 白氏)는 경기도 수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목차 1 역사 1.1 시조 동래설 문제점 2 본관 연혁 3 분파 4 인물 5 과거 급제자 6 집성촌 7 항렬표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사[편집]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으로 중국 소주(蘇州) 출신이다. 당(唐)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아 780년(신라 선덕왕 1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 경주시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 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주 1] 그러나 이후 계대(系代)가 불명하여 신라 경명왕(재위 917년 ∼ 924년)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되었다는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었다.[1] 백창직의 증손 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사적이 없고, 그의 9세손 천장(白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고려 충선왕 때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고 하나 이 역시 사적에 없다. 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이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원 백씨는 개성에서 왔다고 했다.[주 2] 조선 조 이래 백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백효삼(白效參)의 증손인 문신 백인걸(白仁傑)이 있다. 2015년 인구는 354,428명이다. [주 3] 사적(史籍)으로 볼 때 수원을 본관으로 처음 쓴 사람은 백효삼(白效參)이다. 백효삼은 1427년(세종 9) 친시(親試)에서 과지에 본관을 '수원'으로 기재하였다. 백효삼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낸 백회(白薈)의 아들로, 임천 백씨 백경신(白景臣)의 아들 진식(眞植)의 후손인 백천장(白天藏)의 현손이다. 조선조에 효삼의 후손들이 잇달아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는 백씨 일족 중에서도 대관(大貫)이 되어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시조 동래설 문제점[편집] 시조 백우경의 동래설은 당나라 덕종년간인 서기780년에 소주에서 통일신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고 서기 1669년 경주부사 민주면이 간행한 동경잡기에 실린 기록인데 그 출처는 서기 1637년 간행된 대흥백씨 정축구보의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서 보다 명확한 고증이 될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진필명(秦弼明)은 한반도 진씨의 시조인데 서기 624년에 출생,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의 증손자 진자윤(秦自潤)의 처가 바로 백씨로서 진씨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대략 710년~720년에 출생한 사람이라 시조 백우경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나이가 많으니 시조의 동래설은 의심되는 바이며,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의 5세손 이입전(李立全)의 배위는 한림학사 백광선(白光善)의 여식이라고 선원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장인인 백씨는 대략 730~740년대 사람이지만 지금의 백씨족보에는 나오지 않는다. 본관 연혁[편집] 수원은 선사 시대에 '모수국'으로 불렸다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買忽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水州)로 승격하여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파하고, 1018년(현종 9)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1271년(원종 12)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그 뒤에 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군(郡)으로 강등시켰는데, 후에 다시 부(府)로 되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조선태조 3)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수원'(水原)으로 개명되어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때 묵는 화성 행궁이 건립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에 두어 상업이 발전하였으며,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순조 원년) 정조가 사망한 후 수원에 대해 베풀던 특권이 폐지되면서 쇠퇴하였다.[주 4] 분파[편집] 백씨는 중시조 백창직의 후대에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 파로 갈라졌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 927?)에게 길(吉)과 탁(卓),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백길(白吉)의 후손이 28개 파(派)를 이루고 백탁(白卓)의 후손은 문간공파 뿐이다. 백길의 후계 중 5세 백간미(白簡美)의 후손들이 25개 파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1세 백인관(白仁寬)의 후손이 장파인 <선정공파>(선산 백씨)다. 12세 백역(白繹)의 후손이 <인주공파>(정주 백씨)이고, 13세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이 <오산군파>(청도 백씨)이다. 13세 백유(白維)의 후손이 <장단공파>이며, 10세 백문보(白文寶)의 후손이 <담암공파>(대흥 백씨)이다. 백간미(白簡美)의 셋째 아들인 6세 백무신(白武臣)의 후손이 <양곡공파>, 넷째 아들인 백가신(白可臣)의 후손이 <태사공파>(홍주 백씨)이다. 다섯째 아들 경신(景臣) 후손 원정(白元貞) 계통 9세인 백천장(白天藏)은 백간미(白簡美)의 다섯째 아들인 경신(景臣)의 후계로, 아들 여섯을 두어 그 후손들은 모두 17개 파(派)로 분파하였다. 백천장의 아들 련(璉)의 장손으로 12세 백장(白莊)이 장흥으로 낙향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정신재공파>(장흥 또는 해미 백씨)이다. 해미 백씨에서 태인 백씨가 분적하여 의주로 이거하였다. 려말선초에 개성에 살던 일족들 중 백장의 동생 백회(白薈(繪))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내고 남하하여 장남인 13세 백효삼의 자손들이 수원을 본관으로 삼고 파주와 양주 등지에 자리잡았다. 14세 백사순(白思純)의 후손이 <좌랑공파>, 16세 백인현(白仁賢)의 후손이 <훈정공파>, 백인영(白仁英)의 후손이 <도승지공파>, 백인웅(白仁雄)의 후손이 <참봉공파>, 백인호(白仁豪)의 후손이 <별좌공파>,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 <문경공파>다. 백효삼의 동생들로, 백효옹(白效雍)의 후손이 <청산공파>, 백효연(白效淵)의 후손이 <산음공파>, 백효약(白效若)의 후손이 <임피공파>다. 백회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중후기에는 백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었다. 백천장의 둘째 아들 전(琠)의 아들 11세 백인석(白仁碩)의 후손이 <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이고, 셋째 아들 환(環)의 후계에서 13세 백운실(白雲實)의 후손이 <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 12세 백수희(白受禧)[주 5]의 후손이 <부사공파>(직산 백씨)이며, 넷째 아들 산(珊)의 후계에서 12세 백수(白粹)의 후손이 <금릉부원군파>(김천 백씨)이고, 다섯째 아들 황(璜)의 후대에서 17세 백응상(白應祥)의 후손이 <함판공파>, 18세인 백흥남(白興男)의 후손이 <절제공파>다. 그리고 백천장(白天藏)의 여섯째 아들 백거(白琚)의 후손이 중랑장(中郞將) <수의부위공파>(부령 백씨)이니, 백천장의 후손 17개 파(派)를 수원 백씨라 한다. 백천장의 동생인 백지장(白地藏)의 후손은 <동림공파>(임천 백씨)다. 5세인 백행미의 후손은 <시랑공파>(태천 백씨)), 백가미(白可美)의 후손은 <사부공파>(신풍 백씨), 백채(白採)의 손자인 6세 백영신(白英臣)의 후손이 <부여군파>(부여 백씨)다. 중시조 백창직의 둘째 아들 백탁(卓)의 후손은 단계(單係)로 이어져 백문절(白文節)에 이르고, 그 후손이 <문간공파>(남포 백씨)다. 고려 조에 선산, 대흥, 남포, 직산, 청도 등을 본관으로 번성했던 백씨들이 조선 조 들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들어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쇠락한 반면, 조선 창업 무렵 창관한 수원 백씨들은 개국 이래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전체 백씨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인물[편집] 백사수(白思粹) : 1454년 문과, 훈련원정(訓正)을 지냈다. 백인영(白仁英) : 1537년 문과,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백인걸(白仁傑, 1497년 ~ 1579년) :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백유함(白惟咸, 1546년 ~ 1618년) :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명나라의 군량(軍糧)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1594년 동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호군(護軍)으로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만나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의논하였다. 백유양(白惟讓, 1530년 ~ 1589년) : 1572년 문과, 이조참의(吏議)를 지냈다 백광현(白光炫, 1625년 ~ 1697년 ) : 독학으로 침술을 익혔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였으나,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악성종기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였다. 1670년 현종의 종기를 완치하여 어의가 되었고, 효종비 인선왕후, 숙종의 종기를 치료하였으며, 1691년 정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1692년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숙종실록29권에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신의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동수(白東脩, 1743년 ~ 1816년) : 무예가 뛰어나 당대 창검의 일인자로 꼽혔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와 깊이 교유하였는데 이덕무는 "백동수는 딴 세상을 노니는 사람 같았다." 고 평하였다. 당대 제일의 무인이지만, 학문과 서예에도 뛰어난 경지를 보여 박지원, 성대중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 는 평가를 받았다. 백용성(白龍成, 1864년 ~ 1940년) :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여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지원.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백인제(白麟濟, 1898년 ~ ? ) : 1915년 경성의전 입학,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다. 1941년 백외과(현재 백병원)를 개업하였고, 해방후 서울의과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장, 서울의사회 초대회장, 대한외과학회 초대 및 3대회장을 역임했으며, 당시 국내 의술계의 제1인자로 손꼽혔다. 6.25전쟁때 납북되었다. 백남준(白南準, 1932년 ~ 2006년 ) : 한국출신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93),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1999), 미국 아트뉴스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작가(1999), 미국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2006) 백종원(白種元, 1966년 ~ ) : 한국 최고의 요식업 프랜차이즈 사업가.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연구가 중 한 명이다. 과거 급제자[편집] 조선 문과 백효삼(白效參) 백사수(白思粹) 백 훈 (白 勛) 백인영(白仁英) 백인걸(白仁傑) 백유양(白惟讓) 백유함(白惟咸) 백대형(白大珩) 백홍규(白鴻逵) 백시광(白時光) 백홍거(白鴻擧) 백대성(白大成) 백상우(白相右) 백의환(白義煥) 백인환(白仁煥) 백종혁(白宗赫) 백사은(白師殷) 백광택(白光澤) 백사곤(白師坤) 백사근(白師謹) 백경해(白慶楷) 백흥삼(白興三) 백문경(白文璟) 백사곤(白思坤) 백광유(白光濡) 백시원(白時源) 백시형(白時亨) 백동규(白東奎) 백만영(白萬榮) 백문봉(白文鳳) 백종걸(白宗杰) 백윤학(白潤鶴) 백동규(白東奎) 백종전(白宗佺) 백문진(白文振) 백종규(白宗逵) 백시은(白時殷) 백규수(白奎洙) 백봉삼(白鳳三) 백오진(白五珍) 백인행(白仁行) 백의행(白義行) 백시범(白時範) 백성수(白誠洙) 백규연(白奎演) 백낙흥(白樂興) 백영제(白永濟) 백선행(白璿行) 백규섭(白奎燮) 백시현(白是玄) 백취규(白聚奎) 백주범(白周範) 백시순(白時淳) 백진섭(白珍燮) 백면행(白冕行) 백남도(白南道) 백영기(白霙基) 백문행(白文行) 백호섭(白虎燮) 백극행(白克行) 백낙순(白樂舜) 백학구(白鶴九) 백현곤(白顯袞) 백현진(白顯震) 무과 백인현(白仁賢) 등 101명 생원 백사수(白思粹) 등 54명 진사 백인호(白仁豪) 등 57명 집성촌[편집]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강원도 평강군 목전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전라북도 진안군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전라남도 영암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전라남도 장흥군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부포리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황해도 장연군 신화면 평안남도 순천군 후탄면 양포리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금서리 항렬표[편집] 대동항렬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口진(鎭) 口수(洙) 낙(樂) 남(南) 口균(均)口기(基) 口현(鉉)口호(鎬)口흠(欽) 승(承)운(雲) 종(種)인(寅) 口열(烈)口하(夏) 口규(圭)口재(在) 선(善)용(鎔) 순(淳)태(泰) 口식(植)口근(根) 口환(煥)口섭(燮) 수(壽)중(重) 상(商)경(庚) 口윤(潤)口해(海) 口영(榮)口주(柱) 연(然)희(熙) 곤(坤)진(珍) 口은(銀)口석(錫) 주해[편집] ↑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13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조에 '서울에서 온 성[京來姓]이 1이니, 백(白) '이라 했으니 이는 고려 조가 망하고 조선 조가 들어서면서 개경으로부터 새로운 도성인 한양으로 내려온 백씨 일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조"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3"를 보면,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최(崔)·김(金)·이(李)·서(徐)요, 서울에서 온 성[京來姓]이 1이니, 백(白)이요, 촌락성(村落姓)이 1이니, 하(河)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백(白)·최(崔)·이(李)·방(方)이다. <중략> 분촌(盆村)의 토성(土姓)이 1이니, 백(白)이며, 망성(亡姓)이 1이니, 전(田)이다. 내미(內彌)의 토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이 1이니, 백(白)이며, 속성이 1이니, 이(李)이다. <후략> ↑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고,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그 해 수원시가 되었다. 1963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하였다. 1983년 용인군 일부가, 1987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88년 장안구와 권선구가, 1993년 팔달구가 설치되었다. 1994년 화성군 일부, 용인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95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2003년 영통구가 설치되었다. ↑ 환(環)의 손자인 수희(受禧)가 1450년(세종 32) 경오식년시 과지(科紙)에 본관을 직산(稷山)이라 썼다. 각주[편집] ↑ 수원 백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외부 링크[편집] 수원백씨 중앙종친회 수원 백씨 대종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원_백씨&oldid=24354125" 분류: 본관별 성씨백씨수원 백씨경기도 소재 성씨수원시중국계 한국인의 성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21: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선사시대에 '수원'은 무엇이라고 불렸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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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백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원 백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원 백씨(水原 白氏) 수원 백씨의 종문 관향 경기도 수원시 시조 백우경(白宇經) 주요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백천장(白天藏) 주요 인물 백인걸, 백시구, 백남신, 백용성, 백낙원, 백낙삼, 백인기, 백윤화, 백낙준, 백인제, 백남운, 백낙승, 백한성, 백기만, 백두진, 백선엽, 백인엽, 백남준, 백승탁, 백일섭, 백성운, 백성현, 백군기, 백재현, 백원우, 백종원, 백주은, 백지연, 백승주, 백인호, 백하람, 백지현,백인화,백채림, 백승재, 백수현 인구(2015년) 354,428명 수원 백씨(水原 白氏)는 경기도 수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목차 1 역사 1.1 시조 동래설 문제점 2 본관 연혁 3 분파 4 인물 5 과거 급제자 6 집성촌 7 항렬표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사[편집]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으로 중국 소주(蘇州) 출신이다. 당(唐)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아 780년(신라 선덕왕 1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 경주시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 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주 1] 그러나 이후 계대(系代)가 불명하여 신라 경명왕(재위 917년 ∼ 924년)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되었다는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었다.[1] 백창직의 증손 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사적이 없고, 그의 9세손 천장(白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고려 충선왕 때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고 하나 이 역시 사적에 없다. 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이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원 백씨는 개성에서 왔다고 했다.[주 2] 조선 조 이래 백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백효삼(白效參)의 증손인 문신 백인걸(白仁傑)이 있다. 2015년 인구는 354,428명이다. [주 3] 사적(史籍)으로 볼 때 수원을 본관으로 처음 쓴 사람은 백효삼(白效參)이다. 백효삼은 1427년(세종 9) 친시(親試)에서 과지에 본관을 '수원'으로 기재하였다. 백효삼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낸 백회(白薈)의 아들로, 임천 백씨 백경신(白景臣)의 아들 진식(眞植)의 후손인 백천장(白天藏)의 현손이다. 조선조에 효삼의 후손들이 잇달아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는 백씨 일족 중에서도 대관(大貫)이 되어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시조 동래설 문제점[편집] 시조 백우경의 동래설은 당나라 덕종년간인 서기780년에 소주에서 통일신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고 서기 1669년 경주부사 민주면이 간행한 동경잡기에 실린 기록인데 그 출처는 서기 1637년 간행된 대흥백씨 정축구보의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서 보다 명확한 고증이 될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진필명(秦弼明)은 한반도 진씨의 시조인데 서기 624년에 출생,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의 증손자 진자윤(秦自潤)의 처가 바로 백씨로서 진씨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대략 710년~720년에 출생한 사람이라 시조 백우경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나이가 많으니 시조의 동래설은 의심되는 바이며,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의 5세손 이입전(李立全)의 배위는 한림학사 백광선(白光善)의 여식이라고 선원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장인인 백씨는 대략 730~740년대 사람이지만 지금의 백씨족보에는 나오지 않는다. 본관 연혁[편집] 수원은 선사 시대에 '모수국'으로 불렸다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買忽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水州)로 승격하여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파하고, 1018년(현종 9)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1271년(원종 12)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그 뒤에 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군(郡)으로 강등시켰는데, 후에 다시 부(府)로 되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조선태조 3)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수원'(水原)으로 개명되어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때 묵는 화성 행궁이 건립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에 두어 상업이 발전하였으며,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순조 원년) 정조가 사망한 후 수원에 대해 베풀던 특권이 폐지되면서 쇠퇴하였다.[주 4] 분파[편집] 백씨는 중시조 백창직의 후대에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 파로 갈라졌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 927?)에게 길(吉)과 탁(卓),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백길(白吉)의 후손이 28개 파(派)를 이루고 백탁(白卓)의 후손은 문간공파 뿐이다. 백길의 후계 중 5세 백간미(白簡美)의 후손들이 25개 파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1세 백인관(白仁寬)의 후손이 장파인 <선정공파>(선산 백씨)다. 12세 백역(白繹)의 후손이 <인주공파>(정주 백씨)이고, 13세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이 <오산군파>(청도 백씨)이다. 13세 백유(白維)의 후손이 <장단공파>이며, 10세 백문보(白文寶)의 후손이 <담암공파>(대흥 백씨)이다. 백간미(白簡美)의 셋째 아들인 6세 백무신(白武臣)의 후손이 <양곡공파>, 넷째 아들인 백가신(白可臣)의 후손이 <태사공파>(홍주 백씨)이다. 다섯째 아들 경신(景臣) 후손 원정(白元貞) 계통 9세인 백천장(白天藏)은 백간미(白簡美)의 다섯째 아들인 경신(景臣)의 후계로, 아들 여섯을 두어 그 후손들은 모두 17개 파(派)로 분파하였다. 백천장의 아들 련(璉)의 장손으로 12세 백장(白莊)이 장흥으로 낙향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정신재공파>(장흥 또는 해미 백씨)이다. 해미 백씨에서 태인 백씨가 분적하여 의주로 이거하였다. 려말선초에 개성에 살던 일족들 중 백장의 동생 백회(白薈(繪))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내고 남하하여 장남인 13세 백효삼의 자손들이 수원을 본관으로 삼고 파주와 양주 등지에 자리잡았다. 14세 백사순(白思純)의 후손이 <좌랑공파>, 16세 백인현(白仁賢)의 후손이 <훈정공파>, 백인영(白仁英)의 후손이 <도승지공파>, 백인웅(白仁雄)의 후손이 <참봉공파>, 백인호(白仁豪)의 후손이 <별좌공파>,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 <문경공파>다. 백효삼의 동생들로, 백효옹(白效雍)의 후손이 <청산공파>, 백효연(白效淵)의 후손이 <산음공파>, 백효약(白效若)의 후손이 <임피공파>다. 백회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중후기에는 백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었다. 백천장의 둘째 아들 전(琠)의 아들 11세 백인석(白仁碩)의 후손이 <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이고, 셋째 아들 환(環)의 후계에서 13세 백운실(白雲實)의 후손이 <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 12세 백수희(白受禧)[주 5]의 후손이 <부사공파>(직산 백씨)이며, 넷째 아들 산(珊)의 후계에서 12세 백수(白粹)의 후손이 <금릉부원군파>(김천 백씨)이고, 다섯째 아들 황(璜)의 후대에서 17세 백응상(白應祥)의 후손이 <함판공파>, 18세인 백흥남(白興男)의 후손이 <절제공파>다. 그리고 백천장(白天藏)의 여섯째 아들 백거(白琚)의 후손이 중랑장(中郞將) <수의부위공파>(부령 백씨)이니, 백천장의 후손 17개 파(派)를 수원 백씨라 한다. 백천장의 동생인 백지장(白地藏)의 후손은 <동림공파>(임천 백씨)다. 5세인 백행미의 후손은 <시랑공파>(태천 백씨)), 백가미(白可美)의 후손은 <사부공파>(신풍 백씨), 백채(白採)의 손자인 6세 백영신(白英臣)의 후손이 <부여군파>(부여 백씨)다. 중시조 백창직의 둘째 아들 백탁(卓)의 후손은 단계(單係)로 이어져 백문절(白文節)에 이르고, 그 후손이 <문간공파>(남포 백씨)다. 고려 조에 선산, 대흥, 남포, 직산, 청도 등을 본관으로 번성했던 백씨들이 조선 조 들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들어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쇠락한 반면, 조선 창업 무렵 창관한 수원 백씨들은 개국 이래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전체 백씨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인물[편집] 백사수(白思粹) : 1454년 문과, 훈련원정(訓正)을 지냈다. 백인영(白仁英) : 1537년 문과,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백인걸(白仁傑, 1497년 ~ 1579년) :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백유함(白惟咸, 1546년 ~ 1618년) :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명나라의 군량(軍糧)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1594년 동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호군(護軍)으로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만나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의논하였다. 백유양(白惟讓, 1530년 ~ 1589년) : 1572년 문과, 이조참의(吏議)를 지냈다 백광현(白光炫, 1625년 ~ 1697년 ) : 독학으로 침술을 익혔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였으나,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악성종기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였다. 1670년 현종의 종기를 완치하여 어의가 되었고, 효종비 인선왕후, 숙종의 종기를 치료하였으며, 1691년 정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1692년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숙종실록29권에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신의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동수(白東脩, 1743년 ~ 1816년) : 무예가 뛰어나 당대 창검의 일인자로 꼽혔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와 깊이 교유하였는데 이덕무는 "백동수는 딴 세상을 노니는 사람 같았다." 고 평하였다. 당대 제일의 무인이지만, 학문과 서예에도 뛰어난 경지를 보여 박지원, 성대중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 는 평가를 받았다. 백용성(白龍成, 1864년 ~ 1940년) :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여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지원.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백인제(白麟濟, 1898년 ~ ? ) : 1915년 경성의전 입학,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다. 1941년 백외과(현재 백병원)를 개업하였고, 해방후 서울의과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장, 서울의사회 초대회장, 대한외과학회 초대 및 3대회장을 역임했으며, 당시 국내 의술계의 제1인자로 손꼽혔다. 6.25전쟁때 납북되었다. 백남준(白南準, 1932년 ~ 2006년 ) : 한국출신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93),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1999), 미국 아트뉴스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작가(1999), 미국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2006) 백종원(白種元, 1966년 ~ ) : 한국 최고의 요식업 프랜차이즈 사업가.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연구가 중 한 명이다. 과거 급제자[편집] 조선 문과 백효삼(白效參) 백사수(白思粹) 백 훈 (白 勛) 백인영(白仁英) 백인걸(白仁傑) 백유양(白惟讓) 백유함(白惟咸) 백대형(白大珩) 백홍규(白鴻逵) 백시광(白時光) 백홍거(白鴻擧) 백대성(白大成) 백상우(白相右) 백의환(白義煥) 백인환(白仁煥) 백종혁(白宗赫) 백사은(白師殷) 백광택(白光澤) 백사곤(白師坤) 백사근(白師謹) 백경해(白慶楷) 백흥삼(白興三) 백문경(白文璟) 백사곤(白思坤) 백광유(白光濡) 백시원(白時源) 백시형(白時亨) 백동규(白東奎) 백만영(白萬榮) 백문봉(白文鳳) 백종걸(白宗杰) 백윤학(白潤鶴) 백동규(白東奎) 백종전(白宗佺) 백문진(白文振) 백종규(白宗逵) 백시은(白時殷) 백규수(白奎洙) 백봉삼(白鳳三) 백오진(白五珍) 백인행(白仁行) 백의행(白義行) 백시범(白時範) 백성수(白誠洙) 백규연(白奎演) 백낙흥(白樂興) 백영제(白永濟) 백선행(白璿行) 백규섭(白奎燮) 백시현(白是玄) 백취규(白聚奎) 백주범(白周範) 백시순(白時淳) 백진섭(白珍燮) 백면행(白冕行) 백남도(白南道) 백영기(白霙基) 백문행(白文行) 백호섭(白虎燮) 백극행(白克行) 백낙순(白樂舜) 백학구(白鶴九) 백현곤(白顯袞) 백현진(白顯震) 무과 백인현(白仁賢) 등 101명 생원 백사수(白思粹) 등 54명 진사 백인호(白仁豪) 등 57명 집성촌[편집]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강원도 평강군 목전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전라북도 진안군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전라남도 영암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전라남도 장흥군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부포리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황해도 장연군 신화면 평안남도 순천군 후탄면 양포리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금서리 항렬표[편집] 대동항렬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口진(鎭) 口수(洙) 낙(樂) 남(南) 口균(均)口기(基) 口현(鉉)口호(鎬)口흠(欽) 승(承)운(雲) 종(種)인(寅) 口열(烈)口하(夏) 口규(圭)口재(在) 선(善)용(鎔) 순(淳)태(泰) 口식(植)口근(根) 口환(煥)口섭(燮) 수(壽)중(重) 상(商)경(庚) 口윤(潤)口해(海) 口영(榮)口주(柱) 연(然)희(熙) 곤(坤)진(珍) 口은(銀)口석(錫) 주해[편집] ↑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13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조에 '서울에서 온 성[京來姓]이 1이니, 백(白) '이라 했으니 이는 고려 조가 망하고 조선 조가 들어서면서 개경으로부터 새로운 도성인 한양으로 내려온 백씨 일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조"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3"를 보면,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최(崔)·김(金)·이(李)·서(徐)요, 서울에서 온 성[京來姓]이 1이니, 백(白)이요, 촌락성(村落姓)이 1이니, 하(河)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백(白)·최(崔)·이(李)·방(方)이다. <중략> 분촌(盆村)의 토성(土姓)이 1이니, 백(白)이며, 망성(亡姓)이 1이니, 전(田)이다. 내미(內彌)의 토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이 1이니, 백(白)이며, 속성이 1이니, 이(李)이다. <후략> ↑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고,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그 해 수원시가 되었다. 1963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하였다. 1983년 용인군 일부가, 1987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88년 장안구와 권선구가, 1993년 팔달구가 설치되었다. 1994년 화성군 일부, 용인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95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2003년 영통구가 설치되었다. ↑ 환(環)의 손자인 수희(受禧)가 1450년(세종 32) 경오식년시 과지(科紙)에 본관을 직산(稷山)이라 썼다. 각주[편집] ↑ 수원 백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외부 링크[편집] 수원백씨 중앙종친회 수원 백씨 대종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원_백씨&oldid=24354125" 분류: 본관별 성씨백씨수원 백씨경기도 소재 성씨수원시중국계 한국인의 성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21: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경기도에 있는 수원 백씨의 집성촌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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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백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원 백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원 백씨(水原 白氏) 수원 백씨의 종문 관향 경기도 수원시 시조 백우경(白宇經) 주요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백천장(白天藏) 주요 인물 백인걸, 백시구, 백남신, 백용성, 백낙원, 백낙삼, 백인기, 백윤화, 백낙준, 백인제, 백남운, 백낙승, 백한성, 백기만, 백두진, 백선엽, 백인엽, 백남준, 백승탁, 백일섭, 백성운, 백성현, 백군기, 백재현, 백원우, 백종원, 백주은, 백지연, 백승주, 백인호, 백하람, 백지현,백인화,백채림, 백승재, 백수현 인구(2015년) 354,428명 수원 백씨(水原 白氏)는 경기도 수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목차 1 역사 1.1 시조 동래설 문제점 2 본관 연혁 3 분파 4 인물 5 과거 급제자 6 집성촌 7 항렬표 8 주해 9 각주 10 외부 링크 역사[편집]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으로 중국 소주(蘇州) 출신이다. 당(唐)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아 780년(신라 선덕왕 1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 경주시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 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주 1] 그러나 이후 계대(系代)가 불명하여 신라 경명왕(재위 917년 ∼ 924년)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되었다는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었다.[1] 백창직의 증손 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사적이 없고, 그의 9세손 천장(白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고려 충선왕 때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고 하나 이 역시 사적에 없다. 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이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원 백씨는 개성에서 왔다고 했다.[주 2] 조선 조 이래 백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백효삼(白效參)의 증손인 문신 백인걸(白仁傑)이 있다. 2015년 인구는 354,428명이다. [주 3] 사적(史籍)으로 볼 때 수원을 본관으로 처음 쓴 사람은 백효삼(白效參)이다. 백효삼은 1427년(세종 9) 친시(親試)에서 과지에 본관을 '수원'으로 기재하였다. 백효삼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낸 백회(白薈)의 아들로, 임천 백씨 백경신(白景臣)의 아들 진식(眞植)의 후손인 백천장(白天藏)의 현손이다. 조선조에 효삼의 후손들이 잇달아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는 백씨 일족 중에서도 대관(大貫)이 되어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시조 동래설 문제점[편집] 시조 백우경의 동래설은 당나라 덕종년간인 서기780년에 소주에서 통일신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고 서기 1669년 경주부사 민주면이 간행한 동경잡기에 실린 기록인데 그 출처는 서기 1637년 간행된 대흥백씨 정축구보의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서 보다 명확한 고증이 될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진필명(秦弼明)은 한반도 진씨의 시조인데 서기 624년에 출생,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의 증손자 진자윤(秦自潤)의 처가 바로 백씨로서 진씨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대략 710년~720년에 출생한 사람이라 시조 백우경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나이가 많으니 시조의 동래설은 의심되는 바이며,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의 5세손 이입전(李立全)의 배위는 한림학사 백광선(白光善)의 여식이라고 선원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장인인 백씨는 대략 730~740년대 사람이지만 지금의 백씨족보에는 나오지 않는다. 본관 연혁[편집] 수원은 선사 시대에 '모수국'으로 불렸다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買忽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水州)로 승격하여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파하고, 1018년(현종 9)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1271년(원종 12)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그 뒤에 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군(郡)으로 강등시켰는데, 후에 다시 부(府)로 되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조선태조 3)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수원'(水原)으로 개명되어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때 묵는 화성 행궁이 건립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에 두어 상업이 발전하였으며,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순조 원년) 정조가 사망한 후 수원에 대해 베풀던 특권이 폐지되면서 쇠퇴하였다.[주 4] 분파[편집] 백씨는 중시조 백창직의 후대에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 파로 갈라졌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 927?)에게 길(吉)과 탁(卓),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백길(白吉)의 후손이 28개 파(派)를 이루고 백탁(白卓)의 후손은 문간공파 뿐이다. 백길의 후계 중 5세 백간미(白簡美)의 후손들이 25개 파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1세 백인관(白仁寬)의 후손이 장파인 <선정공파>(선산 백씨)다. 12세 백역(白繹)의 후손이 <인주공파>(정주 백씨)이고, 13세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이 <오산군파>(청도 백씨)이다. 13세 백유(白維)의 후손이 <장단공파>이며, 10세 백문보(白文寶)의 후손이 <담암공파>(대흥 백씨)이다. 백간미(白簡美)의 셋째 아들인 6세 백무신(白武臣)의 후손이 <양곡공파>, 넷째 아들인 백가신(白可臣)의 후손이 <태사공파>(홍주 백씨)이다. 다섯째 아들 경신(景臣) 후손 원정(白元貞) 계통 9세인 백천장(白天藏)은 백간미(白簡美)의 다섯째 아들인 경신(景臣)의 후계로, 아들 여섯을 두어 그 후손들은 모두 17개 파(派)로 분파하였다. 백천장의 아들 련(璉)의 장손으로 12세 백장(白莊)이 장흥으로 낙향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정신재공파>(장흥 또는 해미 백씨)이다. 해미 백씨에서 태인 백씨가 분적하여 의주로 이거하였다. 려말선초에 개성에 살던 일족들 중 백장의 동생 백회(白薈(繪))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내고 남하하여 장남인 13세 백효삼의 자손들이 수원을 본관으로 삼고 파주와 양주 등지에 자리잡았다. 14세 백사순(白思純)의 후손이 <좌랑공파>, 16세 백인현(白仁賢)의 후손이 <훈정공파>, 백인영(白仁英)의 후손이 <도승지공파>, 백인웅(白仁雄)의 후손이 <참봉공파>, 백인호(白仁豪)의 후손이 <별좌공파>,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 <문경공파>다. 백효삼의 동생들로, 백효옹(白效雍)의 후손이 <청산공파>, 백효연(白效淵)의 후손이 <산음공파>, 백효약(白效若)의 후손이 <임피공파>다. 백회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중후기에는 백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었다. 백천장의 둘째 아들 전(琠)의 아들 11세 백인석(白仁碩)의 후손이 <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이고, 셋째 아들 환(環)의 후계에서 13세 백운실(白雲實)의 후손이 <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 12세 백수희(白受禧)[주 5]의 후손이 <부사공파>(직산 백씨)이며, 넷째 아들 산(珊)의 후계에서 12세 백수(白粹)의 후손이 <금릉부원군파>(김천 백씨)이고, 다섯째 아들 황(璜)의 후대에서 17세 백응상(白應祥)의 후손이 <함판공파>, 18세인 백흥남(白興男)의 후손이 <절제공파>다. 그리고 백천장(白天藏)의 여섯째 아들 백거(白琚)의 후손이 중랑장(中郞將) <수의부위공파>(부령 백씨)이니, 백천장의 후손 17개 파(派)를 수원 백씨라 한다. 백천장의 동생인 백지장(白地藏)의 후손은 <동림공파>(임천 백씨)다. 5세인 백행미의 후손은 <시랑공파>(태천 백씨)), 백가미(白可美)의 후손은 <사부공파>(신풍 백씨), 백채(白採)의 손자인 6세 백영신(白英臣)의 후손이 <부여군파>(부여 백씨)다. 중시조 백창직의 둘째 아들 백탁(卓)의 후손은 단계(單係)로 이어져 백문절(白文節)에 이르고, 그 후손이 <문간공파>(남포 백씨)다. 고려 조에 선산, 대흥, 남포, 직산, 청도 등을 본관으로 번성했던 백씨들이 조선 조 들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들어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쇠락한 반면, 조선 창업 무렵 창관한 수원 백씨들은 개국 이래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전체 백씨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인물[편집] 백사수(白思粹) : 1454년 문과, 훈련원정(訓正)을 지냈다. 백인영(白仁英) : 1537년 문과,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백인걸(白仁傑, 1497년 ~ 1579년) :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백유함(白惟咸, 1546년 ~ 1618년) :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명나라의 군량(軍糧)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1594년 동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호군(護軍)으로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만나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의논하였다. 백유양(白惟讓, 1530년 ~ 1589년) : 1572년 문과, 이조참의(吏議)를 지냈다 백광현(白光炫, 1625년 ~ 1697년 ) : 독학으로 침술을 익혔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였으나,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악성종기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였다. 1670년 현종의 종기를 완치하여 어의가 되었고, 효종비 인선왕후, 숙종의 종기를 치료하였으며, 1691년 정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1692년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숙종실록29권에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신의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동수(白東脩, 1743년 ~ 1816년) : 무예가 뛰어나 당대 창검의 일인자로 꼽혔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와 깊이 교유하였는데 이덕무는 "백동수는 딴 세상을 노니는 사람 같았다." 고 평하였다. 당대 제일의 무인이지만, 학문과 서예에도 뛰어난 경지를 보여 박지원, 성대중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 는 평가를 받았다. 백용성(白龍成, 1864년 ~ 1940년) :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여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지원.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백인제(白麟濟, 1898년 ~ ? ) : 1915년 경성의전 입학,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다. 1941년 백외과(현재 백병원)를 개업하였고, 해방후 서울의과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장, 서울의사회 초대회장, 대한외과학회 초대 및 3대회장을 역임했으며, 당시 국내 의술계의 제1인자로 손꼽혔다. 6.25전쟁때 납북되었다. 백남준(白南準, 1932년 ~ 2006년 ) : 한국출신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93),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1999), 미국 아트뉴스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작가(1999), 미국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2006) 백종원(白種元, 1966년 ~ ) : 한국 최고의 요식업 프랜차이즈 사업가.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연구가 중 한 명이다. 과거 급제자[편집] 조선 문과 백효삼(白效參) 백사수(白思粹) 백 훈 (白 勛) 백인영(白仁英) 백인걸(白仁傑) 백유양(白惟讓) 백유함(白惟咸) 백대형(白大珩) 백홍규(白鴻逵) 백시광(白時光) 백홍거(白鴻擧) 백대성(白大成) 백상우(白相右) 백의환(白義煥) 백인환(白仁煥) 백종혁(白宗赫) 백사은(白師殷) 백광택(白光澤) 백사곤(白師坤) 백사근(白師謹) 백경해(白慶楷) 백흥삼(白興三) 백문경(白文璟) 백사곤(白思坤) 백광유(白光濡) 백시원(白時源) 백시형(白時亨) 백동규(白東奎) 백만영(白萬榮) 백문봉(白文鳳) 백종걸(白宗杰) 백윤학(白潤鶴) 백동규(白東奎) 백종전(白宗佺) 백문진(白文振) 백종규(白宗逵) 백시은(白時殷) 백규수(白奎洙) 백봉삼(白鳳三) 백오진(白五珍) 백인행(白仁行) 백의행(白義行) 백시범(白時範) 백성수(白誠洙) 백규연(白奎演) 백낙흥(白樂興) 백영제(白永濟) 백선행(白璿行) 백규섭(白奎燮) 백시현(白是玄) 백취규(白聚奎) 백주범(白周範) 백시순(白時淳) 백진섭(白珍燮) 백면행(白冕行) 백남도(白南道) 백영기(白霙基) 백문행(白文行) 백호섭(白虎燮) 백극행(白克行) 백낙순(白樂舜) 백학구(白鶴九) 백현곤(白顯袞) 백현진(白顯震) 무과 백인현(白仁賢) 등 101명 생원 백사수(白思粹) 등 54명 진사 백인호(白仁豪) 등 57명 집성촌[편집]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강원도 평강군 목전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전라북도 진안군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전라남도 영암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전라남도 장흥군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부포리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황해도 장연군 신화면 평안남도 순천군 후탄면 양포리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금서리 항렬표[편집] 대동항렬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口진(鎭) 口수(洙) 낙(樂) 남(南) 口균(均)口기(基) 口현(鉉)口호(鎬)口흠(欽) 승(承)운(雲) 종(種)인(寅) 口열(烈)口하(夏) 口규(圭)口재(在) 선(善)용(鎔) 순(淳)태(泰) 口식(植)口근(根) 口환(煥)口섭(燮) 수(壽)중(重) 상(商)경(庚) 口윤(潤)口해(海) 口영(榮)口주(柱) 연(然)희(熙) 곤(坤)진(珍) 口은(銀)口석(錫) 주해[편집] ↑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13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조에 '서울에서 온 성[京來姓]이 1이니, 백(白) '이라 했으니 이는 고려 조가 망하고 조선 조가 들어서면서 개경으로부터 새로운 도성인 한양으로 내려온 백씨 일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조"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3"를 보면,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최(崔)·김(金)·이(李)·서(徐)요, 서울에서 온 성[京來姓]이 1이니, 백(白)이요, 촌락성(村落姓)이 1이니, 하(河)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백(白)·최(崔)·이(李)·방(方)이다. <중략> 분촌(盆村)의 토성(土姓)이 1이니, 백(白)이며, 망성(亡姓)이 1이니, 전(田)이다. 내미(內彌)의 토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이 1이니, 백(白)이며, 속성이 1이니, 이(李)이다. <후략> ↑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고,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그 해 수원시가 되었다. 1963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하였다. 1983년 용인군 일부가, 1987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88년 장안구와 권선구가, 1993년 팔달구가 설치되었다. 1994년 화성군 일부, 용인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995년 화성군 일부가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2003년 영통구가 설치되었다. ↑ 환(環)의 손자인 수희(受禧)가 1450년(세종 32) 경오식년시 과지(科紙)에 본관을 직산(稷山)이라 썼다. 각주[편집] ↑ 수원 백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외부 링크[편집] 수원백씨 중앙종친회 수원 백씨 대종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수원_백씨&oldid=24354125" 분류: 본관별 성씨백씨수원 백씨경기도 소재 성씨수원시중국계 한국인의 성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21: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동항렬 28세의 돌림자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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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공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민연금공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국민연금공단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국민연금공단(國民年金公團, National Pension Service, NPS)은 국민연금을 운영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한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이다. 약자로는 NPS로 표기한다. 정부로부터 기금 관리를 위탁받은 공기업이기 때문에,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으로 분류된다.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기지로 180에 위치하고 있다. 목차 1 설립 취지 2 규모 3 자산운용 4 연혁 5 조직 5.1 이사장 5.1.1 기획이사 5.1.2 연금이사 5.1.3 복지이사 5.1.4 기금이사 6 소속기관 7 논란 8 각주 9 외부 링크 설립 취지[편집] 1987년 10월 19일 국민연금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나이가 들어 생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되거나 불의의 사고로 사망 또는 장애를 입었을 경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연금을 지급하고, 아울러 각종 복지사업을 실시함으로써 국민복지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규모[편집] 설립 당시 본부 6부 15과 14개 지부에 총인원 656명 규모였던 것이, 국민연금 적용 대상의 확대와 특례노령연금 지급, 농어촌지역 국민연금 확대 실시 등으로 업무량이 대폭 증가하고 전문화됨에 따라 인력과 조직이 대폭 확충되었다. 2014년 현재 직원 수는 5,000명 가량이다. 2013년에는 기금 규모가 400조를 돌파하여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올라섰다.[1] 2015년에는 5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2] 자산운용[편집] 국민연금공단이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것은 국채이며, 주식 투자도 하고 있다. 2012년 말의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국내 채권 비중이 60% 가량으로 가장 높고 대한민국 내 주식 19%, 해외 주식 8%, 해외 채권 5% 가량으로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다.[3] 2016년 자료는, 국내 채권 비중이 52%, 국내주식 19%, 해외주식 14%, 해외 채권 4%가량으로 이루어 지고있다. 총 94개의 대한민국 내 기업에 5%이상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이 단 한 주라도 보유하고 있는 종목은 600여개로 전체 상장 종목의 30%에 이른다. 대부분 블루칩, 즉 대형주・우량주 위주로 투자하므로 투자금은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다.[4] 지분 10% 이상을 넘기면 매매시 공시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전략 노출을 피하기 위해 지분율을 10% 이하로 맞추어 왔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종목은 안정적이라는 인식이 있어, 투자에 활용되기도 한다.[5] 그러나 국민연금의 투자 수익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2013년 국민연금 운용수익률은 4.16% 였고, 2012년은 6.99%였다. 이는 세계 6대 연기금 중에서 꼴찌로, 규모 면에서는 성장했지만 자산 운용 면에서는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6][7] 국민연금은 2009년 1사분기 동안 348개의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했고, 이 중 하나의 안건이라도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주주총회는 총 84건으로 그 비율은 무려 24.1%이다. 하지만 안건별로 보면 총 2,417개의 안건 중 111개 안건에 대해서만 반대함으로써 4.59%의 반대비율을 기록하였다. 기권도 반대의 효과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실질적인 반대비율은 6.33%에 이른다. 국민연금이 하나의 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주주총회는 총 63건이고, 2개 이상의 안건에 대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주주총회는 21개이다.[8] 연혁[편집] 1986년 12월 31일 - 국민연금법 공포 1987년 9월 18일 - 국민연금관리공단 설립 1988년 1월 1일 - 국민연금제도 실시 1992년 1월 1일 - 당연적용 사업장 확대(5인이상 사업장) 1993년 1월 1일 - 특례노령연금 지급 개시 1995년 4월 1일 - 국민연금연구센터 설치 1995년 7월 1일 - 농어촌지역 주민 확대 적용 1995년 8월 4일 - 사업장 종사 외국인 당연 적용 1999년 1월 1일 - 조기노령연금 지급 개시 1999년 4월 1일 - 대한민국 전지역 확대 적용 1999년 11월 5일 - 기금운용본부 설치 2000년 7월 1일 - 농어촌지역 특례노령연금 지급 개시 2001년 11월 13일 – 텔레서비스시스템 전국 확대 운영 2002년 11월 4일 - 4대사회보험 정보연계 서비스 시행 2003년 1월 1일 - 감액노령연금 및 재직자노령연금 지급 개시 2003년 7월 1일 - 당연적용 사업장 확대 적용(1단계) 2004년 4월 1일 - 도시지역 특례노령연금 지급 개시 2004년 7월 1일 - 당연적용 사업장 확대 적용(2단계) 2006년 1월 1일 - 당연적용 사업장 확대적용(3단계) 2006년 9월 18일 - 국민연금 新 CI 발표 2007년 7월 23일 - "국민연금공단"으로 명칭 변경[9] 2008년 1월 1일 - 완전노령연금 지급 개시 2009년 5월 1일 - 노후설계서비스(CSA) 사업 시행 2009년 5월 14일 - 국제업무센터 설립 및 개설 2009년 8월 7일 - 국민연금과 4개 직역연금 가입기간 연계사업시행 2011년 1월 1일 - 사회보험 징수통합에 따른 징수업무 이관 2011년 4월 1일 - 장애인복지법 상 장애 전(全)등급 심사 개시 2011년 10월 5일 - 장애인 활동지원 사업 시행 2012년 12월 1일 - 기초수급자 근로능력평가 사업 수행 2014년 7월 1일 - 기초연금 사업 수행 2015년 7월 23일 - 국민연금공단 서울 송파구 신천동 사옥에서 전북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신사옥으로 이전 2015년 12월 23일 - 전 국민 대상 노후준비서비스 시행 조직[편집] 감사 감사실 이사장[편집] 비서실 정보화본부 정보전략실 준법감시인 기획이사[편집] 기획조정실 국제협력센터 인사혁신실 총무지원실 국민소통실 연금이사[편집] 고객지원실 가입지원실 연금급여실 4대보험정보연계센터 복지이사[편집] 중앙노후준비지원센터 노후준비지원실 지역노후준비지원센터 장애심사센터 기초연금실 복지사업단 기금이사[편집] 기금운용본부 소속기관[편집] 국민연금연구원 지역본부 (7개소) 지사 (109개소) 지역노후준비지원센터 (109개소) 논란[편집] 대한민국의 국민연금은 운용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기금의 쓰임새가 대기업에 대한 투자에 집중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국민연금이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대상은 국채인데 정부가 국채를 찍어내면 그것을 국민연금이 덥석 사가는 식이라 국민이 낸 연금을 정부가 쌈지돈처럼 쓴다는 논란도 거세다. 국민연금의 국채 투자는 전체의 무려 60%에 달한다. 안이한 운용에 따른 저조한 수익률과 기금 고갈의 우려 역시 국민연금이 당면하고 있는 비판들이다.[4] 각주[편집] ↑ 국민연금 기금 400조 돌파, 세계 3대연기금 점프, 머니투데이 Feb 26, 2013 ↑ 국민연금 운용본부 독립문제 수면위로, 매일경제 May 20, 2014 ↑ 국민연금 기금 400조 돌파, 세계 3대연기금 점프, 머니투데이 2013-02-26 ↑ 가 나 두 얼굴의 국민연금 연금인가 세금인가, 매일경제 LUXMEN 2013.04.29 ↑ 국민연금, 지분율 10% 이상 매수 후보는? 머니투데이 2013.07.15 ↑ 지난해 국민연금 운용수익률 4.16%, 연합뉴스 Jun 13, 2014 ↑ 국민연금 수익률, 세계 6대 연기금중 '꼴찌'(종합), 뉴스1, Jun 14, 2013 ↑ 김우찬.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 실태와 그 개선방향”. 《기업지배구조 리뷰 2009.7.~8.》 45. 2014년 2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9월 23일에 확인함. ↑ “기록물 생산기관 변천정보 > 기관연혁 상세정보”. 2018년 4월 1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국민연금공단 - 공식 웹사이트 vdeh 대한민국의 준정부기관 (기금관리형)금융위원회 산하 신용보증기금 예금보험공사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인사혁신처 산하 공무원연금공단 교육부 산하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민체육진흥공단 영화진흥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언론진흥재단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무역보험공사 한국원자력환경공단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공단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기술보증기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시장형 공기업 준시장형 공기업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 기타공공기관 vdeh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기재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안부 문체부 농식품부 산업부 복지부 환경부 고용부 여가부 국토부 해수부 중기부 본부 소속 장관 차관 국립소록도병원 오송생명과학단지지원센터 국립망향의동산관리원 건강보험분쟁조정위원회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 소속 위원회 목록) 질병관리본부 본부장 국립보건연구원 국립검역소 국립인천공항검역소 김포지소 국립부산검역소 신항지소 국립인천검역소 평택지소 국립군산검역소 대산지소 국립울산검역소 국립포항검역소 대구국제공항지소 국립동해검역소 속초지소 고성지소 국립목포검역소 무안국제공항지소 국립여수검역소 광양지소 국립마산검역소 국립김해검역소 국립통영검역소 거제지소 국립제주검역소 제주국제공항지소 국립정신병원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연구소 국립나주병원 국립부곡병원 약물중독진료소 국립춘천병원 국립공주병원 국립결핵병원 국립마산병원 국립목포병원 산하 공공기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립암센터 국립중앙의료원 국민건강보험공단 국민연금공단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대한적십자사 사회보장정보원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의료기관평가인증원 한국건강증진개발원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한국노인인력개발원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한국보육진흥원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한국장기조직기증원 한국장애인개발원 한약진흥재단 한일병원 소관기관 중앙입양원 대한조산협회 대한치과위생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한약사회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어린이집안전공제회 한국사회복지공제회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한국언어재활사협회 한국효문화진흥원 (소관 사단법인 소관 재단법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국민연금공단&oldid=22276680" 분류: 대한민국의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1987년 설립공공기관 (보건복지부 소관)전라북도의 기업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14: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국민연금공단의 최대 투자 대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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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지평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잃어버린 지평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저자 제임스 힐튼국가 영국언어 영어 발행일 1933년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은 1933년 발행된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이다. 샹그릴라(Shangri-La)의 원전(origin)으로 유명하다. 소설 속에서 샹그릴라는 티베트의 산맥속에 있는 라마교 사원 공동체로 신비스런 가공의 유토피아로 그려졌다. 목차 1 개요 2 요약 3 영향 4 영화 5 같이 보기 6 참조 7 외부 링크 개요[편집] 주인공 휴 콘웨이(Hugh Conway)는 영국의 베테랑 외교관의 신분으로 인간의 나이라고는 잊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내적인 평화와 사랑과 샹그릴라의 목적 그 자체를 발견한다. 책 속에는 당시의 정세를 서술하는 가운데 또다른 파국적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전조를 암시하고 있는 바, 이것은 그대로 현실화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지의 탐험가인 생물학자 조셉 록(Joseph Rock)이 쓴 티베트 국경지방 여행기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책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록이 방문한 마을들은 저자가 묘사한 샹그릴라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그 중 한 곳인 중띠엔(Zhongdian)은 (바로 그 때문에) 공식적으로 샹그릴라로 명칭이 바뀌었다. 요약[편집] 11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진 본문, 그리고 이것의 경위를 설명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나레이터는 주인공의 친구이자 소설가인 러더포드(Rutherford)가 맡았다. Cigars had burned low, and we were beginning to ~ 로 시작하는 첫 장면, 러더포드가 베를린의 템플호프(Tempelhof)에서 오랜만에 옛친구들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다. 이런 저런 이야기 도중에 대학시절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콘웨이(Conway)가 잠깐 화제가 되었다. 모임이 끝난 후, 밤이 깊었을 때, 러더포드는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알려진 콘웨이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다른 친구에게 말해 준다. 콘웨이는 1931년 5월 인도의 바스쿨(Baskul)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현지 영사(consul)로서 자국민들을 파키스탄 Peshawar로 피난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일을 마무리하고 그 자신도 다른 일행과 비행기에 올랐지만 그들이 탄 비행기가 엉뚱한 조종사에 의해 계획과는 전혀 다른 목적지를 향하여 날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납치극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착륙도중에 조종사가 죽음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게 되었지만, 히말라야를 넘어 어딘가의 장소에서 꼼짝없이 조난당하게 된 그들 앞에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우두머리인 장(Chang)이라는 사람은 놀랍게도 영어와 영국식 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이로써 그와 다른 3명의 일행은 외부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샹그릴라라고 하는 신천지에 초대되었다. 이하 생략. 영향[편집] 1933년에 출간된 이 책은 1934년 (동일한 저자의 책인) 《굿바이 미스터 칩스》가 출판된 직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아가 페이퍼백 형식으로 출간된 포켓 북(Pocket Book) 시리즈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미국 대통령은 메릴랜드주(Maryland)에 있는 대통령 휴양지를 샹그릴라로 명명할 정도였다. 훗날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샹그릴라라는 이름은 무릉도원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보통명사가 되었으며 호텔의 상호에 쓰인 예도 있다(샹그릴라 호텔). 영화[편집] 제인 와이어트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Lost Horizon (1937년), 프랑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 콜롬비아 영화사, 주연은 로널드 콜만(Ronald Colman), 제인 와이어트(Jane Wyatt). 여주인공인 제인 와이어트(Jane Wyatt)의 가장 성공적인 출연작으로 꼽힌다. 그녀는 배우 그레고리 팩과 함께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에 출연하였고, 《스타 트렉》을 비롯 티비 시리즈물에 나오는 등 다양한 배우활동을 하였다. 세 차례 에미상(best actress)을 수상하였다.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활동으로 배우경력에 타격을 입었다.[1] 심지어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탁때문에 한 일이었는데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볼쇼이 발레단(Bolshoi Ballet) 공연을 후원한 일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고향과도 같은 뉴욕의 연극 무대로 돌아가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릴리언 헬먼의 《가을의 정원》(The Autumn Garden) 같은 작품에 출연하였다.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에 대해서는 "전쟁중이라서 그들은 평화주의적인 장면은 모두 삭제했어요. 도중에 하이라마(the High Lama)가 세계평화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건 모두 잘렸어요. 군인들이 나와서 '빵! 빵!' 하고 총 쏘는 장면을 더 원했거든요. 결국 그게 필름을 망쳐버렸어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2] 미국 상류계층 출신이다. 선조의 한 사람(Rufus King)이 미국 헌법의 서명자이며, 부친은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가였다. 영부인 엘레노어 루스벨트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1910년 8월 12일 출생. 2006년 10월 20일 캘리포니아, 벨 에어(Bel-Air)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96세. Lost Horizon (1973년), 찰스 자롯 감독 (뮤지컬) 같이 보기[편집] 무릉도원 할리우드 텐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참조[편집] ↑ [1] Archived 2010년 6월 16일 - 웨이백 머신 politicalaffairs.net 제인 와이어트 관련 기사. ↑ St. Anthony Messenger newsletter 외부 링크[편집] (영어) Lost Horizon, by James Hilton, 원문을 ebook 형태로 볼 수 있다. (영어) Website dedicated to the novel and derivative works (영어) Review by Steven Silver (영어) Clues to real Shangri-La point to China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잃어버린_지평선&oldid=23683058" 분류: 영국 소설1933년 책미국 국립영화등기부 등재 영화유토피아 소설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Română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2월 11일 (월) 16:1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콘웨이는 1931년 5월에 어떤 국가의 현지 영사로 있었어? |
동암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암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동암 2번 출구쪽 역명판 개괄 관할 기관 코레일 수도권서부본부 부평관리역 소재지 인천광역시 부평구 동암광장로 10 개업일 1974년 8월 15일 역 번호 154 종별 배치간이역 등급 3급 승강장 구조 2면 4선(쌍섬식) 노선 경인선 구로 기점 18.1 km ■ 수도권 전철 1호선 ← 백운 (1.5 km) 간석 →(1.2 km) 동암역(銅岩驛)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에 있는 경인선의 전철역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운행한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간석오거리역과 꽤 가까운 곳에 있으며, 이 역과 간석역 사이에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인천시청역과 연결되는 선로가 있다. 인근에 인천교통공사가 있다. 목차 1 역사 2 역 구조 3 역 주변 4 이용객 변동 5 인접한 역 6 각주 7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74년 8월 15일 :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2002년 3월 15일 : 2복선 개통과 함께 급행열차 정차 2010년 6월 15일 : 승강장 스크린도어 설치 역 구조[편집] 승강장 2면 4선의 쌍섬식 승강장이며,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출구는 2개다. ↑ 백운 | 12 | | 34 | 간석 ↓ 1 ■ 수도권 전철 1호선 부천·구로·소요산 방면 2 구로·용산 방면 (급행) 3 동인천 방면 (급행) 4 주안·제물포·인천 방면 역 주변[편집] 동암치안센터 가천대학교 길병원 인천남동경찰서 십정2동 행정복지센터 동암우체국 인천세무고등학교 가좌동 석남동 인천광역시 도시철도건설본부 인천교통공사 인천상정중학교 인천상정고등학교 간석오거리역 이용객 변동[편집] 노선 일평균 인원수 (명/일) 각주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1호선 승차 32,106 32,314 38,005 40,172 29,865 28,408 27,415 28,047 28,739 28,125 [1] 하차 28,159 30,503 35,738 38,953 28,532 27,705 28,177 27,089 27,662 26,956 노선 일평균 인원수 (명/일) 각주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1호선 승차 29,119 29,726 28,875 27,687 26,971 26,077 23,865 20,206 18,604 [1] 하차 28,309 29,101 28,427 27,280 26,602 25,629 23,557 20,170 18,603 인접한 역[편집] 경인선 152 부평용산 방면 ■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 급행 156 주안동인천 방면 153 백운소요산 방면 ■ 수도권 전철 1호선경원선 급행 · 경인선 완행 155 간석인천 방면 각주[편집] ↑ 가 나 코레일 > 사업분야 > 광역철도사업 > 수송통계 > 자료실 외부 링크[편집] 한국철도공사 동암역 vdeh한국철도공사 경인선구로 - 구일 - 개봉 - 오류동 - 온수 - 역곡 - 소사 - 부천 - 중동 - 송내 - 부개 - 부평 - 백운 - 동암 - 간석 - 주안 - 도화 - 제물포 - 도원(우각동) - 동인천 - 인천 : 폐역 vdeh수도권 전철 1호선경원선소요산 - 동두천 - 보산 - 동두천중앙 - 지행 - 덕정 - 덕계 - 양주 - 녹양 - 가능 - 의정부 - 회룡 - 망월사 - 도봉산 - 도봉 - 방학 - 창동 - 녹천 - 월계 - 광운대 - 석계 - 신이문 - 외대앞 - 회기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 - 제기동 - 신설동 - 동묘앞 - 동대문 - 종로5가 - 종로3가 - 종각 - 시청 - 서울역 -경부―장항선서울 - 남영 - 용산 - 노량진 - 대방 - 신길 - 영등포 - 신도림 - 구로 - 가산디지털단지 - 독산 - 금천구청 - 석수 - 관악 - 안양 - 명학 - 금정 - 군포 - 당정 - 의왕 - 성균관대 - 화서 - 수원 - 세류 - 병점 - 세마 - 오산대 - 오산 - 진위 - 송탄 - 서정리 - 지제 - 평택 - 성환 - 직산 - 두정 - 천안 - 봉명 - 쌍용 - 아산 - 배방 - 온양온천 - 신창경인선- 구로 - 구일 - 개봉 - 오류동 - 온수 - 역곡 - 소사 - 부천 - 중동 - 송내 - 부개 - 부평 - 백운 - 동암 - 간석 - 주안 - 도화 - 제물포 - 도원 - 동인천 - 인천병점기지선- 병점 - 서동탄경부고속선- 금천구청 - 광명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동암역&oldid=24185149" 분류: 경인선수도권 전철 1호선인천 부평구의 전철역1974년 개업한 철도역숨은 분류: 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MagyarInterlinguaIdo日本語Русский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2: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동암역 1호선의 2001년 승차 일평균 인원수는 ? |
크리스 브라우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크리스 브라우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크리스브라우닝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크리스 브라우닝Chris Browning본명 크리스토퍼 제이 브라우닝Christopher Jay Browning출생 1976년 4월 1일(1976-04-01) (43세)네바다주 리노국적 미국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7년 - 현재 자녀 2 크리스토퍼 제이 "크리스" 브라우닝(영어: Christopher Jay "Chris" Browning)은 미국의 배우이다. 드라마 《썬즈 오브 아나키》의 고고 역, 《에이전트 카터》의 루퍼스 헌트 역으로 출연했다. 목차 1 출연작 목록 1.1 영화 1.2 텔레비전 드라마 2 외부 링크 출연작 목록[편집] 영화[편집] 연도 제목 원제 배역 비고 2009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 모리슨 2010 일라이 The Book of Eli 하이재킹단 리더 2010 렛 미 인 Let Me In 잭 2012 더 파이터 The Philly Kid 레이 마크스 2017 샷 콜러 Shot Caller 레드우드 / 토비 심스 2017 브라이트 Bright 2017 라스트 램페이지 Last Rampage 2018 도니브룩 Donnybrook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연도 제목 원제 배역 비고 2013 브리지 The Bridge 잭 칠드레스 2회분 출연 2014 썬즈 오브 아나키 Sons of Anarchy 고고 7회분 출연 2014 원헌드레드 The 100 제이크 그리핀 3회분 출연 2014 캐슬 Castle 바이커 "For Better or Worse" 에피소드 출연 2015 레이 도노반 Ray Donovan 게리 로열 "The Kalamazoo" 에피소드 출연 2013 슈퍼걸 Supergirl 벤 크럴 / 리액트론 "Fight or Flight" 에피소드 출연 2016 에이전트 카터 Agent Carter 루퍼스 헌트 3회분 출연 2016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Westworld 홀든 2회분 출연 외부 링크[편집] 크리스 브라우닝 - 트위터 Daum 영화 네이버 영화 (영어) 크리스 브라우닝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이 글은 미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크리스_브라우닝&oldid=22344734" 분류: 살아있는 사람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네바다주 출신 배우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미국 배우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تۆرکجهEnglishفارسیItalianoNederland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04: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크리스 브라우닝이 출연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연도별 출연작품 목록은 어떠한가요? |
시성 (기독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성 (기독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성 치프리아노의 이콘. 그는 처음으로 성인 시성 단계 고안을 주창하였다. 시성(諡聖, 라틴어: canonizatio)이란 기독교에서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언하는 행위로, 그 선언에 따라 해당 인물은 성인 목록에 등재됨과 동시에 즉시 성인으로 인정받아 전 세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공경받을 수가 있다. 원래 개개인이 사후 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려면 어떤 특별한 절차 같은 것이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양측은 각자 실정에 맞는 시성 작업을 고안해냈다. 목차 1 역사적 발전 단계 2 가톨릭교회 3 개신교 4 각주 5 같이 보기 역사적 발전 단계[편집] 성인으로서 처음 공경을 받은 것은 순교자들로서, 이들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와 지상의 교회를 중계한다고 여겨졌다. 라틴 전례 양식 미사 경문에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오직 순교자들의 이름만이 언급되며, 1962년 이후부터는 성 요셉도 언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4세기에 접어들면서 순교만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이들도 사후 민중의 공경을 받기 시작했다. 동방의 성 힐라리온과 성 에프렘, 서방의 성 마르티노와 성 힐라리오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디프티카(2연판)에 목록으로 나열되는 형식으로 새겨졌으며, 이 명단에 있는 성인들은 공개적으로 전례 중에 공경을 받았다. 또한 이들의 무덤은 순교자들의 무덤과 같은 영광을 받았다. 그들이 살았던 삶은 순교자들의 삶만큼나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 주교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공적으로 공경받을 수가 있었다. 이를 이따금씩 ‘지역 시성’이라고 부르곤 하였다.[1] 이러한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보통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순교자 같은 조건이 필요하였다. 성 옵타토는 카르타고에서 루칠라라는 이름의 한 기독교도 기혼 여성이 아직 법적으로 생전에 겪은 수난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한 유명한 순교자의 유해에 존경의 의미로 입맞추는 행위를 하자 교회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성 치프리아노는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이들을 조사할 때 최대한 성실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전체 교회 차원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 이들에 대한 모든 조사가 대대적으로 재개되었다. 특히 그들의 신앙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게 된 동기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자격이 미달인 사람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순교했다고 전해진 이들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주로 그들에 대한 법정 재판 기록이나 당시 법정을 참관했던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집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순교가 인정되기 위한 당시 절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순교가 일어난 지역을 관할하는 주교가 최고의 엄격함을 가지고, 사실 조사를 하기 위한 표준 절차를 결정하였다. 순교자의 행적이 수도대주교나 수석주교에게 보고되면, 해당 주교는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조사가 끝나고 결과가 보고되면 보좌 주교들과 협의한 끝에 사망 인물이 순교자의 명칭을 부여받고 공적으로 공경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최종 판단을 내렸다. 공식적인 조사에 앞서 해당 인물의 거룩한 생애와 그의 전구에 의한 기적 등이 교회 당국에 보고되면, 교회에서는 이를 철저하게 조사한 후 문제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 성인의 무덤 위에 제대를 설치하거나 성인의 유해 및 유품에 대한 관할권을 교회에 넘어갔다. 성인의 인정하고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는 것은 권위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일은 해당 성인이 소속된 지역 교구에서만 행할 수 있지만, 해당 성인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 이따금씩 다른 교구에서도 시성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편집]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 교회와 동방 가톨릭교회 모두 교황청에서 시성 작업을 할 수가 있다. 누군가를 시성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필요한 근거로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오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시성 요청을 받은 인물이 모범적이고 거룩한 방식으로 살다가 죽었다면 그 인물은 성인으로 여길 가치가 있다고 본다. 교회에서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은 곧 그 인물이 현재 하늘나라의 영광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각종 전례에서 공공연하게 그 이름이 언급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인 호칭 기도이다. 가톨릭교회에서 시성은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전례에서 해당 성인을 공경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만약 지역 교회 차원에서만 공경이 허용되려면 시복만이 요구된다.[2] 중세 서유럽의 경우, 교황청은 성인 시성에 대해 보다 권위 있는 결정이 내려지도록 시성 문의 과정에 적극 개입할 것을 요구받았다. 역사적으로 993년 교황 요한 15세에 의해 주재된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성 우달리코의 시성은 로마 교구 외의 지역에서 교황에 의해 주재된 최초의 시성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804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주재된 성 스비베르토의 시성이 최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후로 성인 시성 문제는 교황의 판결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1153년 루앙의 대주교 위그 드 보베에 의해 시성된 성 발테르는 서유럽에서 교황이 아닌 이에 의해 시성된 마지막 성인이다.[3][4] 개신교[편집] 개신교에서 성인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며, 새로이 성인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각주[편집] ↑ For the history of canonization, see Kemp, Canonization and Authority in the Western Church, ↑ "Beatification, in the present discipline, differs from canonization in this: that the former implies (1) a locally restricted, not a universal, permission to venerate, which is (2) a mere permission, and no precept; while canonization implies a universal precept" (Beccari, Camillo. "Beatification and Canonization"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2.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7. Retrieved 27 May 2009). ↑ William Smith, Samuel Cheetham, A Dictionary of Christian Antiquities (Murray, 1875), 283. ↑ “Alexander III”. 2013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8월 28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시복 가톨릭교회의 시성 단계하느님의 종 → 가경자 → 복자 → 성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시성_(기독교)&oldid=22883429" 분류: 기독교의 연중행사기독교 용어종교 활동사후 인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Boarisch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Interlingua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Jawaಕನ್ನಡLatinaLietuvių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Kiswahiliதமிழ்ไทยTagalog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0일 (화) 22: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교황 아닌 사람에게 시성이 이루어진 가장 마지막 해는 언제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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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문장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설립일 1910년 10월 1일 설립 근거 일본 제국의 한반도 통치 전신 한국통감부 해산일 1945년 9월 2일 소재지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경복궁 상급기관 일본 황실 한국의 역사韓國史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 시대) 청동기 시대 (민무늬토기 시대) 고조선시대 단군조선(?~기원전 194년) 위만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 진(辰)(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 원삼국시대 부여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삼국시대 고구려(기원전 37년~668년) 백제(기원전 18년~660년) 신라(기원전 57년~ ) 가야(42~562년) 남북국시대 발해(698~926년) 통일신라(676년~ ) 후삼국시대 태봉(901~918년) 후백제(892~936년) 신라( ~935년) 통일왕조시대 고려(918~1392년) 조선(1392~1897년) 대한제국(1897~1910년) 식민지시대 일제 강점기(1910~194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1919~1945년) 현대 군정기 한국 (1945~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년~현재) 대한민국(1948년~현재) v • d • e • h 조선총독부(일본어: 朝鮮総督府 조센소토쿠후[*])는 일본 제국이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이었다. 본부의 소재지는 당시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있었다. 1905년(광무 8년) 대한제국 시기에 설치된 조선통감부(韓國統監府, 영어: Resident-General of Korea)를 전신으로 하여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직후에 출범하였으며 초대 조선총독으로 앞서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취임하였다.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를 통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는데, 훗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체계의 기본골격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총독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패전한 이후에도 당분간 한반도 지역을 계속 통치하였고, 1945년 9월 3일부로 38도선 이남 지역을 미군정에게 인계하며 해체되었다. 목차 1 역대 총독 2 청사 3 조직 3.1 1910년 10월 1일 제정 3.2 1919년 8월 20일 개정 3.3 종합 3.4 직제 4 조선인 참정권 정책 4.1 조선인 귀족원 의원 선출 과정 5 연표 5.1 1909년 ~ 1929년 5.2 1930년 ~ 1945년 6 기타 7 역대 총독부의 정책,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 변천과정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참고 자료 11 외부 링크 역대 총독[편집] 조선총독(朝鮮總督)은 육군·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다.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일본제국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 행정권·사법권·군사권 등의 모든 권한을 가졌다. 1913년 칙령 제134호(고등관 관등봉급령)에 따르면, 조선 총독 연봉은 8,000엔이었다고 한다.[1] 사이토 마코토가 취임한 1919년에 형식적으로 무관 총독 임용제를 폐지하였으나 1945년에 폐지될 때까지 문관 출신의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다. 조선총독을 역임하고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거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조선총독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역대 이름 사진 취임 이임 이력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910년 10월 1일 1916년 10월 14일 통감부 제3대 통감, 대장(大将), , 수상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16년 10월 14일 1919년 8월 12일 대장(大将), 제3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년 8월 13일 1927년 12월 10일 대장(大将), 수상 임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27년 4월 15일 1927년 10월 1일 대장(大将) 제4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927년 12월 10일 1929년 8월 17일 대장(大将) 제5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29년 8월 17일 1931년 6월 17일 대장(大将), 수상 제6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1년 6월 17일 1936년 8월 5일 대장(大将) 제7대 미나미 지로(南次郎) 1936년 8월 5일 1942년 5월 29일 대장(大将)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942년 5월 29일 1944년 7월 21일 대장(大将), 수상 제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944년 7월 21일 1945년 9월 28일 대장(大将), 수상 청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입니다.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행한 조선총독부가 최고 행정 관청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35년의 식민통치 기간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2곳과 용산, 경무대의 총독 관저 3곳을 비롯하여 관사 다수를 건립하였다. 총독부 청사는 1907년에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청사를 신축하였다.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청사로 사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그 후 이 건물의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되었고 건물의 부재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총독 관저는 1910년부터 남산 왜성대의 일본 공사관을 관저로 사용하였고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관저를 별도로 운용하였으며 1937년에 경복궁 북쪽에 경무대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한편 1910년 이후 식민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일본인 관리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어 보급되었다. 조직[편집]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2일부로 조선 13도의 관찰사를 도 장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가 1912년부터 도지사로 바꾸었다. 또한, 도지사 아래 부지사를 두어 도지사의 업무를 보좌하게 했고, 이방, 호방, 예방 등 각 방을 근대식 각각의 국과 과로 나누었다. 또한, 규모가 큰 부에는 국장급을, 작은 부에는 과장급만을 두어 예하 행정체계를 구성하게 했다. 행정기관은 면리제와 동제,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반제였던 것을 도시지역은 동(洞) 대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町)을 쓰게 하였다. 또한, 부 중에서도 규모가 큰 부는 다시 몇 개의 동을 묶어 한 개의 구(區)로 나누었다. 관료의 채용은 향리가 세습하던 것을 폐지하고 공개채용 시험과 고등관 시험, 판임관 시험 등의 채용시험으로 전환하였다. 관료들의 직위는 군속, 면속으로 칭하고, 기수(서기), 기사, 주사, 사무관, 서기관 등의 직위를 적용하고 차등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의 수사, 검열 등의 편의를 위해 한국인 출신의 순사보조원과 헌병보조원 등의 사무보조원을 채용해서 썼다. 1910년 10월 1일 제정[편집] 총독관방 - 비서과, 무관실 장관관방 - 서무계, 회계계(會計係) 내무부 - 지방계, 권업계, 학무계 서무과 지방국 - 지방과, 토목과, 위생과 학무국 - 학무과, 편집과 재무부 - 세무계, 이재계 총무부 - 외사국, 인사국, 회계국, 문서과 탁지부 서무과 세관공사과 사세국 - 세무과, 관세과 사계국 - 예산결산과, 재무과 농상공부 서무과 식산국 - 농무과, 산림과, 수산과 상공국 - 광무과(鑛務課), 상공과 사법부 - 서무과, 민사과, 형사과 1919년 8월 20일 개정[편집] 계(係)를 과(課)로 개정했다. 지사관방(장관관방을 개정) 제1부 제2부 제3부 - 경무과, 고등경찰과, 보안과, 위생과 종합[편집] 총독관방(総督官房) 총무부(総務部) 인사국(人事局) - 서무과, 인사과 외사국(外事局) 회계국(会計局) - 경리과, 영선과 문서과(1910년 개정)[2] 감사실(監事室) 내무부(内務部) 서무과(1910년 개정) 지방국(地方局) - 지방과, 토목과, 지적과, 건축과, 위생과(1910년 개정) 학무국(学務局) - 학무과, 편집과(1910년 개정) 경무국(警務局) - 서무과, 경무과 탁지부(度支部: 1910년 개정) 서무과 세관공사과 사세국 - 세무과, 회계과, 관세과(1910년 개정) 사계국 - 예산결산과, 재무과(1910년 개정) 탁지부(度支部) - 사세국(司税局), 사계국(司計局) 농상공부(農商工部) 서무과(1910년 개정) 식산국(殖産局) - 농무과, 산림과, 방재과, 수산과(1910년 개정) 상공국(商工局) - 광무과(鑛務課), 상공과(1910년 개정) 사법부(司法部) - 서무과, 민사과, 형사과(1910년 개정), 특별수사과 중추원 - 서무과, 조사과, 편찬과[3] 취조국(1910년 10월 설치, 1912년 폐지, 참사관실 대치) 직제[편집] 총독 정무총감 장관 : 각 부의 장 실국장 : 각 실,국의 장 참사관 : 2명 비서관 : 2명 서기관 : 19명 사무관 : 19명~25명 기사 : 부처별 30명 통역관 : 각 실국별 6명 기수 : 337명 통역생 총독부 무관 : 육해군 소장 또는 좌관(영관급) 부속부관 : 육해군 좌관 등이 있다. 조선인 참정권 정책[편집]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 정부에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32년 12월 박영효가 귀족원 의원에 칙임 된 예가 있었고, 1941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이[4] 선정되었는데 박중양은 이때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러나 박중양은 1945년 4월 3일 두 번째로 귀족원 의원직에 임명되자 이때는 수용한다. 1943년에는 이진호가 칙선 되고 있었지만,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4] 이때까지의 귀족원 의원은 임명되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거절한 인물은 박중양이 유일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1945년 당시 조선인 귀족원 의원으로는 박영효, 윤덕영, 이진호, 윤치호, 김명준, 박중양, 박상준, 송종헌, 이기용, 한상룡 등이 선임되었다. 초기에 박영효, 윤덕영, 이진호, 김명준, 박상준, 송종헌, 이기용, 한상룡 등을 선정하고 1945년에는 박중양, 윤치호를 추가로 선임하였다. 조선인 지식인과 관료들의 참정권 요구에 답변을 회피하던 조선총독부는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권고에 의해서든 한국인들이 태평양 전쟁에 강제 징집되거나 자원해서 입대하자 이를 계기로 본국 정부에 계속해서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0년부터 계속되었던 총독부의 요구는 결국 1945년 1월에 가서야 통과된다. 조선인 귀족원 의원 선출 과정[편집] 일본 제국 국회의 상원 격이었던 귀족원에 한국인 의원이 선출된 배경은 조선인들의 참정권 요구가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징병제가 일본 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에 비해,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원안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5] 귀족원 의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등이었다.[6] 한편 한국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6]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가 법률로써 실현된 것은 1945년 1월의 일본 의회를 통과한 법률 제34호 '중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 율안'과 칙령 제193호 '귀족원령 중 개정안'에 의해서였고, 참정권 부여는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5] 이를 두고 사학자 김유리는 참정권 문제 해결이 늦어졌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한반도에 대한 징병 시행이 발표되었던 1942년의 시점에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 발표 시기에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고, 오히려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었다.[5]'고 비판했다. 그는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돼왔던 문제가 2,3년의 잠복 기간을 거친 후 한인들의 강한 요구라는 구실을 빌어 해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5]'고 비판한다. 원래 귀족원 의원의 피선거권은 일본은 '제국 신민인 남자로서 연령 30세 이상인 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었다.[7]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부여된 참정권도 일부 제한이 있는 것이었다. 먼저 귀족원 의원의 경우는 한반도와 타이완에 거주하는 만 30세 이상의 남자로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칙임 된 사람 10명 이내를 참가시키며, 7년 임기로 하였다.[7] 이 10명의 귀족원 의원 가운데 몇 명씩을 배당할 것인가에 대한 명문 규정은 없었으나, 7명을 한반도에, 나머지 3명을 타이완에 할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귀족원 의원들은 1945년 4월에 鈴木 내각이 성립한 직후의 임시의회에 참가하고 있다.[7] 원래 일본 출신 일본 귀족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음에도 한반도와 타이완 출신 의원의 임기를 7년으로 한 것은 또 다른 차별을 만든 것이었다.[7] 일본 정부는 시간이 지나면 하원 격인 중의원에도 한인을 참가시킬 계획이었다. 중의원에 있어서는 공선(선거)에 의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해 있는 만큼 선거의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7] 여기에 대해 일본 본국과 조선총독부 모두 보통선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고, 이 때문에 선거 방법은 제한선거에 의할 것으로 결정되었다.[7] 즉 선거권을 제한하는 데 있어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일제는 직접 국세 15원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을 선거권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이미 실시하고 있었던 지방자치 단체 의원 선거의 경우[7] 보다도 그 자격 기준이 훨씬 더 강화된 것인데, 당시 도회, 부회, 읍회, 면협의회 선거의 선거권도 그 자격 기준이 국세 5원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8] 그러나 조선인 중의원은 일본 제국 귀족원과 중의원에게 안건이 계류 중에 있던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되면서 전면 백지화된다. 연표[편집] 1909년 ~ 1929년[편집] 1909년 12월 4일 - 한국 일진회에서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상주문이 제출되었다. 1910년 3월 14일 - 토지 조사 사업 시작 1910년 6월 30일 - 헌병 경찰 제도 발족 1910년 8월 22일 - 한일합방 조약 체결 1910년 10월 1일 - 조선총독부 설치 (전날인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 관제에 대한 관제 공포) 1911년 8월 23일 - 제1차 조선 교육령. 국어를 일본어로 한다. 1912년 1월 1일 - 표준시 UTC 8시 30분에서 UTC 9시로 변경 1912년 4월 - 보통 학교용 언문 철자법 확정 1912년 9월 9일 - 고종의 형 흥친왕 사망 1914년 3월 1일 - 행정 구역 개정 (부에서 군면 제도) 1917년 3월 22일 - 이준용 사망 1919년 1월 21일 - 고종황제 붕어(崩御) 1919년 3월 1일 - 삼일 만세 운동 시작( - 1919년 5월) 1919년 8월 12일 - 사이토 마코토, 제3대 총독으로 취임 1919년 8월 20일 - 헌병 경찰 제도 폐지 1919년 10월 5일 - 김성수,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1920년 3월 5일 - 조선일보 창간 1920년 4월 1일 - 동아일보 창간 1920년 12월 27일 - 총독부, 산미 증산 계획 1925년 11월 22일 - 제1차 조선공산당 조직 미수 사건 1926년 4월 1일 - 경성제국대학 개설 1926년 4월 25일 - 순종황제 붕어(崩御), 인산 후 영친왕이 이왕직 세습 1926년 6월 10일 - 6·10 만세운동 1926년 6월 -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7년 2월 16일 - 사단법인 경성 방송국, 라디오 방송 시작 1927년 5월 2일 - 조선질소주식회사 설립 1927년 8월 -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8년 8월 -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9년 11월 3일 - 광주학생사건 (- 1930년 3월) 1930년 ~ 1945년[편집] 1930년 5월 30일 - 간도 5.30 사건 1930년 - 언문 철자법 제정 1931년 7월 2일 - 만보산 사건 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 발발 1931년 1월 8일 - 애국단원 이봉창, 도쿄에서 천황 암살 미수 사건 1931년 4월 29일 - 애국단원 윤봉길 ,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1936년 8월 9일 -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1937년 6월 1일 - 김일성, 보천보 전투를 일으켰다. 1937년 7월 7일 - 중일전쟁 발발 1937년 10월 2일 -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1938년 2월 26일 - 육군 특별 지원자 법령 공포 1938년 3월 4일 - 조선 교육령 개정으로 한국어 수업을 필수에서 제외함. 1940년 2월 11일 - 창씨개명 실시 1941년 3월 31일 - 국민학교 규정 개정, 한국어 수업 폐지 1941년 12월 8일 - 태평양전쟁 발발 1942년 10월 1일 - 조선어학회 사건 1944년 4월 1일 - 제1회 징병 검사 시작 1944년 8월 23일 - 여자 정신대 근로령 공포 1945년 8월 9일 - 소련 대일본 참전, 두만강을 넘는다. 1945년 8월 15일 - 일본 정부 항복과 포츠담 선언 수락. 소비에트 연방이 청진시에 일본군과 전투로 인해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을 임명하여 여운형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결성 1945년 8월 16일 - 소련군, 청진시 점령 1945년 8월 21일 - 소련군, 평양 진주 1945년 8월 25일 - 미군, 인천 상륙 1945년 9월 6일 - 여운형 등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 1945년 9월 7일 - 미국 극동 군사령부, 조선의 군정 선언 (즉시 독립 부인) 1945년 9월 9일 - 총독부, 항복 문서에 조인 기타[편집] 3·1 운동의 불씨가 남아 있던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 수준에 불과했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경쟁률이 10대 1을 웃돌았다. 1926년에는 856명 모집에 9천193명이 지원, 약 10.7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년에는 854명 모집에 1만 6천193명이 지원해 19대 1로 경쟁률이 수직으로 상승했다.[9] 순사 등에 대한 19.6대 1로 정점을 찍은 1935년 이후 순사에 대한 선호는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경쟁률이 10∼20대 1에 이를 정도로 순사직이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9] 이를 두고 연세대학교의 장신은 "순사는 조선인 사회에서의 좋지 못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법률로 보장된 권한 탓에 해마다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라고 지적하면서 "관리의 최말단인 까닭에 지원자의 학력 수준은 보통학교 졸업자가 80% 정도를 차지했다."라고 분석했다.[9] 역대 총독부의 정책,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 변천과정[편집] 일본 제국 - 1890년대 경부철도 부설권, 동학난 진압 등의 이권 침탈 (총독부가 없던 시절) 일본 제국 - 1905년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 승리 확실시로 이토 히로부미의 외교권 간섭(총독부가 없던 시절) 일본 제국 - 1910년대 한일합방, 토지조사사업과 무단통치(데라우치 시절) 일본 제국 - 1919년 3·1 운동 진압. (하세가와 시절) 일본 제국 -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과 문화통치(사이토 시절) 일본 제국 - 1929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인한 문화통치의 종료 (2차 사이토 시절) 일본 제국 - 1930년대 일본의 전체주의화와 만주사변, 조선의 병참기지화. (우가키 시절) 일본 제국 - 1936년 중일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 가속, 창씨개명 시행 (미나미 시절) 일본 제국 - 1942년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 가속, 조선인 대거 동원 (구이소 시절) 일본 제국 - 1944년 태평양 전쟁의 방어전을 수행 및 종전 후 식민지 처리(아베 시절) 같이 보기[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령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보 타이완 총독부 각주[편집] ↑ <친일파는 살아 있다-41> 허수아비 감투, 중추원참의 정운현 ↑ “국가기록원”. 2011년 11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11일에 확인함. ↑ 조선총독부중추원사무분장규정(1925년 개정) Archived 2011년 11월 18일 - 웨이백 머신, 국가기록원 ↑ 가 나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35페이지 ↑ 가 나 다 라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40페이지 ↑ 가 나 송건호, 《송건호 전집 04:한국현대사 2》 (한길사, 2002) 98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41페이지 ↑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42페이지 ↑ 가 나 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선망의 직장(?) 참고 자료[편집] 김윤정, 《조선총독부 중추원 연구》 (경인문화사, 2011)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 (청아출판사, 2007)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6) 외부 링크[편집] 조선총독부 관보 활용 시스템 vdeh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총독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 - 1916 |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 - 1919 | 사이토 마코토 1919 - 1927 | 우가키 가즈시게(임시대리) 1927 | 야마나시 한조 1927 - 1929 | 사이토 마코토 1929 - 1931 | 우가키 가즈시게 1931 - 1936 | 미나미 지로 1936 - 1942 | 고이소 구니아키 1942 - 1944 | 아베 노부유키 1944 - 1945정무총감야마가타 이사부로 1910 - 1919 | 미즈노 렌타로 1919 - 1922 | 아리요시 주이치 1922 - 1924 | 시모오카 주지 1924 - 1925 | 유아사 구라헤이 1925 - 1927 | 이케가미 시로 1927 - 1929 | 고다마 히데오 1929 - 1931 |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 - 1936 | 오노 로쿠이치로 1936 - 1942 | 다나카 다케오 1942 - 1944 | 엔도 류사쿠 1944 - 1945청사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기구내부부국 총독관방 재무국 농상국 광공국 법무국 학무국 경무국 외국·관할기관 체신국 교통국 재판소 형무소 중추원 조선사 편수회 폐지(1943년 이전) 사정국 전매국 농상공부 기타 관보 동양척식주식회사 선만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정책 헌병경찰제도 무단 통치 문화 통치 민족말살정책 치안유지법 창씨개명 일선동조론 ※ 참고 : 통감부 · 한일 병합 조약 | 이왕가 · 왕공족 · 이왕직 · 조선귀족 vdeh 일본 제국의 외지의 행정 구역타이완 타이완 총독부 다이호쿠주 신치쿠주 다이추주 다이난주 다카오주 가렌코청 다이토청 호코청 (1926년 당시) 가라후토청 가라후토 민정서 → 가라후토청 도요하라 지청 오토마리 지청 루타카 지청 시쿠카 지청 모토토마리 지청 마오카 지청 도마리오루 지청 혼토 지청 에스토루 지청 우시로 지청 (1922년 당시) 관동주 관동도독부 → 관동청 → 관동국 - 관동주청 다롄 민정지서 뤼순 민정지서 진저우 민정지서 푸란뎬 민정지서 피쯔워 민정지서 (1930년 당시) 조선 조선총독부 경기도 (게이키도) 강원도 (고겐도) 충청북도 (주세이호쿠도) 충청남도 (주세이난도) 전라북도 (젠라호쿠도) 전라남도 (젠라난도) 경상북도 (게이쇼호쿠도) 경상남도 (게이쇼난도) 평안남도 (헤이안난도) 평안북도 (헤이안호쿠도) 황해도 (고카이도) 함경남도 (간쿄난도) 함경북도 (간쿄호쿠도) 남양 군도 임시남양군도방비대 민정서 → 남양청 사이판 지청 팔라우 지청 야프 지청 트루크 지청 포나페 지청 마셜 제도 (1922년 당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선총독부&oldid=24436862" 분류: 일본 육군 대장일본의 원수일본 해군 대장조선총독부1910년 설립1945년 폐지일제 강점기일본의 군사정부폐지된 일본의 국가기관일제 강점기의 행정한국의 군정기한국의 역사전간기의 정체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orsk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6일 (일) 17: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926년에 조선총독부의 모집인원은 몇 명이였나요? |
조선총독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총독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총독부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문장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설립일 1910년 10월 1일 설립 근거 일본 제국의 한반도 통치 전신 한국통감부 해산일 1945년 9월 2일 소재지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경복궁 상급기관 일본 황실 한국의 역사韓國史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 시대) 청동기 시대 (민무늬토기 시대) 고조선시대 단군조선(?~기원전 194년) 위만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 진(辰)(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 원삼국시대 부여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삼국시대 고구려(기원전 37년~668년) 백제(기원전 18년~660년) 신라(기원전 57년~ ) 가야(42~562년) 남북국시대 발해(698~926년) 통일신라(676년~ ) 후삼국시대 태봉(901~918년) 후백제(892~936년) 신라( ~935년) 통일왕조시대 고려(918~1392년) 조선(1392~1897년) 대한제국(1897~1910년) 식민지시대 일제 강점기(1910~194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1919~1945년) 현대 군정기 한국 (1945~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년~현재) 대한민국(1948년~현재) v • d • e • h 조선총독부(일본어: 朝鮮総督府 조센소토쿠후[*])는 일본 제국이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이었다. 본부의 소재지는 당시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있었다. 1905년(광무 8년) 대한제국 시기에 설치된 조선통감부(韓國統監府, 영어: Resident-General of Korea)를 전신으로 하여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직후에 출범하였으며 초대 조선총독으로 앞서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취임하였다.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를 통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는데, 훗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체계의 기본골격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총독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패전한 이후에도 당분간 한반도 지역을 계속 통치하였고, 1945년 9월 3일부로 38도선 이남 지역을 미군정에게 인계하며 해체되었다. 목차 1 역대 총독 2 청사 3 조직 3.1 1910년 10월 1일 제정 3.2 1919년 8월 20일 개정 3.3 종합 3.4 직제 4 조선인 참정권 정책 4.1 조선인 귀족원 의원 선출 과정 5 연표 5.1 1909년 ~ 1929년 5.2 1930년 ~ 1945년 6 기타 7 역대 총독부의 정책,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 변천과정 8 같이 보기 9 각주 10 참고 자료 11 외부 링크 역대 총독[편집] 조선총독(朝鮮總督)은 육군·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다.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일본제국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 행정권·사법권·군사권 등의 모든 권한을 가졌다. 1913년 칙령 제134호(고등관 관등봉급령)에 따르면, 조선 총독 연봉은 8,000엔이었다고 한다.[1] 사이토 마코토가 취임한 1919년에 형식적으로 무관 총독 임용제를 폐지하였으나 1945년에 폐지될 때까지 문관 출신의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다. 조선총독을 역임하고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거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조선총독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역대 이름 사진 취임 이임 이력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910년 10월 1일 1916년 10월 14일 통감부 제3대 통감, 대장(大将), , 수상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16년 10월 14일 1919년 8월 12일 대장(大将), 제3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년 8월 13일 1927년 12월 10일 대장(大将), 수상 임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27년 4월 15일 1927년 10월 1일 대장(大将) 제4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927년 12월 10일 1929년 8월 17일 대장(大将) 제5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29년 8월 17일 1931년 6월 17일 대장(大将), 수상 제6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1년 6월 17일 1936년 8월 5일 대장(大将) 제7대 미나미 지로(南次郎) 1936년 8월 5일 1942년 5월 29일 대장(大将)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942년 5월 29일 1944년 7월 21일 대장(大将), 수상 제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944년 7월 21일 1945년 9월 28일 대장(大将), 수상 청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입니다.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행한 조선총독부가 최고 행정 관청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35년의 식민통치 기간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2곳과 용산, 경무대의 총독 관저 3곳을 비롯하여 관사 다수를 건립하였다. 총독부 청사는 1907년에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청사를 신축하였다.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청사로 사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그 후 이 건물의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되었고 건물의 부재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총독 관저는 1910년부터 남산 왜성대의 일본 공사관을 관저로 사용하였고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관저를 별도로 운용하였으며 1937년에 경복궁 북쪽에 경무대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한편 1910년 이후 식민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일본인 관리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어 보급되었다. 조직[편집]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2일부로 조선 13도의 관찰사를 도 장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가 1912년부터 도지사로 바꾸었다. 또한, 도지사 아래 부지사를 두어 도지사의 업무를 보좌하게 했고, 이방, 호방, 예방 등 각 방을 근대식 각각의 국과 과로 나누었다. 또한, 규모가 큰 부에는 국장급을, 작은 부에는 과장급만을 두어 예하 행정체계를 구성하게 했다. 행정기관은 면리제와 동제,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반제였던 것을 도시지역은 동(洞) 대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町)을 쓰게 하였다. 또한, 부 중에서도 규모가 큰 부는 다시 몇 개의 동을 묶어 한 개의 구(區)로 나누었다. 관료의 채용은 향리가 세습하던 것을 폐지하고 공개채용 시험과 고등관 시험, 판임관 시험 등의 채용시험으로 전환하였다. 관료들의 직위는 군속, 면속으로 칭하고, 기수(서기), 기사, 주사, 사무관, 서기관 등의 직위를 적용하고 차등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의 수사, 검열 등의 편의를 위해 한국인 출신의 순사보조원과 헌병보조원 등의 사무보조원을 채용해서 썼다. 1910년 10월 1일 제정[편집] 총독관방 - 비서과, 무관실 장관관방 - 서무계, 회계계(會計係) 내무부 - 지방계, 권업계, 학무계 서무과 지방국 - 지방과, 토목과, 위생과 학무국 - 학무과, 편집과 재무부 - 세무계, 이재계 총무부 - 외사국, 인사국, 회계국, 문서과 탁지부 서무과 세관공사과 사세국 - 세무과, 관세과 사계국 - 예산결산과, 재무과 농상공부 서무과 식산국 - 농무과, 산림과, 수산과 상공국 - 광무과(鑛務課), 상공과 사법부 - 서무과, 민사과, 형사과 1919년 8월 20일 개정[편집] 계(係)를 과(課)로 개정했다. 지사관방(장관관방을 개정) 제1부 제2부 제3부 - 경무과, 고등경찰과, 보안과, 위생과 종합[편집] 총독관방(総督官房) 총무부(総務部) 인사국(人事局) - 서무과, 인사과 외사국(外事局) 회계국(会計局) - 경리과, 영선과 문서과(1910년 개정)[2] 감사실(監事室) 내무부(内務部) 서무과(1910년 개정) 지방국(地方局) - 지방과, 토목과, 지적과, 건축과, 위생과(1910년 개정) 학무국(学務局) - 학무과, 편집과(1910년 개정) 경무국(警務局) - 서무과, 경무과 탁지부(度支部: 1910년 개정) 서무과 세관공사과 사세국 - 세무과, 회계과, 관세과(1910년 개정) 사계국 - 예산결산과, 재무과(1910년 개정) 탁지부(度支部) - 사세국(司税局), 사계국(司計局) 농상공부(農商工部) 서무과(1910년 개정) 식산국(殖産局) - 농무과, 산림과, 방재과, 수산과(1910년 개정) 상공국(商工局) - 광무과(鑛務課), 상공과(1910년 개정) 사법부(司法部) - 서무과, 민사과, 형사과(1910년 개정), 특별수사과 중추원 - 서무과, 조사과, 편찬과[3] 취조국(1910년 10월 설치, 1912년 폐지, 참사관실 대치) 직제[편집] 총독 정무총감 장관 : 각 부의 장 실국장 : 각 실,국의 장 참사관 : 2명 비서관 : 2명 서기관 : 19명 사무관 : 19명~25명 기사 : 부처별 30명 통역관 : 각 실국별 6명 기수 : 337명 통역생 총독부 무관 : 육해군 소장 또는 좌관(영관급) 부속부관 : 육해군 좌관 등이 있다. 조선인 참정권 정책[편집]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 정부에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32년 12월 박영효가 귀족원 의원에 칙임 된 예가 있었고, 1941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이[4] 선정되었는데 박중양은 이때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러나 박중양은 1945년 4월 3일 두 번째로 귀족원 의원직에 임명되자 이때는 수용한다. 1943년에는 이진호가 칙선 되고 있었지만,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4] 이때까지의 귀족원 의원은 임명되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거절한 인물은 박중양이 유일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1945년 당시 조선인 귀족원 의원으로는 박영효, 윤덕영, 이진호, 윤치호, 김명준, 박중양, 박상준, 송종헌, 이기용, 한상룡 등이 선임되었다. 초기에 박영효, 윤덕영, 이진호, 김명준, 박상준, 송종헌, 이기용, 한상룡 등을 선정하고 1945년에는 박중양, 윤치호를 추가로 선임하였다. 조선인 지식인과 관료들의 참정권 요구에 답변을 회피하던 조선총독부는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권고에 의해서든 한국인들이 태평양 전쟁에 강제 징집되거나 자원해서 입대하자 이를 계기로 본국 정부에 계속해서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0년부터 계속되었던 총독부의 요구는 결국 1945년 1월에 가서야 통과된다. 조선인 귀족원 의원 선출 과정[편집] 일본 제국 국회의 상원 격이었던 귀족원에 한국인 의원이 선출된 배경은 조선인들의 참정권 요구가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징병제가 일본 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에 비해,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원안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5] 귀족원 의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등이었다.[6] 한편 한국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6]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가 법률로써 실현된 것은 1945년 1월의 일본 의회를 통과한 법률 제34호 '중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 율안'과 칙령 제193호 '귀족원령 중 개정안'에 의해서였고, 참정권 부여는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5] 이를 두고 사학자 김유리는 참정권 문제 해결이 늦어졌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한반도에 대한 징병 시행이 발표되었던 1942년의 시점에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 발표 시기에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고, 오히려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었다.[5]'고 비판했다. 그는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돼왔던 문제가 2,3년의 잠복 기간을 거친 후 한인들의 강한 요구라는 구실을 빌어 해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5]'고 비판한다. 원래 귀족원 의원의 피선거권은 일본은 '제국 신민인 남자로서 연령 30세 이상인 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었다.[7]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부여된 참정권도 일부 제한이 있는 것이었다. 먼저 귀족원 의원의 경우는 한반도와 타이완에 거주하는 만 30세 이상의 남자로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칙임 된 사람 10명 이내를 참가시키며, 7년 임기로 하였다.[7] 이 10명의 귀족원 의원 가운데 몇 명씩을 배당할 것인가에 대한 명문 규정은 없었으나, 7명을 한반도에, 나머지 3명을 타이완에 할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귀족원 의원들은 1945년 4월에 鈴木 내각이 성립한 직후의 임시의회에 참가하고 있다.[7] 원래 일본 출신 일본 귀족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음에도 한반도와 타이완 출신 의원의 임기를 7년으로 한 것은 또 다른 차별을 만든 것이었다.[7] 일본 정부는 시간이 지나면 하원 격인 중의원에도 한인을 참가시킬 계획이었다. 중의원에 있어서는 공선(선거)에 의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해 있는 만큼 선거의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7] 여기에 대해 일본 본국과 조선총독부 모두 보통선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고, 이 때문에 선거 방법은 제한선거에 의할 것으로 결정되었다.[7] 즉 선거권을 제한하는 데 있어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일제는 직접 국세 15원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을 선거권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이미 실시하고 있었던 지방자치 단체 의원 선거의 경우[7] 보다도 그 자격 기준이 훨씬 더 강화된 것인데, 당시 도회, 부회, 읍회, 면협의회 선거의 선거권도 그 자격 기준이 국세 5원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8] 그러나 조선인 중의원은 일본 제국 귀족원과 중의원에게 안건이 계류 중에 있던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되면서 전면 백지화된다. 연표[편집] 1909년 ~ 1929년[편집] 1909년 12월 4일 - 한국 일진회에서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상주문이 제출되었다. 1910년 3월 14일 - 토지 조사 사업 시작 1910년 6월 30일 - 헌병 경찰 제도 발족 1910년 8월 22일 - 한일합방 조약 체결 1910년 10월 1일 - 조선총독부 설치 (전날인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 관제에 대한 관제 공포) 1911년 8월 23일 - 제1차 조선 교육령. 국어를 일본어로 한다. 1912년 1월 1일 - 표준시 UTC 8시 30분에서 UTC 9시로 변경 1912년 4월 - 보통 학교용 언문 철자법 확정 1912년 9월 9일 - 고종의 형 흥친왕 사망 1914년 3월 1일 - 행정 구역 개정 (부에서 군면 제도) 1917년 3월 22일 - 이준용 사망 1919년 1월 21일 - 고종황제 붕어(崩御) 1919년 3월 1일 - 삼일 만세 운동 시작( - 1919년 5월) 1919년 8월 12일 - 사이토 마코토, 제3대 총독으로 취임 1919년 8월 20일 - 헌병 경찰 제도 폐지 1919년 10월 5일 - 김성수,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1920년 3월 5일 - 조선일보 창간 1920년 4월 1일 - 동아일보 창간 1920년 12월 27일 - 총독부, 산미 증산 계획 1925년 11월 22일 - 제1차 조선공산당 조직 미수 사건 1926년 4월 1일 - 경성제국대학 개설 1926년 4월 25일 - 순종황제 붕어(崩御), 인산 후 영친왕이 이왕직 세습 1926년 6월 10일 - 6·10 만세운동 1926년 6월 -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7년 2월 16일 - 사단법인 경성 방송국, 라디오 방송 시작 1927년 5월 2일 - 조선질소주식회사 설립 1927년 8월 -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8년 8월 -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9년 11월 3일 - 광주학생사건 (- 1930년 3월) 1930년 ~ 1945년[편집] 1930년 5월 30일 - 간도 5.30 사건 1930년 - 언문 철자법 제정 1931년 7월 2일 - 만보산 사건 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 발발 1931년 1월 8일 - 애국단원 이봉창, 도쿄에서 천황 암살 미수 사건 1931년 4월 29일 - 애국단원 윤봉길 ,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1936년 8월 9일 -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1937년 6월 1일 - 김일성, 보천보 전투를 일으켰다. 1937년 7월 7일 - 중일전쟁 발발 1937년 10월 2일 -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1938년 2월 26일 - 육군 특별 지원자 법령 공포 1938년 3월 4일 - 조선 교육령 개정으로 한국어 수업을 필수에서 제외함. 1940년 2월 11일 - 창씨개명 실시 1941년 3월 31일 - 국민학교 규정 개정, 한국어 수업 폐지 1941년 12월 8일 - 태평양전쟁 발발 1942년 10월 1일 - 조선어학회 사건 1944년 4월 1일 - 제1회 징병 검사 시작 1944년 8월 23일 - 여자 정신대 근로령 공포 1945년 8월 9일 - 소련 대일본 참전, 두만강을 넘는다. 1945년 8월 15일 - 일본 정부 항복과 포츠담 선언 수락. 소비에트 연방이 청진시에 일본군과 전투로 인해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을 임명하여 여운형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결성 1945년 8월 16일 - 소련군, 청진시 점령 1945년 8월 21일 - 소련군, 평양 진주 1945년 8월 25일 - 미군, 인천 상륙 1945년 9월 6일 - 여운형 등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 1945년 9월 7일 - 미국 극동 군사령부, 조선의 군정 선언 (즉시 독립 부인) 1945년 9월 9일 - 총독부, 항복 문서에 조인 기타[편집] 3·1 운동의 불씨가 남아 있던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 수준에 불과했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경쟁률이 10대 1을 웃돌았다. 1926년에는 856명 모집에 9천193명이 지원, 약 10.7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년에는 854명 모집에 1만 6천193명이 지원해 19대 1로 경쟁률이 수직으로 상승했다.[9] 순사 등에 대한 19.6대 1로 정점을 찍은 1935년 이후 순사에 대한 선호는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경쟁률이 10∼20대 1에 이를 정도로 순사직이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9] 이를 두고 연세대학교의 장신은 "순사는 조선인 사회에서의 좋지 못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법률로 보장된 권한 탓에 해마다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라고 지적하면서 "관리의 최말단인 까닭에 지원자의 학력 수준은 보통학교 졸업자가 80% 정도를 차지했다."라고 분석했다.[9] 역대 총독부의 정책,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 변천과정[편집] 일본 제국 - 1890년대 경부철도 부설권, 동학난 진압 등의 이권 침탈 (총독부가 없던 시절) 일본 제국 - 1905년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 승리 확실시로 이토 히로부미의 외교권 간섭(총독부가 없던 시절) 일본 제국 - 1910년대 한일합방, 토지조사사업과 무단통치(데라우치 시절) 일본 제국 - 1919년 3·1 운동 진압. (하세가와 시절) 일본 제국 -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과 문화통치(사이토 시절) 일본 제국 - 1929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인한 문화통치의 종료 (2차 사이토 시절) 일본 제국 - 1930년대 일본의 전체주의화와 만주사변, 조선의 병참기지화. (우가키 시절) 일본 제국 - 1936년 중일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 가속, 창씨개명 시행 (미나미 시절) 일본 제국 - 1942년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 가속, 조선인 대거 동원 (구이소 시절) 일본 제국 - 1944년 태평양 전쟁의 방어전을 수행 및 종전 후 식민지 처리(아베 시절) 같이 보기[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령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보 타이완 총독부 각주[편집] ↑ <친일파는 살아 있다-41> 허수아비 감투, 중추원참의 정운현 ↑ “국가기록원”. 2011년 11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11일에 확인함. ↑ 조선총독부중추원사무분장규정(1925년 개정) Archived 2011년 11월 18일 - 웨이백 머신, 국가기록원 ↑ 가 나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35페이지 ↑ 가 나 다 라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40페이지 ↑ 가 나 송건호, 《송건호 전집 04:한국현대사 2》 (한길사, 2002) 98페이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41페이지 ↑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242페이지 ↑ 가 나 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선망의 직장(?) 참고 자료[편집] 김윤정, 《조선총독부 중추원 연구》 (경인문화사, 2011)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국학자료원, 1997)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 (청아출판사, 2007)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6) 외부 링크[편집] 조선총독부 관보 활용 시스템 vdeh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총독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 - 1916 |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 - 1919 | 사이토 마코토 1919 - 1927 | 우가키 가즈시게(임시대리) 1927 | 야마나시 한조 1927 - 1929 | 사이토 마코토 1929 - 1931 | 우가키 가즈시게 1931 - 1936 | 미나미 지로 1936 - 1942 | 고이소 구니아키 1942 - 1944 | 아베 노부유키 1944 - 1945정무총감야마가타 이사부로 1910 - 1919 | 미즈노 렌타로 1919 - 1922 | 아리요시 주이치 1922 - 1924 | 시모오카 주지 1924 - 1925 | 유아사 구라헤이 1925 - 1927 | 이케가미 시로 1927 - 1929 | 고다마 히데오 1929 - 1931 |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 - 1936 | 오노 로쿠이치로 1936 - 1942 | 다나카 다케오 1942 - 1944 | 엔도 류사쿠 1944 - 1945청사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기구내부부국 총독관방 재무국 농상국 광공국 법무국 학무국 경무국 외국·관할기관 체신국 교통국 재판소 형무소 중추원 조선사 편수회 폐지(1943년 이전) 사정국 전매국 농상공부 기타 관보 동양척식주식회사 선만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정책 헌병경찰제도 무단 통치 문화 통치 민족말살정책 치안유지법 창씨개명 일선동조론 ※ 참고 : 통감부 · 한일 병합 조약 | 이왕가 · 왕공족 · 이왕직 · 조선귀족 vdeh 일본 제국의 외지의 행정 구역타이완 타이완 총독부 다이호쿠주 신치쿠주 다이추주 다이난주 다카오주 가렌코청 다이토청 호코청 (1926년 당시) 가라후토청 가라후토 민정서 → 가라후토청 도요하라 지청 오토마리 지청 루타카 지청 시쿠카 지청 모토토마리 지청 마오카 지청 도마리오루 지청 혼토 지청 에스토루 지청 우시로 지청 (1922년 당시) 관동주 관동도독부 → 관동청 → 관동국 - 관동주청 다롄 민정지서 뤼순 민정지서 진저우 민정지서 푸란뎬 민정지서 피쯔워 민정지서 (1930년 당시) 조선 조선총독부 경기도 (게이키도) 강원도 (고겐도) 충청북도 (주세이호쿠도) 충청남도 (주세이난도) 전라북도 (젠라호쿠도) 전라남도 (젠라난도) 경상북도 (게이쇼호쿠도) 경상남도 (게이쇼난도) 평안남도 (헤이안난도) 평안북도 (헤이안호쿠도) 황해도 (고카이도) 함경남도 (간쿄난도) 함경북도 (간쿄호쿠도) 남양 군도 임시남양군도방비대 민정서 → 남양청 사이판 지청 팔라우 지청 야프 지청 트루크 지청 포나페 지청 마셜 제도 (1922년 당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선총독부&oldid=24436862" 분류: 일본 육군 대장일본의 원수일본 해군 대장조선총독부1910년 설립1945년 폐지일제 강점기일본의 군사정부폐지된 일본의 국가기관일제 강점기의 행정한국의 군정기한국의 역사전간기의 정체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orskРусский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6일 (일) 17:0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일제 시대 때 경복궁에 지어졌으며 1995년 철거된 것은 무엇인가? |
백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서쪽을 관장하는 전설의 동물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백호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백호 백호(白虎)는 사신(四神)의 하나로 서쪽(西)을 관장하고 있다. 벽화에 그려지는 백호는 일반적으로 용의 모습, 또는 흰호랑이의 머리에 용의 몸통으로 그려진다. 조선 시대에는 실제 흰호랑이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오행 중에서는 쇠(金)를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가을을 관장한다. 동아시아의 별자리에서는 규·루·위·묘·필·자·삼수의 7개 별자리 영역이 이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와 고려 시대의 무덤 벽화에 다른 사신들과 같이 그려졌다. 또한 조선 시대 궁궐의 북쪽 문의 천장에도 백호의 그림이 그려졌다. 목차 1 고분벽화 2 별자리 3 같이 보기 4 대중문화 속의 백호 5 이름이 백호 캐릭터 6 참고 문헌 고분벽화[편집] 집안과 평양의 무덤에서 백호의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백호의 방향이나 형태는 그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집안: 춤무덤(무용총), 환문총(고리무늬무덤), 삼실총, 장천1호분, 통구사신총, 오회분5호묘, 오회분4호묘 평양: 요동성총, 약수리벽화분, 대안리1호분, 쌍영총, 노산동1호분, 우산리3호분, 수렵총, 고산리1호분, 보산리벽화분, 덕화리1호분, 덕화리2호분, 우산리1호분, 개마총, 호남리사신총, 진파리4호분, 진파리1호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별자리[편집] 백호는 다음과 같은 동방의 7개 별자리군을 대표한다. 7개의 대표 별자리들은 전체가 백호의 모양을 이룬다. 총 56개의 별자리로 이루어져 있다 규수: 백호 루수: 백호의 새끼 1 위수: 백호의 새끼 2 묘수: 백호의 새끼 3 필수: 호랑이 자수: 기린 머리 삼수: 기린 몸 같이 보기[편집] 청룡 주작 현무 동아시아의 별자리 대중문화 속의 백호[편집] 꾸러기 수비대 - 사천왕 1호 디지몬 테이머즈 - 백호몬 유유백서 - 백호 탑블레이드 - 레이(드래이거)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 수호랑 둥굴레차! - 백건 둥굴레차! - 백훈 이름이 백호 캐릭터[편집] 슬램덩크 - 강백호 참고 문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백호 이순지, 《천문류초》, 규장각, 조선초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 2000 vdeh동아시아의 별자리삼원 태미원(太微垣) 자미원(紫微垣) 천시원(天市垣) 이십팔수동방칠수(청룡) 각수(角宿) 항수(亢宿) 저수(氐宿) 방수(房宿) 심수(心宿) 미수(尾宿) 기수(箕宿) 북방칠수(현무) 두수(斗宿) 우수(牛宿) 여수(女宿) 허수(虛宿) 위수(危宿) 실수(室宿) 벽수(壁宿) 서방칠수(백호) 규수(奎宿) 누수(婁宿) 위수(胃宿) 묘수(昴宿) 필수(畢宿) 자수(觜宿) 삼수(參宿) 남방칠수(주작) 정수(井宿) 귀수(鬼宿) 유수(柳宿) 성수(星宿) 장수(張宿) 익수(翼宿) 진수(軫宿) vdeh동아시아 전설의 생물사신청룡(靑龍) - 백호(白虎) - 주작(朱雀) - 현무(玄武)오룡청룡(靑龍) - 적룡(赤龍) - 황룡(黃龍) - 백룡(白龍) - 흑룡(黑龍)사령기린(麒麟) - 봉황(鳳凰) - 영귀(靈龜) - 용(龍)사흉혼돈(混沌) - 궁기(窮奇) - 도올(檮杌) - 도철(饕餮)기타천마(天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백호&oldid=24504195" 분류: 사신동아시아의 별자리계절의 신호랑이전설의 동물신화의 동물신화의 포유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sturianuCatalàMìng-dĕ̤ng-ngṳ̄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客家語/Hak-kâ-ngî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Bahasa Melayu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0일 (일) 14: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백호가 대표하는 7개 별자리는 무엇이 있는가? |
KBS대전방송총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BS대전방송총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BS 대전방송총국 1998년 2월 28일에 준공한 KBS 대전방송총국 現 만년동 사옥 한국명 KBS대전방송총국 한자표기 KBS大田放送總局 영문표기 KBS Daejeon Broadcasting Branch Office 약칭 KBS대전 형태 공영 방송 방송 영역 지상파 방송 창립일 1940년 8월 5일 개국일 1943년 7월 7일 본사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117번길 128 사장 이완희 (총국장) 모기업 한국방송공사 웹사이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KBS大田放送總局)은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지역을 방송구역으로 하는 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총국이다. 지역총국 중 하나로, 하부에 속해있는 지역국은 없다. 목차 1 개요 1.1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2 지국 2 역사 2.1 개국 초기 2.2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 2.3 6.25 전쟁 2.4 기반구축기 2.5 성장발전기 2.6 디지털방송시대 초기 2.7 UHD시대 3 방송 송출 시설망 3.1 TV 3.2 라디오 3.3 지상파DMB 4 프로그램 4.1 KBS 1TV 4.1.1 뉴스 프로그램 4.1.2 TV 프로그램 4.2 라디오 4.2.1 제1라디오 4.2.2 제2라디오 4.2.3 음악FM 5 아나운서 5.1 아나운서 5.2 전직 아나운서 5.2.1 남성 5.2.2 여성 6 기자 6.1 남성 6.2 여성 6.3 전직 기자 6.3.1 남성 6.3.2 여성 7 사진첩 8 각주 9 참고 문헌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43년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창설되어 1986년 12월 KBS 공사 직제개편으로 KBS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천안과 서산에 설치했던 사업소를 폐지했으며, 1998년 2월에는 목동에 있는 사옥을 폐쇄하고 신사옥을 준공하였다. 보도, 지역현안, 지역민 문제에 대한 시사교양적 프로그램을 자체제작하여 편성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방송은 KBS본사의 프로그램을 릴레이 하여 편성하고 있다. 산업기술, 첨단과학의 도시인 대전특성에 맞게 과학프로젝트팀을 운영하여 제작하는 과학프로그램이 전국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다.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편집] 대전방송총국 총국장 부속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심의실 노동조합 KBS노조 대전지부 언론노조 KBS본부 대전지부 편성제작국 TV제작팀 편성팀 아나운서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부장 김연선) 영상제작팀 보도국 취재팀 편집팀 영상취재팀 천안방송센터 홍성방송센터 기술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기술관리팀 제작기술팀 송출정비팀 홍성송출센터 시청자서비스국 총무팀 기획 인사 재원관리팀 천안사업지사 홍성사업지사 지국[편집] 천안방송센터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17(신부동) 홍성방송센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충서로 1373(월산리) 역사[편집] 개국 초기[편집] 조선방송협회대전방송국을 설치할 당시 여건은 매우 나쁜 상태였다. 방송망 구상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가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진주만 폭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자재 구입이나 인력이 부족하고 방송 청취 통제의 강화와 방송의 전쟁 도구화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친 시기였다. 개국하기 전에 앞서서 1940년 8월 5일 대전부 북정 15번지(現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에 13평짜리 건물의 출장소로서 출범하였다. 그 후 1942년 출장소에서 방송국으로 승격하였고 1943년 7월 15일 정식으로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이 개국하였다. (AM 880kHz, 출력 50W, 호출부호 JBIK) 원래는 한국어로 방송하는 제2방송과 함께 세울 계획이었지만 1942년 4월 27일 전파관제가 이루어지면서 제2방송의 전파발사가 일단 중지 되었기 때문에 제1방송만 공사가 진행되어 먼저 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한국어방송은 1943년 11월 10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사옥은 6,600평의 넓은 부지에 기와를 올린 벽돌조 단층 130평의 건물로 연주실, 송신기실, 사무실 등을 마련하고 따로 송신소는 두지 않은 채 방송을 하였다. 그 후 1944년 10월 1일 45M 목주안테나를 설치하여 송신소를 따로 건설하였다.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편집] 광복이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일본인 직원들은 모두 물러나고 한국인 직원들로 채워졌다. 이어 1947년 10월 1일에는 호출부호를 일본식 JBIK에서 한국식의 HLKI로 변경하였고, 1948년 8월 6일에는 사명을 대한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1949년 7월 26일 기존 50W이던 방송 출력을 500W로 높이는 등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였다. 6.25 전쟁[편집]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대전은 임시수도가 되었고 대전방송국은 6월 28일부터 임시중앙방송국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송을 듣고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국무회의에 보고하고, 비밀 방송 수신실을 마련하여 VOA를 비롯해 북한측이 방송하는 서울방송,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모니터하여 작성한 분석보고서를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세워 나가는 등, 대전임시수도 시절동안 대전방송국은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전쟁중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대전방송국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방송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10kW 출력 증강 공사를 하여 서울의 송신소가 가동이 되고 있어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키스테이션이 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기 위해 1951년 11월 8일 공사를 착공하여 1952년 11월 5일 준공하였다. 이로인해 대전방송국은 지역국 중 당시로서는 최초로 10kW의 대출력 송신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기반구축기[편집] 1961년 1월 22일 대전방송국은 사옥을 대흥동으로 이전하고 목동의 사옥자리는 송신소로 사용하였다. 1965년 8월 5일에는 홍성중계소(AM 510kHz)를 설치하여 방송망 확장을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16일에는 충청지역에서 최초로, 대전에 식장산TV중계소가 준공되어 KBS-TV 방송을 중계하였다. KBS-TV 방송망이 확장될 때 식장산 중계소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이 없어서 서울의 전파를 그대로 수신하고 그걸 또 중계하는 방식으로 방송망을 구성하였는데, 식장산은 남한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통해서 전국 TV방송 링크가 구성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곳의 출력이 500W미만이었던 것과는 달리 식장산TV중계소는 유일하게 1kW로 설치되었다. 채널과 출력을 그대로 유지하여 2012년 10월 2일 오후 2시까지 청주방송총국에서 사용하였다. 1973년 3월 1일, KBS가 공사로 출범하게 됨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대전방송국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1976년에는 목동의 송신소를 회덕으로 이전하여 20kW급의 대덕송신소(AM 882kHz)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목동에 청사를 다시 새로 지어 1978년 11월 17일 준공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 한국방송공사의 각 방송국들은 자체TV방송을 시작하였다. 대전방송국도 이를 추진하면서 충청남도 전역까지 가시청권으로 포함해야 된다는 계획을 추진 하면서 계룡산TV송신소를 세우고 1978년 11월 20일부터 전파를 발사하였다. 또한 1981년 3월 20일부터 2TV방송을 시작하고, 1981년 5월 25일 음악FM방송을 개국하는 등 대전방송국에도 여러 방송이 추가되었다. 성장발전기[편집] 1986년 12월 8일 대전방송국은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하게 된다. 이후 1987년 7월 20일, 공주방송국이 신설되면서 공주중계소, 부여중계소, 부여출장소의 담당을 공주방송국으로 이관하게 된다. 1998년 2월 28일에는 만년동의 신사옥으로 이전과 7월 15일에는 신사옥 준공식을 가지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디지털방송시대 초기[편집] 디지털TV방송의 개시에 따라 2001년 12월 5일 제2라디오 FM방송 개국(100.9MHz), 대전방송총국도 2004년 7월 12일 계룡산송신소와 식장산중계소에서 1TV, 2TV 디지털방송을 개국하여 송출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18일에는 계룡산·식장산 EBS-DTV, 2005년 12월 26일에는 흑성산중계소, 2006년 6월 1일에는 원효봉중계소 등 기간급 중계소에도 디지털TV방송 중계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1월 11일부터는 식장산송신소에서 지상파DMB방송을 실시했고 같은해 8월 1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2007년 12월 13일에는 HD뉴스부조와 TOC를 준공하여 HDTV방송의 기반시설을 구축하여 고화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 1월 14일에는 계룡산송신소의 1라디오 표준FM 출력을 증강하여 수신가능지역을 확대하였고, 2009년부터는 디지털TV와 지상파DMB 중계소를 더욱 확충하는 등 디지털방송의 방송망을 꾸준히 구축해나가고 있다. 2012년 10월 16일에는 지상파아날로그TV방송을 종료하고 완전한 디지털TV방송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2013년 10월 16일 오후 2시에는 지상파디지털TV방송의 채널 재배치를 실시하였다. UHD시대[편집] 2017년 12월 29일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 방송개국. 2018년 6월 20일 공주시 KBS대전 2TV UHD와 보령시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와 금산군 KBS대전 1TV UHD 방송개시. 방송 송출 시설망[편집] TV[편집] 1TV 호출부호 : HLKI-DTV 가상채널 : 9-1 2TV 호출부호 : HLQT-DTV 가상채널 : 7-1 송신소 UHD HD 송신소 위치 직접 수신 물리채널 출력 물리채널 출력 1TV 2TV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52 CH 56 2㎾ CH 26 CH 32 1㎾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충주 수신 식장산 중계소 5㎾ CH 14 CH 16 2.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청주 수신 적오산 소출력 CH 14 CH 16 0.05W 대전 유성구 화암동 산11 충주 수신 추부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청주 수신 성당리 소출력 CH 14 CH 16 0.0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충주 수신 진산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청주 수신 군북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충주 수신 금산 중계소 CH 41 CH 42 2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신대리 662-4 청주 수신 제원 중계소 CH 19 CH 20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충주 수신 남이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청주 수신 초현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충주 수신 부리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청주 수신 양촌 중계소 CH 39 CH 40 5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충주 수신 내판 소출력 CH 14 CH 16 0.05W 세종 연동면 송용리 청주 수신 공주 중계소 CH 44 CH 45 2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충주 수신 유구 중계소 CH 29 CH ?? 10W 충남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24 청주 수신 청양 중계소 CH 44 CH 51 2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충주 수신 외산 중계소 CH 21 CH 20 5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주 수신 청라 중계소 CH ?? CH ?? 5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충주 수신 옥마산 중계소 CH 28 CH 36 9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청주 수신 비인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충주 수신 판교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청주 수신 서천 중계소 CH 28 CH 36 2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충주 수신 흑성산 중계소 CH 44 CH 50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청주 수신 원효봉 중계소 CH 23 CH 21 1㎾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충주 수신 당진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청주 수신 정미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충주 수신 갈산 중계소 CH 14 CH 15 5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청주 수신 안면 소출력 CH 23 CH 21 0.05W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충주 수신 아날로그TV 2012년 10월 16일 오후 2시 방송 종료(대한민국의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참고) 1TV 호출부호 : HLKI-TV 2TV 호출부호 : HLQT-TV 송신소 채널 출력 송신소 위치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6 CH 42 10㎾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식장산 중계소 CH 56 CH 48 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추부 중계소 CH 12 CH 44 1W/10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진산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군북 중계소 CH 10 CH 25 1W/10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금산 중계소 CH 29 CH 35 5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176 제원 중계소 CH 23 CH 47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남이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초현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부리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양촌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공주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청양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외산 중계소 CH 29 CH 37 10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라 중계소 CH 44 CH 47 10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옥마산 중계소 CH 20 CH 24 5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옥마산 비인 중계소 CH 35 CH 47 10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판교 중계소 CH 29 CH 35 10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서천 중계소 CH 53 CH 36 10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흑성산 중계소 CH 47 CH 51 10㎾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원효봉 중계소 CH 31 CH 35 5㎾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당진 중계소 CH 19 CH 54 5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정미 중계소 CH 54 CH 44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갈산 중계소 CH 21 CH 25 10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라디오[편집] KBS대전 제1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대덕 송신소 AM 882㎑ 20㎾ HLKI 대전 대덕구 와동 291-2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계룡산 송신소 FM 94.7㎒ 3㎾ HLKI-S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흑성산 송신소 FM 89.9㎒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산32-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원효봉 중계소 FM 88.1㎒ 250W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옥마산 중계소 FM 107.3㎒ 1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서천 중계소 FM 88.9㎒ 9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컴퓨터 마이크:전주 송출 KBS대전 제2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식장산 송신소 FM 100.9㎒ 3㎾ HLQT-SFM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KBS대전 음악FM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계룡산 송신소 FM 98.5㎒ 5㎾ HLKI-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지상파DMB[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KBS § 방송 송출 시설망입니다. 프로그램[편집] KBS 1TV[편집] 뉴스 프로그램[편집] 프로그램명 방송시간 편성시간 앵커 KBS 뉴스광장 대전·세종·충남 15분 월요일 ~ 금요일 오전 7시 35분 ~ 7시 50분 김연선 KBS 930 뉴스 대전·세종·충남 10분 평일 오전 9시 50분 ~ 10시 박명원 KBS 뉴스 7 대전·세종·충남 5분 평일 저녁 7시 20분 ~ 7시 25분 박병준 KBS 뉴스 9 대전·세종·충남 월요일 ~ 금요일 10분토요일 10분 평일 밤 9시 35분 ~ 9시 45분주말 밤 9시 20분 ~ 9시 30분 양민오, 전유미(평일) 김연선 (주말) TV 프로그램[편집] 모든방송은 HD기준인 동시에 지역총국은 DMB방송을 하지않으며 6시 내고향은 월~목요일사이에 네트워크 제작을 한다. 방송 시간 방송 프로그램 비고 17:30 (월~목) 전국을 달린다 스페셜은 금요일 11시 방송 17:40 (월~목) TV이웃 다정다감 19:35 (화) 산촌일기메아리 마지막주방송 19:35 (수) 거북이늬우스 08:25 (금) 아침마당(생생토크 자체방송) 16:00 (금) KBS 대전 생생토론 17:30 (금) 이야기가 있는 풍경 라디오[편집] 제1라디오[편집] KBS대전 생생뉴스 (시사교양, 평일,08:30~08:58)(진행 방석준) 5시 N 대.세.남 (시사교양, 평일,17:05~17:58)(진행 김연선) 제2라디오[편집] 전유미의 뮤직 런 (연예오락, 평일,18:00~19:00)(진행 전유미) 프로야구 중계방송 (진행 김연선) 음악FM[편집] 김숙경의 팝브런치 (음악, 평일,11:00~12:00)(진행 김숙경) 아나운서[편집] 아나운서[편집] KBS대전 아나운서 입사연도 기수 남성 여성 1995년 (21기) 김연선 2001년 (27기) 김숙경 2004년 (30기) 최연수 2005년 (31기) 전유미 2007년 (33기) 박명원 2008년 (34기) 손지화 전직 아나운서[편집] 남성[편집] 김윤한(1968~1985, 전 KBS 서울본국) 이종태(1981~2008, 현 KNN 아나운서) 박윤도(1985~2010, 현 퇴사) 조건진(1987~1988, 현 KBS 서울본국) 윤성원(1993~1994, 전 KBS 서울본국) 박상규(1993~1996, 전 SBS 기자/현 채널A 앵커) 양민오(1995~2004, 현 KBS 대전총국 보도국 편집부장) 유지철(1995~2000, 현 KBS 서울본국) 최시중(1996~2003, 현 KBS 서울본국) 박성준(1996~2012, 현 JTBC 아나운서 팀장) 이재홍(1998~1999, 현 KBS 서울본국) 이정헌(1998~1999, 전 JTV 기자/현 JTBC 기자, 앵커) 여성[편집] 김이숙(1990~2003, 퇴사) 지승현(2000~2001, 전 KBS 서울본국, 현 프리랜서 MC) 배유선(1978~2012, 퇴사) 변우영(1994~1997, 현 KBS 서울본국) 김여진(1998~2004, 현 YTN 아나운서) 박주아(2000~2001, 현 KBS 서울본국) 주혜연(2001~2008, 현 퇴사/2009~2010, 전 KFN 국군방송 아나운서) 위서현(2003~2004, 현 KBS 서울본국) 이승연(2004~2005, 현 KBS 서울본국) 김지연(2010~2016, 현 KBS 대전총국 심의실 사원) 기자[편집] 남성[편집] 유진환(보도국장) 박종오 김병창(차장) 서영준 황정환 박병준 조영호 송민석 이용순 박해평 김용만 최선중 방석준 박장훈 성용희 백상현 이수복 복병민 정재훈 여성[편집] 이정은 박지은 홍정표 조정아 이연경 한솔 전직 기자[편집] 남성[편집] 이재호 유승영 곽영지 김진원 홍지명 서기상 최성원 이종국 이정두 김택현 김성우 이재희 여성[편집] 박에스더 김양순 윤진 김빛이라 이지윤 홍화경 사진첩[편집] 대덕대교에서 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 (북향) KBS대전방송총국 전경.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외부 링크[편집] KBS대전방송총국 공식 홈페이지 vdeh충청권의 지상파 방송사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경북권 경남권 제주권 TV방송국대전·세종·충남 TJB 5 KBS 2TV 7 KBS 1TV대전 9 EBS1 10-1 EBS2 10-2 대전MBC 11 충청북도 CJB 6 KBS 2TV 7 KBS 1TV,청주 9 EBS1 10-1 EBS2 10-2 MBC충북(청주/충주) 11 라디오방송국대전·세종·충남 KBS대전(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대전MBC 라디오 대전MBC FM4U TJB PowerFM대전CBS 라디오 febc대전극동방송 CPBC대전가톨릭평화방송TBN대전교통방송 대전국악방송 금강FM 국방FM 충북 중부, 남부 KBS청주(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MBC충북 청주 라디오 MBC충북 청주 FM4U CJB JoyFMCBS청주 라디오 BBS청주불교방송 TBN대전교통방송 국방FM 충북 북부 KBS충주 (제1라디오/음악FM) MBC충북 충주 라디오 MBC충북 충주 FM4U CJB JoyFM TBN대전교통방송 지상파DMBMY MBCTV my MBC11 GS SHOP CJ오쇼핑 TPEG DMB Drive U-KBSTV KBS STAR KBS HEART V-Radio KBS MUSIC TPEG KBS MOZEN TPEG TJB uTV TJB-SBSu CJB-mYTN 현대홈쇼핑 TPEG DTS vdeh텔레비전 KBS 1TV KBS 2TV KBS 24시 뉴스 KBS 월드TV KBS 월드 24 라디오 KBS 1라디오 KBS 2라디오(해피FM) KBS 클래식FM KBS 쿨FM KBS 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KBS 한민족방송 KBS 월드라디오 지상파 DMB U-KBS (U-KBS 스타 U-KBS 하트 U-KBS 뮤직 U-KBS 클로버) 지역방송국경기권한국방송공사(KBS 본사)(경인방송센터)강원권춘천방송총국(원주방송국 · 강릉방송국)충북권청주방송총국(충주방송국)충남권대전방송총국전북권전주방송총국전남권광주방송총국(목포방송국 · 순천방송국)경북권대구방송총국(안동방송국 · 포항방송국)경남권부산방송총국(울산방송국) · 창원방송총국(진주방송국)제주권제주방송총국KBS N KBS N 스포츠 KBS 드라마 KBS 조이 KBS N 라이프 KBS W KBS 키즈 KBS N 플러스 자회사 KBS N KBS 미디어 KBS 아트비전 KBS 비즈니스(KBS스포츠월드) KBS 아메리카 KBS 재팬 KBS 교향악단 KBS 미제휴사 EBS EBS 1TV EBS 2TV EBS FM (책 읽어주는 라디오) EBS i-Radio (인터넷 어학 라디오) EBS english EBS 플러스 1 EBS 플러스 2 EBS KIDS EBS 아메리카 EBSi EBSlang EBS 스페이스 공감 EBS 원격교육연수원 EBS EDRB EBS미디어 국방홍보원 국방일보 국방TV 국방FM 환경TV 상생방송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폐국 · 명칭 변경이전 계열사 및 채널 속초방송국 태백방송국 영월방송국 공주방송국 여수방송국 군산방송국 남원방송국 KBS 3TV KBS TV KBS 위성 1TV(KBS1) KBS 위성 2TV(KBS2) KBS 코리아 KBS 프라임 KBS 스포츠채널 스카이 KBS 스포츠 KBS 스카이 스포츠 KBS 드라마채널 스카이 KBS 드라마 KBS 스카이 드라마 KBS 교육라디오 구 제3라디오 KBS 영상사업단 스카이 KBS KFN 국군방송TV 국군방송 FM 라디오 EBS TV EBS 위성1 EBS 위성2 EBS u 센추리TV CTN 방송광고향상협의회/공익광고협의회/한국방송광고공사 OSB 동양위성TV/OSB 코리아 OSB 1TV OSB NTV OSB 오락 OSB 무협 무협TV OSB 3TV OSB DTV OSB 드라마 OSB 크리스천TV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BS대전방송총국&oldid=24517223" 분류: 대한민국의 방송국1943년 설립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국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지상파 방송국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3일 (수) 10: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전이 임시수도가 된 후에 대전 방송국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
KBS대전방송총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BS대전방송총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BS 대전방송총국 1998년 2월 28일에 준공한 KBS 대전방송총국 現 만년동 사옥 한국명 KBS대전방송총국 한자표기 KBS大田放送總局 영문표기 KBS Daejeon Broadcasting Branch Office 약칭 KBS대전 형태 공영 방송 방송 영역 지상파 방송 창립일 1940년 8월 5일 개국일 1943년 7월 7일 본사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117번길 128 사장 이완희 (총국장) 모기업 한국방송공사 웹사이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KBS大田放送總局)은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지역을 방송구역으로 하는 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총국이다. 지역총국 중 하나로, 하부에 속해있는 지역국은 없다. 목차 1 개요 1.1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2 지국 2 역사 2.1 개국 초기 2.2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 2.3 6.25 전쟁 2.4 기반구축기 2.5 성장발전기 2.6 디지털방송시대 초기 2.7 UHD시대 3 방송 송출 시설망 3.1 TV 3.2 라디오 3.3 지상파DMB 4 프로그램 4.1 KBS 1TV 4.1.1 뉴스 프로그램 4.1.2 TV 프로그램 4.2 라디오 4.2.1 제1라디오 4.2.2 제2라디오 4.2.3 음악FM 5 아나운서 5.1 아나운서 5.2 전직 아나운서 5.2.1 남성 5.2.2 여성 6 기자 6.1 남성 6.2 여성 6.3 전직 기자 6.3.1 남성 6.3.2 여성 7 사진첩 8 각주 9 참고 문헌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43년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창설되어 1986년 12월 KBS 공사 직제개편으로 KBS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천안과 서산에 설치했던 사업소를 폐지했으며, 1998년 2월에는 목동에 있는 사옥을 폐쇄하고 신사옥을 준공하였다. 보도, 지역현안, 지역민 문제에 대한 시사교양적 프로그램을 자체제작하여 편성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방송은 KBS본사의 프로그램을 릴레이 하여 편성하고 있다. 산업기술, 첨단과학의 도시인 대전특성에 맞게 과학프로젝트팀을 운영하여 제작하는 과학프로그램이 전국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다.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편집] 대전방송총국 총국장 부속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심의실 노동조합 KBS노조 대전지부 언론노조 KBS본부 대전지부 편성제작국 TV제작팀 편성팀 아나운서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부장 김연선) 영상제작팀 보도국 취재팀 편집팀 영상취재팀 천안방송센터 홍성방송센터 기술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기술관리팀 제작기술팀 송출정비팀 홍성송출센터 시청자서비스국 총무팀 기획 인사 재원관리팀 천안사업지사 홍성사업지사 지국[편집] 천안방송센터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17(신부동) 홍성방송센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충서로 1373(월산리) 역사[편집] 개국 초기[편집] 조선방송협회대전방송국을 설치할 당시 여건은 매우 나쁜 상태였다. 방송망 구상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가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진주만 폭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자재 구입이나 인력이 부족하고 방송 청취 통제의 강화와 방송의 전쟁 도구화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친 시기였다. 개국하기 전에 앞서서 1940년 8월 5일 대전부 북정 15번지(現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에 13평짜리 건물의 출장소로서 출범하였다. 그 후 1942년 출장소에서 방송국으로 승격하였고 1943년 7월 15일 정식으로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이 개국하였다. (AM 880kHz, 출력 50W, 호출부호 JBIK) 원래는 한국어로 방송하는 제2방송과 함께 세울 계획이었지만 1942년 4월 27일 전파관제가 이루어지면서 제2방송의 전파발사가 일단 중지 되었기 때문에 제1방송만 공사가 진행되어 먼저 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한국어방송은 1943년 11월 10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사옥은 6,600평의 넓은 부지에 기와를 올린 벽돌조 단층 130평의 건물로 연주실, 송신기실, 사무실 등을 마련하고 따로 송신소는 두지 않은 채 방송을 하였다. 그 후 1944년 10월 1일 45M 목주안테나를 설치하여 송신소를 따로 건설하였다.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편집] 광복이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일본인 직원들은 모두 물러나고 한국인 직원들로 채워졌다. 이어 1947년 10월 1일에는 호출부호를 일본식 JBIK에서 한국식의 HLKI로 변경하였고, 1948년 8월 6일에는 사명을 대한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1949년 7월 26일 기존 50W이던 방송 출력을 500W로 높이는 등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였다. 6.25 전쟁[편집]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대전은 임시수도가 되었고 대전방송국은 6월 28일부터 임시중앙방송국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송을 듣고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국무회의에 보고하고, 비밀 방송 수신실을 마련하여 VOA를 비롯해 북한측이 방송하는 서울방송,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모니터하여 작성한 분석보고서를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세워 나가는 등, 대전임시수도 시절동안 대전방송국은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전쟁중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대전방송국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방송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10kW 출력 증강 공사를 하여 서울의 송신소가 가동이 되고 있어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키스테이션이 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기 위해 1951년 11월 8일 공사를 착공하여 1952년 11월 5일 준공하였다. 이로인해 대전방송국은 지역국 중 당시로서는 최초로 10kW의 대출력 송신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기반구축기[편집] 1961년 1월 22일 대전방송국은 사옥을 대흥동으로 이전하고 목동의 사옥자리는 송신소로 사용하였다. 1965년 8월 5일에는 홍성중계소(AM 510kHz)를 설치하여 방송망 확장을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16일에는 충청지역에서 최초로, 대전에 식장산TV중계소가 준공되어 KBS-TV 방송을 중계하였다. KBS-TV 방송망이 확장될 때 식장산 중계소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이 없어서 서울의 전파를 그대로 수신하고 그걸 또 중계하는 방식으로 방송망을 구성하였는데, 식장산은 남한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통해서 전국 TV방송 링크가 구성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곳의 출력이 500W미만이었던 것과는 달리 식장산TV중계소는 유일하게 1kW로 설치되었다. 채널과 출력을 그대로 유지하여 2012년 10월 2일 오후 2시까지 청주방송총국에서 사용하였다. 1973년 3월 1일, KBS가 공사로 출범하게 됨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대전방송국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1976년에는 목동의 송신소를 회덕으로 이전하여 20kW급의 대덕송신소(AM 882kHz)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목동에 청사를 다시 새로 지어 1978년 11월 17일 준공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 한국방송공사의 각 방송국들은 자체TV방송을 시작하였다. 대전방송국도 이를 추진하면서 충청남도 전역까지 가시청권으로 포함해야 된다는 계획을 추진 하면서 계룡산TV송신소를 세우고 1978년 11월 20일부터 전파를 발사하였다. 또한 1981년 3월 20일부터 2TV방송을 시작하고, 1981년 5월 25일 음악FM방송을 개국하는 등 대전방송국에도 여러 방송이 추가되었다. 성장발전기[편집] 1986년 12월 8일 대전방송국은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하게 된다. 이후 1987년 7월 20일, 공주방송국이 신설되면서 공주중계소, 부여중계소, 부여출장소의 담당을 공주방송국으로 이관하게 된다. 1998년 2월 28일에는 만년동의 신사옥으로 이전과 7월 15일에는 신사옥 준공식을 가지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디지털방송시대 초기[편집] 디지털TV방송의 개시에 따라 2001년 12월 5일 제2라디오 FM방송 개국(100.9MHz), 대전방송총국도 2004년 7월 12일 계룡산송신소와 식장산중계소에서 1TV, 2TV 디지털방송을 개국하여 송출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18일에는 계룡산·식장산 EBS-DTV, 2005년 12월 26일에는 흑성산중계소, 2006년 6월 1일에는 원효봉중계소 등 기간급 중계소에도 디지털TV방송 중계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1월 11일부터는 식장산송신소에서 지상파DMB방송을 실시했고 같은해 8월 1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2007년 12월 13일에는 HD뉴스부조와 TOC를 준공하여 HDTV방송의 기반시설을 구축하여 고화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 1월 14일에는 계룡산송신소의 1라디오 표준FM 출력을 증강하여 수신가능지역을 확대하였고, 2009년부터는 디지털TV와 지상파DMB 중계소를 더욱 확충하는 등 디지털방송의 방송망을 꾸준히 구축해나가고 있다. 2012년 10월 16일에는 지상파아날로그TV방송을 종료하고 완전한 디지털TV방송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2013년 10월 16일 오후 2시에는 지상파디지털TV방송의 채널 재배치를 실시하였다. UHD시대[편집] 2017년 12월 29일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 방송개국. 2018년 6월 20일 공주시 KBS대전 2TV UHD와 보령시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와 금산군 KBS대전 1TV UHD 방송개시. 방송 송출 시설망[편집] TV[편집] 1TV 호출부호 : HLKI-DTV 가상채널 : 9-1 2TV 호출부호 : HLQT-DTV 가상채널 : 7-1 송신소 UHD HD 송신소 위치 직접 수신 물리채널 출력 물리채널 출력 1TV 2TV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52 CH 56 2㎾ CH 26 CH 32 1㎾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충주 수신 식장산 중계소 5㎾ CH 14 CH 16 2.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청주 수신 적오산 소출력 CH 14 CH 16 0.05W 대전 유성구 화암동 산11 충주 수신 추부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청주 수신 성당리 소출력 CH 14 CH 16 0.0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충주 수신 진산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청주 수신 군북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충주 수신 금산 중계소 CH 41 CH 42 2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신대리 662-4 청주 수신 제원 중계소 CH 19 CH 20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충주 수신 남이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청주 수신 초현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충주 수신 부리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청주 수신 양촌 중계소 CH 39 CH 40 5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충주 수신 내판 소출력 CH 14 CH 16 0.05W 세종 연동면 송용리 청주 수신 공주 중계소 CH 44 CH 45 2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충주 수신 유구 중계소 CH 29 CH ?? 10W 충남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24 청주 수신 청양 중계소 CH 44 CH 51 2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충주 수신 외산 중계소 CH 21 CH 20 5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주 수신 청라 중계소 CH ?? CH ?? 5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충주 수신 옥마산 중계소 CH 28 CH 36 9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청주 수신 비인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충주 수신 판교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청주 수신 서천 중계소 CH 28 CH 36 2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충주 수신 흑성산 중계소 CH 44 CH 50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청주 수신 원효봉 중계소 CH 23 CH 21 1㎾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충주 수신 당진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청주 수신 정미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충주 수신 갈산 중계소 CH 14 CH 15 5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청주 수신 안면 소출력 CH 23 CH 21 0.05W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충주 수신 아날로그TV 2012년 10월 16일 오후 2시 방송 종료(대한민국의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참고) 1TV 호출부호 : HLKI-TV 2TV 호출부호 : HLQT-TV 송신소 채널 출력 송신소 위치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6 CH 42 10㎾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식장산 중계소 CH 56 CH 48 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추부 중계소 CH 12 CH 44 1W/10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진산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군북 중계소 CH 10 CH 25 1W/10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금산 중계소 CH 29 CH 35 5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176 제원 중계소 CH 23 CH 47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남이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초현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부리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양촌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공주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청양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외산 중계소 CH 29 CH 37 10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라 중계소 CH 44 CH 47 10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옥마산 중계소 CH 20 CH 24 5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옥마산 비인 중계소 CH 35 CH 47 10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판교 중계소 CH 29 CH 35 10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서천 중계소 CH 53 CH 36 10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흑성산 중계소 CH 47 CH 51 10㎾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원효봉 중계소 CH 31 CH 35 5㎾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당진 중계소 CH 19 CH 54 5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정미 중계소 CH 54 CH 44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갈산 중계소 CH 21 CH 25 10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라디오[편집] KBS대전 제1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대덕 송신소 AM 882㎑ 20㎾ HLKI 대전 대덕구 와동 291-2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계룡산 송신소 FM 94.7㎒ 3㎾ HLKI-S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흑성산 송신소 FM 89.9㎒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산32-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원효봉 중계소 FM 88.1㎒ 250W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옥마산 중계소 FM 107.3㎒ 1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서천 중계소 FM 88.9㎒ 9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컴퓨터 마이크:전주 송출 KBS대전 제2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식장산 송신소 FM 100.9㎒ 3㎾ HLQT-SFM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KBS대전 음악FM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계룡산 송신소 FM 98.5㎒ 5㎾ HLKI-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지상파DMB[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KBS § 방송 송출 시설망입니다. 프로그램[편집] KBS 1TV[편집] 뉴스 프로그램[편집] 프로그램명 방송시간 편성시간 앵커 KBS 뉴스광장 대전·세종·충남 15분 월요일 ~ 금요일 오전 7시 35분 ~ 7시 50분 김연선 KBS 930 뉴스 대전·세종·충남 10분 평일 오전 9시 50분 ~ 10시 박명원 KBS 뉴스 7 대전·세종·충남 5분 평일 저녁 7시 20분 ~ 7시 25분 박병준 KBS 뉴스 9 대전·세종·충남 월요일 ~ 금요일 10분토요일 10분 평일 밤 9시 35분 ~ 9시 45분주말 밤 9시 20분 ~ 9시 30분 양민오, 전유미(평일) 김연선 (주말) TV 프로그램[편집] 모든방송은 HD기준인 동시에 지역총국은 DMB방송을 하지않으며 6시 내고향은 월~목요일사이에 네트워크 제작을 한다. 방송 시간 방송 프로그램 비고 17:30 (월~목) 전국을 달린다 스페셜은 금요일 11시 방송 17:40 (월~목) TV이웃 다정다감 19:35 (화) 산촌일기메아리 마지막주방송 19:35 (수) 거북이늬우스 08:25 (금) 아침마당(생생토크 자체방송) 16:00 (금) KBS 대전 생생토론 17:30 (금) 이야기가 있는 풍경 라디오[편집] 제1라디오[편집] KBS대전 생생뉴스 (시사교양, 평일,08:30~08:58)(진행 방석준) 5시 N 대.세.남 (시사교양, 평일,17:05~17:58)(진행 김연선) 제2라디오[편집] 전유미의 뮤직 런 (연예오락, 평일,18:00~19:00)(진행 전유미) 프로야구 중계방송 (진행 김연선) 음악FM[편집] 김숙경의 팝브런치 (음악, 평일,11:00~12:00)(진행 김숙경) 아나운서[편집] 아나운서[편집] KBS대전 아나운서 입사연도 기수 남성 여성 1995년 (21기) 김연선 2001년 (27기) 김숙경 2004년 (30기) 최연수 2005년 (31기) 전유미 2007년 (33기) 박명원 2008년 (34기) 손지화 전직 아나운서[편집] 남성[편집] 김윤한(1968~1985, 전 KBS 서울본국) 이종태(1981~2008, 현 KNN 아나운서) 박윤도(1985~2010, 현 퇴사) 조건진(1987~1988, 현 KBS 서울본국) 윤성원(1993~1994, 전 KBS 서울본국) 박상규(1993~1996, 전 SBS 기자/현 채널A 앵커) 양민오(1995~2004, 현 KBS 대전총국 보도국 편집부장) 유지철(1995~2000, 현 KBS 서울본국) 최시중(1996~2003, 현 KBS 서울본국) 박성준(1996~2012, 현 JTBC 아나운서 팀장) 이재홍(1998~1999, 현 KBS 서울본국) 이정헌(1998~1999, 전 JTV 기자/현 JTBC 기자, 앵커) 여성[편집] 김이숙(1990~2003, 퇴사) 지승현(2000~2001, 전 KBS 서울본국, 현 프리랜서 MC) 배유선(1978~2012, 퇴사) 변우영(1994~1997, 현 KBS 서울본국) 김여진(1998~2004, 현 YTN 아나운서) 박주아(2000~2001, 현 KBS 서울본국) 주혜연(2001~2008, 현 퇴사/2009~2010, 전 KFN 국군방송 아나운서) 위서현(2003~2004, 현 KBS 서울본국) 이승연(2004~2005, 현 KBS 서울본국) 김지연(2010~2016, 현 KBS 대전총국 심의실 사원) 기자[편집] 남성[편집] 유진환(보도국장) 박종오 김병창(차장) 서영준 황정환 박병준 조영호 송민석 이용순 박해평 김용만 최선중 방석준 박장훈 성용희 백상현 이수복 복병민 정재훈 여성[편집] 이정은 박지은 홍정표 조정아 이연경 한솔 전직 기자[편집] 남성[편집] 이재호 유승영 곽영지 김진원 홍지명 서기상 최성원 이종국 이정두 김택현 김성우 이재희 여성[편집] 박에스더 김양순 윤진 김빛이라 이지윤 홍화경 사진첩[편집] 대덕대교에서 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 (북향) KBS대전방송총국 전경.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외부 링크[편집] KBS대전방송총국 공식 홈페이지 vdeh충청권의 지상파 방송사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경북권 경남권 제주권 TV방송국대전·세종·충남 TJB 5 KBS 2TV 7 KBS 1TV대전 9 EBS1 10-1 EBS2 10-2 대전MBC 11 충청북도 CJB 6 KBS 2TV 7 KBS 1TV,청주 9 EBS1 10-1 EBS2 10-2 MBC충북(청주/충주) 11 라디오방송국대전·세종·충남 KBS대전(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대전MBC 라디오 대전MBC FM4U TJB PowerFM대전CBS 라디오 febc대전극동방송 CPBC대전가톨릭평화방송TBN대전교통방송 대전국악방송 금강FM 국방FM 충북 중부, 남부 KBS청주(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MBC충북 청주 라디오 MBC충북 청주 FM4U CJB JoyFMCBS청주 라디오 BBS청주불교방송 TBN대전교통방송 국방FM 충북 북부 KBS충주 (제1라디오/음악FM) MBC충북 충주 라디오 MBC충북 충주 FM4U CJB JoyFM TBN대전교통방송 지상파DMBMY MBCTV my MBC11 GS SHOP CJ오쇼핑 TPEG DMB Drive U-KBSTV KBS STAR KBS HEART V-Radio KBS MUSIC TPEG KBS MOZEN TPEG TJB uTV TJB-SBSu CJB-mYTN 현대홈쇼핑 TPEG DTS vdeh텔레비전 KBS 1TV KBS 2TV KBS 24시 뉴스 KBS 월드TV KBS 월드 24 라디오 KBS 1라디오 KBS 2라디오(해피FM) KBS 클래식FM KBS 쿨FM KBS 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KBS 한민족방송 KBS 월드라디오 지상파 DMB U-KBS (U-KBS 스타 U-KBS 하트 U-KBS 뮤직 U-KBS 클로버) 지역방송국경기권한국방송공사(KBS 본사)(경인방송센터)강원권춘천방송총국(원주방송국 · 강릉방송국)충북권청주방송총국(충주방송국)충남권대전방송총국전북권전주방송총국전남권광주방송총국(목포방송국 · 순천방송국)경북권대구방송총국(안동방송국 · 포항방송국)경남권부산방송총국(울산방송국) · 창원방송총국(진주방송국)제주권제주방송총국KBS N KBS N 스포츠 KBS 드라마 KBS 조이 KBS N 라이프 KBS W KBS 키즈 KBS N 플러스 자회사 KBS N KBS 미디어 KBS 아트비전 KBS 비즈니스(KBS스포츠월드) KBS 아메리카 KBS 재팬 KBS 교향악단 KBS 미제휴사 EBS EBS 1TV EBS 2TV EBS FM (책 읽어주는 라디오) EBS i-Radio (인터넷 어학 라디오) EBS english EBS 플러스 1 EBS 플러스 2 EBS KIDS EBS 아메리카 EBSi EBSlang EBS 스페이스 공감 EBS 원격교육연수원 EBS EDRB EBS미디어 국방홍보원 국방일보 국방TV 국방FM 환경TV 상생방송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폐국 · 명칭 변경이전 계열사 및 채널 속초방송국 태백방송국 영월방송국 공주방송국 여수방송국 군산방송국 남원방송국 KBS 3TV KBS TV KBS 위성 1TV(KBS1) KBS 위성 2TV(KBS2) KBS 코리아 KBS 프라임 KBS 스포츠채널 스카이 KBS 스포츠 KBS 스카이 스포츠 KBS 드라마채널 스카이 KBS 드라마 KBS 스카이 드라마 KBS 교육라디오 구 제3라디오 KBS 영상사업단 스카이 KBS KFN 국군방송TV 국군방송 FM 라디오 EBS TV EBS 위성1 EBS 위성2 EBS u 센추리TV CTN 방송광고향상협의회/공익광고협의회/한국방송광고공사 OSB 동양위성TV/OSB 코리아 OSB 1TV OSB NTV OSB 오락 OSB 무협 무협TV OSB 3TV OSB DTV OSB 드라마 OSB 크리스천TV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BS대전방송총국&oldid=24517223" 분류: 대한민국의 방송국1943년 설립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국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지상파 방송국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3일 (수) 10: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디지털tv방송이 생겨나면서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
KBS대전방송총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BS대전방송총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BS 대전방송총국 1998년 2월 28일에 준공한 KBS 대전방송총국 現 만년동 사옥 한국명 KBS대전방송총국 한자표기 KBS大田放送總局 영문표기 KBS Daejeon Broadcasting Branch Office 약칭 KBS대전 형태 공영 방송 방송 영역 지상파 방송 창립일 1940년 8월 5일 개국일 1943년 7월 7일 본사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117번길 128 사장 이완희 (총국장) 모기업 한국방송공사 웹사이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KBS大田放送總局)은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지역을 방송구역으로 하는 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총국이다. 지역총국 중 하나로, 하부에 속해있는 지역국은 없다. 목차 1 개요 1.1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2 지국 2 역사 2.1 개국 초기 2.2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 2.3 6.25 전쟁 2.4 기반구축기 2.5 성장발전기 2.6 디지털방송시대 초기 2.7 UHD시대 3 방송 송출 시설망 3.1 TV 3.2 라디오 3.3 지상파DMB 4 프로그램 4.1 KBS 1TV 4.1.1 뉴스 프로그램 4.1.2 TV 프로그램 4.2 라디오 4.2.1 제1라디오 4.2.2 제2라디오 4.2.3 음악FM 5 아나운서 5.1 아나운서 5.2 전직 아나운서 5.2.1 남성 5.2.2 여성 6 기자 6.1 남성 6.2 여성 6.3 전직 기자 6.3.1 남성 6.3.2 여성 7 사진첩 8 각주 9 참고 문헌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43년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창설되어 1986년 12월 KBS 공사 직제개편으로 KBS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천안과 서산에 설치했던 사업소를 폐지했으며, 1998년 2월에는 목동에 있는 사옥을 폐쇄하고 신사옥을 준공하였다. 보도, 지역현안, 지역민 문제에 대한 시사교양적 프로그램을 자체제작하여 편성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방송은 KBS본사의 프로그램을 릴레이 하여 편성하고 있다. 산업기술, 첨단과학의 도시인 대전특성에 맞게 과학프로젝트팀을 운영하여 제작하는 과학프로그램이 전국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다.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편집] 대전방송총국 총국장 부속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심의실 노동조합 KBS노조 대전지부 언론노조 KBS본부 대전지부 편성제작국 TV제작팀 편성팀 아나운서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부장 김연선) 영상제작팀 보도국 취재팀 편집팀 영상취재팀 천안방송센터 홍성방송센터 기술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기술관리팀 제작기술팀 송출정비팀 홍성송출센터 시청자서비스국 총무팀 기획 인사 재원관리팀 천안사업지사 홍성사업지사 지국[편집] 천안방송센터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17(신부동) 홍성방송센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충서로 1373(월산리) 역사[편집] 개국 초기[편집] 조선방송협회대전방송국을 설치할 당시 여건은 매우 나쁜 상태였다. 방송망 구상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가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진주만 폭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자재 구입이나 인력이 부족하고 방송 청취 통제의 강화와 방송의 전쟁 도구화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친 시기였다. 개국하기 전에 앞서서 1940년 8월 5일 대전부 북정 15번지(現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에 13평짜리 건물의 출장소로서 출범하였다. 그 후 1942년 출장소에서 방송국으로 승격하였고 1943년 7월 15일 정식으로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이 개국하였다. (AM 880kHz, 출력 50W, 호출부호 JBIK) 원래는 한국어로 방송하는 제2방송과 함께 세울 계획이었지만 1942년 4월 27일 전파관제가 이루어지면서 제2방송의 전파발사가 일단 중지 되었기 때문에 제1방송만 공사가 진행되어 먼저 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한국어방송은 1943년 11월 10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사옥은 6,600평의 넓은 부지에 기와를 올린 벽돌조 단층 130평의 건물로 연주실, 송신기실, 사무실 등을 마련하고 따로 송신소는 두지 않은 채 방송을 하였다. 그 후 1944년 10월 1일 45M 목주안테나를 설치하여 송신소를 따로 건설하였다.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편집] 광복이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일본인 직원들은 모두 물러나고 한국인 직원들로 채워졌다. 이어 1947년 10월 1일에는 호출부호를 일본식 JBIK에서 한국식의 HLKI로 변경하였고, 1948년 8월 6일에는 사명을 대한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1949년 7월 26일 기존 50W이던 방송 출력을 500W로 높이는 등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였다. 6.25 전쟁[편집]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대전은 임시수도가 되었고 대전방송국은 6월 28일부터 임시중앙방송국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송을 듣고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국무회의에 보고하고, 비밀 방송 수신실을 마련하여 VOA를 비롯해 북한측이 방송하는 서울방송,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모니터하여 작성한 분석보고서를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세워 나가는 등, 대전임시수도 시절동안 대전방송국은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전쟁중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대전방송국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방송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10kW 출력 증강 공사를 하여 서울의 송신소가 가동이 되고 있어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키스테이션이 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기 위해 1951년 11월 8일 공사를 착공하여 1952년 11월 5일 준공하였다. 이로인해 대전방송국은 지역국 중 당시로서는 최초로 10kW의 대출력 송신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기반구축기[편집] 1961년 1월 22일 대전방송국은 사옥을 대흥동으로 이전하고 목동의 사옥자리는 송신소로 사용하였다. 1965년 8월 5일에는 홍성중계소(AM 510kHz)를 설치하여 방송망 확장을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16일에는 충청지역에서 최초로, 대전에 식장산TV중계소가 준공되어 KBS-TV 방송을 중계하였다. KBS-TV 방송망이 확장될 때 식장산 중계소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이 없어서 서울의 전파를 그대로 수신하고 그걸 또 중계하는 방식으로 방송망을 구성하였는데, 식장산은 남한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통해서 전국 TV방송 링크가 구성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곳의 출력이 500W미만이었던 것과는 달리 식장산TV중계소는 유일하게 1kW로 설치되었다. 채널과 출력을 그대로 유지하여 2012년 10월 2일 오후 2시까지 청주방송총국에서 사용하였다. 1973년 3월 1일, KBS가 공사로 출범하게 됨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대전방송국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1976년에는 목동의 송신소를 회덕으로 이전하여 20kW급의 대덕송신소(AM 882kHz)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목동에 청사를 다시 새로 지어 1978년 11월 17일 준공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 한국방송공사의 각 방송국들은 자체TV방송을 시작하였다. 대전방송국도 이를 추진하면서 충청남도 전역까지 가시청권으로 포함해야 된다는 계획을 추진 하면서 계룡산TV송신소를 세우고 1978년 11월 20일부터 전파를 발사하였다. 또한 1981년 3월 20일부터 2TV방송을 시작하고, 1981년 5월 25일 음악FM방송을 개국하는 등 대전방송국에도 여러 방송이 추가되었다. 성장발전기[편집] 1986년 12월 8일 대전방송국은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하게 된다. 이후 1987년 7월 20일, 공주방송국이 신설되면서 공주중계소, 부여중계소, 부여출장소의 담당을 공주방송국으로 이관하게 된다. 1998년 2월 28일에는 만년동의 신사옥으로 이전과 7월 15일에는 신사옥 준공식을 가지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디지털방송시대 초기[편집] 디지털TV방송의 개시에 따라 2001년 12월 5일 제2라디오 FM방송 개국(100.9MHz), 대전방송총국도 2004년 7월 12일 계룡산송신소와 식장산중계소에서 1TV, 2TV 디지털방송을 개국하여 송출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18일에는 계룡산·식장산 EBS-DTV, 2005년 12월 26일에는 흑성산중계소, 2006년 6월 1일에는 원효봉중계소 등 기간급 중계소에도 디지털TV방송 중계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1월 11일부터는 식장산송신소에서 지상파DMB방송을 실시했고 같은해 8월 1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2007년 12월 13일에는 HD뉴스부조와 TOC를 준공하여 HDTV방송의 기반시설을 구축하여 고화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 1월 14일에는 계룡산송신소의 1라디오 표준FM 출력을 증강하여 수신가능지역을 확대하였고, 2009년부터는 디지털TV와 지상파DMB 중계소를 더욱 확충하는 등 디지털방송의 방송망을 꾸준히 구축해나가고 있다. 2012년 10월 16일에는 지상파아날로그TV방송을 종료하고 완전한 디지털TV방송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2013년 10월 16일 오후 2시에는 지상파디지털TV방송의 채널 재배치를 실시하였다. UHD시대[편집] 2017년 12월 29일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 방송개국. 2018년 6월 20일 공주시 KBS대전 2TV UHD와 보령시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와 금산군 KBS대전 1TV UHD 방송개시. 방송 송출 시설망[편집] TV[편집] 1TV 호출부호 : HLKI-DTV 가상채널 : 9-1 2TV 호출부호 : HLQT-DTV 가상채널 : 7-1 송신소 UHD HD 송신소 위치 직접 수신 물리채널 출력 물리채널 출력 1TV 2TV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52 CH 56 2㎾ CH 26 CH 32 1㎾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충주 수신 식장산 중계소 5㎾ CH 14 CH 16 2.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청주 수신 적오산 소출력 CH 14 CH 16 0.05W 대전 유성구 화암동 산11 충주 수신 추부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청주 수신 성당리 소출력 CH 14 CH 16 0.0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충주 수신 진산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청주 수신 군북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충주 수신 금산 중계소 CH 41 CH 42 2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신대리 662-4 청주 수신 제원 중계소 CH 19 CH 20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충주 수신 남이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청주 수신 초현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충주 수신 부리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청주 수신 양촌 중계소 CH 39 CH 40 5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충주 수신 내판 소출력 CH 14 CH 16 0.05W 세종 연동면 송용리 청주 수신 공주 중계소 CH 44 CH 45 2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충주 수신 유구 중계소 CH 29 CH ?? 10W 충남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24 청주 수신 청양 중계소 CH 44 CH 51 2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충주 수신 외산 중계소 CH 21 CH 20 5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주 수신 청라 중계소 CH ?? CH ?? 5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충주 수신 옥마산 중계소 CH 28 CH 36 9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청주 수신 비인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충주 수신 판교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청주 수신 서천 중계소 CH 28 CH 36 2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충주 수신 흑성산 중계소 CH 44 CH 50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청주 수신 원효봉 중계소 CH 23 CH 21 1㎾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충주 수신 당진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청주 수신 정미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충주 수신 갈산 중계소 CH 14 CH 15 5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청주 수신 안면 소출력 CH 23 CH 21 0.05W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충주 수신 아날로그TV 2012년 10월 16일 오후 2시 방송 종료(대한민국의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참고) 1TV 호출부호 : HLKI-TV 2TV 호출부호 : HLQT-TV 송신소 채널 출력 송신소 위치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6 CH 42 10㎾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식장산 중계소 CH 56 CH 48 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추부 중계소 CH 12 CH 44 1W/10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진산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군북 중계소 CH 10 CH 25 1W/10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금산 중계소 CH 29 CH 35 5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176 제원 중계소 CH 23 CH 47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남이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초현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부리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양촌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공주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청양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외산 중계소 CH 29 CH 37 10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라 중계소 CH 44 CH 47 10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옥마산 중계소 CH 20 CH 24 5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옥마산 비인 중계소 CH 35 CH 47 10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판교 중계소 CH 29 CH 35 10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서천 중계소 CH 53 CH 36 10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흑성산 중계소 CH 47 CH 51 10㎾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원효봉 중계소 CH 31 CH 35 5㎾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당진 중계소 CH 19 CH 54 5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정미 중계소 CH 54 CH 44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갈산 중계소 CH 21 CH 25 10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라디오[편집] KBS대전 제1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대덕 송신소 AM 882㎑ 20㎾ HLKI 대전 대덕구 와동 291-2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계룡산 송신소 FM 94.7㎒ 3㎾ HLKI-S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흑성산 송신소 FM 89.9㎒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산32-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원효봉 중계소 FM 88.1㎒ 250W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옥마산 중계소 FM 107.3㎒ 1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서천 중계소 FM 88.9㎒ 9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컴퓨터 마이크:전주 송출 KBS대전 제2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식장산 송신소 FM 100.9㎒ 3㎾ HLQT-SFM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KBS대전 음악FM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계룡산 송신소 FM 98.5㎒ 5㎾ HLKI-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지상파DMB[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KBS § 방송 송출 시설망입니다. 프로그램[편집] KBS 1TV[편집] 뉴스 프로그램[편집] 프로그램명 방송시간 편성시간 앵커 KBS 뉴스광장 대전·세종·충남 15분 월요일 ~ 금요일 오전 7시 35분 ~ 7시 50분 김연선 KBS 930 뉴스 대전·세종·충남 10분 평일 오전 9시 50분 ~ 10시 박명원 KBS 뉴스 7 대전·세종·충남 5분 평일 저녁 7시 20분 ~ 7시 25분 박병준 KBS 뉴스 9 대전·세종·충남 월요일 ~ 금요일 10분토요일 10분 평일 밤 9시 35분 ~ 9시 45분주말 밤 9시 20분 ~ 9시 30분 양민오, 전유미(평일) 김연선 (주말) TV 프로그램[편집] 모든방송은 HD기준인 동시에 지역총국은 DMB방송을 하지않으며 6시 내고향은 월~목요일사이에 네트워크 제작을 한다. 방송 시간 방송 프로그램 비고 17:30 (월~목) 전국을 달린다 스페셜은 금요일 11시 방송 17:40 (월~목) TV이웃 다정다감 19:35 (화) 산촌일기메아리 마지막주방송 19:35 (수) 거북이늬우스 08:25 (금) 아침마당(생생토크 자체방송) 16:00 (금) KBS 대전 생생토론 17:30 (금) 이야기가 있는 풍경 라디오[편집] 제1라디오[편집] KBS대전 생생뉴스 (시사교양, 평일,08:30~08:58)(진행 방석준) 5시 N 대.세.남 (시사교양, 평일,17:05~17:58)(진행 김연선) 제2라디오[편집] 전유미의 뮤직 런 (연예오락, 평일,18:00~19:00)(진행 전유미) 프로야구 중계방송 (진행 김연선) 음악FM[편집] 김숙경의 팝브런치 (음악, 평일,11:00~12:00)(진행 김숙경) 아나운서[편집] 아나운서[편집] KBS대전 아나운서 입사연도 기수 남성 여성 1995년 (21기) 김연선 2001년 (27기) 김숙경 2004년 (30기) 최연수 2005년 (31기) 전유미 2007년 (33기) 박명원 2008년 (34기) 손지화 전직 아나운서[편집] 남성[편집] 김윤한(1968~1985, 전 KBS 서울본국) 이종태(1981~2008, 현 KNN 아나운서) 박윤도(1985~2010, 현 퇴사) 조건진(1987~1988, 현 KBS 서울본국) 윤성원(1993~1994, 전 KBS 서울본국) 박상규(1993~1996, 전 SBS 기자/현 채널A 앵커) 양민오(1995~2004, 현 KBS 대전총국 보도국 편집부장) 유지철(1995~2000, 현 KBS 서울본국) 최시중(1996~2003, 현 KBS 서울본국) 박성준(1996~2012, 현 JTBC 아나운서 팀장) 이재홍(1998~1999, 현 KBS 서울본국) 이정헌(1998~1999, 전 JTV 기자/현 JTBC 기자, 앵커) 여성[편집] 김이숙(1990~2003, 퇴사) 지승현(2000~2001, 전 KBS 서울본국, 현 프리랜서 MC) 배유선(1978~2012, 퇴사) 변우영(1994~1997, 현 KBS 서울본국) 김여진(1998~2004, 현 YTN 아나운서) 박주아(2000~2001, 현 KBS 서울본국) 주혜연(2001~2008, 현 퇴사/2009~2010, 전 KFN 국군방송 아나운서) 위서현(2003~2004, 현 KBS 서울본국) 이승연(2004~2005, 현 KBS 서울본국) 김지연(2010~2016, 현 KBS 대전총국 심의실 사원) 기자[편집] 남성[편집] 유진환(보도국장) 박종오 김병창(차장) 서영준 황정환 박병준 조영호 송민석 이용순 박해평 김용만 최선중 방석준 박장훈 성용희 백상현 이수복 복병민 정재훈 여성[편집] 이정은 박지은 홍정표 조정아 이연경 한솔 전직 기자[편집] 남성[편집] 이재호 유승영 곽영지 김진원 홍지명 서기상 최성원 이종국 이정두 김택현 김성우 이재희 여성[편집] 박에스더 김양순 윤진 김빛이라 이지윤 홍화경 사진첩[편집] 대덕대교에서 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 (북향) KBS대전방송총국 전경.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외부 링크[편집] KBS대전방송총국 공식 홈페이지 vdeh충청권의 지상파 방송사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경북권 경남권 제주권 TV방송국대전·세종·충남 TJB 5 KBS 2TV 7 KBS 1TV대전 9 EBS1 10-1 EBS2 10-2 대전MBC 11 충청북도 CJB 6 KBS 2TV 7 KBS 1TV,청주 9 EBS1 10-1 EBS2 10-2 MBC충북(청주/충주) 11 라디오방송국대전·세종·충남 KBS대전(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대전MBC 라디오 대전MBC FM4U TJB PowerFM대전CBS 라디오 febc대전극동방송 CPBC대전가톨릭평화방송TBN대전교통방송 대전국악방송 금강FM 국방FM 충북 중부, 남부 KBS청주(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MBC충북 청주 라디오 MBC충북 청주 FM4U CJB JoyFMCBS청주 라디오 BBS청주불교방송 TBN대전교통방송 국방FM 충북 북부 KBS충주 (제1라디오/음악FM) MBC충북 충주 라디오 MBC충북 충주 FM4U CJB JoyFM TBN대전교통방송 지상파DMBMY MBCTV my MBC11 GS SHOP CJ오쇼핑 TPEG DMB Drive U-KBSTV KBS STAR KBS HEART V-Radio KBS MUSIC TPEG KBS MOZEN TPEG TJB uTV TJB-SBSu CJB-mYTN 현대홈쇼핑 TPEG DTS vdeh텔레비전 KBS 1TV KBS 2TV KBS 24시 뉴스 KBS 월드TV KBS 월드 24 라디오 KBS 1라디오 KBS 2라디오(해피FM) KBS 클래식FM KBS 쿨FM KBS 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KBS 한민족방송 KBS 월드라디오 지상파 DMB U-KBS (U-KBS 스타 U-KBS 하트 U-KBS 뮤직 U-KBS 클로버) 지역방송국경기권한국방송공사(KBS 본사)(경인방송센터)강원권춘천방송총국(원주방송국 · 강릉방송국)충북권청주방송총국(충주방송국)충남권대전방송총국전북권전주방송총국전남권광주방송총국(목포방송국 · 순천방송국)경북권대구방송총국(안동방송국 · 포항방송국)경남권부산방송총국(울산방송국) · 창원방송총국(진주방송국)제주권제주방송총국KBS N KBS N 스포츠 KBS 드라마 KBS 조이 KBS N 라이프 KBS W KBS 키즈 KBS N 플러스 자회사 KBS N KBS 미디어 KBS 아트비전 KBS 비즈니스(KBS스포츠월드) KBS 아메리카 KBS 재팬 KBS 교향악단 KBS 미제휴사 EBS EBS 1TV EBS 2TV EBS FM (책 읽어주는 라디오) EBS i-Radio (인터넷 어학 라디오) EBS english EBS 플러스 1 EBS 플러스 2 EBS KIDS EBS 아메리카 EBSi EBSlang EBS 스페이스 공감 EBS 원격교육연수원 EBS EDRB EBS미디어 국방홍보원 국방일보 국방TV 국방FM 환경TV 상생방송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폐국 · 명칭 변경이전 계열사 및 채널 속초방송국 태백방송국 영월방송국 공주방송국 여수방송국 군산방송국 남원방송국 KBS 3TV KBS TV KBS 위성 1TV(KBS1) KBS 위성 2TV(KBS2) KBS 코리아 KBS 프라임 KBS 스포츠채널 스카이 KBS 스포츠 KBS 스카이 스포츠 KBS 드라마채널 스카이 KBS 드라마 KBS 스카이 드라마 KBS 교육라디오 구 제3라디오 KBS 영상사업단 스카이 KBS KFN 국군방송TV 국군방송 FM 라디오 EBS TV EBS 위성1 EBS 위성2 EBS u 센추리TV CTN 방송광고향상협의회/공익광고협의회/한국방송광고공사 OSB 동양위성TV/OSB 코리아 OSB 1TV OSB NTV OSB 오락 OSB 무협 무협TV OSB 3TV OSB DTV OSB 드라마 OSB 크리스천TV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BS대전방송총국&oldid=24517223" 분류: 대한민국의 방송국1943년 설립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국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지상파 방송국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3일 (수) 10: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조선방송협회대전방송국이 출장소가 아닌 정식 방송국으로 승인된 해는 몇년도인가? |
KBS대전방송총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BS대전방송총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BS 대전방송총국 1998년 2월 28일에 준공한 KBS 대전방송총국 現 만년동 사옥 한국명 KBS대전방송총국 한자표기 KBS大田放送總局 영문표기 KBS Daejeon Broadcasting Branch Office 약칭 KBS대전 형태 공영 방송 방송 영역 지상파 방송 창립일 1940년 8월 5일 개국일 1943년 7월 7일 본사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117번길 128 사장 이완희 (총국장) 모기업 한국방송공사 웹사이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KBS大田放送總局)은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충청남도 지역을 방송구역으로 하는 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총국이다. 지역총국 중 하나로, 하부에 속해있는 지역국은 없다. 목차 1 개요 1.1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2 지국 2 역사 2.1 개국 초기 2.2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 2.3 6.25 전쟁 2.4 기반구축기 2.5 성장발전기 2.6 디지털방송시대 초기 2.7 UHD시대 3 방송 송출 시설망 3.1 TV 3.2 라디오 3.3 지상파DMB 4 프로그램 4.1 KBS 1TV 4.1.1 뉴스 프로그램 4.1.2 TV 프로그램 4.2 라디오 4.2.1 제1라디오 4.2.2 제2라디오 4.2.3 음악FM 5 아나운서 5.1 아나운서 5.2 전직 아나운서 5.2.1 남성 5.2.2 여성 6 기자 6.1 남성 6.2 여성 6.3 전직 기자 6.3.1 남성 6.3.2 여성 7 사진첩 8 각주 9 참고 문헌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1943년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창설되어 1986년 12월 KBS 공사 직제개편으로 KBS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천안과 서산에 설치했던 사업소를 폐지했으며, 1998년 2월에는 목동에 있는 사옥을 폐쇄하고 신사옥을 준공하였다. 보도, 지역현안, 지역민 문제에 대한 시사교양적 프로그램을 자체제작하여 편성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방송은 KBS본사의 프로그램을 릴레이 하여 편성하고 있다. 산업기술, 첨단과학의 도시인 대전특성에 맞게 과학프로젝트팀을 운영하여 제작하는 과학프로그램이 전국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다. 조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편집] 대전방송총국 총국장 부속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심의실 노동조합 KBS노조 대전지부 언론노조 KBS본부 대전지부 편성제작국 TV제작팀 편성팀 아나운서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부장 김연선) 영상제작팀 보도국 취재팀 편집팀 영상취재팀 천안방송센터 홍성방송센터 기술국[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기술관리팀 제작기술팀 송출정비팀 홍성송출센터 시청자서비스국 총무팀 기획 인사 재원관리팀 천안사업지사 홍성사업지사 지국[편집] 천안방송센터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17(신부동) 홍성방송센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충서로 1373(월산리) 역사[편집] 개국 초기[편집] 조선방송협회대전방송국을 설치할 당시 여건은 매우 나쁜 상태였다. 방송망 구상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가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진주만 폭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자재 구입이나 인력이 부족하고 방송 청취 통제의 강화와 방송의 전쟁 도구화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친 시기였다. 개국하기 전에 앞서서 1940년 8월 5일 대전부 북정 15번지(現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에 13평짜리 건물의 출장소로서 출범하였다. 그 후 1942년 출장소에서 방송국으로 승격하였고 1943년 7월 15일 정식으로 조선방송협회 대전방송국이 개국하였다. (AM 880kHz, 출력 50W, 호출부호 JBIK) 원래는 한국어로 방송하는 제2방송과 함께 세울 계획이었지만 1942년 4월 27일 전파관제가 이루어지면서 제2방송의 전파발사가 일단 중지 되었기 때문에 제1방송만 공사가 진행되어 먼저 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한국어방송은 1943년 11월 10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사옥은 6,600평의 넓은 부지에 기와를 올린 벽돌조 단층 130평의 건물로 연주실, 송신기실, 사무실 등을 마련하고 따로 송신소는 두지 않은 채 방송을 하였다. 그 후 1944년 10월 1일 45M 목주안테나를 설치하여 송신소를 따로 건설하였다. 광복 후 ~ 6.25 전쟁 직전[편집] 광복이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일본인 직원들은 모두 물러나고 한국인 직원들로 채워졌다. 이어 1947년 10월 1일에는 호출부호를 일본식 JBIK에서 한국식의 HLKI로 변경하였고, 1948년 8월 6일에는 사명을 대한방송협회 대전방송국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1949년 7월 26일 기존 50W이던 방송 출력을 500W로 높이는 등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였다. 6.25 전쟁[편집]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대전은 임시수도가 되었고 대전방송국은 6월 28일부터 임시중앙방송국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송을 듣고 정보 보고서를 만들어 국무회의에 보고하고, 비밀 방송 수신실을 마련하여 VOA를 비롯해 북한측이 방송하는 서울방송,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모니터하여 작성한 분석보고서를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략을 세워 나가는 등, 대전임시수도 시절동안 대전방송국은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전쟁중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대전방송국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방송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10kW 출력 증강 공사를 하여 서울의 송신소가 가동이 되고 있어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키스테이션이 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기 위해 1951년 11월 8일 공사를 착공하여 1952년 11월 5일 준공하였다. 이로인해 대전방송국은 지역국 중 당시로서는 최초로 10kW의 대출력 송신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기반구축기[편집] 1961년 1월 22일 대전방송국은 사옥을 대흥동으로 이전하고 목동의 사옥자리는 송신소로 사용하였다. 1965년 8월 5일에는 홍성중계소(AM 510kHz)를 설치하여 방송망 확장을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16일에는 충청지역에서 최초로, 대전에 식장산TV중계소가 준공되어 KBS-TV 방송을 중계하였다. KBS-TV 방송망이 확장될 때 식장산 중계소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이 없어서 서울의 전파를 그대로 수신하고 그걸 또 중계하는 방식으로 방송망을 구성하였는데, 식장산은 남한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통해서 전국 TV방송 링크가 구성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곳의 출력이 500W미만이었던 것과는 달리 식장산TV중계소는 유일하게 1kW로 설치되었다. 채널과 출력을 그대로 유지하여 2012년 10월 2일 오후 2시까지 청주방송총국에서 사용하였다. 1973년 3월 1일, KBS가 공사로 출범하게 됨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대전방송국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1976년에는 목동의 송신소를 회덕으로 이전하여 20kW급의 대덕송신소(AM 882kHz)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목동에 청사를 다시 새로 지어 1978년 11월 17일 준공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 한국방송공사의 각 방송국들은 자체TV방송을 시작하였다. 대전방송국도 이를 추진하면서 충청남도 전역까지 가시청권으로 포함해야 된다는 계획을 추진 하면서 계룡산TV송신소를 세우고 1978년 11월 20일부터 전파를 발사하였다. 또한 1981년 3월 20일부터 2TV방송을 시작하고, 1981년 5월 25일 음악FM방송을 개국하는 등 대전방송국에도 여러 방송이 추가되었다. 성장발전기[편집] 1986년 12월 8일 대전방송국은 대전방송총국으로 승격하게 된다. 이후 1987년 7월 20일, 공주방송국이 신설되면서 공주중계소, 부여중계소, 부여출장소의 담당을 공주방송국으로 이관하게 된다. 1998년 2월 28일에는 만년동의 신사옥으로 이전과 7월 15일에는 신사옥 준공식을 가지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디지털방송시대 초기[편집] 디지털TV방송의 개시에 따라 2001년 12월 5일 제2라디오 FM방송 개국(100.9MHz), 대전방송총국도 2004년 7월 12일 계룡산송신소와 식장산중계소에서 1TV, 2TV 디지털방송을 개국하여 송출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18일에는 계룡산·식장산 EBS-DTV, 2005년 12월 26일에는 흑성산중계소, 2006년 6월 1일에는 원효봉중계소 등 기간급 중계소에도 디지털TV방송 중계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 1월 11일부터는 식장산송신소에서 지상파DMB방송을 실시했고 같은해 8월 1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2007년 12월 13일에는 HD뉴스부조와 TOC를 준공하여 HDTV방송의 기반시설을 구축하여 고화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 1월 14일에는 계룡산송신소의 1라디오 표준FM 출력을 증강하여 수신가능지역을 확대하였고, 2009년부터는 디지털TV와 지상파DMB 중계소를 더욱 확충하는 등 디지털방송의 방송망을 꾸준히 구축해나가고 있다. 2012년 10월 16일에는 지상파아날로그TV방송을 종료하고 완전한 디지털TV방송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2013년 10월 16일 오후 2시에는 지상파디지털TV방송의 채널 재배치를 실시하였다. UHD시대[편집] 2017년 12월 29일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 방송개국. 2018년 6월 20일 공주시 KBS대전 2TV UHD와 보령시 KBS대전 1TV와 KBS대전 2TV UHD와 금산군 KBS대전 1TV UHD 방송개시. 방송 송출 시설망[편집] TV[편집] 1TV 호출부호 : HLKI-DTV 가상채널 : 9-1 2TV 호출부호 : HLQT-DTV 가상채널 : 7-1 송신소 UHD HD 송신소 위치 직접 수신 물리채널 출력 물리채널 출력 1TV 2TV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52 CH 56 2㎾ CH 26 CH 32 1㎾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충주 수신 식장산 중계소 5㎾ CH 14 CH 16 2.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청주 수신 적오산 소출력 CH 14 CH 16 0.05W 대전 유성구 화암동 산11 충주 수신 추부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청주 수신 성당리 소출력 CH 14 CH 16 0.05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충주 수신 진산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청주 수신 군북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충주 수신 금산 중계소 CH 41 CH 42 2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신대리 662-4 청주 수신 제원 중계소 CH 19 CH 20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충주 수신 남이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청주 수신 초현 중계소 CH 19 CH 20 5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충주 수신 부리 중계소 CH ?? CH 28 5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청주 수신 양촌 중계소 CH 39 CH 40 5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충주 수신 내판 소출력 CH 14 CH 16 0.05W 세종 연동면 송용리 청주 수신 공주 중계소 CH 44 CH 45 2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충주 수신 유구 중계소 CH 29 CH ?? 10W 충남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24 청주 수신 청양 중계소 CH 44 CH 51 2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충주 수신 외산 중계소 CH 21 CH 20 5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주 수신 청라 중계소 CH ?? CH ?? 5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충주 수신 옥마산 중계소 CH 28 CH 36 9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청주 수신 비인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충주 수신 판교 중계소 CH 20 CH 21 5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청주 수신 서천 중계소 CH 28 CH 36 2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충주 수신 흑성산 중계소 CH 44 CH 50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청주 수신 원효봉 중계소 CH 23 CH 21 1㎾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충주 수신 당진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청주 수신 정미 중계소 CH 44 CH 45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충주 수신 갈산 중계소 CH 14 CH 15 5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청주 수신 안면 소출력 CH 23 CH 21 0.05W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충주 수신 아날로그TV 2012년 10월 16일 오후 2시 방송 종료(대한민국의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참고) 1TV 호출부호 : HLKI-TV 2TV 호출부호 : HLQT-TV 송신소 채널 출력 송신소 위치 1TV 2TV 계룡산 송신소 CH 6 CH 42 10㎾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식장산 중계소 CH 56 CH 48 5㎾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추부 중계소 CH 12 CH 44 1W/10W 충남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산54-3 진산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156-2 군북 중계소 CH 10 CH 25 1W/10W 충남 금산군 군북면 동편리 산61 금산 중계소 CH 29 CH 35 50W 충남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176 제원 중계소 CH 23 CH 47 10W 충남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603-4 남이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 산11 초현 중계소 CH 30 CH 44 10W 충남 금산군 남일면 초현리 산45-8 부리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 산83 양촌 중계소 CH 37 CH 25 10W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인천리 산6 공주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공주시 반죽동 산2-1 봉황산 청양 중계소 CH 50 CH 55 100W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 산62-4 외산 중계소 CH 29 CH 37 10W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산29 청라 중계소 CH 44 CH 47 10W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옥마산 중계소 CH 20 CH 24 5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옥마산 비인 중계소 CH 35 CH 47 10W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산39-1 판교 중계소 CH 29 CH 35 10W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산18-1 서천 중계소 CH 53 CH 36 10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흑성산 중계소 CH 47 CH 51 10㎾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산11-3 원효봉 중계소 CH 31 CH 35 5㎾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당진 중계소 CH 19 CH 54 50W 충남 당진시 읍내동 234-29 정미 중계소 CH 54 CH 44 10W 충남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산1 갈산 중계소 CH 21 CH 25 10W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4 라디오[편집] KBS대전 제1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대덕 송신소 AM 882㎑ 20㎾ HLKI 대전 대덕구 와동 291-2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계룡산 송신소 FM 94.7㎒ 3㎾ HLKI-S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흑성산 송신소 FM 89.9㎒ 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산32-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원효봉 중계소 FM 88.1㎒ 250W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산25-1 컴퓨터 마이크:청주 송출 옥마산 중계소 FM 107.3㎒ 100W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산23-4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서천 중계소 FM 88.9㎒ 90W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34 남산 컴퓨터 마이크:전주 송출 KBS대전 제2라디오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식장산 송신소 FM 100.9㎒ 3㎾ HLQT-SFM 대전 동구 대성동 산2-7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KBS대전 음악FM 송신소 주파수 출력 호출부호 송신소 위치 비고 계룡산 송신소 FM 98.5㎒ 5㎾ HLKI-FM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11-5 컴퓨터 마이크:경인 송출 지상파DMB[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U-KBS § 방송 송출 시설망입니다. 프로그램[편집] KBS 1TV[편집] 뉴스 프로그램[편집] 프로그램명 방송시간 편성시간 앵커 KBS 뉴스광장 대전·세종·충남 15분 월요일 ~ 금요일 오전 7시 35분 ~ 7시 50분 김연선 KBS 930 뉴스 대전·세종·충남 10분 평일 오전 9시 50분 ~ 10시 박명원 KBS 뉴스 7 대전·세종·충남 5분 평일 저녁 7시 20분 ~ 7시 25분 박병준 KBS 뉴스 9 대전·세종·충남 월요일 ~ 금요일 10분토요일 10분 평일 밤 9시 35분 ~ 9시 45분주말 밤 9시 20분 ~ 9시 30분 양민오, 전유미(평일) 김연선 (주말) TV 프로그램[편집] 모든방송은 HD기준인 동시에 지역총국은 DMB방송을 하지않으며 6시 내고향은 월~목요일사이에 네트워크 제작을 한다. 방송 시간 방송 프로그램 비고 17:30 (월~목) 전국을 달린다 스페셜은 금요일 11시 방송 17:40 (월~목) TV이웃 다정다감 19:35 (화) 산촌일기메아리 마지막주방송 19:35 (수) 거북이늬우스 08:25 (금) 아침마당(생생토크 자체방송) 16:00 (금) KBS 대전 생생토론 17:30 (금) 이야기가 있는 풍경 라디오[편집] 제1라디오[편집] KBS대전 생생뉴스 (시사교양, 평일,08:30~08:58)(진행 방석준) 5시 N 대.세.남 (시사교양, 평일,17:05~17:58)(진행 김연선) 제2라디오[편집] 전유미의 뮤직 런 (연예오락, 평일,18:00~19:00)(진행 전유미) 프로야구 중계방송 (진행 김연선) 음악FM[편집] 김숙경의 팝브런치 (음악, 평일,11:00~12:00)(진행 김숙경) 아나운서[편집] 아나운서[편집] KBS대전 아나운서 입사연도 기수 남성 여성 1995년 (21기) 김연선 2001년 (27기) 김숙경 2004년 (30기) 최연수 2005년 (31기) 전유미 2007년 (33기) 박명원 2008년 (34기) 손지화 전직 아나운서[편집] 남성[편집] 김윤한(1968~1985, 전 KBS 서울본국) 이종태(1981~2008, 현 KNN 아나운서) 박윤도(1985~2010, 현 퇴사) 조건진(1987~1988, 현 KBS 서울본국) 윤성원(1993~1994, 전 KBS 서울본국) 박상규(1993~1996, 전 SBS 기자/현 채널A 앵커) 양민오(1995~2004, 현 KBS 대전총국 보도국 편집부장) 유지철(1995~2000, 현 KBS 서울본국) 최시중(1996~2003, 현 KBS 서울본국) 박성준(1996~2012, 현 JTBC 아나운서 팀장) 이재홍(1998~1999, 현 KBS 서울본국) 이정헌(1998~1999, 전 JTV 기자/현 JTBC 기자, 앵커) 여성[편집] 김이숙(1990~2003, 퇴사) 지승현(2000~2001, 전 KBS 서울본국, 현 프리랜서 MC) 배유선(1978~2012, 퇴사) 변우영(1994~1997, 현 KBS 서울본국) 김여진(1998~2004, 현 YTN 아나운서) 박주아(2000~2001, 현 KBS 서울본국) 주혜연(2001~2008, 현 퇴사/2009~2010, 전 KFN 국군방송 아나운서) 위서현(2003~2004, 현 KBS 서울본국) 이승연(2004~2005, 현 KBS 서울본국) 김지연(2010~2016, 현 KBS 대전총국 심의실 사원) 기자[편집] 남성[편집] 유진환(보도국장) 박종오 김병창(차장) 서영준 황정환 박병준 조영호 송민석 이용순 박해평 김용만 최선중 방석준 박장훈 성용희 백상현 이수복 복병민 정재훈 여성[편집] 이정은 박지은 홍정표 조정아 이연경 한솔 전직 기자[편집] 남성[편집] 이재호 유승영 곽영지 김진원 홍지명 서기상 최성원 이종국 이정두 김택현 김성우 이재희 여성[편집] 박에스더 김양순 윤진 김빛이라 이지윤 홍화경 사진첩[편집] 대덕대교에서 본 KBS대전방송총국 KBS대전방송총국 (북향) KBS대전방송총국 전경.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KBS 대전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외부 링크[편집] KBS대전방송총국 공식 홈페이지 vdeh충청권의 지상파 방송사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경북권 경남권 제주권 TV방송국대전·세종·충남 TJB 5 KBS 2TV 7 KBS 1TV대전 9 EBS1 10-1 EBS2 10-2 대전MBC 11 충청북도 CJB 6 KBS 2TV 7 KBS 1TV,청주 9 EBS1 10-1 EBS2 10-2 MBC충북(청주/충주) 11 라디오방송국대전·세종·충남 KBS대전(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대전MBC 라디오 대전MBC FM4U TJB PowerFM대전CBS 라디오 febc대전극동방송 CPBC대전가톨릭평화방송TBN대전교통방송 대전국악방송 금강FM 국방FM 충북 중부, 남부 KBS청주(제1라디오/제2라디오/음악FM) MBC충북 청주 라디오 MBC충북 청주 FM4U CJB JoyFMCBS청주 라디오 BBS청주불교방송 TBN대전교통방송 국방FM 충북 북부 KBS충주 (제1라디오/음악FM) MBC충북 충주 라디오 MBC충북 충주 FM4U CJB JoyFM TBN대전교통방송 지상파DMBMY MBCTV my MBC11 GS SHOP CJ오쇼핑 TPEG DMB Drive U-KBSTV KBS STAR KBS HEART V-Radio KBS MUSIC TPEG KBS MOZEN TPEG TJB uTV TJB-SBSu CJB-mYTN 현대홈쇼핑 TPEG DTS vdeh텔레비전 KBS 1TV KBS 2TV KBS 24시 뉴스 KBS 월드TV KBS 월드 24 라디오 KBS 1라디오 KBS 2라디오(해피FM) KBS 클래식FM KBS 쿨FM KBS 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KBS 한민족방송 KBS 월드라디오 지상파 DMB U-KBS (U-KBS 스타 U-KBS 하트 U-KBS 뮤직 U-KBS 클로버) 지역방송국경기권한국방송공사(KBS 본사)(경인방송센터)강원권춘천방송총국(원주방송국 · 강릉방송국)충북권청주방송총국(충주방송국)충남권대전방송총국전북권전주방송총국전남권광주방송총국(목포방송국 · 순천방송국)경북권대구방송총국(안동방송국 · 포항방송국)경남권부산방송총국(울산방송국) · 창원방송총국(진주방송국)제주권제주방송총국KBS N KBS N 스포츠 KBS 드라마 KBS 조이 KBS N 라이프 KBS W KBS 키즈 KBS N 플러스 자회사 KBS N KBS 미디어 KBS 아트비전 KBS 비즈니스(KBS스포츠월드) KBS 아메리카 KBS 재팬 KBS 교향악단 KBS 미제휴사 EBS EBS 1TV EBS 2TV EBS FM (책 읽어주는 라디오) EBS i-Radio (인터넷 어학 라디오) EBS english EBS 플러스 1 EBS 플러스 2 EBS KIDS EBS 아메리카 EBSi EBSlang EBS 스페이스 공감 EBS 원격교육연수원 EBS EDRB EBS미디어 국방홍보원 국방일보 국방TV 국방FM 환경TV 상생방송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폐국 · 명칭 변경이전 계열사 및 채널 속초방송국 태백방송국 영월방송국 공주방송국 여수방송국 군산방송국 남원방송국 KBS 3TV KBS TV KBS 위성 1TV(KBS1) KBS 위성 2TV(KBS2) KBS 코리아 KBS 프라임 KBS 스포츠채널 스카이 KBS 스포츠 KBS 스카이 스포츠 KBS 드라마채널 스카이 KBS 드라마 KBS 스카이 드라마 KBS 교육라디오 구 제3라디오 KBS 영상사업단 스카이 KBS KFN 국군방송TV 국군방송 FM 라디오 EBS TV EBS 위성1 EBS 위성2 EBS u 센추리TV CTN 방송광고향상협의회/공익광고협의회/한국방송광고공사 OSB 동양위성TV/OSB 코리아 OSB 1TV OSB NTV OSB 오락 OSB 무협 무협TV OSB 3TV OSB DTV OSB 드라마 OSB 크리스천TV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BS대전방송총국&oldid=24517223" 분류: 대한민국의 방송국1943년 설립한국방송공사의 지역방송국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상파 방송국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지상파 방송국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3일 (수) 10: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KBS대전방송총국에서 KBS 1TV 채널을 통해 매주 월-목요일 17시30분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은? |
저출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출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산아니)은 출생률이 저하되는 현상을 말한다. 초창기에는 남성의 경제력 부족, 경제적인 문제만으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개인주의, 가치관의 다원화, 성격문제, 인간관계 스트레스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정 종교와 사상에 입각한 결혼 강요, 가부장제가 사라지면서 수면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화권과 일본에서는 소자화(少子化)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목차 1 원인 2 나라별 저출산 2.1 유럽 2.2 미국 2.3 러시아 2.4 아시아 2.5 대한민국 3 각국의 합계출산율 비교 4 같이 보기 5 각주 원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수태인자 (인구학)입니다. 도시화로 인한 개인주의 사상의 확산 경제 사정의 악화와 고용률 감소 독신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환경 증가(1인가구 증가, 인스턴트 식품 생산, 세탁소, 빨래방, 의류가게 등 각종 서비스업의 확산 등) 사교육비 등 육아 양육비 부담 증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의 부족 학력과 경제력으로 인한 결혼 포기(집값 상승, 땅값 상승도 이 원인에 포함됨) 결혼과 육아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보는 시각의 확산 성격 문제와 인간관계 스트레스 대인관계에 미숙한 사람의 증가 독신을 선호하는 사람 수 증가 만혼(晩婚)으로 인해 여성이 평생 낳는 아기 수의 감소 자녀 양육에 대한 가치관 변화 신체적, 체력적 결함을 지닌 사람의 증가(산업혁명 이전, 개발도상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증가) 나라별 저출산[편집] 유럽[편집] 유럽의 인구 증가율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미 감소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전쟁 직후인 1946년부터 1965년에 이르기까지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1986년까지는 많은 나라에서 출산율이 계속 저하했지만, 1987년부터는 출산율이 반전(反轉) 혹은 정체(定滯)하는 나라가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스웨덴 등은 1990년에 인구 치환(여성 1명당 2.1명) 수준을 회복했지만, 그 후 다시 출산율이 저하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출산율 회복을 정책 목표라고는 하지는 못하지만, 육아 지원 등은 아동·가족 정책으로서 행해지고 있다. 남유럽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합계출산율이 급격히 저하해, 1990년대 중반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1.1대라고 하는 초저출산률(超低出産率)이 되었다. 전통적 가치관이 강하고, 급격하게 진행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고학력화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노동을 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 덕분에[1] 공산주의 붕괴 전에도 여성들이 많은 출산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특히 동독은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을 만들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갔기 때문에 1961년까지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은 다자녀 가정의 부모에게 메달을 수여하며 출산을 장려해서 출산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감소했고 러시아의 인구는 199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의 인구는 2008년까지 660만 명이 줄어들었다.[2]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러시아의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이민자도 늘어나서 러시아의 인구는 2009년 8월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3] 미국[편집] 미국에서는 1985이후부터 출산율이 상승세로 변해 1990년 이후부터는 합계출산율 2.0 근처에서 정체(定滯)되어 있다. 이것은 대다수가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의에 따라 낙태와 피임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신자들인 히스패닉계(系) 국민의 출산율이 높기 때문으로(2003년에 2.79명), 非히스패닉계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출생률은 인구치환수준(人口置換水準: 여성 1명당 2.1명)을 밑돌고 있다. 그러나 非히스패닉계 백인의 출생률도 2000년 이후 1.85 정도로(2003년에 1.86) 인구치환 수준 이하여도 한국·일본·유럽보다는 높은 수준에 있으며, 저하 경향이 아니고 정체 상태에 있다. 한편 매우 높았던 흑인의 출산율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하강,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2003년에 2.00). 러시아[편집] 러시아에서는 소련 붕괴 직후부터 출산율과 평균수명이 감소했고 타국으로의 이주(移住)에 의한 인구 유출 때문에, 1993년에 주요국 중 가장 빨리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8년까지 계속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러시아의 인구는 1993년부터 2008년까지 15년 동안 660만 명이 줄어들었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이민자와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증가해 2009년부터는 인구가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편집] 일본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합계출산율이 2 이하로 떨어졌으며, 저출산 현상이 계속되어 2005년에는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 등의 합계출산율은 2003년 기준으로 홍콩이 0.94, 중화민국이 1.24, 싱가포르가 1.25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나 타이에서도 출산율이 인구치환 수준을 밑돌고 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출생률이 인구치환 수준을 웃돌고 있지만 저하 경향에 있는 나라가 많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가구에 자녀를 1명이상 낳지 못하도록 중국 공산당이 강력하게 규제하는 1가구 1자녀 정책에 따른 인구 억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식적인 합계의 결과일뿐, 실상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아이를 포함하게 되면 낮지 않은 출산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화민국에서는 출생아수 급감으로 2008년에는 출산율이 1.1명이었으나, 또 다시 감소세가 지속 돼 2009년에는 1명으로 1.08명이었던 대한민국(남한)의 2005년 최저 출산율 기록을 경신해 세계 최저의 출산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민국(남한)의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6.1명이었다. 이승만 및 윤보선 정부에서는 출산을 장려했지만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에 의해 196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인 가족계획이 실시되면서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5.2명, 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4.7명이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가족계획을 매우 강화시켜서[4] 1984년에는 2명 미만인 1.74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음해인 1985년 1.66명 수준으로 약간 떨어졌고 그 이후에도 계속된 정책으로 마침내 1987년 출산율이 1.53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후 1996년 8월 김영삼 정부가 출산정책을 산아제한정책에서 산아자율정책으로 전환했으나 출산율은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하락하였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에 따른 여파로 출산율은 계속 떨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에 즈문둥이 출산을 장려하여 일시적으로 출생아 수가 증가했지만 2001년에는 1.30명의 초저출산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산아자율정책에서 더욱 앞서나가 출산장려정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2005년에는 역대 최저치인 1.08명으로 떨어졌다. 이후 황금돼지해 홍보 등 정부의 많은 노력에 힘입어 2007년 1.26명으로 급증했지만 곧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해 2009년 1.15명으로 감소했다. 2010년부터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2년 1.3명으로 초저출산 국가에서 탈출하려는 기미를 보였으나 그 후 이어진 불경기 등의 여파로 출산율은 감소하여 2013년 1.18명, 2014년 1.21명에 이르렀다.[5][6] 이러한 출산율 변화는 아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 3남 2녀로 5명은 낳아야죠. 1960년대: 3·3·35운동 - 3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대: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90년대: 아들 바람 부모 세대 짝꿍 없는 우리 세대 2000년대: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 — 보건복지가족부, 인구보건복지협회(구 대한가족계획협회) 발췌 각국의 합계출산율 비교[편집] 순위 국가 2000년 2010년 2011년 2012년 1 니제르 7.72 7.58 7.58 7.57 2 우간다 6.96 6.73 - - 3 말리 6.84 6.84 6.85 6.85 82 인도 3.14 2.56 2.53 2.51 85 세계 평균 2.80 2.56 - - 116 브라질 2.36 1.84 1.82 1.81 126 뉴질랜드 1.98 2.15 2.06 2.05 129 미국 2.06 1.93 1.90 1.80 135 프랑스 1.89 2.03 2.01 2.01 14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1.99. 2.00 2.00 2.00 188 중화인민공화국 1.51 1.65 1.66 1.66 유럽 연합 1.52 1.63 1.58 1.54 203 독일 1.38 1.39 1.36 1.38 220 일본 1.36 1.39 1.39 1.41 226 대한민국 1.47 1.22 1.24 1.29[7] 227 중화민국[8] 1.76 1.21 1.08 1.01 228 싱가포르 1.44 1.15 1.20 1.29 229 홍콩 1.04 1.13 1.20 1.28 230 마카오 0.94 1.00 1.03 1.06 같이 보기[편집] 가족 계획 골드미스 난혼 결혼 독신세 무자녀세 수태인자 (인구학) 각주[편집] ↑ 소설《태백산맥》을 보면 북한의 여성 전차운전수가 평양 시내에서 묵묵히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미선과 이학송이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옛 공산권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노동을 함으로써 평등을 실천했던 것이다. ↑ <러시아 인구 15년 만에 증가> ↑ ‘출산 증가’에 우쭐한 푸틴 ↑ 1970년대 중반까지 베이비 붐 현상이 지속되면서 인구 규모의 증가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욱이 초기(1955-1964년) 베이비 붐 세대가 출산하는 1980년경에는 제2차 베이비 붐 현상까지 나타났다. ↑ 출산율 여전히 '꼴찌수준' …한국 1.22명 - 문화일보 2009.11.18 ↑ 출산율 1.18명 안팎…2012년보다 하락전망” - 서울신문 2014.2.12 ↑ 한국, 11년만에 초저출산국 탈출 임박…출생아 3년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대만 출산율 꼴찌 전거 통제 NDL: 0099498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저출산&oldid=24258396" 분류: 사회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Українська中文文言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05: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아시아에 속하는 주요 나라별 저출산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
저출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출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산아니)은 출생률이 저하되는 현상을 말한다. 초창기에는 남성의 경제력 부족, 경제적인 문제만으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개인주의, 가치관의 다원화, 성격문제, 인간관계 스트레스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정 종교와 사상에 입각한 결혼 강요, 가부장제가 사라지면서 수면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화권과 일본에서는 소자화(少子化)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목차 1 원인 2 나라별 저출산 2.1 유럽 2.2 미국 2.3 러시아 2.4 아시아 2.5 대한민국 3 각국의 합계출산율 비교 4 같이 보기 5 각주 원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수태인자 (인구학)입니다. 도시화로 인한 개인주의 사상의 확산 경제 사정의 악화와 고용률 감소 독신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환경 증가(1인가구 증가, 인스턴트 식품 생산, 세탁소, 빨래방, 의류가게 등 각종 서비스업의 확산 등) 사교육비 등 육아 양육비 부담 증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의 부족 학력과 경제력으로 인한 결혼 포기(집값 상승, 땅값 상승도 이 원인에 포함됨) 결혼과 육아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보는 시각의 확산 성격 문제와 인간관계 스트레스 대인관계에 미숙한 사람의 증가 독신을 선호하는 사람 수 증가 만혼(晩婚)으로 인해 여성이 평생 낳는 아기 수의 감소 자녀 양육에 대한 가치관 변화 신체적, 체력적 결함을 지닌 사람의 증가(산업혁명 이전, 개발도상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증가) 나라별 저출산[편집] 유럽[편집] 유럽의 인구 증가율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미 감소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전쟁 직후인 1946년부터 1965년에 이르기까지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1986년까지는 많은 나라에서 출산율이 계속 저하했지만, 1987년부터는 출산율이 반전(反轉) 혹은 정체(定滯)하는 나라가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스웨덴 등은 1990년에 인구 치환(여성 1명당 2.1명) 수준을 회복했지만, 그 후 다시 출산율이 저하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출산율 회복을 정책 목표라고는 하지는 못하지만, 육아 지원 등은 아동·가족 정책으로서 행해지고 있다. 남유럽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합계출산율이 급격히 저하해, 1990년대 중반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1.1대라고 하는 초저출산률(超低出産率)이 되었다. 전통적 가치관이 강하고, 급격하게 진행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고학력화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노동을 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 덕분에[1] 공산주의 붕괴 전에도 여성들이 많은 출산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특히 동독은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을 만들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갔기 때문에 1961년까지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은 다자녀 가정의 부모에게 메달을 수여하며 출산을 장려해서 출산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감소했고 러시아의 인구는 199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의 인구는 2008년까지 660만 명이 줄어들었다.[2]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러시아의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이민자도 늘어나서 러시아의 인구는 2009년 8월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3] 미국[편집] 미국에서는 1985이후부터 출산율이 상승세로 변해 1990년 이후부터는 합계출산율 2.0 근처에서 정체(定滯)되어 있다. 이것은 대다수가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의에 따라 낙태와 피임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신자들인 히스패닉계(系) 국민의 출산율이 높기 때문으로(2003년에 2.79명), 非히스패닉계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출생률은 인구치환수준(人口置換水準: 여성 1명당 2.1명)을 밑돌고 있다. 그러나 非히스패닉계 백인의 출생률도 2000년 이후 1.85 정도로(2003년에 1.86) 인구치환 수준 이하여도 한국·일본·유럽보다는 높은 수준에 있으며, 저하 경향이 아니고 정체 상태에 있다. 한편 매우 높았던 흑인의 출산율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하강,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2003년에 2.00). 러시아[편집] 러시아에서는 소련 붕괴 직후부터 출산율과 평균수명이 감소했고 타국으로의 이주(移住)에 의한 인구 유출 때문에, 1993년에 주요국 중 가장 빨리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8년까지 계속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러시아의 인구는 1993년부터 2008년까지 15년 동안 660만 명이 줄어들었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이민자와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증가해 2009년부터는 인구가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편집] 일본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합계출산율이 2 이하로 떨어졌으며, 저출산 현상이 계속되어 2005년에는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 등의 합계출산율은 2003년 기준으로 홍콩이 0.94, 중화민국이 1.24, 싱가포르가 1.25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나 타이에서도 출산율이 인구치환 수준을 밑돌고 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출생률이 인구치환 수준을 웃돌고 있지만 저하 경향에 있는 나라가 많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가구에 자녀를 1명이상 낳지 못하도록 중국 공산당이 강력하게 규제하는 1가구 1자녀 정책에 따른 인구 억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식적인 합계의 결과일뿐, 실상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아이를 포함하게 되면 낮지 않은 출산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화민국에서는 출생아수 급감으로 2008년에는 출산율이 1.1명이었으나, 또 다시 감소세가 지속 돼 2009년에는 1명으로 1.08명이었던 대한민국(남한)의 2005년 최저 출산율 기록을 경신해 세계 최저의 출산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민국(남한)의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6.1명이었다. 이승만 및 윤보선 정부에서는 출산을 장려했지만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에 의해 196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인 가족계획이 실시되면서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5.2명, 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4.7명이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가족계획을 매우 강화시켜서[4] 1984년에는 2명 미만인 1.74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음해인 1985년 1.66명 수준으로 약간 떨어졌고 그 이후에도 계속된 정책으로 마침내 1987년 출산율이 1.53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후 1996년 8월 김영삼 정부가 출산정책을 산아제한정책에서 산아자율정책으로 전환했으나 출산율은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하락하였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에 따른 여파로 출산율은 계속 떨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에 즈문둥이 출산을 장려하여 일시적으로 출생아 수가 증가했지만 2001년에는 1.30명의 초저출산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산아자율정책에서 더욱 앞서나가 출산장려정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2005년에는 역대 최저치인 1.08명으로 떨어졌다. 이후 황금돼지해 홍보 등 정부의 많은 노력에 힘입어 2007년 1.26명으로 급증했지만 곧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해 2009년 1.15명으로 감소했다. 2010년부터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2년 1.3명으로 초저출산 국가에서 탈출하려는 기미를 보였으나 그 후 이어진 불경기 등의 여파로 출산율은 감소하여 2013년 1.18명, 2014년 1.21명에 이르렀다.[5][6] 이러한 출산율 변화는 아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 3남 2녀로 5명은 낳아야죠. 1960년대: 3·3·35운동 - 3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대: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90년대: 아들 바람 부모 세대 짝꿍 없는 우리 세대 2000년대: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 — 보건복지가족부, 인구보건복지협회(구 대한가족계획협회) 발췌 각국의 합계출산율 비교[편집] 순위 국가 2000년 2010년 2011년 2012년 1 니제르 7.72 7.58 7.58 7.57 2 우간다 6.96 6.73 - - 3 말리 6.84 6.84 6.85 6.85 82 인도 3.14 2.56 2.53 2.51 85 세계 평균 2.80 2.56 - - 116 브라질 2.36 1.84 1.82 1.81 126 뉴질랜드 1.98 2.15 2.06 2.05 129 미국 2.06 1.93 1.90 1.80 135 프랑스 1.89 2.03 2.01 2.01 14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1.99. 2.00 2.00 2.00 188 중화인민공화국 1.51 1.65 1.66 1.66 유럽 연합 1.52 1.63 1.58 1.54 203 독일 1.38 1.39 1.36 1.38 220 일본 1.36 1.39 1.39 1.41 226 대한민국 1.47 1.22 1.24 1.29[7] 227 중화민국[8] 1.76 1.21 1.08 1.01 228 싱가포르 1.44 1.15 1.20 1.29 229 홍콩 1.04 1.13 1.20 1.28 230 마카오 0.94 1.00 1.03 1.06 같이 보기[편집] 가족 계획 골드미스 난혼 결혼 독신세 무자녀세 수태인자 (인구학) 각주[편집] ↑ 소설《태백산맥》을 보면 북한의 여성 전차운전수가 평양 시내에서 묵묵히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미선과 이학송이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옛 공산권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노동을 함으로써 평등을 실천했던 것이다. ↑ <러시아 인구 15년 만에 증가> ↑ ‘출산 증가’에 우쭐한 푸틴 ↑ 1970년대 중반까지 베이비 붐 현상이 지속되면서 인구 규모의 증가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욱이 초기(1955-1964년) 베이비 붐 세대가 출산하는 1980년경에는 제2차 베이비 붐 현상까지 나타났다. ↑ 출산율 여전히 '꼴찌수준' …한국 1.22명 - 문화일보 2009.11.18 ↑ 출산율 1.18명 안팎…2012년보다 하락전망” - 서울신문 2014.2.12 ↑ 한국, 11년만에 초저출산국 탈출 임박…출생아 3년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대만 출산율 꼴찌 전거 통제 NDL: 0099498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저출산&oldid=24258396" 분류: 사회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Українська中文文言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05: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한민국이 언제 초저출산사회로 진입했을까? |
저출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출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산아니)은 출생률이 저하되는 현상을 말한다. 초창기에는 남성의 경제력 부족, 경제적인 문제만으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개인주의, 가치관의 다원화, 성격문제, 인간관계 스트레스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정 종교와 사상에 입각한 결혼 강요, 가부장제가 사라지면서 수면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화권과 일본에서는 소자화(少子化)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목차 1 원인 2 나라별 저출산 2.1 유럽 2.2 미국 2.3 러시아 2.4 아시아 2.5 대한민국 3 각국의 합계출산율 비교 4 같이 보기 5 각주 원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수태인자 (인구학)입니다. 도시화로 인한 개인주의 사상의 확산 경제 사정의 악화와 고용률 감소 독신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환경 증가(1인가구 증가, 인스턴트 식품 생산, 세탁소, 빨래방, 의류가게 등 각종 서비스업의 확산 등) 사교육비 등 육아 양육비 부담 증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의 부족 학력과 경제력으로 인한 결혼 포기(집값 상승, 땅값 상승도 이 원인에 포함됨) 결혼과 육아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보는 시각의 확산 성격 문제와 인간관계 스트레스 대인관계에 미숙한 사람의 증가 독신을 선호하는 사람 수 증가 만혼(晩婚)으로 인해 여성이 평생 낳는 아기 수의 감소 자녀 양육에 대한 가치관 변화 신체적, 체력적 결함을 지닌 사람의 증가(산업혁명 이전, 개발도상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증가) 나라별 저출산[편집] 유럽[편집] 유럽의 인구 증가율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미 감소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전쟁 직후인 1946년부터 1965년에 이르기까지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1986년까지는 많은 나라에서 출산율이 계속 저하했지만, 1987년부터는 출산율이 반전(反轉) 혹은 정체(定滯)하는 나라가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스웨덴 등은 1990년에 인구 치환(여성 1명당 2.1명) 수준을 회복했지만, 그 후 다시 출산율이 저하했다. 많은 나라에서는 출산율 회복을 정책 목표라고는 하지는 못하지만, 육아 지원 등은 아동·가족 정책으로서 행해지고 있다. 남유럽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합계출산율이 급격히 저하해, 1990년대 중반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1.1대라고 하는 초저출산률(超低出産率)이 되었다. 전통적 가치관이 강하고, 급격하게 진행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고학력화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노동을 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 덕분에[1] 공산주의 붕괴 전에도 여성들이 많은 출산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특히 동독은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을 만들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갔기 때문에 1961년까지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은 다자녀 가정의 부모에게 메달을 수여하며 출산을 장려해서 출산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감소했고 러시아의 인구는 199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의 인구는 2008년까지 660만 명이 줄어들었다.[2]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러시아의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이민자도 늘어나서 러시아의 인구는 2009년 8월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3] 미국[편집] 미국에서는 1985이후부터 출산율이 상승세로 변해 1990년 이후부터는 합계출산율 2.0 근처에서 정체(定滯)되어 있다. 이것은 대다수가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의에 따라 낙태와 피임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신자들인 히스패닉계(系) 국민의 출산율이 높기 때문으로(2003년에 2.79명), 非히스패닉계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출생률은 인구치환수준(人口置換水準: 여성 1명당 2.1명)을 밑돌고 있다. 그러나 非히스패닉계 백인의 출생률도 2000년 이후 1.85 정도로(2003년에 1.86) 인구치환 수준 이하여도 한국·일본·유럽보다는 높은 수준에 있으며, 저하 경향이 아니고 정체 상태에 있다. 한편 매우 높았던 흑인의 출산율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하강,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2003년에 2.00). 러시아[편집] 러시아에서는 소련 붕괴 직후부터 출산율과 평균수명이 감소했고 타국으로의 이주(移住)에 의한 인구 유출 때문에, 1993년에 주요국 중 가장 빨리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8년까지 계속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러시아의 인구는 1993년부터 2008년까지 15년 동안 660만 명이 줄어들었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이민자와 출산율과 평균 수명이 증가해 2009년부터는 인구가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편집] 일본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합계출산율이 2 이하로 떨어졌으며, 저출산 현상이 계속되어 2005년에는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 등의 합계출산율은 2003년 기준으로 홍콩이 0.94, 중화민국이 1.24, 싱가포르가 1.25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나 타이에서도 출산율이 인구치환 수준을 밑돌고 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출생률이 인구치환 수준을 웃돌고 있지만 저하 경향에 있는 나라가 많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가구에 자녀를 1명이상 낳지 못하도록 중국 공산당이 강력하게 규제하는 1가구 1자녀 정책에 따른 인구 억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식적인 합계의 결과일뿐, 실상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아이를 포함하게 되면 낮지 않은 출산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화민국에서는 출생아수 급감으로 2008년에는 출산율이 1.1명이었으나, 또 다시 감소세가 지속 돼 2009년에는 1명으로 1.08명이었던 대한민국(남한)의 2005년 최저 출산율 기록을 경신해 세계 최저의 출산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민국(남한)의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6.1명이었다. 이승만 및 윤보선 정부에서는 출산을 장려했지만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에 의해 196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인 가족계획이 실시되면서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5.2명, 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4.7명이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가족계획을 매우 강화시켜서[4] 1984년에는 2명 미만인 1.74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음해인 1985년 1.66명 수준으로 약간 떨어졌고 그 이후에도 계속된 정책으로 마침내 1987년 출산율이 1.53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후 1996년 8월 김영삼 정부가 출산정책을 산아제한정책에서 산아자율정책으로 전환했으나 출산율은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하락하였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에 따른 여파로 출산율은 계속 떨어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에 즈문둥이 출산을 장려하여 일시적으로 출생아 수가 증가했지만 2001년에는 1.30명의 초저출산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산아자율정책에서 더욱 앞서나가 출산장려정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2005년에는 역대 최저치인 1.08명으로 떨어졌다. 이후 황금돼지해 홍보 등 정부의 많은 노력에 힘입어 2007년 1.26명으로 급증했지만 곧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해 2009년 1.15명으로 감소했다. 2010년부터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2년 1.3명으로 초저출산 국가에서 탈출하려는 기미를 보였으나 그 후 이어진 불경기 등의 여파로 출산율은 감소하여 2013년 1.18명, 2014년 1.21명에 이르렀다.[5][6] 이러한 출산율 변화는 아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 3남 2녀로 5명은 낳아야죠. 1960년대: 3·3·35운동 - 3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대: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90년대: 아들 바람 부모 세대 짝꿍 없는 우리 세대 2000년대: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 — 보건복지가족부, 인구보건복지협회(구 대한가족계획협회) 발췌 각국의 합계출산율 비교[편집] 순위 국가 2000년 2010년 2011년 2012년 1 니제르 7.72 7.58 7.58 7.57 2 우간다 6.96 6.73 - - 3 말리 6.84 6.84 6.85 6.85 82 인도 3.14 2.56 2.53 2.51 85 세계 평균 2.80 2.56 - - 116 브라질 2.36 1.84 1.82 1.81 126 뉴질랜드 1.98 2.15 2.06 2.05 129 미국 2.06 1.93 1.90 1.80 135 프랑스 1.89 2.03 2.01 2.01 14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1.99. 2.00 2.00 2.00 188 중화인민공화국 1.51 1.65 1.66 1.66 유럽 연합 1.52 1.63 1.58 1.54 203 독일 1.38 1.39 1.36 1.38 220 일본 1.36 1.39 1.39 1.41 226 대한민국 1.47 1.22 1.24 1.29[7] 227 중화민국[8] 1.76 1.21 1.08 1.01 228 싱가포르 1.44 1.15 1.20 1.29 229 홍콩 1.04 1.13 1.20 1.28 230 마카오 0.94 1.00 1.03 1.06 같이 보기[편집] 가족 계획 골드미스 난혼 결혼 독신세 무자녀세 수태인자 (인구학) 각주[편집] ↑ 소설《태백산맥》을 보면 북한의 여성 전차운전수가 평양 시내에서 묵묵히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미선과 이학송이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옛 공산권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노동을 함으로써 평등을 실천했던 것이다. ↑ <러시아 인구 15년 만에 증가> ↑ ‘출산 증가’에 우쭐한 푸틴 ↑ 1970년대 중반까지 베이비 붐 현상이 지속되면서 인구 규모의 증가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욱이 초기(1955-1964년) 베이비 붐 세대가 출산하는 1980년경에는 제2차 베이비 붐 현상까지 나타났다. ↑ 출산율 여전히 '꼴찌수준' …한국 1.22명 - 문화일보 2009.11.18 ↑ 출산율 1.18명 안팎…2012년보다 하락전망” - 서울신문 2014.2.12 ↑ 한국, 11년만에 초저출산국 탈출 임박…출생아 3년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대만 출산율 꼴찌 전거 통제 NDL: 00994983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저출산&oldid=24258396" 분류: 사회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日本語NederlandsPortuguêsУкраїнська中文文言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2일 (수) 05: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12년 출산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어디인가? |
스즈키 쿄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즈키 쿄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스즈키 쿄카 출생 1968년 5월 31일(1968-05-31) (51세)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시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9년 ~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 스즈키 쿄카 (일본어: 鈴木京香, 1968년 5월 31일 ~)는 일본의 배우이다. 미야기현 센다이 시 출신이며, 소속사는 '반다'이다. 목차 1 주요 출연작 1.1 드라마 1.2 영화 2 외부 링크 주요 출연작[편집] 드라마[편집] 대하드라마 (NHK) 나는 듯이 (1990년) - 카즈노미야 역 불타오르다 (1993년 7월 4일 - 1994년 3월 13일) - 나카 역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 호소카와 가라샤 역 신센구미! (2004년) - 오우메 역 사나다마루 (2016년) - 기타노만도코로 역 1995년 《임금님의 레스토랑》 1997년 《기프트》 1998년 《반짝반짝 빛나는》 2004년 《희망 없는 자》 2007년 《화려한 일족》 - 타카스 아이코 역 2008년 《스캔들》 2010년 《세컨드 버진》 2012년 《이상의 아들》 2013년 《야행관람차》 2013년 《리갈 하이》 영화[편집] 1994년 《119》 1997년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1999년 《39 형법 제39조》 2001년 《사토라레》 2004년 《제브라맨》 2004년 《피와 뼈》 2005년 《전국자위대 1549》 2005년 《남자들의 야마토》 2006년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 2006년 《우동》 2007년 《아르헨티나 할머니》 2008년 《매직 아워》 2008년 《중력 피에로》 2008년 《지지 않는 태양》 2010년 《플라워즈》 2011년 《세컨드 버진》 외부 링크[편집] (일본어/영어) 스즈키 쿄카 - 공식 웹사이트 (영어) 스즈키 쿄카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vdeh닛칸스포츠 영화대상 여우주연상1980년대 요시나가 사유리 (1988) 도아케 유키요 (1989) 1990년대 마츠자카 케이코 (1990) 무라세 사치코 (1991) 미타 요시코 (1992) 이와시타 시마 (1993) 타카오카 사키 (1994) 스기무라 하루코 (1995) 아사오카 루리코 (1996) 쿠로키 히토미 (1997) 오오타케 시노부 (1998) 후지 스미코 (1999) 2000년대 요시나가 사유리 (2000) 키시 케이코 (2001) 스즈키 쿄카 (2002) 테라지마 시노부 (2003) 코유키 (2004) 코이즈미 쿄코 (2005) 마츠유키 야스코 (2006) 다케우치 유코 (2007) 아야세 하루카 (2008) 마츠 타카코 (2009) 2010년대 후카츠 에리 (2010) 미야자키 아오이 (2011) 요시나가 사유리 (2012) 마키 요코 (2013) 미야자와 리에 (2014) 아야세 하루카 (2015) 미야자와 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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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오 아야코 츠카사 요코 1967년 ~ 1974년 개최되지 않음 1970년대 1967년 ~ 1974년 개최되지 않음 아사오카 루리코 아키요시 쿠미코 이와시타 시마 카지 메이코 모모이 카오리 1980년대 토아케 유키요 마츠자카 케이코 나츠메 마사코 다나카 유코 야쿠시마루 히로코 토아케 유키요 이시다 아유미 미타 요시코 모모이 카오리 다나카 요시코 1990년대 마츠자카 케이코 쿠도 유키 미타 요시코 루비 모레노 타카오카 사키 나카야마 미호 수상자 없음 모모이 카오리 하라다 미에코 스즈키 쿄카 2000년대 요시나가 사유리 아마미 유키 카타오카 레이코 테라지마 시노부 미야자와 리에 코이즈미 쿄코 아오이 유우 아소 쿠미코 키무라 타에 아야세 하루카 2010년대 테라지마 시노부 나가사쿠 히로미 안도 사쿠라 칸지야 시호리 안도 사쿠라 아리무라 카스미 오오타케 시노부 아라가키 유이 카도와키 무기 작품상 · 감독상 · 남우주연상 · 여우주연상 · 남우조연상 · 여우조연상 · 신인상 ※1967년-1974년은 미개최 vdeh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여우주연상1955년 ~ 1969년 다카미네 히데코 (1955) 야마다 이스즈 (1956) 야마다 이스즈 (1957) 다나카 키누요 (1958) 아라타마 미치요 (1959) 야마모토 후지코 (1960) 와카오 아야코 (1961) 오카다 마리코 (1962) 히다리 사치코 (1963) 쿄 마치코 (1964) 와카오 아야코 (1965) 츠카사 요코 (1966) 이와시타 시마 (1967) 와카오 아야코 (1968) 이와시타 시마 (1969) 1970년 ~ 1989년 바이쇼 치에코 (1970) 후지 준코 (1971) 이사야마 히로코 (1972) 에나미 쿄코 (1973) 다나카 키누요 (1974) 아사오카 루리코 (1975) 하라다 미에코 (1976) 이와시타 시마 (1977) 카지 메이코 (1978) 모모이 카오리 (1979) 오타니 나오코 (1980) 바이쇼 치에코 (1981) 바이쇼 치에코 (1982) 다나카 유코 (1983) 요시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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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야마 후미에 7 (1967) 요코우치 타다시 8 (1968) 후지타 유미코 9 (1969) 오타니 나오코 10 (1970) 미나미다 요코 11편 - 20편 11 (1971) 야마구치 카린 12 (1972) 마키 히로코 13 (1973) 다카하시 요코 14 (1974) 사이토 코즈에→후지타 미호코 15 (1975 전반기) 오타케 시노부 16 (1975 후반기) 아키노 요코 17 (1976 전반기) 아사지 요코 18 (1976 후반기) 스즈카 케이코 19 (1977 전반기) 타카세 하루나・고다이 미치코 20 (1977 후반기) 아라이 하루미 21편 - 30편 21 (1978 전반기) 키쿠치 유코→유리 치카코 22 (1978 후반기) 아이하라 토모코 23 (1979 전반기) 쿠마가이 마미 24 (1979 후반기) 야마자키 센리 25 (1980 전반기) 호시노 토모코 26 (1980 후반기) 콘노 미사코 27 (1981 전반기) 나카무라 아케미 28 (1981 후반기) 하라 히데코 29 (1982 전반기) 테즈카 사토미 30 (1982 후반기) 후지요시 쿠미코 31편 - 40편 31 (1983) 코바야시 아야코→다나카 유코→오토와 노부코 32 (1984 전반기) 에노키 타카아키 33 (1984 후반기) 신도 에이사쿠 34 (1985 전반기) 사와구치 야스코 35 (1985 후반기) 오카노 신이치로 36 (1986 전반기) 사이토 유키 37 (1986 후반기) 카노 미유키 38 (1987 전반기) 고무라 히로 39 (1987 후반기) 와카무라 마유미 40 (1988 전반기) 후지타 토모코 41편 - 50편 41 (1988 후반기) 야마구치 토모코 42 (1989 전반기) 이시다 아유미・시미즈 미사 43 (1989 후반기) 와타나베 아즈사 44 (1990 전반기) 다나카 미노루 45 (1990 후반기) 야마모토 요코・하타다 리에 46 (1991) 스즈키 쿄카・쿠라타 테츠오 47 (1992 전반기) 이즈미 핀코・사쿠라이 사치코 48 (1992 후반기) 이시다 히카리 49 (1993 전반기) 토다 나호 50 (1993 후반기) 호소카와 나오미 51편 - 60편 51 (1994 전반기) 준나 리사 52 (1994 후반기 - 1995 전반기) 야스다 나루미→나카타 요시코 53 (1995 후반기) 미쿠니 카즈오 54 (1996 전반기) 마츠시마 나나코 55 (1996 후반기) 미쿠라 카나→이와사키 히로미・미쿠라 마나→키쿠치 마이코 56 (1997 전반기) 다나카 미사토 57 (1997 후반기) 사토 유미코 58 (1998 전반기) 스도 리사 59 (1998 후반기) 코니시 미호 60 (1999 전반기) 히이라기 루미→토노 나기코→바이쇼 치에코 61편 - 70편 61 (1999 후반기) 다케우치 유코 62 (2000 전반기) 타바타 토모코 63 (2000 후반기) 오카모토 아야 64 (2001 전반기) 쿠니나카 료코 65 (2001 후반기) 이케와키 치즈루 66 (2002 전반기) 타카노 시호 67 (2002 후반기) 미야지 마오 68 (2003 전반기) 나카 노리코 69 (2003 후반기) 이시하라 사토미 70 (2004 전반기) 후지사와 에마 71편 - 80편 71 (2004 후반기) 하라다 나츠키 72 (2005 전반기) 모토카리야 유이카 73 (2005 후반기) 무라카와 에리 74 (2006 전반기) 미야자키 아오이 75 (2006 후반기) 후지야마 나오미 76 (2007 전반기) 히가 마나미 77 (2007 후반기) 칸지야 시호리 78 (2008 전반기) 에이쿠라 나나 79 (2008 후반기) 미쿠라 마나・미쿠라 가나 80 (2009 전반기) 타베 미카코 81편 - 90편 81 (2009 후반기) 쿠라시나 카나 82 (2010 전반기) 마츠시타 나오 83 (2010 후반기) 타키모토 미오리 84 (2011 전반기) 이노우에 마오 85 (2011 후반기) 오노 마치코→나츠키 마리 86 (2012 전반기) 호리키타 마키 87 (2012 후반기) 나츠나 88 (2013 전반기) 노넨 레나 89 (2013 후반기) 안 90 (2014 전반기) 요시타카 유리코 91편 - 100편 91 (2014 후반기) 타마야마 테츠지・샬럿 케이트 폭스 92 (2015 전반기) 츠치야 타오 93 (2015 후반기) 하루 94 (2016 전반기) 타카하타 미츠키 95 (2016 후반기) 요시네 쿄코 96 (2017 전반기) 아리무라 카스미 97 (2017 후반기) 아오이 와카나 98 (2018 전반기) 나가노 메이 99 (2018 후반기) 안도 사쿠라 100 (2019 전반기) 히로세 스즈 101편 - 101 (2019 후반기) 토다 에리카 102 (2020 전반기) 쿠보타 마사타카 vdeh닛칸스포츠 드라마 그랑프리 여우조연상 이나모리 이즈미 후카다 쿄코 미즈노 미키 스즈카제 마요 아마미 유키 야다 아키코 코유키 오카모토 아야 야쿠시마루 히로코 스즈키 쿄카 카시이 유우 우에노 주리 오마사 아야 안 토다 에리카 시바사키 코우 키무라 후미노 쿠리야마 치아키 코이케 에이코 vdeh더 텔레비전 드라마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1회 - 10회('94 [2] - '96 [3])1. 아다치 유미 | 2. 아사노 아쓰코 | 3. 와쿠이 에미 | 4. 나카야마 미호 | 5. 사카이 노리코 | 6. 토키와 타카코 | 7. 스즈키 호나미 | 8. 와쿠이 에미 | 9. 야마구치 토모코 | 10. 토키와 타카코11회 - 20회('96 [4] - '99 [1])11. 사카이 노리코 | 12. 토키와 타카코 | 13. 야쿠시마루 히로코 | 14. 토키와 타카코 | 15. 무로이 시게루 | 16. 스즈키 호나미 | 17. 에스미 마키코 | 18. 나카타니 미키 | 19. 나카야마 미호 | 20. 나카타니 미키21회 - 30회('99 [2] - '01 [3])21. 나가사쿠 히로미 | 22. 후카츠 에리 | 23. 마츠시마 나나코 | 24. 토키와 타카코 | 25. 토모사카 리에 | 26. 칸노 미호 | 27. 마츠시마 나나코 | 28. 미즈노 미키 | 29. 호시노 마리 | 30. 쿠니나카 료코31회 - 40회('01 [4] - '04 [1])31. 후지와라 노리카 | 32. 후카츠 에리 | 33. 나카마 유키에 | 34. 다케우치 유코 | 35. 마츠시마 나나코 | 36. 마츠시마 나나코 | 37. 나카마 유키에 | 38. 칸노 미호 | 39. 나카마 유키에 | 40. 우에토 아야41회 - 50회('04 [2] - '06 [3])41. 시노하라 료코 | 42. 아마미 유키 | 43. 요네쿠라 료코 | 44. 나카마 유키에 | 45. 시노하라 료코 | 46. 아마미 유키 | 47. 이노우에 마오 | 48. 시노하라 료코 | 49. 아마미 유키 | 50. 미야자키 아오이51회 - 60회('06 [4] - '09 [1])51. 우에노 주리 | 52. 시노하라 료코 | 53. 칸노 미호 | 54. 호리키타 마키 | 55. 칸노 미호 | 56. 카리나 | 57. 나카마 유키에 | 58. 시다 미라이 | 59. 미야자키 아오이 | 60. 칸노 미호61회 - 70회('09 [2] - '11 [3])61. 아마미 유키 | 62. 마츠시마 나나코 | 63. 시다 미라이 | 64. 칸노 미호 | 65. 마츠유키 야스코 | 66. 아야세 하루카 | 67. 토다 에리카 | 68. 타베 미카코 | 69. 아시다 마나 | 70. 이노우에 마오71회 - 80회('11 [4] - '14 [1])71. 마츠시마 나나코 | 72. 오노 마치코 | 73. 나가사와 마사미 | 74. 호리키타 마키 | 75. 요네쿠라 료코 | 76. 스즈키 쿄카 | 77. 시노하라 료코 | 78. 노넨 레나 | 79. 요네쿠라 료코 | 80. 안81회 - 90회('14 [2] - '16 [3])81. 코이즈미 쿄코 | 82. 요시타카 유리코 | 83. 아야세 하루카 | 84. 안 | 85. 오시마 유코 | 86. 요시네 쿄코 | 87. 이시하라 사토미 | 88. 하루 | 89. 쿠로키 하루 | 90. 키타가와 케이코91회 - 100회('16 [4] - '19 [1])91. 아라가키 유이 | 92. 마츠 타카코 | 93. 하루 | 94. 아리무라 카스미 | 95. 아야세 하루카 | 96. 이시하라 사토미 | 97. 나가사와 마사미 | 98. 나가노 메이 | 99. 토다 에리카 | 100. 후카다 쿄코 vdeh더 텔레비전 드라마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1회 - 10회('94 [2] - '96 [3])1. 스즈키 안즈 | 2. 사쿠라이 사치코 | 3. 츠루타 마유 | 4. 오기노메 케이코 | 5. 야마구치 토모코 | 6. 오쓰카 네네 | 7. 이이지마 나오코 | 8. 호쇼 마이 | 9. 이나모리 이즈미 | 10. 이이지마 나오코11회 - 20회('96 [4] - '99 [1])11. 나가사쿠 히로미 | 12. 히나가타 아키코 | 13. 무로이 시게루 | 14. 히로스에 료코 | 15. 나츠카와 유이 | 16. 스즈키 쿄카 | 17. 기무라 요시노 | 18. 후카다 쿄코 | 19. 토모사카 리에 | 20. 이시다 유리코21회 - 30회('99 [2] - '01 [3])21. 마츠시타 유키 | 22. 후카다 쿄코 | 23. 토키와 타카코 | 24. 미즈노 미키 | 25. 후카츠 에리 | 26. 히로스에 료코 | 27. 히로스에 료코 | 28. 후카츠 에리 | 29. 토미타 야스코 | 30. 타이라 토미31회 - 40회('01 [4] - '04 [1])31. 다케우치 유코 | 32. 호시노 마리 | 33. 시바사키 코우 | 34. 이케와키 치즈루 | 35. 마츠유키 야스코 | 36. 야다 아키코 | 37. 시노하라 료코 | 38. 히로스에 료코 | 39. 코이즈미 쿄코 | 40. 미야마 카렌41회 - 50회('04 [2] - '06 [3])41. 고바야시 사토미 | 42. 아야세 하루카 | 43. 시노하라 료코 | 44. 하세가와 쿄코 | 45. 코유키 | 46. 시라이시 미호 | 47. 호리키타 마키 | 48. 아야세 하루카 | 49. 호리키타 마키 | 50. 나츠카와 유이51회 - 60회('06 [4] - '09 [1])51. 카리나 | 52. 스즈키 쿄카 | 53. 오고 스즈카 | 54. 후쿠다 사키 | 55. 시바사키 코우 | 56. 다케우치 유코 | 57. 우에노 주리 | 58. 야마다 유 | 59. 토다 에리카 | 60. 카타세 나나61회 - 70회('09 [2] - '11 [3])61. 아라가키 유이 | 62. 쿠로키 메이사 | 63. 아야세 하루카 | 64. 안 | 65. 다나카 유코 | 66. 다케우치 유코 | 67. 우에토 아야 | 68. 타케이 에미 | 69. 아야세 하루카 | 70. 오오타케 시노부71회 - 80회('11 [4] - '14 [1])71. 안 | 72. 마키 요코 | 73. 토다 에리카 | 74. 이시하라 사토미 | 75. 타베 미카코 | 76. 오노 마치코 | 77. 요시타카 유리코 | 78. 코이즈미 쿄코 | 79. 아라가키 유이 | 80. 이시하라 사토미81회 - 90회('14 [2] - '16 [3])81. 나나오 | 82. 나카마 유키에 | 83. 미츠시마 히카리 | 84. 타카하타 미츠키 | 85. 쿠로키 하루 | 86. 미츠시마 히카리 | 87. 나나오 | 88. 타카하타 아츠코 | 89. 코이케 에이코 | 90. 이모토 아야코91회 - 100회('16 [4] - '19 [1])91. 이시다 유리코 | 92. 요시오카 리호 | 93. 코이케 에이코 | 94. 아라가키 유이 | 95. 미츠시마 히카리 | 96. 키무라 후미노 | 97. 키무라 타에 | 98. 우에노 주리 | 99. 요시다 요 | 100. 나가노 메이 전거 통제 WorldCat VIAF: 85121555 LCCN: no2009176027 ISNI: 0000 0001 1476 3779 SUDOC: 161899145 BNF: cb150616527 (데이터) NDL: 001157301 NKC: pna200739763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즈키_쿄카&oldid=24066557" 분류: 196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일본의 여자 영화 배우일본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센다이시 출신갤럭시 개인 상연속 TV 소설 주연 배우도호쿠 가쿠인 대학 동문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와 위키백과에서 차이가 있는 공식 웹사이트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فارسیFrançais日本語Polski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15: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스즈키 쿄카는 2007년 《화려한 일족》에서 무슨 역을 맡았는가? |
쓰루미구 (오사카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쓰루미구 (오사카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쓰루미 구 (오사카 시)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쓰루미 구 쓰루미 구의 위치 한자 표기 鶴見区 가나 표기 つるみく 나라 일본 지방 긴키 지방 도도부현 오사카 부 분류코드 27124-1 면적 8.17 km² 인구 111,311명(추계인구,2019년 6월 1일) 웹사이트 쓰루미 구 공식 홈페이지 쓰루미 구(일본어: 鶴見区)는 일본 오사카 시를 구성하는 24개 구 중 하나이다. 오사카시의 대부분은 셋쓰 국 지역이지만 쓰루미 구는 그 대부분이 가와치 국이며 가장 늦게 오사카 시에 흡수된 지역이다. 1990년에 개최된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의 회장이 된 쓰루미 녹지가 구의 상징이 되고 있다. 지하철 나가호리쓰루미료쿠치 선이 연장되고, 가타마치 선의 JR 도자이 선의 차를 타고 들어가게 된 이후 순조롭게 인구가 증가하였다. 구내에서는 대규모 맨션이 잇달아 건설되고 있다. 목차 1 인접한 지자체 2 역사 3 교통 3.1 철도 3.2 도로 4 외부 링크 인접한 지자체[원본 편집] 오사카 시 : 조토 구, 아사히 구, 히가시나리 구 히가시오사카 시, 모리구치 시, 가도마 시, 다이토 시 역사[원본 편집] 1974년 - 조토 구로부터 동부를 분리해 탄생하였다. 1990년 - 국제꽃과 초록의 박람회(화박)가 화박기념 공원 쓰루미 녹지에서 개최되었다. 교통[원본 편집] 철도[원본 편집] 서일본 여객철도 가타마치 선 (← 히가시오사카시 도쿠안 역) - 하나텐 역 - (조토구 시기노 역 →) 오사카히가시 선 하나텐 역 - (히가시오사카시 다카이다추오 역 →) 오사카 지하철 나가호리쓰루미료쿠치 선 (← 조토구 가모 4초메 역) - 이마후쿠쓰루미 역 - 요코즈쓰미 역 - 쓰루미료쿠치 역 - (가도마시 가도마미나미 역 →) 도로[원본 편집] 긴키 자동차도(일본어판) 국도 제163호선 (일본)(일본어판) 국도 제479호선 (일본)(일본어판) 외부 링크[원본 편집] (일본어) 쓰루미 구 홈페이지 vdeh오사카부의 행정 구역오사카시 기타구 고노하나구 나니와구 니시구 니시나리구 니시요도가와구 다이쇼구 덴노지구 미나토구 미야코지마구 스미노에구 스미요시구 쓰루미구 아베노구 아사히구 요도가와구 이쿠노구 조토구 주오구 후쿠시마구 히가시나리구 히가시스미요시구 히가시요도가와구 히라노구 사카이시 사카이구 기타구 나카구 니시구 미나미구 미하라구 히가시구 그 밖의 시 가도마시 가시와라시 기시와다시 가와치나가노시 가이즈카시 가타노시 네야가와시 다이토시 다카쓰키시 다카이시시 도요나카시 돈다바야시시 마쓰바라시 미노오시 모리구치시 센난시 셋쓰시 스이타시 시조나와테시 야오시 오사카사야마시 이바라키시 이즈미시 이즈미사노시 이즈미오쓰시 이케다시 하비키노시 한난시 후지이데라시 히가시오사카시 히라카타시 미시마군시마모토정도요노군 도요노정 노세정 센보쿠군다다오카정센난군 구마토리정 다지리정 미사키정 미나미카와치군 가난정 다이시정 지하야아카사카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쓰루미구_(오사카시)&oldid=24515276" 분류: 쓰루미구 (오사카시)오사카시의 구조토구의 역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ebuanoEnglishEsperantoفارسیSuomiFrançais日本語PolskiScotsไทยاردو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2일 (화) 21: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쓰루미구의 철도는 어떻게 될까? |
홀로코스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홀로코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대인 대학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히브리어: השואה, 이디시어: 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1]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2]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3]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4] 목차 1 어원과 개념 2 특징 2.1 전국가적 동조 2.2 배경 사상과 규모 2.3 집단 학살 수용소 2.4 생체 의학 실험 3 발달과 실행 3.1 유래 3.2 법적 탄압과 이주 3.3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1938) 3.4 재정착과 강제추방 3.5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 3.6 게토(Ghetto)(1940-1945) 3.7 유대인 대학살(1939-1942) 3.8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 3.9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 3.10 반응 3.10.1 독일의 대중 3.11 동기 3.12 집단 학살 수용소 3.13 가스실 3.14 유태인의 반발 3.14.1 - 저항의 정의와 평가 3.14.2 -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 3.14.3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 3.15 절정 3.16 죽음의 행군(1944-1945) 3.17 해방 4 피해자와 사망 통계 4.1 유태인 4.1.1 국가별 4.1.2 이디시어(Yiddish)에 대한 영향 4.2 비유태인 4.2.1 슬라브인 4.2.2 폴란드인 4.2.3 서부 슬라브인 4.2.4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브인 4.2.5 동부 슬라브인 4.2.6 소련 전쟁 포로 4.2.7 집시 4.2.8 유색인종 4.2.9 신체장애인/정신장애인 4.2.10 동성애자 4.2.11 좌익분자 4.2.12 프리메이슨 4.2.13 여호와의 증인 5 각주 6 같이 보기 7 참조 문헌 8 외부 링크 어원과 개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홀로코스트의 명칭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특징[편집] 2007년 국경(점선) 기준의 강제 수용소 위치 지도. 전국가적 동조[편집]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4]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5]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6]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6] 배경 사상과 규모[편집] 다른 학살들의 경우, 학살 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 사항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 (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는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태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태까지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 정작 실행은 매우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7]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는 것을 꼽았다.[8]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9]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10]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11]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12] 집단 학살 수용소[편집] “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 — 아돌프 히틀러[13]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14] 생체 의학 실험[편집]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15]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16]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17]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17] 발달과 실행[편집] 유래[편집]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18]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19] 1895년, 옛 독일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20]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21]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21]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22]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23]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24]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25]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26]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27]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28]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29]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적 탄압과 이주[편집] 나치 지도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 나치정책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이다.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과 도덕적인 적으로는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상습범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의 목적은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30]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31]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32]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었다.[33]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34]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35]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34]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36]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37]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38]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39]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성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월터 벤자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옹 페츠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월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월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램퍼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40] 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더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41]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맥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 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 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41]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1938)[편집]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쉘 그륀스판(Herschel Grünspan)은 파리에서 독일 나치의 외교관 에른스트 봄 레이스를 암살했다.[42]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물리적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였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42]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회당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43]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42]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부르크(Oranieburg),[44]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45]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 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42]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42] 재정착과 강제추방[편집] 전쟁 이전 나치는 유럽으로부터 독일 유대인을 대량 강제추방하는 것을 고심하였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사흐트 계획이 필요 없어지질 때까지 수 천명의 유대인 강제추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국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이치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스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 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 달러를 수송했다.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편집] 제 3제국의 시작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감금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 50%에 육박하는 사망률을 보이긴 했지만, 그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곳으로 설계 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에 오직 많은 학살만을 위한 6개의 대규모 집단 처형장이 세워졌다.) 1939년 이후, 많은 수용소가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는 장소로 변했다. 15,000개의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독일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동부 유럽에 위치했다. 독일 내에도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공산당원 혹은 로마와 신티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수용소가 많이 세워졌다. 수감자들을 화물차에 태워 이송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도착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려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역을 통한 학살은 구조적인 학살정책이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일을 하거나, 체력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독가스에 의해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노역은 전쟁용품 생산에 사용되었다. 허락 하에 몇몇의 수용소는 수감자의 몸에 수감번호를 새겼다. 이것은 12시간에서 14시간을 교대로 일을 하게 하는데 편리했다. 노동 전후로 점호가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게토(Ghetto)(1940-1945)[편집] 폴란드 침공이후, 나치는 편입된 영토에 유대인이 제한된 게토와 일반정부를 설립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이것들은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밝혀진 것처럼, 그러한 추방은 일어나지 않았고 게토의 주민들은 대신에 학살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인들은 각각의 게토에 유대인들의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Judenrat)에 의해 운영돼야 된다고 지시했고 그러한 위원회의 설립을 첫 번째 주문은 하이드리히(Heydrich)에서 특수행동부대(Einsatzgruppen)의 상부에 1939년 9월 29일 편지에 포함되었다. 게토는 다른 시간들과 다른 이유들로 형성되었고 외부세계로부터 베제되었다. 그 위원회들은 게토를 매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살 곳, 의료, 난방, 물, 음식의 배급문제들을 포함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위원회에 몰수시작, 강제 노동구성, 마지막으로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운영회의 기본적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치정권 또는 그 대행자이 주로 협력하였다. 점점 더 끔찍한 협정 뇌물수수와 청원을 받아들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한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위원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숨을 제공했다.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되어야 할 추방자들의 이름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주된 패턴은 이 마지막 과제를 준수하는 것이었지만, 몇몇 위원회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떤 한 사람도 넘겨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Lviv) 그리고 요제프 파르나스(Joseph Parnas)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 1942년 10월 14일에 부아로짜(Buaroza)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을 협력하는 대신에 자살했다. 1942년7월 23일에 바르샤바에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ow)는 마지막으로 게토가 청산되어 그가 다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자살했다. 차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와 같이 독재자에게 헌신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는 살 수 있는 유대인들은 살리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는 독일에서도 유지되었다. 한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권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지시를 복종하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인 전투기관이 위원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협력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인들은 통제를 잃게 됐다. 바르샤바 게토는 380,000명의 인원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0,000명의 인원으로 2번째로 컸다. 요컨대 느리고 수동적인 살인자인 미하엘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에 따르면 그곳은 거대하게 북적이는 감옥이었다.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그 곳은 폴란드 수도지역의 2.4% 만을 차지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43,000명 이상의 거주자들은 1941년에 그곳에서 죽었고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10분의 1이상이 죽었으며 1942년에는 그 거주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다. "독일인들은 경찰이 되었고 그들은 집들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유대인은 나가(Raus, raus, raus, Juden raus)”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녀의 손에 오줌을 누어서 그 아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음료로 주었다. 그 경찰이 갔을때 나는 그 엄마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죽어있었고, 다른 엄마는 그녀 자신의 아이를 기절시켜 죽였었다." - 아브라함 말릭(Abraham Malik)이 코브노(Kovno) 게토에서 경험을 저술한 것에서.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의 시작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3일 후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300,000명에 사람들이 바르샤바로부터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수용소까지 화물기차로 수송되었다. 많은 다른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첫 번째 빈민가 폭동은 남동 폴란드 라크바(Łachwa)의 작은 마을에서 1942년 9월 발생했다. 1943년 무장저항 시도는 바르샤바 게토봉기와 비알리스토크(Białystok) 빈민가 반란과 같이 큰 게토들에 의해 발생했지만 모든 경우 그들은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유대인 대학살(1939-1942)[편집] 지역의 인구에 의한 수많은 치명적인 학살은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는 자발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의 학살을 포함하는데 그 학살은 14,000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다. 또한 1941년 7월의 실크 프로그램(Jedwabne pogrom)을 포함하는데 이는 나치 질서경찰(Nazi Ordnungspolizei)가 있는 데서 300명 유대인이 불 난 헛간에 잠기게 되는 사건이다. 독일인에 의해 같은 곳에서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다. 이것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에 의해 조사된 두 개의 무덤에 있는 피해자의 숫자로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 의해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 최종 발견되었다. 소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편집] 1939년 12월의 시작과 함께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다중 살인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였다. 첫째로, 가스 실린더를 장착한 실험용 가스차(gas van)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는 T-4 작전(나치의 인종정책 일환으로 안락사를 이용한 장애인 학살 계획)의 일환으로써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선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가스차가 실린더 대신 엔진의 배기가스를 이용하면서 1941년 11월부터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들은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Chełmno extermination camp)에 소개되었고 그것 중 15대는 점령된 소련에서 대량살상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는 국가보안본부(SS-Reichssicherheitshauptamt)의 감독 아래에서 개발되었고 운영되었다. 또한 대략 50만명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가스차는 신중하게 감독받았고 한달 동안의 관찰 후의 한 기록에서는 “기계에 어떠한 결함도 나타나지 않고 세 대의 가스차를 이용하여 9만7천번이 진행되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새로운 다중 살인 기법의 필요성은 군사정부의 통치자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한스 프랑크는 다수의 사람들을 간단히 쏘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방법으로 설계된 단계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나치친위대(SS)가 독성 가스를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살인이 동반된 실험을 하게 만든 문제였다.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는 가스방을 발명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입니다. 반제 회의는 반제의 베를린 교외에서 1942년 1월 20일에 라인 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유대인 문제 와 관련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국가 사무총장, 고위 관리, 파티의 리더, SS 장교와 정부 부처의 다른 지도자의 숫자를 포함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정책 회의의 초기 목적은 유럽안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방법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유럽내 유대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양한 점령 지역에서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을 위한 지식과 책임을 모두 공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에 의해 그려진 분의 사본은 살아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그것들은 "완곡 어법 언어"로서 쓰여졌다. 따라서 회의에서 사용 된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에 유대인 철수 정책에 의해 추방을 나타내는 회의는 대체되었다고 연설했다. 이는 독일에 의해서 통제 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나머지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에 사는 11만 유대인들을 포함하는 임시적인 해결방법에서 궁극적인 해결방법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최종 해결책'의 문구에 의해서 이해되도록 분명히 했다.” 최종해결책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이다. 관계자는이 200만은 여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230만 유대인은 일반정부, 850,000은 헝가리에, 다른 점령 국가에서 110만, USSR에서 안에 오백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 총 약 650만. 이들은 모두 거의 모두가 한번에 가스로 죽을 폴란드에 있는 학살 수용소 (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 될 것이다. 괴링의 대표, 박사 에리히 노이만은 산업 노동자들의 몇 가지 클래스에 대한 제한된 면제를 받았다. 반응[편집] 독일의 대중[편집] 그의 1983 책, 대중의 의견과 제 3제국의 정치적 반대에서, 이안 커쇼는 나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Alltagsgeschichte (일상 생활의 역사)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의 태도를 묘사하면서, 커쇼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이 쇼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에” 관한 전챙에 대해서는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이 증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관심에 의해 길이 닦였다"고 비유했다. 대부분의 바바리아, 그리고 함축적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쇼아에 무관심 있다는 커쇼의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Kulka, 나치 독일의 여론에 대한 전문가 및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 정도를 경시했다고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자연스러운" 반유대주의가 행해지고 있다고 인정할 지라도 이러한 작업은 독일의 상당한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단독으로 오는 것으로서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Kulka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커쇼가 그들을 대중의견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오히려 "무관심", "수동적인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더 나은 용어가 될 수 있다. 나치정권에 반대 하는 유대인들 또는 독일인들에 관한 관점으로만 연구를 집중 시키면, 나치 독일의 역사 학자 크리스토프 디퍼가 그의 1983년 에세이 "Der Deutsche Widerstand und die Juden" (영어로 번역하면 “독일인의 정황과 유대인들” Yad Vashem의 저서 16권, 1984)에서 반 나치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반유대주의라고 주장했다. 디퍼는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관료적인 것과 의사 법적 박탈이 1938년에 여전히 받아들여질때까지 행해졌다고” 썼다. 디퍼는 어떠한 독일 저항자들도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고 쓴 적이 없었지만 그는 또한 민족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에 의해 그들의 계획이 엎어지고 나서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회복시킬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디퍼가 정권의 상대방에 의해 세워진 관점에서 보면 독일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 문제는 존재했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베를린에 다양한 기능의 3,000개의 수용소가 있고 또 다른 1,300개가 함부르크에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것의 공동 연구원은 독일 인구는 그러한 유행을 고려하면 박해에 대해 알고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Gellately는 대부분의 독일 민간인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Gellately에 따르면, 정부는 언론과 민간인을 통한 음모는 가스 챔버의 사용을 제외한 모든 측면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어떤 역사적 증거는 홀로 코스트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전의 강제 수용소에 추방당했고, 그들을 기다려온 운명을 알지도 못했고 거부 할 수도 없었다. ;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이 다시 정착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기[편집] 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어떠한 강압적인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46] Buchheim은 범죄나 다름없는 그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다고 저술하며,[46]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47]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46]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48]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49] 후일 Stanley Milgram은 Milgram Experiment를 통해서, 응집력이 강력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은 이에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이에 큰 영향을 받은 Browning은 위의 101부대의 사례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나 동류집단 압력(peer groop perssure)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 트라브니키 간수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50] 사학자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51] 그리고 Kudryashov는 이들이 대개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52]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는 관심도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52]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53] 이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트라브니키(Trawniki)는 물론이고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보프(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51][54] 집단 학살 수용소[편집] 각 수용소별 개략적인 사망자 수[55] 수용소 사망자 좌표 주석 Auschwitz II 1,000,000 북위 50° 2′ 9″ 동경 19° 10′ 42″ / 북위 50.03583° 동경 19.17833° / 50.03583; 19.17833 (Oświęcim (Auschwitz, Poland)) [56][57][58] Belzec 600,000 북위 50° 22′ 18″ 동경 23° 27′ 27″ / 북위 50.37167° 동경 23.45750° / 50.37167; 23.45750 (Belzec (Poland)) [59][60] Chełmno 320,000 북위 52° 9′ 27″ 동경 18° 43′ 43″ / 북위 52.15750° 동경 18.72861° / 52.15750; 18.72861 (Chełmno (Poland)) [61][62] Jasenovac 58–97,000 북위 45° 16′ 54″ 동경 16° 56′ 6″ / 북위 45.28167° 동경 16.93500° / 45.28167; 16.93500 (Jasenovac (Sisačko-Moslavačka, Croatia)) [63][64] Majdanek 360,000 북위 51° 13′ 13″ 동경 22° 36′ 0″ / 북위 51.22028° 동경 22.60000° / 51.22028; 22.60000 (Majdanek (Poland)) [65][66] Maly Trostinets 65,000 북위 53° 51′ 4″ 동경 27° 42′ 17″ / 북위 53.85111° 동경 27.70472° / 53.85111; 27.70472 (Malyy Trostenets (Belarus)) [67][68] Sobibór 250,000 북위 51° 26′ 50″ 동경 23° 35′ 37″ / 북위 51.44722° 동경 23.59361° / 51.44722; 23.59361 (Sobibór (Poland)) [69][70] Treblinka 870,000 북위 52° 37′ 35″ 동경 22° 2′ 49″ / 북위 52.62639° 동경 22.04694° / 52.62639; 22.04694 (Treblinka (Poland)) [71][72]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의 유대인 학살계획(Operation/Aktion Reinhard)을 수행하게 되었다.[73][74] 이중 헤움노(Chełmno)[75]와 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충실한 노동 및 전쟁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학살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의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는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Dachau)나 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수용소의 화물적재램프로 기차가 유대인들을 실어온다. 하루에 한번, 많게는 다섯 번까지 불철주야 실어나른다. 사람들은 유럽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앞서 도착했던 ‘화물’들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이 수라장에 놓인 이들은 - 나는 곧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 열에 아홉은 가스실에 놓일 것이다. — Rudolf Vrba, 1942.8.18에서 1943.6.7까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송램프에서 근무 이러한 집단학살 수용소는 SS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 가스실[편집] 학살에 사용된 가스의 고형이 담겼던 빈 캔들과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전시된 주인잃은 머리카락들 가스실을 구비한 모든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모든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하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지고 여기서 모든 소유품들은 나치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압수되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과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쥐어주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공황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긴 여정으로 인해 갈증을 호소하는 인원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76] 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4년 9월 13일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Rudolf Höss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번에 ‘처분’할수 있었다고 한다.[77]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는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78] 가스실을 감독하던 SS군의관으로 근무했던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79]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78] 잔여가스를 모두 제거하고 시신들을 모두 치우는 등 가스실의 사후처리 작업에는 최대 4시간이 걸렸으며, 화장하기 전 여성의 모발은 잘라내고 치과의사 포로를 이용해 금니들을 적출했다.[80]비워진 가스실의 바닥을 청소하고 벽은 흰색으로 덧칠했다.[79] 이 모든 작업은 유대인 포로 작업반인 Sonderkommando에 의해 수행되었다. 화장터 1과 2의 Sonderkommando는 화장시설의 다락에서 살았고 3과 4는 가스실에서 살았다.[81] 이들에 의해 시신 처리작업이 끝나면 SS대원이 적출된 금니의 개수와 시신의 구강상흔 수를 맞춰보고, 만약 금이 누락된 것으로 간주된다면 해당 포로는 그 자리에서 소각로에 던져졌다.[82] 초기에 시신들은 가스실에서 꺼내져 그대로 깊은 구덩이에 묻혀 석회로 덮혔지만, 1942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의해 다시 꺼내어져 소각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지어진 것들이다.[83] 우리는 트레블링카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많은 개선안을 얻게 되었다. 우선 한번에 2000명을 처분하더라도 200명을 수용하는 10개의 가스실을 쓰던 과거에 비해, 800명과 1200명을 수용하는 2개의 가스실을 운용하게 된 점이다. 따라서 포로의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 검진하는 데에는 SS군의관 2명이면 충분했다. 포로들은 의사를 향해 줄줄이 걸어가고 의사는 그대로 걸어서 통과하는 포로들의 상태를 보고 노동력으로 활용할지 처형할지 즉석에서 판결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냈다. 수용소 아니면 가스실. 물론 유아들은 노동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예외 없이 가스실로 보냈다.트레블링카를 통해 우리가 이룩한 또 다른 개선은 포로의 안정이었다. 트레블링카에서 포로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포로들이 그러한 자각을 하지 못하도록 속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다. 물론 가끔씩 그들이 우리의 진의를 알아채고 자잘한 말썽을 부리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여성들은 치맛자락에 아이를 숨겼지만, 발견하는 즉시 남김없이 가스실로 보냈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린 언제나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해야 했지만, 당연하게도 반복적인 소각으로 퍼지는 악취와 구역질나는 시체 탄내는 근방 지역에 완전히 배어버렸고, 주민들까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챘다. — Rudolf Höss의 뉘른베르크 증언[84] 유태인의 반발[편집] - 저항의 정의와 평가[편집] 바르샤바 게토 봉기(1943.1)체포되어 방공호에서 강제로 연행되어나가는 유대인들 -Heinrich Himmler에게 보고된Jurgen Stroop의 Stroop Report에서 나치의 학살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의 반응은 거의 완벽한 무저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실제로 넘쳐나는 나치독일의 프로파간다 자료와는 달리, 유대 공동체의 자체적인 저항운동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당시 유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유대인들은 저항기구 수립이나 무장 활동에 대한 계획 자체가 없었고, 심리전에 대한 대비조차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었다. ...유대인과 관련한 독일군 측 사상자 자료를 분석해 보면, 유대인의 조직적인 무장저항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히려 독일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사회의 순종적인 참여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나마 각 지역 Resistance 등에 산재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활동을 벌이던 유대인들은, 동족들이 집단적인 무력감과 타성에 빠져 순순히 나치의 명령에 이끌리는 것을 경고하며 “도살자에 이끌려가는 양떼가 되지 마십시오” 라고 호소하고 다니곤 했다. ...두 집단학살 수용소를 관리했던 Franz Stangl은 전후 서독 감옥에 투옥되고 받은 인터뷰에서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과 그 처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나그네쥐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자신들이 어디를 가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집단적으로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이 쥐들에게서 트레블린카 수용소에 바글거리던 그들이 겹쳐 보였다.'[85]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Raul Hilberg Peter Longerich 역시 막대한 연구 끝에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지었다.[86] Hilberg는 이러한 순응적인 태도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유대인들은 수세기동안 단순히 압제자들에게 애원하기만 할뿐, 명령에 복종하며 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 피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이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박해를 받는 시기에는 항상 수많은 피해를 받았지만, 마치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와 같이 다시 재기하곤 했으며 사실상 이들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반복되어온 순종의 역사가 각인시킨 타성 속에 갇혀버린 셈이다.'[87] 하지만 Yehuda Bauer를 비롯한 동료 사학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물리적 항쟁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취한 모든 종류의 행동들까지 포함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유대인들은 모든 게토, 강제송환 열차, 강제 수용소와 심지어 가스실 앞에서까지 온갖 형태로 저항을 표시했다. 조악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자들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저항의 뜻을 밝히는 자들, 그리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짜내는 자들, 이 모든 행동들은 나치독일이 자신들의 죽음을 조소와 함께 감상하는 것만은 용인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이중에서 무위와 순종이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잔인무도한 폭력 앞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숭고한 저항이었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 속에 확정된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인간으로서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 애쓰고,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는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아 고문기술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저항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이들의 순응과 죽음은 전범재판에서 나치독일의 잔인무도함을 고발하는 가장 강렬한 증거가 되었다. 인간정신의 승리였다." -The Holocaust: The Jewish Tragedy, Martin Gilbert[89] 한편 Hilberg는 위에 인용된 Gilbert의 평가처럼 과잉되고 범위조차 명확치 않은 정의를 통해 유대인 저항을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흐름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평범하거나 순수했던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게 되어버린 케이스처럼 개인적이고 흔치않은 사례들을 당시의 보편적인 사례로 과장한다면 우리는 정작 나치독일이 취한 정책의 특성과 의도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흔치 않거나 소규모의 개별적인 사례들을 당시의 시대상인 양 포장하면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의 의의와 기본성격까지도 왜곡시켜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저항의 정의를 끝없이 확장하고 사례들은 과장하다보니, 오히려 실제로 실행되었던 저항다운 저항운동들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대로 간다면 영웅적 정신은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과 그 공동체들의 기본 소양으로 치부되어버리고, 정작 저항을 행동에 옮겼던 소수 유대인들의 진정한 용기는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사회의 이러한 ‘순응하는 대다수와 행동하는 극소수의 혼재와 불통’을 단순히 문제해결 과정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맹탕 공동체로 치부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이 구조는 사실상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생산적인 질문과 대안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는 곧 공동체 스스로 추론능력과 생존전략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를 외면한다면, 유대인의 역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90] -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편집] 연행되어온 유대인 레지스탕스, 바르샤바 게토, 1943 물론 무력저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독일군에 붙잡힌 유대계 소련군 전쟁포로, 1941.8월대전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91][92]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93]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94]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 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95]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 앞에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그들은 언제나 저보다 위험한 임무들을 도맡아 수행했습니다. — Pieter Meerburg, 레지스탕스 생존자[96] 그리고 14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이들은 각각 50만은 공산권의 붉은 군대에, 55만은 미군에, 10만은 폴란드군, 3만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97] 특이하게도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편집]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면서 어수선해진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들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됐고, 6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중 40명만이 종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를 포함한 600여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버(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1명의 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되고 나서는 중화기까지 동원한 수용소 측의 공격으로 3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되었다. 그나마 탈출한 인원의 대다수도 수용소를 둘러싼 지뢰밭을 통과하진 못하고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이들 중 60여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년 뒤, 1944년 8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수감자들이 인근 공장에서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3명의 간수가 살해되었고 이중 하나는 오븐 속에 구겨진 채 발견되었다. Sonderkommando들은 이어서 바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전원 사살되었다. 사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저항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었지만, 그들 역시 강제이주라는 명분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탈출과 협상, 공무 방해와 때때로는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나치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이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노리고, 오히려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구성원들의 복종을 강제하게 유도했다. 이 계획의 대표적인 타겟조직이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였다. 나치는 이들에게 유대인 권익보호와 시오니스트에 대한 지원책 등 거짓 공약을 제시해, 이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하고 희생자를 더욱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대인들은 2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박해받으며, 저항은 구원이 아닌 죽음을 몰고 온다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왔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 속에서 그들의 논리와 전승, 문화와 사회구조, 언어까지도 타협과 설득, 애원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거기에 저항과 대결의 자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Paul Johnson, 작가 및 사학자[98] 절정[편집]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어 SS소속 장성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RHSA(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감수 아래, 그는 최종 해결법(유대인 말살계획)을 착실히 전개해나가며 1943년부터 1년간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데 전념했다. 유대인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99] 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100] 1944.8.20-22, 헝가리 부다페스트.붙잡힌 유대인 여성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최종 해결법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히믈러가 얼마나 이 소명에 미쳐있었는지는 나치 고위당원들의 공식 집회에서 한 연설의 녹취록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저는 일생일대의 난제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와 이토록 가까이 마주앉은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거나, 혹은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분도 있을것 입니다. 그 문제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중략) 이제부터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부디 여러분 이외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중략)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이들에게 처자식이 있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결국 이 자리에 와서야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저는 이것들을 박멸하는데 있어서 후환이 남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후환이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것들을 멸종시키기 위해서 약간은 꺼림칙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 하인리히 힘러, 1943.10.4. 폴란드 포젠의 나치 고위당원 모임에서 1944,봄. 체코 동부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최종 해결법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슈페어는 재판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101]라고 선언했다. 1944년 봄,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해서야 학살의 규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 문제로 마찰이 빈번하던 헝가리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일찌감치 배신의 기미를 파악하여 3월 19일에 선제공격했다. 공격 하루 전,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헝가리의 섭정이자 제독인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었다. "헝가리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난민으로 인해 폭증한 유대인 인구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102] 마침내 점령이 완료된 헝가리에서 80만의 유대인들이 대량학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세 달에 걸쳐 40만명 전부 살해되었다. 수용소장 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이후 전범재판에서 이 사실을 자백했다. -Blood for Goods 협상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작전은 나치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샀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냥 학살하느니 차라리 이들에게 평화로운 정착지를 제공해주는 대신 연합국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라는 제안까지 나왔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관리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100만명과 트럭 1만대 분의 물품을 교환하는 거래를 발의했고, 이에 대해 이스탄불에서 하인리히 힘러와 영국, 유대인 단체의 대리인들이 모여 비공식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 규모의 거래가 제대로 성사 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죽음의 행군(1944-1945)[편집] 1944년 중순 쯤 되었을 때 “최종 해결법(Final Solution)"은 거의 실행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나치 정권에게 접근이 용이하였던 유태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말살 당하였는데, 프랑스는 약 25%가 제거된 반면 폴란드는 파괴된 공동체 비율이 약 90%에 달하였다. 나치 친위대장 하임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5월 5일 연설에서 ”독일과 독일 점령지 내의 유태인 문제는 전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103] 1944년에는 이 임무가 점차 어려워졌는데, 독일군이 러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전투에서도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 연합군은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의 공습과 게릴라 전투는 독일군의 철도 운영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기차의 일부를 죄수 운송에 쓰는 것에 할애하는 데에 대한 독일군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 소련군이 점점 진격해오자 폴란드 동쪽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생존해있던 수감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이후에는 실레지아(Silesia)에 있는 Gross Rosen으로-로 이송되었다. 마지막 13명의 죄수-모두 여성이었다-는 1944년 11월 25일 아우슈비츠 II에서 죽임을 당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전면적 죽음(unmittelbar getötet)"을 당하였다고 되어있어, 가스실에서 죽었는지 다른 방법으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104] 암울한 전쟁 형세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가스실은 해체되었고, 화장터는 폭파되었으며, 집단 매장지를 뒤엎고 시체들은 화장시켰다. 또한 폴란드 농부들에게 그 자리에 식물 씨앗을 키우도록 강제하여 그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역 지휘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태인들을 죽이고 또 강제된 “죽음의 행군(Death March)"을 통해 수용소 간 이동을 시켰다.[105] 수 년 간의 폭력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기차역까지 눈발을 뚫고 장거리를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고, 이후 며칠씩 음식 없이 화물열차 안에 갇혀서 운송되었고, 내린 후에 또다시 수용소로 행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즉시 총살되었다. 이 행군 중에 죽은 유태인은 약 2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06] 이러한 죽음의 행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행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9일 전이었는데, 수용소 경비대는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56km 떨어진 Wodzislaw(독일어: Loslau)까지 걸어가게 시켰다.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화물열차를 통해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는데, 여기까지의 행군 도중 약 15,000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해방[편집] 첫 번째 주요 수용소였던 Majdanek 수용소는 진격하는 소련군에 의해 1944년 7월 23일에 발견되었다. Chelmno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0일에 해방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또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7일에 해방되었다.[107] Buchenwald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11일,[108] Bergen-Belsen 수용소는 영국군에 의해 4월 15일,[109] Dachau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29일,[110] Ravensbrück 수용소는 같은 날 소련군에 의해, Mauthausen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5월 5일,[111] Theresienstadt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5월 8일에 해방되었다.[112] Treblinka, Sobibor, Belzec 수용소는 해방되지 못하고 1943년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7군 William W. Quinn 대령은 Dachau 수용소에 대해 “우리 부대는 그 곳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 소리, 악취를 목격하였다. 도저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잔인함이었다”라고 회고한다.[113][114] 소련군에 의해 발견된 수용소들의 대부분은 이미 죄수들을 이송하여 몇 천명만이 살아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되었던 180명의 아이들을 비롯해 7,6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발견되었다.[115] Bergen-Belsen 수용소에서는 60,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영국군 11사단에 의해 발견 되었는데,[116] 13,000여 구의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10,000여 명은 몇 주 후 티푸스나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117] 영국군은 남아있던 수용소 경비대를 시켜 시체를 모아서 집단 묘지를 만들게 하였다.[118] 피해자와 사망 통계[편집] 피해자 사망자수 출처 유태인 590만명 [119] 소련군 전쟁포로 2–3백만명 [120] 폴란드인 1.8–2백만명 [121] 집시 220,000–1,500,000명 [122][123] 장애인 200,000–250,000명 [124] 프리메이슨 80,000–200,000명 [125][126] 슬로베니아인 20,000–25,000명 [127] 동성애자 5,000–15,000명 [128] 여호와의 증인들 2,500–5,000명 [129] 스페인 공화주의자들 7000명 [130]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통계치는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500만 명 유럽 유태인에 대한 큰 규모의 학살을 의미하며,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정확한 정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131] 마틴 길버트의 측정치에 따르면 총 피해자 인원수은 600만 명 이하이며, 당시 유럽 유태인의 78%를 차지하다고 말했다. 티모시 스나이더는 홀로코스트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나눠 보았다. 하나는 독일군이 전쟁했을 때 모든 학살행위이며 하나는 나치가 유태인에 행한 모든 압박행위이다 포괄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인원수는 소련 전쟁포로 200만~300만명, 폴란드인 200만명, 장애인 27만명, 집시 22만명, 프리메이슨 회원 22만명, 슬로베니아인 2만5천명, 동성애자 1만5천명, 여호와의 증인 신도 5천명, 스페인 공화주의자 5천명을 포함하여 총 1100만명이다. 더 넓은 통계범위로 600만 명의 소련 민간인을 포함하게 될 경우 총 사망인원수는 17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유태인학살기념관에서 전시된 수치에 따르면 1500~2000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루돌프 럼멜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된 사람 수를 2100만 명이라고 측정하였으며, 다른 학자의 측정치에 따르면 소련 민간인의 사망 수를 합쳐 26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한다.[132] 유태인[편집] 연속 기획:반유대주의유대인의 역사의 일부 역사 연표 참고자료 발현 학술계 아랍 보이콧 기독교 경제적 가자 전쟁 이슬람 홀로코스트 부정론 이슬람 국가 신반유대주의 급진반유대주의 종교적 반유대주의 이차 반유대주의 세계의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적 유언비어 피의 중상 유대살신설 드레퓌스 사건 성체모독 유대 볼셰비즘 유대인 로비 프리메이슨 음모론 유대세 배후중상설 우물에 독 타기 시온주의 괴뢰 음모론 관련 텍스트 유대인과 그 거짓말에 대하여 유대의 프랑스 시온 장로 의정서 국제유대인 나의 투쟁 제2의 서 흑인과 유대인 사이의 은밀한 관계 터너 일기장 사냥꾼 인터넷의 반유대주의 쥬 워치 스톰프런트 유대인 박해 유대인 추방 유럽 게토 포그롬 필레우스 코르누투스 유대 암퇘지 황색 육망성 스페인 종교재판 종교적 분리 유대인 할당제 홀로코스트 나치즘 반유대주의 반대 UN 워치 명예훼손방지동맹(ADL) 공동체안보신탁(CST) 유럽기본권기관(FRA) 친유대주의 스티븐 로스 연구소 비에너 도서관 남부빈곤법률센터(SPLC) 시몬 비젠탈 센터(SWC) 구소련 유대인 평의조합(UCSJ) 스웨덴 반유대주의 반대위원회(SCAA) 야드바솀 시온주의 분류vdeh 1945년에서 지금까지 흔히 나온 학살을 당한 유태인사망인원수에 대한 측정치는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대학살기념관에 이런 말이 전시되어 있다.[133] 살해를 당한 유태인은 정확하게 통계할 수 없고 문서에서 300만 명의 유태인의 이름을 찾았고 , 유객센터에서 전시되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중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600만 명의 숫자는 당위군 장관을 맡은 Adolf Eichmann가 말한 것이다. 당위군 장관 Wilhelm Höttl의 증사에 따르면 1944년 8월에 Adolf Eichmann가 그한테 6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을 당하고 ,4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나머지 200만 명이 총사나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1953년에 Gerald Reitlinger가 쓴 《최종해결방안》이 피해자인원수에 대해 측정했다. 인원수는 4,200,000-4,500,000 명의 사이이었다. 이외에도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하고 Jacob Lestschinsky측정한 5,950,000인 측정치가 있다. Yisrael Gutman와Robert Rozett가 쓴《유태인대학살백과전서》중에 측정한 사망 인원수는 5,590,000~ 5,860,000명의 사이였다. 베를린 공업대학의 교수 Wolfgang· lBenz 연구한 결과는 피해자인원수가 5,290,000-6,200,000명 사이인 것이다. 이스라엘유태인대학살기념관이 전시된 수치의 근거는 전쟁 전후의 인구통계대조하고 강제송환과 학살의 문서에서 온 것이다.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명의 피해자가 보수적인 측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Raul Hilberg가 찾을 수 있는 사망기록만 참조하면서 측정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유럽유태인의 멸망》제3판에서 800,000명이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임을 당하고, 1,400,000명이 총사로 사망하고 2,900,000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쓰인다. 그는 폴란드 유태인의 사망인수 300만 명에 달한다고 측정했다. Martin Gilbert가 최소 5750000 명의 유태인을 살해당한다고 측정하고, 그 중에 Oświęcim에서 독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죽은 200만 명도 포함이 된다. Lucy Dawidowicz 전쟁 이전의 통계수치를 통해 5,934,000명의 유태인이 사망되었다고 지적했다. 각 강제수용소의 사망인원수가 3800000명을 넘고 그중에 80~90% 모두 유태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유태인이 나치 대학살로 인한 총 유태인피해자인원수의 반에 달했다. 폴란드의 유태인 거의 이런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도 최소 50만 명의 유태인 기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그중에 독일의 몇 개의 주요한 수용소 포함된다. 많은 유태인을 징역하고, 특히 전쟁의 마지막 1년 동안 나치가 폴란드에서 철수한 후, 약 100만 명의 사람이 이런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중에 최소 50%가 유태인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알 수가 없다. 이외에도 80~100만 명의 유태인이 독일이 점령한 구역에서 살해를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영양불량으로 송환되기 전에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었다.[134] 이하 수치는 Lucy Dawidowicz에 의해 제공된 전쟁 전 유럽 국가 내 유태인 인구의 학살을 잘 드러낸 수치다:[119] 국가 전쟁전유태인 인구(추정) 사망인구(추정) 사망비율 폴란드 3,300,000 3,000,000 90 발트해 국가들 253,000 228,000 90 독일과 오스트리아 240,000 210,000 90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90,000 80,000 89 슬로바키아 90,000 75,000 83 그리스 70,000 54,000 77 네덜란드 140,000 105,000 75 헝가리 650,000 450,000 70 벨로루시안 연합 375,000 245,000 65 우크라이나 연합 1,500,000 900,000 60 벨기에 65,000 40,000 60 유고슬라비아 43,000 26,000 60 루마니아 600,000 300,000 50 노르웨이 2,173 890 41 프랑스 350,000 90,000 26 불가리아 64,000 14,000 22 이탈리아 40,000 8,000 20 룩셈부르크 5,000 1,000 20 러시아 연방 975,000 107,000 11 덴마크 8,000 52 <1 합계 8,861,800 5,933,900 67 국가별[편집] 독일 간접 또는 직접 통제된 구역에서 약 800~1000만 명의 유태인이 있었다. 유태인대학살로 피해된 600만 명이 전부의 60%~75%를 차지했다. 폴란드에서 3300000명의 유태인 중에 90% 살해를 당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피해비율이 무려 90%에 달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의 유태인이 다행히 모두 안전하게 철수했다. 1933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는 750,000명 중에 1/4의 생존자만 있었다. 1939년 이전 많은 독일유태인 안전하게 독일을 떠나고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로 도망갔지만, 나중에 여전히 강제송환을 당하여 학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의 유태인 중에 70%가 피해를 받았다. 루마니아, 벨기에, 헝가리의 피해자 비율은 50%-70%에 달했다. 벨로루시하고 우크라이나에서 피해된 유태인 비율이 비슷하지만 정확한 사망자 인원수를 알 수 없다. 유태인피해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는 불가리아,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이었다. 알바니아는 1945년의 유태인인수가 1939년의 인수보다 많아지는 유일한 독일 점령국가다. 약 200명의 토종 유태인과 1000명 이상의 난민이 가짜 신분증을 통해 떠나거나 60%의 이슬람교도 중에서 숨어 있었다. 1990년대 동유럽정부문서가 개방된 이후 Hilberg, Dawidowicz, Gilbert가 사망인원수에 대한 통계수치를 다시 수정했다. Wolfgang Benz가 몇 년 간의 계속 피해자 수를 업데이트를 해 왔고 그는 1999년 이런 말을 했다. “1942년 1월 만호회의에서 제출한 모든 유럽 유태인을 인종청소를 한다는 임무는 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600만 명의 피해자를 죽인 대학살은 이미 인류 역사 상의 가장 큰 폭력이었다. 피해자 인원수는 일일이 알려 주지 못하고 아주 보수적인 측정수치는 이하와 같다. 숫자는 대개 측정한 수치고 이런 잔인한 폭력이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 대학살 피해자 중에 독일에서 165,000명, 오스트리아에서 65,000명, 프랑스하고 벨기에에서 32,000명, 네덜란드에서 10만 명을 넘고, 그리스에서 60,000명, 유고슬라비아에서 사망인원수는 그리스와 같고, 140,000명이 넘는 피해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왔고, 50만 명이 헝가리에서 왔고, 220만 명이 소련에서 왔고, 270만 명이 폴란드에서 왔다. 이외에도 루마니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종족의 피해자인원수(200,000 이상), 그리고 알바니아, 노르웨이,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불가리아에서 피해자 인원수를 더해야 한다." [135] -Wolfgang Benz,《대학살:독일 역사학자 연구하는 대학살》 이디시어(Yiddish)에 대한 영향[편집] 대학살은 이디시어에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 대전이전, 약 1100~1300만 명의 사람들이 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136]대학살은 유태인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종교, 일상생활을 파괴하여 이디시어의 상용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피해자 중에 약 500만 명이(85%)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 이디시어를 쓰지 않은 사람들인 그리스하고 발칸지역에서 쓰는 언어도 파괴되었다. 이러한 ‘유태-스페인어’가 거의 사라졌다. 비유태인[편집] 슬라브인[편집] 1942년 여름에,Heinrich Luitpold Himmler의 《동부전체계획》이(Generalplan Ost)히틀러의 허락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슬라브인을 그들의 고토에서 소멸하거나 유방시키거나 노예로 시킨다는 것이다. 목적은 그 땅에서 독일인이 살도록 할 것이다. 원래 계획은 20–30년의 장기에 걸쳐 추진한 것이다. 작가이며 역사학자인 Doris·L·Bergen 이런 말을 쓰었다. “다른 나치문헌과 마찬가지로 《동부전체계획》이 사용한 어휘가 완곡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근본적인 의도는 분명하다'. 이 계획은 나치독일이 다민족정치관계에 대한 기본방침을 명확히 제기했다. 슬라브인에 대한 학살,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모두 같은 계획의 구성부분이다[137]. 다른 역사학자Williams·W·Hagen 이런 말을 하였다. “《동부전체계획》는 동유럽 인구에 대해 소멸할 인원수까지 예측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폴란드인– 85%;벨라루스인 – 75%;우크라이나인 – 65%;체코인 – 50%, 이러한 거대한 감원하는 규모는 노예로 시키거나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출산통제 등 조치로 달성하겠다는 내용이 있다[138]. Heinrich Luitpold Himmler“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잔인한 인종주의와 편견이고, 2000~3000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태인은 군사적인 조치나 식량부족위기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139]. 폴란드인[편집] 폴란드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고난의 역사였다. 특히 독일은 폴란드의 이웃으로서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넘보았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럽에서 폴란드의 지도를 없애고 독일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140] 그렇게 하여 독일인들을 폴란드 땅에 재정착 시킨다는 생각이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폴란드의 유태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90%이상이 죽임을 당하여 사라졌지만 폴란드의 기독교인들은 잔인한 독일 점령 하에서도 94%가 살아남았다[141]. 1939년 11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인종청소 정책을 수립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폴란드인을 완전히 말살한다는 정책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란드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서부지역의 정부(일반정부라고 부름)는 폴란드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계획에 의하면, 1952년까지 폴란드 서부지역에는 3-4백만 명의 폴란드인만을 남겨놓아 독일인들의 노예로 삼아 부려 먹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들 폴란드인들은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결혼을 금지하며 독일로부터 의료지원을 중지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폴란드인들이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1주일 앞두고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동부지역(폴란드를 말함)에서 폴란드 민족의 후손이거나 폴란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자, 여자, 아이들을 구분하지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군대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래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기간 중에 도합 1백80만에서 2백10만명에 이르는 비유태계 폴란드인이 독일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중 5분의 4가 폴란드 민족이었으며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의 소수민족이었다. 거의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이들 중 최소 20만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그중 14만 6천명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여러 경로로 집단 학살되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봉기 때에 12만에서 20만의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인을 자연소멸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하였다. 예를 들면 철저한 식량배급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주려 죽게 만들었으며 위생시설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전염병 등에 걸려 죽게 만들었고 의료서비스를 중단함으로써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결과,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천 명당 13-18명이었다[142]. 2차 대전의 희생자중 5백 60만 명이 폴란드인이었다. 이에는 물론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도 포함되지만 비유태인도 포함되어 있다. 폴란드는 2차 대전으로 인하여 16%의 인구를 잃었다. 전체 유태인 3백30만 명중 3백 10만 명이 희생되었고 비유태인의 민간인은 3천1백70만 명중 2백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143]. 이들 희생자 중 90%는 전쟁과는 관련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나치 독일도 폴란드인의 청소에 앞장섰지만 후방의 소련도 폴란드인의 제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서부 슬라브인[편집] 리디체 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서부 슬라브인도 마찬가지로 살해를 당했다. 측정한 수치에 따르면 약 345,000명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인들을 살해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144] 나치 독일은 남김없이 리디체를 포함한 마을들을 파괴하고 16세가 넘은 남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치 수용소로 보내고, 여성과 아이들도 리디체를 떠났다. 소르브인도 무참히 학살했다.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브인[편집]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세르비아인 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나치는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발칸에서 58만 1천명의 유고슬라브인을 학살했다.[145][146][147] 이에는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동맹으로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자인 우스타세(Ustase)가 합세하였다. 히틀러는 발칸에서 유고슬라브인을 모두 학살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인간 이하(Untermensch)’라고 표명함으로써 간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나치의 동조자인 유스타세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역 괴뢰정권으로서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주로 야세노바크(Jasenovac)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우스타세 당국은 1941년부터 45년 사이에 크로아티아에 여러 곳의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무슬림(보스니아인), 그리고 가톨릭교도가 아닌 소수민족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물론 크로아티아의 정치범들과 반종교인들도 희생되었다. 니아드 할릴베고비치(Nihad Halilbegovic)가 주도한 최근 연구인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의 보스니아인’(Bosniaks in 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 의하면 약 10만 3천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슬라브인들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나치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운동인 우스타샤에 의해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집시라는 명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동부 슬라브인[편집] 벨라루스 지역이 가장 큰 희생자였다. 나치는 벨라루스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온갖 만행을 자행토록 부추겼다. 결국 9천개의 마을에 불에 탔으며 38만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이송되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Khatyn)과 같은 마을은 마을을 불태울 때에 주민들도 모두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런 마을이 벨라루스에 600개나 있었다. 동구에서 벨라루스로 이전한 슬라브인들이 만든 정착촌은 5,295개소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 정착촌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도합 1백 67만명의 민간인이 3년 동안의 독일 점령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24만 5천명은 유태인으로써 벨라루스 시민들로 구성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에 의해 살해되었다.[148] 소련 전쟁 포로[편집]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초기에 승승장구하여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았다. 독일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은 대략 2-3백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전체 포로들의 57%가 1941-45년간에 굶주림과 학대로, 또는 처형당하여 죽었다.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은 소련군 전쟁포로 중 2백 80만 명이 1941-42년간의 8개월 동안에 죽었으며 1944년 중반까지는 3백3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149]. 이들은 모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생명을 잃었다. 1943년에는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의 사망률이 감소하였다. 이는 상당수 소련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잡힌 소련군 전쟁포로는 도합 23만 1천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8천3백 명만이 죽었다.[150] 집시[편집] 로마니(Romani)와 신티(Sinti)라고도 불리는 집시들은 전통적으로 기록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나치는 집시들이 위생상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성적으로도 문란하다고 생각하여 혐오하였다. 집시들은 아우슈비츠에 끌려 와서도 불결하고 불건전한 생활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순수 아리안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청소키로 결정했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집시의 수는 약 1백만에 달했다. 그중 13만 명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희생되었다. 하지만 미국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의 역사학자였던 시빌 밀튼(Sybil Milton)은 희생당한 집시의 수가 22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유럽에 70만 명의 집시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수는 22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51].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집시에 대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오스틴의 텍사스대학교 집시문제연구소장인 이안 핸코크(Ian Hancock)는 '모르면 몰라도 집시희생자의 수가 유태인희생자의 수와 맞먹을 것'이라고 보았다. 집시들은 집단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오거나 요행으로 게토로 집어넣어 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인자츠그루펜(현지인 나치 동조자)들이 집시들의 야영지를 급습하여 현장에서 모조리 학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나치 점령지의 괴뢰정부들도 집시말살에 한몫을 거들었다. 예를 들면 크로아티아의 괴뢰정부인 우스타세는 집시들을 대거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로 끌고 와서 집단 학살하였다. 1942년부터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동등한 법적 처우를 받았으며 동등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SS 책임자로서 나치 인종청소의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집시 잡종(Mischlinge), 로마니(Romani: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집시), 독일 혈통이 아닌 발칸 출신의 종족들은 이들이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지 않는한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에는 독일에 있는 모든 로마니를 색출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일부 학자들은 집시(로마니)들이 원래는 아리안족이었으나 비(非)아리안족들과의 교합으로 불순한 혈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유색인종[편집] 나치시대에 독일 안에 사는 흑인 약 5000~25000명[152]이 있다. 이 수치는 아시아 사람을 포함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국대학살기념관의 기술에 따르면 1945년 그 쪽의 흑인들이 격리, 살해, 생체실험, 징역, 폭력을 모두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태인을 멸종시키는 것처럼 체계적인 학살을 안 했다. 이외에는 아프리카너, 베르베르인 ,이란인 , 인도인을 아리아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압박을 당하지 않았다. 돌궐족, 아라비아인, 남아메리카인에 대한 종족의식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153] 그래도 일부는 독일군을 위해 일을 시켰다. 신체장애인/정신장애인[편집] "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식물을 주거나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거나 옷이 없는 사람에게 옷을 제공하는 것에 신경을 안 쓴다. 우리의 목적은 색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꼭 건강한 인간으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 요제프 괴벨스, 1938년.[154] T-4 작전은 1939년부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독일의 유전자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강제로 불임하게 하거나 살해했다. 1939년 ~ 1941년 동안, 나치가 정신병원에서 총 80,000 ~ 100,000명의 정신장애인들을 죽였다. 그 중에 아동은 5,000명이고 유태인은 1,000명이다.[155] 또 다른 측정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200,000명의 정신병자가 사망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숫자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시를 받지 않았다. 많은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들이 실험도구로 사망했다. 독일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1941년 8월 24일 이 프로그램을 중지시켰다, 동성애자[편집]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나치에게 희생당한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호모모뉴먼트(Homomonument) 나치 독일에서는 실질적 범죄 행위보다 범행의 동기나 개개인의 자질 등을 문제시 삼았으며, "gesundes Volksempfinden"(건강한 국민 정서)이 나치 독일의 새로운 규범적 원칙이 되었다.[156] 1936년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을 설립하였다.[157] 곧 동성애는 '건강한 국민 정서'에 반하며,[128] 독일혈통을 더럽히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게슈타포는 게이바를 습격하였으며, 체포한 동성애자의 개인 연락처와 성소수자 신문 및 잡지 등을 이용하여 다른 동성애자들을 추적하였다. 또한 이웃에 동성애자나 동성애자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할 것을 대중에 종용하였다.[128][156] 1933년에서 1944년 사이에 10만여명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었고, 이 중 약 5만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갱생'을 이유로 5천명에서 1만5천여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28] 수용소에서 이들은 초기에 노란색 완장으로 구분되었으나,[158] 성폭행 및 강간의 대상이 되어 나중에는 상의뿐만 아니라 바지에도 착용해야하는 분홍색의 역삼각형 낙인으로 변경되었다.[156] 또한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수백명의 동성애자가 강제로 거세를 당하였다.[159]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들은 성적 모욕과 고문, 생체 실험을 당하며 처형되었다.[128] 홀로코스트에서의 동성애자 피해 연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199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형법상 동성애가 여전히 범죄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156] 좌익분자[편집] 독일공산당원, 사회주의자 또한 공희주의자는 나치들이 독일국 내에서 최초의 적이었으며[160], 최초로 수용소로 옮긴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는 유태인의 학설(学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틀러는 그들이 "유태인의 볼셰비키"라고 언급했다. 1933년, 나치즘들이 반공산주의를 명분으로 전권위임법을 선포했다. 이 법안을 통해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나치들이 독일 공산당을 압박함으로써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독일 엘리트 계급 사람들이 나치즘하고 손을 잡았다. 독일 좌파의 많은 리더들이 유태인 출신이다. 유태인 출신 리더들이 1919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단 혁명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맑시스트하고 볼셰비키들이 “국제적 유태인”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이 ”종족의 순결성”과 북유럽사람의 생활을 파괴했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사회계급간에 모순되어 반정부세력들이 수용소에서 독일공산당이 유태인보다 많은 특권을 누렸다. 바로 공산당들이 유태인 종족보다 더 순결하기 때문이다. 나치즘이 점령한 지역에서 항상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구류를 받거나 처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위원은 독일이 점령한 모든 곳에서 처형한 적이 있다. 특별행동부대가 동부전선에서 이 명령을 실시하였다.[161] 프리메이슨[편집]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이 유대인들에게 복종해 왔고, 상류층들을 자신들의 아젠다로 유혹하는 "뛰어난 도구"[162]였다고 말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독일은 프리메이슨이 아주 큰 위협이라고 여긴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을 불법화했고, 많은 로지lodges들을 폐쇄했다. 많은 형제들Brethren이 체포되었고, 집중 캠프로 보내졌다. 로지에서 훔친 물건들은 그 동업자들을 향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일으킬 목적으로, 독일 전역에서 메이슨 반대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리메이슨들도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도 침략하고 점령한 나라(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그리스 등)에서 나치가 훔쳤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8 만 명의 메이슨들이 유럽 전역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미국대학살기념관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많은 잡힌 프리메이슨 맨버들이 유태인 신분이나 반대파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프리메이슨 신분을 갖고 있는 원인으로 나치수용소에 보내는 사람 수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163]. 여호와의 증인[편집] 약 12,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나치한테 선서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거절해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중 약 2500 ~ 5000명이 살해되었다.[164] 각주[편집] ↑ Eric Lichtblau (2013년 3월 1일). “The Holocaust Just Got More Shocking”. 《The New York Times》. 2013년 3월 2일에 확인함. ↑ Dawidowicz 1975, 403쪽. ↑ Fitzgerald 2011, 4쪽; Hedgepeth & Saidel 2010, 16쪽. ↑ 가 나 Berenbaum 2005, 103쪽. ↑ Berenbaum 2005, 104쪽. ↑ 가 나 Friedländer 2007, xxi쪽. ↑ Bauer 2002, 48쪽. ↑ Maier 1988, 53쪽. ↑ "Holocaust Map of Concentration and Death Camps", History1900s, About.com. 16 June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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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Questions about the Holocaust by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vdeh나치즘단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돌격대(SA) 친위대(SS)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 히틀러 청소년단(HJ) 독일소년단(DJ) 독일소녀동맹(BDM) 국가사회주의 독일학생동맹(NSDStB) 국가사회주의 체육국가동맹(NSRL)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NSF) 혁명적 국가사회주의자 투쟁동맹(KGRNS) 역사 초기 역사 히틀러의 성공시대 마흐터그라이풍 독일의 재무장 나치 독일 장검의 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방공 협정 수정의 밤 제2차 세계 대전 삼국 동맹 조약 홀로코스트 뉘른베르크 재판 탈나치화 신나치주의 이념 파시즘 지도자 원리 군국주의 나치 건축물 강제적 동일화 반민주주의 슈트라서주의 히틀러의 정치관 《나의 투쟁》 《19세기의 기초》 《20세기의 신화》 25개조 강령 신질서 《프로이센과 사회주의》 선전술 종교적 측면 혼합 정치 상징주의 여성정책 나치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 피와 명예 우생학 대게르만국 제국으로의 귀환 레벤스라움 우등인종 나치 독일의 인종정책 민족평등 종교 최종 해결책 강제 수용소 퇴거 강제 의사 재판 절멸 수용소 집단살해 게토 인체실험 노역수용소 대박해 인종 분리 독일 외 미국 나치당 화살십자당 (헝가리) 불가리아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국가사회주의운동 (불가리아) 독일계 미국인 연합 리히텐슈타인 독일민족운동 그레이셔츠 (남아프리카)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루마니아 철위대 민족주의당 (노르웨이) 국가사회주의당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당 스위스 민족주의 운동 국가사회주의 블록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연맹 (영국) 국가사회주의운동 (미국) 그리스 국가사회주의당 국가사회주의 덴마크 노동자당 국가단결당 (캐나다) 오제바브란트바흐 (남아프리카 연방) 목록 히틀러의 저서 이데올로기 총수와 임원 나치 당원 과거 나치 당원 히틀러의 연설 SS 장교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마르틴 보어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아돌프 아이히만 알베르트 슈페어 루돌프 헤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빌헬름 프리크 루돌프 회스 한스 프랑크 요제프 멩겔레 리하르트 발터 다레 발두어 폰 시라흐 에른스트 룀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에른스트 한프슈텡글 헤르만 에세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조지 링컨 록웰 관련 주제 나치즘 밀교 극우 나치 독일의 용어 나치 경례 신나치주의 스톰프런트 볼키스체 운동 스와스티카 사회 진화주의 사회주의 제국당 독일 국가민주당 분류 vdeh제2차 세계 대전유럽 (서부 전선 · 동부 전선) · 지중해·중동 (중동 · 동아프리카) · 아시아·태평양 (동남아시아 · 서남아시아) · 서아프리카 · 대서양 · 북아메리카 · 남아메리카개요 · 사상자 · 군사 장비 · 회담 및 회의 · 지휘관 · 통계참전국연합국(지도자)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중국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에티오피아 핀란드 (1944~45) 프랑스 자유 프랑스 (1940년 6월 이후) 그리스 영국령 인도 제국 이탈리아 (1943년 9월 이후) 전역 룩셈부르크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 소련 영국 미국 푸에르토리코인 유고슬라비아 추축국(지도자) 불가리아 왕징웨이 정권 크로아티아 독립국 핀란드 나치 독일 헝가리 자유 인도 이라크 이탈리아 (1943년 9월까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일본 만주국 필리핀 제2공화국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태국 비시 프랑스 (무장 중립) 레지스탕스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체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독일 그리스 홍콩 인도 이탈리아 일본 유대인 한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반공 레지스탕스) 루마니아 태국 소련 슬로바키아 서부 우크라이나 베트남 유고슬라비아 연표전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1939년 폴란드 침공 가짜 전쟁 겨울 전쟁 아드리아 해 전투 대서양 전투 1차 창사 전투 중국 동계 공세 1940년 노르웨이 전역 베저위붕 작전 룩셈부르크 침공 네덜란드 전투 벨기에 전투 프랑스 공방전 2차 콩피에뉴 휴전 영국 본토 항공전 서부 사막 전역 서아프리카 전역 영국령 소말릴란드 소련의 발트3국 점령 소련의 몰도바 점령 인도차이나 침공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컴퍼스 작전 1941년 동아프리카 전역 유고슬라비아 전선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공방전 크레타 전투 영국-이라크 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계속 전쟁 리투아니아 6월 봉기 시리아-레바논 전역 키예프 전투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 레닌그라드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세바스토폴 포위전 진주만 공격 홍콩 전투 필리핀 전역 2차 창사 전투 말레이 전역 보르디노 전투 1942년 버마 전역 3차 창사 전투 마다가스카르 전투 자바해 해전 산호해 해전 가잘라 전투 미드웨이 해전 청색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디에프 기습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과달카날 전역 횃불 작전 1943년 튀니지 전역 쿠르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솔로몬 제도 전역 시칠리아 침공 드네프르 전투 2차 키예프 전투 이탈리아 침공 카시빌 휴전 길버트·마셜 제도 전역 창더 전투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 / 싱글 작전 나르바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템페스트 작전 대륙타통작전 오버로드 작전 해왕성 작전 노르망디 상륙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 바그라티온 작전 리비우-산도메시우 공세 타넨베르크 선 전투 바르샤바 봉기 이야시-키시네프 공세 베오그라드 공세 파리 해방 용기병 작전 고딕 선 마켓 가든 작전 탈린 공세 석궁 작전 혼성폭격기 공세 라플란드 전쟁 부다페스트 공세 레이테 만 전투 벌지 전투 보텐플라테 작전 필리핀 전역 버마 전역 1945년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이오 섬 전투 독일 본토 침공 오키나와 전투 1945년 봄 이탈리아 공세 시르미아 전선 베를린 공방전 프라하 공세 부다페스트 공방전 서후난성 전투 빈 공세 독일의 항복 유럽 전승 기념일 승리의 날 훌라 계획 만주 전략공세작전 마닐라 전투 보르네오 전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쿠릴 열도 상륙 작전 슘슈 섬 전투 다운폴 작전 일본의 항복 대일 전승 기념일 양상일반 항공전 전격전 장군 계급 비교 암호 외교 역사 국내 전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무기 대여법 맨해튼 계획 훈장 군사 장비 군수 산업 나치의 약탈 기술 연합국의 협력 총력전 전략폭격 1943년 벵골 기근 1942년~1943년 중국 기근 종속국 여성 예술 여파 독일인 추방 페이퍼클립 작전 오소아비아힘 작전 킬하울 작전 독일의 연합군 군정기 독일의 영토 변화 소련의 점령 지역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소련의 발트 점령 연합군의 일본 점령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냉전 탈식민지화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대중 문화 전쟁 범죄 연합국의 전쟁 범죄 소련의 전쟁 범죄 영국의 전쟁 범죄 미국의 전쟁 범죄 독일의 전쟁 범죄 (강제 노동) /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홀로코스트 여파 국제적 반응 뉘른베르크 재판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 일본의 전쟁 범죄 731 부대 극동 국제 군사 재판 크로아티아의 전쟁 범죄 세르비아인 유대인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전쟁 성범죄 독일군 위안부 수용소 위안부 일본 점령 기간의 강간 위안부 난징 대학살 기간의 강간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프랑스 해방 기간의 강간 폴란드 해방 기간의 강간 포로 소련의 핀란드인 포로 소련의 독일인 포로 미국의 독일인 포로 소련의 이탈리아인 포로 소련의 일본인 포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일본인 포로 독일의 소련인 포로 학대 소련의 폴란드인 포로 소련의 루마니아인 포로 분류 · 위키프로젝트 위키낱말사전 · 위키책 · 위키인용집 · 위키문헌 · 위키공용 · 위키뉴스 vdeh 파시즘 이론핵심 교리 국민주의 제국주의 권위주의 반민주주의 전체주의 일당제 독재 사회진화론 사회개입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족 선전 우생학 영웅주의 군국주의 경제개입주의 반공주의 주제 정의 경제 이념 전세계의 파시즘 상징주의 개념 능동관념론 계급협조론 협동조합주의 영웅자본주의 국가사회주의 국민생디칼리슴 국민자본주의 초자본주의 제3의 위치 전체주의 사회질서 변종 이탈리아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팔랑헤주의 영국 파시즘 오스트로파시즘 메탁사스주의 국민급진주의 일민주의 렉스주의 교권적 파시즘 군단주의 천황제 파시즘 정당, 조직, 운동아프리카 회의사 오제바브란트바흐 아시아 남의사 백의사 동방회 사쿠라회 가나프당 브리트 하비리오님 북서유럽 알티리 너 하셰리 흑색전선 육군전우협회 브르타뉴 사회국민노동자운동 영국 파시스트 영국 인민당 영국 파시스트 연합 르 카골레 교권인민당 르 페소 플랑드르 국민연합 드블라그 프랑스 대중당 네덜란드 파시스트 총동맹 제국 파시스트 동맹 라푸아 운동 국민연합 국민협조당 녹의사 국민 파시스트 국민당 국민사회주의 블록 국민사회주의 네덜란드 노동자당 국민사회주의 동맹 네덜란드 국민사회주의 운동 노르웨이 국민사회주의 운동 국민사회주의 노동자당 신당 애국인민운동 천둥십자당 렉스당 중앙유럽 화살십자당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당 조국전선 헝가리 국민사회주의자당 국민전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주데텐 독일인당 남유럽 알바니아 파시스트당 민주 파시스트당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팔랑헤 그리스 국민사회주의당 이탈리아 파시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메탁사스주의 국가 파시스트당 국민연합 공화 파시스트당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동유럽 불가리아 국민사회주의 노동자당 루마니아 십자군당 철위대 국민급진기지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파시스트 국민운동 이탈리아-루마니아 국민문화경제운동 국민사회운동 국민급진기지 팔랑가 루마니아 국민 파스키오 국민부흥전선 불가리아 국민성 진보를 위한 전사단 루마니아 전선 러시아 파시스트당 러시아 여성 파시스트운동 슬로바키아 인민당 불가리아 국민군단연합 블라이카 북미 캐나다의 파시즘 캐나다 파시스트 연합 국민연합당 금의사 독일계 미국인 동맹 은의사 남미 라틴아메리카의 팔랑헤주의 브라질 통일주의 볼리비아 사회주의 팔랑헤당 칠레 국민사회주의운동 혁명연합 관련자 압바 아히메이르 니미오 데 안퀸 아라키 사다오 마르 오기어 모리스 바르데체 자크 베노이스트메칭 앙리 베로 졸탄 보소르메니 주세페 보타이 로베르 브라지야크 알퐁스 드 샤토브랴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구스타브스 켈민슈 엔리코 코라디니 카를로 코스타마그나 리하르트 발터 다레 마르셀 데아 레옹 드그렐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 고트프리트 페더 지오반니 젠틸레 요제프 괴벨스 한스 프리드리히 카를 귄터 하인리히 힘러 고노에 후미마로 아돌프 히틀러 기타 잇키 이사키 비흐토리 코솔라 아고스티노 란실로 디미트리예 료티치 레오폴도 루고네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로베르트 미헬스 오즈왈드 어날드 모즐리 준남작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인 오더피 가로드 오 키나간 세르지오 파눈치오 지오반니 파피니 안테 파빌리치 윌리엄 더들리 펠레이 알프레트 플뢰츠 로베르 폴레 비드쿤 크비슬링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뤼시앵 레바테 디오니시오 리드루에호 알프레도 롯코 콘스탄틴 로드자엡스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플리니우 사우가두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 마르게리타 사르파티 카를 슈미트 아르뎅고 소피치 오트마어 슈판 우고 스피리토 살러시 페렌츠 곤살로 토렌테 발레스테르 조르주 발루아 아나스타시 바사츠키 안호상 염동진 박정희 문헌단행본 《파시즘의 교리》 《파시스트 선언》 《파시스트 지식인 선언문》 《나의 투쟁》 《오스월드 모슬리 자서전》 《20세기의 신화》 《히틀러 제2서》 《러시아 파시스트의 유언장》 정기간행물 국가의 정복 다스 라이히 데어 앙그리프 독일일반신문 노르웨이 독일일반신문 네덜란드 독일일반신문 Figli d'Italia 프론텐 간디레아 청년 파시스트지 나는 어디에나 있다 작업 중의 프랑스 뮌헨 베오바흐터 노보프레스 월간 NS 노르웨이-독일 저널 흑군단 데어 슈튀르머 이탈리아 인민 스파르머피아트러 지크날 블라이카 푈키셔 베오바흐터 우리의 길 파시스트 르알바 영상물 《신념의 승리》 《의지의 승리》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 관련 주제 나치 예술 파시스트 건축 영웅사실주의 나치 건축 나치즘과 영화 나치의 예술품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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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85061515 GND: 4073091-8 NDL: 0111132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홀로코스트&oldid=24179693" 분류: 홀로코스트독일의 역사반독 감정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4년 4월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4년 5월인용 오류 - 날짜CS1 - 폴란드어 인용 (pl)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인용 오류 - URL 없이 확인날짜를 사용함히브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이디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인용 오류 - 외부 링크인용 오류 - 보이지 않는 문자CS1 - 독일어 인용 (de)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کوردی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हिन्दीFi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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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홀로코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대인 대학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히브리어: השואה, 이디시어: 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1]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2]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3]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4] 목차 1 어원과 개념 2 특징 2.1 전국가적 동조 2.2 배경 사상과 규모 2.3 집단 학살 수용소 2.4 생체 의학 실험 3 발달과 실행 3.1 유래 3.2 법적 탄압과 이주 3.3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1938) 3.4 재정착과 강제추방 3.5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 3.6 게토(Ghetto)(1940-1945) 3.7 유대인 대학살(1939-1942) 3.8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 3.9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 3.10 반응 3.10.1 독일의 대중 3.11 동기 3.12 집단 학살 수용소 3.13 가스실 3.14 유태인의 반발 3.14.1 - 저항의 정의와 평가 3.14.2 -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 3.14.3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 3.15 절정 3.16 죽음의 행군(1944-1945) 3.17 해방 4 피해자와 사망 통계 4.1 유태인 4.1.1 국가별 4.1.2 이디시어(Yiddish)에 대한 영향 4.2 비유태인 4.2.1 슬라브인 4.2.2 폴란드인 4.2.3 서부 슬라브인 4.2.4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브인 4.2.5 동부 슬라브인 4.2.6 소련 전쟁 포로 4.2.7 집시 4.2.8 유색인종 4.2.9 신체장애인/정신장애인 4.2.10 동성애자 4.2.11 좌익분자 4.2.12 프리메이슨 4.2.13 여호와의 증인 5 각주 6 같이 보기 7 참조 문헌 8 외부 링크 어원과 개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홀로코스트의 명칭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특징[편집] 2007년 국경(점선) 기준의 강제 수용소 위치 지도. 전국가적 동조[편집]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4]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5]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6]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6] 배경 사상과 규모[편집] 다른 학살들의 경우, 학살 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 사항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 (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는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태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태까지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 정작 실행은 매우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7]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는 것을 꼽았다.[8]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9]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10]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11]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12] 집단 학살 수용소[편집] “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 — 아돌프 히틀러[13]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14] 생체 의학 실험[편집]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15]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16]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17]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17] 발달과 실행[편집] 유래[편집]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18]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19] 1895년, 옛 독일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20]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21]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21]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22]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23]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24]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25]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26]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27]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28]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29]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적 탄압과 이주[편집] 나치 지도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 나치정책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이다.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과 도덕적인 적으로는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상습범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의 목적은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30]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31]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32]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었다.[33]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34]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35]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34]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36]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37]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38]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39]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성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월터 벤자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옹 페츠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월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월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램퍼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40] 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더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41]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맥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 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 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41]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1938)[편집]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쉘 그륀스판(Herschel Grünspan)은 파리에서 독일 나치의 외교관 에른스트 봄 레이스를 암살했다.[42]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물리적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였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42]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회당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43]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42]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부르크(Oranieburg),[44]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45]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 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42]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42] 재정착과 강제추방[편집] 전쟁 이전 나치는 유럽으로부터 독일 유대인을 대량 강제추방하는 것을 고심하였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사흐트 계획이 필요 없어지질 때까지 수 천명의 유대인 강제추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국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이치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스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 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 달러를 수송했다.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편집] 제 3제국의 시작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감금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 50%에 육박하는 사망률을 보이긴 했지만, 그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곳으로 설계 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에 오직 많은 학살만을 위한 6개의 대규모 집단 처형장이 세워졌다.) 1939년 이후, 많은 수용소가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는 장소로 변했다. 15,000개의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독일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동부 유럽에 위치했다. 독일 내에도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공산당원 혹은 로마와 신티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수용소가 많이 세워졌다. 수감자들을 화물차에 태워 이송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도착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려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역을 통한 학살은 구조적인 학살정책이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일을 하거나, 체력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독가스에 의해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노역은 전쟁용품 생산에 사용되었다. 허락 하에 몇몇의 수용소는 수감자의 몸에 수감번호를 새겼다. 이것은 12시간에서 14시간을 교대로 일을 하게 하는데 편리했다. 노동 전후로 점호가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게토(Ghetto)(1940-1945)[편집] 폴란드 침공이후, 나치는 편입된 영토에 유대인이 제한된 게토와 일반정부를 설립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이것들은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밝혀진 것처럼, 그러한 추방은 일어나지 않았고 게토의 주민들은 대신에 학살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인들은 각각의 게토에 유대인들의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Judenrat)에 의해 운영돼야 된다고 지시했고 그러한 위원회의 설립을 첫 번째 주문은 하이드리히(Heydrich)에서 특수행동부대(Einsatzgruppen)의 상부에 1939년 9월 29일 편지에 포함되었다. 게토는 다른 시간들과 다른 이유들로 형성되었고 외부세계로부터 베제되었다. 그 위원회들은 게토를 매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살 곳, 의료, 난방, 물, 음식의 배급문제들을 포함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위원회에 몰수시작, 강제 노동구성, 마지막으로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운영회의 기본적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치정권 또는 그 대행자이 주로 협력하였다. 점점 더 끔찍한 협정 뇌물수수와 청원을 받아들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한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위원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숨을 제공했다.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되어야 할 추방자들의 이름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주된 패턴은 이 마지막 과제를 준수하는 것이었지만, 몇몇 위원회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떤 한 사람도 넘겨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Lviv) 그리고 요제프 파르나스(Joseph Parnas)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 1942년 10월 14일에 부아로짜(Buaroza)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을 협력하는 대신에 자살했다. 1942년7월 23일에 바르샤바에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ow)는 마지막으로 게토가 청산되어 그가 다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자살했다. 차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와 같이 독재자에게 헌신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는 살 수 있는 유대인들은 살리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는 독일에서도 유지되었다. 한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권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지시를 복종하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인 전투기관이 위원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협력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인들은 통제를 잃게 됐다. 바르샤바 게토는 380,000명의 인원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0,000명의 인원으로 2번째로 컸다. 요컨대 느리고 수동적인 살인자인 미하엘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에 따르면 그곳은 거대하게 북적이는 감옥이었다.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그 곳은 폴란드 수도지역의 2.4% 만을 차지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43,000명 이상의 거주자들은 1941년에 그곳에서 죽었고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10분의 1이상이 죽었으며 1942년에는 그 거주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다. "독일인들은 경찰이 되었고 그들은 집들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유대인은 나가(Raus, raus, raus, Juden raus)”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녀의 손에 오줌을 누어서 그 아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음료로 주었다. 그 경찰이 갔을때 나는 그 엄마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죽어있었고, 다른 엄마는 그녀 자신의 아이를 기절시켜 죽였었다." - 아브라함 말릭(Abraham Malik)이 코브노(Kovno) 게토에서 경험을 저술한 것에서.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의 시작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3일 후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300,000명에 사람들이 바르샤바로부터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수용소까지 화물기차로 수송되었다. 많은 다른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첫 번째 빈민가 폭동은 남동 폴란드 라크바(Łachwa)의 작은 마을에서 1942년 9월 발생했다. 1943년 무장저항 시도는 바르샤바 게토봉기와 비알리스토크(Białystok) 빈민가 반란과 같이 큰 게토들에 의해 발생했지만 모든 경우 그들은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유대인 대학살(1939-1942)[편집] 지역의 인구에 의한 수많은 치명적인 학살은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는 자발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의 학살을 포함하는데 그 학살은 14,000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다. 또한 1941년 7월의 실크 프로그램(Jedwabne pogrom)을 포함하는데 이는 나치 질서경찰(Nazi Ordnungspolizei)가 있는 데서 300명 유대인이 불 난 헛간에 잠기게 되는 사건이다. 독일인에 의해 같은 곳에서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다. 이것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에 의해 조사된 두 개의 무덤에 있는 피해자의 숫자로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 의해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 최종 발견되었다. 소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편집] 1939년 12월의 시작과 함께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다중 살인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였다. 첫째로, 가스 실린더를 장착한 실험용 가스차(gas van)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는 T-4 작전(나치의 인종정책 일환으로 안락사를 이용한 장애인 학살 계획)의 일환으로써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선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가스차가 실린더 대신 엔진의 배기가스를 이용하면서 1941년 11월부터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들은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Chełmno extermination camp)에 소개되었고 그것 중 15대는 점령된 소련에서 대량살상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는 국가보안본부(SS-Reichssicherheitshauptamt)의 감독 아래에서 개발되었고 운영되었다. 또한 대략 50만명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가스차는 신중하게 감독받았고 한달 동안의 관찰 후의 한 기록에서는 “기계에 어떠한 결함도 나타나지 않고 세 대의 가스차를 이용하여 9만7천번이 진행되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새로운 다중 살인 기법의 필요성은 군사정부의 통치자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한스 프랑크는 다수의 사람들을 간단히 쏘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방법으로 설계된 단계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나치친위대(SS)가 독성 가스를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살인이 동반된 실험을 하게 만든 문제였다.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는 가스방을 발명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입니다. 반제 회의는 반제의 베를린 교외에서 1942년 1월 20일에 라인 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유대인 문제 와 관련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국가 사무총장, 고위 관리, 파티의 리더, SS 장교와 정부 부처의 다른 지도자의 숫자를 포함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정책 회의의 초기 목적은 유럽안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방법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유럽내 유대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양한 점령 지역에서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을 위한 지식과 책임을 모두 공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에 의해 그려진 분의 사본은 살아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그것들은 "완곡 어법 언어"로서 쓰여졌다. 따라서 회의에서 사용 된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에 유대인 철수 정책에 의해 추방을 나타내는 회의는 대체되었다고 연설했다. 이는 독일에 의해서 통제 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나머지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에 사는 11만 유대인들을 포함하는 임시적인 해결방법에서 궁극적인 해결방법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최종 해결책'의 문구에 의해서 이해되도록 분명히 했다.” 최종해결책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이다. 관계자는이 200만은 여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230만 유대인은 일반정부, 850,000은 헝가리에, 다른 점령 국가에서 110만, USSR에서 안에 오백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 총 약 650만. 이들은 모두 거의 모두가 한번에 가스로 죽을 폴란드에 있는 학살 수용소 (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 될 것이다. 괴링의 대표, 박사 에리히 노이만은 산업 노동자들의 몇 가지 클래스에 대한 제한된 면제를 받았다. 반응[편집] 독일의 대중[편집] 그의 1983 책, 대중의 의견과 제 3제국의 정치적 반대에서, 이안 커쇼는 나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Alltagsgeschichte (일상 생활의 역사)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의 태도를 묘사하면서, 커쇼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이 쇼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에” 관한 전챙에 대해서는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이 증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관심에 의해 길이 닦였다"고 비유했다. 대부분의 바바리아, 그리고 함축적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쇼아에 무관심 있다는 커쇼의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Kulka, 나치 독일의 여론에 대한 전문가 및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 정도를 경시했다고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자연스러운" 반유대주의가 행해지고 있다고 인정할 지라도 이러한 작업은 독일의 상당한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단독으로 오는 것으로서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Kulka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커쇼가 그들을 대중의견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오히려 "무관심", "수동적인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더 나은 용어가 될 수 있다. 나치정권에 반대 하는 유대인들 또는 독일인들에 관한 관점으로만 연구를 집중 시키면, 나치 독일의 역사 학자 크리스토프 디퍼가 그의 1983년 에세이 "Der Deutsche Widerstand und die Juden" (영어로 번역하면 “독일인의 정황과 유대인들” Yad Vashem의 저서 16권, 1984)에서 반 나치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반유대주의라고 주장했다. 디퍼는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관료적인 것과 의사 법적 박탈이 1938년에 여전히 받아들여질때까지 행해졌다고” 썼다. 디퍼는 어떠한 독일 저항자들도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고 쓴 적이 없었지만 그는 또한 민족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에 의해 그들의 계획이 엎어지고 나서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회복시킬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디퍼가 정권의 상대방에 의해 세워진 관점에서 보면 독일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 문제는 존재했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베를린에 다양한 기능의 3,000개의 수용소가 있고 또 다른 1,300개가 함부르크에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것의 공동 연구원은 독일 인구는 그러한 유행을 고려하면 박해에 대해 알고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Gellately는 대부분의 독일 민간인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Gellately에 따르면, 정부는 언론과 민간인을 통한 음모는 가스 챔버의 사용을 제외한 모든 측면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어떤 역사적 증거는 홀로 코스트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전의 강제 수용소에 추방당했고, 그들을 기다려온 운명을 알지도 못했고 거부 할 수도 없었다. ;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이 다시 정착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기[편집] 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어떠한 강압적인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46] Buchheim은 범죄나 다름없는 그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다고 저술하며,[46]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47]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46]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48]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49] 후일 Stanley Milgram은 Milgram Experiment를 통해서, 응집력이 강력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은 이에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이에 큰 영향을 받은 Browning은 위의 101부대의 사례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나 동류집단 압력(peer groop perssure)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 트라브니키 간수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50] 사학자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51] 그리고 Kudryashov는 이들이 대개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52]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는 관심도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52]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53] 이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트라브니키(Trawniki)는 물론이고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보프(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51][54] 집단 학살 수용소[편집] 각 수용소별 개략적인 사망자 수[55] 수용소 사망자 좌표 주석 Auschwitz II 1,000,000 북위 50° 2′ 9″ 동경 19° 10′ 42″ / 북위 50.03583° 동경 19.17833° / 50.03583; 19.17833 (Oświęcim (Auschwitz, Poland)) [56][57][58] Belzec 600,000 북위 50° 22′ 18″ 동경 23° 27′ 27″ / 북위 50.37167° 동경 23.45750° / 50.37167; 23.45750 (Belzec (Poland)) [59][60] Chełmno 320,000 북위 52° 9′ 27″ 동경 18° 43′ 43″ / 북위 52.15750° 동경 18.72861° / 52.15750; 18.72861 (Chełmno (Poland)) [61][62] Jasenovac 58–97,000 북위 45° 16′ 54″ 동경 16° 56′ 6″ / 북위 45.28167° 동경 16.93500° / 45.28167; 16.93500 (Jasenovac (Sisačko-Moslavačka, Croatia)) [63][64] Majdanek 360,000 북위 51° 13′ 13″ 동경 22° 36′ 0″ / 북위 51.22028° 동경 22.60000° / 51.22028; 22.60000 (Majdanek (Poland)) [65][66] Maly Trostinets 65,000 북위 53° 51′ 4″ 동경 27° 42′ 17″ / 북위 53.85111° 동경 27.70472° / 53.85111; 27.70472 (Malyy Trostenets (Belarus)) [67][68] Sobibór 250,000 북위 51° 26′ 50″ 동경 23° 35′ 37″ / 북위 51.44722° 동경 23.59361° / 51.44722; 23.59361 (Sobibór (Poland)) [69][70] Treblinka 870,000 북위 52° 37′ 35″ 동경 22° 2′ 49″ / 북위 52.62639° 동경 22.04694° / 52.62639; 22.04694 (Treblinka (Poland)) [71][72]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의 유대인 학살계획(Operation/Aktion Reinhard)을 수행하게 되었다.[73][74] 이중 헤움노(Chełmno)[75]와 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충실한 노동 및 전쟁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학살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의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는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Dachau)나 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수용소의 화물적재램프로 기차가 유대인들을 실어온다. 하루에 한번, 많게는 다섯 번까지 불철주야 실어나른다. 사람들은 유럽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앞서 도착했던 ‘화물’들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이 수라장에 놓인 이들은 - 나는 곧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 열에 아홉은 가스실에 놓일 것이다. — Rudolf Vrba, 1942.8.18에서 1943.6.7까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송램프에서 근무 이러한 집단학살 수용소는 SS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 가스실[편집] 학살에 사용된 가스의 고형이 담겼던 빈 캔들과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전시된 주인잃은 머리카락들 가스실을 구비한 모든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모든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하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지고 여기서 모든 소유품들은 나치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압수되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과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쥐어주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공황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긴 여정으로 인해 갈증을 호소하는 인원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76] 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4년 9월 13일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Rudolf Höss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번에 ‘처분’할수 있었다고 한다.[77]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는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78] 가스실을 감독하던 SS군의관으로 근무했던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79]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78] 잔여가스를 모두 제거하고 시신들을 모두 치우는 등 가스실의 사후처리 작업에는 최대 4시간이 걸렸으며, 화장하기 전 여성의 모발은 잘라내고 치과의사 포로를 이용해 금니들을 적출했다.[80]비워진 가스실의 바닥을 청소하고 벽은 흰색으로 덧칠했다.[79] 이 모든 작업은 유대인 포로 작업반인 Sonderkommando에 의해 수행되었다. 화장터 1과 2의 Sonderkommando는 화장시설의 다락에서 살았고 3과 4는 가스실에서 살았다.[81] 이들에 의해 시신 처리작업이 끝나면 SS대원이 적출된 금니의 개수와 시신의 구강상흔 수를 맞춰보고, 만약 금이 누락된 것으로 간주된다면 해당 포로는 그 자리에서 소각로에 던져졌다.[82] 초기에 시신들은 가스실에서 꺼내져 그대로 깊은 구덩이에 묻혀 석회로 덮혔지만, 1942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의해 다시 꺼내어져 소각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지어진 것들이다.[83] 우리는 트레블링카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많은 개선안을 얻게 되었다. 우선 한번에 2000명을 처분하더라도 200명을 수용하는 10개의 가스실을 쓰던 과거에 비해, 800명과 1200명을 수용하는 2개의 가스실을 운용하게 된 점이다. 따라서 포로의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 검진하는 데에는 SS군의관 2명이면 충분했다. 포로들은 의사를 향해 줄줄이 걸어가고 의사는 그대로 걸어서 통과하는 포로들의 상태를 보고 노동력으로 활용할지 처형할지 즉석에서 판결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냈다. 수용소 아니면 가스실. 물론 유아들은 노동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예외 없이 가스실로 보냈다.트레블링카를 통해 우리가 이룩한 또 다른 개선은 포로의 안정이었다. 트레블링카에서 포로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포로들이 그러한 자각을 하지 못하도록 속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다. 물론 가끔씩 그들이 우리의 진의를 알아채고 자잘한 말썽을 부리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여성들은 치맛자락에 아이를 숨겼지만, 발견하는 즉시 남김없이 가스실로 보냈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린 언제나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해야 했지만, 당연하게도 반복적인 소각으로 퍼지는 악취와 구역질나는 시체 탄내는 근방 지역에 완전히 배어버렸고, 주민들까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챘다. — Rudolf Höss의 뉘른베르크 증언[84] 유태인의 반발[편집] - 저항의 정의와 평가[편집] 바르샤바 게토 봉기(1943.1)체포되어 방공호에서 강제로 연행되어나가는 유대인들 -Heinrich Himmler에게 보고된Jurgen Stroop의 Stroop Report에서 나치의 학살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의 반응은 거의 완벽한 무저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실제로 넘쳐나는 나치독일의 프로파간다 자료와는 달리, 유대 공동체의 자체적인 저항운동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당시 유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유대인들은 저항기구 수립이나 무장 활동에 대한 계획 자체가 없었고, 심리전에 대한 대비조차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었다. ...유대인과 관련한 독일군 측 사상자 자료를 분석해 보면, 유대인의 조직적인 무장저항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히려 독일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사회의 순종적인 참여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나마 각 지역 Resistance 등에 산재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활동을 벌이던 유대인들은, 동족들이 집단적인 무력감과 타성에 빠져 순순히 나치의 명령에 이끌리는 것을 경고하며 “도살자에 이끌려가는 양떼가 되지 마십시오” 라고 호소하고 다니곤 했다. ...두 집단학살 수용소를 관리했던 Franz Stangl은 전후 서독 감옥에 투옥되고 받은 인터뷰에서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과 그 처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나그네쥐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자신들이 어디를 가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집단적으로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이 쥐들에게서 트레블린카 수용소에 바글거리던 그들이 겹쳐 보였다.'[85]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Raul Hilberg Peter Longerich 역시 막대한 연구 끝에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지었다.[86] Hilberg는 이러한 순응적인 태도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유대인들은 수세기동안 단순히 압제자들에게 애원하기만 할뿐, 명령에 복종하며 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 피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이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박해를 받는 시기에는 항상 수많은 피해를 받았지만, 마치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와 같이 다시 재기하곤 했으며 사실상 이들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반복되어온 순종의 역사가 각인시킨 타성 속에 갇혀버린 셈이다.'[87] 하지만 Yehuda Bauer를 비롯한 동료 사학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물리적 항쟁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취한 모든 종류의 행동들까지 포함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유대인들은 모든 게토, 강제송환 열차, 강제 수용소와 심지어 가스실 앞에서까지 온갖 형태로 저항을 표시했다. 조악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자들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저항의 뜻을 밝히는 자들, 그리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짜내는 자들, 이 모든 행동들은 나치독일이 자신들의 죽음을 조소와 함께 감상하는 것만은 용인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이중에서 무위와 순종이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잔인무도한 폭력 앞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숭고한 저항이었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 속에 확정된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인간으로서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 애쓰고,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는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아 고문기술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저항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이들의 순응과 죽음은 전범재판에서 나치독일의 잔인무도함을 고발하는 가장 강렬한 증거가 되었다. 인간정신의 승리였다." -The Holocaust: The Jewish Tragedy, Martin Gilbert[89] 한편 Hilberg는 위에 인용된 Gilbert의 평가처럼 과잉되고 범위조차 명확치 않은 정의를 통해 유대인 저항을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흐름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평범하거나 순수했던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게 되어버린 케이스처럼 개인적이고 흔치않은 사례들을 당시의 보편적인 사례로 과장한다면 우리는 정작 나치독일이 취한 정책의 특성과 의도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흔치 않거나 소규모의 개별적인 사례들을 당시의 시대상인 양 포장하면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의 의의와 기본성격까지도 왜곡시켜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저항의 정의를 끝없이 확장하고 사례들은 과장하다보니, 오히려 실제로 실행되었던 저항다운 저항운동들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대로 간다면 영웅적 정신은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과 그 공동체들의 기본 소양으로 치부되어버리고, 정작 저항을 행동에 옮겼던 소수 유대인들의 진정한 용기는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사회의 이러한 ‘순응하는 대다수와 행동하는 극소수의 혼재와 불통’을 단순히 문제해결 과정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맹탕 공동체로 치부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이 구조는 사실상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생산적인 질문과 대안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는 곧 공동체 스스로 추론능력과 생존전략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를 외면한다면, 유대인의 역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90] -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편집] 연행되어온 유대인 레지스탕스, 바르샤바 게토, 1943 물론 무력저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독일군에 붙잡힌 유대계 소련군 전쟁포로, 1941.8월대전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91][92]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93]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94]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 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95]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 앞에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그들은 언제나 저보다 위험한 임무들을 도맡아 수행했습니다. — Pieter Meerburg, 레지스탕스 생존자[96] 그리고 14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이들은 각각 50만은 공산권의 붉은 군대에, 55만은 미군에, 10만은 폴란드군, 3만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97] 특이하게도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편집]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면서 어수선해진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들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됐고, 6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중 40명만이 종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를 포함한 600여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버(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1명의 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되고 나서는 중화기까지 동원한 수용소 측의 공격으로 3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되었다. 그나마 탈출한 인원의 대다수도 수용소를 둘러싼 지뢰밭을 통과하진 못하고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이들 중 60여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년 뒤, 1944년 8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수감자들이 인근 공장에서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3명의 간수가 살해되었고 이중 하나는 오븐 속에 구겨진 채 발견되었다. Sonderkommando들은 이어서 바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전원 사살되었다. 사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저항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었지만, 그들 역시 강제이주라는 명분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탈출과 협상, 공무 방해와 때때로는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나치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이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노리고, 오히려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구성원들의 복종을 강제하게 유도했다. 이 계획의 대표적인 타겟조직이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였다. 나치는 이들에게 유대인 권익보호와 시오니스트에 대한 지원책 등 거짓 공약을 제시해, 이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하고 희생자를 더욱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대인들은 2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박해받으며, 저항은 구원이 아닌 죽음을 몰고 온다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왔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 속에서 그들의 논리와 전승, 문화와 사회구조, 언어까지도 타협과 설득, 애원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거기에 저항과 대결의 자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Paul Johnson, 작가 및 사학자[98] 절정[편집]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어 SS소속 장성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RHSA(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감수 아래, 그는 최종 해결법(유대인 말살계획)을 착실히 전개해나가며 1943년부터 1년간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데 전념했다. 유대인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99] 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100] 1944.8.20-22, 헝가리 부다페스트.붙잡힌 유대인 여성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최종 해결법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히믈러가 얼마나 이 소명에 미쳐있었는지는 나치 고위당원들의 공식 집회에서 한 연설의 녹취록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저는 일생일대의 난제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와 이토록 가까이 마주앉은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거나, 혹은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분도 있을것 입니다. 그 문제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중략) 이제부터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부디 여러분 이외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중략)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이들에게 처자식이 있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결국 이 자리에 와서야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저는 이것들을 박멸하는데 있어서 후환이 남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후환이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것들을 멸종시키기 위해서 약간은 꺼림칙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 하인리히 힘러, 1943.10.4. 폴란드 포젠의 나치 고위당원 모임에서 1944,봄. 체코 동부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최종 해결법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슈페어는 재판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101]라고 선언했다. 1944년 봄,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해서야 학살의 규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 문제로 마찰이 빈번하던 헝가리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일찌감치 배신의 기미를 파악하여 3월 19일에 선제공격했다. 공격 하루 전,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헝가리의 섭정이자 제독인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었다. "헝가리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난민으로 인해 폭증한 유대인 인구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102] 마침내 점령이 완료된 헝가리에서 80만의 유대인들이 대량학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세 달에 걸쳐 40만명 전부 살해되었다. 수용소장 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이후 전범재판에서 이 사실을 자백했다. -Blood for Goods 협상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작전은 나치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샀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냥 학살하느니 차라리 이들에게 평화로운 정착지를 제공해주는 대신 연합국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라는 제안까지 나왔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관리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100만명과 트럭 1만대 분의 물품을 교환하는 거래를 발의했고, 이에 대해 이스탄불에서 하인리히 힘러와 영국, 유대인 단체의 대리인들이 모여 비공식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 규모의 거래가 제대로 성사 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죽음의 행군(1944-1945)[편집] 1944년 중순 쯤 되었을 때 “최종 해결법(Final Solution)"은 거의 실행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나치 정권에게 접근이 용이하였던 유태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말살 당하였는데, 프랑스는 약 25%가 제거된 반면 폴란드는 파괴된 공동체 비율이 약 90%에 달하였다. 나치 친위대장 하임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5월 5일 연설에서 ”독일과 독일 점령지 내의 유태인 문제는 전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103] 1944년에는 이 임무가 점차 어려워졌는데, 독일군이 러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전투에서도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 연합군은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의 공습과 게릴라 전투는 독일군의 철도 운영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기차의 일부를 죄수 운송에 쓰는 것에 할애하는 데에 대한 독일군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 소련군이 점점 진격해오자 폴란드 동쪽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생존해있던 수감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이후에는 실레지아(Silesia)에 있는 Gross Rosen으로-로 이송되었다. 마지막 13명의 죄수-모두 여성이었다-는 1944년 11월 25일 아우슈비츠 II에서 죽임을 당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전면적 죽음(unmittelbar getötet)"을 당하였다고 되어있어, 가스실에서 죽었는지 다른 방법으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104] 암울한 전쟁 형세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가스실은 해체되었고, 화장터는 폭파되었으며, 집단 매장지를 뒤엎고 시체들은 화장시켰다. 또한 폴란드 농부들에게 그 자리에 식물 씨앗을 키우도록 강제하여 그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역 지휘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태인들을 죽이고 또 강제된 “죽음의 행군(Death March)"을 통해 수용소 간 이동을 시켰다.[105] 수 년 간의 폭력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기차역까지 눈발을 뚫고 장거리를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고, 이후 며칠씩 음식 없이 화물열차 안에 갇혀서 운송되었고, 내린 후에 또다시 수용소로 행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즉시 총살되었다. 이 행군 중에 죽은 유태인은 약 2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06] 이러한 죽음의 행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행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9일 전이었는데, 수용소 경비대는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56km 떨어진 Wodzislaw(독일어: Loslau)까지 걸어가게 시켰다.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화물열차를 통해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는데, 여기까지의 행군 도중 약 15,000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해방[편집] 첫 번째 주요 수용소였던 Majdanek 수용소는 진격하는 소련군에 의해 1944년 7월 23일에 발견되었다. Chelmno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0일에 해방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또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7일에 해방되었다.[107] Buchenwald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11일,[108] Bergen-Belsen 수용소는 영국군에 의해 4월 15일,[109] Dachau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29일,[110] Ravensbrück 수용소는 같은 날 소련군에 의해, Mauthausen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5월 5일,[111] Theresienstadt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5월 8일에 해방되었다.[112] Treblinka, Sobibor, Belzec 수용소는 해방되지 못하고 1943년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7군 William W. Quinn 대령은 Dachau 수용소에 대해 “우리 부대는 그 곳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 소리, 악취를 목격하였다. 도저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잔인함이었다”라고 회고한다.[113][114] 소련군에 의해 발견된 수용소들의 대부분은 이미 죄수들을 이송하여 몇 천명만이 살아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되었던 180명의 아이들을 비롯해 7,6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발견되었다.[115] Bergen-Belsen 수용소에서는 60,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영국군 11사단에 의해 발견 되었는데,[116] 13,000여 구의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10,000여 명은 몇 주 후 티푸스나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117] 영국군은 남아있던 수용소 경비대를 시켜 시체를 모아서 집단 묘지를 만들게 하였다.[118] 피해자와 사망 통계[편집] 피해자 사망자수 출처 유태인 590만명 [119] 소련군 전쟁포로 2–3백만명 [120] 폴란드인 1.8–2백만명 [121] 집시 220,000–1,500,000명 [122][123] 장애인 200,000–250,000명 [124] 프리메이슨 80,000–200,000명 [125][126] 슬로베니아인 20,000–25,000명 [127] 동성애자 5,000–15,000명 [128] 여호와의 증인들 2,500–5,000명 [129] 스페인 공화주의자들 7000명 [130]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통계치는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500만 명 유럽 유태인에 대한 큰 규모의 학살을 의미하며,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정확한 정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131] 마틴 길버트의 측정치에 따르면 총 피해자 인원수은 600만 명 이하이며, 당시 유럽 유태인의 78%를 차지하다고 말했다. 티모시 스나이더는 홀로코스트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나눠 보았다. 하나는 독일군이 전쟁했을 때 모든 학살행위이며 하나는 나치가 유태인에 행한 모든 압박행위이다 포괄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인원수는 소련 전쟁포로 200만~300만명, 폴란드인 200만명, 장애인 27만명, 집시 22만명, 프리메이슨 회원 22만명, 슬로베니아인 2만5천명, 동성애자 1만5천명, 여호와의 증인 신도 5천명, 스페인 공화주의자 5천명을 포함하여 총 1100만명이다. 더 넓은 통계범위로 600만 명의 소련 민간인을 포함하게 될 경우 총 사망인원수는 17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유태인학살기념관에서 전시된 수치에 따르면 1500~2000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루돌프 럼멜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된 사람 수를 2100만 명이라고 측정하였으며, 다른 학자의 측정치에 따르면 소련 민간인의 사망 수를 합쳐 26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한다.[132] 유태인[편집] 연속 기획:반유대주의유대인의 역사의 일부 역사 연표 참고자료 발현 학술계 아랍 보이콧 기독교 경제적 가자 전쟁 이슬람 홀로코스트 부정론 이슬람 국가 신반유대주의 급진반유대주의 종교적 반유대주의 이차 반유대주의 세계의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적 유언비어 피의 중상 유대살신설 드레퓌스 사건 성체모독 유대 볼셰비즘 유대인 로비 프리메이슨 음모론 유대세 배후중상설 우물에 독 타기 시온주의 괴뢰 음모론 관련 텍스트 유대인과 그 거짓말에 대하여 유대의 프랑스 시온 장로 의정서 국제유대인 나의 투쟁 제2의 서 흑인과 유대인 사이의 은밀한 관계 터너 일기장 사냥꾼 인터넷의 반유대주의 쥬 워치 스톰프런트 유대인 박해 유대인 추방 유럽 게토 포그롬 필레우스 코르누투스 유대 암퇘지 황색 육망성 스페인 종교재판 종교적 분리 유대인 할당제 홀로코스트 나치즘 반유대주의 반대 UN 워치 명예훼손방지동맹(ADL) 공동체안보신탁(CST) 유럽기본권기관(FRA) 친유대주의 스티븐 로스 연구소 비에너 도서관 남부빈곤법률센터(SPLC) 시몬 비젠탈 센터(SWC) 구소련 유대인 평의조합(UCSJ) 스웨덴 반유대주의 반대위원회(SCAA) 야드바솀 시온주의 분류vdeh 1945년에서 지금까지 흔히 나온 학살을 당한 유태인사망인원수에 대한 측정치는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대학살기념관에 이런 말이 전시되어 있다.[133] 살해를 당한 유태인은 정확하게 통계할 수 없고 문서에서 300만 명의 유태인의 이름을 찾았고 , 유객센터에서 전시되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중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600만 명의 숫자는 당위군 장관을 맡은 Adolf Eichmann가 말한 것이다. 당위군 장관 Wilhelm Höttl의 증사에 따르면 1944년 8월에 Adolf Eichmann가 그한테 6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을 당하고 ,4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나머지 200만 명이 총사나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1953년에 Gerald Reitlinger가 쓴 《최종해결방안》이 피해자인원수에 대해 측정했다. 인원수는 4,200,000-4,500,000 명의 사이이었다. 이외에도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하고 Jacob Lestschinsky측정한 5,950,000인 측정치가 있다. Yisrael Gutman와Robert Rozett가 쓴《유태인대학살백과전서》중에 측정한 사망 인원수는 5,590,000~ 5,860,000명의 사이였다. 베를린 공업대학의 교수 Wolfgang· lBenz 연구한 결과는 피해자인원수가 5,290,000-6,200,000명 사이인 것이다. 이스라엘유태인대학살기념관이 전시된 수치의 근거는 전쟁 전후의 인구통계대조하고 강제송환과 학살의 문서에서 온 것이다.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명의 피해자가 보수적인 측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Raul Hilberg가 찾을 수 있는 사망기록만 참조하면서 측정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유럽유태인의 멸망》제3판에서 800,000명이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임을 당하고, 1,400,000명이 총사로 사망하고 2,900,000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쓰인다. 그는 폴란드 유태인의 사망인수 300만 명에 달한다고 측정했다. Martin Gilbert가 최소 5750000 명의 유태인을 살해당한다고 측정하고, 그 중에 Oświęcim에서 독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죽은 200만 명도 포함이 된다. Lucy Dawidowicz 전쟁 이전의 통계수치를 통해 5,934,000명의 유태인이 사망되었다고 지적했다. 각 강제수용소의 사망인원수가 3800000명을 넘고 그중에 80~90% 모두 유태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유태인이 나치 대학살로 인한 총 유태인피해자인원수의 반에 달했다. 폴란드의 유태인 거의 이런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도 최소 50만 명의 유태인 기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그중에 독일의 몇 개의 주요한 수용소 포함된다. 많은 유태인을 징역하고, 특히 전쟁의 마지막 1년 동안 나치가 폴란드에서 철수한 후, 약 100만 명의 사람이 이런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중에 최소 50%가 유태인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알 수가 없다. 이외에도 80~100만 명의 유태인이 독일이 점령한 구역에서 살해를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영양불량으로 송환되기 전에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었다.[134] 이하 수치는 Lucy Dawidowicz에 의해 제공된 전쟁 전 유럽 국가 내 유태인 인구의 학살을 잘 드러낸 수치다:[119] 국가 전쟁전유태인 인구(추정) 사망인구(추정) 사망비율 폴란드 3,300,000 3,000,000 90 발트해 국가들 253,000 228,000 90 독일과 오스트리아 240,000 210,000 90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90,000 80,000 89 슬로바키아 90,000 75,000 83 그리스 70,000 54,000 77 네덜란드 140,000 105,000 75 헝가리 650,000 450,000 70 벨로루시안 연합 375,000 245,000 65 우크라이나 연합 1,500,000 900,000 60 벨기에 65,000 40,000 60 유고슬라비아 43,000 26,000 60 루마니아 600,000 300,000 50 노르웨이 2,173 890 41 프랑스 350,000 90,000 26 불가리아 64,000 14,000 22 이탈리아 40,000 8,000 20 룩셈부르크 5,000 1,000 20 러시아 연방 975,000 107,000 11 덴마크 8,000 52 <1 합계 8,861,800 5,933,900 67 국가별[편집] 독일 간접 또는 직접 통제된 구역에서 약 800~1000만 명의 유태인이 있었다. 유태인대학살로 피해된 600만 명이 전부의 60%~75%를 차지했다. 폴란드에서 3300000명의 유태인 중에 90% 살해를 당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피해비율이 무려 90%에 달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의 유태인이 다행히 모두 안전하게 철수했다. 1933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는 750,000명 중에 1/4의 생존자만 있었다. 1939년 이전 많은 독일유태인 안전하게 독일을 떠나고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로 도망갔지만, 나중에 여전히 강제송환을 당하여 학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의 유태인 중에 70%가 피해를 받았다. 루마니아, 벨기에, 헝가리의 피해자 비율은 50%-70%에 달했다. 벨로루시하고 우크라이나에서 피해된 유태인 비율이 비슷하지만 정확한 사망자 인원수를 알 수 없다. 유태인피해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는 불가리아,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이었다. 알바니아는 1945년의 유태인인수가 1939년의 인수보다 많아지는 유일한 독일 점령국가다. 약 200명의 토종 유태인과 1000명 이상의 난민이 가짜 신분증을 통해 떠나거나 60%의 이슬람교도 중에서 숨어 있었다. 1990년대 동유럽정부문서가 개방된 이후 Hilberg, Dawidowicz, Gilbert가 사망인원수에 대한 통계수치를 다시 수정했다. Wolfgang Benz가 몇 년 간의 계속 피해자 수를 업데이트를 해 왔고 그는 1999년 이런 말을 했다. “1942년 1월 만호회의에서 제출한 모든 유럽 유태인을 인종청소를 한다는 임무는 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600만 명의 피해자를 죽인 대학살은 이미 인류 역사 상의 가장 큰 폭력이었다. 피해자 인원수는 일일이 알려 주지 못하고 아주 보수적인 측정수치는 이하와 같다. 숫자는 대개 측정한 수치고 이런 잔인한 폭력이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 대학살 피해자 중에 독일에서 165,000명, 오스트리아에서 65,000명, 프랑스하고 벨기에에서 32,000명, 네덜란드에서 10만 명을 넘고, 그리스에서 60,000명, 유고슬라비아에서 사망인원수는 그리스와 같고, 140,000명이 넘는 피해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왔고, 50만 명이 헝가리에서 왔고, 220만 명이 소련에서 왔고, 270만 명이 폴란드에서 왔다. 이외에도 루마니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종족의 피해자인원수(200,000 이상), 그리고 알바니아, 노르웨이,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불가리아에서 피해자 인원수를 더해야 한다." [135] -Wolfgang Benz,《대학살:독일 역사학자 연구하는 대학살》 이디시어(Yiddish)에 대한 영향[편집] 대학살은 이디시어에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 대전이전, 약 1100~1300만 명의 사람들이 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136]대학살은 유태인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종교, 일상생활을 파괴하여 이디시어의 상용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피해자 중에 약 500만 명이(85%)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 이디시어를 쓰지 않은 사람들인 그리스하고 발칸지역에서 쓰는 언어도 파괴되었다. 이러한 ‘유태-스페인어’가 거의 사라졌다. 비유태인[편집] 슬라브인[편집] 1942년 여름에,Heinrich Luitpold Himmler의 《동부전체계획》이(Generalplan Ost)히틀러의 허락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슬라브인을 그들의 고토에서 소멸하거나 유방시키거나 노예로 시킨다는 것이다. 목적은 그 땅에서 독일인이 살도록 할 것이다. 원래 계획은 20–30년의 장기에 걸쳐 추진한 것이다. 작가이며 역사학자인 Doris·L·Bergen 이런 말을 쓰었다. “다른 나치문헌과 마찬가지로 《동부전체계획》이 사용한 어휘가 완곡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근본적인 의도는 분명하다'. 이 계획은 나치독일이 다민족정치관계에 대한 기본방침을 명확히 제기했다. 슬라브인에 대한 학살,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모두 같은 계획의 구성부분이다[137]. 다른 역사학자Williams·W·Hagen 이런 말을 하였다. “《동부전체계획》는 동유럽 인구에 대해 소멸할 인원수까지 예측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폴란드인– 85%;벨라루스인 – 75%;우크라이나인 – 65%;체코인 – 50%, 이러한 거대한 감원하는 규모는 노예로 시키거나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출산통제 등 조치로 달성하겠다는 내용이 있다[138]. Heinrich Luitpold Himmler“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잔인한 인종주의와 편견이고, 2000~3000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태인은 군사적인 조치나 식량부족위기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139]. 폴란드인[편집] 폴란드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고난의 역사였다. 특히 독일은 폴란드의 이웃으로서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넘보았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럽에서 폴란드의 지도를 없애고 독일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140] 그렇게 하여 독일인들을 폴란드 땅에 재정착 시킨다는 생각이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폴란드의 유태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90%이상이 죽임을 당하여 사라졌지만 폴란드의 기독교인들은 잔인한 독일 점령 하에서도 94%가 살아남았다[141]. 1939년 11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인종청소 정책을 수립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폴란드인을 완전히 말살한다는 정책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란드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서부지역의 정부(일반정부라고 부름)는 폴란드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계획에 의하면, 1952년까지 폴란드 서부지역에는 3-4백만 명의 폴란드인만을 남겨놓아 독일인들의 노예로 삼아 부려 먹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들 폴란드인들은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결혼을 금지하며 독일로부터 의료지원을 중지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폴란드인들이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1주일 앞두고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동부지역(폴란드를 말함)에서 폴란드 민족의 후손이거나 폴란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자, 여자, 아이들을 구분하지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군대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래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기간 중에 도합 1백80만에서 2백10만명에 이르는 비유태계 폴란드인이 독일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중 5분의 4가 폴란드 민족이었으며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의 소수민족이었다. 거의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이들 중 최소 20만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그중 14만 6천명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여러 경로로 집단 학살되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봉기 때에 12만에서 20만의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인을 자연소멸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하였다. 예를 들면 철저한 식량배급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주려 죽게 만들었으며 위생시설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전염병 등에 걸려 죽게 만들었고 의료서비스를 중단함으로써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결과,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천 명당 13-18명이었다[142]. 2차 대전의 희생자중 5백 60만 명이 폴란드인이었다. 이에는 물론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도 포함되지만 비유태인도 포함되어 있다. 폴란드는 2차 대전으로 인하여 16%의 인구를 잃었다. 전체 유태인 3백30만 명중 3백 10만 명이 희생되었고 비유태인의 민간인은 3천1백70만 명중 2백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143]. 이들 희생자 중 90%는 전쟁과는 관련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나치 독일도 폴란드인의 청소에 앞장섰지만 후방의 소련도 폴란드인의 제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서부 슬라브인[편집] 리디체 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서부 슬라브인도 마찬가지로 살해를 당했다. 측정한 수치에 따르면 약 345,000명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인들을 살해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144] 나치 독일은 남김없이 리디체를 포함한 마을들을 파괴하고 16세가 넘은 남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치 수용소로 보내고, 여성과 아이들도 리디체를 떠났다. 소르브인도 무참히 학살했다.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브인[편집]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세르비아인 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나치는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발칸에서 58만 1천명의 유고슬라브인을 학살했다.[145][146][147] 이에는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동맹으로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자인 우스타세(Ustase)가 합세하였다. 히틀러는 발칸에서 유고슬라브인을 모두 학살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인간 이하(Untermensch)’라고 표명함으로써 간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나치의 동조자인 유스타세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역 괴뢰정권으로서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주로 야세노바크(Jasenovac)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우스타세 당국은 1941년부터 45년 사이에 크로아티아에 여러 곳의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무슬림(보스니아인), 그리고 가톨릭교도가 아닌 소수민족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물론 크로아티아의 정치범들과 반종교인들도 희생되었다. 니아드 할릴베고비치(Nihad Halilbegovic)가 주도한 최근 연구인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의 보스니아인’(Bosniaks in 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 의하면 약 10만 3천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슬라브인들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나치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운동인 우스타샤에 의해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집시라는 명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동부 슬라브인[편집] 벨라루스 지역이 가장 큰 희생자였다. 나치는 벨라루스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온갖 만행을 자행토록 부추겼다. 결국 9천개의 마을에 불에 탔으며 38만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이송되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Khatyn)과 같은 마을은 마을을 불태울 때에 주민들도 모두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런 마을이 벨라루스에 600개나 있었다. 동구에서 벨라루스로 이전한 슬라브인들이 만든 정착촌은 5,295개소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 정착촌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도합 1백 67만명의 민간인이 3년 동안의 독일 점령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24만 5천명은 유태인으로써 벨라루스 시민들로 구성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에 의해 살해되었다.[148] 소련 전쟁 포로[편집]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초기에 승승장구하여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았다. 독일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은 대략 2-3백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전체 포로들의 57%가 1941-45년간에 굶주림과 학대로, 또는 처형당하여 죽었다.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은 소련군 전쟁포로 중 2백 80만 명이 1941-42년간의 8개월 동안에 죽었으며 1944년 중반까지는 3백3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149]. 이들은 모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생명을 잃었다. 1943년에는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의 사망률이 감소하였다. 이는 상당수 소련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잡힌 소련군 전쟁포로는 도합 23만 1천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8천3백 명만이 죽었다.[150] 집시[편집] 로마니(Romani)와 신티(Sinti)라고도 불리는 집시들은 전통적으로 기록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나치는 집시들이 위생상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성적으로도 문란하다고 생각하여 혐오하였다. 집시들은 아우슈비츠에 끌려 와서도 불결하고 불건전한 생활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순수 아리안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청소키로 결정했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집시의 수는 약 1백만에 달했다. 그중 13만 명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희생되었다. 하지만 미국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의 역사학자였던 시빌 밀튼(Sybil Milton)은 희생당한 집시의 수가 22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유럽에 70만 명의 집시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수는 22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51].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집시에 대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오스틴의 텍사스대학교 집시문제연구소장인 이안 핸코크(Ian Hancock)는 '모르면 몰라도 집시희생자의 수가 유태인희생자의 수와 맞먹을 것'이라고 보았다. 집시들은 집단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오거나 요행으로 게토로 집어넣어 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인자츠그루펜(현지인 나치 동조자)들이 집시들의 야영지를 급습하여 현장에서 모조리 학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나치 점령지의 괴뢰정부들도 집시말살에 한몫을 거들었다. 예를 들면 크로아티아의 괴뢰정부인 우스타세는 집시들을 대거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로 끌고 와서 집단 학살하였다. 1942년부터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동등한 법적 처우를 받았으며 동등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SS 책임자로서 나치 인종청소의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집시 잡종(Mischlinge), 로마니(Romani: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집시), 독일 혈통이 아닌 발칸 출신의 종족들은 이들이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지 않는한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에는 독일에 있는 모든 로마니를 색출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일부 학자들은 집시(로마니)들이 원래는 아리안족이었으나 비(非)아리안족들과의 교합으로 불순한 혈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유색인종[편집] 나치시대에 독일 안에 사는 흑인 약 5000~25000명[152]이 있다. 이 수치는 아시아 사람을 포함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국대학살기념관의 기술에 따르면 1945년 그 쪽의 흑인들이 격리, 살해, 생체실험, 징역, 폭력을 모두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태인을 멸종시키는 것처럼 체계적인 학살을 안 했다. 이외에는 아프리카너, 베르베르인 ,이란인 , 인도인을 아리아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압박을 당하지 않았다. 돌궐족, 아라비아인, 남아메리카인에 대한 종족의식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153] 그래도 일부는 독일군을 위해 일을 시켰다. 신체장애인/정신장애인[편집] "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식물을 주거나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거나 옷이 없는 사람에게 옷을 제공하는 것에 신경을 안 쓴다. 우리의 목적은 색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꼭 건강한 인간으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 요제프 괴벨스, 1938년.[154] T-4 작전은 1939년부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독일의 유전자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강제로 불임하게 하거나 살해했다. 1939년 ~ 1941년 동안, 나치가 정신병원에서 총 80,000 ~ 100,000명의 정신장애인들을 죽였다. 그 중에 아동은 5,000명이고 유태인은 1,000명이다.[155] 또 다른 측정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200,000명의 정신병자가 사망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숫자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시를 받지 않았다. 많은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들이 실험도구로 사망했다. 독일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1941년 8월 24일 이 프로그램을 중지시켰다, 동성애자[편집]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나치에게 희생당한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호모모뉴먼트(Homomonument) 나치 독일에서는 실질적 범죄 행위보다 범행의 동기나 개개인의 자질 등을 문제시 삼았으며, "gesundes Volksempfinden"(건강한 국민 정서)이 나치 독일의 새로운 규범적 원칙이 되었다.[156] 1936년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을 설립하였다.[157] 곧 동성애는 '건강한 국민 정서'에 반하며,[128] 독일혈통을 더럽히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게슈타포는 게이바를 습격하였으며, 체포한 동성애자의 개인 연락처와 성소수자 신문 및 잡지 등을 이용하여 다른 동성애자들을 추적하였다. 또한 이웃에 동성애자나 동성애자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할 것을 대중에 종용하였다.[128][156] 1933년에서 1944년 사이에 10만여명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었고, 이 중 약 5만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갱생'을 이유로 5천명에서 1만5천여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28] 수용소에서 이들은 초기에 노란색 완장으로 구분되었으나,[158] 성폭행 및 강간의 대상이 되어 나중에는 상의뿐만 아니라 바지에도 착용해야하는 분홍색의 역삼각형 낙인으로 변경되었다.[156] 또한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수백명의 동성애자가 강제로 거세를 당하였다.[159]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들은 성적 모욕과 고문, 생체 실험을 당하며 처형되었다.[128] 홀로코스트에서의 동성애자 피해 연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199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형법상 동성애가 여전히 범죄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156] 좌익분자[편집] 독일공산당원, 사회주의자 또한 공희주의자는 나치들이 독일국 내에서 최초의 적이었으며[160], 최초로 수용소로 옮긴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는 유태인의 학설(学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틀러는 그들이 "유태인의 볼셰비키"라고 언급했다. 1933년, 나치즘들이 반공산주의를 명분으로 전권위임법을 선포했다. 이 법안을 통해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나치들이 독일 공산당을 압박함으로써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독일 엘리트 계급 사람들이 나치즘하고 손을 잡았다. 독일 좌파의 많은 리더들이 유태인 출신이다. 유태인 출신 리더들이 1919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단 혁명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맑시스트하고 볼셰비키들이 “국제적 유태인”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이 ”종족의 순결성”과 북유럽사람의 생활을 파괴했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사회계급간에 모순되어 반정부세력들이 수용소에서 독일공산당이 유태인보다 많은 특권을 누렸다. 바로 공산당들이 유태인 종족보다 더 순결하기 때문이다. 나치즘이 점령한 지역에서 항상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구류를 받거나 처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위원은 독일이 점령한 모든 곳에서 처형한 적이 있다. 특별행동부대가 동부전선에서 이 명령을 실시하였다.[161] 프리메이슨[편집]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이 유대인들에게 복종해 왔고, 상류층들을 자신들의 아젠다로 유혹하는 "뛰어난 도구"[162]였다고 말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독일은 프리메이슨이 아주 큰 위협이라고 여긴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을 불법화했고, 많은 로지lodges들을 폐쇄했다. 많은 형제들Brethren이 체포되었고, 집중 캠프로 보내졌다. 로지에서 훔친 물건들은 그 동업자들을 향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일으킬 목적으로, 독일 전역에서 메이슨 반대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리메이슨들도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도 침략하고 점령한 나라(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그리스 등)에서 나치가 훔쳤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8 만 명의 메이슨들이 유럽 전역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미국대학살기념관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많은 잡힌 프리메이슨 맨버들이 유태인 신분이나 반대파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프리메이슨 신분을 갖고 있는 원인으로 나치수용소에 보내는 사람 수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163]. 여호와의 증인[편집] 약 12,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나치한테 선서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거절해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중 약 2500 ~ 5000명이 살해되었다.[164] 각주[편집] ↑ Eric Lichtblau (2013년 3월 1일). “The Holocaust Just Got More Shocking”. 《The New York Times》. 2013년 3월 2일에 확인함. ↑ Dawidowicz 1975, 403쪽. ↑ Fitzgerald 2011, 4쪽; Hedgepeth & Saidel 2010, 16쪽. ↑ 가 나 Berenbaum 2005, 103쪽. ↑ Berenbaum 2005, 104쪽. ↑ 가 나 Friedländer 2007, xxi쪽. ↑ Bauer 2002, 48쪽. ↑ Maier 1988, 53쪽. ↑ "Holocaust Map of Concentration and Death Camps", History1900s, About.com. 16 June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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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Questions about the Holocaust by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vdeh나치즘단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돌격대(SA) 친위대(SS)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 히틀러 청소년단(HJ) 독일소년단(DJ) 독일소녀동맹(BDM) 국가사회주의 독일학생동맹(NSDStB) 국가사회주의 체육국가동맹(NSRL)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NSF) 혁명적 국가사회주의자 투쟁동맹(KGRNS) 역사 초기 역사 히틀러의 성공시대 마흐터그라이풍 독일의 재무장 나치 독일 장검의 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방공 협정 수정의 밤 제2차 세계 대전 삼국 동맹 조약 홀로코스트 뉘른베르크 재판 탈나치화 신나치주의 이념 파시즘 지도자 원리 군국주의 나치 건축물 강제적 동일화 반민주주의 슈트라서주의 히틀러의 정치관 《나의 투쟁》 《19세기의 기초》 《20세기의 신화》 25개조 강령 신질서 《프로이센과 사회주의》 선전술 종교적 측면 혼합 정치 상징주의 여성정책 나치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 피와 명예 우생학 대게르만국 제국으로의 귀환 레벤스라움 우등인종 나치 독일의 인종정책 민족평등 종교 최종 해결책 강제 수용소 퇴거 강제 의사 재판 절멸 수용소 집단살해 게토 인체실험 노역수용소 대박해 인종 분리 독일 외 미국 나치당 화살십자당 (헝가리) 불가리아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국가사회주의운동 (불가리아) 독일계 미국인 연합 리히텐슈타인 독일민족운동 그레이셔츠 (남아프리카)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루마니아 철위대 민족주의당 (노르웨이) 국가사회주의당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당 스위스 민족주의 운동 국가사회주의 블록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연맹 (영국) 국가사회주의운동 (미국) 그리스 국가사회주의당 국가사회주의 덴마크 노동자당 국가단결당 (캐나다) 오제바브란트바흐 (남아프리카 연방) 목록 히틀러의 저서 이데올로기 총수와 임원 나치 당원 과거 나치 당원 히틀러의 연설 SS 장교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마르틴 보어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아돌프 아이히만 알베르트 슈페어 루돌프 헤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빌헬름 프리크 루돌프 회스 한스 프랑크 요제프 멩겔레 리하르트 발터 다레 발두어 폰 시라흐 에른스트 룀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에른스트 한프슈텡글 헤르만 에세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조지 링컨 록웰 관련 주제 나치즘 밀교 극우 나치 독일의 용어 나치 경례 신나치주의 스톰프런트 볼키스체 운동 스와스티카 사회 진화주의 사회주의 제국당 독일 국가민주당 분류 vdeh제2차 세계 대전유럽 (서부 전선 · 동부 전선) · 지중해·중동 (중동 · 동아프리카) · 아시아·태평양 (동남아시아 · 서남아시아) · 서아프리카 · 대서양 · 북아메리카 · 남아메리카개요 · 사상자 · 군사 장비 · 회담 및 회의 · 지휘관 · 통계참전국연합국(지도자)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중국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에티오피아 핀란드 (1944~45) 프랑스 자유 프랑스 (1940년 6월 이후) 그리스 영국령 인도 제국 이탈리아 (1943년 9월 이후) 전역 룩셈부르크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 소련 영국 미국 푸에르토리코인 유고슬라비아 추축국(지도자) 불가리아 왕징웨이 정권 크로아티아 독립국 핀란드 나치 독일 헝가리 자유 인도 이라크 이탈리아 (1943년 9월까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일본 만주국 필리핀 제2공화국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태국 비시 프랑스 (무장 중립) 레지스탕스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체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독일 그리스 홍콩 인도 이탈리아 일본 유대인 한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반공 레지스탕스) 루마니아 태국 소련 슬로바키아 서부 우크라이나 베트남 유고슬라비아 연표전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1939년 폴란드 침공 가짜 전쟁 겨울 전쟁 아드리아 해 전투 대서양 전투 1차 창사 전투 중국 동계 공세 1940년 노르웨이 전역 베저위붕 작전 룩셈부르크 침공 네덜란드 전투 벨기에 전투 프랑스 공방전 2차 콩피에뉴 휴전 영국 본토 항공전 서부 사막 전역 서아프리카 전역 영국령 소말릴란드 소련의 발트3국 점령 소련의 몰도바 점령 인도차이나 침공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컴퍼스 작전 1941년 동아프리카 전역 유고슬라비아 전선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공방전 크레타 전투 영국-이라크 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계속 전쟁 리투아니아 6월 봉기 시리아-레바논 전역 키예프 전투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 레닌그라드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세바스토폴 포위전 진주만 공격 홍콩 전투 필리핀 전역 2차 창사 전투 말레이 전역 보르디노 전투 1942년 버마 전역 3차 창사 전투 마다가스카르 전투 자바해 해전 산호해 해전 가잘라 전투 미드웨이 해전 청색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디에프 기습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과달카날 전역 횃불 작전 1943년 튀니지 전역 쿠르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솔로몬 제도 전역 시칠리아 침공 드네프르 전투 2차 키예프 전투 이탈리아 침공 카시빌 휴전 길버트·마셜 제도 전역 창더 전투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 / 싱글 작전 나르바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템페스트 작전 대륙타통작전 오버로드 작전 해왕성 작전 노르망디 상륙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 바그라티온 작전 리비우-산도메시우 공세 타넨베르크 선 전투 바르샤바 봉기 이야시-키시네프 공세 베오그라드 공세 파리 해방 용기병 작전 고딕 선 마켓 가든 작전 탈린 공세 석궁 작전 혼성폭격기 공세 라플란드 전쟁 부다페스트 공세 레이테 만 전투 벌지 전투 보텐플라테 작전 필리핀 전역 버마 전역 1945년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이오 섬 전투 독일 본토 침공 오키나와 전투 1945년 봄 이탈리아 공세 시르미아 전선 베를린 공방전 프라하 공세 부다페스트 공방전 서후난성 전투 빈 공세 독일의 항복 유럽 전승 기념일 승리의 날 훌라 계획 만주 전략공세작전 마닐라 전투 보르네오 전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쿠릴 열도 상륙 작전 슘슈 섬 전투 다운폴 작전 일본의 항복 대일 전승 기념일 양상일반 항공전 전격전 장군 계급 비교 암호 외교 역사 국내 전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무기 대여법 맨해튼 계획 훈장 군사 장비 군수 산업 나치의 약탈 기술 연합국의 협력 총력전 전략폭격 1943년 벵골 기근 1942년~1943년 중국 기근 종속국 여성 예술 여파 독일인 추방 페이퍼클립 작전 오소아비아힘 작전 킬하울 작전 독일의 연합군 군정기 독일의 영토 변화 소련의 점령 지역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소련의 발트 점령 연합군의 일본 점령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냉전 탈식민지화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대중 문화 전쟁 범죄 연합국의 전쟁 범죄 소련의 전쟁 범죄 영국의 전쟁 범죄 미국의 전쟁 범죄 독일의 전쟁 범죄 (강제 노동) /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홀로코스트 여파 국제적 반응 뉘른베르크 재판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 일본의 전쟁 범죄 731 부대 극동 국제 군사 재판 크로아티아의 전쟁 범죄 세르비아인 유대인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전쟁 성범죄 독일군 위안부 수용소 위안부 일본 점령 기간의 강간 위안부 난징 대학살 기간의 강간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프랑스 해방 기간의 강간 폴란드 해방 기간의 강간 포로 소련의 핀란드인 포로 소련의 독일인 포로 미국의 독일인 포로 소련의 이탈리아인 포로 소련의 일본인 포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일본인 포로 독일의 소련인 포로 학대 소련의 폴란드인 포로 소련의 루마니아인 포로 분류 · 위키프로젝트 위키낱말사전 · 위키책 · 위키인용집 · 위키문헌 · 위키공용 · 위키뉴스 vdeh 파시즘 이론핵심 교리 국민주의 제국주의 권위주의 반민주주의 전체주의 일당제 독재 사회진화론 사회개입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족 선전 우생학 영웅주의 군국주의 경제개입주의 반공주의 주제 정의 경제 이념 전세계의 파시즘 상징주의 개념 능동관념론 계급협조론 협동조합주의 영웅자본주의 국가사회주의 국민생디칼리슴 국민자본주의 초자본주의 제3의 위치 전체주의 사회질서 변종 이탈리아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팔랑헤주의 영국 파시즘 오스트로파시즘 메탁사스주의 국민급진주의 일민주의 렉스주의 교권적 파시즘 군단주의 천황제 파시즘 정당, 조직, 운동아프리카 회의사 오제바브란트바흐 아시아 남의사 백의사 동방회 사쿠라회 가나프당 브리트 하비리오님 북서유럽 알티리 너 하셰리 흑색전선 육군전우협회 브르타뉴 사회국민노동자운동 영국 파시스트 영국 인민당 영국 파시스트 연합 르 카골레 교권인민당 르 페소 플랑드르 국민연합 드블라그 프랑스 대중당 네덜란드 파시스트 총동맹 제국 파시스트 동맹 라푸아 운동 국민연합 국민협조당 녹의사 국민 파시스트 국민당 국민사회주의 블록 국민사회주의 네덜란드 노동자당 국민사회주의 동맹 네덜란드 국민사회주의 운동 노르웨이 국민사회주의 운동 국민사회주의 노동자당 신당 애국인민운동 천둥십자당 렉스당 중앙유럽 화살십자당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당 조국전선 헝가리 국민사회주의자당 국민전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주데텐 독일인당 남유럽 알바니아 파시스트당 민주 파시스트당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팔랑헤 그리스 국민사회주의당 이탈리아 파시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메탁사스주의 국가 파시스트당 국민연합 공화 파시스트당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동유럽 불가리아 국민사회주의 노동자당 루마니아 십자군당 철위대 국민급진기지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파시스트 국민운동 이탈리아-루마니아 국민문화경제운동 국민사회운동 국민급진기지 팔랑가 루마니아 국민 파스키오 국민부흥전선 불가리아 국민성 진보를 위한 전사단 루마니아 전선 러시아 파시스트당 러시아 여성 파시스트운동 슬로바키아 인민당 불가리아 국민군단연합 블라이카 북미 캐나다의 파시즘 캐나다 파시스트 연합 국민연합당 금의사 독일계 미국인 동맹 은의사 남미 라틴아메리카의 팔랑헤주의 브라질 통일주의 볼리비아 사회주의 팔랑헤당 칠레 국민사회주의운동 혁명연합 관련자 압바 아히메이르 니미오 데 안퀸 아라키 사다오 마르 오기어 모리스 바르데체 자크 베노이스트메칭 앙리 베로 졸탄 보소르메니 주세페 보타이 로베르 브라지야크 알퐁스 드 샤토브랴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구스타브스 켈민슈 엔리코 코라디니 카를로 코스타마그나 리하르트 발터 다레 마르셀 데아 레옹 드그렐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 고트프리트 페더 지오반니 젠틸레 요제프 괴벨스 한스 프리드리히 카를 귄터 하인리히 힘러 고노에 후미마로 아돌프 히틀러 기타 잇키 이사키 비흐토리 코솔라 아고스티노 란실로 디미트리예 료티치 레오폴도 루고네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로베르트 미헬스 오즈왈드 어날드 모즐리 준남작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인 오더피 가로드 오 키나간 세르지오 파눈치오 지오반니 파피니 안테 파빌리치 윌리엄 더들리 펠레이 알프레트 플뢰츠 로베르 폴레 비드쿤 크비슬링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뤼시앵 레바테 디오니시오 리드루에호 알프레도 롯코 콘스탄틴 로드자엡스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플리니우 사우가두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 마르게리타 사르파티 카를 슈미트 아르뎅고 소피치 오트마어 슈판 우고 스피리토 살러시 페렌츠 곤살로 토렌테 발레스테르 조르주 발루아 아나스타시 바사츠키 안호상 염동진 박정희 문헌단행본 《파시즘의 교리》 《파시스트 선언》 《파시스트 지식인 선언문》 《나의 투쟁》 《오스월드 모슬리 자서전》 《20세기의 신화》 《히틀러 제2서》 《러시아 파시스트의 유언장》 정기간행물 국가의 정복 다스 라이히 데어 앙그리프 독일일반신문 노르웨이 독일일반신문 네덜란드 독일일반신문 Figli d'Italia 프론텐 간디레아 청년 파시스트지 나는 어디에나 있다 작업 중의 프랑스 뮌헨 베오바흐터 노보프레스 월간 NS 노르웨이-독일 저널 흑군단 데어 슈튀르머 이탈리아 인민 스파르머피아트러 지크날 블라이카 푈키셔 베오바흐터 우리의 길 파시스트 르알바 영상물 《신념의 승리》 《의지의 승리》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 관련 주제 나치 예술 파시스트 건축 영웅사실주의 나치 건축 나치즘과 영화 나치의 예술품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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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85061515 GND: 4073091-8 NDL: 0111132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홀로코스트&oldid=24179693" 분류: 홀로코스트독일의 역사반독 감정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4년 4월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4년 5월인용 오류 - 날짜CS1 - 폴란드어 인용 (pl)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인용 오류 - URL 없이 확인날짜를 사용함히브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이디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인용 오류 - 외부 링크인용 오류 - 보이지 않는 문자CS1 - 독일어 인용 (de)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کوردی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हिन्दीFi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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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홀로코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대인 대학살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다른 뜻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히브리어: השואה, 이디시어: 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1]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2]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3]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4] 목차 1 어원과 개념 2 특징 2.1 전국가적 동조 2.2 배경 사상과 규모 2.3 집단 학살 수용소 2.4 생체 의학 실험 3 발달과 실행 3.1 유래 3.2 법적 탄압과 이주 3.3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1938) 3.4 재정착과 강제추방 3.5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 3.6 게토(Ghetto)(1940-1945) 3.7 유대인 대학살(1939-1942) 3.8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 3.9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 3.10 반응 3.10.1 독일의 대중 3.11 동기 3.12 집단 학살 수용소 3.13 가스실 3.14 유태인의 반발 3.14.1 - 저항의 정의와 평가 3.14.2 -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 3.14.3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 3.15 절정 3.16 죽음의 행군(1944-1945) 3.17 해방 4 피해자와 사망 통계 4.1 유태인 4.1.1 국가별 4.1.2 이디시어(Yiddish)에 대한 영향 4.2 비유태인 4.2.1 슬라브인 4.2.2 폴란드인 4.2.3 서부 슬라브인 4.2.4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브인 4.2.5 동부 슬라브인 4.2.6 소련 전쟁 포로 4.2.7 집시 4.2.8 유색인종 4.2.9 신체장애인/정신장애인 4.2.10 동성애자 4.2.11 좌익분자 4.2.12 프리메이슨 4.2.13 여호와의 증인 5 각주 6 같이 보기 7 참조 문헌 8 외부 링크 어원과 개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홀로코스트의 명칭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특징[편집] 2007년 국경(점선) 기준의 강제 수용소 위치 지도. 전국가적 동조[편집]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4]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5]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6]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6] 배경 사상과 규모[편집] 다른 학살들의 경우, 학살 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 사항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 (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는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태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태까지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 정작 실행은 매우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7]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는 것을 꼽았다.[8]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9]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10]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11]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12] 집단 학살 수용소[편집] “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 — 아돌프 히틀러[13]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14] 생체 의학 실험[편집]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15]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16]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17]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17] 발달과 실행[편집] 유래[편집]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18]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19] 1895년, 옛 독일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20]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21]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21]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22]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23]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24]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25]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26]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27]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28]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29]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적 탄압과 이주[편집] 나치 지도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 나치정책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이다.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과 도덕적인 적으로는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상습범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의 목적은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30]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31]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32]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었다.[33]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34]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35]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34]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36]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37]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38]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39]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성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월터 벤자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옹 페츠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월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월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램퍼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40] 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더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41]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맥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 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 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41]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1938)[편집]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쉘 그륀스판(Herschel Grünspan)은 파리에서 독일 나치의 외교관 에른스트 봄 레이스를 암살했다.[42]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물리적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였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42]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회당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43]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42]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부르크(Oranieburg),[44]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45]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 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42]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42] 재정착과 강제추방[편집] 전쟁 이전 나치는 유럽으로부터 독일 유대인을 대량 강제추방하는 것을 고심하였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사흐트 계획이 필요 없어지질 때까지 수 천명의 유대인 강제추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국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이치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스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 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 달러를 수송했다.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편집] 제 3제국의 시작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감금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 50%에 육박하는 사망률을 보이긴 했지만, 그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곳으로 설계 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에 오직 많은 학살만을 위한 6개의 대규모 집단 처형장이 세워졌다.) 1939년 이후, 많은 수용소가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는 장소로 변했다. 15,000개의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독일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동부 유럽에 위치했다. 독일 내에도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공산당원 혹은 로마와 신티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수용소가 많이 세워졌다. 수감자들을 화물차에 태워 이송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도착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려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역을 통한 학살은 구조적인 학살정책이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일을 하거나, 체력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독가스에 의해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노역은 전쟁용품 생산에 사용되었다. 허락 하에 몇몇의 수용소는 수감자의 몸에 수감번호를 새겼다. 이것은 12시간에서 14시간을 교대로 일을 하게 하는데 편리했다. 노동 전후로 점호가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게토(Ghetto)(1940-1945)[편집] 폴란드 침공이후, 나치는 편입된 영토에 유대인이 제한된 게토와 일반정부를 설립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이것들은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밝혀진 것처럼, 그러한 추방은 일어나지 않았고 게토의 주민들은 대신에 학살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인들은 각각의 게토에 유대인들의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Judenrat)에 의해 운영돼야 된다고 지시했고 그러한 위원회의 설립을 첫 번째 주문은 하이드리히(Heydrich)에서 특수행동부대(Einsatzgruppen)의 상부에 1939년 9월 29일 편지에 포함되었다. 게토는 다른 시간들과 다른 이유들로 형성되었고 외부세계로부터 베제되었다. 그 위원회들은 게토를 매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살 곳, 의료, 난방, 물, 음식의 배급문제들을 포함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위원회에 몰수시작, 강제 노동구성, 마지막으로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운영회의 기본적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치정권 또는 그 대행자이 주로 협력하였다. 점점 더 끔찍한 협정 뇌물수수와 청원을 받아들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한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위원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숨을 제공했다.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되어야 할 추방자들의 이름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주된 패턴은 이 마지막 과제를 준수하는 것이었지만, 몇몇 위원회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떤 한 사람도 넘겨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Lviv) 그리고 요제프 파르나스(Joseph Parnas)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 1942년 10월 14일에 부아로짜(Buaroza)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을 협력하는 대신에 자살했다. 1942년7월 23일에 바르샤바에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ow)는 마지막으로 게토가 청산되어 그가 다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자살했다. 차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와 같이 독재자에게 헌신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는 살 수 있는 유대인들은 살리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는 독일에서도 유지되었다. 한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권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지시를 복종하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인 전투기관이 위원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협력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인들은 통제를 잃게 됐다. 바르샤바 게토는 380,000명의 인원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0,000명의 인원으로 2번째로 컸다. 요컨대 느리고 수동적인 살인자인 미하엘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에 따르면 그곳은 거대하게 북적이는 감옥이었다.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그 곳은 폴란드 수도지역의 2.4% 만을 차지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43,000명 이상의 거주자들은 1941년에 그곳에서 죽었고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10분의 1이상이 죽었으며 1942년에는 그 거주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다. "독일인들은 경찰이 되었고 그들은 집들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유대인은 나가(Raus, raus, raus, Juden raus)”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녀의 손에 오줌을 누어서 그 아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음료로 주었다. 그 경찰이 갔을때 나는 그 엄마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죽어있었고, 다른 엄마는 그녀 자신의 아이를 기절시켜 죽였었다." - 아브라함 말릭(Abraham Malik)이 코브노(Kovno) 게토에서 경험을 저술한 것에서.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의 시작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3일 후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300,000명에 사람들이 바르샤바로부터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수용소까지 화물기차로 수송되었다. 많은 다른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첫 번째 빈민가 폭동은 남동 폴란드 라크바(Łachwa)의 작은 마을에서 1942년 9월 발생했다. 1943년 무장저항 시도는 바르샤바 게토봉기와 비알리스토크(Białystok) 빈민가 반란과 같이 큰 게토들에 의해 발생했지만 모든 경우 그들은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유대인 대학살(1939-1942)[편집] 지역의 인구에 의한 수많은 치명적인 학살은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는 자발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의 학살을 포함하는데 그 학살은 14,000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다. 또한 1941년 7월의 실크 프로그램(Jedwabne pogrom)을 포함하는데 이는 나치 질서경찰(Nazi Ordnungspolizei)가 있는 데서 300명 유대인이 불 난 헛간에 잠기게 되는 사건이다. 독일인에 의해 같은 곳에서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다. 이것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에 의해 조사된 두 개의 무덤에 있는 피해자의 숫자로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 의해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 최종 발견되었다. 소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편집] 1939년 12월의 시작과 함께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다중 살인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였다. 첫째로, 가스 실린더를 장착한 실험용 가스차(gas van)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는 T-4 작전(나치의 인종정책 일환으로 안락사를 이용한 장애인 학살 계획)의 일환으로써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선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가스차가 실린더 대신 엔진의 배기가스를 이용하면서 1941년 11월부터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들은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Chełmno extermination camp)에 소개되었고 그것 중 15대는 점령된 소련에서 대량살상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는 국가보안본부(SS-Reichssicherheitshauptamt)의 감독 아래에서 개발되었고 운영되었다. 또한 대략 50만명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가스차는 신중하게 감독받았고 한달 동안의 관찰 후의 한 기록에서는 “기계에 어떠한 결함도 나타나지 않고 세 대의 가스차를 이용하여 9만7천번이 진행되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새로운 다중 살인 기법의 필요성은 군사정부의 통치자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한스 프랑크는 다수의 사람들을 간단히 쏘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방법으로 설계된 단계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나치친위대(SS)가 독성 가스를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살인이 동반된 실험을 하게 만든 문제였다.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는 가스방을 발명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입니다. 반제 회의는 반제의 베를린 교외에서 1942년 1월 20일에 라인 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유대인 문제 와 관련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국가 사무총장, 고위 관리, 파티의 리더, SS 장교와 정부 부처의 다른 지도자의 숫자를 포함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정책 회의의 초기 목적은 유럽안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방법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유럽내 유대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양한 점령 지역에서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을 위한 지식과 책임을 모두 공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에 의해 그려진 분의 사본은 살아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그것들은 "완곡 어법 언어"로서 쓰여졌다. 따라서 회의에서 사용 된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에 유대인 철수 정책에 의해 추방을 나타내는 회의는 대체되었다고 연설했다. 이는 독일에 의해서 통제 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나머지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에 사는 11만 유대인들을 포함하는 임시적인 해결방법에서 궁극적인 해결방법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최종 해결책'의 문구에 의해서 이해되도록 분명히 했다.” 최종해결책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이다. 관계자는이 200만은 여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230만 유대인은 일반정부, 850,000은 헝가리에, 다른 점령 국가에서 110만, USSR에서 안에 오백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 총 약 650만. 이들은 모두 거의 모두가 한번에 가스로 죽을 폴란드에 있는 학살 수용소 (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 될 것이다. 괴링의 대표, 박사 에리히 노이만은 산업 노동자들의 몇 가지 클래스에 대한 제한된 면제를 받았다. 반응[편집] 독일의 대중[편집] 그의 1983 책, 대중의 의견과 제 3제국의 정치적 반대에서, 이안 커쇼는 나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Alltagsgeschichte (일상 생활의 역사)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의 태도를 묘사하면서, 커쇼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이 쇼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에” 관한 전챙에 대해서는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이 증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관심에 의해 길이 닦였다"고 비유했다. 대부분의 바바리아, 그리고 함축적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쇼아에 무관심 있다는 커쇼의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Kulka, 나치 독일의 여론에 대한 전문가 및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 정도를 경시했다고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자연스러운" 반유대주의가 행해지고 있다고 인정할 지라도 이러한 작업은 독일의 상당한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단독으로 오는 것으로서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Kulka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커쇼가 그들을 대중의견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오히려 "무관심", "수동적인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더 나은 용어가 될 수 있다. 나치정권에 반대 하는 유대인들 또는 독일인들에 관한 관점으로만 연구를 집중 시키면, 나치 독일의 역사 학자 크리스토프 디퍼가 그의 1983년 에세이 "Der Deutsche Widerstand und die Juden" (영어로 번역하면 “독일인의 정황과 유대인들” Yad Vashem의 저서 16권, 1984)에서 반 나치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반유대주의라고 주장했다. 디퍼는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관료적인 것과 의사 법적 박탈이 1938년에 여전히 받아들여질때까지 행해졌다고” 썼다. 디퍼는 어떠한 독일 저항자들도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고 쓴 적이 없었지만 그는 또한 민족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에 의해 그들의 계획이 엎어지고 나서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회복시킬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디퍼가 정권의 상대방에 의해 세워진 관점에서 보면 독일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 문제는 존재했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베를린에 다양한 기능의 3,000개의 수용소가 있고 또 다른 1,300개가 함부르크에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것의 공동 연구원은 독일 인구는 그러한 유행을 고려하면 박해에 대해 알고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Gellately는 대부분의 독일 민간인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Gellately에 따르면, 정부는 언론과 민간인을 통한 음모는 가스 챔버의 사용을 제외한 모든 측면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어떤 역사적 증거는 홀로 코스트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전의 강제 수용소에 추방당했고, 그들을 기다려온 운명을 알지도 못했고 거부 할 수도 없었다. ;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이 다시 정착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기[편집] 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어떠한 강압적인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46] Buchheim은 범죄나 다름없는 그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다고 저술하며,[46]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47]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46]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48]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49] 후일 Stanley Milgram은 Milgram Experiment를 통해서, 응집력이 강력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은 이에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이에 큰 영향을 받은 Browning은 위의 101부대의 사례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나 동류집단 압력(peer groop perssure)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 트라브니키 간수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50] 사학자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51] 그리고 Kudryashov는 이들이 대개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52]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는 관심도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52]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53] 이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트라브니키(Trawniki)는 물론이고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보프(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51][54] 집단 학살 수용소[편집] 각 수용소별 개략적인 사망자 수[55] 수용소 사망자 좌표 주석 Auschwitz II 1,000,000 북위 50° 2′ 9″ 동경 19° 10′ 42″ / 북위 50.03583° 동경 19.17833° / 50.03583; 19.17833 (Oświęcim (Auschwitz, Poland)) [56][57][58] Belzec 600,000 북위 50° 22′ 18″ 동경 23° 27′ 27″ / 북위 50.37167° 동경 23.45750° / 50.37167; 23.45750 (Belzec (Poland)) [59][60] Chełmno 320,000 북위 52° 9′ 27″ 동경 18° 43′ 43″ / 북위 52.15750° 동경 18.72861° / 52.15750; 18.72861 (Chełmno (Poland)) [61][62] Jasenovac 58–97,000 북위 45° 16′ 54″ 동경 16° 56′ 6″ / 북위 45.28167° 동경 16.93500° / 45.28167; 16.93500 (Jasenovac (Sisačko-Moslavačka, Croatia)) [63][64] Majdanek 360,000 북위 51° 13′ 13″ 동경 22° 36′ 0″ / 북위 51.22028° 동경 22.60000° / 51.22028; 22.60000 (Majdanek (Poland)) [65][66] Maly Trostinets 65,000 북위 53° 51′ 4″ 동경 27° 42′ 17″ / 북위 53.85111° 동경 27.70472° / 53.85111; 27.70472 (Malyy Trostenets (Belarus)) [67][68] Sobibór 250,000 북위 51° 26′ 50″ 동경 23° 35′ 37″ / 북위 51.44722° 동경 23.59361° / 51.44722; 23.59361 (Sobibór (Poland)) [69][70] Treblinka 870,000 북위 52° 37′ 35″ 동경 22° 2′ 49″ / 북위 52.62639° 동경 22.04694° / 52.62639; 22.04694 (Treblinka (Poland)) [71][72]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의 유대인 학살계획(Operation/Aktion Reinhard)을 수행하게 되었다.[73][74] 이중 헤움노(Chełmno)[75]와 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충실한 노동 및 전쟁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학살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의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는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Dachau)나 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수용소의 화물적재램프로 기차가 유대인들을 실어온다. 하루에 한번, 많게는 다섯 번까지 불철주야 실어나른다. 사람들은 유럽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앞서 도착했던 ‘화물’들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이 수라장에 놓인 이들은 - 나는 곧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 열에 아홉은 가스실에 놓일 것이다. — Rudolf Vrba, 1942.8.18에서 1943.6.7까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송램프에서 근무 이러한 집단학살 수용소는 SS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 가스실[편집] 학살에 사용된 가스의 고형이 담겼던 빈 캔들과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전시된 주인잃은 머리카락들 가스실을 구비한 모든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모든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하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지고 여기서 모든 소유품들은 나치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압수되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과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쥐어주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공황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긴 여정으로 인해 갈증을 호소하는 인원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76] 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4년 9월 13일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Rudolf Höss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번에 ‘처분’할수 있었다고 한다.[77]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는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78] 가스실을 감독하던 SS군의관으로 근무했던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79]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78] 잔여가스를 모두 제거하고 시신들을 모두 치우는 등 가스실의 사후처리 작업에는 최대 4시간이 걸렸으며, 화장하기 전 여성의 모발은 잘라내고 치과의사 포로를 이용해 금니들을 적출했다.[80]비워진 가스실의 바닥을 청소하고 벽은 흰색으로 덧칠했다.[79] 이 모든 작업은 유대인 포로 작업반인 Sonderkommando에 의해 수행되었다. 화장터 1과 2의 Sonderkommando는 화장시설의 다락에서 살았고 3과 4는 가스실에서 살았다.[81] 이들에 의해 시신 처리작업이 끝나면 SS대원이 적출된 금니의 개수와 시신의 구강상흔 수를 맞춰보고, 만약 금이 누락된 것으로 간주된다면 해당 포로는 그 자리에서 소각로에 던져졌다.[82] 초기에 시신들은 가스실에서 꺼내져 그대로 깊은 구덩이에 묻혀 석회로 덮혔지만, 1942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의해 다시 꺼내어져 소각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지어진 것들이다.[83] 우리는 트레블링카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많은 개선안을 얻게 되었다. 우선 한번에 2000명을 처분하더라도 200명을 수용하는 10개의 가스실을 쓰던 과거에 비해, 800명과 1200명을 수용하는 2개의 가스실을 운용하게 된 점이다. 따라서 포로의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 검진하는 데에는 SS군의관 2명이면 충분했다. 포로들은 의사를 향해 줄줄이 걸어가고 의사는 그대로 걸어서 통과하는 포로들의 상태를 보고 노동력으로 활용할지 처형할지 즉석에서 판결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냈다. 수용소 아니면 가스실. 물론 유아들은 노동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예외 없이 가스실로 보냈다.트레블링카를 통해 우리가 이룩한 또 다른 개선은 포로의 안정이었다. 트레블링카에서 포로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포로들이 그러한 자각을 하지 못하도록 속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다. 물론 가끔씩 그들이 우리의 진의를 알아채고 자잘한 말썽을 부리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여성들은 치맛자락에 아이를 숨겼지만, 발견하는 즉시 남김없이 가스실로 보냈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린 언제나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해야 했지만, 당연하게도 반복적인 소각으로 퍼지는 악취와 구역질나는 시체 탄내는 근방 지역에 완전히 배어버렸고, 주민들까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챘다. — Rudolf Höss의 뉘른베르크 증언[84] 유태인의 반발[편집] - 저항의 정의와 평가[편집] 바르샤바 게토 봉기(1943.1)체포되어 방공호에서 강제로 연행되어나가는 유대인들 -Heinrich Himmler에게 보고된Jurgen Stroop의 Stroop Report에서 나치의 학살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의 반응은 거의 완벽한 무저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실제로 넘쳐나는 나치독일의 프로파간다 자료와는 달리, 유대 공동체의 자체적인 저항운동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당시 유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유대인들은 저항기구 수립이나 무장 활동에 대한 계획 자체가 없었고, 심리전에 대한 대비조차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었다. ...유대인과 관련한 독일군 측 사상자 자료를 분석해 보면, 유대인의 조직적인 무장저항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히려 독일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사회의 순종적인 참여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나마 각 지역 Resistance 등에 산재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활동을 벌이던 유대인들은, 동족들이 집단적인 무력감과 타성에 빠져 순순히 나치의 명령에 이끌리는 것을 경고하며 “도살자에 이끌려가는 양떼가 되지 마십시오” 라고 호소하고 다니곤 했다. ...두 집단학살 수용소를 관리했던 Franz Stangl은 전후 서독 감옥에 투옥되고 받은 인터뷰에서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과 그 처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나그네쥐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자신들이 어디를 가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집단적으로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이 쥐들에게서 트레블린카 수용소에 바글거리던 그들이 겹쳐 보였다.'[85]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Raul Hilberg Peter Longerich 역시 막대한 연구 끝에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지었다.[86] Hilberg는 이러한 순응적인 태도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유대인들은 수세기동안 단순히 압제자들에게 애원하기만 할뿐, 명령에 복종하며 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 피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이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박해를 받는 시기에는 항상 수많은 피해를 받았지만, 마치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와 같이 다시 재기하곤 했으며 사실상 이들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반복되어온 순종의 역사가 각인시킨 타성 속에 갇혀버린 셈이다.'[87] 하지만 Yehuda Bauer를 비롯한 동료 사학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물리적 항쟁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취한 모든 종류의 행동들까지 포함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유대인들은 모든 게토, 강제송환 열차, 강제 수용소와 심지어 가스실 앞에서까지 온갖 형태로 저항을 표시했다. 조악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자들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저항의 뜻을 밝히는 자들, 그리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짜내는 자들, 이 모든 행동들은 나치독일이 자신들의 죽음을 조소와 함께 감상하는 것만은 용인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이중에서 무위와 순종이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잔인무도한 폭력 앞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숭고한 저항이었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 속에 확정된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인간으로서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 애쓰고,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는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아 고문기술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저항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이들의 순응과 죽음은 전범재판에서 나치독일의 잔인무도함을 고발하는 가장 강렬한 증거가 되었다. 인간정신의 승리였다." -The Holocaust: The Jewish Tragedy, Martin Gilbert[89] 한편 Hilberg는 위에 인용된 Gilbert의 평가처럼 과잉되고 범위조차 명확치 않은 정의를 통해 유대인 저항을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흐름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평범하거나 순수했던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게 되어버린 케이스처럼 개인적이고 흔치않은 사례들을 당시의 보편적인 사례로 과장한다면 우리는 정작 나치독일이 취한 정책의 특성과 의도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흔치 않거나 소규모의 개별적인 사례들을 당시의 시대상인 양 포장하면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의 의의와 기본성격까지도 왜곡시켜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저항의 정의를 끝없이 확장하고 사례들은 과장하다보니, 오히려 실제로 실행되었던 저항다운 저항운동들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대로 간다면 영웅적 정신은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과 그 공동체들의 기본 소양으로 치부되어버리고, 정작 저항을 행동에 옮겼던 소수 유대인들의 진정한 용기는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사회의 이러한 ‘순응하는 대다수와 행동하는 극소수의 혼재와 불통’을 단순히 문제해결 과정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맹탕 공동체로 치부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이 구조는 사실상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생산적인 질문과 대안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는 곧 공동체 스스로 추론능력과 생존전략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를 외면한다면, 유대인의 역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90] -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편집] 연행되어온 유대인 레지스탕스, 바르샤바 게토, 1943 물론 무력저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독일군에 붙잡힌 유대계 소련군 전쟁포로, 1941.8월대전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91][92]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93]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94]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 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95]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 앞에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그들은 언제나 저보다 위험한 임무들을 도맡아 수행했습니다. — Pieter Meerburg, 레지스탕스 생존자[96] 그리고 14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이들은 각각 50만은 공산권의 붉은 군대에, 55만은 미군에, 10만은 폴란드군, 3만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97] 특이하게도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편집]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면서 어수선해진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들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됐고, 6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중 40명만이 종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를 포함한 600여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버(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1명의 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되고 나서는 중화기까지 동원한 수용소 측의 공격으로 3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되었다. 그나마 탈출한 인원의 대다수도 수용소를 둘러싼 지뢰밭을 통과하진 못하고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이들 중 60여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년 뒤, 1944년 8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수감자들이 인근 공장에서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3명의 간수가 살해되었고 이중 하나는 오븐 속에 구겨진 채 발견되었다. Sonderkommando들은 이어서 바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전원 사살되었다. 사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저항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었지만, 그들 역시 강제이주라는 명분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탈출과 협상, 공무 방해와 때때로는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나치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이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노리고, 오히려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구성원들의 복종을 강제하게 유도했다. 이 계획의 대표적인 타겟조직이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였다. 나치는 이들에게 유대인 권익보호와 시오니스트에 대한 지원책 등 거짓 공약을 제시해, 이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하고 희생자를 더욱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대인들은 2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박해받으며, 저항은 구원이 아닌 죽음을 몰고 온다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왔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 속에서 그들의 논리와 전승, 문화와 사회구조, 언어까지도 타협과 설득, 애원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거기에 저항과 대결의 자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Paul Johnson, 작가 및 사학자[98] 절정[편집]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어 SS소속 장성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RHSA(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감수 아래, 그는 최종 해결법(유대인 말살계획)을 착실히 전개해나가며 1943년부터 1년간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데 전념했다. 유대인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99] 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100] 1944.8.20-22, 헝가리 부다페스트.붙잡힌 유대인 여성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최종 해결법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히믈러가 얼마나 이 소명에 미쳐있었는지는 나치 고위당원들의 공식 집회에서 한 연설의 녹취록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저는 일생일대의 난제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와 이토록 가까이 마주앉은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거나, 혹은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분도 있을것 입니다. 그 문제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중략) 이제부터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부디 여러분 이외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중략)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이들에게 처자식이 있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결국 이 자리에 와서야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저는 이것들을 박멸하는데 있어서 후환이 남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후환이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것들을 멸종시키기 위해서 약간은 꺼림칙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 하인리히 힘러, 1943.10.4. 폴란드 포젠의 나치 고위당원 모임에서 1944,봄. 체코 동부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최종 해결법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슈페어는 재판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101]라고 선언했다. 1944년 봄,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해서야 학살의 규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 문제로 마찰이 빈번하던 헝가리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일찌감치 배신의 기미를 파악하여 3월 19일에 선제공격했다. 공격 하루 전,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헝가리의 섭정이자 제독인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었다. "헝가리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난민으로 인해 폭증한 유대인 인구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102] 마침내 점령이 완료된 헝가리에서 80만의 유대인들이 대량학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세 달에 걸쳐 40만명 전부 살해되었다. 수용소장 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이후 전범재판에서 이 사실을 자백했다. -Blood for Goods 협상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작전은 나치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샀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냥 학살하느니 차라리 이들에게 평화로운 정착지를 제공해주는 대신 연합국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라는 제안까지 나왔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관리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100만명과 트럭 1만대 분의 물품을 교환하는 거래를 발의했고, 이에 대해 이스탄불에서 하인리히 힘러와 영국, 유대인 단체의 대리인들이 모여 비공식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 규모의 거래가 제대로 성사 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죽음의 행군(1944-1945)[편집] 1944년 중순 쯤 되었을 때 “최종 해결법(Final Solution)"은 거의 실행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나치 정권에게 접근이 용이하였던 유태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말살 당하였는데, 프랑스는 약 25%가 제거된 반면 폴란드는 파괴된 공동체 비율이 약 90%에 달하였다. 나치 친위대장 하임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5월 5일 연설에서 ”독일과 독일 점령지 내의 유태인 문제는 전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103] 1944년에는 이 임무가 점차 어려워졌는데, 독일군이 러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전투에서도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 연합군은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의 공습과 게릴라 전투는 독일군의 철도 운영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기차의 일부를 죄수 운송에 쓰는 것에 할애하는 데에 대한 독일군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 소련군이 점점 진격해오자 폴란드 동쪽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생존해있던 수감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이후에는 실레지아(Silesia)에 있는 Gross Rosen으로-로 이송되었다. 마지막 13명의 죄수-모두 여성이었다-는 1944년 11월 25일 아우슈비츠 II에서 죽임을 당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전면적 죽음(unmittelbar getötet)"을 당하였다고 되어있어, 가스실에서 죽었는지 다른 방법으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104] 암울한 전쟁 형세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가스실은 해체되었고, 화장터는 폭파되었으며, 집단 매장지를 뒤엎고 시체들은 화장시켰다. 또한 폴란드 농부들에게 그 자리에 식물 씨앗을 키우도록 강제하여 그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역 지휘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태인들을 죽이고 또 강제된 “죽음의 행군(Death March)"을 통해 수용소 간 이동을 시켰다.[105] 수 년 간의 폭력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기차역까지 눈발을 뚫고 장거리를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고, 이후 며칠씩 음식 없이 화물열차 안에 갇혀서 운송되었고, 내린 후에 또다시 수용소로 행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즉시 총살되었다. 이 행군 중에 죽은 유태인은 약 2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06] 이러한 죽음의 행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행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9일 전이었는데, 수용소 경비대는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56km 떨어진 Wodzislaw(독일어: Loslau)까지 걸어가게 시켰다.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화물열차를 통해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는데, 여기까지의 행군 도중 약 15,000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해방[편집] 첫 번째 주요 수용소였던 Majdanek 수용소는 진격하는 소련군에 의해 1944년 7월 23일에 발견되었다. Chelmno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0일에 해방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또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7일에 해방되었다.[107] Buchenwald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11일,[108] Bergen-Belsen 수용소는 영국군에 의해 4월 15일,[109] Dachau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29일,[110] Ravensbrück 수용소는 같은 날 소련군에 의해, Mauthausen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5월 5일,[111] Theresienstadt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5월 8일에 해방되었다.[112] Treblinka, Sobibor, Belzec 수용소는 해방되지 못하고 1943년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7군 William W. Quinn 대령은 Dachau 수용소에 대해 “우리 부대는 그 곳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 소리, 악취를 목격하였다. 도저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잔인함이었다”라고 회고한다.[113][114] 소련군에 의해 발견된 수용소들의 대부분은 이미 죄수들을 이송하여 몇 천명만이 살아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되었던 180명의 아이들을 비롯해 7,6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발견되었다.[115] Bergen-Belsen 수용소에서는 60,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영국군 11사단에 의해 발견 되었는데,[116] 13,000여 구의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10,000여 명은 몇 주 후 티푸스나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117] 영국군은 남아있던 수용소 경비대를 시켜 시체를 모아서 집단 묘지를 만들게 하였다.[118] 피해자와 사망 통계[편집] 피해자 사망자수 출처 유태인 590만명 [119] 소련군 전쟁포로 2–3백만명 [120] 폴란드인 1.8–2백만명 [121] 집시 220,000–1,500,000명 [122][123] 장애인 200,000–250,000명 [124] 프리메이슨 80,000–200,000명 [125][126] 슬로베니아인 20,000–25,000명 [127] 동성애자 5,000–15,000명 [128] 여호와의 증인들 2,500–5,000명 [129] 스페인 공화주의자들 7000명 [130]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통계치는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500만 명 유럽 유태인에 대한 큰 규모의 학살을 의미하며,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정확한 정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131] 마틴 길버트의 측정치에 따르면 총 피해자 인원수은 600만 명 이하이며, 당시 유럽 유태인의 78%를 차지하다고 말했다. 티모시 스나이더는 홀로코스트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나눠 보았다. 하나는 독일군이 전쟁했을 때 모든 학살행위이며 하나는 나치가 유태인에 행한 모든 압박행위이다 포괄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인원수는 소련 전쟁포로 200만~300만명, 폴란드인 200만명, 장애인 27만명, 집시 22만명, 프리메이슨 회원 22만명, 슬로베니아인 2만5천명, 동성애자 1만5천명, 여호와의 증인 신도 5천명, 스페인 공화주의자 5천명을 포함하여 총 1100만명이다. 더 넓은 통계범위로 600만 명의 소련 민간인을 포함하게 될 경우 총 사망인원수는 17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유태인학살기념관에서 전시된 수치에 따르면 1500~2000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루돌프 럼멜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된 사람 수를 2100만 명이라고 측정하였으며, 다른 학자의 측정치에 따르면 소련 민간인의 사망 수를 합쳐 26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한다.[132] 유태인[편집] 연속 기획:반유대주의유대인의 역사의 일부 역사 연표 참고자료 발현 학술계 아랍 보이콧 기독교 경제적 가자 전쟁 이슬람 홀로코스트 부정론 이슬람 국가 신반유대주의 급진반유대주의 종교적 반유대주의 이차 반유대주의 세계의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적 유언비어 피의 중상 유대살신설 드레퓌스 사건 성체모독 유대 볼셰비즘 유대인 로비 프리메이슨 음모론 유대세 배후중상설 우물에 독 타기 시온주의 괴뢰 음모론 관련 텍스트 유대인과 그 거짓말에 대하여 유대의 프랑스 시온 장로 의정서 국제유대인 나의 투쟁 제2의 서 흑인과 유대인 사이의 은밀한 관계 터너 일기장 사냥꾼 인터넷의 반유대주의 쥬 워치 스톰프런트 유대인 박해 유대인 추방 유럽 게토 포그롬 필레우스 코르누투스 유대 암퇘지 황색 육망성 스페인 종교재판 종교적 분리 유대인 할당제 홀로코스트 나치즘 반유대주의 반대 UN 워치 명예훼손방지동맹(ADL) 공동체안보신탁(CST) 유럽기본권기관(FRA) 친유대주의 스티븐 로스 연구소 비에너 도서관 남부빈곤법률센터(SPLC) 시몬 비젠탈 센터(SWC) 구소련 유대인 평의조합(UCSJ) 스웨덴 반유대주의 반대위원회(SCAA) 야드바솀 시온주의 분류vdeh 1945년에서 지금까지 흔히 나온 학살을 당한 유태인사망인원수에 대한 측정치는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대학살기념관에 이런 말이 전시되어 있다.[133] 살해를 당한 유태인은 정확하게 통계할 수 없고 문서에서 300만 명의 유태인의 이름을 찾았고 , 유객센터에서 전시되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중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600만 명의 숫자는 당위군 장관을 맡은 Adolf Eichmann가 말한 것이다. 당위군 장관 Wilhelm Höttl의 증사에 따르면 1944년 8월에 Adolf Eichmann가 그한테 6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을 당하고 ,4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나머지 200만 명이 총사나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1953년에 Gerald Reitlinger가 쓴 《최종해결방안》이 피해자인원수에 대해 측정했다. 인원수는 4,200,000-4,500,000 명의 사이이었다. 이외에도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하고 Jacob Lestschinsky측정한 5,950,000인 측정치가 있다. Yisrael Gutman와Robert Rozett가 쓴《유태인대학살백과전서》중에 측정한 사망 인원수는 5,590,000~ 5,860,000명의 사이였다. 베를린 공업대학의 교수 Wolfgang· lBenz 연구한 결과는 피해자인원수가 5,290,000-6,200,000명 사이인 것이다. 이스라엘유태인대학살기념관이 전시된 수치의 근거는 전쟁 전후의 인구통계대조하고 강제송환과 학살의 문서에서 온 것이다.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명의 피해자가 보수적인 측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Raul Hilberg가 찾을 수 있는 사망기록만 참조하면서 측정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유럽유태인의 멸망》제3판에서 800,000명이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임을 당하고, 1,400,000명이 총사로 사망하고 2,900,000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쓰인다. 그는 폴란드 유태인의 사망인수 300만 명에 달한다고 측정했다. Martin Gilbert가 최소 5750000 명의 유태인을 살해당한다고 측정하고, 그 중에 Oświęcim에서 독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죽은 200만 명도 포함이 된다. Lucy Dawidowicz 전쟁 이전의 통계수치를 통해 5,934,000명의 유태인이 사망되었다고 지적했다. 각 강제수용소의 사망인원수가 3800000명을 넘고 그중에 80~90% 모두 유태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유태인이 나치 대학살로 인한 총 유태인피해자인원수의 반에 달했다. 폴란드의 유태인 거의 이런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도 최소 50만 명의 유태인 기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그중에 독일의 몇 개의 주요한 수용소 포함된다. 많은 유태인을 징역하고, 특히 전쟁의 마지막 1년 동안 나치가 폴란드에서 철수한 후, 약 100만 명의 사람이 이런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중에 최소 50%가 유태인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알 수가 없다. 이외에도 80~100만 명의 유태인이 독일이 점령한 구역에서 살해를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영양불량으로 송환되기 전에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었다.[134] 이하 수치는 Lucy Dawidowicz에 의해 제공된 전쟁 전 유럽 국가 내 유태인 인구의 학살을 잘 드러낸 수치다:[119] 국가 전쟁전유태인 인구(추정) 사망인구(추정) 사망비율 폴란드 3,300,000 3,000,000 90 발트해 국가들 253,000 228,000 90 독일과 오스트리아 240,000 210,000 90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90,000 80,000 89 슬로바키아 90,000 75,000 83 그리스 70,000 54,000 77 네덜란드 140,000 105,000 75 헝가리 650,000 450,000 70 벨로루시안 연합 375,000 245,000 65 우크라이나 연합 1,500,000 900,000 60 벨기에 65,000 40,000 60 유고슬라비아 43,000 26,000 60 루마니아 600,000 300,000 50 노르웨이 2,173 890 41 프랑스 350,000 90,000 26 불가리아 64,000 14,000 22 이탈리아 40,000 8,000 20 룩셈부르크 5,000 1,000 20 러시아 연방 975,000 107,000 11 덴마크 8,000 52 <1 합계 8,861,800 5,933,900 67 국가별[편집] 독일 간접 또는 직접 통제된 구역에서 약 800~1000만 명의 유태인이 있었다. 유태인대학살로 피해된 600만 명이 전부의 60%~75%를 차지했다. 폴란드에서 3300000명의 유태인 중에 90% 살해를 당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피해비율이 무려 90%에 달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의 유태인이 다행히 모두 안전하게 철수했다. 1933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는 750,000명 중에 1/4의 생존자만 있었다. 1939년 이전 많은 독일유태인 안전하게 독일을 떠나고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로 도망갔지만, 나중에 여전히 강제송환을 당하여 학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의 유태인 중에 70%가 피해를 받았다. 루마니아, 벨기에, 헝가리의 피해자 비율은 50%-70%에 달했다. 벨로루시하고 우크라이나에서 피해된 유태인 비율이 비슷하지만 정확한 사망자 인원수를 알 수 없다. 유태인피해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는 불가리아,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이었다. 알바니아는 1945년의 유태인인수가 1939년의 인수보다 많아지는 유일한 독일 점령국가다. 약 200명의 토종 유태인과 1000명 이상의 난민이 가짜 신분증을 통해 떠나거나 60%의 이슬람교도 중에서 숨어 있었다. 1990년대 동유럽정부문서가 개방된 이후 Hilberg, Dawidowicz, Gilbert가 사망인원수에 대한 통계수치를 다시 수정했다. Wolfgang Benz가 몇 년 간의 계속 피해자 수를 업데이트를 해 왔고 그는 1999년 이런 말을 했다. “1942년 1월 만호회의에서 제출한 모든 유럽 유태인을 인종청소를 한다는 임무는 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600만 명의 피해자를 죽인 대학살은 이미 인류 역사 상의 가장 큰 폭력이었다. 피해자 인원수는 일일이 알려 주지 못하고 아주 보수적인 측정수치는 이하와 같다. 숫자는 대개 측정한 수치고 이런 잔인한 폭력이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 대학살 피해자 중에 독일에서 165,000명, 오스트리아에서 65,000명, 프랑스하고 벨기에에서 32,000명, 네덜란드에서 10만 명을 넘고, 그리스에서 60,000명, 유고슬라비아에서 사망인원수는 그리스와 같고, 140,000명이 넘는 피해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왔고, 50만 명이 헝가리에서 왔고, 220만 명이 소련에서 왔고, 270만 명이 폴란드에서 왔다. 이외에도 루마니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종족의 피해자인원수(200,000 이상), 그리고 알바니아, 노르웨이,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불가리아에서 피해자 인원수를 더해야 한다." [135] -Wolfgang Benz,《대학살:독일 역사학자 연구하는 대학살》 이디시어(Yiddish)에 대한 영향[편집] 대학살은 이디시어에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 대전이전, 약 1100~1300만 명의 사람들이 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136]대학살은 유태인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종교, 일상생활을 파괴하여 이디시어의 상용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피해자 중에 약 500만 명이(85%)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 이디시어를 쓰지 않은 사람들인 그리스하고 발칸지역에서 쓰는 언어도 파괴되었다. 이러한 ‘유태-스페인어’가 거의 사라졌다. 비유태인[편집] 슬라브인[편집] 1942년 여름에,Heinrich Luitpold Himmler의 《동부전체계획》이(Generalplan Ost)히틀러의 허락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슬라브인을 그들의 고토에서 소멸하거나 유방시키거나 노예로 시킨다는 것이다. 목적은 그 땅에서 독일인이 살도록 할 것이다. 원래 계획은 20–30년의 장기에 걸쳐 추진한 것이다. 작가이며 역사학자인 Doris·L·Bergen 이런 말을 쓰었다. “다른 나치문헌과 마찬가지로 《동부전체계획》이 사용한 어휘가 완곡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근본적인 의도는 분명하다'. 이 계획은 나치독일이 다민족정치관계에 대한 기본방침을 명확히 제기했다. 슬라브인에 대한 학살,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모두 같은 계획의 구성부분이다[137]. 다른 역사학자Williams·W·Hagen 이런 말을 하였다. “《동부전체계획》는 동유럽 인구에 대해 소멸할 인원수까지 예측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폴란드인– 85%;벨라루스인 – 75%;우크라이나인 – 65%;체코인 – 50%, 이러한 거대한 감원하는 규모는 노예로 시키거나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출산통제 등 조치로 달성하겠다는 내용이 있다[138]. Heinrich Luitpold Himmler“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잔인한 인종주의와 편견이고, 2000~3000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태인은 군사적인 조치나 식량부족위기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139]. 폴란드인[편집] 폴란드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고난의 역사였다. 특히 독일은 폴란드의 이웃으로서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넘보았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럽에서 폴란드의 지도를 없애고 독일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140] 그렇게 하여 독일인들을 폴란드 땅에 재정착 시킨다는 생각이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폴란드의 유태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90%이상이 죽임을 당하여 사라졌지만 폴란드의 기독교인들은 잔인한 독일 점령 하에서도 94%가 살아남았다[141]. 1939년 11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인종청소 정책을 수립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폴란드인을 완전히 말살한다는 정책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란드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서부지역의 정부(일반정부라고 부름)는 폴란드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계획에 의하면, 1952년까지 폴란드 서부지역에는 3-4백만 명의 폴란드인만을 남겨놓아 독일인들의 노예로 삼아 부려 먹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들 폴란드인들은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결혼을 금지하며 독일로부터 의료지원을 중지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폴란드인들이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1주일 앞두고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동부지역(폴란드를 말함)에서 폴란드 민족의 후손이거나 폴란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자, 여자, 아이들을 구분하지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군대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래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기간 중에 도합 1백80만에서 2백10만명에 이르는 비유태계 폴란드인이 독일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중 5분의 4가 폴란드 민족이었으며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의 소수민족이었다. 거의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이들 중 최소 20만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그중 14만 6천명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여러 경로로 집단 학살되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봉기 때에 12만에서 20만의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인을 자연소멸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하였다. 예를 들면 철저한 식량배급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주려 죽게 만들었으며 위생시설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전염병 등에 걸려 죽게 만들었고 의료서비스를 중단함으로써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결과,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천 명당 13-18명이었다[142]. 2차 대전의 희생자중 5백 60만 명이 폴란드인이었다. 이에는 물론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도 포함되지만 비유태인도 포함되어 있다. 폴란드는 2차 대전으로 인하여 16%의 인구를 잃었다. 전체 유태인 3백30만 명중 3백 10만 명이 희생되었고 비유태인의 민간인은 3천1백70만 명중 2백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143]. 이들 희생자 중 90%는 전쟁과는 관련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나치 독일도 폴란드인의 청소에 앞장섰지만 후방의 소련도 폴란드인의 제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서부 슬라브인[편집] 리디체 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서부 슬라브인도 마찬가지로 살해를 당했다. 측정한 수치에 따르면 약 345,000명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인들을 살해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144] 나치 독일은 남김없이 리디체를 포함한 마을들을 파괴하고 16세가 넘은 남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치 수용소로 보내고, 여성과 아이들도 리디체를 떠났다. 소르브인도 무참히 학살했다.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브인[편집]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세르비아인 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나치는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발칸에서 58만 1천명의 유고슬라브인을 학살했다.[145][146][147] 이에는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동맹으로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자인 우스타세(Ustase)가 합세하였다. 히틀러는 발칸에서 유고슬라브인을 모두 학살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인간 이하(Untermensch)’라고 표명함으로써 간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나치의 동조자인 유스타세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역 괴뢰정권으로서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주로 야세노바크(Jasenovac)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우스타세 당국은 1941년부터 45년 사이에 크로아티아에 여러 곳의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무슬림(보스니아인), 그리고 가톨릭교도가 아닌 소수민족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물론 크로아티아의 정치범들과 반종교인들도 희생되었다. 니아드 할릴베고비치(Nihad Halilbegovic)가 주도한 최근 연구인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의 보스니아인’(Bosniaks in 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 의하면 약 10만 3천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슬라브인들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나치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운동인 우스타샤에 의해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집시라는 명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동부 슬라브인[편집] 벨라루스 지역이 가장 큰 희생자였다. 나치는 벨라루스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온갖 만행을 자행토록 부추겼다. 결국 9천개의 마을에 불에 탔으며 38만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이송되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Khatyn)과 같은 마을은 마을을 불태울 때에 주민들도 모두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런 마을이 벨라루스에 600개나 있었다. 동구에서 벨라루스로 이전한 슬라브인들이 만든 정착촌은 5,295개소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 정착촌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도합 1백 67만명의 민간인이 3년 동안의 독일 점령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24만 5천명은 유태인으로써 벨라루스 시민들로 구성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에 의해 살해되었다.[148] 소련 전쟁 포로[편집]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초기에 승승장구하여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았다. 독일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은 대략 2-3백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전체 포로들의 57%가 1941-45년간에 굶주림과 학대로, 또는 처형당하여 죽었다.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은 소련군 전쟁포로 중 2백 80만 명이 1941-42년간의 8개월 동안에 죽었으며 1944년 중반까지는 3백3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149]. 이들은 모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생명을 잃었다. 1943년에는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의 사망률이 감소하였다. 이는 상당수 소련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잡힌 소련군 전쟁포로는 도합 23만 1천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8천3백 명만이 죽었다.[150] 집시[편집] 로마니(Romani)와 신티(Sinti)라고도 불리는 집시들은 전통적으로 기록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나치는 집시들이 위생상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성적으로도 문란하다고 생각하여 혐오하였다. 집시들은 아우슈비츠에 끌려 와서도 불결하고 불건전한 생활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순수 아리안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청소키로 결정했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집시의 수는 약 1백만에 달했다. 그중 13만 명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희생되었다. 하지만 미국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의 역사학자였던 시빌 밀튼(Sybil Milton)은 희생당한 집시의 수가 22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유럽에 70만 명의 집시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수는 22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51].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집시에 대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오스틴의 텍사스대학교 집시문제연구소장인 이안 핸코크(Ian Hancock)는 '모르면 몰라도 집시희생자의 수가 유태인희생자의 수와 맞먹을 것'이라고 보았다. 집시들은 집단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오거나 요행으로 게토로 집어넣어 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인자츠그루펜(현지인 나치 동조자)들이 집시들의 야영지를 급습하여 현장에서 모조리 학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나치 점령지의 괴뢰정부들도 집시말살에 한몫을 거들었다. 예를 들면 크로아티아의 괴뢰정부인 우스타세는 집시들을 대거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로 끌고 와서 집단 학살하였다. 1942년부터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동등한 법적 처우를 받았으며 동등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SS 책임자로서 나치 인종청소의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집시 잡종(Mischlinge), 로마니(Romani: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집시), 독일 혈통이 아닌 발칸 출신의 종족들은 이들이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지 않는한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에는 독일에 있는 모든 로마니를 색출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일부 학자들은 집시(로마니)들이 원래는 아리안족이었으나 비(非)아리안족들과의 교합으로 불순한 혈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유색인종[편집] 나치시대에 독일 안에 사는 흑인 약 5000~25000명[152]이 있다. 이 수치는 아시아 사람을 포함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국대학살기념관의 기술에 따르면 1945년 그 쪽의 흑인들이 격리, 살해, 생체실험, 징역, 폭력을 모두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태인을 멸종시키는 것처럼 체계적인 학살을 안 했다. 이외에는 아프리카너, 베르베르인 ,이란인 , 인도인을 아리아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압박을 당하지 않았다. 돌궐족, 아라비아인, 남아메리카인에 대한 종족의식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153] 그래도 일부는 독일군을 위해 일을 시켰다. 신체장애인/정신장애인[편집] "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식물을 주거나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거나 옷이 없는 사람에게 옷을 제공하는 것에 신경을 안 쓴다. 우리의 목적은 색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꼭 건강한 인간으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 요제프 괴벨스, 1938년.[154] T-4 작전은 1939년부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독일의 유전자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강제로 불임하게 하거나 살해했다. 1939년 ~ 1941년 동안, 나치가 정신병원에서 총 80,000 ~ 100,000명의 정신장애인들을 죽였다. 그 중에 아동은 5,000명이고 유태인은 1,000명이다.[155] 또 다른 측정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200,000명의 정신병자가 사망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숫자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시를 받지 않았다. 많은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들이 실험도구로 사망했다. 독일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1941년 8월 24일 이 프로그램을 중지시켰다, 동성애자[편집]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나치에게 희생당한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호모모뉴먼트(Homomonument) 나치 독일에서는 실질적 범죄 행위보다 범행의 동기나 개개인의 자질 등을 문제시 삼았으며, "gesundes Volksempfinden"(건강한 국민 정서)이 나치 독일의 새로운 규범적 원칙이 되었다.[156] 1936년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을 설립하였다.[157] 곧 동성애는 '건강한 국민 정서'에 반하며,[128] 독일혈통을 더럽히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게슈타포는 게이바를 습격하였으며, 체포한 동성애자의 개인 연락처와 성소수자 신문 및 잡지 등을 이용하여 다른 동성애자들을 추적하였다. 또한 이웃에 동성애자나 동성애자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할 것을 대중에 종용하였다.[128][156] 1933년에서 1944년 사이에 10만여명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었고, 이 중 약 5만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갱생'을 이유로 5천명에서 1만5천여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28] 수용소에서 이들은 초기에 노란색 완장으로 구분되었으나,[158] 성폭행 및 강간의 대상이 되어 나중에는 상의뿐만 아니라 바지에도 착용해야하는 분홍색의 역삼각형 낙인으로 변경되었다.[156] 또한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수백명의 동성애자가 강제로 거세를 당하였다.[159]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들은 성적 모욕과 고문, 생체 실험을 당하며 처형되었다.[128] 홀로코스트에서의 동성애자 피해 연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199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형법상 동성애가 여전히 범죄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156] 좌익분자[편집] 독일공산당원, 사회주의자 또한 공희주의자는 나치들이 독일국 내에서 최초의 적이었으며[160], 최초로 수용소로 옮긴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는 유태인의 학설(学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틀러는 그들이 "유태인의 볼셰비키"라고 언급했다. 1933년, 나치즘들이 반공산주의를 명분으로 전권위임법을 선포했다. 이 법안을 통해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나치들이 독일 공산당을 압박함으로써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독일 엘리트 계급 사람들이 나치즘하고 손을 잡았다. 독일 좌파의 많은 리더들이 유태인 출신이다. 유태인 출신 리더들이 1919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단 혁명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맑시스트하고 볼셰비키들이 “국제적 유태인”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이 ”종족의 순결성”과 북유럽사람의 생활을 파괴했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사회계급간에 모순되어 반정부세력들이 수용소에서 독일공산당이 유태인보다 많은 특권을 누렸다. 바로 공산당들이 유태인 종족보다 더 순결하기 때문이다. 나치즘이 점령한 지역에서 항상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구류를 받거나 처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위원은 독일이 점령한 모든 곳에서 처형한 적이 있다. 특별행동부대가 동부전선에서 이 명령을 실시하였다.[161] 프리메이슨[편집]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이 유대인들에게 복종해 왔고, 상류층들을 자신들의 아젠다로 유혹하는 "뛰어난 도구"[162]였다고 말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독일은 프리메이슨이 아주 큰 위협이라고 여긴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을 불법화했고, 많은 로지lodges들을 폐쇄했다. 많은 형제들Brethren이 체포되었고, 집중 캠프로 보내졌다. 로지에서 훔친 물건들은 그 동업자들을 향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일으킬 목적으로, 독일 전역에서 메이슨 반대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리메이슨들도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도 침략하고 점령한 나라(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그리스 등)에서 나치가 훔쳤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8 만 명의 메이슨들이 유럽 전역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미국대학살기념관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많은 잡힌 프리메이슨 맨버들이 유태인 신분이나 반대파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프리메이슨 신분을 갖고 있는 원인으로 나치수용소에 보내는 사람 수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163]. 여호와의 증인[편집] 약 12,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나치한테 선서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거절해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중 약 2500 ~ 5000명이 살해되었다.[164] 각주[편집] ↑ Eric Lichtblau (2013년 3월 1일). “The Holocaust Just Got More Shocking”. 《The New York Times》. 2013년 3월 2일에 확인함. ↑ Dawidowicz 1975, 403쪽. ↑ Fitzgerald 2011, 4쪽; Hedgepeth & Saidel 2010, 16쪽. ↑ 가 나 Berenbaum 2005, 103쪽. ↑ Berenbaum 2005, 104쪽. ↑ 가 나 Friedländer 2007, xxi쪽. ↑ Bauer 2002, 48쪽. ↑ Maier 1988, 53쪽. ↑ "Holocaust Map of Concentration and Death Camps", History1900s, About.com. 16 June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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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Questions about the Holocaust by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vdeh나치즘단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돌격대(SA) 친위대(SS)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 히틀러 청소년단(HJ) 독일소년단(DJ) 독일소녀동맹(BDM) 국가사회주의 독일학생동맹(NSDStB) 국가사회주의 체육국가동맹(NSRL)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NSF) 혁명적 국가사회주의자 투쟁동맹(KGRNS) 역사 초기 역사 히틀러의 성공시대 마흐터그라이풍 독일의 재무장 나치 독일 장검의 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방공 협정 수정의 밤 제2차 세계 대전 삼국 동맹 조약 홀로코스트 뉘른베르크 재판 탈나치화 신나치주의 이념 파시즘 지도자 원리 군국주의 나치 건축물 강제적 동일화 반민주주의 슈트라서주의 히틀러의 정치관 《나의 투쟁》 《19세기의 기초》 《20세기의 신화》 25개조 강령 신질서 《프로이센과 사회주의》 선전술 종교적 측면 혼합 정치 상징주의 여성정책 나치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 피와 명예 우생학 대게르만국 제국으로의 귀환 레벤스라움 우등인종 나치 독일의 인종정책 민족평등 종교 최종 해결책 강제 수용소 퇴거 강제 의사 재판 절멸 수용소 집단살해 게토 인체실험 노역수용소 대박해 인종 분리 독일 외 미국 나치당 화살십자당 (헝가리) 불가리아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국가사회주의운동 (불가리아) 독일계 미국인 연합 리히텐슈타인 독일민족운동 그레이셔츠 (남아프리카)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루마니아 철위대 민족주의당 (노르웨이) 국가사회주의당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당 스위스 민족주의 운동 국가사회주의 블록 (스웨덴) 국가사회주의 연맹 (영국) 국가사회주의운동 (미국) 그리스 국가사회주의당 국가사회주의 덴마크 노동자당 국가단결당 (캐나다) 오제바브란트바흐 (남아프리카 연방) 목록 히틀러의 저서 이데올로기 총수와 임원 나치 당원 과거 나치 당원 히틀러의 연설 SS 장교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마르틴 보어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아돌프 아이히만 알베르트 슈페어 루돌프 헤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빌헬름 프리크 루돌프 회스 한스 프랑크 요제프 멩겔레 리하르트 발터 다레 발두어 폰 시라흐 에른스트 룀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에른스트 한프슈텡글 헤르만 에세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조지 링컨 록웰 관련 주제 나치즘 밀교 극우 나치 독일의 용어 나치 경례 신나치주의 스톰프런트 볼키스체 운동 스와스티카 사회 진화주의 사회주의 제국당 독일 국가민주당 분류 vdeh제2차 세계 대전유럽 (서부 전선 · 동부 전선) · 지중해·중동 (중동 · 동아프리카) · 아시아·태평양 (동남아시아 · 서남아시아) · 서아프리카 · 대서양 · 북아메리카 · 남아메리카개요 · 사상자 · 군사 장비 · 회담 및 회의 · 지휘관 · 통계참전국연합국(지도자)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중국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에티오피아 핀란드 (1944~45) 프랑스 자유 프랑스 (1940년 6월 이후) 그리스 영국령 인도 제국 이탈리아 (1943년 9월 이후) 전역 룩셈부르크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 소련 영국 미국 푸에르토리코인 유고슬라비아 추축국(지도자) 불가리아 왕징웨이 정권 크로아티아 독립국 핀란드 나치 독일 헝가리 자유 인도 이라크 이탈리아 (1943년 9월까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일본 만주국 필리핀 제2공화국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태국 비시 프랑스 (무장 중립) 레지스탕스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체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독일 그리스 홍콩 인도 이탈리아 일본 유대인 한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필리핀 폴란드 (반공 레지스탕스) 루마니아 태국 소련 슬로바키아 서부 우크라이나 베트남 유고슬라비아 연표전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1939년 폴란드 침공 가짜 전쟁 겨울 전쟁 아드리아 해 전투 대서양 전투 1차 창사 전투 중국 동계 공세 1940년 노르웨이 전역 베저위붕 작전 룩셈부르크 침공 네덜란드 전투 벨기에 전투 프랑스 공방전 2차 콩피에뉴 휴전 영국 본토 항공전 서부 사막 전역 서아프리카 전역 영국령 소말릴란드 소련의 발트3국 점령 소련의 몰도바 점령 인도차이나 침공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컴퍼스 작전 1941년 동아프리카 전역 유고슬라비아 전선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공방전 크레타 전투 영국-이라크 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계속 전쟁 리투아니아 6월 봉기 시리아-레바논 전역 키예프 전투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 레닌그라드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세바스토폴 포위전 진주만 공격 홍콩 전투 필리핀 전역 2차 창사 전투 말레이 전역 보르디노 전투 1942년 버마 전역 3차 창사 전투 마다가스카르 전투 자바해 해전 산호해 해전 가잘라 전투 미드웨이 해전 청색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디에프 기습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과달카날 전역 횃불 작전 1943년 튀니지 전역 쿠르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솔로몬 제도 전역 시칠리아 침공 드네프르 전투 2차 키예프 전투 이탈리아 침공 카시빌 휴전 길버트·마셜 제도 전역 창더 전투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 / 싱글 작전 나르바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템페스트 작전 대륙타통작전 오버로드 작전 해왕성 작전 노르망디 상륙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 바그라티온 작전 리비우-산도메시우 공세 타넨베르크 선 전투 바르샤바 봉기 이야시-키시네프 공세 베오그라드 공세 파리 해방 용기병 작전 고딕 선 마켓 가든 작전 탈린 공세 석궁 작전 혼성폭격기 공세 라플란드 전쟁 부다페스트 공세 레이테 만 전투 벌지 전투 보텐플라테 작전 필리핀 전역 버마 전역 1945년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이오 섬 전투 독일 본토 침공 오키나와 전투 1945년 봄 이탈리아 공세 시르미아 전선 베를린 공방전 프라하 공세 부다페스트 공방전 서후난성 전투 빈 공세 독일의 항복 유럽 전승 기념일 승리의 날 훌라 계획 만주 전략공세작전 마닐라 전투 보르네오 전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쿠릴 열도 상륙 작전 슘슈 섬 전투 다운폴 작전 일본의 항복 대일 전승 기념일 양상일반 항공전 전격전 장군 계급 비교 암호 외교 역사 국내 전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무기 대여법 맨해튼 계획 훈장 군사 장비 군수 산업 나치의 약탈 기술 연합국의 협력 총력전 전략폭격 1943년 벵골 기근 1942년~1943년 중국 기근 종속국 여성 예술 여파 독일인 추방 페이퍼클립 작전 오소아비아힘 작전 킬하울 작전 독일의 연합군 군정기 독일의 영토 변화 소련의 점령 지역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소련의 발트 점령 연합군의 일본 점령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냉전 탈식민지화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대중 문화 전쟁 범죄 연합국의 전쟁 범죄 소련의 전쟁 범죄 영국의 전쟁 범죄 미국의 전쟁 범죄 독일의 전쟁 범죄 (강제 노동) /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홀로코스트 여파 국제적 반응 뉘른베르크 재판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 일본의 전쟁 범죄 731 부대 극동 국제 군사 재판 크로아티아의 전쟁 범죄 세르비아인 유대인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전쟁 성범죄 독일군 위안부 수용소 위안부 일본 점령 기간의 강간 위안부 난징 대학살 기간의 강간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프랑스 해방 기간의 강간 폴란드 해방 기간의 강간 포로 소련의 핀란드인 포로 소련의 독일인 포로 미국의 독일인 포로 소련의 이탈리아인 포로 소련의 일본인 포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일본인 포로 독일의 소련인 포로 학대 소련의 폴란드인 포로 소련의 루마니아인 포로 분류 · 위키프로젝트 위키낱말사전 · 위키책 · 위키인용집 · 위키문헌 · 위키공용 · 위키뉴스 vdeh 파시즘 이론핵심 교리 국민주의 제국주의 권위주의 반민주주의 전체주의 일당제 독재 사회진화론 사회개입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족 선전 우생학 영웅주의 군국주의 경제개입주의 반공주의 주제 정의 경제 이념 전세계의 파시즘 상징주의 개념 능동관념론 계급협조론 협동조합주의 영웅자본주의 국가사회주의 국민생디칼리슴 국민자본주의 초자본주의 제3의 위치 전체주의 사회질서 변종 이탈리아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팔랑헤주의 영국 파시즘 오스트로파시즘 메탁사스주의 국민급진주의 일민주의 렉스주의 교권적 파시즘 군단주의 천황제 파시즘 정당, 조직, 운동아프리카 회의사 오제바브란트바흐 아시아 남의사 백의사 동방회 사쿠라회 가나프당 브리트 하비리오님 북서유럽 알티리 너 하셰리 흑색전선 육군전우협회 브르타뉴 사회국민노동자운동 영국 파시스트 영국 인민당 영국 파시스트 연합 르 카골레 교권인민당 르 페소 플랑드르 국민연합 드블라그 프랑스 대중당 네덜란드 파시스트 총동맹 제국 파시스트 동맹 라푸아 운동 국민연합 국민협조당 녹의사 국민 파시스트 국민당 국민사회주의 블록 국민사회주의 네덜란드 노동자당 국민사회주의 동맹 네덜란드 국민사회주의 운동 노르웨이 국민사회주의 운동 국민사회주의 노동자당 신당 애국인민운동 천둥십자당 렉스당 중앙유럽 화살십자당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당 조국전선 헝가리 국민사회주의자당 국민전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주데텐 독일인당 남유럽 알바니아 파시스트당 민주 파시스트당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팔랑헤 그리스 국민사회주의당 이탈리아 파시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메탁사스주의 국가 파시스트당 국민연합 공화 파시스트당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동유럽 불가리아 국민사회주의 노동자당 루마니아 십자군당 철위대 국민급진기지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파시스트 국민운동 이탈리아-루마니아 국민문화경제운동 국민사회운동 국민급진기지 팔랑가 루마니아 국민 파스키오 국민부흥전선 불가리아 국민성 진보를 위한 전사단 루마니아 전선 러시아 파시스트당 러시아 여성 파시스트운동 슬로바키아 인민당 불가리아 국민군단연합 블라이카 북미 캐나다의 파시즘 캐나다 파시스트 연합 국민연합당 금의사 독일계 미국인 동맹 은의사 남미 라틴아메리카의 팔랑헤주의 브라질 통일주의 볼리비아 사회주의 팔랑헤당 칠레 국민사회주의운동 혁명연합 관련자 압바 아히메이르 니미오 데 안퀸 아라키 사다오 마르 오기어 모리스 바르데체 자크 베노이스트메칭 앙리 베로 졸탄 보소르메니 주세페 보타이 로베르 브라지야크 알퐁스 드 샤토브랴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구스타브스 켈민슈 엔리코 코라디니 카를로 코스타마그나 리하르트 발터 다레 마르셀 데아 레옹 드그렐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 고트프리트 페더 지오반니 젠틸레 요제프 괴벨스 한스 프리드리히 카를 귄터 하인리히 힘러 고노에 후미마로 아돌프 히틀러 기타 잇키 이사키 비흐토리 코솔라 아고스티노 란실로 디미트리예 료티치 레오폴도 루고네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로베르트 미헬스 오즈왈드 어날드 모즐리 준남작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인 오더피 가로드 오 키나간 세르지오 파눈치오 지오반니 파피니 안테 파빌리치 윌리엄 더들리 펠레이 알프레트 플뢰츠 로베르 폴레 비드쿤 크비슬링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프랑코 뤼시앵 레바테 디오니시오 리드루에호 알프레도 롯코 콘스탄틴 로드자엡스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플리니우 사우가두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 마르게리타 사르파티 카를 슈미트 아르뎅고 소피치 오트마어 슈판 우고 스피리토 살러시 페렌츠 곤살로 토렌테 발레스테르 조르주 발루아 아나스타시 바사츠키 안호상 염동진 박정희 문헌단행본 《파시즘의 교리》 《파시스트 선언》 《파시스트 지식인 선언문》 《나의 투쟁》 《오스월드 모슬리 자서전》 《20세기의 신화》 《히틀러 제2서》 《러시아 파시스트의 유언장》 정기간행물 국가의 정복 다스 라이히 데어 앙그리프 독일일반신문 노르웨이 독일일반신문 네덜란드 독일일반신문 Figli d'Italia 프론텐 간디레아 청년 파시스트지 나는 어디에나 있다 작업 중의 프랑스 뮌헨 베오바흐터 노보프레스 월간 NS 노르웨이-독일 저널 흑군단 데어 슈튀르머 이탈리아 인민 스파르머피아트러 지크날 블라이카 푈키셔 베오바흐터 우리의 길 파시스트 르알바 영상물 《신념의 승리》 《의지의 승리》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 관련 주제 나치 예술 파시스트 건축 영웅사실주의 나치 건축 나치즘과 영화 나치의 예술품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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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85061515 GND: 4073091-8 NDL: 01111326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홀로코스트&oldid=24179693" 분류: 홀로코스트독일의 역사반독 감정숨은 분류: 참조 오류가 있는 문서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4년 4월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4년 5월인용 오류 - 날짜CS1 - 폴란드어 인용 (pl)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인용 오류 - URL 없이 확인날짜를 사용함히브리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이디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인용 오류 - 외부 링크인용 오류 - 보이지 않는 문자CS1 - 독일어 인용 (de)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Alemannischአማርኛ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ܐܪܡܝܐمصرىAsturianuAzərbaycancaتۆرکجهБашҡортсаBoarischŽemaitėšk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বাংলাBrezhonegBosanskiБуряадCatalàکوردیČeštinaЧӑвашлаCymraegDanskDeutschZazaki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VõroFøroysktFrançaisFryskGaeilgeGàidhligGalegoGaelgעבריתहिन्दीFi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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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천은사 삼장보살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례 천은사 삼장보살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례 천은사 삼장탱화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구례 천은사 삼장보살도(求禮 泉隱寺 三藏菩薩圖) 대한민국의 보물 종목 보물 제1888호 (2016년 2월 22일 지정)면적 전체 세로224.5 가로420.0 화면 세로 186.1 가로394.0수량 1폭시대 조선시대 1776년(乾隆 41)소유 천은사참고 견본채색, 조성화원: 信庵, 來淑, 德箴, 敏徽, 泰閠, 六圓, 幻綜, 泰華 등위치 구례 천은사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노고단로 209 (광의면, 천은사)좌표 북위 35° 16′ 26″ 동경 127° 27′ 59″ / 북위 35.27389° 동경 127.46639° / 35.27389; 127.46639좌표: 북위 35° 16′ 26″ 동경 127° 27′ 59″ / 북위 35.27389° 동경 127.46639° / 35.27389; 127.46639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구례 천은사 삼장탱화(求禮 泉隱寺 三藏幀畵)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해지)종목 유형문화재 제268호 (2005년 1월 27일 지정) (2016년 2월 22일 해지)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구례 천은사 삼장보살도(求禮 泉隱寺 三藏菩薩圖)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천은사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불화이다. 2005년 1월 27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68호 구례 천은사 삼장탱화로 지정되었다. 2015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보물 구례 천은사 삼장보살도로 지정 예고를 거쳐[1], 2016년 2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2]. 목차 1 개요 2 보물 지정 사유 3 각주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개요[편집] 구례 천은사 삼장탱화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탱화로 제작의 절대연대(1776년)를 알 수 있으며, 구도와 색채감이 뛰어나다. 또한 등장하는 도상의 이름이 하단에 밝혀져 있어서 삼장탱화의 도상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며, 불교사나 민간불교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같은 작가들에 의하여 제작된 천은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가 보물 9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등 천은사 삼장탱화는 여러 가지 사료적인 가치와 더불어 18세기의 우수한 불화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 천은사 극락전 향 우측 벽에 봉안된 삼장탱화는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와 조성연대가 같은 1776년의 작품이다. 옆으로 긴 그림으로 비단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렸다. 한 화면에 좌우로 3등분하여 중앙에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권속이 모인 천장회상(天藏會上)과 향 우측이 지지보살과 그 권속들을 그린 지지회상(持地會上), 향 좌측이 지장보살과 그 권속이 모인 지장회상(地藏會上)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각 보살들은 중앙에 위치하고 각각의 권속들이 보살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하단에는 4개의 화기가 쓰여 있는데 하나는 불화의 조성시기와 시주자 등의 내력을 밝힌 것이고 나머지 셋은 각 회상에 참석한 성중들의 명호가 쓰여 있다. 이 참가 성중들의 명호는 조선시대 삼장탱화의 도상 명칭을 밝히는데 중요한 기록이다. 가운데 천장보살(天藏菩薩)은 청색 천의를 걸치고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한 손은 무릎위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오른쪽 가슴 위에 들어 올린 모습으로 대좌위에 앉아있다. 주위에는 26명의 권속이 하단에서부터 보살의 광배 주위에 좌우대칭으로 서 있다. 하단의 명호에 따르면 교주천장보살(敎主天藏菩薩). 좌보진주보살(左補眞珠菩薩) 우보대진주보살(右補大眞珠菩薩) 사공천중(四空天衆) 십팔천중(十八天衆) 육욕천중(六欲天衆) 일월천중(日月天衆) 제성군중(諸星君衆) 오통선중(五通仙衆) 등이다. 향 우측의 지지보살은 붉은색 천의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무릎 위에 올린 왼손에는 경책을 들고 오른손을 천장보살과 같이 우측 가슴 앞에 올리고 있다. 주위에는 27명의 권속이 하단부터 층층이 겹쳐 그려져 있는데, 하단의 명호에 따르면 교주지지보살(敎主持地菩薩) 좌보용수보살(左補龍樹菩薩) 우보다라니보살(右補陀羅尼菩薩) 제견뢰신중(諸堅牢神衆) 제금강신중(諸金剛神衆) 제팔부신중(諸八部神衆) 제용왕신중(諸龍王神衆) 제아수라중(諸阿修羅衆) 대약차중(大藥叉衆) 나찰바중(羅刹婆衆) 귀자모중(鬼子母衆) 대하왕중(大河王衆) 등이다. 향 좌측의 지장보살은 승형 머리를 하고 그 위에 투명한 검은 색 두건을 쓰고 있는데 무릎 위에 올린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앞의 두 보살과 같이 우측 가슴 앞에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위에는 28명의 권속이 좌우대칭으로 층층이 배치되어있는데 하단의 화기에 따르면 교주지장보살(敎主地藏菩薩) 좌보도명존자(左補道明尊者) 우보무독귀왕(右補無毒鬼王)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상비보살(常悲菩薩) 용수보살(龍樹菩薩)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제일진광대왕(第一秦廣大王) 초강대왕(楚江大王) 송제대왕(宋帝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태산부군(太山府君) 판관(判官) 귀왕(鬼王) 장군(將軍) 동자(童子) 감재(監齋) 직부(直符) 등이다. 불보살상의 얼굴은 갸름하게 둥근 형태로 얼굴에 비해 큰 코와 작은 입을 꼭 다문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모두 장식무늬가 수놓인 의습을 걸치고 있다. 색조는 대체로 붉은색과 초록색을 주로 사용하고 파랑색과 흰색으로 변화를 주고 있으며, 엷은 녹색과 주황색을 간색으로 사용하여 통일감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선명한 느낌을 주는 우수한 불화이다. 불화의 제작에는 신암 화련(信庵 華蓮) 내숙(來淑) 덕잠(德箴) 민휘(敏徽) 태윤(泰閏) 육원(六圓) 환종(幻縱) 태화(泰華) 유운(有云) 성잠(性岑) 성활(性闊) 보잠(普岑) 행정(幸正) 성감(惺鑑)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에 그려진 극락전의 <아미타후불탱화>의 제작에도 모두 참여하고 있어서 두 작품이 함께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라도 지역의 불화제작에 자주 나타나는 화승이 아니어서 다른 지역에서 초청되어 천은사 불화들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삼장보살도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의 삼장보살도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등장인물의 수도 많아지면서 화폭의 크기도 커지고 있다. 천은사의 삼장보살탱화는 18세기 중엽에 그려지면서 그 당시 불화의 뛰어난 색감과 묘사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우수한 작품이다. 그리고 제작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고, 도상이나 구도에 있어서도 뛰어나다. 보물 지정 사유[편집] 천은사 삼장보살도는 1776년에 천은사 대법당(극락전)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삼장보살도이다. 불화의 제작에는 수화승 신암화련(信庵華連)을 비롯하여 내숙(來淑), 덕잠(德箴), 민휘(敏徽), 태윤(泰閠), 육원(六圓), 환종(幻綜), 태화(泰華), 유운(有云), 성잠(性岑), 성활(性闊), 보잠(普岑), 행정(幸正), 성감(性鑑) 등 모두 14명의 화승이 참여하였다. 신암화련은 국보 제314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를 그린 18세기 중후반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한 화승이다.[2] 이 불화는 수륙재의 중단의례용 불화로 제작된 것인데, 세로폭에 비해 가로 폭이 매우 넓은 중대형 불화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천장보살과 협시 진주·대진주보살을 비롯한 권속을, 왼쪽에는 지지보살과 협시 용수·다라니보살을 비롯한 권속을, 그리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과 협시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비롯한 권속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각 주존 보살은 높은 수미단 위에 결가부좌하고 그 주위에 각각의 권속들이 주존을 둘러싸고 시립한 모습인데, 화면에 비하여 많은 권속들을 표현하였지만 비교적 여유 있는 화면구성을 보여준다.[2] 조선 중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삼장보살도는 16세기 이후 많은 수의 작품들이 남아 있는데, 천은사 삼장보살도는 각 보살의 아래 화기란에 화면에 도설된 권속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해 놓은 유일한 자료로서 삼장보살도의 도상 연구에 기준이 되고 있다. 화기의 명칭에 의해볼 때 권속들의 명칭은 수륙재 의궤집인 『천지명왕수륙재의범음산보집』(1739년) 등에 근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장보살도 도상연구에 기준이 되고 삼장보살도와 수륙재 의궤와의 관련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 보호할 가치가 있다.[2] 각주[편집] ↑ 문화재청공고제2015-411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예고》, 대한민국 관보 제18670호(그2), 391면, 2015-12-31 ↑ 가 나 다 라 문화재청공고제2016-9호,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대한민국 관보 제18703호, 58면, 2016-2-22 같이 보기[편집] 천은사 참고 자료[편집] 구례 천은사 삼장보살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구례_천은사_삼장보살도&oldid=23800338" 분류: 전라남도의 보물구례군의 문화재조선의 불화1776년 작품삼장보살도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없는 좌표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3월 3일 (일) 13:5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천은사 삼장보살도가 제작된 년도는 언제일까? |
행성 (모음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행성 (모음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행성》(The Planets, Op. 32)은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가 쓴,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이다. 작곡자에게 점성술을 가르쳐 준 클리포드 백스의 제안으로 1914년에 착상하여 1916년에 작곡을 마쳤으며 1920년 10월 10일 버밍엄에서 애플비 매슈스(Appleby Matthews)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도미타 이사오의 신시사이저 편곡이 있다. 이 중 〈화성〉은 넥스트의 《Lazenca - A Space Rock Opera》 앨범에 편곡돼 수록되어 있고,〈목성〉의 도입부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목차 1 작곡 1.1 배경 1.2 경과 1.3 '행성조곡'의 초연과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 2 악기편성 3 연주시간 4 구조 5 구성 5.1 제1곡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5.2 제2곡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5.3 제3곡 ‘수성, 날개 달린 파발꾼’ 5.4 제4곡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 5.5 제5곡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 5.6 제6곡 ‘천왕성, 마술사’ 5.7 제7곡 ‘해왕성, 신비로운 자’ 6 다른 작곡가에 의한 추가 악장 6.1 명왕성 7 각주 작곡[편집] 배경[편집] 홀스트가 '행성조곡'의 작곡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13년 그의 친구 클리포드 백스가 점성술에 관해 소개하는 데서 출발한다. 1925년 출판된 클리포드 백스의 회고록인 'Inland Far'에서 그는 1913년 3월의 어느 날에 그의 형인 아놀드, 밸포어 가디너 그리고 구스타브 홀스트와 가졌던 휴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클리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홀스트는 나에게 그가 막 점성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알렸으며, 그러한 성향의 화제거리로 오랜 동안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가디너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그를 상하게 할 문제는 없었다." 책의 뒤에서 클리포드는 별도로 언급하기로는 홀스트에게 점성술을 소개한 이는 자신이었다고 적었으며, 홀스트가 점성술로부터 끌어낸 영감을 소진해 버리고 나서 그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홀스트의 딸 이모겐은 '행성조곡'의 원고 사본판 서문에서 그녀의 부친이 읽은 책인 1913년 런던에서 출판된 Alan Leo의 '천궁도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적었다. 사실 Alan Leo는 1차 대전 전과 전쟁 중에 점성술을 장려하는 일종의 대중적인 책과 인쇄물의 저자였다. 홀스트는 이 책을 보고(비록 친구들의 점괘를 맞추는 것 뿐이지만) 일생동안 '점쟁이' 노릇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Leo의 책에는 '화성 전쟁의 신', '토성 수확자' 처럼 각 행성의 성격에 대해 간단한 기술이 되어 있었고, 홀스트는 이에 착안하여 자신의 작품에도 각 행성 별로 부제를 붙였는데, '해왕성'에 붙인 '신비로운 자' 만은 Leo의 기술을 그대로 갖다 붙인 제목이었다. 경과[편집] 1908년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기간에 영국에서는 드뷔시와 라벨에 의한 새로운 음악이 런던에서 연주(1908년 "바다", 1909년 "야샹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1912년 "어미 거위")되었고,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뤼스를 이끌고 와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1912),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모두 1913년),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1914)를 더했고, 작곡자의 관현악적 색채는 선명하게 확대되어서 영국의 음악적 조직의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은 1914-16년 사이에 작곡된 '행성'에 홀스트에 의해 내면화 되었다. '행성'의 필사본에는 단순하게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7개의 작품'이라는 제목이 달렸었다. 이미 언급한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와는 별개로, 1914년 8월 이전 런던에서 주목할 만한 관현악 초연은 1912년 9월 12일 헨리 우드 경의 지휘로 초연된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1914년 1월에 쇤베르크 자신의 지휘로 한번 더 연주되었다.)이었다. 최근의 몇몇 주석자들은 홀스트의 작곡의 시작점이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악보의 예로 보아도 된다는 의견을 냈다. 홀스트가 첫 연주회에 참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수첩 속의 기술은 그가 두 번째에는 틀림없이 참석했었음을 제시한다. 홀스트 생가 박물관의 관리자인 Lowinger Maddison은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의 문고판 총보는 홀스트가 가장 아끼던 소지품들 중에 하나로, 그가 작곡시에 그것을 곁에 두었음을 지적했다.('금성'에는 쇤베르크의 악보와 유사한 첼레스타 악구가 나타난다.) 홀스트는 '행성'을 2년 혹은 3년 간 다듬었지만, 마지막으로 쓰여진 '수성'을 제외하고 그는 그것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순서대로 썼다는 점은 흥미롭다.(1차대전 전에 명왕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행성'은 실제로 거의 2년의 기간이 넘게 작곡되었다. 홀스트는 "그것은 마치 여인의 뱃속의 아기처럼 ... 2년 동안, 스스로 점차 확실하게 형태를 이루듯이" 그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자랐다고 말했다. 1914년에 먼저, 집요한 운율적 행보의 '화성'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발발에 대한 반작용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홀스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6월에 그의 스케치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후 전쟁 중의 첫 가을에 '금성'(평화를 가져오는 자)이, 그리고 '목성'(즐거움을 가져오는 자)이 나왔다. 1915년의 여름과 가을에 '천왕성'과 '해왕성'을 끝냈는데, '수성'은 1916년 초까지도 마치지 못했다. 그것은 홀스트가 작곡을 매우 천천히 했고 그의 오른팔의 신경염 때문에 세인트 폴 학교의 전(前)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팀의 사보가들의 봉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손으로 작성된 원고는 그의 딸 이모겐이 사본판으로 출판하였다. '행성조곡'의 초연과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편집] 홀스트 자신은 '행성'을 실제로 들어볼 수 있을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차 대전 종료 1주일 전 무렵에 그가 살로니카에 군대 음악교육계의 음악 간사로 가게 되었고, 그의 후원자이던 밸포어 가디너가 그에게 이별의 선물로 퀸즈 홀에서 퀸즈 홀 오케스트라로 '행성'의 연주를 주선하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던 것이다. 홀스트는 즉각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29살의 야심있는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마침 그는 작품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 에이드리언, 내가 YMCA룰 위해 곧 살로니카로 가게 되었어. 밸포어 가디너가 은혜롭게 나에게 이별 선물로 퀸즈 홀과 퀸즈 홀 오케스트라 전부를 일요일 아침에 모두 주셨어. 우리는 '행성'을 할 예정이고 자네가 지휘를 해 줘야겠어." 볼트는 이미 전 해에 그 작품의 2대의 피아노 편곡판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홀스트의 청을 바로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행성'의 초연은 1918년 9월 29일에 이루어졌는데, 거의 '개인적인' 연주회였던 터라 초대된 청중들만 온 탓에, 넓은 퀸즈 홀은 절반도 못 채웠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대 성공이었다. 홀스트의 딸 이모겐에 따르면 "회랑에 있던 파출부들 조차도 넋을 잃을 정도" 였다고 하면서, '목성'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그들도 빗자루를 내려 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홀스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에 난처해 하였고, 연주회 후 볼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자네는 영광에 둘러싸였고 [중략] 자네의 성공은 내가 말과 글로써 형언하기 건방질 만큼이나 확실하다네. 신의 가호가 있기를!" 홀스트는 또한 '행성조곡'의 악보를 출판하면서 서문에 자신과 그 작품의 성공은 아드리안 볼트 덕분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볼트는 왕립 음악협회의 2차례 시즌의 두 번째 연주회인 1919년 2월 27일에도 초대되어 '행성조곡'의 5개 악장만을 연주하였다(대중에의 전곡 초연은 1920년 11월 알버트 코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볼트는 세계에 걸친 객원지휘 뿐만 아니라 버밍엄(1924-30 및 1959-60), BBC 교향악단(1930-50) 그리고 런던 필하모닉(1950-57) 등의 수석 지휘자로서의 경력 중에도 계속 '행성조곡'을 지휘하였고 녹음도 5회나 남겼다. 악기편성[편집] 목관악기: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와 알토 플루트를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금관악기: 호른6, 트럼펫4, 트롬본3, 튜바, 유포니움 타악기: 팀파니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실로폰 현악기: 하프 2, 현악 5부 건반악기: 오르간 기타: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연주시간[편집] 약 50분 구조[편집] 《행성》은 태양계의 일곱 행성에 해당하는 로마 신화의 신을 각각 주제로 한 일곱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천문학이 아닌 점성술 상의 행성 배열로 나누었고, 행성과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그리스로마 신화 신들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고, 곡에도 물론 반영되어 있다.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Mars, the Bringer of War)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Venus, the Bringer of Peace) 〈수성, 날개달린 파발꾼〉(Mercury, the Winged Messenger)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Jupiter, the Bringer of Jollity)[1]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Saturn, the Bringer of Old Age) 〈천왕성, 마술사〉(Uranus, the Magician) 〈해왕성, 신비로운 자〉(Neptune, the Mystic) 점성술의 이미지 외에 동시대에 작곡된 곡들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데, 이교적인 기괴한 스토리와 거대한 관현악 편성, 미칠듯이 변하는 박자와 불협화음의 향연으로 스캔들이 되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이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클로드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 와 '야상곡' 등의 영향이 종종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음악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 드뷔시와 달리 곡 자체를 크게 놓고 보면 그리 혁신적인 것도 아닌데, 오히려 대편성의 관현악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굉장히 다채로운 음색을 뽑아내는 면모 덕에 그런 인상을 받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이 곡은 영국 음악의 전통에 깊게 뿌리박고 있고, '목성' 의 중간부 선율은 애국적인 내용의 가사가 붙어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합니다'(I vow to thee, my country) 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는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악명이 높았고, 초연 때의 연주는 연습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꽤 어설펐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개량되었던 녹음 기술 덕에 홀스트 자신이 직접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두 종류의 음반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것마저 한정된 녹음 시간과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곡의 독특한 색채는 거의 죽어버린 소리가 나왔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 포맷이었던 SP는 한 면당 기껏해야 3분~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다. 그런 탓에 대곡을 녹음할 경우, 판 숫자를 줄이려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등 녹음 스탭의 요청 때문에 빨리 내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압류해온 오픈릴 테이프와 그 레코더의 개량 작업, 그리고 스테레오 녹음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녹음의 질이 부쩍 좋아진 덕에, '스펙터클한 레퍼토리' 를 찾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음반 취입곡이 되었다. 구성[편집] 제1곡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편집] 다장조 5/4박자. 제시부-발전부-재현부-종결부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 - 특정 패턴의 이른바 "오스티나토" 리듬이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가운데 호른에 의한 제 1주제("da --- da da ---")가 시작된다. 제 1주제는 반복되면서 점차 복잡하게 발전하며 정점에 이른 뒤, 좀더 격렬한 느낌의 오스티나토 리듬을 타고 제 2주제("da - dada - da")가 등장하여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이 제 2주제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후 발전부로 이어진다. 발전부 - 행진곡 풍의 리듬을 타고 테너 튜바에 의해 제 3주제가 나타나고, 이 제 3주제는 확대 변형된 후 저음 현에 의해서 제 2주제가 다시 나타나 질질 끄는 듯한 느낌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금관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전 관현악에 의해 오스티나토 리듬이 나타나면서 재현부가 시작된다. 재현부 - 전 관현악의 총주로 오스티나토 리듬을 필두로 제시부의 제 1주제와 발전부의 제 3주제가 차례로 등장한 후 제 2주제가 등장하여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다 정점에 이르러서 금관과 오르간의 코랄이 포르티시시모로 등장하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 - 금관과 오르간의 마치 추락하는 듯한 느낌의 코랄이 잦아들면서 잠잠해지다가 다시 현악과 목관의 상승 음형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변형된 오스티나토 리듬의 팀파니와 금관이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데, 미국의 작곡가 존 윌리엄스는 자신이 작곡한 '스타워즈 영화부수음악'의 주제곡에서 이 부분을 차용하기도 했다. 제2곡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편집] 내림마장조, 4/4박자. 호른을 제외한 금관과 타악기가 숨을 죽인 채, 조금 긴 호흡의 호른의 제 1주제가 개시된다. 이어서 목관이 가세하고 하프, 현악 합주로 see-saw음형의 제 2주제가 이어진다. 잠시 종결하는 듯한 후 다시 제 1주제가 나타나면서 고조된다. 이어 나타나는 감미로운 느낌의 첼로의 분산화음이 상승하면서, 호른과 목관의 유영하는 느낌의 반주를 타고 바이올린 독주가 고음역을 한가롭게 노래하는 제3주제가 이어진다. 한차례 클라이막스가 있은 후, 바이올린 독주와 목관, 호른의 반주가 교대 혼합되어 진행한다. 다시 제2주제, 제1주제가 나타나고, 앞에서 나왔던 첼로의 분산 화음이 한 옥타브 높게 등장한 후 제3주제가 다시 나타난다. 하프와 목관의 분산화음이 어우러지며 클라이막스에 이른 후 첼레스타의 속삭이는 듯한 분산화음에 호른이 see-saw음형을 노래하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고음으로 이어지고 흩어지듯이 사라진다. 제3곡 ‘수성, 날개 달린 파발꾼’[편집] 내림나장조, 8/6박자. 비록 홀스트는 그의 계획에 독일 교향곡의 어떠한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없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느린 악장에 이어지는 스케르초이다. '화성'의 집중된 음향의 무게는 다시 멀어졌고, 목관악기와 약음기를 낀 현의 반짝이는 대비는 주목할 만한 발빠른 분위기를 창줄한다.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의 목관의 빠른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면서 하프의 달리는 느낌의 연주에 이어지면서 고조되다가 호른의 코랄로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분이 잠잠해진 후, 날아다니는 느낌의 목관이 다시 나타나고 현악기의 달려가는 듯한 악구가 고조된다. 팀파니의 빠른 패시지를 타고 목관이 연주되다 사라지고 첼레스타와 하프, 목관악기들이 어우러지며 고조된 후 조용히 끝맺는다. 제4곡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편집] 다장조, 2/4박자. '화성'과 마찬가지로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는 바이올린의 분산화음을 타고 호른이 귀에 익숙한 제1주제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이 주제는 오래 전에 모 방송국에서 저녁 9시 뉴스의 시그널로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목성'은 중간부의 아름다운 선율과 더불어 친근감이 드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목관의 분산화음이 더해지고 다른 금관들도 합세하여 한차례 더 반복된다. 이어 전 관현악이 분위기를 일신한 후 반복과 변형을 거듭하며 발전한다. 그후 제2주제인 3박자의 리듬이 반복되면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제1주제 등의 단편들이 나타나면서 제시부는 점차 잦아든다. 이어지는 발전부는 금관에 의해서 3박자의 유려한 선율이 전개되는데, 후에 홀스트는 이 선율에 'I Vow to Thee My Country'의 가사를 붙였다. 한껏 고조된 발전부가 끝나고 이어지는 재현부는 제시부의 선율들이 다시 순서대로 등장하여 부풀어 오르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는 하프와 현악기의 물결치는 듯한 아르페지오를 타고 저음 금관과 저음 목관에 의해 발전부 선율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금관의 기상곡 풍의 팡파르가 등장하면서 끝맺는다. 제5곡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편집] 다장조, 4/4박자.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곡상을 풀어가는 교향시의 성격이다. 플루트와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조용히 시작하면서 마치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듯이 '화성'의 제 1주제가 들어간 음형(이하 "A음형"이라 칭함)이 더블베이스에 의해 나타난다. 목관이 이 A음형을 반복하고, 점차 현악기군과 목관이 더해지고 금관이 지속음을 내면서 멎는 듯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으로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행진곡 풍의 리듬을 피치카토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의욕적인 출발의 느낌을 주는 A음형의 금관의 화음이 상승, 하강을 반복하면서 고조되다가 하프와 현의 잡아채는 듯한 리듬에 목관이 처음에는 순응하다가 점차로 저항하는 듯이 확대되면서 상승한다. 확대된 목관이 점차 고조되어 금관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저항을 이겨낸 듯 see-saw 음형의 행진 리듬으로 바뀐다. see-saw 음형과 A음형이 혼합되어 반복되면서 점차 침잠하는 듯이 잦아들고 마치 고독한 승자의 모습을 묘사하듯 플루트와 하프의 투명한 울림만이 남는다. 오르간의 지속음과 하프와 목관이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금관의 see-saw 음형이 명상적인 느낌을 이끌어 내며 천천히 음색을 변화시켜 간다. 마침내 모든 욕심으로부터 초연해진 듯이, 음악은 서서히 높은 곳을 향해 사라진다. 제6곡 ‘천왕성, 마술사’[편집] 다장조, 6/4박자. 서주는 트럼펫과 테너 튜바, 베이스 튜바에 의해 "솔-미flat-라-시" 의 네 음으로 시작한다. 알렉산더 깁슨/RNO(Chandos) 음반의 내지 설명에 의하면. 이 네 음은 홀스트의 이름(GuStAv Holst)에서 따 온 것이라는 Malcolm MacDonald의 주장도 있다. 금관에 의해 제시된 네 음은 테너튜바와 베이스튜바가 모방하다가 팀파니에 의해 제지당하면서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어서 바순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른 목관들도 차례로 합류하고 더불어 속도도 빨라진다. 점차 고조된 뒤, 바순에 의해 다른 주제가 나타나고, 이 주제를 다른 목관들이 따라 하면서 확대 발전한다. 이어 금관에 의해서 '화성'의 제 2주제가 나타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절정에 다다른 후 점차 가라앉는다. 여기까지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가 카오스로부터 여러 신과 물질을 창조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이스 튜바에 의해서 서주에 나왔던 네 음이 다시 등장하고, 새로운 주제의 행진곡이 등장하면서 확대 변형 발전하면서 점차 고조된다. 온갖 타악기들이 난무하는 소란스러운 선율로 한동안 정신없이 연주하는데, 마치 바람기를 억제하지 못한 우라노스의 행각(?)을 보는 듯하다. 전 관현악의 코랄과 함께 오르간이 거칠은 음향으로 등장하면서 모두 침묵하고 눈치를 살피는 듯한 하프의 see-saw 음형이 마치 가이아의 사주를 받은 제우스와 맞선 우라노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침내 일격을 가하는 제우스의 모습이 오르간과 전 관현악에 의해 연주되고, 비참하게 사라져 가는 우라노스의 모습이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표현되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제7곡 ‘해왕성, 신비로운 자’[편집] 다장조, 5/4박자. 제목에 걸맞게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한다. 하프와 다른 목관들이 선율을 따르며 발전하고, 금관이 부드럽게 지속음으로 받쳐준다. 이어서 일렁이는 느낌의 첼레스타와 하프의 아르페지오를 타고 팀파니, 심벌즈, 사이드 드럼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목관 금관의 지속음이 신비로운 느낌을 채색하다가 점차 가라앉는다. 저음 현의 지속음이 깔린 채 베이스 오보에와 바순의 느릿한 상승을 다른 목관들이 이어받으며 반복하는 중에,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2부 여성합창이 보칼리제로 지속음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호른이 see-saw음형으로 화음을 연주하고,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 고조되었다가 사라지면, 박자를 세는 듯한 느낌의 하프를 타고 여성 합창이 앞서의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연주했던 선율을 재현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여성합창이 쉬는 사이 목관과 금관의 지속음과 타악기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하프 및 첼레스타의 아르페지오로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여성합창이 다시 등장하여 see-saw음형을 연주하면서 하프가 간간이 받쳐주다가 여성합창만이 연주된다. 이 부분에서 여성합창이 있는 곳의 문은 서서히 닫히도록 악보에 지시되어 있는데, 마치 보이저 2호가 마지막으로 해왕성 사진을 전송하고는 은하계 바깥으로 사라져 가듯이 여성합창도 점점 멀어진다. 다른 작곡가에 의한 추가 악장[편집] 명왕성[편집] 1930년 명왕성이 발견되었는데, 홀스트는 명왕성을 위한 곡을 쓰는 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00년 할레 오케스트라(Hallé Orchestra)의 위촉으로 콜린 매슈스가 〈명왕성, 새롭게 하는 자〉(Pluto, the renewer)를 써서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했다. 매슈스는 해왕성의 종결 부분을 명왕성으로 넘어가도록 고쳤다. 명왕성이 포함된 《행성》은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2000년 5월 11일 맨체스터에서 초연했다.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이 명왕성의 분류를 행성에서 외행성으로 바꾸면서 《행성》은 다시 지구를 제외한 모든 태양계의 행성을 다루는 곡이 되었다. 연주시간 : 약 6분 악기편성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 G조 베이스 플루트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호른 6, 트럼펫 4, 트롬본 3, 튜바, 유포니움, 팀파니 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자일러폰, 하프 2, 오르간,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각주[편집] ↑ 나중에 이 곡에 세실 스프링 라이스의 시를 붙여 영국의 애국가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하노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행성_(모음곡)&oldid=24487667" 분류: 관현악곡모음곡행성을 소재로 한 노래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Latina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6일 (수) 20: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곡의 장조와 박자가 뭐야 ? |
행성 (모음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행성 (모음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행성》(The Planets, Op. 32)은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가 쓴,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이다. 작곡자에게 점성술을 가르쳐 준 클리포드 백스의 제안으로 1914년에 착상하여 1916년에 작곡을 마쳤으며 1920년 10월 10일 버밍엄에서 애플비 매슈스(Appleby Matthews)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도미타 이사오의 신시사이저 편곡이 있다. 이 중 〈화성〉은 넥스트의 《Lazenca - A Space Rock Opera》 앨범에 편곡돼 수록되어 있고,〈목성〉의 도입부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목차 1 작곡 1.1 배경 1.2 경과 1.3 '행성조곡'의 초연과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 2 악기편성 3 연주시간 4 구조 5 구성 5.1 제1곡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5.2 제2곡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5.3 제3곡 ‘수성, 날개 달린 파발꾼’ 5.4 제4곡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 5.5 제5곡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 5.6 제6곡 ‘천왕성, 마술사’ 5.7 제7곡 ‘해왕성, 신비로운 자’ 6 다른 작곡가에 의한 추가 악장 6.1 명왕성 7 각주 작곡[편집] 배경[편집] 홀스트가 '행성조곡'의 작곡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13년 그의 친구 클리포드 백스가 점성술에 관해 소개하는 데서 출발한다. 1925년 출판된 클리포드 백스의 회고록인 'Inland Far'에서 그는 1913년 3월의 어느 날에 그의 형인 아놀드, 밸포어 가디너 그리고 구스타브 홀스트와 가졌던 휴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클리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홀스트는 나에게 그가 막 점성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알렸으며, 그러한 성향의 화제거리로 오랜 동안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가디너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그를 상하게 할 문제는 없었다." 책의 뒤에서 클리포드는 별도로 언급하기로는 홀스트에게 점성술을 소개한 이는 자신이었다고 적었으며, 홀스트가 점성술로부터 끌어낸 영감을 소진해 버리고 나서 그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홀스트의 딸 이모겐은 '행성조곡'의 원고 사본판 서문에서 그녀의 부친이 읽은 책인 1913년 런던에서 출판된 Alan Leo의 '천궁도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적었다. 사실 Alan Leo는 1차 대전 전과 전쟁 중에 점성술을 장려하는 일종의 대중적인 책과 인쇄물의 저자였다. 홀스트는 이 책을 보고(비록 친구들의 점괘를 맞추는 것 뿐이지만) 일생동안 '점쟁이' 노릇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Leo의 책에는 '화성 전쟁의 신', '토성 수확자' 처럼 각 행성의 성격에 대해 간단한 기술이 되어 있었고, 홀스트는 이에 착안하여 자신의 작품에도 각 행성 별로 부제를 붙였는데, '해왕성'에 붙인 '신비로운 자' 만은 Leo의 기술을 그대로 갖다 붙인 제목이었다. 경과[편집] 1908년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기간에 영국에서는 드뷔시와 라벨에 의한 새로운 음악이 런던에서 연주(1908년 "바다", 1909년 "야샹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1912년 "어미 거위")되었고,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뤼스를 이끌고 와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1912),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모두 1913년),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1914)를 더했고, 작곡자의 관현악적 색채는 선명하게 확대되어서 영국의 음악적 조직의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은 1914-16년 사이에 작곡된 '행성'에 홀스트에 의해 내면화 되었다. '행성'의 필사본에는 단순하게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7개의 작품'이라는 제목이 달렸었다. 이미 언급한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와는 별개로, 1914년 8월 이전 런던에서 주목할 만한 관현악 초연은 1912년 9월 12일 헨리 우드 경의 지휘로 초연된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1914년 1월에 쇤베르크 자신의 지휘로 한번 더 연주되었다.)이었다. 최근의 몇몇 주석자들은 홀스트의 작곡의 시작점이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악보의 예로 보아도 된다는 의견을 냈다. 홀스트가 첫 연주회에 참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수첩 속의 기술은 그가 두 번째에는 틀림없이 참석했었음을 제시한다. 홀스트 생가 박물관의 관리자인 Lowinger Maddison은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의 문고판 총보는 홀스트가 가장 아끼던 소지품들 중에 하나로, 그가 작곡시에 그것을 곁에 두었음을 지적했다.('금성'에는 쇤베르크의 악보와 유사한 첼레스타 악구가 나타난다.) 홀스트는 '행성'을 2년 혹은 3년 간 다듬었지만, 마지막으로 쓰여진 '수성'을 제외하고 그는 그것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순서대로 썼다는 점은 흥미롭다.(1차대전 전에 명왕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행성'은 실제로 거의 2년의 기간이 넘게 작곡되었다. 홀스트는 "그것은 마치 여인의 뱃속의 아기처럼 ... 2년 동안, 스스로 점차 확실하게 형태를 이루듯이" 그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자랐다고 말했다. 1914년에 먼저, 집요한 운율적 행보의 '화성'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발발에 대한 반작용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홀스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6월에 그의 스케치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후 전쟁 중의 첫 가을에 '금성'(평화를 가져오는 자)이, 그리고 '목성'(즐거움을 가져오는 자)이 나왔다. 1915년의 여름과 가을에 '천왕성'과 '해왕성'을 끝냈는데, '수성'은 1916년 초까지도 마치지 못했다. 그것은 홀스트가 작곡을 매우 천천히 했고 그의 오른팔의 신경염 때문에 세인트 폴 학교의 전(前)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팀의 사보가들의 봉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손으로 작성된 원고는 그의 딸 이모겐이 사본판으로 출판하였다. '행성조곡'의 초연과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편집] 홀스트 자신은 '행성'을 실제로 들어볼 수 있을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차 대전 종료 1주일 전 무렵에 그가 살로니카에 군대 음악교육계의 음악 간사로 가게 되었고, 그의 후원자이던 밸포어 가디너가 그에게 이별의 선물로 퀸즈 홀에서 퀸즈 홀 오케스트라로 '행성'의 연주를 주선하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던 것이다. 홀스트는 즉각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29살의 야심있는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마침 그는 작품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 에이드리언, 내가 YMCA룰 위해 곧 살로니카로 가게 되었어. 밸포어 가디너가 은혜롭게 나에게 이별 선물로 퀸즈 홀과 퀸즈 홀 오케스트라 전부를 일요일 아침에 모두 주셨어. 우리는 '행성'을 할 예정이고 자네가 지휘를 해 줘야겠어." 볼트는 이미 전 해에 그 작품의 2대의 피아노 편곡판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홀스트의 청을 바로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행성'의 초연은 1918년 9월 29일에 이루어졌는데, 거의 '개인적인' 연주회였던 터라 초대된 청중들만 온 탓에, 넓은 퀸즈 홀은 절반도 못 채웠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대 성공이었다. 홀스트의 딸 이모겐에 따르면 "회랑에 있던 파출부들 조차도 넋을 잃을 정도" 였다고 하면서, '목성'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그들도 빗자루를 내려 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홀스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에 난처해 하였고, 연주회 후 볼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자네는 영광에 둘러싸였고 [중략] 자네의 성공은 내가 말과 글로써 형언하기 건방질 만큼이나 확실하다네. 신의 가호가 있기를!" 홀스트는 또한 '행성조곡'의 악보를 출판하면서 서문에 자신과 그 작품의 성공은 아드리안 볼트 덕분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볼트는 왕립 음악협회의 2차례 시즌의 두 번째 연주회인 1919년 2월 27일에도 초대되어 '행성조곡'의 5개 악장만을 연주하였다(대중에의 전곡 초연은 1920년 11월 알버트 코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볼트는 세계에 걸친 객원지휘 뿐만 아니라 버밍엄(1924-30 및 1959-60), BBC 교향악단(1930-50) 그리고 런던 필하모닉(1950-57) 등의 수석 지휘자로서의 경력 중에도 계속 '행성조곡'을 지휘하였고 녹음도 5회나 남겼다. 악기편성[편집] 목관악기: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와 알토 플루트를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금관악기: 호른6, 트럼펫4, 트롬본3, 튜바, 유포니움 타악기: 팀파니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실로폰 현악기: 하프 2, 현악 5부 건반악기: 오르간 기타: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연주시간[편집] 약 50분 구조[편집] 《행성》은 태양계의 일곱 행성에 해당하는 로마 신화의 신을 각각 주제로 한 일곱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천문학이 아닌 점성술 상의 행성 배열로 나누었고, 행성과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그리스로마 신화 신들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고, 곡에도 물론 반영되어 있다.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Mars, the Bringer of War)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Venus, the Bringer of Peace) 〈수성, 날개달린 파발꾼〉(Mercury, the Winged Messenger)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Jupiter, the Bringer of Jollity)[1]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Saturn, the Bringer of Old Age) 〈천왕성, 마술사〉(Uranus, the Magician) 〈해왕성, 신비로운 자〉(Neptune, the Mystic) 점성술의 이미지 외에 동시대에 작곡된 곡들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데, 이교적인 기괴한 스토리와 거대한 관현악 편성, 미칠듯이 변하는 박자와 불협화음의 향연으로 스캔들이 되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이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클로드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 와 '야상곡' 등의 영향이 종종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음악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 드뷔시와 달리 곡 자체를 크게 놓고 보면 그리 혁신적인 것도 아닌데, 오히려 대편성의 관현악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굉장히 다채로운 음색을 뽑아내는 면모 덕에 그런 인상을 받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이 곡은 영국 음악의 전통에 깊게 뿌리박고 있고, '목성' 의 중간부 선율은 애국적인 내용의 가사가 붙어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합니다'(I vow to thee, my country) 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는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악명이 높았고, 초연 때의 연주는 연습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꽤 어설펐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개량되었던 녹음 기술 덕에 홀스트 자신이 직접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두 종류의 음반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것마저 한정된 녹음 시간과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곡의 독특한 색채는 거의 죽어버린 소리가 나왔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 포맷이었던 SP는 한 면당 기껏해야 3분~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다. 그런 탓에 대곡을 녹음할 경우, 판 숫자를 줄이려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등 녹음 스탭의 요청 때문에 빨리 내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압류해온 오픈릴 테이프와 그 레코더의 개량 작업, 그리고 스테레오 녹음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녹음의 질이 부쩍 좋아진 덕에, '스펙터클한 레퍼토리' 를 찾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음반 취입곡이 되었다. 구성[편집] 제1곡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편집] 다장조 5/4박자. 제시부-발전부-재현부-종결부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 - 특정 패턴의 이른바 "오스티나토" 리듬이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가운데 호른에 의한 제 1주제("da --- da da ---")가 시작된다. 제 1주제는 반복되면서 점차 복잡하게 발전하며 정점에 이른 뒤, 좀더 격렬한 느낌의 오스티나토 리듬을 타고 제 2주제("da - dada - da")가 등장하여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이 제 2주제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후 발전부로 이어진다. 발전부 - 행진곡 풍의 리듬을 타고 테너 튜바에 의해 제 3주제가 나타나고, 이 제 3주제는 확대 변형된 후 저음 현에 의해서 제 2주제가 다시 나타나 질질 끄는 듯한 느낌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금관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전 관현악에 의해 오스티나토 리듬이 나타나면서 재현부가 시작된다. 재현부 - 전 관현악의 총주로 오스티나토 리듬을 필두로 제시부의 제 1주제와 발전부의 제 3주제가 차례로 등장한 후 제 2주제가 등장하여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다 정점에 이르러서 금관과 오르간의 코랄이 포르티시시모로 등장하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 - 금관과 오르간의 마치 추락하는 듯한 느낌의 코랄이 잦아들면서 잠잠해지다가 다시 현악과 목관의 상승 음형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변형된 오스티나토 리듬의 팀파니와 금관이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데, 미국의 작곡가 존 윌리엄스는 자신이 작곡한 '스타워즈 영화부수음악'의 주제곡에서 이 부분을 차용하기도 했다. 제2곡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편집] 내림마장조, 4/4박자. 호른을 제외한 금관과 타악기가 숨을 죽인 채, 조금 긴 호흡의 호른의 제 1주제가 개시된다. 이어서 목관이 가세하고 하프, 현악 합주로 see-saw음형의 제 2주제가 이어진다. 잠시 종결하는 듯한 후 다시 제 1주제가 나타나면서 고조된다. 이어 나타나는 감미로운 느낌의 첼로의 분산화음이 상승하면서, 호른과 목관의 유영하는 느낌의 반주를 타고 바이올린 독주가 고음역을 한가롭게 노래하는 제3주제가 이어진다. 한차례 클라이막스가 있은 후, 바이올린 독주와 목관, 호른의 반주가 교대 혼합되어 진행한다. 다시 제2주제, 제1주제가 나타나고, 앞에서 나왔던 첼로의 분산 화음이 한 옥타브 높게 등장한 후 제3주제가 다시 나타난다. 하프와 목관의 분산화음이 어우러지며 클라이막스에 이른 후 첼레스타의 속삭이는 듯한 분산화음에 호른이 see-saw음형을 노래하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고음으로 이어지고 흩어지듯이 사라진다. 제3곡 ‘수성, 날개 달린 파발꾼’[편집] 내림나장조, 8/6박자. 비록 홀스트는 그의 계획에 독일 교향곡의 어떠한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없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느린 악장에 이어지는 스케르초이다. '화성'의 집중된 음향의 무게는 다시 멀어졌고, 목관악기와 약음기를 낀 현의 반짝이는 대비는 주목할 만한 발빠른 분위기를 창줄한다.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의 목관의 빠른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면서 하프의 달리는 느낌의 연주에 이어지면서 고조되다가 호른의 코랄로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분이 잠잠해진 후, 날아다니는 느낌의 목관이 다시 나타나고 현악기의 달려가는 듯한 악구가 고조된다. 팀파니의 빠른 패시지를 타고 목관이 연주되다 사라지고 첼레스타와 하프, 목관악기들이 어우러지며 고조된 후 조용히 끝맺는다. 제4곡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편집] 다장조, 2/4박자. '화성'과 마찬가지로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는 바이올린의 분산화음을 타고 호른이 귀에 익숙한 제1주제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이 주제는 오래 전에 모 방송국에서 저녁 9시 뉴스의 시그널로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목성'은 중간부의 아름다운 선율과 더불어 친근감이 드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목관의 분산화음이 더해지고 다른 금관들도 합세하여 한차례 더 반복된다. 이어 전 관현악이 분위기를 일신한 후 반복과 변형을 거듭하며 발전한다. 그후 제2주제인 3박자의 리듬이 반복되면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제1주제 등의 단편들이 나타나면서 제시부는 점차 잦아든다. 이어지는 발전부는 금관에 의해서 3박자의 유려한 선율이 전개되는데, 후에 홀스트는 이 선율에 'I Vow to Thee My Country'의 가사를 붙였다. 한껏 고조된 발전부가 끝나고 이어지는 재현부는 제시부의 선율들이 다시 순서대로 등장하여 부풀어 오르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는 하프와 현악기의 물결치는 듯한 아르페지오를 타고 저음 금관과 저음 목관에 의해 발전부 선율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금관의 기상곡 풍의 팡파르가 등장하면서 끝맺는다. 제5곡 ‘토성, 황혼기를 가져오는 자’[편집] 다장조, 4/4박자.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곡상을 풀어가는 교향시의 성격이다. 플루트와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조용히 시작하면서 마치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듯이 '화성'의 제 1주제가 들어간 음형(이하 "A음형"이라 칭함)이 더블베이스에 의해 나타난다. 목관이 이 A음형을 반복하고, 점차 현악기군과 목관이 더해지고 금관이 지속음을 내면서 멎는 듯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으로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행진곡 풍의 리듬을 피치카토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의욕적인 출발의 느낌을 주는 A음형의 금관의 화음이 상승, 하강을 반복하면서 고조되다가 하프와 현의 잡아채는 듯한 리듬에 목관이 처음에는 순응하다가 점차로 저항하는 듯이 확대되면서 상승한다. 확대된 목관이 점차 고조되어 금관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저항을 이겨낸 듯 see-saw 음형의 행진 리듬으로 바뀐다. see-saw 음형과 A음형이 혼합되어 반복되면서 점차 침잠하는 듯이 잦아들고 마치 고독한 승자의 모습을 묘사하듯 플루트와 하프의 투명한 울림만이 남는다. 오르간의 지속음과 하프와 목관이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금관의 see-saw 음형이 명상적인 느낌을 이끌어 내며 천천히 음색을 변화시켜 간다. 마침내 모든 욕심으로부터 초연해진 듯이, 음악은 서서히 높은 곳을 향해 사라진다. 제6곡 ‘천왕성, 마술사’[편집] 다장조, 6/4박자. 서주는 트럼펫과 테너 튜바, 베이스 튜바에 의해 "솔-미flat-라-시" 의 네 음으로 시작한다. 알렉산더 깁슨/RNO(Chandos) 음반의 내지 설명에 의하면. 이 네 음은 홀스트의 이름(GuStAv Holst)에서 따 온 것이라는 Malcolm MacDonald의 주장도 있다. 금관에 의해 제시된 네 음은 테너튜바와 베이스튜바가 모방하다가 팀파니에 의해 제지당하면서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어서 바순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른 목관들도 차례로 합류하고 더불어 속도도 빨라진다. 점차 고조된 뒤, 바순에 의해 다른 주제가 나타나고, 이 주제를 다른 목관들이 따라 하면서 확대 발전한다. 이어 금관에 의해서 '화성'의 제 2주제가 나타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절정에 다다른 후 점차 가라앉는다. 여기까지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가 카오스로부터 여러 신과 물질을 창조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이스 튜바에 의해서 서주에 나왔던 네 음이 다시 등장하고, 새로운 주제의 행진곡이 등장하면서 확대 변형 발전하면서 점차 고조된다. 온갖 타악기들이 난무하는 소란스러운 선율로 한동안 정신없이 연주하는데, 마치 바람기를 억제하지 못한 우라노스의 행각(?)을 보는 듯하다. 전 관현악의 코랄과 함께 오르간이 거칠은 음향으로 등장하면서 모두 침묵하고 눈치를 살피는 듯한 하프의 see-saw 음형이 마치 가이아의 사주를 받은 제우스와 맞선 우라노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침내 일격을 가하는 제우스의 모습이 오르간과 전 관현악에 의해 연주되고, 비참하게 사라져 가는 우라노스의 모습이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표현되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제7곡 ‘해왕성, 신비로운 자’[편집] 다장조, 5/4박자. 제목에 걸맞게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한다. 하프와 다른 목관들이 선율을 따르며 발전하고, 금관이 부드럽게 지속음으로 받쳐준다. 이어서 일렁이는 느낌의 첼레스타와 하프의 아르페지오를 타고 팀파니, 심벌즈, 사이드 드럼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목관 금관의 지속음이 신비로운 느낌을 채색하다가 점차 가라앉는다. 저음 현의 지속음이 깔린 채 베이스 오보에와 바순의 느릿한 상승을 다른 목관들이 이어받으며 반복하는 중에,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2부 여성합창이 보칼리제로 지속음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호른이 see-saw음형으로 화음을 연주하고,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 고조되었다가 사라지면, 박자를 세는 듯한 느낌의 하프를 타고 여성 합창이 앞서의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연주했던 선율을 재현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여성합창이 쉬는 사이 목관과 금관의 지속음과 타악기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하프 및 첼레스타의 아르페지오로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여성합창이 다시 등장하여 see-saw음형을 연주하면서 하프가 간간이 받쳐주다가 여성합창만이 연주된다. 이 부분에서 여성합창이 있는 곳의 문은 서서히 닫히도록 악보에 지시되어 있는데, 마치 보이저 2호가 마지막으로 해왕성 사진을 전송하고는 은하계 바깥으로 사라져 가듯이 여성합창도 점점 멀어진다. 다른 작곡가에 의한 추가 악장[편집] 명왕성[편집] 1930년 명왕성이 발견되었는데, 홀스트는 명왕성을 위한 곡을 쓰는 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00년 할레 오케스트라(Hallé Orchestra)의 위촉으로 콜린 매슈스가 〈명왕성, 새롭게 하는 자〉(Pluto, the renewer)를 써서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했다. 매슈스는 해왕성의 종결 부분을 명왕성으로 넘어가도록 고쳤다. 명왕성이 포함된 《행성》은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2000년 5월 11일 맨체스터에서 초연했다.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이 명왕성의 분류를 행성에서 외행성으로 바꾸면서 《행성》은 다시 지구를 제외한 모든 태양계의 행성을 다루는 곡이 되었다. 연주시간 : 약 6분 악기편성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 G조 베이스 플루트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호른 6, 트럼펫 4, 트롬본 3, 튜바, 유포니움, 팀파니 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자일러폰, 하프 2, 오르간,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각주[편집] ↑ 나중에 이 곡에 세실 스프링 라이스의 시를 붙여 영국의 애국가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하노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행성_(모음곡)&oldid=24487667" 분류: 관현악곡모음곡행성을 소재로 한 노래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Latina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6일 (수) 20: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행성의 제4곡 «목성, 즐거움을 가져오는 자»는 무슨 형식일까? |
레위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위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레위인 총인구 약 50만 ~ 60만 명 언어 히브리어, 영어 종교 유대교 민족계통 근연민족 유대인, 사마리아인 레위인(לויים)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레위를 직계 선조로 가지는 유대인 남성을 뜻한다. 고대의 유대인 사회에서 모든 레위인이 제사장 계급을 이루도록 한 것이 그 기원이다. 레위인의 혈통은 부계로 결정된다.[1] 목차 1 개요 2 주요 인물 2.1 고대 2.2 근대 3 각주 개요[편집]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레위인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레위 지파의 구성원으로, 야곱과 레아의 셋째 아들인 레위의 후손이다. 레위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에 포함된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민수기 1:47~54, 3:12),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후손이 각각 하나의 지파로 여겨지면서 열두 지파에서는 제외되었다(신명기 27:12~13).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이 되는 특수한 지파로서,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레위인이라는 말과 제사장이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제사장이 아론의 직계로 한정되면서부터 제사장이 아닌 레위 지파 사람이 레위인으로 불렸으며, 제사장을 도와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계급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들은 다윗 왕 시대에 3계급으로 나뉘고, 각 계급은 24반으로 분류되었다. 첫째 계급은 사제직이었고, 둘째 계급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악사의 역할을 하였으며, 셋째 계급은 성전지기 및 그 문지기였다. 그 밖에 모든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하는 자 외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의 생활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48개의 성읍과 각각의 땅을 제공하고, 또 국내의 농산물과 가축의 1/10을 주었는데, 그들은 다시 그 1/10을 사제에게 바쳤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의 기원이다. 신약시대에는 이미 그 제도나 세력이 미약해져서 성전 제사의식에서의 심부름을 하는 정도로 되었다. 주요 인물[편집] 고대[편집] 모세 아론 미리암 에제키엘 이사야 예레미야 사무엘 하바꾹 에즈라 세례자 요한 근대[편집] 프랭크 게리 프리모 레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뤼시앵 레비브륄 각주[편집] ↑ “Medical Definition of Levite”. 2017년 2월 19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레위인&oldid=19815390" 분류: 레위인토라의 인물히브리어 성경의 낱말과 구성직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تۆرکجهBrezhonegČeštinaDanskEnglishEsperantoEuskaraفارسیעבריתBahasa IndonesiaItalianoMalagasyNorskPolskiРусскийසිංහලSvensk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17일 (화) 13: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유대교의 레위인은 무엇인가? |
울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울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울르(고대 노르드어: Ullr)는 노르드 신화를 비롯한 게르만 신화에 널리 등장하는 존재다. 그는 신 또는 신을 나타내는 선사시대의 상형문자였다. 게르만어로 *Wulþuz, 중세 라틴화 노르드어로 올레루스(Ollerus), 현대 아이슬란드어로 위들뤼르(Ullur), 스칸디나비아 본토의 현대어(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 울(Ull)이라고 한다. 정황증거상 고대 게르만 세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신으로 생각되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문헌상의 기록은 매우 희박하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울르는 활과 스키의 신이며 시프의 아들인데 토르의 친아들은 아니라는 것이 전부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는 울르의 이름을 걸고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모습들이 포착되는데, 후대의 기록으로 가면 의식에서 이름을 거는 신이 토르 등으로 변한다. 목차 1 고고학적 발견 2 문헌상의 출전 2.1 데인인의 사적 2.2 고 에다 2.3 신 에다 2.4 스칼드 시가 3 이름의 어원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고고학적 발견[편집] 토르스베르크 이탄지에서 발견된 토르스베르크 물림쇠에 다음과 같은 푸타르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물건은 기원후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owlþuþewaz / niwajmariz 처음의 owlþu는 곧 wolþu-로, "영광" 또는 "영광스러운 존재"를 뜻하며, 고대 노르드어로 울르(Ullr), 고대 영어로 울도르(wuldor)라 한다. 두 번째 -þewaz는 "노예, 종"을 뜻하며, 합치면 "영광스러운 존재의 종", "울르를 섬기는 자(신관)"이 된다. Niwajmariz란 "명예로운"이라는 뜻이다. 문헌상의 출전[편집] 데인인의 사적[편집] 마법의 뼈다귀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올레루스. 16세기 목판화. 12세기 사람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노르만의 신들을 에우헤메리즘적으로 해석한 《데인인의 사적》을 썼는데, 여기 보면 마술적인 이동수단을 갖고 있는 교활한 마법사 "올레루스"(Ollerus)가 등장한다. Fama est, illum adeo praestigiarum usu calluisse, ut ad traicienda maria osse, quod diris carminibus obsignavisset, navigii loco uteretur nec eo segnius quam remigio praeiecta aquarum obstacula superaret. [1] 그는 특별한 뼈다귀를 가진 교활한 마법사였다. 그는 뼈다귀에 끔찍한 주문을 걸어두고, 배 대신 그 뼈다귀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녔다. 이 뼈다귀를 사용해 그는 자기 앞을 가로막는 물들을 모두 노를 저어 가는 만큼 빠르게 지나칠 수 있었다. (Elton's translation) 오딘이 추방당한 이후에는 올레루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올레루스는 10년동안 오딘을 참칭하여 다스리다가 진짜 오딘이 돌아오자 스웨덴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데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고 에다[편집] 보크스타 룬스톤의 암각화에 새겨진 스키를 타고 활을 든 남자. 울르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울르는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에서 그림니르(변장한 오딘)이 신들 각각을 열거할 때 언급된다. 벤저민 소프의 영역본을 중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르드어: Ýdalir heita þar er Ullr hefir sér of görva sali. 영어 중역: 그곳을 위달리르라고 불렀으니, 거기가 바로 울르가 자기 보금자리로 삼은 곳이다. "위달리르"(Ýdalir)란 "주목나무 골짜기"라는 뜻인데, 이 부분을 제외하면 신화의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주목나무는 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중요한 재료였고, "주목나무"라는 뜻의 "위"(ýr)는 곧 활을 가리키는 환유법으로 사용되었다. 울르의 궁전 이름이 위달리르라는 것은 울르가 활의 신이라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다.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의 다른 절에서 울르가 또 언급된다. 노르드어: Ullar hylli hefr ok allra goða hverr er tekr fyrstr á funa, því at opnir heimar verða of ása sonum, þá er hefja af hvera. 영어 중역: 솥들을 끌어올릴 때 에시르의 자식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불을 먼저 지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던 울르와 모든 신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소 애매하지만 어떤 종교적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울르는 신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 에다》에서 울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틀리의 서사시〉이다. 노르드어: Svá gangi þér, Atli, sem þú við Gunnar áttir eiða oft of svarða ok ár of nefnda, at sól inni suðrhöllu ok at Sigtýs bergi, hölkvi hvílbeðjar ok at hringi Ullar. 영어 중역: So be it with thee, Atli! as toward Gunnar thou hast held the oft-sworn oaths, formerly taken - by the southward verging sun, and by Sigtý’s hill, the secluded bed of rest, and by Ullr’s ring. 〈아틀리의 서사시〉와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은 현존하는 에다 시가들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울르에 대한 언급이 이 두 서사시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여기서도 울르는 어떤 의식과 관계되어 있는데, 그 의식은 반지를 가지고 무슨 맹세를 서약하는 것이다. 보다 후기의 문헌들에서는 이 의식을 토르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 신 에다[편집] 〈길피의 속임수〉 제31장에서 울르는 시프의 아들이자 시프의 남편 토르의 의붓아들이라고 한다. 울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Ullr heitir einn, sonr Sifjar, stjúpsonr Þórs. Hann er bogmaðr svá góðr ok skíðfœrr svá at engi má við hann keppask. Hann er ok fagr álitum ok hefir hermanns atgervi. Á hann er ok gott at heita í einvígi. [2] 시프의 아들이자 토르의 의붓아들 울르도 있었다. 그는 탁월한 명사수이자 따를 자가 없는 스키 주자였다. 그를 바라보면 아름다웠으며 전사로서의 풍모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싸움에 있어 그에게 부탁하는 것도 좋았다. 〈시어법〉에서 스노리는 케닝을 논하면서 울르를 다시 언급한다. 스노리는 독자들에게 울르가 스키-신, 활-신, 사냥-신, 방패-신 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방패를 ‘울르의 배’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감질나는 토막 사실들을 제외하면 스노리는 울르에 관한 신화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스노리에게 울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거나, 또는 잊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스칼드 시가[편집] 스노리가 방패를 ‘울르의 배’라고 부를 수 있다고 기록했는데, 스칼드 시가를 살펴보면 "아스크 울라르"(askr Ullar), "파르 울라르"(far Ullar), "쿌 울라르"(kjóll Ullar) 등의 케닝들이 발견된다. 이는 모두 ‘울르의 배’라는 뜻이고,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케닝의 기원은 불명이나 울르가 스키의 신이라는 것과 관계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초기의 스키 또는 썰매는 마치 방패를 눈 위에 엎어놓고 타고 다니는 것을 연상시킨다. 보다 후대의 아이슬란드어 문헌인 《라우파의 에다》에서는 울르의 배를 "스쿌드"(Skjöldr), 곧 "방패"라고 바로 부른다. 울르의 이름은 싸움꾼, 전사를 가리키는 케닝으로도 발견되는데, 이는 다른 남신들의 이름이 그렇게 사용된 것과 별다르지 않다. 울르 브란드스(Ullr brands): 검-전사, 검사 란드울르(rand-Ullr): 방패-전사, 방패수 울르 알름시마(Ullr almsíma): 활시위-전사, 궁수 [3] 〈토르의 송가〉, 〈기나긴 가을〉 등의 스칼드 시가와 에위스테인 발다손의 시가 파편에서 토르를 울르의 의붓아버지라고 하는데, 이는 스노리가 서술한 정보와 일치한다. 이름의 어원[편집] 울렌사케르의 휘장에 나타난 울르. "울르"(Ullr)라는 이름은 아마 고대 영어의 wuldor, 고트어의 wulþus와 어원이 같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두 말은 "영광"을 뜻한다. 복원된 게르만 조어 형태는 *Wulþuz이다. 같이 보기[편집] 스카디 참고 자료[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울르 vdeh노르드 신화등장인물에시르 델링그 로두르 로키 마니 메일리 모디와 마그니 발드르 발리 브라기 비다르 빌리와 베이 오드 오딘 울르 토르 튀르 크바시르 포르세티 헤르모드 헤임달 호드 회니르 아쉬뉴르 게르드 게푠 그나 난나 뇨룬 란 로픈 린드 바르 보르 빌 사가 솔 쇼픈 쉰 스노트라 스루드 스카디 시귄 시프 에이르 요르드 이둔 이르파 일름 토르게르드 홀가브루드 프리그 풀라 흘린 바니르 굴베이그 뇨르드 뇨르드의 처 프레이 프레이야 요트나르 군늘로드 그리드 라우페위 로기 미미르 바우기 바프스루드니르 베르겔미르 벨리 소크 수르트 수퉁그 스륌 신마라 야른삭사 에기르 우트가르다로키 위미르 샤치 휘미르 흐레스벨그 흐로드 흐룽그니르 흐륌 괴물 가름 니드호그 라타토스크 베드르폴니르와 수리 아우둠블라 요르문간드 펜리르 헬 요정 드베르그 알프 도크알프 료스알프 스바르트알프 디시르 노른 우르드 베르단디 스쿨드 발키리 브륀힐드 시그룬 … 인간 리프와 리프트라시르 아스크와 엠블라 에인헤랴르 인간 영웅들 군나르 라그나르 시구르드 시그문드 아틀리 헬기 호그니 … 그 외 뤼티르 베티르 보르 볼룬드 부리 스킨팍시와 흐림팍시 장소 긴눙가가프 니다벨리르 나스트론드 니플헤임 니플헬 무스펠스헤임 미드가르드 바나헤임 발홀 비그리드 비프로스트 스바르트알파헤임 아스가르드 우물들 미미스브룬느 흐베르겔미르 우르다르브룬느 우트가르드 위그드라실 요툰헤임 알프헤임 폴크방 헬헤임 사건 아스-반 전쟁 햐드닝가비그 핌불베트르 라그나로크 문헌 《데인인의 사적》 룬스톤 에다 《고 에다》 《신 에다》 사가 티르핑 대계 뵐숭 대계 사트르 스칼드 고대 노르드어 철자법 대중문화 사회 블로트 펠라그 게르만의 역법 헤이티 호르그 케닝그 욜 연회장 니드 종교의례 Numbers 세이드 스칼드 바이킹 시대 볼바 스캴드메르 참조 신 목록 북유럽 신화의 인물, 보물, 장소 목록 게르만 이교 아사트루 전거 통제 VIAF: 18134022 GND: 12354649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울르&oldid=22894629" 분류: 아스숨은 분류: 고대 노르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아이슬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Ænglisc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02: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노르만 신들을 해석해서 쓴 책의 제목은 무엇인가? |
울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울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울르(고대 노르드어: Ullr)는 노르드 신화를 비롯한 게르만 신화에 널리 등장하는 존재다. 그는 신 또는 신을 나타내는 선사시대의 상형문자였다. 게르만어로 *Wulþuz, 중세 라틴화 노르드어로 올레루스(Ollerus), 현대 아이슬란드어로 위들뤼르(Ullur), 스칸디나비아 본토의 현대어(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 울(Ull)이라고 한다. 정황증거상 고대 게르만 세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신으로 생각되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문헌상의 기록은 매우 희박하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울르는 활과 스키의 신이며 시프의 아들인데 토르의 친아들은 아니라는 것이 전부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는 울르의 이름을 걸고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모습들이 포착되는데, 후대의 기록으로 가면 의식에서 이름을 거는 신이 토르 등으로 변한다. 목차 1 고고학적 발견 2 문헌상의 출전 2.1 데인인의 사적 2.2 고 에다 2.3 신 에다 2.4 스칼드 시가 3 이름의 어원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고고학적 발견[편집] 토르스베르크 이탄지에서 발견된 토르스베르크 물림쇠에 다음과 같은 푸타르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물건은 기원후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owlþuþewaz / niwajmariz 처음의 owlþu는 곧 wolþu-로, "영광" 또는 "영광스러운 존재"를 뜻하며, 고대 노르드어로 울르(Ullr), 고대 영어로 울도르(wuldor)라 한다. 두 번째 -þewaz는 "노예, 종"을 뜻하며, 합치면 "영광스러운 존재의 종", "울르를 섬기는 자(신관)"이 된다. Niwajmariz란 "명예로운"이라는 뜻이다. 문헌상의 출전[편집] 데인인의 사적[편집] 마법의 뼈다귀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올레루스. 16세기 목판화. 12세기 사람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노르만의 신들을 에우헤메리즘적으로 해석한 《데인인의 사적》을 썼는데, 여기 보면 마술적인 이동수단을 갖고 있는 교활한 마법사 "올레루스"(Ollerus)가 등장한다. Fama est, illum adeo praestigiarum usu calluisse, ut ad traicienda maria osse, quod diris carminibus obsignavisset, navigii loco uteretur nec eo segnius quam remigio praeiecta aquarum obstacula superaret. [1] 그는 특별한 뼈다귀를 가진 교활한 마법사였다. 그는 뼈다귀에 끔찍한 주문을 걸어두고, 배 대신 그 뼈다귀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녔다. 이 뼈다귀를 사용해 그는 자기 앞을 가로막는 물들을 모두 노를 저어 가는 만큼 빠르게 지나칠 수 있었다. (Elton's translation) 오딘이 추방당한 이후에는 올레루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올레루스는 10년동안 오딘을 참칭하여 다스리다가 진짜 오딘이 돌아오자 스웨덴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데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고 에다[편집] 보크스타 룬스톤의 암각화에 새겨진 스키를 타고 활을 든 남자. 울르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울르는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에서 그림니르(변장한 오딘)이 신들 각각을 열거할 때 언급된다. 벤저민 소프의 영역본을 중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르드어: Ýdalir heita þar er Ullr hefir sér of görva sali. 영어 중역: 그곳을 위달리르라고 불렀으니, 거기가 바로 울르가 자기 보금자리로 삼은 곳이다. "위달리르"(Ýdalir)란 "주목나무 골짜기"라는 뜻인데, 이 부분을 제외하면 신화의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주목나무는 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중요한 재료였고, "주목나무"라는 뜻의 "위"(ýr)는 곧 활을 가리키는 환유법으로 사용되었다. 울르의 궁전 이름이 위달리르라는 것은 울르가 활의 신이라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다.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의 다른 절에서 울르가 또 언급된다. 노르드어: Ullar hylli hefr ok allra goða hverr er tekr fyrstr á funa, því at opnir heimar verða of ása sonum, þá er hefja af hvera. 영어 중역: 솥들을 끌어올릴 때 에시르의 자식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불을 먼저 지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던 울르와 모든 신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소 애매하지만 어떤 종교적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울르는 신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 에다》에서 울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틀리의 서사시〉이다. 노르드어: Svá gangi þér, Atli, sem þú við Gunnar áttir eiða oft of svarða ok ár of nefnda, at sól inni suðrhöllu ok at Sigtýs bergi, hölkvi hvílbeðjar ok at hringi Ullar. 영어 중역: So be it with thee, Atli! as toward Gunnar thou hast held the oft-sworn oaths, formerly taken - by the southward verging sun, and by Sigtý’s hill, the secluded bed of rest, and by Ullr’s ring. 〈아틀리의 서사시〉와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은 현존하는 에다 시가들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울르에 대한 언급이 이 두 서사시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여기서도 울르는 어떤 의식과 관계되어 있는데, 그 의식은 반지를 가지고 무슨 맹세를 서약하는 것이다. 보다 후기의 문헌들에서는 이 의식을 토르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 신 에다[편집] 〈길피의 속임수〉 제31장에서 울르는 시프의 아들이자 시프의 남편 토르의 의붓아들이라고 한다. 울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Ullr heitir einn, sonr Sifjar, stjúpsonr Þórs. Hann er bogmaðr svá góðr ok skíðfœrr svá at engi má við hann keppask. Hann er ok fagr álitum ok hefir hermanns atgervi. Á hann er ok gott at heita í einvígi. [2] 시프의 아들이자 토르의 의붓아들 울르도 있었다. 그는 탁월한 명사수이자 따를 자가 없는 스키 주자였다. 그를 바라보면 아름다웠으며 전사로서의 풍모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싸움에 있어 그에게 부탁하는 것도 좋았다. 〈시어법〉에서 스노리는 케닝을 논하면서 울르를 다시 언급한다. 스노리는 독자들에게 울르가 스키-신, 활-신, 사냥-신, 방패-신 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방패를 ‘울르의 배’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감질나는 토막 사실들을 제외하면 스노리는 울르에 관한 신화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스노리에게 울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거나, 또는 잊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스칼드 시가[편집] 스노리가 방패를 ‘울르의 배’라고 부를 수 있다고 기록했는데, 스칼드 시가를 살펴보면 "아스크 울라르"(askr Ullar), "파르 울라르"(far Ullar), "쿌 울라르"(kjóll Ullar) 등의 케닝들이 발견된다. 이는 모두 ‘울르의 배’라는 뜻이고,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케닝의 기원은 불명이나 울르가 스키의 신이라는 것과 관계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초기의 스키 또는 썰매는 마치 방패를 눈 위에 엎어놓고 타고 다니는 것을 연상시킨다. 보다 후대의 아이슬란드어 문헌인 《라우파의 에다》에서는 울르의 배를 "스쿌드"(Skjöldr), 곧 "방패"라고 바로 부른다. 울르의 이름은 싸움꾼, 전사를 가리키는 케닝으로도 발견되는데, 이는 다른 남신들의 이름이 그렇게 사용된 것과 별다르지 않다. 울르 브란드스(Ullr brands): 검-전사, 검사 란드울르(rand-Ullr): 방패-전사, 방패수 울르 알름시마(Ullr almsíma): 활시위-전사, 궁수 [3] 〈토르의 송가〉, 〈기나긴 가을〉 등의 스칼드 시가와 에위스테인 발다손의 시가 파편에서 토르를 울르의 의붓아버지라고 하는데, 이는 스노리가 서술한 정보와 일치한다. 이름의 어원[편집] 울렌사케르의 휘장에 나타난 울르. "울르"(Ullr)라는 이름은 아마 고대 영어의 wuldor, 고트어의 wulþus와 어원이 같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두 말은 "영광"을 뜻한다. 복원된 게르만 조어 형태는 *Wulþuz이다. 같이 보기[편집] 스카디 참고 자료[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울르 vdeh노르드 신화등장인물에시르 델링그 로두르 로키 마니 메일리 모디와 마그니 발드르 발리 브라기 비다르 빌리와 베이 오드 오딘 울르 토르 튀르 크바시르 포르세티 헤르모드 헤임달 호드 회니르 아쉬뉴르 게르드 게푠 그나 난나 뇨룬 란 로픈 린드 바르 보르 빌 사가 솔 쇼픈 쉰 스노트라 스루드 스카디 시귄 시프 에이르 요르드 이둔 이르파 일름 토르게르드 홀가브루드 프리그 풀라 흘린 바니르 굴베이그 뇨르드 뇨르드의 처 프레이 프레이야 요트나르 군늘로드 그리드 라우페위 로기 미미르 바우기 바프스루드니르 베르겔미르 벨리 소크 수르트 수퉁그 스륌 신마라 야른삭사 에기르 우트가르다로키 위미르 샤치 휘미르 흐레스벨그 흐로드 흐룽그니르 흐륌 괴물 가름 니드호그 라타토스크 베드르폴니르와 수리 아우둠블라 요르문간드 펜리르 헬 요정 드베르그 알프 도크알프 료스알프 스바르트알프 디시르 노른 우르드 베르단디 스쿨드 발키리 브륀힐드 시그룬 … 인간 리프와 리프트라시르 아스크와 엠블라 에인헤랴르 인간 영웅들 군나르 라그나르 시구르드 시그문드 아틀리 헬기 호그니 … 그 외 뤼티르 베티르 보르 볼룬드 부리 스킨팍시와 흐림팍시 장소 긴눙가가프 니다벨리르 나스트론드 니플헤임 니플헬 무스펠스헤임 미드가르드 바나헤임 발홀 비그리드 비프로스트 스바르트알파헤임 아스가르드 우물들 미미스브룬느 흐베르겔미르 우르다르브룬느 우트가르드 위그드라실 요툰헤임 알프헤임 폴크방 헬헤임 사건 아스-반 전쟁 햐드닝가비그 핌불베트르 라그나로크 문헌 《데인인의 사적》 룬스톤 에다 《고 에다》 《신 에다》 사가 티르핑 대계 뵐숭 대계 사트르 스칼드 고대 노르드어 철자법 대중문화 사회 블로트 펠라그 게르만의 역법 헤이티 호르그 케닝그 욜 연회장 니드 종교의례 Numbers 세이드 스칼드 바이킹 시대 볼바 스캴드메르 참조 신 목록 북유럽 신화의 인물, 보물, 장소 목록 게르만 이교 아사트루 전거 통제 VIAF: 18134022 GND: 12354649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울르&oldid=22894629" 분류: 아스숨은 분류: 고대 노르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아이슬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Ænglisc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02: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전사를 의미하는 단어로 울르의 다른 이름은? |
울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울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울르(고대 노르드어: Ullr)는 노르드 신화를 비롯한 게르만 신화에 널리 등장하는 존재다. 그는 신 또는 신을 나타내는 선사시대의 상형문자였다. 게르만어로 *Wulþuz, 중세 라틴화 노르드어로 올레루스(Ollerus), 현대 아이슬란드어로 위들뤼르(Ullur), 스칸디나비아 본토의 현대어(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 울(Ull)이라고 한다. 정황증거상 고대 게르만 세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신으로 생각되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문헌상의 기록은 매우 희박하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울르는 활과 스키의 신이며 시프의 아들인데 토르의 친아들은 아니라는 것이 전부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는 울르의 이름을 걸고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모습들이 포착되는데, 후대의 기록으로 가면 의식에서 이름을 거는 신이 토르 등으로 변한다. 목차 1 고고학적 발견 2 문헌상의 출전 2.1 데인인의 사적 2.2 고 에다 2.3 신 에다 2.4 스칼드 시가 3 이름의 어원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고고학적 발견[편집] 토르스베르크 이탄지에서 발견된 토르스베르크 물림쇠에 다음과 같은 푸타르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물건은 기원후 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owlþuþewaz / niwajmariz 처음의 owlþu는 곧 wolþu-로, "영광" 또는 "영광스러운 존재"를 뜻하며, 고대 노르드어로 울르(Ullr), 고대 영어로 울도르(wuldor)라 한다. 두 번째 -þewaz는 "노예, 종"을 뜻하며, 합치면 "영광스러운 존재의 종", "울르를 섬기는 자(신관)"이 된다. Niwajmariz란 "명예로운"이라는 뜻이다. 문헌상의 출전[편집] 데인인의 사적[편집] 마법의 뼈다귀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올레루스. 16세기 목판화. 12세기 사람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노르만의 신들을 에우헤메리즘적으로 해석한 《데인인의 사적》을 썼는데, 여기 보면 마술적인 이동수단을 갖고 있는 교활한 마법사 "올레루스"(Ollerus)가 등장한다. Fama est, illum adeo praestigiarum usu calluisse, ut ad traicienda maria osse, quod diris carminibus obsignavisset, navigii loco uteretur nec eo segnius quam remigio praeiecta aquarum obstacula superaret. [1] 그는 특별한 뼈다귀를 가진 교활한 마법사였다. 그는 뼈다귀에 끔찍한 주문을 걸어두고, 배 대신 그 뼈다귀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녔다. 이 뼈다귀를 사용해 그는 자기 앞을 가로막는 물들을 모두 노를 저어 가는 만큼 빠르게 지나칠 수 있었다. (Elton's translation) 오딘이 추방당한 이후에는 올레루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올레루스는 10년동안 오딘을 참칭하여 다스리다가 진짜 오딘이 돌아오자 스웨덴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데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고 에다[편집] 보크스타 룬스톤의 암각화에 새겨진 스키를 타고 활을 든 남자. 울르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울르는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에서 그림니르(변장한 오딘)이 신들 각각을 열거할 때 언급된다. 벤저민 소프의 영역본을 중역하면 다음과 같다. 노르드어: Ýdalir heita þar er Ullr hefir sér of görva sali. 영어 중역: 그곳을 위달리르라고 불렀으니, 거기가 바로 울르가 자기 보금자리로 삼은 곳이다. "위달리르"(Ýdalir)란 "주목나무 골짜기"라는 뜻인데, 이 부분을 제외하면 신화의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주목나무는 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중요한 재료였고, "주목나무"라는 뜻의 "위"(ýr)는 곧 활을 가리키는 환유법으로 사용되었다. 울르의 궁전 이름이 위달리르라는 것은 울르가 활의 신이라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다.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의 다른 절에서 울르가 또 언급된다. 노르드어: Ullar hylli hefr ok allra goða hverr er tekr fyrstr á funa, því at opnir heimar verða of ása sonum, þá er hefja af hvera. 영어 중역: 솥들을 끌어올릴 때 에시르의 자식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불을 먼저 지르고자 하는 자는 누구던 울르와 모든 신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소 애매하지만 어떤 종교적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울르는 신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 에다》에서 울르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틀리의 서사시〉이다. 노르드어: Svá gangi þér, Atli, sem þú við Gunnar áttir eiða oft of svarða ok ár of nefnda, at sól inni suðrhöllu ok at Sigtýs bergi, hölkvi hvílbeðjar ok at hringi Ullar. 영어 중역: So be it with thee, Atli! as toward Gunnar thou hast held the oft-sworn oaths, formerly taken - by the southward verging sun, and by Sigtý’s hill, the secluded bed of rest, and by Ullr’s ring. 〈아틀리의 서사시〉와 〈그림니르가 말하기를〉은 현존하는 에다 시가들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울르에 대한 언급이 이 두 서사시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여기서도 울르는 어떤 의식과 관계되어 있는데, 그 의식은 반지를 가지고 무슨 맹세를 서약하는 것이다. 보다 후기의 문헌들에서는 이 의식을 토르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 신 에다[편집] 〈길피의 속임수〉 제31장에서 울르는 시프의 아들이자 시프의 남편 토르의 의붓아들이라고 한다. 울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Ullr heitir einn, sonr Sifjar, stjúpsonr Þórs. Hann er bogmaðr svá góðr ok skíðfœrr svá at engi má við hann keppask. Hann er ok fagr álitum ok hefir hermanns atgervi. Á hann er ok gott at heita í einvígi. [2] 시프의 아들이자 토르의 의붓아들 울르도 있었다. 그는 탁월한 명사수이자 따를 자가 없는 스키 주자였다. 그를 바라보면 아름다웠으며 전사로서의 풍모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싸움에 있어 그에게 부탁하는 것도 좋았다. 〈시어법〉에서 스노리는 케닝을 논하면서 울르를 다시 언급한다. 스노리는 독자들에게 울르가 스키-신, 활-신, 사냥-신, 방패-신 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방패를 ‘울르의 배’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감질나는 토막 사실들을 제외하면 스노리는 울르에 관한 신화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스노리에게 울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거나, 또는 잊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스칼드 시가[편집] 스노리가 방패를 ‘울르의 배’라고 부를 수 있다고 기록했는데, 스칼드 시가를 살펴보면 "아스크 울라르"(askr Ullar), "파르 울라르"(far Ullar), "쿌 울라르"(kjóll Ullar) 등의 케닝들이 발견된다. 이는 모두 ‘울르의 배’라는 뜻이고,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케닝의 기원은 불명이나 울르가 스키의 신이라는 것과 관계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초기의 스키 또는 썰매는 마치 방패를 눈 위에 엎어놓고 타고 다니는 것을 연상시킨다. 보다 후대의 아이슬란드어 문헌인 《라우파의 에다》에서는 울르의 배를 "스쿌드"(Skjöldr), 곧 "방패"라고 바로 부른다. 울르의 이름은 싸움꾼, 전사를 가리키는 케닝으로도 발견되는데, 이는 다른 남신들의 이름이 그렇게 사용된 것과 별다르지 않다. 울르 브란드스(Ullr brands): 검-전사, 검사 란드울르(rand-Ullr): 방패-전사, 방패수 울르 알름시마(Ullr almsíma): 활시위-전사, 궁수 [3] 〈토르의 송가〉, 〈기나긴 가을〉 등의 스칼드 시가와 에위스테인 발다손의 시가 파편에서 토르를 울르의 의붓아버지라고 하는데, 이는 스노리가 서술한 정보와 일치한다. 이름의 어원[편집] 울렌사케르의 휘장에 나타난 울르. "울르"(Ullr)라는 이름은 아마 고대 영어의 wuldor, 고트어의 wulþus와 어원이 같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두 말은 "영광"을 뜻한다. 복원된 게르만 조어 형태는 *Wulþuz이다. 같이 보기[편집] 스카디 참고 자료[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울르 vdeh노르드 신화등장인물에시르 델링그 로두르 로키 마니 메일리 모디와 마그니 발드르 발리 브라기 비다르 빌리와 베이 오드 오딘 울르 토르 튀르 크바시르 포르세티 헤르모드 헤임달 호드 회니르 아쉬뉴르 게르드 게푠 그나 난나 뇨룬 란 로픈 린드 바르 보르 빌 사가 솔 쇼픈 쉰 스노트라 스루드 스카디 시귄 시프 에이르 요르드 이둔 이르파 일름 토르게르드 홀가브루드 프리그 풀라 흘린 바니르 굴베이그 뇨르드 뇨르드의 처 프레이 프레이야 요트나르 군늘로드 그리드 라우페위 로기 미미르 바우기 바프스루드니르 베르겔미르 벨리 소크 수르트 수퉁그 스륌 신마라 야른삭사 에기르 우트가르다로키 위미르 샤치 휘미르 흐레스벨그 흐로드 흐룽그니르 흐륌 괴물 가름 니드호그 라타토스크 베드르폴니르와 수리 아우둠블라 요르문간드 펜리르 헬 요정 드베르그 알프 도크알프 료스알프 스바르트알프 디시르 노른 우르드 베르단디 스쿨드 발키리 브륀힐드 시그룬 … 인간 리프와 리프트라시르 아스크와 엠블라 에인헤랴르 인간 영웅들 군나르 라그나르 시구르드 시그문드 아틀리 헬기 호그니 … 그 외 뤼티르 베티르 보르 볼룬드 부리 스킨팍시와 흐림팍시 장소 긴눙가가프 니다벨리르 나스트론드 니플헤임 니플헬 무스펠스헤임 미드가르드 바나헤임 발홀 비그리드 비프로스트 스바르트알파헤임 아스가르드 우물들 미미스브룬느 흐베르겔미르 우르다르브룬느 우트가르드 위그드라실 요툰헤임 알프헤임 폴크방 헬헤임 사건 아스-반 전쟁 햐드닝가비그 핌불베트르 라그나로크 문헌 《데인인의 사적》 룬스톤 에다 《고 에다》 《신 에다》 사가 티르핑 대계 뵐숭 대계 사트르 스칼드 고대 노르드어 철자법 대중문화 사회 블로트 펠라그 게르만의 역법 헤이티 호르그 케닝그 욜 연회장 니드 종교의례 Numbers 세이드 스칼드 바이킹 시대 볼바 스캴드메르 참조 신 목록 북유럽 신화의 인물, 보물, 장소 목록 게르만 이교 아사트루 전거 통제 VIAF: 18134022 GND: 12354649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울르&oldid=22894629" 분류: 아스숨은 분류: 고대 노르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아이슬란드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Ænglisc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Íslensk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02:2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울르의 의붓아버지는 누구인가? |
미워도 다시 한 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워도 다시 한 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1968년 개봉한 영화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미워도 다시 한 번 감독 정소영 제작 한갑진 각본 이성재 촬영 안창복 편집 현동춘 음악 김용환 개봉일 1968년 7월 16일 언어 한국어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정소영이 감독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1968년 7월 16일에 국도극장에서 단관 개봉되어 370,005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1] 한국적인 멜로 드라마의 전형으로, 통속적인 소재로 이만큼 흥행에 성공하기도 드물었다. 제12회 부일상에서 감독상과 여우 조연상(전계현)을 수상했다. 목차 1 줄거리 2 출연 배우 3 제작진 4 각주 줄거리[편집] 유치원 교사인 혜영은 혼자 하숙하는 신호를 여러가지로 돌봐주다 서로 사랑하게 되고 아이까지 갖는다. 그러나 신호는 유부남이었고, 혜영은 시골에서 신호의 아내와 아이들이 상경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혜영은 신호 곁을 떠나 바닷가에서 영신을 낳아 혼자 기른다. 영신이 어느 정도 자라자 오빠가 찾아와 아이를 신호에게 보낼 것을 권유한다. 혜영은 아이의 장래를 위해 신호에게 아이를 보내기로 결심하고, 신호의 아내에게 아이를 잘 길러달라고 부탁한다. 신호와 신호의 아내는 아이를 잘 돌보려 애쓰지만 아이는 좀처럼 신호의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엄마를 그리워 한다. 결국 아이는 엄마를 찾아가려다 길을 잃는다. 비오는 밤에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찾아나선 신호는 집 근처에서 아이를 발견한다. 신호는 화를 참지 못해 아이를 야단치고 때마침 아이를 보러 집에 찾아온 혜영이 그 모습을 보고 만다. 혜영은 아이를 자신이 길러야겠다고 결심하고 아이를 다시 시골로 데려간다. 출연 배우[편집] 신영균: 신호 역 문희: 혜영 역 김정훈: 영신 역 전계현: 신호 아내 역 안승훈: 선욱 남편 김종만 역 박암 이충범 김정옥 김신명 제작진[편집] 제작: 한갑진 기획: 정소영 원작: 이성재 각본: 이성재 촬영: 안창복 조명: 이기섭 음악: 김용환 편집: 현동춘 미술: 이문현 제작사: 한진흥업 각주[편집]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미워도 다시 한번"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워도_다시_한_번&oldid=22164119" 분류: 대한민국의 영화 작품한국어 영화 작품1968년 영화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8월 31일 (금) 02: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주인공이자 유치원 교사인 이 캐릭터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동막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막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의 역에 관한 것입니다. 용산선 상에 있던 역에 대해서는 동막역 (서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동막(인천광역시 평생학습관) 역명판 승강장 개괄 관할 기관 인천교통공사 소재지 인천광역시 연수구 경원대로 지하80 개업일 1999년 10월 6일 역 번호 I132 승강장 구조 2면 3선 노선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계양 기점 22.9 km ← 동춘 (1.0 km) 캠퍼스타운 →(1.6 km) 동막역(東幕驛)은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있는 인천교통공사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의 지하철역이다. 부역명은 인천광역시 평생학습관이다. 심야에 1편성이 주박한다. 목차 1 역사 2 구조 2.1 승강장 3 역 주변 4 이용객 변동 5 사진 6 인접한 역 7 각주 8 외부 링크 역사[편집] 1994년 3월 19일: 동막역으로 역명 결정[1] 1999년 10월 6일: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개통과 함께 종착역으로 영업 개시[2] 2009년 6월 1일: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국제업무지구역 연장 개통과 함께 중간역으로 전환, 시·종착 기능 폐지 2010년: 승강장 스크린도어 설치 완료 (동쪽 승강장 제외) 구조[편집] 지하 2층 규모의 지하역이다. 지하 1층에 개찰구 및 역무 시설, 지하 2층에 승강장이 있다. 각 층은 계단 및 엘리베이터로 연결된다. 출구는 모두 4곳이다. 승강장[편집] 2면 3선, 흔히 “2섬 3선식”으로 불리는 구조이다. 개통 당시에는 서측 승강장의 양 면을 당역 종착 열차가, 동측 승강장의 양 면을 당역 시발 열차가 각각 사용하였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이 국제업무지구역 방면으로 연장된 이후에 동측 승강장은 폐쇄되었으며, 서측 승강장의 두 면을 각 방면별로 나누어 사용한다. 스크린도어는 현재 사용 중인 서측 승강장에만 설치되어 있다. 별도의 승강장 번호는 설정되어 있지 않다. 동춘 ↑ 서 | 하 중하 | 중상 상 | 동 ↓ 캠퍼스타운 하선 ■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센트럴파크 · 국제업무지구 방면 중하선 원인재 · 부평 · 부평구청 · 계양 방면 중상선 미사용 상선 역 주변[편집] 남동국가산업단지(2단지) 인천대건고등학교 인천박문초등학교 인천뷰티예술고등학교 승기하수처리장 인천서면초등학교 인천시립롤러스케이트장 인천신송고등학교 인천신송중학교 인천광역시 평생학습관 이용객 변동[편집] 노선 일평균 인원수 (명/일) 각주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인천1호선 승차 3,249 3,364 4,013 5,452 5,924 6,815 6,059 5,506 5,840 6,181 [3] 하차 3,293 3,434 4,078 5,370 5,809 6,669 5,895 5,321 5,646 5,952 승하차 6,542 6,817 8,092 10,823 11,733 13,484 11,955 10,828 11,486 12,133 노선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인천1호선 승차 6,432 6,228 6,004 6,208 6,231 하차 6,178 6,014 5,729 5,925 5,881 승하차 12,610 12,242 11,733 12,133 12,112 사진[편집] 스크린도어 설치 이전의 승강장 대합실 1번 출입구 폐쇄된 동측 승강장 인접한 역[편집] 인천 도시철도 1호선 I131 동춘계양 방면 ■ 인천 도시철도 1호선 I133 캠퍼스타운국제업무지구 방면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동막역 ↑ 인천직할시고시 제94-35호, 1994년 3월 19일. ↑ 인천광역시지하철공사공고 제1999-54호, 1999년 10월 4일. ↑ 인천교통공사 > 알림마당 > 자료실 > 일반 자료실 외부 링크[편집] 인천교통공사 동막(인천광역시 평생학습관)역 (철도 통합정보시스템) vdeh인천 도시철도 1호선계양 - 귤현 - 박촌 - 임학 - 계산 - 경인교대입구 - 작전 - 갈산 - 부평구청 - 부평시장 - 부평 - 동수 - 부평삼거리 - 간석오거리 - 인천시청 - 예술회관 - 인천터미널 - 문학경기장 - 선학 - 신연수 - 원인재 - 동춘 - 동막 - 캠퍼스타운 - 테크노파크 - 지식정보단지 - 인천대입구 - 센트럴파크 - 국제업무지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동막역&oldid=24189080" 분류: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인천 연수구의 전철역1999년 개업한 철도역숨은 분류: 지도가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Ido日本語Norsk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1: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동막역의 2017년 총 승객인원은 몇명일까? |
김치찌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치찌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치찌개 김치찌개 김치찌개(영어: kimchi-jjigae 또는 Kimchi stew)는 대표적인 한국 요리 중 하나로, 김치를 넣고 얼큰하게 끓인 찌개이다.[1] 된장찌개, 순두부찌개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찌개 요리이다. 목차 1 역사 2 재료 3 영양 4 종류 5 같이 보기 6 각주 역사[편집] 김치찌개는 고추, 배추, 소금, 고추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김치가 등장했을 시기에 동시기에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치가 너무 시어지고 염분도가 높아 생식이 어려워질 경우, 또는 양을 늘리기 위해 물에 넣어 끓여먹던 방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궁중요리에도 소개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이런식의 김치가 좋아 "김치좋지!"라고 하다가 ‘김치조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재료[편집] 재료가 간단하고 만들기 쉽기 때문에 한국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김치찌개에는 배추김치와 채소, 두부, 육류, 어패류 등이 들어가는데, 보통 육류와 해산물은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 육류는 주로 돼지고기를 넣고, 쇠고기는 쉽게 질겨서 일반적으론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해산물은 주로 참치를 넣으며, 간혹 꽁치를 쓰기도 한다. 다른 한국 요리처럼 반찬과 밥이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다. 김치찌개를 끓이다가 고춧가루를 첨가하면 맛과 색감이 좋아진다고 한다. 김치찌개에는 어느 정도 발효가 되어 신 맛이 나는 김치를 사용하는데, 담근 지 얼마 안 된 김치를 사용하면 특유의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 김치는 바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기름에 볶아서 사용하면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볶는 기름은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주로 사용된다. 돼지고기와 곁들일 경우 라드(혹은 돼지 비계)를 이용해서 볶아도 구수한 맛이 나온다. 고기나 해산물을 곁들일 때 잡내를 없애기 위해 된장을 약간 풀어 넣을 수도 있다. 된장 대신 청주나 소주 등의 술을 넣어도 같은 효과가 나며, 조리 중간에 넣은 마늘과 양파로도 약간의 잡내를 잡을 수도 있다. 또는 매우 신 김치를 이용하면 이들 재료를 추가하지 않아도 잡내를 없앨 수 있다. 끓일때 신맛이 강하거나 할 경우 설탕과 소금을 넣어서 감칠맛을 더하기도 한다. 영양[편집] 영양적으로는 김치 외에 다른 재료를 넣어 영양소를 보충할 수 있으나, 김치는 높은 온도로 끓일 경우 유산균이 파괴되므로 영양적 면이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김치와 다른 부가재료 때문에 나트륨 함량도 매우 높으며, 볶을 때 사용되는 기름 때문에 지방 함량도 높은 편이다. 종류[편집] 참치 김치찌개 꽁치 김치찌개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김치찌개 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부대찌개 오모리 김치찌개 라면 각주[편집] ↑ “김치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5년 9월 11일에 확인함. vdeh한국인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2004년 된장찌개 김치찌개 김치 불고기 비빔밥 삼겹살 청국장 갈비찜 갈비 잡채 2014년 김치찌개 된장찌개 김치 불고기 비빔밥 잡채 갈비 청국장 삼겹살 갈비찜 닭볶음탕 범례 : 진한 글씨는 1위 선정출처 : 한국갤럽조사연구소 (http://www.gallup.co.kr/) vdeh한국인이 좋아하는 안주 삼겹살 치킨 오징어 김치찌개 과일 회 파전 골뱅이 땅콩 족발 오뎅탕 고기 매운탕 마른안주 소시지 두부김치 범례 : 진한 글씨는 1위 선정출처 : 한국갤럽조사연구소 (http://www.gallup.co.kr/) 이 글은 한국 요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치찌개&oldid=24452623" 분류: 김치 요리찌개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한국 요리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MagyarBahasa Indonesia日本語JawaBahasa Melayu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9일 (수) 23: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치찌개의 재료에는 무엇이 있어? |
이현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현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현보의 초상 이현보(李賢輔, 1467년 8월 28일(음력 7월 29일)~ 1555년 7월 1일(음력 6월 13일))는 조선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賓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관련 작품 3.1 어부사 4 저서 5 문화재 6 드라마 7 갤러리 8 각주 생애[편집] 이흠(李欽)의 아들로 안동 도산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1498년 (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7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농암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때 조선 중종 임금과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소매를 뿌리쳐 거절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가에서 배를 탈 때 배에는 오직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전사옹(田舍翁)으로 자처하며 집 앞 시냇가에 배를 띄우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니 사람들이 농암을 신선으로 여겼다. 특히 농암은 송재 이우를 비롯하여 그 조카 퇴계 이황과도 대를 이어가며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농암의 벼슬은 비록 참판에 그쳤으나 품계는 조선 명종 치세때인 1549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명종실록이현보의 졸기에서는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여 으뜸으로 친다고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노나라 래자에 비견되었고 1519년 안동부사 재직당시 중양절에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을 열어 부모님을 포함한 고을의 80이상 노인들을 초대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님을 즐겁게 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聾巖)문집>에 수록되어 있다.[1] 가족 관계[편집] 고조부 : 이헌(李軒) - 고려말에 군기감소윤을 지냈다. 영천이씨 소윤공파의 파조이다. 증조부 : 이파(李坡) 조부 : 이효손(李孝孫) 아버지 : 이흠(李欽) 어머니 : 안동 권씨, 권겸의 딸 부인 : 안동 권씨, 권효성의 딸 장남 : 이석량(李碩樑) 차남 : 이문량(李文樑) 삼남 : 이희량(李希樑) 사남 : 이중량(李仲樑) 오남 : 이계량(李季樑) 육남 : 이숙량(李叔樑) 관련 작품[편집] 어부사[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어부사 중종 때 이현보는 연시조인 어부단가(漁父短歌)를 지었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어부 단가 10수를 고쳐 지은 것이다. 모두 5장으로 내용은 어부의 생활을 읊은 것이며 본래의 어부 단가 10수는 전하지 않는다. 그 가사가<청구영언><해동가요>에 전해 온다.[2] 주제: 강호 한정(江湖 閑情). 자연에 은거하는 어부의 생활 해제: 자연을 벗하며 고기잡이를 하는 한가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부는 "가어옹(假漁翁)"으로, 실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어옹"이란 속세를 떠나 강호에서 낚시하면서 시나 읊고 술잔을 기울이던 양반을 이르는 말로, 작품에서도 실제 어부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천심녹수(千尋錄水)", "만첩청산(萬疊靑山)"과 같이 상투적인 용어를 구사하여 관념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어부의 삶이란 곧 자연 속에서의 은둔 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5수의 초장과 중장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다. 저서[편집] 농암문집 문화재[편집] 이현보 초상 - 보물 제872호 농암각자 -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3호 농암 영정 후사본 및 금서대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드라마[편집]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한동환) 갤러리[편집] 농암 영정 후사본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이현보〉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어부사(漁父詞)〉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2001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vdeh조선조 청백리 218인태조조 5인 1 참찬 안성 2 찬성사 우현보 3 제학 류순 4 고려주서 길재 5 고려장령 서견 태종조 8인 6 절도사 경의 7 참의 이지직 8 대사성 김약항 9 관찰사 이백지 10 참찬 최유경 11 좌의정 이원 12 대사헌 박서생 13 판돈녕 최사의 세종조 15인 14 판윤 정척 15 부제학 최만리 16 영의정 황희 17 영의정 류관 18 좌의정 맹사성 19 좌참찬 류겸 20 익평군 이석근 21 주부 민불탐 22 참의 홍계방 23 승지 박팽년 24 관찰사 이정보 25 판관 이지 26 좌찬성 황효원 27 이조판서 류염 28 장령 김장 세조조 7인 29 대사헌 노숙동 30 우의정 정문형 31 판중추 박강 32 부윤 이언 33 판서 기건 34 군수 곽안방 35 판윤 김종순 성종조 15인 36 직제학 정성근 37 예조판서 임정 38 참찬 성형 39 우의정 허종 40 우의정 허침 41 우찬성 박열 42 직제학 윤석보 43 영의정 구치관 44 참찬 이훈 45 판중추 이현보 46 판서 김겸광 47 사성 안팽명 48 동지돈 양관 49 부제학 박처륜 50 보덕 조지서 51 대사헌 민휘 52 관찰사 이신효 53 참판 이순 54 지중추 이약동 55 판서 류훈 중종조 45인 56 판관 정매신 57 이조판서 조사수 58 형조참판 최명창 59 전직 권빈 60 공조판서 김무 61 사웅전 조치우 62 병마절도사 오세한 63 판중추 송흠 64 영의정 김전 65 사건 강숙둘 66 군수 이선장 67 대사간 류헌 68 병조판서 이화 69 형조판서 김종직 70 찬성 정갑손 71 영의정 정창손 72 이조판서 류빈 73 이조판서 이숭원 74 집의 류희철 75 공조참판 김흔 76 참찬 손중돈 77 시정 표빈 78 판중추 조원기 79 예조의랑 양지손 80 첨정 김연수 81 이조판서 박상 82 판중추 윤사익 83 대사성 이철균 84 찬성 이언적 85 판서 김정 86 수군절도사 유찬 87 형조판서 한형윤 88 이조판서 신공제 89 공조판서 김양진 90 사인 어영준 명종조 45인 91 군수 정연 92 병조참판 윤부 93 관찰사 이세장 94 찬성 정종영 95 우의정 안현 96 참찬 박수량 97 정랑 김순 98 지돈녕 임호신 99 형조의랑 임보신 100 영의정 홍섬 101 좌의정 이명 102 수군절도사 이영 103 이조참판 이몽필 104 판서 홍담 105 호조판서 성세장 106 판서 윤춘년 107 찬성 윤현 108 부정 류혼 109 부정 우세겸 110 이조판서 박영준 111 참판 박민헌 112 공조정랑 이증영 113 직장 김몽좌 114 영의정 이준경 115 찬성 주세붕 116 판서 김개 102 찬성 이황 118 판중추 송찬 119 좌윤 허세린 120 별좌 안잠 121 사용 김팽령 122 사재정 강윤권 123 이조판서 오상 124 목사 신잠 125 부사 김우 126 이조참판 이중경 127 군수 안종전 128 부사 김광 129 정랑 유언겸 130 현령 변훈남 131 집의 김약묵 132 판서 노진 133 목사 신사형 134 대사간 김취문 135 ???? 송익경 선조조 23인 136 우의정 심수경 137 이조판서 허잠 138 이조판서 이기 139 예조판서 이우직 140 영의정 이원익 141 영의정 류성룡 141 영의정 이항복 143 찬성 이직언 144 참찬 백인걸 145 ???? 이시언 146 좌의정 최흥원 147 병마절도사 장필무 148 이조판서 안자유 149 병마절도사 이제신 150 찬성 정곤수 151 판중추 김수 152 참찬 이광정 143 이조판서 이후백 154 좌의정 심희수 155 이조판서 성영 156 좌의정 허욱 157 대사헌 이유중 158 승지 최여림 159 참판 김장생 160 장령 이기설 161 판서 오억령 162 직제학 김행 인조조 13인 163 영의정 김상헌 164 판관 김시양 165 참판 민여임 166 이조판서 이안눌 167 대사헌 김덕함 168 참판 이명준 169 병마절도사 성하종 170 공조참판 최진립 171 영의정 이시백 172 영의정 홍명하 173 대사헌 신경진 174 정랑 구곤원 175 영중추 김신국 숙종조 22인 176 좌의정 이상진 177 판중추 조경 179 참찬 강백년 179 이조참판 조석윤 180 이조참판 유경창 181 참찬 박신규 182 지중추 최관 183 좌윤 이지온 184 부사 성이성 185 참지 이후정 186 진선 조속 187 정랑 홍무 188 수군절도사 홍우량 189 부사 강열 190 부사 이태영 191 판서 이세화 192 대사간 강세구 193 장령 윤추 194 부사 강유후 195 부사 최경창 196 병조판서 윤지인 197 우윤 이제 경종조 6인 198 영의정 유상운 199 관찰사 송정규 200 도정 강석범 201 부사 이명준 202 현납 김두남 203 판서 이하원 영조조 9인 204 수군절도사 허정 205 부제학 이병태 206 형조판서 윤용 207 참판 한덕필 208 형조판서 정형복 209 세마 최유현 210 병조판서 윤득재 211 호조판서 이태중 212 ???? 이겸진 정조조 2인 213 참찬 이의필 214 참판 이단석 순조조 15인 215 부사 남이형 216 판서 서기순 217 관찰사 한익상 218 관찰사 심의신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현보&oldid=24186420" 분류: 1467년 태어남1555년 죽음조선의 문신조선의 시인영천 이씨경상북도 출신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유학자조선의 작가조선의 저술가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4: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어부단가의 유래와 주제 및 해석은? |
이현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현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현보의 초상 이현보(李賢輔, 1467년 8월 28일(음력 7월 29일)~ 1555년 7월 1일(음력 6월 13일))는 조선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賓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관련 작품 3.1 어부사 4 저서 5 문화재 6 드라마 7 갤러리 8 각주 생애[편집] 이흠(李欽)의 아들로 안동 도산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1498년 (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7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농암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때 조선 중종 임금과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소매를 뿌리쳐 거절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가에서 배를 탈 때 배에는 오직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전사옹(田舍翁)으로 자처하며 집 앞 시냇가에 배를 띄우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니 사람들이 농암을 신선으로 여겼다. 특히 농암은 송재 이우를 비롯하여 그 조카 퇴계 이황과도 대를 이어가며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농암의 벼슬은 비록 참판에 그쳤으나 품계는 조선 명종 치세때인 1549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명종실록이현보의 졸기에서는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여 으뜸으로 친다고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노나라 래자에 비견되었고 1519년 안동부사 재직당시 중양절에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을 열어 부모님을 포함한 고을의 80이상 노인들을 초대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님을 즐겁게 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聾巖)문집>에 수록되어 있다.[1] 가족 관계[편집] 고조부 : 이헌(李軒) - 고려말에 군기감소윤을 지냈다. 영천이씨 소윤공파의 파조이다. 증조부 : 이파(李坡) 조부 : 이효손(李孝孫) 아버지 : 이흠(李欽) 어머니 : 안동 권씨, 권겸의 딸 부인 : 안동 권씨, 권효성의 딸 장남 : 이석량(李碩樑) 차남 : 이문량(李文樑) 삼남 : 이희량(李希樑) 사남 : 이중량(李仲樑) 오남 : 이계량(李季樑) 육남 : 이숙량(李叔樑) 관련 작품[편집] 어부사[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어부사 중종 때 이현보는 연시조인 어부단가(漁父短歌)를 지었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어부 단가 10수를 고쳐 지은 것이다. 모두 5장으로 내용은 어부의 생활을 읊은 것이며 본래의 어부 단가 10수는 전하지 않는다. 그 가사가<청구영언><해동가요>에 전해 온다.[2] 주제: 강호 한정(江湖 閑情). 자연에 은거하는 어부의 생활 해제: 자연을 벗하며 고기잡이를 하는 한가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부는 "가어옹(假漁翁)"으로, 실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어옹"이란 속세를 떠나 강호에서 낚시하면서 시나 읊고 술잔을 기울이던 양반을 이르는 말로, 작품에서도 실제 어부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천심녹수(千尋錄水)", "만첩청산(萬疊靑山)"과 같이 상투적인 용어를 구사하여 관념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어부의 삶이란 곧 자연 속에서의 은둔 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5수의 초장과 중장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다. 저서[편집] 농암문집 문화재[편집] 이현보 초상 - 보물 제872호 농암각자 -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3호 농암 영정 후사본 및 금서대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드라마[편집]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한동환) 갤러리[편집] 농암 영정 후사본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이현보〉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어부사(漁父詞)〉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vdeh2001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1월 김부식 2월 최용신 3월 강항 4월 함석헌 5월 지눌 6월 이병기 7월 이현보 8월 오세창 9월 허균·허난설헌 10월 설총 11월 의천 12월 송만갑 vdeh조선조 청백리 218인태조조 5인 1 참찬 안성 2 찬성사 우현보 3 제학 류순 4 고려주서 길재 5 고려장령 서견 태종조 8인 6 절도사 경의 7 참의 이지직 8 대사성 김약항 9 관찰사 이백지 10 참찬 최유경 11 좌의정 이원 12 대사헌 박서생 13 판돈녕 최사의 세종조 15인 14 판윤 정척 15 부제학 최만리 16 영의정 황희 17 영의정 류관 18 좌의정 맹사성 19 좌참찬 류겸 20 익평군 이석근 21 주부 민불탐 22 참의 홍계방 23 승지 박팽년 24 관찰사 이정보 25 판관 이지 26 좌찬성 황효원 27 이조판서 류염 28 장령 김장 세조조 7인 29 대사헌 노숙동 30 우의정 정문형 31 판중추 박강 32 부윤 이언 33 판서 기건 34 군수 곽안방 35 판윤 김종순 성종조 15인 36 직제학 정성근 37 예조판서 임정 38 참찬 성형 39 우의정 허종 40 우의정 허침 41 우찬성 박열 42 직제학 윤석보 43 영의정 구치관 44 참찬 이훈 45 판중추 이현보 46 판서 김겸광 47 사성 안팽명 48 동지돈 양관 49 부제학 박처륜 50 보덕 조지서 51 대사헌 민휘 52 관찰사 이신효 53 참판 이순 54 지중추 이약동 55 판서 류훈 중종조 45인 56 판관 정매신 57 이조판서 조사수 58 형조참판 최명창 59 전직 권빈 60 공조판서 김무 61 사웅전 조치우 62 병마절도사 오세한 63 판중추 송흠 64 영의정 김전 65 사건 강숙둘 66 군수 이선장 67 대사간 류헌 68 병조판서 이화 69 형조판서 김종직 70 찬성 정갑손 71 영의정 정창손 72 이조판서 류빈 73 이조판서 이숭원 74 집의 류희철 75 공조참판 김흔 76 참찬 손중돈 77 시정 표빈 78 판중추 조원기 79 예조의랑 양지손 80 첨정 김연수 81 이조판서 박상 82 판중추 윤사익 83 대사성 이철균 84 찬성 이언적 85 판서 김정 86 수군절도사 유찬 87 형조판서 한형윤 88 이조판서 신공제 89 공조판서 김양진 90 사인 어영준 명종조 45인 91 군수 정연 92 병조참판 윤부 93 관찰사 이세장 94 찬성 정종영 95 우의정 안현 96 참찬 박수량 97 정랑 김순 98 지돈녕 임호신 99 형조의랑 임보신 100 영의정 홍섬 101 좌의정 이명 102 수군절도사 이영 103 이조참판 이몽필 104 판서 홍담 105 호조판서 성세장 106 판서 윤춘년 107 찬성 윤현 108 부정 류혼 109 부정 우세겸 110 이조판서 박영준 111 참판 박민헌 112 공조정랑 이증영 113 직장 김몽좌 114 영의정 이준경 115 찬성 주세붕 116 판서 김개 102 찬성 이황 118 판중추 송찬 119 좌윤 허세린 120 별좌 안잠 121 사용 김팽령 122 사재정 강윤권 123 이조판서 오상 124 목사 신잠 125 부사 김우 126 이조참판 이중경 127 군수 안종전 128 부사 김광 129 정랑 유언겸 130 현령 변훈남 131 집의 김약묵 132 판서 노진 133 목사 신사형 134 대사간 김취문 135 ???? 송익경 선조조 23인 136 우의정 심수경 137 이조판서 허잠 138 이조판서 이기 139 예조판서 이우직 140 영의정 이원익 141 영의정 류성룡 141 영의정 이항복 143 찬성 이직언 144 참찬 백인걸 145 ???? 이시언 146 좌의정 최흥원 147 병마절도사 장필무 148 이조판서 안자유 149 병마절도사 이제신 150 찬성 정곤수 151 판중추 김수 152 참찬 이광정 143 이조판서 이후백 154 좌의정 심희수 155 이조판서 성영 156 좌의정 허욱 157 대사헌 이유중 158 승지 최여림 159 참판 김장생 160 장령 이기설 161 판서 오억령 162 직제학 김행 인조조 13인 163 영의정 김상헌 164 판관 김시양 165 참판 민여임 166 이조판서 이안눌 167 대사헌 김덕함 168 참판 이명준 169 병마절도사 성하종 170 공조참판 최진립 171 영의정 이시백 172 영의정 홍명하 173 대사헌 신경진 174 정랑 구곤원 175 영중추 김신국 숙종조 22인 176 좌의정 이상진 177 판중추 조경 179 참찬 강백년 179 이조참판 조석윤 180 이조참판 유경창 181 참찬 박신규 182 지중추 최관 183 좌윤 이지온 184 부사 성이성 185 참지 이후정 186 진선 조속 187 정랑 홍무 188 수군절도사 홍우량 189 부사 강열 190 부사 이태영 191 판서 이세화 192 대사간 강세구 193 장령 윤추 194 부사 강유후 195 부사 최경창 196 병조판서 윤지인 197 우윤 이제 경종조 6인 198 영의정 유상운 199 관찰사 송정규 200 도정 강석범 201 부사 이명준 202 현납 김두남 203 판서 이하원 영조조 9인 204 수군절도사 허정 205 부제학 이병태 206 형조판서 윤용 207 참판 한덕필 208 형조판서 정형복 209 세마 최유현 210 병조판서 윤득재 211 호조판서 이태중 212 ???? 이겸진 정조조 2인 213 참찬 이의필 214 참판 이단석 순조조 15인 215 부사 남이형 216 판서 서기순 217 관찰사 한익상 218 관찰사 심의신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현보&oldid=24186420" 분류: 1467년 태어남1555년 죽음조선의 문신조선의 시인영천 이씨경상북도 출신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유학자조선의 작가조선의 저술가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04: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이현보가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몇 세 때입니까? |
폐불훼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폐불훼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폐불훼석(일본어: 廃仏毀釈)은 당시 막 성립되었던 메이지 정부(일본 제국)가 불교 사원과 승려들이 받고 있던 특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원, 불경, 불상 등을 훼손한 사건이다. 목차 1 개요 2 목적 3 피해 4 해외 불교 배척 운동 5 각주 6 관련 항목 개요[편집] 파괴된 불상 불경을 태우는 민중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 게이오(慶応) 4년(1868년) 1월 3일에 수립된 일본제국이 게이오 4년 3월 13일(1868년 4월 5일) 발표한 태정관 포고(통칭 신불 분리령"神仏分離令 또는 신불판연령이라고 한다) 및 1870년(메이지 3년) 1월 3일(양력 2월 3일)에 나온 조서 대교선포(大教宣布) 등의 정책이 확대해석되어 폭주한 민중들에 의해 불교 사원과 불상, 불경 등의 파괴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의 신불분리령이나 대교선포는 어디까지나 신토(神道)와 불교를 분리한다는 것이 목적이었고 불교 배척의 의도는 없었음에도 결과적으로 폐불훼석 운동(폐불 운동)이라 불리는 불교 시설 파괴 운동을 일으켜 버린 것이다. 신불습합의 폐지, 불상을 신체(神体)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금지, 신사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다. 신사마다 제신(祭神)이 결정되고 사원이 통폐합되고 승려들은 신직(神職)으로 전향되었으며 불상 및 불구(仏具)의 파괴, 불교 행사 금지 등이 나타났다. 1871년(메이지 4년) 정월 5일(2월 23일) 부태정관포고(付太政官布告)에서 지사령 상지령(寺社領上知令)이 포고되어 경내를 제외하고 사찰이나 신사의 영지는 국가가 소유하게 되었다. 일향종(一向宗)의 교세가 강성했던 미카와(三河)나 에치젠(越前)에서는 이러한 처치에 반발하는 잇코잇키(一向一揆)도 발생하였는데 이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크게 반항하는 것은 없었고, 2、3년 뒤에는 종식되었다. 목적[편집] 메이지 정부는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이지만, 설립 당시에는 메이지 천황은 단지 16살이고,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번주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조슈 번이나 사쓰마 번에서는 개항 이래로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근대 사조(思潮)에 대해 천황제를 방위한다는 취지에서 민중으로부터 위정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황의 충신"으로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에도 시대까지 보급되어 있던 신도와 불교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때 만들어진 국가 종교가 "천황교"라고도 별칭되는 "국가신도"이다.[1]. "폐불훼석" 운동은 에도 막부의 지샤부교(寺社奉行)와 사원법도에 의해 보호되어 온 불교 사원에 대한 공격이 격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옛 막부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폐불훼석을 내세워 피하려고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육식과 유부남을 자유롭게 하라"고 트집을 잡아 불교계를 공격했다. 또한 폐불훼석의 추진에 바탕이 된 이데올로기로 "국학"(영어 직역 : study of nationality)이 있었다. 일본의 국가 정체성을 추구한 국학의 학자들이 "일본의 국가 정체성은 천황이다."라는 이념을 고취하면서 불교 배척을 촉진했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국가 통합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일부 국학자의 주도 아래, 불교는 외래의 종교이다고 하여, 그때까지 다양한 특권을 가지고 있던 불교 세력의 재산이나 지위를 박탈했다. 에도 시대까지는 사원법도에 의해서 금지되고 있던 승려의 육식과 결혼을, 메이지 정부는 「육식이건 결혼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승려들을 파계시켜 환속시키려 했다. 메이지 정부를 수립했던 사쓰마 번에서는 도쿠가와 왕조가 붕괴하기 전부터 이미 폐불훼석이 철저하게 이루어졌으며, 1616개의 사원이 강제 폐업했다. 당시 2966명에 달했던 승려 중 약 1000명은 군속되었다. 피해[편집] 오사카(大阪)의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의 진구지(神宮寺)의 경우 쌍탑을 가진 대가람이었는데 1873년(메이지 6년)에 대부분이 헐렸다. 나라(奈良)의 고후쿠지(興福寺)의 식당은 1875년(메이지 8년)에 파괴되었고, 데와 산잔(出羽三山)에 대해서는 1874년(메이지 7년) 이후 폐불훼석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가즈사 국(上總國, 지바 현千葉県)의 거산(鋸山)에 있던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은 모조리 파괴를 당했다. 오늘날에는 수복되어 있지만 나한상에는 파괴 당시의 깨졌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화족(華族)의 묘지 매장 방식도 불교 방식에서 신토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세 국(伊勢国, 미에 현三重県)에는 이세 신궁(伊勢神宮)이 위치한 곳이라 해서 격렬한 폐불훼석이 이루어졌고, 신궁과의 관계가 깊었던 교코인(慶光院) 등 100여 곳 이상의 사찰이 폐사되었다. 특별히 신궁이 위치한 우지야마다(宇治山田, 오늘날의 이세 시伊勢市)는 사찰의 수가 3백 곳에 이르던 것이 15곳 정도로 감소하였다. 때문에 미에 현은 일본 전국적으로도 오래된 건물의 수 자체가 적다. 메이지 신정부는 신토를 국가통합의 기간으로 삼을 의도였다. 일부 국학자의 주도 아래 불교는 외래 종교로 몰렸고, 그때까지의 특권을 지니고 있던 불교 세력의 재산이나 지위는 박탈당하였다. 승려보다 하위에 있던 신관들 가운데 일부는 「폐불훼석」운동을 스스로 일으켜서 사찰을 파괴하고 토지를 접수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승려 가운데 신관이나 병사가 되었던 자들이나 사찰 토지나 보물을 팔아넘기는 자들도 있었다. 오늘날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고후쿠지의 오중탑(五重塔)은 폐불훼석 당시에 겨우 25엔이라는 가격에 팔려 땔감으로 사라질뻔하기도 하였다. 대찰로써 광대한 가람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하는 우치야마 에이큐지(内山永久寺)는 파괴되고 그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의 능원과 헤이케(平家)를 모신 무덤이 경내에 위치해 있고 「귀 없는 호이치」(耳なし芳一) 전설의 무대로도 유명한 아미타지(阿弥陀寺)도 폐찰되어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폐불훼석이 가장 철저했던 사쓰마 번(薩摩藩)에서는 1616곳의 사찰이 폐찰되었고 환속된 승려는 2966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3분의 1이 군속(軍属)이 되었기 때문에 사찰 소유 영지였다가 몰수된 재산이나 인원이 강제적으로 병과(兵科)로 넘어갔다고도 한다. 미노 국(美濃国, 기후 현岐阜県)의 나에기 번(苗木藩)에서도 메이지 초기 철저한 폐불훼석이 이루어졌는데 영내의 모든 사찰과 불단, 불상들이 파괴되고 역대 번주의 보리사(菩提寺)였던 운림사(雲林寺)도 폐찰되어 오늘날까지도 장례 의식을 불교가 아닌 신토 형식으로 행하는 가정이 많다. 한편으로 오와리 국(尾張国, 아이치 현愛知県)에서는 쓰시마 신사(津島神社)의 진구지(神宮寺)였던 호슈인(宝寿院)이 불교와 관련된 물품을 신사에서 처분하는 것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폐불훼석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났는데 주로 국학이 얼마나 보급되었느냐에 따라 달랐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파의 국학이나 미토학(水戸学)의 경우 신불습합이라는 것 자체를 불순하다고 보았고, 그만큼 불교의 배척도 철저하였다. 폐불훼석은 신토를 국교화하는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신토를 국가통합의 기간으로 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도 호응해 국가신토(国家神道)의 발단이 되었다. 한편으로 에도 시대 막부의 간접통치 시스템으로써 지샤부교에 의한 사청 제도(寺請制度)로 사원을 통한 민중 관리가 법제화되었고 당시의 권력으로부터 받은 특권에 안주한 불교계의 부패에 대한 민중의 반발에 의한 것이었다는 일면도 있다. 번정 시대(藩政時代)의 특권을 사원이 상실하는 사태로부터 초래된 불교의 위기는 불교계의 변혁을 촉구해 전통불교의 근대화로 귀결되었다. 오나베 데루히코(尾鍋輝彦)는 근대 국가 형성기에 있어서 국가와 종교의 문제로써 같은 시기 프로이센에서 벌어졌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른바 문화투쟁(文化闘争)과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의 신불분리 정책 이후 불상과 불구의 파괴를 수반하는 전국적인 폐불훼석이 벌어졌다. 신불분리가 폐불훼석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지역 및 사례별로 다양하지만 폐불 사상이 배경이 된 것 외에도 근세까지의 일본에서의 사단제도(寺檀制度) 아래서의 사원에 의한 관리 ・ 통제에 대한 신관 및 서민들의 반발이나 지방관이 사찰 재산을 국유화하는 것을 노리고 저지르는 등 사회적, 정치적 이유도 다분하였다. 일본 정부는 폐불훼석 등의 행위에 대해서 「사인(社人)과 승려(僧侶) 모두 난폭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신불분리가 폐불훼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주의를 거듭 환기하는 태도를 보였다. 해외 불교 배척 운동[편집] 문화 대혁명의 홍위병에 의한, 불교를 포함한 종교 시설 전반의 파괴. 탈레반에 의한 바미얀 석불 파괴 (2001년 3월), 여성의 취업과 교육 금지. 각주[편집] ↑ 국가신도의 밑에 보호된 신사 안에는, 이세 신궁 등의 도쿠가와 바쿠후 이전 (1868년 이전)의 시대에 있던 신사도 있지만, 이것은 약간이다. 관련 항목[편집] 숭유억불 반달리즘 국가신도 문명개화 부국강병 문화 대혁명 탈레반 vdeh 일본 제국역사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 메이지 유신 사쓰마 반란 류큐 처분 청일 전쟁 러일 전쟁 한일 병합 다이쇼 민주주의 제1차 세계 대전 간토 대지진 만주 사변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궁성 사건 옥음방송 일본의 항복 천황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 황민화 정책 만세일계 인간선언 천황기관설 식민지 타이완 (타이완) 조선 (한반도) 가라후토 청 (사할린 섬 남부) 관동주 (조차지) 남양 군도 (위임통치령) 만주국 (괴뢰 국가) 남경정부 (괴뢰 정권) 필리핀 (일시적) 정치 일본 파시즘 일본 제국 헌법 일본 제국의회 메이지 정부 국체론 원로 어전회의 특별고등경찰 치안유지법 일본의 정치극단주의 일본의 우익 단체 국민정신총동원 상징 일장기 국화문장 기미가요 기리몬 욱일기 사상 국학 부국강병 국가신도 (신도) 대동아 공영권 팔굉일우 옥쇄 신주불멸 귀축미영 황국사관 창씨개명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일류동조론 일만불가분 현양사 흑룡회 일본인종개량론 화혼양재 탈아입구 대정익찬회 오족협화 복어 계획 (육족협화) 일본 제국주의 국가총동원법 교토학파 정한론 군대 일본군 일본 제국 육군 (조슈벌) 일본 제국 해군 (사쓰마벌) 일본의 전쟁 범죄 가미카제 반자이 돌격 야스쿠니 신사 100인 참수 경쟁 731 부대 난징 대학살 마닐라 대학살 숙칭 대학살 스마랑 강간 사건 위안부 가라유키상 요시와라 천인침 황도파 통제파 민족 일본의 우생학 일본인종개량론 (명예백인 & 명예 아리아인) 야마토 민족 (야마토 민족을 중핵으로 하는 세계정책의 검토) 류큐 민족 아이누 구미계도민 산가민족 한민족 (조선민족) 한족 만주족 몽골족 러시아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바시키르족 타타르족 탈리시족 니브흐족 윌타족 오로치인 코랴크인 타이완 원주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폐불훼석&oldid=24222892" 분류: 1868년 일본1870년 일본메이지 유신일본 제국의 문화일본의 불교나카쓰가와시의 역사에나시의 역사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4일 (화) 23: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폐불훼석이란 무엇일까? |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プリティーリズム・レインボーライブ 장르 어린이, 아이돌, 드라마, 음악 TV 애니메이션 원작 아케이드 게임 프리티 리듬타카라토미아츠, 신소피아 원작 총감독 히시다 마사카즈 감독 박찬영 애니메이션 제작 동우A&E, 타츠노코 프로덕션 방송사 TV 도쿄 SBS 그 외의 방송사 챔프TV 애니박스애니원디즈니채널디즈니 주니어키즈원 방영일 2013년 4월 6일 ~ 2014년 3월 29일 2014년 9월 1일 ~ 2015년 3월 3일 화수 총 51화 저작권 표기 ⓒ T2A/S/TX/PRR-DW 전편 꿈의 보석 프리즘스톤 후편 프리티 리듬: 올스타 셀렉션 틀 - 토론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일본어: プリティーリズム・レインボーライブ 푸리티리즈무레인보라이부[*], 영어: Pretty Rhythm: Rainbow Live)는 타카라 토미와 신 소피아가 공동 개발한 일본의 아케이드 게임 《프리티 리듬》을 원작으로 하는 한일 공동제작 TV 애니메이션의 세 번째 시리즈이다. 전작 《프리티 리듬 디어 마이 퓨처》에 이어, 2013년 4월 6일부터 2014년 3월 29일까지 TV 도쿄에서 방송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SBS에서 2014년 9월 1일부터 2015년 3월 3일까지 방영하였다. 목차 1 개요 2 줄거리 3 등장 인물 3.1 프리즘스톤 (Prism Stone) 3.1.1 해피레인 (HAPPY RAIN) 3.1.2 스태프 3.2 에델로즈 (Edel Rose) 3.2.1 벨로즈 (Bell Rose) 3.2.2 스태프 및 기타 3.3 디어 크라운 (Dear Crown) 3.4 기타 3.5 페어펫 4 삽입곡 5 작품 발표회 6 한국판 실사 영상 - 〈미션노트〉 7 제작진 8 방영 목록 9 관련 항목 10 외부 링크 개요[편집] 일본의 타카라 토미와 신 소피아가 공동 개발한 여아용 리듬게임 프리티 리듬 시리즈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TV애니메이션의 세 번째 시리즈이다. 하지만 전작인 〈프리티 리듬: 오로라 드림〉과 〈꿈의 보석 프리즘스톤〉이 하나의 이어진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접점이 사실상 없다. 그러나 설정의 측면에서는 유사한 점을 살펴볼 수 있는데, 피겨 스케이팅을 바탕으로 한 엔터테인먼트인 프리즘 쇼가 등장하고 프리즘 스톤을 사용하여 의상을 갈아입는다는 기본 설정이 그것이다. 또한 프리즘 스톤(Prism Stone)이나 디어 크라운(Dear Crown)같은, 전작에서 등장했던 패션 브랜드가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이 가진 특징은 바로 피겨 스케이팅과 악기 연주가 결합된 프리즘 라이브(Prism Live)라는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새롭게 바뀐 설정과 더불어 전작과 이 작품을 구분하는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꿈의 보석 프리즘스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동우A&E와 일본의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졌다. 줄거리[편집] 평범한 중학생 '한나루'는 이것저것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에 소질이 있는 소녀이다. 언젠가 유명 패션 브랜드 '디어크라운'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 꿈인 나루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직업체험학습을 위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우연히 새로 문을 열게 된 브랜드 '프리즘스톤'에서 중학생 점장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다. 그런데 면접 때 프리즘 쇼 심사도 한다는 것을 몰랐던 나루는 면접장에서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나루는 면접 보기 직전에 만난 정체불명의 생명체 '러블린'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도움을 받아 신기술 '프리즘 라이브'를 성공시키면서 프리즘스톤의 점장으로 뽑히게 된다. 이후 나루는 열정이 넘치는 소녀 '김아람', 왠지 모르게 차갑고 외로워 보이는 소녀 '강이음', 프리즘스톤의 매니저 '소피아 정(모모)'과 DJ. COO,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소녀 '린네'와 함께 프리즘스톤 가게를 이끌어 나간다. 한편 나루와 같은 날 면접을 보러 왔다가 떨어진 에델로즈 최고의 프리즘 연습생 '류빈'은 그날 이후 나루에게 경쟁 의식을 느끼고 '채우리', '송온유' 등과 함께 프리즘스톤 아이들을 견제하려 한다. 나루와 친구들은 처음에는 단지 학교생활의 필요나 개인적인 흥미에 의해서 일에 지원했던 것 뿐이지만, 여러 사건을 겪으며 조금씩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프리즘 쇼에 임하게 되는데... 등장 인물[편집] 프리즘스톤 (Prism Stone)[편집] 한나루가 새로 문을 연 가게로, 패션 상품, 디저트 판매와 메이크업, 그리고 프리즘 쇼 공연을 주된 일로 하는 곳이다. 소피아 정이 사장을 맡고 있으며 점장은 한나루이고 매니저는 DJ.COO, 점원으로는 김아람과 강이음이 있다. 해피레인 (HAPPY RAIN)[편집] 직업체험학습 활동을 계기로 프리즘스톤 가게에서 일하게 된 한나루, 김아람, 강이음이 결성한 그룹이다. 당초에는 가게 홍보를 위해 프리즘스톤(Prism Stone)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나 26회부터 해피레인(Happy RA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해피레인이라는 이름은 그들의 첫 노래인 〈쏟아지는 HAPPY!〉 가사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지개도 없다"라는 주제의식에서 가져온 것으로,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비'라는 뜻이다. 이름의 RAIN은 한나루(N), 김아람(A), 강이음(I), 그리고 린네(R) 이름의 영문 앞글자를 딴 것으로 이음이 제안한 것이고, 앞에 '해피'를 붙이는 것은 나루가 제안한 것이다. 한나루 - 성우 : 김현지 - 나이 : 15세 - 색/스톤 : 분홍/러블리 - 악기: 기타 - 마이송 : 〈해피나루송〉 음악의 색깔을 볼 수 있는 소녀로 항상 행복에 가득 차 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직업체험학습을 위해 프리즘스톤의 점장 자리에 지원했다가 우연히 프리즘 라이브라는 신기술을 성공시키고 점장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기분이 좋으면 "해피나루"라고 말하는 말버릇이 있다. 김아람 - 성우 : 박신희 - 나이 : 15세 - 색/스톤 : 파랑/팝 - 악기 : 드럼 - 마이송 : 〈Sweet Time Cooking Magic〉 음악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소녀로 과자나 빵과 같이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며 실제로 잘 만들기도 한다. 장래희망이 파티시에지만 한과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은 집안의 딸이기 때문에,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 문제를 두고 자주 대립한다. 강이음 - 성우 : 안영미 - 나이 : 15세 - 색/스톤 : 보라/쿨 - 악기: 키보드 (악기) - 마이송 : 〈BT 37.5〉 음악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소녀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약간 도도하고 냉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기 때문인지 여러 종류의 악기, 특히 피아노를 잘 다룰 줄 알며 작곡도 할 수 있다. 사정상 어머니, 남동생과 떨어져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헤어져버린 가족이 언젠가 다시 같이 모여 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린네 - 성우 : 서지연 - 색/스톤 : 하양/스타 - 악기 : 기타 - 마이송 : 〈Gift〉 나루가 프리즘스톤의 점장 면접을 볼 때 홀연히 나타나 4연속 프리즘 점프를 뛴 신비의 소녀. 프리즘스톤 가게에서 계속 지내고 있지만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소피아와 DJ.COO 말고는 없는 듯하다. 평소에는 조용조용하며 말수가 거의 없고 어딘지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지만 프리즘 쇼에 서게 되면 환상적인 무대를 보여준다. 스태프[편집] DJ. COO - 성우 : 사성웅 - 마이송 : 〈EZ DO DANCE〉 그의 본명은 구준혁으로 프리즘스톤 가게의 매니저이자 DJ로서 프리즘스톤 공연장에서 여는 프리즘 쇼의 사회를 맡고 있으며 가게의 일을 돕고 있다. 기계를 만들고 다루는 실력이 수준급이며, 유쾌한 성격으로 언제나 늘 주위를 즐겁게 하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출장공연을 위해 사용하는 프리즘 트레일러는 그의 작품이다. 기분이 좋으면 "쿨(COOL)"이라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모모 -성우 : 이선호 프리즘 월드에서 온 마스코트로 항상 말끝마다 '모모'를 붙이는 습관이 있다. 펭귄을 닮은 의문의 생명체로서 자기가 프리즘스톤 가게의 진짜 사장이라고 주장하는데, 케이크를 굉장히 좋아하며 뛰어난 디자인 실력을 지니고 있다. 에델로즈 (Edel Rose)[편집] 프리즘스타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프리즘스타 사관학교 같은 곳으로서, 수많은 연습생들이 프리즘스타 데뷔를 위해 프리즘쇼 실력을 갈고닦는 곳이다. 전설의 프리즘스타 신비도 이곳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벨로즈 (Bell Rose)[편집] 에델로즈 최고의 프리즘 쇼 실력자인 류빈, 송온유, 채우리가 결성한 그룹으로서 당초에는 '에델로즈 S팀' 이라는 이름으로 대회 등에 참가했으나 25회부터 우리의 제안으로 벨로즈(Bell Rose)라는 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름의 의미는 '아름다운 장미' 라는 뜻이다. 세 사람이 겉보기에는 단지 최고의 실력자들을 모아 놓은 집단 정도로 보이지만, 실은 모두 오랜 친구로서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류빈 - 성우 : 배정미 - 나이 : 15세 - 색/스톤 : 빨강/섹시 - 악기 : 바이올린 - 마이송 : 〈Get Music〉 에델로즈 최고의 실력을 갖춘 프리즘 연습생으로 신비의 뒤를 이을 프리즘 스타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만큼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함에 가깝지만 도도하고 똑부러져 보이는 겉모습 뒤에 약간은 매서운 모습도 감추고 있다. 자신을 밀어내고 프리즘스톤의 점장이 된 한나루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며 항상 송온유, 채우리와 함께 다닌다. 송온유 - 성우 : 서지연 - 나이 : 15세 - 색/스톤 : 노랑/페미닌 - 악기 : 색소폰 - 마이송 : 〈Vanity♥Colon〉 여성스럽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로 홍차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차를 잘 끓일 수 있으며, 에델로즈 입학 오디션을 볼 때 빈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기 때문에 항상 빈에게 잘 해주려 하지만 얼핏 보기에 빈에게 쩔쩔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매사에 쭈뼛쭈뼛거리고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무대 위로 올라서면 좌중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준다. 기분이 좋으면 "메르헨(märchen)"이라고 하는 말버릇이 있다. 채우리 - 성우: 배주영 - 나이: 15세 - 색/스톤 : 초록/에스닉 - 악기 : 마림바 - 마이송 : 〈Blowin' in the Mind〉 에델로즈 두 번째의 실력을 지닌 연습생으로 장난기가 많고 스톤을 사용해서 주변 사람들의 운세를 점쳐 주기도 한다. 류빈과는 온유보다도 오래 된 친구 사이이며 빈을 여러 면에서 챙겨주고 있다. 그리고 아람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하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 같다. 말끝마다 고양이처럼 "냥냥" 거리며 점을 칠때마다 "맞아도 그만! 안 맞아도 그만!" 이라는 말버릇이 있다. 스태프 및 기타[편집] 신도하 - 성우 : 엄상현 - 마이송 : 〈Pride〉 에델로즈에 소속되어 있는 아이돌이자 인기절정의 남자 프리즘 연습생으로 타고난 끼와 실력은 물론이고 출중한 외모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모든 것을 갖춘 백마 탄 왕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면도 가지고 있다. 시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며 시우가 지은 노래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마성진 - 성우 : 사성웅 에델로즈의 대표로 마정진의 아들이다. 마정진 - 성우 : 남도형 에델로즈 재단의 이사장으로 마성진의 아버지이다. 디어 크라운 (Dear Crown)[편집] 신비 - 성우 : 박신희 - 마이송 : 〈Nth Color〉 4연속 점프에 성공한 현존하는 최고의 프리즘스타로 인기 브랜드 디어크라운의 프로듀서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프리즘쇼 세계의 현실에 염증을 느껴 프리즘 쇼를 하지 않고있다. 모두의 동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자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하혜란 - 성우 : 서지연 은시우의 어머니로 디어크라운의 사장이다. 기타[편집] 은시우 - 성우 : 남도형 - 마이송 :〈Reboot〉 강이음의 집 바로 옆 건물에 살고 있는 소년으로 싱어송라이터이며 은선우의 아들이다. 작곡에 재능이 있지만 자기가 만든 노래에 대한 안 좋은 경험 때문에 자기의 노래를 아무에게나 들려주거나 주려고 하지 않고 항상 옥상 위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한다.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윤세찬 - 성우 : 이원찬 - 마이송 :〈Freedom〉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김아람과 같은 동아리에 있었던 선배로 지금은 길거리 프리즘 쇼를 즐기고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매사에 긍정적이면서 의리가 있는 소년으로 아람이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준다. 간판가게를 운영하시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그림실력 또한 뛰어나며, 은시우와는 어렸을 적부터 친한 소꿉친구 사이이다. 백루한 - 성우 : 이원찬 프리즘 쇼 협회(Prism Show Association)의 회장이자 과거 유명한 프리즘 스타였다. 프리즘 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며 지금은 에델로즈를 중심으로 경직되어 버린 프리즘 쇼 세계를 부흥시키기 위해, 그리고 프리즘 쇼 대회가 열릴 때마다 신비와 함께 대회를 관람하며 신비가 다시 프리즘 쇼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매기 - 성우: 배주영 프리즘 공간의 안내자로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의상을 프리즘스톤으로 옮기거나 프리즘스톤에 담긴 의상을 프리즘스타에게 입히는 역할을 한다. 한선주 - 성우 : 남도형 한나루의 아버지로 동화작가이다. 정유진 - 성우 : 안영미 한나루의 어머니로 그림책 작가이다. 김영두 - 성우 : 이원찬 김아람의 아버지이자 한과 가게인 '동우한과'의 주인이다. 완고한 성격으로 아람이가 케이크나 쿠키 따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아람이의 진로 문제를 두고 자주 대립하고 있다. 유화정 - 성우 : 배정미 김아람의 어머니로 온화하고 예절바른 사람이며 현명한 성격으로 항상 아람이를 걱정하고 있다. 강건 - 성우 : 엄상현 강이음의 아버지로 'Lucky Star'라는 이름의 작은 공연장을 운영하고 있다. 과거에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였지만 6년 전에 있었던 갑작스런 의문의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다친 이후 연주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수진 강이음의 어머니로 섬유 디자이너이다. 지금은 피치못할 사정 때문에 이음과 떨어져 제주도에서 지내고 있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한 듯 하다. 강얼 - 성우 : 이선호 강이음의 남동생으로 수진과 같이 살고 있다. 인터넷으로 프리즘 쇼 보는 것을 좋아하며 해피레인의 활약상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듯하며 캐스터네츠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류현민 - 성우 : 사성웅 류빈의 아버지이자 자상한 성격으로 항상 해외로 출장 중이었던 경우가 잦았다. 양수려 - 성우 : 서지연 류빈의 어머니이자 독단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빈이 모든 방면에서 완벽하기를 강요하다시피 하지만 빈이의 프리즘 쇼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딸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송시온 - 성우 : 엄상현 송온유의 아버지로 직업은 조향사이며 배려심 많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신미주 - 성우 : 배주영 송온유의 어머니로 어머니로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송시온과 마찬가지로 배려심 많은 성격이다. 채일만 - 성우 : 남도형 채우리의 아버지로 강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업무 때문에 전근이 잦았다. 도우미 - 성우 : 박신희 채우리의 어머니로 순종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과거에는 전직 여성 조직 폭력배였다. 남애리 신도하의 어머니 은선우 - 성우 : 남도형 은시우의 아버지이자 전설적인 밴드였던 럭키스타 출신으로 과거에는 강이음의 아버지인 강건과 더불어 지금까지 6년동안 밴드활동을 했었지만 갑작스런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박미진 한나루네 반 담임선생님 임지효 한나루네 반 친구 김민경 한나루네 반 친구 제임스 은시우와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는 듯한 소년. 소년이지만 마치 중년 남성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페어펫[편집] 러블린 한나루의 페어펫이다. 착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나루를 닮아 귀여운 것을 정말 좋아한다. 팝픈 김아람의 페어펫이다. 활발한 성격으로 장난꾸러기 먹보이지만 아람이가 만들어준 쿠키를 가장 좋아한다. 쿠른 강이음의 페어펫이다. 쿨한 성격으로 가장 어른스럽지만, 이음이와는 달리 간혹 눈물을 보일 때도 있다. 페미니 송온유의 페어펫이다. 기가 약하고 겁이 많으며 언제나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주위를 안타깝게 하곤 한다. 에스니 채우리의 페어펫이다. 빈둥거리는 것을 좋아하고 장난기가 많으며, 주변 친구들의 점을 봐주기도 한다. 세시니 류빈의 페어펫이다. 우아한 여왕님 스타일로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스탄 린네.신비의 페어펫이다. 반짝반짝 빛을 내뿜으며 언제나 신비주의한 성격이다. 삽입곡[편집] 〈쏟아지는 HAPPY!〉 -작곡/작사: 야마하라 카즈히로, 미에노 히토미 -가사번안: 정다형 -노래: 김현지, 안영미 -코러스: 김현진 해피레인이 부른 노래로 오프닝곡으로 사용되었다. 본편에서는 26회부터 등장한다. 〈Gift〉 -작곡/작사: 사이토 츠네요시, 미에노 히토미 -가사번안: 정다형 -노래: 김현지 린네의 마이송으로 엔딩곡으로 사용되었다. 본편에서는 9회부터 등장한다. 〈Boy Meets Girl〉 프리즘 쇼에 사용되는 음악으로 1회부터 등장한다. 〈Reboot〉 은시우가 옥상 위에서 부르던 노래로 1회부터 등장한다. 〈해피나루송〉 은시우가 한나루를 위해 지은 곡으로 5회부터 등장한다. 〈BT 37.5〉 강이음이 직접 지은 마이송으로 6회부터 등장한다. 〈Sweet Time Cooking Magic〉 김아람의 마이송으로 아람이가 세찬이에게 선물로 받은 곡이다. 7회부터 등장한다. 〈Vanity♥Colon〉 송온유의 마이송으로 11회부터 등장한다. 〈Blowin' in the Mind〉 채우리의 마이송으로 12회부터 등장한다. 〈Get Music〉 류빈의 마이송으로 13회부터 등장한다. 〈Pride〉 신도하의 마이송으로 18회부터 등장한다. 〈Rossette Nebula〉 벨로즈의 노래로 25회부터 등장한다. 〈Freedom〉 윤세찬의 마이송으로 31회부터 등장한다. 〈Nth Color〉 신비의 마이송으로 32회부터 등장한다. 〈Cherry-Picking Days〉 김아람과 채우리의 듀엣송으로 36회부터 등장한다. 〈ALIVE〉 강이음과 송온유의 듀엣송으로 37회부터 등장한다. 〈Little Wing & Beautiful Pride〉 한나루와 류빈의 듀엣송으로 38회부터 등장한다. 〈Sevendays Love Sevendays Friend〉 린네와 신비의 듀엣송으로 43회부터 등장한다. 〈EZ DO DANCE〉 구준혁(DJ.COO)의 마이송으로 18화에 잠시 배경음악으로 나왔다가 44회부터 등장한다. 〈Athletic Core〉 오버 더 레인보우의 노래로 51회에 등장한다. 작품 발표회[편집] 2014년 8월 14일 서울시 대치동의 CMG섬유센터에서 열린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 작품발표회 및 프리즘스톤 게임대회 당시 몰려든 인파 아직 본편이 SBS를 통해 방영되기 전인 2014년 8월 14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CMG섬유센터에서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의 작품발표회가 열렸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발표회가 애니메이션 및 캐릭터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이 발표회는 전국 게임대회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대회 참가자와 그 가족 등 수백 명에 달하는 일반인이 참석하였다. 이날 작품발표회는 김영두 동우A&E 대표와 우사미 히로유키 다카라토미 사장의 축사 이후, 작품 소개와 사업 전개 방향, 출시 예정 상품 등에 관해 약 25분 가량에 걸쳐 다루었다. 또한 행사장 한켠에서는 앞으로 출시가 예정된 관련 상품과, 이 작품의 원작인 아케이드 게임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의 체험행사도 이루어졌다. 한국판 실사 영상 - 〈미션노트〉[편집] 매 이야기 끝 부분에 방송되는 순서로 회당 약 4~5분 가량의 길이이며 어린 피겨스케이팅 유망주들이 출연하여 작품에 등장한 빙상 위 공연 장면을 실제로 재현하는 것이다. 본 내용은 나루가 편지로 하나씩 전달해 주는 임무를 어린이들이 수행해 나가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다. Boy Meets Girl편까지는 제목이 〈도전! 프리즘스타〉였으나 Gift편부터 제목이 바뀌었다. 회차 제목 출연 내용 1 출연자 및 지도자 간략 소개 2 Boy Meets Girl 1회 지도: 문윤선도전자: 강연우, 박주희 Boy Meets Girl을 듣고 노래의 분위기와 감성을 자신만의 표정으로 표현하기 3 Boy Meets Girl 2회 Boy Meets Girl의 포인트 안무 따라하기 4 Boy Meets Girl 3회 악셀 기술 완성하기 5 Boy Meets Girl 4회 레이백 스핀 기술 완성하기 6 Boy Meets Girl 5회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할 프리즘 쇼 초대장 만들기 7 Boy Meets Girl 6회 메이크업 전문가를 찾아가 머리모양과 화장 콘셉트에 대해 설명한 뒤 메이크업 받기 8 Boy Meets Girl 7회 Boy Meets Girl로 프리즘 쇼 9 Gift 1회 지도: 김현정도전자: 김민수, 김민승 자매끼리 얼마나 마음이 잘 통하는지 텔레파시 게임을 통해 보여주기 10 Gift 2회 Gift의 안무 연습하기 11 Gift 3회 지상에서 스파이럴 자세로 20초 이상 버티기 12 Gift 4회 지정된 자리에서 콤비네이션 스핀 돌기 13 Gift 5회 'Gift' 노래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 14 Gift 6회 Gift로 프리즘 쇼 15 해피나루송 1회 지도: 문윤선도전자: 김리현, 황지영 아이스핀 습득하기 16 해피나루송 2회 '스피너'(skate spinner)를 사용하여 지상에서 스핀 연습하기 17 해피나루송 3회 정확한 자세로 더블 살코 점프 성공하기 18 해피나루송 4회 지상에서 도넛 스핀 연습하기 19 해피나루송 5회 빙상에서 도넛 스핀 연습하기 20 해피나루송 6회 해피나루송 안무 연습하기 21 해피나루송 7회 해피나루송으로 프리즘 쇼 22 Rossette Nebula 1회 지도: 문윤선도전자: 강보민, 서호민 보민이 호민에게 악셀 점프 배우기 23 Rossette Nebula 2회 보민이 호민에게 악셀 점프 배우기 (계속) 24 Rossette Nebula 3회 보민의 악셀 점프 도전 25 Rossette Nebula 4회 호민이 트리플 룹 점프 완성하기 26 Rossette Nebula 5회 Rossette Nebula로 프리즘 쇼 27 쏟아지는 HAPPY 1회 지도: 김현정도전자: 박소연, 전민서 코치님 끌고 레이스 하기 28 쏟아지는 HAPPY 2회 더블 러츠 점프 도전하기 29 쏟아지는 HAPPY 3회 모호크 스텝 도전하기 30 쏟아지는 HAPPY 4회 플라잉 카멜 스핀 도전하기 31 쏟아지는 HAPPY 5회 비엘만 스핀 연습에 앞서 유연성 훈련하기 32 쏟아지는 HAPPY 6회 비엘만 스핀 도전하기 33 쏟아지는 HAPPY 7회 트위즐 스텝 도전하기 34 쏟아지는 HAPPY 8회 쏟아지는 HAPPY! 안무 연습하기 35 쏟아지는 HAPPY 9회 쏟아지는 HAPPY!로 프리즘 쇼 36 ALIVE 1회 지도: 이규철도전자: 김유준, 김예은 아이스 댄스 기본 포지션 배우기 37 ALIVE 2회 스윙 스텝(swing step) 배우기 38 ALIVE 3회 두 사람이 동시에 콤비네이션 스핀 돌기 39 ALIVE 4회 댄스 스파이럴(dance spiral) 배우기 40 ALIVE 5회 더블 플립 점프 도전하기 41 ALIVE 6회 플라잉 카멜 스핀 도전하기, Alive 안무 배우기 42 ALIVE 7회 Alive로 프리즘 쇼 43 Nth Color 1회 지도: 김현정도전자: 온정용, 안정원 멋진 점프를 위한 기초 훈련하기 44 Nth Color 2회 더블 루프 점프 도전하기 45 Nth Color 3회 연속 점프(sequence jump) 도전하기 46 Nth Color 4회 브로큰 레그 스핀 도전하기 47 Nth Color 5회 일루전 스텝 및 일루전 스핀 도전하기 48 Nth Color 6회 런지와 이나 바우어 도전하기 49 Nth Color 7회 Nth Color 안무 배우기 50 Nth Color 8회 Nth Color로 프리즘 쇼 51 그동안의 내용 정리 제작진[편집] 제작: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 제작위원회 기획: 민인식, 전수진, 김영두, 카와사키 유키오, 코노스 타카시 책임프로듀서: 김재영 총감독: 안재호 감독: 히시다 마사카즈 프로듀서: 하혜란, 타카야바시 요스케, 타카하시 토모코, 쿠보 와타루 제작 프로듀서: 이현구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나진용, 요시다 쇼이치 시나리오: 이우치 슈지 스토리보드: 최훈철, 박치만, 성원용, 송근식 캐릭터디자인: 차상훈, 마츠우라 아이 소품디자인: 김영범, 사이토 리에, 나카야마 하츠에, 오가와 히로시 배경감독: 이회영 배경디자인: 이원구 색채설계: 양민아 애니메이션 연출: 전병철, 안재호, 최훈철, 김진구, 한영훈, 류봉현, 나기철, 박치만, 김진국 작화감독: 차상훈, 김현옥 레이아웃: 전병철, 김기엽, 김용선, 곽수현, 최영희, 안재호, 최낙진, 전병곤, 김명심, 김유천, 나기철, 최훈철, 최선희, 장재용, 김명희, 권희재, 류봉현, 김진구, 서병진, 황미영, 박치만, 한영훈, 강부영, 이세보, 정진영, 오두형, 하윤정, 이미경 원화제작: 전병철, 김기엽, 김용선, 곽수현, 최영희, 안재호, 최낙진, 전병곤, 김명심, 김유천, 나기철, 최훈철, 최선희, 장재용, 김명희, 권희재, 류봉현, 김진구, 서병진, 황미영, 박치만, 한영훈, 강부영, 이세보, 정진영, 오두형, 하윤정, 이미경 동화제작: 문수정, 김인정, 정기순, 임형석, 임은석, 안민미, 최은영, 이지연, 장희정 컬러링: 배정자, 최현지, 이미현, 김희경, 최은미 배경제작: 서태원, 이성기, 이원구, 김수경, 허숙, 이호준, 이정환, 서의정 파이널체크: 최선호, 유명희, 김경호 촬영감독: 김강옥, 허태희 촬영: 박지원, 최덕규, 장종섭, 유한글, 구동필, 강희창, 서혜원, 임지윤, 양주희, 최은주, 이진영, 이미경, 구동필 영상편집: 이영민 제작진행: 김구, 최두현, 임지효, 김민경 프리즘쇼 연출: 쿄고쿠 타카히코 CG디렉터: 오토베 요시히로 포스트프로덕션: WSound 포스트프로덕션 감독, 우리말연출: 이영진 오디오감독: 한탁균 녹음 대본: 허숙 성우: 김현지, 이선호, 배정미, 배주영, 박신희, 서지연, 안영미, 엄상현, 사성웅, 이원찬, 남도형 노래: 김현지, 박신희, 안영미, 배정미, 서지연, 남도형, 이원찬, 신동희(뮤지컬 배우), 이보라(뮤지컬 배우), 김현진(가수) 믹싱: MK. Lee 〈프리즘스톤 미션노트〉 제작: (주)키네프로 촬영: 김재원, 이영광 연출: 김재원 조연출: 천은재 글/구성: 최별 진행: 장하은, 김수영 출연: 김현정, 문윤선, 이규철, 강연우, 박주희, 김민수, 김민승, 김리현, 황지영, 강보민, 서호민, 박소연, 전민서, 김예은, 김유준, 안정원, 온정용 장소협조: 광운대학교 아이스링크, 카페 베르데, 고양 어울림누리 아이스링크, 헤라 메이크업 아카데미 사업/마케팅: 이세은, 정유진, 정다형, 이원석, 한준엽, 김태욱, 김보람 공동사업: (주)티아츠코리아 기술감독: 이선복, 김용인, 장근선, 김홍규, 최정문, 권호식, 양승원 음향감독: 이형원, 박근태, 김종한 종합편집: 최동찬, 이선복, 권호식, 황적현, 김홍규, 장근선, 김용인, 최군효, 황현표, 조영훈 영상: 최정문, 김주연 음향: 박근태, 김종한, 정원요 녹화: 노경남, 최은화, 백길현, 김성재 C.G: 한혜원 조연출: 김수영 애니메이션 공동제작: 동우A&E(주), (주)타츠노코프로 방영 목록[편집] 2014년 회차 방송일 제목 1 9월 1일 한나루, 프리즘스톤의 점장이 되다! 2 9월 2일 디저트는 아람이에게 맡겨줘! 3 9월 15일 크로스! 강이음을 영입하라! 4 9월 16일 부활절 이벤트에 초대합니다! 5 9월 22일 행복을 부르는 노래! 6 냉정과 열정 사이 7 9월 29일 호랑이 아빠에게 케이크 매직! 8 사나이들의 댄스 대결! 9 10월 7일 빗속의 프리즘 라이브 10 의문의 생물 출현! 11 10월 13일 출발, 드리밍 세션! 12 10월 14일 날아올라라! 용기의 날개! 13 10월 20일 마음을 잇는 무지개다리! 14 10월 21일 린네의 비밀! 15 10월 27일 온유의 메르헨 다과회! 16 10월 28일 채우리, 실패해도 괜찮아! 냥! 17 11월 3일 류빈, 우아하고 강하게 피어나라! 18 11월 4일 최강 아이돌, 그 이름은 신도하! 19 11월 10일 마음을 이어주는 끈! 20 11월 11일 하나 되어, 프리즘 데이즈 세션! 21 11월 17일 두 번째 오디션! 22 11월 18일 약속과 스페셜 샌드위치! 23 11월 24일 추억을 나르는 프리즘의 바람! 24 11월 25일 고독한 여왕! 25 12월 1일 아름다운 장미, 벨로즈! 26 12월 2일 무지개를 부르는 해피레인! 27 12월 8일 피콕 선생님 화나다! 28 12월 9일 두근두근 프리즘 토크! 29 12월 15일 빈, 프리즘스톤의 점장이 되다! 30 12월 16일 맹세의 크로스로드! 31 12월 22일 승리보다 중요한 것! 프리덤! 32 12월 23일 프리즘 퀸의 귀환 33 12월 29일 솔직하게 부딪쳐보는 거야 34 12월 30일 손을 잡고 하나되어! 2015년 회차 방송일 제목 35 1월 5일 갈팡질팡 듀오 결성! 36 1월 6일 파자마 파티로 의기투합! 37 1월 12일 슬픔의 럭키 스타! 38 1월 19일 크리스마스의 기적! 39 1월 20일 무지개 온천의 진실! 40 1월 26일 개막! 윈터 화이트 세션! 41 1월 27일 별이 이어준 인연! 42 2월 2일 나루의 위기, 사라진 러블린! 43 2월 3일 천사의 결심! 44 2월 9일 일곱 빛깔 구세주! 45 2월 10일 장미의 혁명! 46 2월 16일 대망의 오버 더 레인보우! 47 2월 17일 행복의 별, 럭키스타! 48 2월 23일 꿈을 향해, 나답게, 자신 있게! 49 2월 24일 생명이 다할 때까지! 50 3월 2일 반짝임은 언제나 우리곁에...! 51 3월 3일 선물! 관련 항목[편집] 프리티 리듬 프리티 리듬: 오로라 드림 꿈의 보석 프리즘스톤 외부 링크[편집] 프리즘스톤 공식 카페 동우A&E 홈페이지 티아츠코리아 홈페이지 SBS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 공식 홈페이지 SBS 월ㆍ화 만화왕국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매일엄마 (시즌 2)(2014년 3월 3일 ~ 2014년 8월 25일)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2014년 9월 1일 ~ 2015년 3월 3일) 폐지 vdeh 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드라마 아침드라마 (《수상한 장모》) 월화드라마 (《VIP》) 드라마 스페셜 (《닥터 탐정》) 금토드라마(《녹두꽃》) 예능 《동상이몽 2 - 너는 내 운명》 《본격연예 한밤》 《불타는 청춘》 《백종원의 골목식당》 《접속! 무비월드》 《그랑블루》 《정글의 법칙》 《TV 동물농장》 《SBS 인기가요》 《런닝맨》 《집사부일체》 《미운 우리 새끼》 《가요대전》¹ 《연예대상》¹ 《연기대상》¹ 《청룡영화제》¹ 시사교양 《모닝와이드 3부》 《좋은 아침》 《생방송 투데이》 《살맛나는 오늘》 《생활의 달인》 《영재발굴단》 《네트워크 현장! 고향이 보인다》 (지역민방 공동제작) 《열린 TV 시청자 세상》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궁금한 이야기 Y》 《톡톡 정보 브런치》 《문화가중계》 《SBS 뉴스토리》 《그것이 알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물은 생명이다》 《맨 인 블랙박스》 《일요특선 다큐멘터리》 《SBS 스페셜》 《SBS 네트워크 특선》 뉴스 《모닝와이드 1, 2부》 (《SBS 파워 스포츠》) 《SBS 뉴스 (1010)》 《SBS 12 뉴스》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SBS 오 뉴스》 《SBS 8 뉴스》 (《SBS 스포츠뉴스》) 《SBS 나이트라인》 《SBS 주말뉴스》 《SBS 뉴스특보》² 스포츠 《스포츠 투나잇》 《SBS 골프》 《풋볼매거진 골!》 《e스포츠 매거진 GG》 어린이 《꾸러기 탐구생활》 《SBS 애니갤러리》 《요리조리 맛있는 수업》 《런닝맨 시즌 2》 《헬로 카봇 시즌 7》 《캡슐보이: 지구를 지켜라》 《로봇트레인 S2》 KBS1 KBS2 EBS1 EBS2 MBC OBS SBS †현재 잠정 중단된 프로그램 ¹ 연중 1회 방송되는 프로그램 ² 유동적으로 편성되는 프로그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꿈의_라이브_프리즘스톤&oldid=23515219" 분류: TV 도쿄 계열 애니메이션SBS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다쓰노코 프로덕션일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2013년 애니메이션2014년 애니메이션201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프리티 리듬아이돌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투니버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Italiano日本語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22일 (화) 17:1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꿈의 라이브 작품발표회가 열린 날짜는 언제야? |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금, 만나러 갑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대한민국의 영화에 대해서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18년 영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지금, 만나러 갑니다いま、会いにゆきますBe with you저자 이치카와 다쿠지번역가 양윤옥국가 일본언어 일본어장르 드라마, 판타지, 로맨스출판사 쇼가쿠칸 랜덤하우스코리아 발행일 2003년 2월 27일페이지 352ISBN 9788959241095 《지금, 만나러 갑니다》(일본어: いま、会いにゆきます)는 이치카와 다쿠지의 판타지 연애 소설이다. 2003년 2월 27일 쇼가쿠칸에서 간행되어, 일본내에서 판매 부수 100만 부를 기록했다.(ISBN 409386117X)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함께 미디어 믹스의 히트작 중 하나이다. 목차 1 줄거리 2 기타 3 영화 3.1 개요 3.2 출연진 3.3 제작진 3.4 수상 정보 3.5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3.6 참고 사항 4 텔레비전 드라마 4.1 개요 4.2 등장인물 4.3 제작진 4.4 방송 일자 5 대한민국의 영화 6 만화 7 드라마 CD 8 각주 9 외부 링크 줄거리[편집] 어느 마을에 사는 아이오 타쿠미는, 1년전에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미오(澪)를 잃고, 외아들 유지(佑司)와 보내고 있었다. 2명은 생전에 미오가 남긴, 「1년 지나면, 비의 계절에 또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비의 계절에 둘의 앞에 죽었음이 분명한 미오가 나타난다. 둘은 기뻤으나, 미오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3명의 공동 생활이 시작된다. 기타[편집] 이 작품은 원작자인 이치카와 자신의 질병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아내와의 연애와 오토바이 여행 등 그의 실제 삶에서 일어난 에센스가 다소 담겨져 있다. 이야기의 무대에서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이치카와와 아내는 사이타마현에 거주하고 있으며 대체로 사이타마 현이다. 영화[편집] 지금, 만나러 갑니다일본어: いま、会いにゆきます 감독 도이 노부히로 제작 하루나 케이하리구치 신이치카와 미나미 각본 오카다 요시카즈 원작 이치카와 다쿠지 《지금, 만나러 갑니다》 출연 다케우치 유코나카무라 시도다케이 아카시 촬영 시바누시 타카히데 편집 민쇼 토모오 음악 마츠타니 스구루오렌지 렌지 배급사 도호 개봉일 2004년 10월 30일 2005년 3월 25일 시간 118분 국가 일본 언어 일본어 수익 $46,616,207[1] 이치카와 다쿠지의 동명의 소설을 실사 영화화하여, 2004년 10월 30일 개봉한 일본의 영화이다. 대한민국에는 2005년 3월 25일에 개봉하였다. 개요[편집] 일본에서는 2004년 10월 30일부터 전국 도호 계열에서 영화가 공개되었다. 최종 흥행수입은 48억엔을 기록해 대히트하였다. 또한 제작사의 (TBS, 하쿠호도 DY 미디어 파트너스, 쇼가쿠칸, 스타더스트 픽처스 등)가 연애 소설을 영화화하여 대히트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동일하다. 출연진[편집] 아이오 미오: 다케우치 유코 아이오 타쿠미: 나카무라 시도 아이오 유지: 다케이 아카시 고등학생 시절 타쿠미: 아사리 요스케 고등학생 시절 미오: 오오츠카 치히로 고교생(18세) 유지: 히라오카 유타 아야(유지의 반 친구): 미야마 카렌 미오의 대학 시절 친구: 다나카 케이 아야세 미도리: 이치카와 미카코 케이크 가게 주인: 마츠오 스즈키 의사 노구치: 코히나타 후미요 제작진[편집] 원작 : 이치카와 다쿠지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감독 : 도이 노부히로 각본 : 오카다 요시카즈 음악 : 마츠타니 스구루 미술 : 타네다 요헤이 촬영 : 시바누시 타카히데(JSC / 도호 스타지오) 조명 : 우에다 나리유키 녹음 : 츠루마키 진 제작담당 : 타케이시 히로토 제작위원회 : 도호, TBS, 하쿠호도 DY 미디어 파트너스, 쇼가쿠칸, 스타더스트 픽처스, 마이니치 방송 수상 정보[편집] 제28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여우주연상(다케우치 유코) 제23회 골든 그로스상 일본 영화 부문 우수상 은상 제17회 닛칸 스포츠 영화대상 남우조연상 제22회 와카야마 시민 영화제 여우주연상(다케우치 유코) 남우조연상 제9회 니프티 영화 대상 남우주연상(나카무라 시도) 여우주연상(다케우치 유코) 2004년 MovieWalker 시네마 대상 베스트 여배우 부문 1위(다케우치 유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편집]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마츠타니 스구루의 사운드트랙 음반발매일 2004년 11월 17일 2005년 3월 24일포맷 CD언어 일본어레이블 에픽 소니 레코드 수록곡 いま、会いにゆきます - 森の記憶 いつもの朝 (언제나의 아침) 雨の予感 (비의 예감) ママとの約束 (엄마와의 약속) 雨の森 (비의 숲) 幸せの意味 (행복의 의미) 大切な想い出 (소중한 추억) 新たな想い出の日々 (새로운 추억의 날들) 優しい雨 (부드러운 비) 決心 - ?の住む街へ 六週間後 (6주 후) 光の彼方 (빛의 저편) 最後の森へ… (마지막 숲으로…) 決められた運命 (정해진 운명) いま、会いにゆきます - 時を越えて 이 외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삽입된 곡인 花가 ORANGE RANGE의 2집 앨범인 《MusiQ》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 사항[편집] 드라마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TBS에서 2005년 7월부터 9월까지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케이블 TV 채널J를 통해 방영이 되었다. 또한 주제가는 영화판의 주제가에 참여했던 오렌지 렌지가 다시 참여하였으며, 드라마에는 오렌지 렌지의 〈キズナ〉라는 곡이 삽입되었다. 2005년 미국의 워너브라더스를 통해 영화로 리메이크한다는 제작 발표가 있었다. 주연은 제니퍼 가너로 원작의 영화를 본 후 감동을 받아 워너 브라더스측에 리메이크 판권 구입을 권유했으며, 자신의 출연까지 적극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2] 주연도 제니퍼 가너가 맡아 연기할 예정으로, 《Be with You》라는 제목으로 2009년에 개봉 예정이었지만 영화가 실제로 제작되었다는 보도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어: いま、会いにゆきます 장르 드라마 방송 국가 일본 방송 기간 2005년 7월 3일 ~ 2005년 9월 18일 방송 시간 매주 일요일 21:00~21:54 방송 횟수 전 10화 원작 이치카와 다쿠지 프로듀서 이요다 히데노리 제작자 TBS 연출 히라노 슌이치야마무로 다이스케오오카 스스무카와시마 류타로 극본 이노 요코시노자키 에리코 출연자 미무라나리미야 히로키 외 닫는 곡 오렌지 렌지 - 〈인연〉 음성 2채널 스테레오 사운드(아날로그)2채널 돌비 디지털(디지털) 자막 문자 다중 방송 데이터 방송 프로그램 연동 데이터 방송 HD 방송 여부 HD 제작·방송 텔레비전 드라마는 TBS에서 2005년 7월 3일부터 9월 18일까지 일요극장에서 방송되었다. 개요[편집] 이치카와 다쿠지의 판타지 연애소설로, 앞서 개봉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이어 제작, 방송된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미무라, 나리미야 히로키가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에서와 같이 아이오 유지 역에 다케이 아카시가 출연하였고, 주제가도 오렌지 렌지가 다시 담당했다. 또한 2007년 4월부터 하와이에서도 지상파 방송사의 "KIKU-TV"를 통해 방송되었다.(현지 시간은 일요일 20:00~). 영어 제목은 "Be with you." 등장인물[편집] 아이오 미오 (24) - 미무라 아이오 타쿠미 (25) - 나리미야 히로키 나가세 마리코 (25) - 오카모토 아야 ※타쿠미 동료 중학생 미오 (회상 장면) - 쿠로카와 토모카 중학생 타쿠미 (회상 장면) - 후쿠모토 유키 중학생 마리코 (회상 장면) - 야노 시호 쿠도 아키히로 (회상 장면) - 미우라 하루마 ※고교 시절의 타쿠미의 육상부의 라이벌 아이오 유지 (6) - 다케이 아카시 사이토 레나 (6) - 시게모토 에루 ※유지의 동급생 미우라 사오리 (27) - MEGUMI ※유지의 담임 선생님 오가사와라 우야 (43) - 덴덴 ※이동 점포 차량 "UFO 가게"의 주인 혼고 나오미 (41) - 요 키미코 ※타쿠미의 주치의 스즈키 하치 (64) - 타니케이 ※타쿠미의 상사 키쿠치 슌스케 (38) - 나마세 카츠히사 ※케이크 가게 주인 키쿠치 아스카 (40) - 나카이 미호 ※케이크 가게 주인의 아내 에노키다 타카오 (60) - 야마모토 케이 ※미오의 아버지 에노키다 료코 (55) - 미타 요시코 ※미오의 어머니 제작진[편집] 원작 : 이치카와 다쿠지 각본 : 이노 요코, 시노자키 에리코 연출 : 히라노 슌이치, 야마무로 다이스케, 오오카 스스무, 카와시마 류타로 음악 : 세노 타케시 주제가 : 오렌지 렌지 〈인연〉 프로듀서 : 이요다 히데노리 제작 : TBS 텔레비전 저작권 : TBS 방송 일자[편집] 각 화 방송일 부제(원어) 부제(풀이) 시청률 제1화 2005년 7월 3일 6週間の奇跡 6주간의 기적 15.2% 제2화 2005년 7월 10일 授業参観 수업 참관 13.0% 제3화 2005년 7월 17일 約束 약속 11.5% 제4화 2005년 7월 24일 母の愛 어머니의 사랑 10.9% 제5화 2005년 7월 31일 恋の予感 사랑의 예감 9.2% 제6화 2005년 8월 7일 三角関係 삼각 관계 9.0% 제7화 2005년 8월 21일 わずかな時間 짧은 시간 9.1% 제8화 2005년 8월 28일 好きです。でも 좋아. 하지만 9.5% 제9화 2005년 9월 4일 あと一日 앞으로 하루 10.7% 최종화 2005년 9월 18일 涙の別れ 눈물의 이별 11.6% 평균시청률 10.9% (시청률은 간토 지방·비디오 리서치사 조사) TBS 일요극장 이전 작품 작품명 다음 작품 너무 귀여워(2005.04.10~2005.06.26)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5.07.03 ~ 2005.09.18) 사랑의 시간(2005.10.23 - 2005.12.25) 대한민국의 영화[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18년 영화)입니다. 만화[편집] 그림 : 다카다 야스히코, 원작 : 이치카와 타쿠지 빅 코믹 스페리 올(쇼가쿠칸)에서 연재되었다. 2004년 10월 28일, 쇼가쿠칸에서 단행본이 간행되었다.(빅 코믹스, ISBN 4091861571) 그림 : 카와시마 아야, 원작 : 이치카와 타쿠, 각본 : 이노 요코 "여성 세븐"에서 연재되어, 2005년 쇼가쿠칸에서 단행본이 간행되었다.(플라워 코믹스 스페셜, ISBN 4091302769) 드라마 CD[편집] 프론티어 웍스로부터 2008년 6월 25일에 발매되었다. 각주[편집] ↑ 박스 오피스 모조. “Ima, ai ni yukimasu (Be With You) (2004)”. 2012년 5월 21일에 확인함. ↑ “미국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 주연에 제니퍼 가너”. 헤럴드 경제뉴스. 2005년 6월 23일. 외부 링크[편집] (한국어)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 한국 공식 홈페이지 (일본어) 소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공식 사이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영어)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vdeh ( 계열) 일요극장 (9시)도시바 일요극장(1993년 4월~ 2002년 9월)1993년 《언덕 위의 해바라기》 《과장님의 액년》 《아내의 험담》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 1994년 《스위트 홈》 《나의 취직》 《남자의 거처》 《오빠의 선택》 1995년 《아내의 험담 2》 《어제의 적은 오늘도 적》 《파파 서바이벌》 《빛나라 린타로》 1996년 《관혼상제 부장》 《그럴 기분이 들 때까지》 《두 사람의 시소 게임》 《Dear 우먼》 1997년 《멜로디》 《이상의 상사》 《성인 남자》 《베스트 파트너》 1998년 《맡겨줘 달링》 《집사람 따윈 무섭지 않아》 《바다까지 5분》 《어떤 분!》 1999년 《샐러리맨 킨타로》 《굿 뉴스》 《The Doctor》 《야마다 일가의 인내》 2000년 《뷰티풀 라이프》 《샐러리맨 킨타로 2》 《최면》 《오야지》 2001년 《하얀 그림자》 《러브 스토리》 《사랑하고파》 《학교의 선생》 2002년 《샐러리맨 킨타로 3》 《아첨하는 남자》 《태양의 계절》 일요극장(2002년 10월 ~ )2002년 《아버지》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구를 삭제하지 마세요. 이 문 2003년 《GOOD LUCK!!》 《웃는 얼굴의 법칙》 《모토카레》 《막내 장남 누나 셋》 2004년 《모래 그릇》 《오렌지 데이즈》 《도망자 RUNAWAY》 《부부.》 2005년 《M의 비극》 《너무 귀여워》 《지금, 만나러 갑니다》 《사랑의 시간》 2006년 《윤무곡》 《맛있는 프로포즈》 《누구보다도 엄마를 사랑해》 《철판소녀 아카네!!》 2007년 《화려한 일족》 《농담이 아니야!》 《아빠와 딸의 7일간》 《스무살의 연인》 2008년 《사사키 부부의 인의없는 싸움》 《엽기적인 그녀》 《Tomorrow》 《SCANDAL》 2009년 《오늘도 맑음 이상 없음》 《나의 여동생》 《관료들의 여름》 《JIN-진-》(제1기) 2010년 《특상 카바치!!》 《신참자》 《GM~춤춰라 닥터》 《수의사 두리틀》 2011년 《겨울의 벚꽃》 《JIN-진-》(완결편) 《하나와가의 네자매》 《남극대륙》 2012년 《운명의 인간》 《ATARU》 《서머 레스큐~천공의 진료소~》 《MONSTERS》 2013년 《솔개》 《하늘을 나는 홍보실》 《한자와 나오키》 《안도로이도~A.I.Knows LOVE?~》 2014년 《S-최후의 경찰-》 《루즈벨트 게임》 《아버지의 등》 《미안해 청춘!》 2015년 《유성 왜건》 《천황의 요리사》 《나폴레옹의 마을》 《변두리 로켓(제1시리즈)》 2016년 《가족의 형태》 《99.9 -형사 전문 변호사-》 《우러러보니 존귀한》 《IQ246~화려한 사건부~》 2017년 《A LIFE~사랑스러운 사람~》 《작은 거인》 《미안하다, 사랑한다》 《육왕》 2018년 《99.9 -형사 전문 변호사- SEASON Ⅱ》 《블랙페앙》 《이 세상의 한구석에》 《변두리 로켓(제2시리즈)》 2019년 《굿 와이프》 《집단 좌천!!》 《노사이드 게임》 타이틀 미정 2020년 미정 《한자와 나오키(제2시리즈)》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지금,_만나러_갑니다&oldid=23093780" 분류: 2003년 소설일본의 영화 작품일본의 로맨스 영화일본의 드라마 영화2004년 영화도이 노부히로 감독 영화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TBS 제작 영화도호소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화 작품2005년 드라마일본의 로맨스 드라마TBS 일요일 밤 9시 드라마드라마 CD오카다 요시카즈 시나리오 작품시노자키 에리코 시나리오 작품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日本語Tagalog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5일 (일) 12: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감독 이름은? |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브롤터 별칭 팀 54 연맹 지브롤터 축구 연맹 대륙 유럽 축구 연맹 감독 훌리오 세자르 리바스 주장 로이 치폴리나 최다 출전자 리엄 워커 (37) 최다 득점자 리 캐스카이로조지프 치폴리나제이크 고슬링리엄 워커 (2) 홈 구장 빅토리아 스타디움 FIFA 코드 GIB FIFA 랭킹 이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첫 국제경기 출전 비공식 지브롤터 1 - 2 저지섬 (아일오브와이트; 1993년 7월 4일)공식 지브롤터 0 - 0 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파루; 2013년 11월 19일) 최다 점수차승리 지브롤터 1 - 0 몰타 (포르투갈 파루; 2014년 6월 4일) 지브롤터 1 - 0 라트비아 (지브롤터; 2018년 3월 25일) 최다 점수차패배 벨기에 9 - 0 지브롤터 (벨기에 리에주; 2017년 8월 31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유니폼 홈 원정 아일랜드 게임 출전 횟수 10회 (1993년에 처음 출전) 최고 성적 금메달 (2007년)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브롤터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2013년 5월 24일에 유럽 축구 연맹(UEFA) 정회원국이 되었으며 2016년 5월 13일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정회원국이 되었다. 그래서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참가가 가능해졌다. 목차 1 개요 2 FIFA 월드컵 (본선) 3 FIFA 월드컵 (예선) 4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록 개요[편집] 2013년 11월 19일 포르투갈 파루에서 2010년 FIFA 월드컵 16강 진출팀인 슬로바키아와 치른 공식 A매치 데뷔전에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듬해인 2014년 6월 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또다른 최약체팀인 몰타와 친선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면서 공식 A매치에서 사상 첫 승을 신고했다. UEFA 및 FIFA 정회원국으로 처음 예선에 참가한 UEFA 유로 2016 예선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는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20경기에서 전패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2018년 3월 25일 지브롤터에서 열린 UEFA 유로 2004 본선 진출팀이자 발틱컵 최다 우승국인 라트비아와의 홈 친선 경기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A매치 2번째 승리를 챙겼다. 지브롤터가 가장 성적이 좋았던 국제 대회는 아일랜드 게임 축구로 이 대회에서 2007년에 금메달, 1995년에 은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2006년 FIFI 와일드컵에 출전하여 이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한 전적도 있다. FIFA 월드컵 (본선)[편집]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비회원국 1934년 193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예선 탈락 합계 FIFA 월드컵 (예선)[편집]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비회원국 1934년 193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10 0 0 10 3 47 0 합계 10 0 0 10 3 47 0 순위 월드컵 예선 승점 순위 : 215위 (유럽 56위)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록[편집] 1960년 ~ 2012년 : 비회원국 2016년 : 예선 탈락 UEFA 유로컵 예선 기록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60년 비회원국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 10 0 0 10 2 56 0 합계 10 0 0 10 2 56 0 순위 유로 예선 승점 순위 : 54위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UEFA 소속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북아일랜드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웨일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잉글랜드 조지아 지브롤터 체코 카자흐스탄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터키 페로 제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지브롤터_축구_국가대표팀&oldid=24173441" 분류: 축구 국가대표팀지브롤터의 축구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mburgsLietuviųLatviešu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18: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지브롤터 축구대표팀이 공식전 첫 승을 기록하게 된 상대는? |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브롤터 별칭 팀 54 연맹 지브롤터 축구 연맹 대륙 유럽 축구 연맹 감독 훌리오 세자르 리바스 주장 로이 치폴리나 최다 출전자 리엄 워커 (37) 최다 득점자 리 캐스카이로조지프 치폴리나제이크 고슬링리엄 워커 (2) 홈 구장 빅토리아 스타디움 FIFA 코드 GIB FIFA 랭킹 이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첫 국제경기 출전 비공식 지브롤터 1 - 2 저지섬 (아일오브와이트; 1993년 7월 4일)공식 지브롤터 0 - 0 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파루; 2013년 11월 19일) 최다 점수차승리 지브롤터 1 - 0 몰타 (포르투갈 파루; 2014년 6월 4일) 지브롤터 1 - 0 라트비아 (지브롤터; 2018년 3월 25일) 최다 점수차패배 벨기에 9 - 0 지브롤터 (벨기에 리에주; 2017년 8월 31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유니폼 홈 원정 아일랜드 게임 출전 횟수 10회 (1993년에 처음 출전) 최고 성적 금메달 (2007년)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브롤터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2013년 5월 24일에 유럽 축구 연맹(UEFA) 정회원국이 되었으며 2016년 5월 13일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정회원국이 되었다. 그래서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참가가 가능해졌다. 목차 1 개요 2 FIFA 월드컵 (본선) 3 FIFA 월드컵 (예선) 4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록 개요[편집] 2013년 11월 19일 포르투갈 파루에서 2010년 FIFA 월드컵 16강 진출팀인 슬로바키아와 치른 공식 A매치 데뷔전에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듬해인 2014년 6월 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또다른 최약체팀인 몰타와 친선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면서 공식 A매치에서 사상 첫 승을 신고했다. UEFA 및 FIFA 정회원국으로 처음 예선에 참가한 UEFA 유로 2016 예선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는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20경기에서 전패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2018년 3월 25일 지브롤터에서 열린 UEFA 유로 2004 본선 진출팀이자 발틱컵 최다 우승국인 라트비아와의 홈 친선 경기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A매치 2번째 승리를 챙겼다. 지브롤터가 가장 성적이 좋았던 국제 대회는 아일랜드 게임 축구로 이 대회에서 2007년에 금메달, 1995년에 은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2006년 FIFI 와일드컵에 출전하여 이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한 전적도 있다. FIFA 월드컵 (본선)[편집]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비회원국 1934년 193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예선 탈락 합계 FIFA 월드컵 (예선)[편집]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비회원국 1934년 193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10 0 0 10 3 47 0 합계 10 0 0 10 3 47 0 순위 월드컵 예선 승점 순위 : 215위 (유럽 56위)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록[편집] 1960년 ~ 2012년 : 비회원국 2016년 : 예선 탈락 UEFA 유로컵 예선 기록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60년 비회원국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 10 0 0 10 2 56 0 합계 10 0 0 10 2 56 0 순위 유로 예선 승점 순위 : 54위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UEFA 소속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북아일랜드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웨일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잉글랜드 조지아 지브롤터 체코 카자흐스탄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터키 페로 제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지브롤터_축구_국가대표팀&oldid=24173441" 분류: 축구 국가대표팀지브롤터의 축구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mburgsLietuviųLatviešu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18: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지브롤터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성적은 어떨까? |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지브롤터 별칭 팀 54 연맹 지브롤터 축구 연맹 대륙 유럽 축구 연맹 감독 훌리오 세자르 리바스 주장 로이 치폴리나 최다 출전자 리엄 워커 (37) 최다 득점자 리 캐스카이로조지프 치폴리나제이크 고슬링리엄 워커 (2) 홈 구장 빅토리아 스타디움 FIFA 코드 GIB FIFA 랭킹 이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첫 국제경기 출전 비공식 지브롤터 1 - 2 저지섬 (아일오브와이트; 1993년 7월 4일)공식 지브롤터 0 - 0 슬로바키아 (포르투갈 파루; 2013년 11월 19일) 최다 점수차승리 지브롤터 1 - 0 몰타 (포르투갈 파루; 2014년 6월 4일) 지브롤터 1 - 0 라트비아 (지브롤터; 2018년 3월 25일) 최다 점수차패배 벨기에 9 - 0 지브롤터 (벨기에 리에주; 2017년 8월 31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유니폼 홈 원정 아일랜드 게임 출전 횟수 10회 (1993년에 처음 출전) 최고 성적 금메달 (2007년)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브롤터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2013년 5월 24일에 유럽 축구 연맹(UEFA) 정회원국이 되었으며 2016년 5월 13일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정회원국이 되었다. 그래서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참가가 가능해졌다. 목차 1 개요 2 FIFA 월드컵 (본선) 3 FIFA 월드컵 (예선) 4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록 개요[편집] 2013년 11월 19일 포르투갈 파루에서 2010년 FIFA 월드컵 16강 진출팀인 슬로바키아와 치른 공식 A매치 데뷔전에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듬해인 2014년 6월 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또다른 최약체팀인 몰타와 친선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면서 공식 A매치에서 사상 첫 승을 신고했다. UEFA 및 FIFA 정회원국으로 처음 예선에 참가한 UEFA 유로 2016 예선과 2018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는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20경기에서 전패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2018년 3월 25일 지브롤터에서 열린 UEFA 유로 2004 본선 진출팀이자 발틱컵 최다 우승국인 라트비아와의 홈 친선 경기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A매치 2번째 승리를 챙겼다. 지브롤터가 가장 성적이 좋았던 국제 대회는 아일랜드 게임 축구로 이 대회에서 2007년에 금메달, 1995년에 은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2006년 FIFI 와일드컵에 출전하여 이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한 전적도 있다. FIFA 월드컵 (본선)[편집] 년도 결과 순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비회원국 1934년 193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예선 탈락 합계 FIFA 월드컵 (예선)[편집]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30년 비회원국 1934년 193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1982년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10 0 0 10 3 47 0 합계 10 0 0 10 3 47 0 순위 월드컵 예선 승점 순위 : 215위 (유럽 56위)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기록[편집] 1960년 ~ 2012년 : 비회원국 2016년 : 예선 탈락 UEFA 유로컵 예선 기록 년도 경기 승 무* 패 득점 실점 승점 1960년 비회원국 1964년 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1984년 1988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 10 0 0 10 2 56 0 합계 10 0 0 10 2 56 0 순위 유로 예선 승점 순위 : 54위 vdeh국제 축구 FIFA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청소년 올림픽 FIFA 클럽 월드컵 FIFA 풋살 월드컵 FIFA 비치사커 월드컵 FIFA e월드컵 유니버시아드 풋볼 어워드 남자 대표팀 목록 FIFA 코드 FIFA 랭킹 남미 CONMEBOL – 코파 아메리카 U-20 U-17 U-15 북중미카리브 CONCACAF – CONCACAF 골드컵 CONCACAF 네이션스리그 U-20 U-17 U-15 지역별 UNCAF 아시아 AFC – AFC 아시안컵 U-23 U-19 U-16 U-14 지역별 AFF CAFA EAFF SAFF WAFF 아프리카 CAF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오세아니아 OFC – OFC 네이션스컵 U-23 U-20 U-17 유럽 UEFA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UEFA 네이션스리그 U-21 U-19 U-17 FIFA 비회원국 NF-보드 – VIVA 월드컵 CONIFA – CONIFA 축구 선수권 대회 IGA – 아일랜드 게임 종합 대회 아시안 게임 올아프리카 게임 팬아메리칸 게임 동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남아시아 경기 대회 지중해 경기 대회 카리브 게임 퍼시픽 게임 유러피언 게임 인도해 아일랜드 게임 팬아랍 게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 루소포니아 경기 대회 vdehUEFA 소속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벨기에 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북아일랜드 불가리아 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웨덴 스위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제르바이잔 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웨일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잉글랜드 조지아 지브롤터 체코 카자흐스탄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터키 페로 제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남미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지브롤터_축구_국가대표팀&oldid=24173441" 분류: 축구 국가대표팀지브롤터의 축구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mburgsLietuviųLatviešuनेपाली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9일 (목) 18:4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18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지브롤터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종 결과는 무엇일까요? |
여의도공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여의도공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여의도 공원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여의도공원 국기게양대 여의도 공원(汝矣島公園)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공원이다. 면적은 약 23만m2이다. 이 공원은 자연생태의 숲, 잔디마당, 한국 전통의 숲, 문화의 마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1 역사 2 볼거리 3 프로그램 안내 4 사진 5 각주 6 외부 링크 역사[편집] 일제 강점기 때 여의도에는 활주로와 여의도 비행장이 있었으며 광복 이후 1949년부터 공군기지로 쓰였다. 1970년대 한강 일대를 개발하면서 여의도를 상업 지구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기존의 활주로 자리를 유사시에도 쓸 수 있도록 5·16 광장이라는 형태로 남겨 놓았다. 5.16 광장은 1971년 2월 착공해, 같은 해 9월에 완공됐다. 5.16 광장이란 명칭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정했다고 한다. 광장은 197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때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됐고, 이 후 대통령 취임식, 국풍 81, 이산가족 찾기 만남의 광장 등 굵직한 행사들이 열렸다.[1] 그 후 여의도 광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9년 7월 5일 여의도 공원으로 변경되어 공원으로 개장되었다. 1981년에 이곳에서 국풍’81이 열렸으며, 1984년 5월 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기도 하였다. 볼거리[편집] 생태연못 사모정 지당 팔각정 세종대왕동상 야외무대 잔디마당 태극기 게양대 지압보도 프로그램 안내[편집] 프로그램 기간 시간 인원 대상 내용 생태의 숲 관찰교실 토요일, 일요일 10:00-12:00 23명 초등학생 1.생태의숲 관찰 2.식물관찰 현미경교실 토요일, 일요일 10:00-12:00 16명 초등학교 3학년이상 1.현미경 구조설명 2.현미경관찰 프로그램은 미리 예약을 할 수 있으며 예약한 후에 이용가능하다.[2] 사진[편집] 2016년 4월 여의도공원 연못 각주[편집] ↑ 16. 5·16 광장 - 2003년 9월 24일, 손정목, 중앙일보 ↑ “보관 된 사본”. 2015년 5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서울의 공원 vdeh 서울특별시의 공원공원 | 교통 | 도로 | 도서관 | 동굴 | 박물관 | 산 | 서원 | 섬 | 성 | 온천 | 저수지 | 종합병원 | 축제 | 하천 | 해수욕장강남구 구룡산도시자연공원 도곡공원 도산공원 봉은공원 샘터공원 청담공원 강동구 광나루한강공원 길동생태공원 동명공원 명일공원 샘터공원 샛마을공원 일자산공원 천호공원 강북구 북서울 꿈의숲 솔밭공원 오동공원 강서구 강서한강공원 구암공원 궁산공원 꿩고개공원 매화공원 방화공원 봉제산공원 염창공원 우장공원 관악구 관악산공원 낙성대공원 샘말공원 광진구 뚝섬한강공원 어린이대공원 구로구 개웅산공원 고척공원 서울푸른수목원 온수공원 금천구 감로천생태공원 금천체육공원 금천폭포공원 만수천공원 노원구 경춘선숲길 불암산공원 수락산공원 충숙공원 태릉푸른동산 도봉구 발바닥공원 서울창포원 쌍문근린공원 월천근린공원 초안산근린공원 초안산생태공원 동대문구 간데메공원 답십리공원 배봉산공원 용두공원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까치산공원 노량진공원 보라매공원 사육신공원 삼일공원 상도공원 마포구 경의선숲길 난지한강공원 망원한강공원 상암근린공원 와우공원 외국인묘지공원 월드컵공원 효창공원 서대문구 궁동공원 백련공원 북한산공원 서대문독립공원 안산공원 서초구 반포종합운동장 반포한강공원 구룡산도시자연공원 말죽거리근린공원 서리풀공원 양재시민의숲 양재시민의숲 문화예술공원 염곡느티나무형제공원 잠원한강공원 성동구 금호근린공원 달맞이근린공원 서울숲 성수공원 응봉공원 응봉근린공원 응봉산 암벽등반공원 성북구 개운산공원 성북공원 오동공원 오동근린공원 청량공원 송파구 문정근린공원 석촌호수공원 아시아공원 오금공원 올림픽공원 잠실한강공원 장지공원 천마공원 양천구 갈산공원 계남공원 서서울호수공원 용왕산근린공원 파리공원 양천공원 영등포구 선유도공원 앙카라공원 양화한강공원 여의도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여의도한강공원 영등포공원 자매공원 중마루공원 용산구 노들텃밭 용산가족공원 응봉공원 이촌한강공원 효창공원 은평구 갈현근린공원 구파발공원(진관근린공원) 봉산공원 불광공원 종로구 경희궁 광화문시민열린마당 낙산공원 동대문성곽공원 마로니에공원 북악산공원 북한산공원 사직공원 삼청공원 세운초록띠공원 세종로공원 와룡공원 인왕산공원 청운공원 탑골공원 중구 남산공원 서울로 7017 손기정공원 장충단공원 훈련원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중랑구 망우리 묘지공원 봉화산공원 샘터공원 용마공원 용마폭포공원 중랑캠핑숲 기타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 서울특별시가 소유·운영을 하나 부지는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 부산광역시 | 대구광역시 | 인천광역시 | 광주광역시 | 대전광역시 | 울산광역시 |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 강원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제주특별자치도 이 글은 서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여의도공원&oldid=24543605" 분류: 서울 영등포구여의도서울특별시의 공원숨은 분류: 서울에 관한 토막글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8일 (월) 14: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여의도 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연도는 언제인가? |
김민기 (정치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민기 (정치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민기기본 정보국적 대한민국출생 1966년 4월 28일(1966-04-28) (53세)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거주지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본관 경주(慶州)학력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경제학사경력 제19·20대 국회의원 (용인시을) 군복무 육군 제 201특공여단 소대장 (육군 중위 만기전역)소속위원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원 선수 2의원 대수 19·20정당 더불어민주당지역구 경기 용인시 을당내 직책 수석사무부총장웹사이트 http://www.kimminki.co.kr 김민기(金敏基, 1966년 4월 28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2006년 제5대 용인시의원에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용인시 을(기흥구)에 출마하여 신갈중·유신고 선배인 새누리당 정찬민(민선 6기 용인시장)과 대결, 김민기 54.08% 대 정찬민 45.91%로 이겨 당선됐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허명환, 국민의당 권오진, 민중연합당 김배곤 등과의 4자 대결에서 55.40%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목차 1 학력 2 경력 2.1 전임 경력 2.2 현재 3 수상내역 4 역대 선거 결과 5 외부 링크 학력[편집] 1972~1978 기흥초등학교 1978~1981 신갈중학교 1981~1984 유신고등학교 1984~1988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경제학사) 경력[편집] 전임 경력[편집] 1988 ~ 1990: 대한민국 육군 제201특공여단 소대장(만기전역, ROTC 26기) 1990 ~ 1991: 중소기업은행 2006.07 ~ 2010.06: 제5대 민선 4기 경기 용인시의회 의원 2008.05 ~ 2010.06: 제5대 경기 용인시의회 민주당 대표의원 2009 ~ 2010: 민주당 경기도당 대변인 2011 ~ 2012: 민주당 경기도당 용인시 기흥구 지역위원회 위원장 2012: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2012.05 ~ 2016.05: 제19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을,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2012.07 ~ 2013.03: 제19대 국회 전반기 행정안전위원회 위원 2012.07 ~ 2014.05: 제19대 국회 전반기 정보위원회 위원 2012.08 ~ 2012.12: 제19대 국회 학교폭력대책특별위원회 간사 2013.03 ~ 2016.05: 제19대 국회 전반기, 후반기 안전행정위원회 위원 2013.07 ~ 2013.08: 제19대 국회 국가정보원 댓글의혹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2014.11 ~ 2015.07: 제19대 국회 국민안전혁신특별위원회 위원 2015.08 ~ 2016.05: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본부 본부장 2015.09 ~ 2016.05: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교육연수국 수석부원장 2016.09 ~ 2017.05: 더불어민주당 제5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 2017.05 ~ 2018.09: 더불어민주당 제1사무부총장→수석사무부총장 2017.08 ~ 2018.06: 더불어민주당 지방선거기획단 부단장 현재[편집] 2016.05 ~ : 제20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을, 더불어민주당) 2016.06 ~ 2018.05: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2017.12 ~ 2018.05: 제20대 국회 재난안전대책특별위원회 위원 2018.07 ~ : 제20대 국회 후반기 행정안전위원회 위원 2018.07 ~ : 제20대 국회 후반기 정보위원회 간사 2018.12 ~ : 제20대 국회 공공부문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 2018.09 ~ : 더불어민주당 제1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 수상내역[편집] 2007 한국여성유권자 경기연맹 용인지부 선정 올해의 우수의원 2008 용인참여자치시민연대 선정 우수의원상 2008 제5회 전국지역신문협회 선정 의정대상 2012.11 법률소비자연맹 선정, 2012년도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상 2012.12 국회사무처 선정, 입법 및 정책개발 정당추천 우수 국회의원 2013.12 민주당 원내대표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2014.06 법률소비자연맹 선정, 국회의원헌정대상 2014.09 대한민국 의정대상 선정위원회(시사경제매거진) 선정, 2014 대한민국 의정대상 2014.11 대한민국 의정대상 선정위원회(시사경제매거진) 선정, 2014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 대상 2014.12 유권자시민행동 선정, 2014 국정감사 최우수상 2015.06 법률소비자연맹 선정, 국회의원헌정대상 2015.10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대상 선정위원회(시사경제매거진) 선정, 2015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 대상 2015.12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선정, 2015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5.12 한국유권자총연맹 선정, 2015 국정감사 우수 국회의원 2016.02 법률소비자연맹 선정, 국회의원헌정대상 2016.05 국회사무처 선정, 2015년도 입법 및 정책개발 법안정량평가 우수 국회의원 2017.05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선정, 최우수의원상 2017.06 법률소비자연맹 선정, 국회의원헌정대상 2017.07 지방자치TV(전국케이블방송) 주최, 2017 대한민국의정대상 2018.07 법률소비자연맹 국회의원 헌정대상 2018.11 제9회 한국전문인 대상 정치부문 2018.12 제12회 대한민국환경문화공헌대상 올바른정치문화대상 2018.12 더불어민주당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지방 선거 5대 시의원 경기 용인시(다 선거구) 열린우리당 7,211 표 17.33% 2위 초선, 민선 4기 총선 19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을 민주통합당 68,052 표 54.08% 1위 초선 총선 20대 국회의원 경기 용인시 을 더불어민주당 56,653 표 55.40% 1위 재선 외부 링크[편집] 김민기 블로그 전 임 (용인시 처인구)우제창(용인시 기흥구)박준선(용인시 수지구)한선교 제19대 국회의원(경기 용인시 을) 2012년 5월 30일 ~ 2016년 5월 29일 민주통합당 →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용인시 갑)이우현(용인시 병)한선교 후 임 (용인시 갑)이우현(용인시 을)김민기(용인시 병)한선교(용인시 정)표창원 전 임 (용인시 갑)이우현(용인시 을)김민기(용인시 병)한선교 제20대 국회의원(경기 용인시 을) 2016년 5월 30일 ~ 더불어민주당 (용인시 갑)이우현(용인시 병)한선교(용인시 정)표창원 후 임 (현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민기_(정치인)&oldid=24086061" 분류: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1966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기흥초등학교 동문신갈중학교 동문유신고등학교 동문고려대학교 동문대한민국 육군 중위새천년민주당 당원열린우리당 당원대통합민주신당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더불어민주당 당원용인시 출신경주 김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2일 (월) 15: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민기가 2018년 9월부터 위원장을 맡은 곳은? |
박해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해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해미 출생 1964년 1월 28일(1964-01-28) (55세)대한민국 대전시직업 배우활동 기간 1984년 ~ (현재)소속사 해미뮤지컬컴퍼니 (대표이사)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성악학과 학사배우자 황민(Huang Minh) (1995년 ~ 2019년 5월 14일)자녀 임성민, 황성재(아들)웹사이트 뮤지컬배우 박해미 공식 팬 카페 여성 연기자 박해미 싸이월드 박해미(1964년 1월 28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목차 1 이력 2 학력 3 출연작 3.1 뮤지컬 3.2 영화 3.3 드라마 3.4 CF 광고 3.5 텔레비전 프로그램 3.5.1 MC 3.5.2 예능 3.6 라디오 프로그램(진행, 출연) 4 수상 5 외부 링크 6 참고 사항 이력[편집] 1984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뮤지컬 배우 첫 데뷔 이후 뮤지컬 맘마미아를 포함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으며, TV 드라마 《하늘이시여》, 《거침없이 하이킥》 등을 통해 TV 브라운관을 물론 영화 부문에도 도전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TV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오로라 공주》, 《학교 2013》 등이 있고 여러 방송 광고에도 출연하였으며, 2007년부터는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국 올리브 네트워크 '판도라의 상자'를 진행하고 있으며 2011년 4월 17일 방영된 MBC 《섹션TV 연예통신》'별별랭킹-'연예계 최강 기 센 여자스타 베스트 12' 코너에서 강한 카리스마로 인해 3위에 랭크됐는데[1] 하고 싶은 말은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시원시원한 매력으로 1위에 오른 이경실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박해미 자리에 한때 거론됐으나[2] 결국 좌절됐다. 그는 여성 인권 신장에도 관심이 많다. 한편, 1988년 첫 번째 결혼을 했지만 6년 뒤인 생활고-고부갈등 때문에 이혼했으며[3] 1995년 캐나다 국적의 남편 황민(Huang Minh)과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 황민은 2018년 8월 27일, 음주운전을 해서 동승인 2명을 사망케 했고 결국 구속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2019년 5월 14일 두 번째 이혼을[4] 했다. 학력[편집] 대전대흥초등학교 졸업 대전여자중학교 졸업 충남여자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성악학과 학사 출연작[편집] 뮤지컬[편집] 《아리랑 판타지》 《캣츠》 《키스 앤 메이크업》 《설 판타지》 《진짜진짜 좋아해》 《스위니 토드》 《아이 두 아이 두》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넌센스 잼버리》 《써니 -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 영화[편집] 2010년 《내 남자의 순이》 - 시어머니 세라 역 2013년 《청춘정담》 - 윤성 모 역 2017년 《로마의 휴일》 - 원장수녀 역 드라마[편집] 2005년 SBS 주말극장 《하늘이시여》 - 김배득 역 2006년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 박해미 역 2007년 SBS 드라마스페셜 《쩐의 전쟁 보너스 라운드》 - 진회장 역 2008년 KBS2 주말드라마 《내 사랑 금지옥엽》 - 남주리 역 2009년 KBS1 일일드라마 《다함께 차차차》 - 오동자 역 2010년 MBC 수목드라마 《개인의 취향》 - 주장미 역 2010년 KBS1 일일드라마 《웃어라 동해야》 - 변술녀 역 2011년 MBN 《갈수록 기세등등》 - 박해미 역 2012년 TV조선 《웰컴 투 힐링타운》 - 오하라 역 2012년 KBS2 월화드라마 《학교 2013》 - 임정수 역 2013년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 - 주술사 역 2013년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 - 황미몽 역 2014년 TV조선 《아내스캔들 - 바람이 분다》 2014년 JTBC 주말드라마 《12년만의 재회: 달래 된, 장국》 - 평범숙 역 2014년 KBS2 《드라마 스페셜 - 보미의 방》 - 오길자 역 2014년 KBS2 《드라마 스페셜 - 세 여자 가출소동》 - 형자 역 2015년 MBC 일일드라마 《딱 너 같은 딸》 - 허은숙 역 2015년 KBS2 월화드라마 《발칙하게 고고》 - 최경란 역 2016년 MBC 수목드라마 《한 번 더 해피엔딩》 - 홍애란의 어머니 역 2016년 KBS2 주말연속극 《아이가 다섯》 - 차민경 역 2017년 KBS1 일일드라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허성희 역 2017년 TV조선 시트콤 《너의 등짝에 스매싱》 ... 박해미 역 2017년 웹드라마 《날아올라》 ... 이경희 역 CF 광고[편집] 2007년 LG 하이패스 플러스 카드 2007년 빙그레 바나나 우유 2007년 교원L&C 웰스 정수기 텔레비전 프로그램[편집] MC[편집] 2007년 올리브TV 《박해미의 판도라의 상자》 2007년 SBS 《심리극장 천인야화》 예능[편집] 2010년 5월 25일 KBS2 《1대 100》 156회 게스트 2012년 11월 24일 KBS2 《세대공감 토요일》 148회 게스트 2013년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패널 2015년 TV조선 《재밌는 세상구경 오중주》 2015년 채널A 《아내가 뿔났다》 2015년 MBN 《전국제패》 2016년 SBS 《씬스틸러》 2017년 tvN 《둥지탈출 시즌 2》 라디오 프로그램(진행, 출연)[편집] 2011년 SBS 러브FM 《행복한 주말 박해미입니다》 2015년 EBS FM 《EBS 책 읽는 라디오 낭독 시리즈》 수상[편집] 1986년 MBC ‘제5회 대학가곡제’ 동상 달무리( 박목월 시, 박해미 작곡) 2006년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여자우수상 《거침없이 하이킥!》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인기상 《거침없이 하이킥!》 2008년 제16회 대한민국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영화뮤지컬부문 대상 외부 링크[편집] 뮤지컬배우 박해미 공식 팬 카페 박해미 싸이월드 미니홈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 여성 뮤지컬배우 겸 영화배우 박해미 참고 사항[편집] 본인의 첫 일일극 출연작이었던 KBS 1TV 다 함께 차차차가 있는데 박해미의 드라마 데뷔작인 SBS 하늘이시여 출연진에 속한[5] 현석 반효정, 박해미가 황미몽 역으로 나온 MBC 오로라 공주에서 장연실 역을 맡았던[6] 이상숙은 다 함께 차차차 연출자 김성근 PD가 조연출로 참여한[7] 작품 중의 하나인 KBS 2TV 장녹수에서 연기자(현석 반효정 이상숙)-조연출자(김성근)로 호흡을 맞췄다. ↑ 최보란 (2011년 4월 17일). “이경실, '별별랭킹' 연예계 최강 '기센 女★' 1위”. 스타뉴스. 2019년 5월 14일에 확인함. ↑ 김재범 (2007년 8월 31일). “박해미 '거치없이 하이킥' 캐스팅 비화 공개”. 스포츠한국. 2019년 5월 14일에 확인함. ↑ “배우 박해미, 황민과 이혼…뜻밖에도”. 매일신문. 2019년 5월 14일. 2019년 5월 14일에 확인함. ↑ “배우 박해미, 황민과 이혼…뜻밖에도”. 매일신문. 2019년 5월 14일. 2019년 5월 14일에 확인함. ↑ 이규창 (2006년 4월 9일). “'하늘이시여', 자경 출생비밀 공개 후 극 전개는?”. 스타뉴스. 2018년 6월 29일에 확인함. ↑ 백승주 (2013년 6월 4일). “'오로라 공주' 박해미, 오씨집 며느리들과 백화점 화장실 난투극 벌여”. 서울경제. 2018년 6월 29일에 확인함. ↑ 이기수 (2007년 12월 27일). “[4인4색 인터뷰]④김성근 KBS ‘대왕세종’ PD”. PD저널. 2018년 6월 29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해미&oldid=24353142" 분류: 1964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1984년 데뷔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20세기 대한민국 사람21세기 대한민국 사람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대한민국의 방송인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밀양 박씨비디오 자키이화여자대학교 동문충남여자고등학교 동문대전여자중학교 동문대전대흥초등학교 동문대전광역시 출신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15: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박해미가 뮤지컬에 첫 데뷔한 해는 언제야? |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우슈비츠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폴란드의 도시에 대해서는 오시비엥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영어: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문화어: 오슈벵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로, 폴란드의 오시비엥침(과거 이름 아우슈비츠)에 있는 옛 수용소이다. 위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곳이며, 좀 더 가까운 크라쿠프에서는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소련군 포로·정신질환을 가진 정신장애인·동성애자·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폴란드군의 병영이었으며 수용소의 건물들도 수용소 생성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 이외에는 전부 폴란드군 벽돌 막사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다. 1945년 1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1] 세계유산 지정명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1940~1945))[2]이다. 목차 1 수감시설 2 학살 3 희생자 수 4 같이 보기 5 각주 수감시설[편집] 죄수 건물, 지멘스 공장 수감자들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다.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 명이며, 이중 7만 5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학살[편집]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였는데, 제조사인 회흐스트 AG는 전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가담 전과 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3]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구에서 2,000구까지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희생자 수[편집] 시체 소각로.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4]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나치에 저항한 동유럽 슬라브족, 동유럽인들과 옛 소련군 포로 (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러시아인, 동유럽인들은 3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홀로코스트 각주[편집]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1940~1945)]”. 유네스코한국위원회. 2018년 4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4월 18일에 확인함. ↑ 《현대문명진단》/이원복 글, 그림/조선일보사 출판국 ↑ 뉴스위크 1995년 1월 18일 자,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특집 좌표: 북위 50° 02′ 09″ 동경 19° 10′ 42″ / 북위 50.03583° 동경 19.17833° / 50.03583; 19.17833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전거 통제 WorldCat VIAF: 168340274 LCCN: n96112360 ISNI: 0000 0001 2236 0451 GND: 4003697-2 SELIBR: 217332 SUDOC: 184666333 BNF: cb161355471 (데이터) NLA: 49287899 NKC: olak2003164504 BNE: XX45133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우슈비츠_강제_수용소&oldid=24547936" 분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1940년 설립1945년 폐지폴란드의 세계유산오시비엥침바이엘 (기업)숨은 분류: 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문화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AsturianuAzərbaycanca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Cymraeg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øroysktFrançaisFurlanFryskGaelgעבריתHrvatskiMagyar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ÍslenskaItaliano日本語JawaქართულიLatinaLadinoLumbaartLietuviųLatviešuМакедонскиമലയാ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OccitanਪੰਜਾਬੀPolskiپنجابی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ardu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සිංහල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agalogTürkçeТатарча/tatarçaУкраїнськаاردوVènetoTiếng ViệtWinarayייִדיש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9일 (화) 11: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유대인 수용자들과 소련군 포로들이 독가스실에서 처음으로 학살당한것은 몇년 몇월인가? |
제일교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일교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일교통(第一交通)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로 252 (덕동동)에 위치한 창원시의 시내버스 운수업체이다. 목차 1 차고지 2 연혁 3 운행 노선 4 운행차량 5 사진 차고지[편집]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본사:전노선 시종착) 연혁[편집] 1979년 7월 1일 : 회사 설립 운행 노선[편집] 창원시의 시내버스 노선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내 간선 좌석/일반 노선에는 모두 타 업체와 함께 공동 배차에 참여하고 있으며, 창원/마산 읍면 (20,40~80번대) 일부 노선과 원 마산지역 지선노선(250~260번대)은 2011년부터 대운교통, 신양여객, 마창여객, 마인버스, 대중교통과 함께 1~2달 간격으로 순환하면서 배차에 참여하고 있다. 다음은 이 회사가 고정 운행하는 지선 노선이다. ● 80번 : 진동 - 쌀재터널 - 광려중학교 - 청아병원 - 중리역 - 석전교 - 마산운동장 - 삼성병원 - 창원역 (이 노선은 신양여객, 대중교통, 마창여객과 공동배차한다.) 운행차량[편집] 자일대우버스 대우 BS090 로얄미디 대우 BS106 로얄시티 자일대우 BS106 뉴로얄시티 대우 BS110CN 로얄논스텝 현대자동차 현대 글로벌900 현대 그린시티 현대 뉴 슈퍼 에어로시티 현대 저상 뉴 슈퍼 에어로시티 현대 유니버스 스페이스 엘레강스 사진[편집] 창원시내버스 114번 vdeh경상남도의 버스 기업시내·농어촌·마을버스 업체창원시 대운교통 대중교통 동아여객 동양교통 마인버스 마창여객 신양여객 신흥여객 제일교통 진해여객 진해마을버스 창원버스 창원마을버스 김해시 가야IBS 김해BUS 동부교통 진주시 부산교통 부일교통 삼성교통 진주시민버스 양산시 세원 푸른교통 법서교통 양산BS 웅상교통 웅진교통 지산마을버스 밀양시 밀양교통 삼남교통 삼랑진교통 영남교통 용활교통 한성교통 거제시 삼화여객 세일교통 사천시 거창고속 삼포교통 통영시 신흥여객 통영교통 농어촌 동일익스프레스(함안군) 고성버스(고성군) 남흥여객(남해군) 산청교통(산청군) 서흥여객(거창군 합천군) 영신버스(창녕군 의령군) 함양지리산고속(함양군) 의령버스(의령군) 하동버스(하동군) 시외버스 업체 거창고속 거제현대고속 경남고속 경원여객 경전여객 고려여객 김해여객 남흥여객 대한여객 동아여객 밀성여객 부산교통 세인공항 세원 신흥여객 영화여객 태영고속 천일고속 천일여객 푸른교통 함양지리산고속 해운대고속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특별자치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일교통&oldid=21564230" 분류: 1979년 설립경상남도의 시내버스 기업창원시의 교통마산합포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6월 14일 (목) 20: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일교통에서 사용하는 운행차량중 현대자동차 모델으로 이름이 가장 긴 차량은? |
폐비 신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폐비 신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거창군부인 신씨 지위 세자빈 재위 1488년 ~ 1494년 전임자 빈궁 한씨(장순왕후) 후임자 빈궁 박씨(인성왕후) 왕비(폐비) 재위 1494년 ~ 1506년 전임자 정현왕후 후임자 단경왕후 이름 별호 왕세자빈, 왕비, 폐비, 거창군부인,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 신상정보 출생일 성종 6년(1476) 11월 29일 사망일 중종 32년(1537) 4월 8일 능묘 연산군묘 부친 신승선(愼承善) 모친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 배우자 연산군 자녀 원자휘신공주폐세자 이황공주창녕대군대군 총수대군 영수대군 인수대군 인수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12월 15일(음력 11월 29일)~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1] 는 조선 연산군(燕山君)의 왕비(王妃)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2] 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무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묘(燕山君墓)이며, 남편 연산군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폐비 신씨가 등장하는 작품 4 관련 항목 5 각주 생애[편집]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로, 남편 연산군은 그녀의 칠촌 조카뻘이 되기도 한다. 또 이복 시동생인 중종에게는 형수이자 처고모가 된다. 아버지 신승선(愼承善)은 임영대군의 딸과 혼인을 하는데 그의 생모가 된다. 아버지는 두번에 걸쳐 장원 급제하고 현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愼承善)이며, 그녀는 왕실 유례상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직접 뽑힌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세자빈 간택을 통해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지면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으로 처소를 옮겼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廢妃)가 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된다. 신씨는 연산군과는 달리 덕이 있었다. 1495년에는 적통공주인 휘신공주(徽愼公主)를, 1498년 1월 10일(음력 12월 18일) 왕실의 적통장자인 원자(元子)를 낳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녀의 덕을 높이 사고 황금으로 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중종반종 당시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남편인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지만 별다른 죄가 없는 폐비 신씨는 폐비로 강등 되기는 하였으나 별다든 처벌없이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의 존호를 받았으나[3], 바로 이듬해인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郡夫人)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없었고 신하와 중종은 그녀에게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았다. 또 중종반정 이후 신씨 집안의 노비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착하고 선한 인품이였기 때문이다. 폐비(廢妃)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빈(嬪)의 예를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죽음을 앞두고 '부인 신씨를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는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5남 2녀라는 말도 있으나 그것보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더 많았다. 7남 2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4]. 가족 관계[편집] 친정 거창 신씨(居昌 愼氏) 조부 : 황해도감사 증 영의정 거창부원군 양간공 신전(黃海道監司 贈 居昌府院君 領議政 襄簡公 愼詮) 조모 : 증 정경부인 순흥 안씨(贈 貞敬夫人 順興 安氏)[5] 아버지 : 의정부 영의정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議政府 領議政 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 1436~1502) 외조부 : 정간공 임영대군 구(貞簡公 臨瀛大君 璆, 1420~1469) 외조모 :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濟安府夫人 全州 崔氏, 생몰년 미상) 어머니 : 정경부인 중모현주 증 흥안부부인 전주 이씨(貞敬夫人 中牟縣主 贈 興安府夫人 全州 李氏) 오빠 :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 신수근(領議政 益昌府院君 信度公 愼守勤, 1450~1506) 올케 : 정경부인 청원부부인 청주 한씨(貞敬夫人 贈 淸原府夫人 淸州 韓氏)[6] 조카이자 동서 :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오빠 : 형조판서 신수겸(刑曹判書 愼守謙, ?∼1506) 올케 : 정부인 진산 강씨(貞夫人 晋山 姜氏)[7] 올케 : 정부인 담양 전씨(貞夫人 潭陽 田氏) 오빠 : 형조판서 신수영(刑曹判書 愼守英, ?∼1506) 올케 : 정부인 청주 한씨(貞夫人 淸州 韓氏)[8] 왕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시조부 : 추존 덕종(德宗, 1438~1457) 시조모 : 소혜왕후 청주 한씨(昭惠王后 淸州 韓氏, 1437~1504) 시아버지 : 제9대 성종(成宗大王, 1457~1494, 재위 1469~1495) 시어머니 : 폐비 함안 윤씨(廢妃 咸安 尹氏, 1455?~1482) 남편 :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 1506, 재위 1494~1506) 장남 : 원자 (元子, 1494~1494) 장녀 : 폐 휘신공주(廢 徽愼公主, 1495~?) 차녀 : 공주 (公主, ?~?) - 조졸 차남 : 폐세자 황(廢王世子 𩔇, 1498~1506) 삼남 : 폐 창녕대군 성(廢 昌寧大君 誠, 1501~1506) 사남 : 대군 총수 (大君 聰壽, ?~?) - 조졸 오남 : 대군 영수 (大君 榮壽, ?~1503) - 조졸 육남 : 대군 인수 (大君 人壽, 1500~?) - 조졸 칠남 : 대군 인수 (大君 仁壽, 1501~?) - 조졸 시어머니 : 정현왕후 파평 윤씨(貞顯王后 坡平 尹氏 , 1462~1530) 시동생이자 조카사위 :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폐비 신씨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한애경) 《왕과 나》 (SBS, 2007년~2008년 배우:박하선)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홍소희) 《7일의 왕비》 (KBS2, 2017년 배우:송지인) 관련 항목[편집] 중종반정 신승선 신수근 신숙주 단경왕후 조선 연산군 조선 중종 권람 신후담 각주[편집] ↑ 신씨의 생몰년도는 그의 묘갈(연산군부인신씨묘지명, 燕山君夫人愼氏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다. ↑ 현주(縣主)는 원칙적으로 세자의 서녀에게 부여하는 정3품의 호칭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대군의 적녀를 현주에 봉하는 일도 빈번했다. 신씨의 어머니 중모현주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장녀이다. ↑ 《조선왕조실록》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1번째 기사 ↑ 《조선왕조실록》중종 1년(1506) 9월 24일 3번째 기사 ↑ 지고주군사 안강(知高州郡事 安剛)의 딸. ↑ 첨지중추부사 한충인(僉知中樞府事 韓忠仁)의 딸. ↑ 감사 강자평(姜子平)의 딸. ↑ 청천부원군 한백륜(右議政 淸川府院君 韓伯倫)의 딸. 전임정현왕후 조선 역대 왕후1494년 ~ 1506년 후임단경왕후 vdeh 조선의 후비와 대한제국의 후비4대조추존 목조 효공왕후 이씨 추존 익조 정숙왕후 최씨 부인 손씨 추존 도조 경순왕후 박씨 후궁 조씨 추존 환조 의혜왕후 최씨 부인 이씨 정빈 김씨 조선후비태조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찬덕 주씨 정종 정안왕후 김씨 성빈 지씨 숙의 지씨 숙의 기씨 숙의 문씨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초궁장 태종 원경왕후 민씨 효빈 김씨 신빈 신씨 선빈 안씨 명빈 김씨 의빈 권씨 소빈 노씨 정빈 고씨 숙의 최씨 숙공궁주 김씨 의정궁주 조씨 혜순궁주 이씨 신순궁주 이씨 덕숙옹주 이씨 혜선옹주 홍씨 순혜옹주 장씨 서경옹주 세종 소헌왕후 심씨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귀인 박씨 귀인 최씨 숙의 조씨 소용 홍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사기 차씨 문종 현덕왕후 권씨 폐 휘빈 김씨 폐 순빈 봉씨 숙빈 홍씨 소의 류씨 숙의 문씨 소용 권씨 소용 정씨 소용 윤씨 상궁 장씨 사칙 양씨 단종 정순왕후 송씨 숙의 김씨 숙의 권씨 세조 정희왕후 윤씨 근빈 박씨 폐 소용 박씨 추존 덕종 소혜왕후 한씨 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예종 장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 공빈 최씨 상궁 기씨 후궁 이씨 성종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제헌왕후) 정현왕후 윤씨 명빈 김씨 귀인 정씨 귀인 엄씨 귀인 권씨 귀인 남씨 소의 이씨 숙의 하씨 숙의 홍씨 숙용 심씨 숙용 권씨 숙원 윤씨 연산군 거창군부인 신씨 숙의 곽씨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숙용 장씨 숙용 전씨 숙용 조씨 숙원 최씨 숙원 김씨 숙화 김씨 궁인 안씨 내인 정금 중종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귀인 한씨 숙의 나씨 숙의 김씨 숙의 홍씨 숙의 이씨 숙원 이씨 숙원 권씨 인종 인성왕후 박씨 숙빈 윤씨 혜빈 정씨 귀인 정씨 양제 윤씨 명종 인순왕후 심씨 경빈 이씨 순빈 정씨 소의 신씨 숙의 한씨 숙의 신씨 숙의 정씨 숙의 정씨 선조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공빈 김씨(공성왕후) 인빈 김씨 순빈 김씨 정빈 민씨 정빈 홍씨 온빈 한씨 귀인 정씨 숙의 정씨 소원 윤씨 광해군 문성군부인 류씨 소의 윤씨 소의 홍씨 숙의 허씨 숙의 원씨 숙의 권씨 소용 정씨 소용 임씨 소원 신씨 상궁 이씨 상궁 최씨 궁인 조씨 궁인 변씨 추존 원종 인헌왕후 구씨 후궁 김씨 인조 인렬왕후 한씨 장렬왕후 조씨 폐 귀인 조씨 귀인 장씨 숙의 나씨 숙원 장씨 상궁 이씨 효종 인선왕후 장씨 안빈 이씨 숙의 김씨 숙원 정씨 현종 명성왕후 김씨 숙종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희빈 장씨 화경숙빈 최씨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 경종 단의왕후 심씨 선의왕후 어씨 영조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폐 숙의 문씨 추존 진종 효순왕후 조씨 추존 장조 헌경왕후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 양제 가선 정조 효의왕후 김씨 의빈 성씨 수빈 박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순조 순원왕후 김씨 숙의 박씨 추존 문조 신정왕후 조씨 헌종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경빈 김씨 정빈 윤씨 숙의 김씨 철종 철인왕후 김씨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숙의 김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대한제국후비고종태황제 명성태황후 민씨 순헌황귀비 엄씨 영보당 이씨 귀인 장씨 광화당 이씨 보현당 정씨 내안당 이씨 복녕당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 궁인 서씨 궁인 김씨 궁인 장씨 순종효황제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폐비_신씨&oldid=23315155" 분류: 1476년 태어남1537년 죽음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거창 신씨조선의 왕세자빈조선의 왕비폐위된 왕·황후병사한 사람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Englishไทย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23일 (일) 18: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폐비 신씨의 아버지는 누구야? |
K리그1 201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1 201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개요 대회 명칭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시즌 2018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준우승 경남 FC 승격 경남 FC 강등 전남 드래곤즈 AFC 챔피언스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경남 FC울산 현대 (3차 예선 부터)대구 FC (FA컵 우승) 각종 기록 최다 득점 26골 말컹(경남) 최다 점수차 홈 승리 강원 7 - 0 인천 (8월 19일) 최다 점수차 원정 승리 경남 0 - 4 전북 (4월 11일) 서울 0 - 4 전북 (5월 20일) 최다 점수 경기 전남 6 - 4 수원 (8월 19일) 최다 연승 기록 9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3월 18일 ~ 5월 2일) 최다 무패 기록 14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8월 19일~) 최다 무승 기록 16경기 제주 유나이티드 (7월 11일~9월 26일) 최다 연패 기록 6경기 대구 (4월 21일~5월 13일) 전남 드래곤즈 (7월 18일~8월 15일, 10월 20일~12월 1일) 최다 관중 30,202명 서울 2 - 1 수원 (5월 5일) 최소 관중 290명 상주 0 - 1 강원 (11월 24일) 인접 대회 이전← 2017 다음2019 → K리그1 2018은 대한민국에서 1983년 아시아 최초의 본격 프로 리그로 출범한 '슈퍼리그'에서 시작해 36번째를 맞은 시즌으로, 2013년 도입한 승강제로 지어진 1부의 이름 K리그 클래식을 K리그1으로 바꿔 2018년 3월 1일 개막하였다. 바꾼 이름 K리그1은 혼란을 막기 위해 이번 시즌만 K리그 클래식과 함께 쓴다. 리그는 전년도와 똑같이 △12개팀이 3차에 걸쳐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정규 라운드(1~33 라운드)와 △정규 라운드 성적을 토대로 나누어진 상・하위 스플릿 내에서 6개팀이 싱글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스플릿 라운드(34~38 라운드)로 진행한다. 리그가 끝난 뒤 우승, 준우승 팀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3위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리그 3위 이내의 팀이 FA컵 2018에서 우승하는 경우, 리그 3위까지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4위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고 리그 최하위 12위는 자동으로 K리그2 2019으로 강등된다. 목차 1 K리그1 참가 팀 1.1 경기장 1.2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 1.3 이적 시장 1.4 감독 변화 1.5 외국인 선수 2 리그 순위 2.1 정규 시즌 2.2 라운드별 순위 2.2.1 1-33라운드 2.2.2 34-38라운드 3 우승 구단 4 리그 결과 4.1 1-22 라운드 4.2 23-33 라운드 4.3 34-38 라운드 4.3.1 상위 스플릿 4.3.2 하위 스플릿 4.4 승강 플레이오프 4.5 강등 5 개인 기록 5.1 득점 순위 5.2 도움 순위 5.3 무실점경기 순위 5.4 해트트릭 (Hat-trick) 6 수상 6.1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 6.2 라운드별 MVP 7 관중 수 8 같이 보기 9 각주 K리그1 참가 팀[편집] 경기장[편집]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K리그 1 2018 시즌 팀의 위치 클럽 지난 시즌 순위 첫 리그 참가 총 시즌 연고지 홈구장 수용좌석 강원 FC 16위 2009 7 강원 춘천송암레포츠타운 20,000 경남 FC LL K리그 챌린지 2017 우승 2011 5 경남 창원축구센터 15,116 대구 FC 18위 2003 13 대구 대구스타디움 66,422 상주 상무 211위 2011 5 상주 상주시민운동장 15,042 FC 서울 15위 1984 35 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66,806 수원 삼성 블루윙즈 13위 1996 23 수원 수원월드컵경기장 43,959 울산 현대 14위 1984 35 울산 울산문수축구경기장 44,474 인천 유나이티드 19위 2004 15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300 전남 드래곤즈 210위 1995 24 전남 광양축구전용구장순천팔마경기장 13,49612,703 전북 현대 모터스 0우승 1995 24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 42,477 제주 유나이티드 12위 1983 36 제주 제주월드컵경기장 29,791 포항 스틸러스 17위 1983 36 포항 포항스틸야드 18,960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편집] 클럽 감독 킷 스폰서 메인 스폰서 주장 강원 FC 김병수 조마 하이원리조트 정조국 경남 FC 김종부 험멜 경상남도 배기종 대구 FC 안드레 함프 대구은행, 아진산업 한희훈 상주 상무 김태완 루포 핀타 상주시 여름 FC 서울 최용수 르꼬끄 GS SHOP 고요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자이크로 삼성전자 김은선 울산 현대 축구단 김도훈 험멜 현대오일뱅크 강민수 인천 유나이티드 예른 안데르센 험멜 인천광역시, 인천국제공항, 신한은행 최종환 전남 드래곤즈 김인완 (대행) 조마 포스코 김영욱 전북 현대 모터스 최강희 험멜 현대자동차 신형민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키카 SK 에너지 권순형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아스토레 포스코 김광석 이적 시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K리그 2018 시즌 이적 명단입니다. 감독 변화[편집] 구단 전임 감독 형태 일자 당시 순위 신임 감독 일자 전남 드래곤즈 노상래 사임 2017/12/04 비시즌 유상철 2017/12/04 FC서울 황선홍 사임 2018/04/30 9위 이을용 (감독대행) 2018/04/30 인천 유나이티드 이기형 사임 2018/05/11 11위 박성철 (감독대행) 2018/05/11 인천 유나이티드 박성철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06/09 11위 예른 안데르센 2018/06/09 강원 FC 송경섭 사임 2018/08/12 7위 김병수 2018/08/12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사임 2018/08/16 12위 김인완 (감독대행) 2018/08/16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사임 2018/08/28 4위 이병근 (감독대행) 2018/08/28 FC서울 이을용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1 9위 최용수 2018/1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병근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5 5위 서정원 2018/10/15 외국인 선수[편집]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당 AFC 소속 국가들의 국적인 1인을 포함해서 최대 4인까지 경기에서 뛸 수 있다. 클럽 선수 1 선수 2 선수 3 아시아 선수 강원 FC 디에고 발렌티노스 제리치 맥고원 경남 FC 말컹 네게바 파울링요 쿠니모토 대구 FC 세징야 조세 호베르토 에드가 츠바사 FC 서울 안델손 에반드로 마티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데얀 바그닝요 사리치 울산 현대 축구단 리차드 주니오 믹스 에스쿠데로 인천 유나이티드 FC 부노자 무고사 아길라르 쿠비 전남 드래곤즈 유고비치 마쎄도 완델손 도나치 전북 현대 모터스 로페즈 티아고 아드리아노 제주 유나이티드 마그노 치아구 호베르송 알렉스 포항 스틸러스 알레망 레우 가말류 테이셰이라 채프먼 리그 순위[편집] 정규 시즌[편집] 순위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v • d • e • h 1 전북 현대 모터스 (C) (Q) 38 26 8 4 75 31 +44 86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2 경남 FC (Q) 38 18 11 9 59 44 +15 65 3 울산 현대 (Q) 38 17 12 9 61 46 +15 63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4 포항 스틸러스 38 15 9 14 48 49 −1 54 5 제주 유나이티드 38 14 12 12 42 42 0 54 6 수원 삼성 블루윙즈 38 13 11 14 53 54 −1 50 7 대구 FC (Q) 38 14 8 16 48 55 −7 50[1]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8 강원 FC 38 12 10 16 56 60 −4 46 9 인천 유나이티드 38 10 12 16 55 69 −14 42 10 상주 상무 38 10 10 18 41 52 −11 40 11 FC 서울 (O) 38 9 13 16 40 49 −9 40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12 전남 드래곤즈 (R) 38 8 8 22 43 69 −26 32 K리그2 2019로 강등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년 12월 2일* 출처 : K리그 공식 웹사이트* 순위 결정방식 : 1) 승점; 2) 득점 수; 3) 골 득실차.*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시즌이 끝나지 않은 경우만 사용되는 표시: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라운드별 순위[편집] 1-33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전북 현대 모터스 3 4 4 3 2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경남 FC 2 2 1 1 1 2 3 3 3 3 3 2 4 4 4 4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울산 현대 11 11 12 12 10 9 7 8 7 7 8 6 6 7 5 5 5 5 5 5 4 4 4 3 3 3 3 3 3 3 3 3 3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7 5 5 5 3 2 2 2 2 2 3 2 2 3 2 3 3 3 3 3 3 3 4 4 4 4 4 4 5 5 5 4 포항 스틸러스 1 1 3 2 3 4 4 4 5 5 6 8 7 8 8 9 9 8 7 7 6 6 5 6 5 5 5 5 5 4 4 4 5 제주 유나이티드 6 10 7 8 8 6 5 6 4 4 4 4 3 3 2 3 4 4 4 4 5 5 8 8 8 8 7 7 8 8 7 6 6 강원 FC 4 3 2 4 4 5 6 5 8 8 5 7 8 6 7 6 6 6 6 6 7 8 7 5 6 6 6 6 6 6 6 7 7 대구 FC 12 12 11 11 12 12 11 11 12 12 12 12 12 12 12 11 11 11 11 12 10 10 10 10 10 10 9 10 7 7 8 8 8 FC 서울 7 9 10 10 11 10 10 9 9 9 9 9 9 9 9 8 8 7 8 9 8 7 6 7 7 7 8 8 9 9 9 9 9 상주 상무 10 8 9 9 9 7 8 7 6 6 7 5 5 5 6 7 7 9 9 8 9 9 9 9 9 9 10 9 10 10 10 10 10 전남 드래곤즈 5 5 8 7 7 11 12 12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1 12 12 12 11 12 11 11 11 11 11 11 11 11 인천 유나이티드 8 6 6 6 6 8 9 10 11 11 11 11 11 11 11 12 12 12 12 10 11 11 11 12 11 12 12 12 12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0월 28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34-38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34 35 36 37 38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경남 FC 3 2 2 2 2 울산 현대 2 3 3 3 3 포항 스틸러스 5 4 4 4 4 제주 유나이티드 6 6 6 5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4 5 5 6 6 6.5 6.5 6.5 6.5 6.5 대구 FC 7 8 7 7 7 강원 FC 8 7 8 8 8 인천 유나이티드 12 11 11 10 9 상주 상무 9 10 10 11 10 FC 서울 10 9 9 9 11 전남 드래곤즈 11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우승 구단[편집] K리그1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1 제36대 대한민국 챔피언 (6회 우승) 2009년・2011년・2014년・2015년・2017년2018년 리그 결과[편집] 자세한 경기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1 2018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1–3 0–3 2–1 1–1 2–3 3–3 2–1 1–1 0–2 3–1 0–0 경남 FC 0–1 1–1 3–1 0–0 2–2 0–0 3–0 3–0 0–4 2–0 2–0 대구 FC 2–1 0–2 1–2 2–2 0–2 0–2 2–1 1–1 1–2 1–4 0–1 상주 상무 3–0 0–1 0–1 1–2 1–1 2–3 3–2 1–1 0–2 0–0 2–1 FC 서울 1–2 2–3 3–0 0–0 2–1 1–1 1–1 2–1 0–4 3–0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3–1 2–0 2–1 0–0 0–0 5–2 1–2 0–3 2–3 1–1 울산 현대 3–1 1–1 2–0 0–2 1–0 1–0 2–1 1–1 0–2 0–1 2–1 인천 유나이티드 3–3 2–3 0–0 0–1 2–1 2–3 1–1 2–2 3–2 1–2 1–2 전남 드래곤즈 1–4 1–3 1–1 2–0 2–1 0–2 1–2 1–3 0–0 0–3 2–3 전북 현대 모터스 3–1 0–1 2–1 1–0 2–1 2–0 2–0 3–3 3–0 1–0 0–3 제주 유나이티드 3–5 0–0 1–2 0–0 0–0 0–1 1–1 4–2 1–0 0–1 0–0 포항 스틸러스 0–0 2–1 3–0 0–2 0–3 1–1 2–1 0–0 3–1 0–2 0–1 2018년 8월 1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23-33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2–3 0–0 1–0 7–0 1–1 경남 FC 2–1 2–1 2–1 3–3 0–3 0–1 대구 FC 2–0 2–2 4–2 0–2 1–2 2–1 상주 상무 2–5 1–2 1–2 2–2 1–1 1–2 FC 서울 0–2 2–2 1–1 0–2 0–1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1–2 2–2 0–0 2–0 울산 현대 2–0 4–1 4–1 2–2 3–2 2–0 인천 유나이티드 2–2 0–0 0–0 3–2 3–1 전남 드래곤즈 0–1 3–3 1–0 6–4 1–0 3–2 전북 현대 모터스 3–2 2–1 3–2 1–0 4–0 제주 유나이티드 2–2 2–3 1–0 0–0 0–0 1–0 포항 스틸러스 0–3 2–1 1–0 5–2 2–2 2018년 10월 20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34-38 라운드[편집] 상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경남 수원 울산 전북 제주 포항 경남 FC 2–1 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3–3 0–2 1–3 울산 현대 1–0 0–1 전북 현대 모터스 1–1 2–0 3–1 제주 유나이티드 0–1 0–0 포항 스틸러스 1–3 1–1 1–2 2018년 12월 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하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강원 대구 상주 서울 인천 전남 강원 FC 0–1 2–3 1–0 대구 FC 0–0 1–1 상주 상무 0–1 1–0 FC 서울 1–1 0–1 3–2 인천 유나이티드 0–1 2–1 3–1 전남 드래곤즈 1–2 0–1 2018년 12월 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승강 플레이오프[편집]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그 11위는 K리그2 2018 플레이오프 승자와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을 치루어 우승 시 잔류하고, 패배 시 강등한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의 규칙은 K리그 2016의 규칙을 준용하여 K리그 클래식 1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을 원정 경기, 2차전을 홈 경기로 치른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1차전 리그2 vs. 리그1 2018년 12월 6일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1 - 3 FC 서울 (K리그 1 11위) 구덕운동장, 부산 19:00 UTC+9 호물로 23' 조영욱 59'고요한 79'정현철 89' 관중 수: 10,127명 심판: 김우성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2차전 리그1 vs. 리그2 2018년 12월 9일 FC 서울 (K리그 1 11위) 1 - 1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14:10 UTC+9 박주영 90+4' 김진규 33' 강등[편집] K리그1 12위에 머문 전남 드래곤즈는 K리그2로 강등되었다. K리그1 11위를 기록한 FC 서울은 부산 아이파크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K리그1 잔류를 확정지었다.. 시즌 리그 11위 리그 12위 구단 강등 여부 구단 강등 여부 2018년 FC 서울 잔류 전남 드래곤즈 강등 개인 기록[편집] 득점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득점 (pk) 도움 경기 교체 1 말컹 경남 26 (4) 5 31 13 2 제리치 강원 24 4 36 13 3 주니오 울산 22 (3) 1 32 12 4 무고사 인천 19 (2) 4 35 9 5 문선민 인천 14 6 37 22 6 로페스 전북 13 (1) 6 31 10 7 데얀 수원 13 (2) 3 33 18 8 이동국 전북 13 (3) 4 35 27 9 김신욱 전북 11 3 33 23 10 허용준 전남 9 2 23 18 도움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도움 득점 경기 교체 1 세징야 대구 11 8 25 5 2 아길라르 인천 10 3 35 12 3 이용 전북 9 0 32 2 4 홍철 상주,수원 8 1 30 5 5 한승규 울산 7 5 31 28 6 네게바 경남 7 5 36 16 7 한교원 전북 6 7 23 13 8 이창민 제주 6 3 23 8 9 이승기 전북 6 1 27 13 10 권순형 제주 6 2 29 11 무실점경기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1 송범근 전북 19 30 18 85 2 이창근 제주 16 35 39 101 3 손정현 경남 10 25 25 82 4 강현무 포항 9 38 49 129 4 이범영 강원 9 30 42 90 6 양한빈 서울 8 37 46 124 7 신화용 수원 7 17 17 47 8 유상훈 상주,서울 5 14 17 29 8 오승훈 울산 5 17 20 55 8 노동건 수원 5 21 33 65 아래는 5회 이상 출전 골키퍼들의 기록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이범수 경남 2 13 19 49 김용대 울산 1 14 20 29 조수혁 울산 4 8 6 14 조현우 대구 4 28 42 75 최영은 대구 3 10 13 35 김호준 강원 1 6 10 16 정산 인천 3 18 28 61 이진형 인천 2 13 27 42 이태희 인천 1 7 14 23 윤보상 상주 4 15 25 41 이호승 전남 4 28 44 65 장대희 전남 0 5 13 15 해트트릭 (Hat-trick)[편집] 선수 소속 경기 결과 날짜 비고 말컹 경남 경남 3:1 상주 3월 4일 이후 퇴장. 1부 데뷔전[2] 제리치 강원 강원 4:1 전남 4월 21일 마그노 제주 제주 3:5 강원 5월 2일 소속팀은 짐 이석현 포항 포항 5:2 전북 8월 15일 말컹 경남 경남 3:0 포항 8월 18일 제리치 강원 강원 7:0 인천 8월 19일 4골 *최종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 (출처: K리그 공식 홈페이지) *득점/도움 수가 같을 경우 경기 수가 적은 선수가, 경기 수도 같을 경우 교체 횟수가 많은 선수가 윗 순위가 된다. 수상[편집]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편집] K리그1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부문 수상자 구단 최우수선수상 말컹[3] 경남 FC 감독상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영 플레이어상 한승규 울산 현대 축구단 최다 득점상 말컹 경남 FC 최다 도움상 세징야 대구 FC 베스트11 GK 조현우 대구 FC DF 홍철 수원 삼성 블루윙즈 리차드 울산 현대 축구단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이용 전북 현대 모터스 MF 네게바 경남 FC 최영준 경남 FC 아길라르 인천 유나이티드 FC 로페스 전북 현대 모터스 FW 말컹 경남 FC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 클럽상[4] 팬 프렌들리 클럽상 : 부산 아이파크 풀 스타디움상 : 전북 현대 플러스 스타디움상 : 경남FC 그린 스타디움상 : 안산 그리너스 페어플레이상 : 상주 상무 유소년 클럽상 : 울산 현대 ▲ 특별상[5] 사랑나눔상 : 전남 드래곤즈, 안산 그리너스 감사패 : K리그 홍보대사 감스트 전경기 전시간 출장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김영광 (서울 이랜드) 베스트 포토상 : 말컹 (경남 FC) 아디다스 탱고어워드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EA Sports 피파온라인4 Most Selected Player : 조현우 (대구 FC) ▲ 심판상 최우수 주심상 : 김대용 최우수 부심상 : 김계용 라운드별 MVP[편집] 라운드 MVP 소속 기록 1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3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4 말컹 경남 FC 2득점 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6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7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8 제리치 강원 FC 3득점 9 이기제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도움 10 권순형 제주 유나이티드 FC 2득점 11 제리치 강원 FC 2득점 12 안델손 FC 서울 2득점 13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1득점 14 임선영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5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6 홍정운 대구 FC 1득점 17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18 염기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득점 1도움 19 제리치 강원 FC 2득점 라운드 MVP 소속 기록 20 말컹 경남 FC 2득점 1도움 21 김대원 대구 FC 2득점 22 티아고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3 이석현 포항 스틸러스 3득점 24 제리치 강원 FC 4득점 25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1도움 26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2득점 27 세징야 대구 FC 2득점 28 한교원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도움 29 에드가 대구 FC 2득점 1도움 30 김도형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1 이진현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2 김인성 울산 현대 축구단 1득점 1도움 33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4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1득점 1도움 36 데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득점 1도움 37 이창근 제주 유나이티드 FC 무실점 38 윤빛가람 상주 상무 축구단 1도움 관중 수[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같이 보기[편집] 2018년 대한민국 축구 전체 2018년 대한민국의 축구 201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8 시즌 2018년 대한민국 프로/아마 리그와 FA컵 대회 1부 (프로) K리그1 2018 2부 (프로) K리그2 2018 3부격 (세미프로,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내셔널리그 2018 4부격 (아마추어) K3리그 어드밴스 2018 5부격 (아마추어) K3리그 베이직 2018 FA컵 FA컵 2018 각주[편집] ↑ 대구 FC가 KEB하나은행 FA컵 2018 시즌을 우승하였다. ↑ K리그 최초의 개막전 해트트릭이기도 하다. ↑ 2017년에 K리그2, 2018년에 K리그1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잇달아 받아 K리그 최초로 1부와 2부의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석권한 선수가 되었다.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구단 수상 목록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개인 수상 목록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1_2018&oldid=24385715" 분류: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틀K리그1 시즌2018 축구 리그2018년 대한민국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Lietuvių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22: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K리그1 2018에 참가한 팀의 감독, 스폰서, 주장은 누구일까? |
K리그1 201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1 201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개요 대회 명칭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시즌 2018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준우승 경남 FC 승격 경남 FC 강등 전남 드래곤즈 AFC 챔피언스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경남 FC울산 현대 (3차 예선 부터)대구 FC (FA컵 우승) 각종 기록 최다 득점 26골 말컹(경남) 최다 점수차 홈 승리 강원 7 - 0 인천 (8월 19일) 최다 점수차 원정 승리 경남 0 - 4 전북 (4월 11일) 서울 0 - 4 전북 (5월 20일) 최다 점수 경기 전남 6 - 4 수원 (8월 19일) 최다 연승 기록 9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3월 18일 ~ 5월 2일) 최다 무패 기록 14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8월 19일~) 최다 무승 기록 16경기 제주 유나이티드 (7월 11일~9월 26일) 최다 연패 기록 6경기 대구 (4월 21일~5월 13일) 전남 드래곤즈 (7월 18일~8월 15일, 10월 20일~12월 1일) 최다 관중 30,202명 서울 2 - 1 수원 (5월 5일) 최소 관중 290명 상주 0 - 1 강원 (11월 24일) 인접 대회 이전← 2017 다음2019 → K리그1 2018은 대한민국에서 1983년 아시아 최초의 본격 프로 리그로 출범한 '슈퍼리그'에서 시작해 36번째를 맞은 시즌으로, 2013년 도입한 승강제로 지어진 1부의 이름 K리그 클래식을 K리그1으로 바꿔 2018년 3월 1일 개막하였다. 바꾼 이름 K리그1은 혼란을 막기 위해 이번 시즌만 K리그 클래식과 함께 쓴다. 리그는 전년도와 똑같이 △12개팀이 3차에 걸쳐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정규 라운드(1~33 라운드)와 △정규 라운드 성적을 토대로 나누어진 상・하위 스플릿 내에서 6개팀이 싱글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스플릿 라운드(34~38 라운드)로 진행한다. 리그가 끝난 뒤 우승, 준우승 팀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3위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리그 3위 이내의 팀이 FA컵 2018에서 우승하는 경우, 리그 3위까지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4위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고 리그 최하위 12위는 자동으로 K리그2 2019으로 강등된다. 목차 1 K리그1 참가 팀 1.1 경기장 1.2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 1.3 이적 시장 1.4 감독 변화 1.5 외국인 선수 2 리그 순위 2.1 정규 시즌 2.2 라운드별 순위 2.2.1 1-33라운드 2.2.2 34-38라운드 3 우승 구단 4 리그 결과 4.1 1-22 라운드 4.2 23-33 라운드 4.3 34-38 라운드 4.3.1 상위 스플릿 4.3.2 하위 스플릿 4.4 승강 플레이오프 4.5 강등 5 개인 기록 5.1 득점 순위 5.2 도움 순위 5.3 무실점경기 순위 5.4 해트트릭 (Hat-trick) 6 수상 6.1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 6.2 라운드별 MVP 7 관중 수 8 같이 보기 9 각주 K리그1 참가 팀[편집] 경기장[편집]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K리그 1 2018 시즌 팀의 위치 클럽 지난 시즌 순위 첫 리그 참가 총 시즌 연고지 홈구장 수용좌석 강원 FC 16위 2009 7 강원 춘천송암레포츠타운 20,000 경남 FC LL K리그 챌린지 2017 우승 2011 5 경남 창원축구센터 15,116 대구 FC 18위 2003 13 대구 대구스타디움 66,422 상주 상무 211위 2011 5 상주 상주시민운동장 15,042 FC 서울 15위 1984 35 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66,806 수원 삼성 블루윙즈 13위 1996 23 수원 수원월드컵경기장 43,959 울산 현대 14위 1984 35 울산 울산문수축구경기장 44,474 인천 유나이티드 19위 2004 15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300 전남 드래곤즈 210위 1995 24 전남 광양축구전용구장순천팔마경기장 13,49612,703 전북 현대 모터스 0우승 1995 24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 42,477 제주 유나이티드 12위 1983 36 제주 제주월드컵경기장 29,791 포항 스틸러스 17위 1983 36 포항 포항스틸야드 18,960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편집] 클럽 감독 킷 스폰서 메인 스폰서 주장 강원 FC 김병수 조마 하이원리조트 정조국 경남 FC 김종부 험멜 경상남도 배기종 대구 FC 안드레 함프 대구은행, 아진산업 한희훈 상주 상무 김태완 루포 핀타 상주시 여름 FC 서울 최용수 르꼬끄 GS SHOP 고요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자이크로 삼성전자 김은선 울산 현대 축구단 김도훈 험멜 현대오일뱅크 강민수 인천 유나이티드 예른 안데르센 험멜 인천광역시, 인천국제공항, 신한은행 최종환 전남 드래곤즈 김인완 (대행) 조마 포스코 김영욱 전북 현대 모터스 최강희 험멜 현대자동차 신형민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키카 SK 에너지 권순형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아스토레 포스코 김광석 이적 시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K리그 2018 시즌 이적 명단입니다. 감독 변화[편집] 구단 전임 감독 형태 일자 당시 순위 신임 감독 일자 전남 드래곤즈 노상래 사임 2017/12/04 비시즌 유상철 2017/12/04 FC서울 황선홍 사임 2018/04/30 9위 이을용 (감독대행) 2018/04/30 인천 유나이티드 이기형 사임 2018/05/11 11위 박성철 (감독대행) 2018/05/11 인천 유나이티드 박성철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06/09 11위 예른 안데르센 2018/06/09 강원 FC 송경섭 사임 2018/08/12 7위 김병수 2018/08/12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사임 2018/08/16 12위 김인완 (감독대행) 2018/08/16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사임 2018/08/28 4위 이병근 (감독대행) 2018/08/28 FC서울 이을용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1 9위 최용수 2018/1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병근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5 5위 서정원 2018/10/15 외국인 선수[편집]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당 AFC 소속 국가들의 국적인 1인을 포함해서 최대 4인까지 경기에서 뛸 수 있다. 클럽 선수 1 선수 2 선수 3 아시아 선수 강원 FC 디에고 발렌티노스 제리치 맥고원 경남 FC 말컹 네게바 파울링요 쿠니모토 대구 FC 세징야 조세 호베르토 에드가 츠바사 FC 서울 안델손 에반드로 마티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데얀 바그닝요 사리치 울산 현대 축구단 리차드 주니오 믹스 에스쿠데로 인천 유나이티드 FC 부노자 무고사 아길라르 쿠비 전남 드래곤즈 유고비치 마쎄도 완델손 도나치 전북 현대 모터스 로페즈 티아고 아드리아노 제주 유나이티드 마그노 치아구 호베르송 알렉스 포항 스틸러스 알레망 레우 가말류 테이셰이라 채프먼 리그 순위[편집] 정규 시즌[편집] 순위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v • d • e • h 1 전북 현대 모터스 (C) (Q) 38 26 8 4 75 31 +44 86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2 경남 FC (Q) 38 18 11 9 59 44 +15 65 3 울산 현대 (Q) 38 17 12 9 61 46 +15 63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4 포항 스틸러스 38 15 9 14 48 49 −1 54 5 제주 유나이티드 38 14 12 12 42 42 0 54 6 수원 삼성 블루윙즈 38 13 11 14 53 54 −1 50 7 대구 FC (Q) 38 14 8 16 48 55 −7 50[1]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8 강원 FC 38 12 10 16 56 60 −4 46 9 인천 유나이티드 38 10 12 16 55 69 −14 42 10 상주 상무 38 10 10 18 41 52 −11 40 11 FC 서울 (O) 38 9 13 16 40 49 −9 40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12 전남 드래곤즈 (R) 38 8 8 22 43 69 −26 32 K리그2 2019로 강등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년 12월 2일* 출처 : K리그 공식 웹사이트* 순위 결정방식 : 1) 승점; 2) 득점 수; 3) 골 득실차.*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시즌이 끝나지 않은 경우만 사용되는 표시: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라운드별 순위[편집] 1-33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전북 현대 모터스 3 4 4 3 2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경남 FC 2 2 1 1 1 2 3 3 3 3 3 2 4 4 4 4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울산 현대 11 11 12 12 10 9 7 8 7 7 8 6 6 7 5 5 5 5 5 5 4 4 4 3 3 3 3 3 3 3 3 3 3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7 5 5 5 3 2 2 2 2 2 3 2 2 3 2 3 3 3 3 3 3 3 4 4 4 4 4 4 5 5 5 4 포항 스틸러스 1 1 3 2 3 4 4 4 5 5 6 8 7 8 8 9 9 8 7 7 6 6 5 6 5 5 5 5 5 4 4 4 5 제주 유나이티드 6 10 7 8 8 6 5 6 4 4 4 4 3 3 2 3 4 4 4 4 5 5 8 8 8 8 7 7 8 8 7 6 6 강원 FC 4 3 2 4 4 5 6 5 8 8 5 7 8 6 7 6 6 6 6 6 7 8 7 5 6 6 6 6 6 6 6 7 7 대구 FC 12 12 11 11 12 12 11 11 12 12 12 12 12 12 12 11 11 11 11 12 10 10 10 10 10 10 9 10 7 7 8 8 8 FC 서울 7 9 10 10 11 10 10 9 9 9 9 9 9 9 9 8 8 7 8 9 8 7 6 7 7 7 8 8 9 9 9 9 9 상주 상무 10 8 9 9 9 7 8 7 6 6 7 5 5 5 6 7 7 9 9 8 9 9 9 9 9 9 10 9 10 10 10 10 10 전남 드래곤즈 5 5 8 7 7 11 12 12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1 12 12 12 11 12 11 11 11 11 11 11 11 11 인천 유나이티드 8 6 6 6 6 8 9 10 11 11 11 11 11 11 11 12 12 12 12 10 11 11 11 12 11 12 12 12 12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0월 28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34-38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34 35 36 37 38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경남 FC 3 2 2 2 2 울산 현대 2 3 3 3 3 포항 스틸러스 5 4 4 4 4 제주 유나이티드 6 6 6 5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4 5 5 6 6 6.5 6.5 6.5 6.5 6.5 대구 FC 7 8 7 7 7 강원 FC 8 7 8 8 8 인천 유나이티드 12 11 11 10 9 상주 상무 9 10 10 11 10 FC 서울 10 9 9 9 11 전남 드래곤즈 11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우승 구단[편집] K리그1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1 제36대 대한민국 챔피언 (6회 우승) 2009년・2011년・2014년・2015년・2017년2018년 리그 결과[편집] 자세한 경기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1 2018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1–3 0–3 2–1 1–1 2–3 3–3 2–1 1–1 0–2 3–1 0–0 경남 FC 0–1 1–1 3–1 0–0 2–2 0–0 3–0 3–0 0–4 2–0 2–0 대구 FC 2–1 0–2 1–2 2–2 0–2 0–2 2–1 1–1 1–2 1–4 0–1 상주 상무 3–0 0–1 0–1 1–2 1–1 2–3 3–2 1–1 0–2 0–0 2–1 FC 서울 1–2 2–3 3–0 0–0 2–1 1–1 1–1 2–1 0–4 3–0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3–1 2–0 2–1 0–0 0–0 5–2 1–2 0–3 2–3 1–1 울산 현대 3–1 1–1 2–0 0–2 1–0 1–0 2–1 1–1 0–2 0–1 2–1 인천 유나이티드 3–3 2–3 0–0 0–1 2–1 2–3 1–1 2–2 3–2 1–2 1–2 전남 드래곤즈 1–4 1–3 1–1 2–0 2–1 0–2 1–2 1–3 0–0 0–3 2–3 전북 현대 모터스 3–1 0–1 2–1 1–0 2–1 2–0 2–0 3–3 3–0 1–0 0–3 제주 유나이티드 3–5 0–0 1–2 0–0 0–0 0–1 1–1 4–2 1–0 0–1 0–0 포항 스틸러스 0–0 2–1 3–0 0–2 0–3 1–1 2–1 0–0 3–1 0–2 0–1 2018년 8월 1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23-33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2–3 0–0 1–0 7–0 1–1 경남 FC 2–1 2–1 2–1 3–3 0–3 0–1 대구 FC 2–0 2–2 4–2 0–2 1–2 2–1 상주 상무 2–5 1–2 1–2 2–2 1–1 1–2 FC 서울 0–2 2–2 1–1 0–2 0–1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1–2 2–2 0–0 2–0 울산 현대 2–0 4–1 4–1 2–2 3–2 2–0 인천 유나이티드 2–2 0–0 0–0 3–2 3–1 전남 드래곤즈 0–1 3–3 1–0 6–4 1–0 3–2 전북 현대 모터스 3–2 2–1 3–2 1–0 4–0 제주 유나이티드 2–2 2–3 1–0 0–0 0–0 1–0 포항 스틸러스 0–3 2–1 1–0 5–2 2–2 2018년 10월 20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34-38 라운드[편집] 상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경남 수원 울산 전북 제주 포항 경남 FC 2–1 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3–3 0–2 1–3 울산 현대 1–0 0–1 전북 현대 모터스 1–1 2–0 3–1 제주 유나이티드 0–1 0–0 포항 스틸러스 1–3 1–1 1–2 2018년 12월 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하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강원 대구 상주 서울 인천 전남 강원 FC 0–1 2–3 1–0 대구 FC 0–0 1–1 상주 상무 0–1 1–0 FC 서울 1–1 0–1 3–2 인천 유나이티드 0–1 2–1 3–1 전남 드래곤즈 1–2 0–1 2018년 12월 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승강 플레이오프[편집]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그 11위는 K리그2 2018 플레이오프 승자와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을 치루어 우승 시 잔류하고, 패배 시 강등한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의 규칙은 K리그 2016의 규칙을 준용하여 K리그 클래식 1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을 원정 경기, 2차전을 홈 경기로 치른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1차전 리그2 vs. 리그1 2018년 12월 6일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1 - 3 FC 서울 (K리그 1 11위) 구덕운동장, 부산 19:00 UTC+9 호물로 23' 조영욱 59'고요한 79'정현철 89' 관중 수: 10,127명 심판: 김우성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2차전 리그1 vs. 리그2 2018년 12월 9일 FC 서울 (K리그 1 11위) 1 - 1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14:10 UTC+9 박주영 90+4' 김진규 33' 강등[편집] K리그1 12위에 머문 전남 드래곤즈는 K리그2로 강등되었다. K리그1 11위를 기록한 FC 서울은 부산 아이파크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K리그1 잔류를 확정지었다.. 시즌 리그 11위 리그 12위 구단 강등 여부 구단 강등 여부 2018년 FC 서울 잔류 전남 드래곤즈 강등 개인 기록[편집] 득점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득점 (pk) 도움 경기 교체 1 말컹 경남 26 (4) 5 31 13 2 제리치 강원 24 4 36 13 3 주니오 울산 22 (3) 1 32 12 4 무고사 인천 19 (2) 4 35 9 5 문선민 인천 14 6 37 22 6 로페스 전북 13 (1) 6 31 10 7 데얀 수원 13 (2) 3 33 18 8 이동국 전북 13 (3) 4 35 27 9 김신욱 전북 11 3 33 23 10 허용준 전남 9 2 23 18 도움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도움 득점 경기 교체 1 세징야 대구 11 8 25 5 2 아길라르 인천 10 3 35 12 3 이용 전북 9 0 32 2 4 홍철 상주,수원 8 1 30 5 5 한승규 울산 7 5 31 28 6 네게바 경남 7 5 36 16 7 한교원 전북 6 7 23 13 8 이창민 제주 6 3 23 8 9 이승기 전북 6 1 27 13 10 권순형 제주 6 2 29 11 무실점경기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1 송범근 전북 19 30 18 85 2 이창근 제주 16 35 39 101 3 손정현 경남 10 25 25 82 4 강현무 포항 9 38 49 129 4 이범영 강원 9 30 42 90 6 양한빈 서울 8 37 46 124 7 신화용 수원 7 17 17 47 8 유상훈 상주,서울 5 14 17 29 8 오승훈 울산 5 17 20 55 8 노동건 수원 5 21 33 65 아래는 5회 이상 출전 골키퍼들의 기록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이범수 경남 2 13 19 49 김용대 울산 1 14 20 29 조수혁 울산 4 8 6 14 조현우 대구 4 28 42 75 최영은 대구 3 10 13 35 김호준 강원 1 6 10 16 정산 인천 3 18 28 61 이진형 인천 2 13 27 42 이태희 인천 1 7 14 23 윤보상 상주 4 15 25 41 이호승 전남 4 28 44 65 장대희 전남 0 5 13 15 해트트릭 (Hat-trick)[편집] 선수 소속 경기 결과 날짜 비고 말컹 경남 경남 3:1 상주 3월 4일 이후 퇴장. 1부 데뷔전[2] 제리치 강원 강원 4:1 전남 4월 21일 마그노 제주 제주 3:5 강원 5월 2일 소속팀은 짐 이석현 포항 포항 5:2 전북 8월 15일 말컹 경남 경남 3:0 포항 8월 18일 제리치 강원 강원 7:0 인천 8월 19일 4골 *최종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 (출처: K리그 공식 홈페이지) *득점/도움 수가 같을 경우 경기 수가 적은 선수가, 경기 수도 같을 경우 교체 횟수가 많은 선수가 윗 순위가 된다. 수상[편집]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편집] K리그1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부문 수상자 구단 최우수선수상 말컹[3] 경남 FC 감독상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영 플레이어상 한승규 울산 현대 축구단 최다 득점상 말컹 경남 FC 최다 도움상 세징야 대구 FC 베스트11 GK 조현우 대구 FC DF 홍철 수원 삼성 블루윙즈 리차드 울산 현대 축구단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이용 전북 현대 모터스 MF 네게바 경남 FC 최영준 경남 FC 아길라르 인천 유나이티드 FC 로페스 전북 현대 모터스 FW 말컹 경남 FC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 클럽상[4] 팬 프렌들리 클럽상 : 부산 아이파크 풀 스타디움상 : 전북 현대 플러스 스타디움상 : 경남FC 그린 스타디움상 : 안산 그리너스 페어플레이상 : 상주 상무 유소년 클럽상 : 울산 현대 ▲ 특별상[5] 사랑나눔상 : 전남 드래곤즈, 안산 그리너스 감사패 : K리그 홍보대사 감스트 전경기 전시간 출장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김영광 (서울 이랜드) 베스트 포토상 : 말컹 (경남 FC) 아디다스 탱고어워드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EA Sports 피파온라인4 Most Selected Player : 조현우 (대구 FC) ▲ 심판상 최우수 주심상 : 김대용 최우수 부심상 : 김계용 라운드별 MVP[편집] 라운드 MVP 소속 기록 1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3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4 말컹 경남 FC 2득점 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6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7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8 제리치 강원 FC 3득점 9 이기제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도움 10 권순형 제주 유나이티드 FC 2득점 11 제리치 강원 FC 2득점 12 안델손 FC 서울 2득점 13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1득점 14 임선영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5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6 홍정운 대구 FC 1득점 17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18 염기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득점 1도움 19 제리치 강원 FC 2득점 라운드 MVP 소속 기록 20 말컹 경남 FC 2득점 1도움 21 김대원 대구 FC 2득점 22 티아고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3 이석현 포항 스틸러스 3득점 24 제리치 강원 FC 4득점 25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1도움 26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2득점 27 세징야 대구 FC 2득점 28 한교원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도움 29 에드가 대구 FC 2득점 1도움 30 김도형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1 이진현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2 김인성 울산 현대 축구단 1득점 1도움 33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4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1득점 1도움 36 데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득점 1도움 37 이창근 제주 유나이티드 FC 무실점 38 윤빛가람 상주 상무 축구단 1도움 관중 수[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같이 보기[편집] 2018년 대한민국 축구 전체 2018년 대한민국의 축구 201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8 시즌 2018년 대한민국 프로/아마 리그와 FA컵 대회 1부 (프로) K리그1 2018 2부 (프로) K리그2 2018 3부격 (세미프로,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내셔널리그 2018 4부격 (아마추어) K3리그 어드밴스 2018 5부격 (아마추어) K3리그 베이직 2018 FA컵 FA컵 2018 각주[편집] ↑ 대구 FC가 KEB하나은행 FA컵 2018 시즌을 우승하였다. ↑ K리그 최초의 개막전 해트트릭이기도 하다. ↑ 2017년에 K리그2, 2018년에 K리그1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잇달아 받아 K리그 최초로 1부와 2부의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석권한 선수가 되었다.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구단 수상 목록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개인 수상 목록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1_2018&oldid=24385715" 분류: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틀K리그1 시즌2018 축구 리그2018년 대한민국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Lietuvių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22: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강원 FC의 홈구장은 어디일까? |
K리그1 201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1 201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개요 대회 명칭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시즌 2018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준우승 경남 FC 승격 경남 FC 강등 전남 드래곤즈 AFC 챔피언스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경남 FC울산 현대 (3차 예선 부터)대구 FC (FA컵 우승) 각종 기록 최다 득점 26골 말컹(경남) 최다 점수차 홈 승리 강원 7 - 0 인천 (8월 19일) 최다 점수차 원정 승리 경남 0 - 4 전북 (4월 11일) 서울 0 - 4 전북 (5월 20일) 최다 점수 경기 전남 6 - 4 수원 (8월 19일) 최다 연승 기록 9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3월 18일 ~ 5월 2일) 최다 무패 기록 14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8월 19일~) 최다 무승 기록 16경기 제주 유나이티드 (7월 11일~9월 26일) 최다 연패 기록 6경기 대구 (4월 21일~5월 13일) 전남 드래곤즈 (7월 18일~8월 15일, 10월 20일~12월 1일) 최다 관중 30,202명 서울 2 - 1 수원 (5월 5일) 최소 관중 290명 상주 0 - 1 강원 (11월 24일) 인접 대회 이전← 2017 다음2019 → K리그1 2018은 대한민국에서 1983년 아시아 최초의 본격 프로 리그로 출범한 '슈퍼리그'에서 시작해 36번째를 맞은 시즌으로, 2013년 도입한 승강제로 지어진 1부의 이름 K리그 클래식을 K리그1으로 바꿔 2018년 3월 1일 개막하였다. 바꾼 이름 K리그1은 혼란을 막기 위해 이번 시즌만 K리그 클래식과 함께 쓴다. 리그는 전년도와 똑같이 △12개팀이 3차에 걸쳐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정규 라운드(1~33 라운드)와 △정규 라운드 성적을 토대로 나누어진 상・하위 스플릿 내에서 6개팀이 싱글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스플릿 라운드(34~38 라운드)로 진행한다. 리그가 끝난 뒤 우승, 준우승 팀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3위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리그 3위 이내의 팀이 FA컵 2018에서 우승하는 경우, 리그 3위까지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4위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고 리그 최하위 12위는 자동으로 K리그2 2019으로 강등된다. 목차 1 K리그1 참가 팀 1.1 경기장 1.2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 1.3 이적 시장 1.4 감독 변화 1.5 외국인 선수 2 리그 순위 2.1 정규 시즌 2.2 라운드별 순위 2.2.1 1-33라운드 2.2.2 34-38라운드 3 우승 구단 4 리그 결과 4.1 1-22 라운드 4.2 23-33 라운드 4.3 34-38 라운드 4.3.1 상위 스플릿 4.3.2 하위 스플릿 4.4 승강 플레이오프 4.5 강등 5 개인 기록 5.1 득점 순위 5.2 도움 순위 5.3 무실점경기 순위 5.4 해트트릭 (Hat-trick) 6 수상 6.1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 6.2 라운드별 MVP 7 관중 수 8 같이 보기 9 각주 K리그1 참가 팀[편집] 경기장[편집]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K리그 1 2018 시즌 팀의 위치 클럽 지난 시즌 순위 첫 리그 참가 총 시즌 연고지 홈구장 수용좌석 강원 FC 16위 2009 7 강원 춘천송암레포츠타운 20,000 경남 FC LL K리그 챌린지 2017 우승 2011 5 경남 창원축구센터 15,116 대구 FC 18위 2003 13 대구 대구스타디움 66,422 상주 상무 211위 2011 5 상주 상주시민운동장 15,042 FC 서울 15위 1984 35 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66,806 수원 삼성 블루윙즈 13위 1996 23 수원 수원월드컵경기장 43,959 울산 현대 14위 1984 35 울산 울산문수축구경기장 44,474 인천 유나이티드 19위 2004 15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300 전남 드래곤즈 210위 1995 24 전남 광양축구전용구장순천팔마경기장 13,49612,703 전북 현대 모터스 0우승 1995 24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 42,477 제주 유나이티드 12위 1983 36 제주 제주월드컵경기장 29,791 포항 스틸러스 17위 1983 36 포항 포항스틸야드 18,960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편집] 클럽 감독 킷 스폰서 메인 스폰서 주장 강원 FC 김병수 조마 하이원리조트 정조국 경남 FC 김종부 험멜 경상남도 배기종 대구 FC 안드레 함프 대구은행, 아진산업 한희훈 상주 상무 김태완 루포 핀타 상주시 여름 FC 서울 최용수 르꼬끄 GS SHOP 고요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자이크로 삼성전자 김은선 울산 현대 축구단 김도훈 험멜 현대오일뱅크 강민수 인천 유나이티드 예른 안데르센 험멜 인천광역시, 인천국제공항, 신한은행 최종환 전남 드래곤즈 김인완 (대행) 조마 포스코 김영욱 전북 현대 모터스 최강희 험멜 현대자동차 신형민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키카 SK 에너지 권순형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아스토레 포스코 김광석 이적 시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K리그 2018 시즌 이적 명단입니다. 감독 변화[편집] 구단 전임 감독 형태 일자 당시 순위 신임 감독 일자 전남 드래곤즈 노상래 사임 2017/12/04 비시즌 유상철 2017/12/04 FC서울 황선홍 사임 2018/04/30 9위 이을용 (감독대행) 2018/04/30 인천 유나이티드 이기형 사임 2018/05/11 11위 박성철 (감독대행) 2018/05/11 인천 유나이티드 박성철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06/09 11위 예른 안데르센 2018/06/09 강원 FC 송경섭 사임 2018/08/12 7위 김병수 2018/08/12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사임 2018/08/16 12위 김인완 (감독대행) 2018/08/16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사임 2018/08/28 4위 이병근 (감독대행) 2018/08/28 FC서울 이을용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1 9위 최용수 2018/1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병근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5 5위 서정원 2018/10/15 외국인 선수[편집]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당 AFC 소속 국가들의 국적인 1인을 포함해서 최대 4인까지 경기에서 뛸 수 있다. 클럽 선수 1 선수 2 선수 3 아시아 선수 강원 FC 디에고 발렌티노스 제리치 맥고원 경남 FC 말컹 네게바 파울링요 쿠니모토 대구 FC 세징야 조세 호베르토 에드가 츠바사 FC 서울 안델손 에반드로 마티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데얀 바그닝요 사리치 울산 현대 축구단 리차드 주니오 믹스 에스쿠데로 인천 유나이티드 FC 부노자 무고사 아길라르 쿠비 전남 드래곤즈 유고비치 마쎄도 완델손 도나치 전북 현대 모터스 로페즈 티아고 아드리아노 제주 유나이티드 마그노 치아구 호베르송 알렉스 포항 스틸러스 알레망 레우 가말류 테이셰이라 채프먼 리그 순위[편집] 정규 시즌[편집] 순위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v • d • e • h 1 전북 현대 모터스 (C) (Q) 38 26 8 4 75 31 +44 86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2 경남 FC (Q) 38 18 11 9 59 44 +15 65 3 울산 현대 (Q) 38 17 12 9 61 46 +15 63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4 포항 스틸러스 38 15 9 14 48 49 −1 54 5 제주 유나이티드 38 14 12 12 42 42 0 54 6 수원 삼성 블루윙즈 38 13 11 14 53 54 −1 50 7 대구 FC (Q) 38 14 8 16 48 55 −7 50[1]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8 강원 FC 38 12 10 16 56 60 −4 46 9 인천 유나이티드 38 10 12 16 55 69 −14 42 10 상주 상무 38 10 10 18 41 52 −11 40 11 FC 서울 (O) 38 9 13 16 40 49 −9 40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12 전남 드래곤즈 (R) 38 8 8 22 43 69 −26 32 K리그2 2019로 강등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년 12월 2일* 출처 : K리그 공식 웹사이트* 순위 결정방식 : 1) 승점; 2) 득점 수; 3) 골 득실차.*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시즌이 끝나지 않은 경우만 사용되는 표시: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라운드별 순위[편집] 1-33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전북 현대 모터스 3 4 4 3 2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경남 FC 2 2 1 1 1 2 3 3 3 3 3 2 4 4 4 4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울산 현대 11 11 12 12 10 9 7 8 7 7 8 6 6 7 5 5 5 5 5 5 4 4 4 3 3 3 3 3 3 3 3 3 3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7 5 5 5 3 2 2 2 2 2 3 2 2 3 2 3 3 3 3 3 3 3 4 4 4 4 4 4 5 5 5 4 포항 스틸러스 1 1 3 2 3 4 4 4 5 5 6 8 7 8 8 9 9 8 7 7 6 6 5 6 5 5 5 5 5 4 4 4 5 제주 유나이티드 6 10 7 8 8 6 5 6 4 4 4 4 3 3 2 3 4 4 4 4 5 5 8 8 8 8 7 7 8 8 7 6 6 강원 FC 4 3 2 4 4 5 6 5 8 8 5 7 8 6 7 6 6 6 6 6 7 8 7 5 6 6 6 6 6 6 6 7 7 대구 FC 12 12 11 11 12 12 11 11 12 12 12 12 12 12 12 11 11 11 11 12 10 10 10 10 10 10 9 10 7 7 8 8 8 FC 서울 7 9 10 10 11 10 10 9 9 9 9 9 9 9 9 8 8 7 8 9 8 7 6 7 7 7 8 8 9 9 9 9 9 상주 상무 10 8 9 9 9 7 8 7 6 6 7 5 5 5 6 7 7 9 9 8 9 9 9 9 9 9 10 9 10 10 10 10 10 전남 드래곤즈 5 5 8 7 7 11 12 12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1 12 12 12 11 12 11 11 11 11 11 11 11 11 인천 유나이티드 8 6 6 6 6 8 9 10 11 11 11 11 11 11 11 12 12 12 12 10 11 11 11 12 11 12 12 12 12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0월 28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34-38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34 35 36 37 38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경남 FC 3 2 2 2 2 울산 현대 2 3 3 3 3 포항 스틸러스 5 4 4 4 4 제주 유나이티드 6 6 6 5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4 5 5 6 6 6.5 6.5 6.5 6.5 6.5 대구 FC 7 8 7 7 7 강원 FC 8 7 8 8 8 인천 유나이티드 12 11 11 10 9 상주 상무 9 10 10 11 10 FC 서울 10 9 9 9 11 전남 드래곤즈 11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우승 구단[편집] K리그1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1 제36대 대한민국 챔피언 (6회 우승) 2009년・2011년・2014년・2015년・2017년2018년 리그 결과[편집] 자세한 경기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1 2018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1–3 0–3 2–1 1–1 2–3 3–3 2–1 1–1 0–2 3–1 0–0 경남 FC 0–1 1–1 3–1 0–0 2–2 0–0 3–0 3–0 0–4 2–0 2–0 대구 FC 2–1 0–2 1–2 2–2 0–2 0–2 2–1 1–1 1–2 1–4 0–1 상주 상무 3–0 0–1 0–1 1–2 1–1 2–3 3–2 1–1 0–2 0–0 2–1 FC 서울 1–2 2–3 3–0 0–0 2–1 1–1 1–1 2–1 0–4 3–0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3–1 2–0 2–1 0–0 0–0 5–2 1–2 0–3 2–3 1–1 울산 현대 3–1 1–1 2–0 0–2 1–0 1–0 2–1 1–1 0–2 0–1 2–1 인천 유나이티드 3–3 2–3 0–0 0–1 2–1 2–3 1–1 2–2 3–2 1–2 1–2 전남 드래곤즈 1–4 1–3 1–1 2–0 2–1 0–2 1–2 1–3 0–0 0–3 2–3 전북 현대 모터스 3–1 0–1 2–1 1–0 2–1 2–0 2–0 3–3 3–0 1–0 0–3 제주 유나이티드 3–5 0–0 1–2 0–0 0–0 0–1 1–1 4–2 1–0 0–1 0–0 포항 스틸러스 0–0 2–1 3–0 0–2 0–3 1–1 2–1 0–0 3–1 0–2 0–1 2018년 8월 1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23-33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2–3 0–0 1–0 7–0 1–1 경남 FC 2–1 2–1 2–1 3–3 0–3 0–1 대구 FC 2–0 2–2 4–2 0–2 1–2 2–1 상주 상무 2–5 1–2 1–2 2–2 1–1 1–2 FC 서울 0–2 2–2 1–1 0–2 0–1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1–2 2–2 0–0 2–0 울산 현대 2–0 4–1 4–1 2–2 3–2 2–0 인천 유나이티드 2–2 0–0 0–0 3–2 3–1 전남 드래곤즈 0–1 3–3 1–0 6–4 1–0 3–2 전북 현대 모터스 3–2 2–1 3–2 1–0 4–0 제주 유나이티드 2–2 2–3 1–0 0–0 0–0 1–0 포항 스틸러스 0–3 2–1 1–0 5–2 2–2 2018년 10월 20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34-38 라운드[편집] 상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경남 수원 울산 전북 제주 포항 경남 FC 2–1 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3–3 0–2 1–3 울산 현대 1–0 0–1 전북 현대 모터스 1–1 2–0 3–1 제주 유나이티드 0–1 0–0 포항 스틸러스 1–3 1–1 1–2 2018년 12월 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하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강원 대구 상주 서울 인천 전남 강원 FC 0–1 2–3 1–0 대구 FC 0–0 1–1 상주 상무 0–1 1–0 FC 서울 1–1 0–1 3–2 인천 유나이티드 0–1 2–1 3–1 전남 드래곤즈 1–2 0–1 2018년 12월 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승강 플레이오프[편집]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그 11위는 K리그2 2018 플레이오프 승자와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을 치루어 우승 시 잔류하고, 패배 시 강등한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의 규칙은 K리그 2016의 규칙을 준용하여 K리그 클래식 1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을 원정 경기, 2차전을 홈 경기로 치른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1차전 리그2 vs. 리그1 2018년 12월 6일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1 - 3 FC 서울 (K리그 1 11위) 구덕운동장, 부산 19:00 UTC+9 호물로 23' 조영욱 59'고요한 79'정현철 89' 관중 수: 10,127명 심판: 김우성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2차전 리그1 vs. 리그2 2018년 12월 9일 FC 서울 (K리그 1 11위) 1 - 1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14:10 UTC+9 박주영 90+4' 김진규 33' 강등[편집] K리그1 12위에 머문 전남 드래곤즈는 K리그2로 강등되었다. K리그1 11위를 기록한 FC 서울은 부산 아이파크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K리그1 잔류를 확정지었다.. 시즌 리그 11위 리그 12위 구단 강등 여부 구단 강등 여부 2018년 FC 서울 잔류 전남 드래곤즈 강등 개인 기록[편집] 득점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득점 (pk) 도움 경기 교체 1 말컹 경남 26 (4) 5 31 13 2 제리치 강원 24 4 36 13 3 주니오 울산 22 (3) 1 32 12 4 무고사 인천 19 (2) 4 35 9 5 문선민 인천 14 6 37 22 6 로페스 전북 13 (1) 6 31 10 7 데얀 수원 13 (2) 3 33 18 8 이동국 전북 13 (3) 4 35 27 9 김신욱 전북 11 3 33 23 10 허용준 전남 9 2 23 18 도움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도움 득점 경기 교체 1 세징야 대구 11 8 25 5 2 아길라르 인천 10 3 35 12 3 이용 전북 9 0 32 2 4 홍철 상주,수원 8 1 30 5 5 한승규 울산 7 5 31 28 6 네게바 경남 7 5 36 16 7 한교원 전북 6 7 23 13 8 이창민 제주 6 3 23 8 9 이승기 전북 6 1 27 13 10 권순형 제주 6 2 29 11 무실점경기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1 송범근 전북 19 30 18 85 2 이창근 제주 16 35 39 101 3 손정현 경남 10 25 25 82 4 강현무 포항 9 38 49 129 4 이범영 강원 9 30 42 90 6 양한빈 서울 8 37 46 124 7 신화용 수원 7 17 17 47 8 유상훈 상주,서울 5 14 17 29 8 오승훈 울산 5 17 20 55 8 노동건 수원 5 21 33 65 아래는 5회 이상 출전 골키퍼들의 기록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이범수 경남 2 13 19 49 김용대 울산 1 14 20 29 조수혁 울산 4 8 6 14 조현우 대구 4 28 42 75 최영은 대구 3 10 13 35 김호준 강원 1 6 10 16 정산 인천 3 18 28 61 이진형 인천 2 13 27 42 이태희 인천 1 7 14 23 윤보상 상주 4 15 25 41 이호승 전남 4 28 44 65 장대희 전남 0 5 13 15 해트트릭 (Hat-trick)[편집] 선수 소속 경기 결과 날짜 비고 말컹 경남 경남 3:1 상주 3월 4일 이후 퇴장. 1부 데뷔전[2] 제리치 강원 강원 4:1 전남 4월 21일 마그노 제주 제주 3:5 강원 5월 2일 소속팀은 짐 이석현 포항 포항 5:2 전북 8월 15일 말컹 경남 경남 3:0 포항 8월 18일 제리치 강원 강원 7:0 인천 8월 19일 4골 *최종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 (출처: K리그 공식 홈페이지) *득점/도움 수가 같을 경우 경기 수가 적은 선수가, 경기 수도 같을 경우 교체 횟수가 많은 선수가 윗 순위가 된다. 수상[편집]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편집] K리그1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부문 수상자 구단 최우수선수상 말컹[3] 경남 FC 감독상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영 플레이어상 한승규 울산 현대 축구단 최다 득점상 말컹 경남 FC 최다 도움상 세징야 대구 FC 베스트11 GK 조현우 대구 FC DF 홍철 수원 삼성 블루윙즈 리차드 울산 현대 축구단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이용 전북 현대 모터스 MF 네게바 경남 FC 최영준 경남 FC 아길라르 인천 유나이티드 FC 로페스 전북 현대 모터스 FW 말컹 경남 FC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 클럽상[4] 팬 프렌들리 클럽상 : 부산 아이파크 풀 스타디움상 : 전북 현대 플러스 스타디움상 : 경남FC 그린 스타디움상 : 안산 그리너스 페어플레이상 : 상주 상무 유소년 클럽상 : 울산 현대 ▲ 특별상[5] 사랑나눔상 : 전남 드래곤즈, 안산 그리너스 감사패 : K리그 홍보대사 감스트 전경기 전시간 출장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김영광 (서울 이랜드) 베스트 포토상 : 말컹 (경남 FC) 아디다스 탱고어워드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EA Sports 피파온라인4 Most Selected Player : 조현우 (대구 FC) ▲ 심판상 최우수 주심상 : 김대용 최우수 부심상 : 김계용 라운드별 MVP[편집] 라운드 MVP 소속 기록 1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3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4 말컹 경남 FC 2득점 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6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7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8 제리치 강원 FC 3득점 9 이기제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도움 10 권순형 제주 유나이티드 FC 2득점 11 제리치 강원 FC 2득점 12 안델손 FC 서울 2득점 13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1득점 14 임선영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5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6 홍정운 대구 FC 1득점 17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18 염기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득점 1도움 19 제리치 강원 FC 2득점 라운드 MVP 소속 기록 20 말컹 경남 FC 2득점 1도움 21 김대원 대구 FC 2득점 22 티아고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3 이석현 포항 스틸러스 3득점 24 제리치 강원 FC 4득점 25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1도움 26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2득점 27 세징야 대구 FC 2득점 28 한교원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도움 29 에드가 대구 FC 2득점 1도움 30 김도형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1 이진현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2 김인성 울산 현대 축구단 1득점 1도움 33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4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1득점 1도움 36 데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득점 1도움 37 이창근 제주 유나이티드 FC 무실점 38 윤빛가람 상주 상무 축구단 1도움 관중 수[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같이 보기[편집] 2018년 대한민국 축구 전체 2018년 대한민국의 축구 201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8 시즌 2018년 대한민국 프로/아마 리그와 FA컵 대회 1부 (프로) K리그1 2018 2부 (프로) K리그2 2018 3부격 (세미프로,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내셔널리그 2018 4부격 (아마추어) K3리그 어드밴스 2018 5부격 (아마추어) K3리그 베이직 2018 FA컵 FA컵 2018 각주[편집] ↑ 대구 FC가 KEB하나은행 FA컵 2018 시즌을 우승하였다. ↑ K리그 최초의 개막전 해트트릭이기도 하다. ↑ 2017년에 K리그2, 2018년에 K리그1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잇달아 받아 K리그 최초로 1부와 2부의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석권한 선수가 되었다.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구단 수상 목록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개인 수상 목록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1_2018&oldid=24385715" 분류: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틀K리그1 시즌2018 축구 리그2018년 대한민국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Lietuvių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22: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득점 8점을 기록한 선수의 소속은? |
K리그1 201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1 201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개요 대회 명칭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시즌 2018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준우승 경남 FC 승격 경남 FC 강등 전남 드래곤즈 AFC 챔피언스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경남 FC울산 현대 (3차 예선 부터)대구 FC (FA컵 우승) 각종 기록 최다 득점 26골 말컹(경남) 최다 점수차 홈 승리 강원 7 - 0 인천 (8월 19일) 최다 점수차 원정 승리 경남 0 - 4 전북 (4월 11일) 서울 0 - 4 전북 (5월 20일) 최다 점수 경기 전남 6 - 4 수원 (8월 19일) 최다 연승 기록 9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3월 18일 ~ 5월 2일) 최다 무패 기록 14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8월 19일~) 최다 무승 기록 16경기 제주 유나이티드 (7월 11일~9월 26일) 최다 연패 기록 6경기 대구 (4월 21일~5월 13일) 전남 드래곤즈 (7월 18일~8월 15일, 10월 20일~12월 1일) 최다 관중 30,202명 서울 2 - 1 수원 (5월 5일) 최소 관중 290명 상주 0 - 1 강원 (11월 24일) 인접 대회 이전← 2017 다음2019 → K리그1 2018은 대한민국에서 1983년 아시아 최초의 본격 프로 리그로 출범한 '슈퍼리그'에서 시작해 36번째를 맞은 시즌으로, 2013년 도입한 승강제로 지어진 1부의 이름 K리그 클래식을 K리그1으로 바꿔 2018년 3월 1일 개막하였다. 바꾼 이름 K리그1은 혼란을 막기 위해 이번 시즌만 K리그 클래식과 함께 쓴다. 리그는 전년도와 똑같이 △12개팀이 3차에 걸쳐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정규 라운드(1~33 라운드)와 △정규 라운드 성적을 토대로 나누어진 상・하위 스플릿 내에서 6개팀이 싱글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스플릿 라운드(34~38 라운드)로 진행한다. 리그가 끝난 뒤 우승, 준우승 팀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3위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리그 3위 이내의 팀이 FA컵 2018에서 우승하는 경우, 리그 3위까지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4위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고 리그 최하위 12위는 자동으로 K리그2 2019으로 강등된다. 목차 1 K리그1 참가 팀 1.1 경기장 1.2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 1.3 이적 시장 1.4 감독 변화 1.5 외국인 선수 2 리그 순위 2.1 정규 시즌 2.2 라운드별 순위 2.2.1 1-33라운드 2.2.2 34-38라운드 3 우승 구단 4 리그 결과 4.1 1-22 라운드 4.2 23-33 라운드 4.3 34-38 라운드 4.3.1 상위 스플릿 4.3.2 하위 스플릿 4.4 승강 플레이오프 4.5 강등 5 개인 기록 5.1 득점 순위 5.2 도움 순위 5.3 무실점경기 순위 5.4 해트트릭 (Hat-trick) 6 수상 6.1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 6.2 라운드별 MVP 7 관중 수 8 같이 보기 9 각주 K리그1 참가 팀[편집] 경기장[편집]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K리그 1 2018 시즌 팀의 위치 클럽 지난 시즌 순위 첫 리그 참가 총 시즌 연고지 홈구장 수용좌석 강원 FC 16위 2009 7 강원 춘천송암레포츠타운 20,000 경남 FC LL K리그 챌린지 2017 우승 2011 5 경남 창원축구센터 15,116 대구 FC 18위 2003 13 대구 대구스타디움 66,422 상주 상무 211위 2011 5 상주 상주시민운동장 15,042 FC 서울 15위 1984 35 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66,806 수원 삼성 블루윙즈 13위 1996 23 수원 수원월드컵경기장 43,959 울산 현대 14위 1984 35 울산 울산문수축구경기장 44,474 인천 유나이티드 19위 2004 15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300 전남 드래곤즈 210위 1995 24 전남 광양축구전용구장순천팔마경기장 13,49612,703 전북 현대 모터스 0우승 1995 24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 42,477 제주 유나이티드 12위 1983 36 제주 제주월드컵경기장 29,791 포항 스틸러스 17위 1983 36 포항 포항스틸야드 18,960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편집] 클럽 감독 킷 스폰서 메인 스폰서 주장 강원 FC 김병수 조마 하이원리조트 정조국 경남 FC 김종부 험멜 경상남도 배기종 대구 FC 안드레 함프 대구은행, 아진산업 한희훈 상주 상무 김태완 루포 핀타 상주시 여름 FC 서울 최용수 르꼬끄 GS SHOP 고요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자이크로 삼성전자 김은선 울산 현대 축구단 김도훈 험멜 현대오일뱅크 강민수 인천 유나이티드 예른 안데르센 험멜 인천광역시, 인천국제공항, 신한은행 최종환 전남 드래곤즈 김인완 (대행) 조마 포스코 김영욱 전북 현대 모터스 최강희 험멜 현대자동차 신형민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키카 SK 에너지 권순형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아스토레 포스코 김광석 이적 시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K리그 2018 시즌 이적 명단입니다. 감독 변화[편집] 구단 전임 감독 형태 일자 당시 순위 신임 감독 일자 전남 드래곤즈 노상래 사임 2017/12/04 비시즌 유상철 2017/12/04 FC서울 황선홍 사임 2018/04/30 9위 이을용 (감독대행) 2018/04/30 인천 유나이티드 이기형 사임 2018/05/11 11위 박성철 (감독대행) 2018/05/11 인천 유나이티드 박성철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06/09 11위 예른 안데르센 2018/06/09 강원 FC 송경섭 사임 2018/08/12 7위 김병수 2018/08/12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사임 2018/08/16 12위 김인완 (감독대행) 2018/08/16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사임 2018/08/28 4위 이병근 (감독대행) 2018/08/28 FC서울 이을용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1 9위 최용수 2018/1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병근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5 5위 서정원 2018/10/15 외국인 선수[편집]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당 AFC 소속 국가들의 국적인 1인을 포함해서 최대 4인까지 경기에서 뛸 수 있다. 클럽 선수 1 선수 2 선수 3 아시아 선수 강원 FC 디에고 발렌티노스 제리치 맥고원 경남 FC 말컹 네게바 파울링요 쿠니모토 대구 FC 세징야 조세 호베르토 에드가 츠바사 FC 서울 안델손 에반드로 마티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데얀 바그닝요 사리치 울산 현대 축구단 리차드 주니오 믹스 에스쿠데로 인천 유나이티드 FC 부노자 무고사 아길라르 쿠비 전남 드래곤즈 유고비치 마쎄도 완델손 도나치 전북 현대 모터스 로페즈 티아고 아드리아노 제주 유나이티드 마그노 치아구 호베르송 알렉스 포항 스틸러스 알레망 레우 가말류 테이셰이라 채프먼 리그 순위[편집] 정규 시즌[편집] 순위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v • d • e • h 1 전북 현대 모터스 (C) (Q) 38 26 8 4 75 31 +44 86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2 경남 FC (Q) 38 18 11 9 59 44 +15 65 3 울산 현대 (Q) 38 17 12 9 61 46 +15 63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4 포항 스틸러스 38 15 9 14 48 49 −1 54 5 제주 유나이티드 38 14 12 12 42 42 0 54 6 수원 삼성 블루윙즈 38 13 11 14 53 54 −1 50 7 대구 FC (Q) 38 14 8 16 48 55 −7 50[1]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8 강원 FC 38 12 10 16 56 60 −4 46 9 인천 유나이티드 38 10 12 16 55 69 −14 42 10 상주 상무 38 10 10 18 41 52 −11 40 11 FC 서울 (O) 38 9 13 16 40 49 −9 40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12 전남 드래곤즈 (R) 38 8 8 22 43 69 −26 32 K리그2 2019로 강등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년 12월 2일* 출처 : K리그 공식 웹사이트* 순위 결정방식 : 1) 승점; 2) 득점 수; 3) 골 득실차.*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시즌이 끝나지 않은 경우만 사용되는 표시: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라운드별 순위[편집] 1-33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전북 현대 모터스 3 4 4 3 2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경남 FC 2 2 1 1 1 2 3 3 3 3 3 2 4 4 4 4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울산 현대 11 11 12 12 10 9 7 8 7 7 8 6 6 7 5 5 5 5 5 5 4 4 4 3 3 3 3 3 3 3 3 3 3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7 5 5 5 3 2 2 2 2 2 3 2 2 3 2 3 3 3 3 3 3 3 4 4 4 4 4 4 5 5 5 4 포항 스틸러스 1 1 3 2 3 4 4 4 5 5 6 8 7 8 8 9 9 8 7 7 6 6 5 6 5 5 5 5 5 4 4 4 5 제주 유나이티드 6 10 7 8 8 6 5 6 4 4 4 4 3 3 2 3 4 4 4 4 5 5 8 8 8 8 7 7 8 8 7 6 6 강원 FC 4 3 2 4 4 5 6 5 8 8 5 7 8 6 7 6 6 6 6 6 7 8 7 5 6 6 6 6 6 6 6 7 7 대구 FC 12 12 11 11 12 12 11 11 12 12 12 12 12 12 12 11 11 11 11 12 10 10 10 10 10 10 9 10 7 7 8 8 8 FC 서울 7 9 10 10 11 10 10 9 9 9 9 9 9 9 9 8 8 7 8 9 8 7 6 7 7 7 8 8 9 9 9 9 9 상주 상무 10 8 9 9 9 7 8 7 6 6 7 5 5 5 6 7 7 9 9 8 9 9 9 9 9 9 10 9 10 10 10 10 10 전남 드래곤즈 5 5 8 7 7 11 12 12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1 12 12 12 11 12 11 11 11 11 11 11 11 11 인천 유나이티드 8 6 6 6 6 8 9 10 11 11 11 11 11 11 11 12 12 12 12 10 11 11 11 12 11 12 12 12 12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0월 28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34-38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34 35 36 37 38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경남 FC 3 2 2 2 2 울산 현대 2 3 3 3 3 포항 스틸러스 5 4 4 4 4 제주 유나이티드 6 6 6 5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4 5 5 6 6 6.5 6.5 6.5 6.5 6.5 대구 FC 7 8 7 7 7 강원 FC 8 7 8 8 8 인천 유나이티드 12 11 11 10 9 상주 상무 9 10 10 11 10 FC 서울 10 9 9 9 11 전남 드래곤즈 11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우승 구단[편집] K리그1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1 제36대 대한민국 챔피언 (6회 우승) 2009년・2011년・2014년・2015년・2017년2018년 리그 결과[편집] 자세한 경기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1 2018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1–3 0–3 2–1 1–1 2–3 3–3 2–1 1–1 0–2 3–1 0–0 경남 FC 0–1 1–1 3–1 0–0 2–2 0–0 3–0 3–0 0–4 2–0 2–0 대구 FC 2–1 0–2 1–2 2–2 0–2 0–2 2–1 1–1 1–2 1–4 0–1 상주 상무 3–0 0–1 0–1 1–2 1–1 2–3 3–2 1–1 0–2 0–0 2–1 FC 서울 1–2 2–3 3–0 0–0 2–1 1–1 1–1 2–1 0–4 3–0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3–1 2–0 2–1 0–0 0–0 5–2 1–2 0–3 2–3 1–1 울산 현대 3–1 1–1 2–0 0–2 1–0 1–0 2–1 1–1 0–2 0–1 2–1 인천 유나이티드 3–3 2–3 0–0 0–1 2–1 2–3 1–1 2–2 3–2 1–2 1–2 전남 드래곤즈 1–4 1–3 1–1 2–0 2–1 0–2 1–2 1–3 0–0 0–3 2–3 전북 현대 모터스 3–1 0–1 2–1 1–0 2–1 2–0 2–0 3–3 3–0 1–0 0–3 제주 유나이티드 3–5 0–0 1–2 0–0 0–0 0–1 1–1 4–2 1–0 0–1 0–0 포항 스틸러스 0–0 2–1 3–0 0–2 0–3 1–1 2–1 0–0 3–1 0–2 0–1 2018년 8월 1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23-33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2–3 0–0 1–0 7–0 1–1 경남 FC 2–1 2–1 2–1 3–3 0–3 0–1 대구 FC 2–0 2–2 4–2 0–2 1–2 2–1 상주 상무 2–5 1–2 1–2 2–2 1–1 1–2 FC 서울 0–2 2–2 1–1 0–2 0–1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1–2 2–2 0–0 2–0 울산 현대 2–0 4–1 4–1 2–2 3–2 2–0 인천 유나이티드 2–2 0–0 0–0 3–2 3–1 전남 드래곤즈 0–1 3–3 1–0 6–4 1–0 3–2 전북 현대 모터스 3–2 2–1 3–2 1–0 4–0 제주 유나이티드 2–2 2–3 1–0 0–0 0–0 1–0 포항 스틸러스 0–3 2–1 1–0 5–2 2–2 2018년 10월 20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34-38 라운드[편집] 상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경남 수원 울산 전북 제주 포항 경남 FC 2–1 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3–3 0–2 1–3 울산 현대 1–0 0–1 전북 현대 모터스 1–1 2–0 3–1 제주 유나이티드 0–1 0–0 포항 스틸러스 1–3 1–1 1–2 2018년 12월 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하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강원 대구 상주 서울 인천 전남 강원 FC 0–1 2–3 1–0 대구 FC 0–0 1–1 상주 상무 0–1 1–0 FC 서울 1–1 0–1 3–2 인천 유나이티드 0–1 2–1 3–1 전남 드래곤즈 1–2 0–1 2018년 12월 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승강 플레이오프[편집]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그 11위는 K리그2 2018 플레이오프 승자와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을 치루어 우승 시 잔류하고, 패배 시 강등한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의 규칙은 K리그 2016의 규칙을 준용하여 K리그 클래식 1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을 원정 경기, 2차전을 홈 경기로 치른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1차전 리그2 vs. 리그1 2018년 12월 6일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1 - 3 FC 서울 (K리그 1 11위) 구덕운동장, 부산 19:00 UTC+9 호물로 23' 조영욱 59'고요한 79'정현철 89' 관중 수: 10,127명 심판: 김우성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2차전 리그1 vs. 리그2 2018년 12월 9일 FC 서울 (K리그 1 11위) 1 - 1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14:10 UTC+9 박주영 90+4' 김진규 33' 강등[편집] K리그1 12위에 머문 전남 드래곤즈는 K리그2로 강등되었다. K리그1 11위를 기록한 FC 서울은 부산 아이파크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K리그1 잔류를 확정지었다.. 시즌 리그 11위 리그 12위 구단 강등 여부 구단 강등 여부 2018년 FC 서울 잔류 전남 드래곤즈 강등 개인 기록[편집] 득점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득점 (pk) 도움 경기 교체 1 말컹 경남 26 (4) 5 31 13 2 제리치 강원 24 4 36 13 3 주니오 울산 22 (3) 1 32 12 4 무고사 인천 19 (2) 4 35 9 5 문선민 인천 14 6 37 22 6 로페스 전북 13 (1) 6 31 10 7 데얀 수원 13 (2) 3 33 18 8 이동국 전북 13 (3) 4 35 27 9 김신욱 전북 11 3 33 23 10 허용준 전남 9 2 23 18 도움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도움 득점 경기 교체 1 세징야 대구 11 8 25 5 2 아길라르 인천 10 3 35 12 3 이용 전북 9 0 32 2 4 홍철 상주,수원 8 1 30 5 5 한승규 울산 7 5 31 28 6 네게바 경남 7 5 36 16 7 한교원 전북 6 7 23 13 8 이창민 제주 6 3 23 8 9 이승기 전북 6 1 27 13 10 권순형 제주 6 2 29 11 무실점경기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1 송범근 전북 19 30 18 85 2 이창근 제주 16 35 39 101 3 손정현 경남 10 25 25 82 4 강현무 포항 9 38 49 129 4 이범영 강원 9 30 42 90 6 양한빈 서울 8 37 46 124 7 신화용 수원 7 17 17 47 8 유상훈 상주,서울 5 14 17 29 8 오승훈 울산 5 17 20 55 8 노동건 수원 5 21 33 65 아래는 5회 이상 출전 골키퍼들의 기록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이범수 경남 2 13 19 49 김용대 울산 1 14 20 29 조수혁 울산 4 8 6 14 조현우 대구 4 28 42 75 최영은 대구 3 10 13 35 김호준 강원 1 6 10 16 정산 인천 3 18 28 61 이진형 인천 2 13 27 42 이태희 인천 1 7 14 23 윤보상 상주 4 15 25 41 이호승 전남 4 28 44 65 장대희 전남 0 5 13 15 해트트릭 (Hat-trick)[편집] 선수 소속 경기 결과 날짜 비고 말컹 경남 경남 3:1 상주 3월 4일 이후 퇴장. 1부 데뷔전[2] 제리치 강원 강원 4:1 전남 4월 21일 마그노 제주 제주 3:5 강원 5월 2일 소속팀은 짐 이석현 포항 포항 5:2 전북 8월 15일 말컹 경남 경남 3:0 포항 8월 18일 제리치 강원 강원 7:0 인천 8월 19일 4골 *최종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 (출처: K리그 공식 홈페이지) *득점/도움 수가 같을 경우 경기 수가 적은 선수가, 경기 수도 같을 경우 교체 횟수가 많은 선수가 윗 순위가 된다. 수상[편집]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편집] K리그1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부문 수상자 구단 최우수선수상 말컹[3] 경남 FC 감독상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영 플레이어상 한승규 울산 현대 축구단 최다 득점상 말컹 경남 FC 최다 도움상 세징야 대구 FC 베스트11 GK 조현우 대구 FC DF 홍철 수원 삼성 블루윙즈 리차드 울산 현대 축구단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이용 전북 현대 모터스 MF 네게바 경남 FC 최영준 경남 FC 아길라르 인천 유나이티드 FC 로페스 전북 현대 모터스 FW 말컹 경남 FC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 클럽상[4] 팬 프렌들리 클럽상 : 부산 아이파크 풀 스타디움상 : 전북 현대 플러스 스타디움상 : 경남FC 그린 스타디움상 : 안산 그리너스 페어플레이상 : 상주 상무 유소년 클럽상 : 울산 현대 ▲ 특별상[5] 사랑나눔상 : 전남 드래곤즈, 안산 그리너스 감사패 : K리그 홍보대사 감스트 전경기 전시간 출장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김영광 (서울 이랜드) 베스트 포토상 : 말컹 (경남 FC) 아디다스 탱고어워드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EA Sports 피파온라인4 Most Selected Player : 조현우 (대구 FC) ▲ 심판상 최우수 주심상 : 김대용 최우수 부심상 : 김계용 라운드별 MVP[편집] 라운드 MVP 소속 기록 1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3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4 말컹 경남 FC 2득점 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6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7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8 제리치 강원 FC 3득점 9 이기제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도움 10 권순형 제주 유나이티드 FC 2득점 11 제리치 강원 FC 2득점 12 안델손 FC 서울 2득점 13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1득점 14 임선영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5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6 홍정운 대구 FC 1득점 17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18 염기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득점 1도움 19 제리치 강원 FC 2득점 라운드 MVP 소속 기록 20 말컹 경남 FC 2득점 1도움 21 김대원 대구 FC 2득점 22 티아고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3 이석현 포항 스틸러스 3득점 24 제리치 강원 FC 4득점 25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1도움 26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2득점 27 세징야 대구 FC 2득점 28 한교원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도움 29 에드가 대구 FC 2득점 1도움 30 김도형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1 이진현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2 김인성 울산 현대 축구단 1득점 1도움 33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4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1득점 1도움 36 데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득점 1도움 37 이창근 제주 유나이티드 FC 무실점 38 윤빛가람 상주 상무 축구단 1도움 관중 수[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같이 보기[편집] 2018년 대한민국 축구 전체 2018년 대한민국의 축구 201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8 시즌 2018년 대한민국 프로/아마 리그와 FA컵 대회 1부 (프로) K리그1 2018 2부 (프로) K리그2 2018 3부격 (세미프로,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내셔널리그 2018 4부격 (아마추어) K3리그 어드밴스 2018 5부격 (아마추어) K3리그 베이직 2018 FA컵 FA컵 2018 각주[편집] ↑ 대구 FC가 KEB하나은행 FA컵 2018 시즌을 우승하였다. ↑ K리그 최초의 개막전 해트트릭이기도 하다. ↑ 2017년에 K리그2, 2018년에 K리그1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잇달아 받아 K리그 최초로 1부와 2부의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석권한 선수가 되었다.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구단 수상 목록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개인 수상 목록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1_2018&oldid=24385715" 분류: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틀K리그1 시즌2018 축구 리그2018년 대한민국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Lietuvių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22: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마그노 선수의 소속은? |
K리그1 2018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리그1 2018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개요 대회 명칭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시즌 2018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준우승 경남 FC 승격 경남 FC 강등 전남 드래곤즈 AFC 챔피언스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경남 FC울산 현대 (3차 예선 부터)대구 FC (FA컵 우승) 각종 기록 최다 득점 26골 말컹(경남) 최다 점수차 홈 승리 강원 7 - 0 인천 (8월 19일) 최다 점수차 원정 승리 경남 0 - 4 전북 (4월 11일) 서울 0 - 4 전북 (5월 20일) 최다 점수 경기 전남 6 - 4 수원 (8월 19일) 최다 연승 기록 9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3월 18일 ~ 5월 2일) 최다 무패 기록 14경기 전북 현대 모터스 (8월 19일~) 최다 무승 기록 16경기 제주 유나이티드 (7월 11일~9월 26일) 최다 연패 기록 6경기 대구 (4월 21일~5월 13일) 전남 드래곤즈 (7월 18일~8월 15일, 10월 20일~12월 1일) 최다 관중 30,202명 서울 2 - 1 수원 (5월 5일) 최소 관중 290명 상주 0 - 1 강원 (11월 24일) 인접 대회 이전← 2017 다음2019 → K리그1 2018은 대한민국에서 1983년 아시아 최초의 본격 프로 리그로 출범한 '슈퍼리그'에서 시작해 36번째를 맞은 시즌으로, 2013년 도입한 승강제로 지어진 1부의 이름 K리그 클래식을 K리그1으로 바꿔 2018년 3월 1일 개막하였다. 바꾼 이름 K리그1은 혼란을 막기 위해 이번 시즌만 K리그 클래식과 함께 쓴다. 리그는 전년도와 똑같이 △12개팀이 3차에 걸쳐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정규 라운드(1~33 라운드)와 △정규 라운드 성적을 토대로 나누어진 상・하위 스플릿 내에서 6개팀이 싱글 라운드 로빈을 치르는 스플릿 라운드(34~38 라운드)로 진행한다. 리그가 끝난 뒤 우승, 준우승 팀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3위에게는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출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리그 3위 이내의 팀이 FA컵 2018에서 우승하는 경우, 리그 3위까지 조별리그 출전권이 주어지며 리그 4위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고 리그 최하위 12위는 자동으로 K리그2 2019으로 강등된다. 목차 1 K리그1 참가 팀 1.1 경기장 1.2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 1.3 이적 시장 1.4 감독 변화 1.5 외국인 선수 2 리그 순위 2.1 정규 시즌 2.2 라운드별 순위 2.2.1 1-33라운드 2.2.2 34-38라운드 3 우승 구단 4 리그 결과 4.1 1-22 라운드 4.2 23-33 라운드 4.3 34-38 라운드 4.3.1 상위 스플릿 4.3.2 하위 스플릿 4.4 승강 플레이오프 4.5 강등 5 개인 기록 5.1 득점 순위 5.2 도움 순위 5.3 무실점경기 순위 5.4 해트트릭 (Hat-trick) 6 수상 6.1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 6.2 라운드별 MVP 7 관중 수 8 같이 보기 9 각주 K리그1 참가 팀[편집] 경기장[편집]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K리그 1 2018 시즌 팀의 위치 클럽 지난 시즌 순위 첫 리그 참가 총 시즌 연고지 홈구장 수용좌석 강원 FC 16위 2009 7 강원 춘천송암레포츠타운 20,000 경남 FC LL K리그 챌린지 2017 우승 2011 5 경남 창원축구센터 15,116 대구 FC 18위 2003 13 대구 대구스타디움 66,422 상주 상무 211위 2011 5 상주 상주시민운동장 15,042 FC 서울 15위 1984 35 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66,806 수원 삼성 블루윙즈 13위 1996 23 수원 수원월드컵경기장 43,959 울산 현대 14위 1984 35 울산 울산문수축구경기장 44,474 인천 유나이티드 19위 2004 15 인천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300 전남 드래곤즈 210위 1995 24 전남 광양축구전용구장순천팔마경기장 13,49612,703 전북 현대 모터스 0우승 1995 24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 42,477 제주 유나이티드 12위 1983 36 제주 제주월드컵경기장 29,791 포항 스틸러스 17위 1983 36 포항 포항스틸야드 18,960 감독과 유니폼과 주장[편집] 클럽 감독 킷 스폰서 메인 스폰서 주장 강원 FC 김병수 조마 하이원리조트 정조국 경남 FC 김종부 험멜 경상남도 배기종 대구 FC 안드레 함프 대구은행, 아진산업 한희훈 상주 상무 김태완 루포 핀타 상주시 여름 FC 서울 최용수 르꼬끄 GS SHOP 고요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자이크로 삼성전자 김은선 울산 현대 축구단 김도훈 험멜 현대오일뱅크 강민수 인천 유나이티드 예른 안데르센 험멜 인천광역시, 인천국제공항, 신한은행 최종환 전남 드래곤즈 김인완 (대행) 조마 포스코 김영욱 전북 현대 모터스 최강희 험멜 현대자동차 신형민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키카 SK 에너지 권순형 포항 스틸러스 최순호 아스토레 포스코 김광석 이적 시장[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K리그 2018 시즌 이적 명단입니다. 감독 변화[편집] 구단 전임 감독 형태 일자 당시 순위 신임 감독 일자 전남 드래곤즈 노상래 사임 2017/12/04 비시즌 유상철 2017/12/04 FC서울 황선홍 사임 2018/04/30 9위 이을용 (감독대행) 2018/04/30 인천 유나이티드 이기형 사임 2018/05/11 11위 박성철 (감독대행) 2018/05/11 인천 유나이티드 박성철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06/09 11위 예른 안데르센 2018/06/09 강원 FC 송경섭 사임 2018/08/12 7위 김병수 2018/08/12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사임 2018/08/16 12위 김인완 (감독대행) 2018/08/16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정원 사임 2018/08/28 4위 이병근 (감독대행) 2018/08/28 FC서울 이을용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1 9위 최용수 2018/1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이병근 (감독대행) 임시 감독대행 2018/10/15 5위 서정원 2018/10/15 외국인 선수[편집] 외국인 선수들은 각 팀당 AFC 소속 국가들의 국적인 1인을 포함해서 최대 4인까지 경기에서 뛸 수 있다. 클럽 선수 1 선수 2 선수 3 아시아 선수 강원 FC 디에고 발렌티노스 제리치 맥고원 경남 FC 말컹 네게바 파울링요 쿠니모토 대구 FC 세징야 조세 호베르토 에드가 츠바사 FC 서울 안델손 에반드로 마티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데얀 바그닝요 사리치 울산 현대 축구단 리차드 주니오 믹스 에스쿠데로 인천 유나이티드 FC 부노자 무고사 아길라르 쿠비 전남 드래곤즈 유고비치 마쎄도 완델손 도나치 전북 현대 모터스 로페즈 티아고 아드리아노 제주 유나이티드 마그노 치아구 호베르송 알렉스 포항 스틸러스 알레망 레우 가말류 테이셰이라 채프먼 리그 순위[편집] 정규 시즌[편집] 순위 팀 경기 승 무 패 득 실 차 승점 참가 자격 및 강등v • d • e • h 1 전북 현대 모터스 (C) (Q) 38 26 8 4 75 31 +44 86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2 경남 FC (Q) 38 18 11 9 59 44 +15 65 3 울산 현대 (Q) 38 17 12 9 61 46 +15 63 AFC 챔피언스리그 2019 플레이오프 4 포항 스틸러스 38 15 9 14 48 49 −1 54 5 제주 유나이티드 38 14 12 12 42 42 0 54 6 수원 삼성 블루윙즈 38 13 11 14 53 54 −1 50 7 대구 FC (Q) 38 14 8 16 48 55 −7 50[1] AFC 챔피언스리그 2019 조별 리그 8 강원 FC 38 12 10 16 56 60 −4 46 9 인천 유나이티드 38 10 12 16 55 69 −14 42 10 상주 상무 38 10 10 18 41 52 −11 40 11 FC 서울 (O) 38 9 13 16 40 49 −9 40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12 전남 드래곤즈 (R) 38 8 8 22 43 69 −26 32 K리그2 2019로 강등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년 12월 2일* 출처 : K리그 공식 웹사이트* 순위 결정방식 : 1) 승점; 2) 득점 수; 3) 골 득실차.* (C) = 우승; (R) = 강등; (P) = 승격; (O) = 플레이오프 승리; (A) = 다음 라운드 진출 * 시즌이 끝나지 않은 경우만 사용되는 표시: (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됨; (TQ) = 대항전 진출 자격이 됐으나 진출할 라운드가 정해지지 않음; (RQ) = 강등 결정전 진출 자격이 됨; (DQ) = 대항전 진출 자격을 잃음. 라운드별 순위[편집] 1-33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전북 현대 모터스 3 4 4 3 2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경남 FC 2 2 1 1 1 2 3 3 3 3 3 2 4 4 4 4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2 울산 현대 11 11 12 12 10 9 7 8 7 7 8 6 6 7 5 5 5 5 5 5 4 4 4 3 3 3 3 3 3 3 3 3 3 수원 삼성 블루윙즈 9 7 5 5 5 3 2 2 2 2 2 3 2 2 3 2 3 3 3 3 3 3 3 4 4 4 4 4 4 5 5 5 4 포항 스틸러스 1 1 3 2 3 4 4 4 5 5 6 8 7 8 8 9 9 8 7 7 6 6 5 6 5 5 5 5 5 4 4 4 5 제주 유나이티드 6 10 7 8 8 6 5 6 4 4 4 4 3 3 2 3 4 4 4 4 5 5 8 8 8 8 7 7 8 8 7 6 6 강원 FC 4 3 2 4 4 5 6 5 8 8 5 7 8 6 7 6 6 6 6 6 7 8 7 5 6 6 6 6 6 6 6 7 7 대구 FC 12 12 11 11 12 12 11 11 12 12 12 12 12 12 12 11 11 11 11 12 10 10 10 10 10 10 9 10 7 7 8 8 8 FC 서울 7 9 10 10 11 10 10 9 9 9 9 9 9 9 9 8 8 7 8 9 8 7 6 7 7 7 8 8 9 9 9 9 9 상주 상무 10 8 9 9 9 7 8 7 6 6 7 5 5 5 6 7 7 9 9 8 9 9 9 9 9 9 10 9 10 10 10 10 10 전남 드래곤즈 5 5 8 7 7 11 12 12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0 11 12 12 12 11 12 11 11 11 11 11 11 11 11 인천 유나이티드 8 6 6 6 6 8 9 10 11 11 11 11 11 11 11 12 12 12 12 10 11 11 11 12 11 12 12 12 12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0월 28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34-38라운드[편집] 팀 / 라운드 34 35 36 37 38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경남 FC 3 2 2 2 2 울산 현대 2 3 3 3 3 포항 스틸러스 5 4 4 4 4 제주 유나이티드 6 6 6 5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4 5 5 6 6 6.5 6.5 6.5 6.5 6.5 대구 FC 7 8 7 7 7 강원 FC 8 7 8 8 8 인천 유나이티드 12 11 11 10 9 상주 상무 9 10 10 11 10 FC 서울 10 9 9 9 11 전남 드래곤즈 11 12 12 12 12 마지막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출처: K리그 홈페이지 우승 구단[편집] K리그1 우승 전북 현대 모터스 1 1 1 1 1 1 제36대 대한민국 챔피언 (6회 우승) 2009년・2011년・2014년・2015년・2017년2018년 리그 결과[편집] 자세한 경기결과에 대해서는 K리그1 2018의 경기 결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1–3 0–3 2–1 1–1 2–3 3–3 2–1 1–1 0–2 3–1 0–0 경남 FC 0–1 1–1 3–1 0–0 2–2 0–0 3–0 3–0 0–4 2–0 2–0 대구 FC 2–1 0–2 1–2 2–2 0–2 0–2 2–1 1–1 1–2 1–4 0–1 상주 상무 3–0 0–1 0–1 1–2 1–1 2–3 3–2 1–1 0–2 0–0 2–1 FC 서울 1–2 2–3 3–0 0–0 2–1 1–1 1–1 2–1 0–4 3–0 2–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3–1 2–0 2–1 0–0 0–0 5–2 1–2 0–3 2–3 1–1 울산 현대 3–1 1–1 2–0 0–2 1–0 1–0 2–1 1–1 0–2 0–1 2–1 인천 유나이티드 3–3 2–3 0–0 0–1 2–1 2–3 1–1 2–2 3–2 1–2 1–2 전남 드래곤즈 1–4 1–3 1–1 2–0 2–1 0–2 1–2 1–3 0–0 0–3 2–3 전북 현대 모터스 3–1 0–1 2–1 1–0 2–1 2–0 2–0 3–3 3–0 1–0 0–3 제주 유나이티드 3–5 0–0 1–2 0–0 0–0 0–1 1–1 4–2 1–0 0–1 0–0 포항 스틸러스 0–0 2–1 3–0 0–2 0–3 1–1 2–1 0–0 3–1 0–2 0–1 2018년 8월 1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23-33 라운드[편집] 원정홈 강원 경남 대구 상주 서울 수원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포항 강원 FC 2–3 0–0 1–0 7–0 1–1 경남 FC 2–1 2–1 2–1 3–3 0–3 0–1 대구 FC 2–0 2–2 4–2 0–2 1–2 2–1 상주 상무 2–5 1–2 1–2 2–2 1–1 1–2 FC 서울 0–2 2–2 1–1 0–2 0–1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 1–2 2–2 0–0 2–0 울산 현대 2–0 4–1 4–1 2–2 3–2 2–0 인천 유나이티드 2–2 0–0 0–0 3–2 3–1 전남 드래곤즈 0–1 3–3 1–0 6–4 1–0 3–2 전북 현대 모터스 3–2 2–1 3–2 1–0 4–0 제주 유나이티드 2–2 2–3 1–0 0–0 0–0 1–0 포항 스틸러스 0–3 2–1 1–0 5–2 2–2 2018년 10월 20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34-38 라운드[편집] 상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경남 수원 울산 전북 제주 포항 경남 FC 2–1 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3–3 0–2 1–3 울산 현대 1–0 0–1 전북 현대 모터스 1–1 2–0 3–1 제주 유나이티드 0–1 0–0 포항 스틸러스 1–3 1–1 1–2 2018년 12월 2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하위 스플릿[편집] 원정홈 강원 대구 상주 서울 인천 전남 강원 FC 0–1 2–3 1–0 대구 FC 0–0 1–1 상주 상무 0–1 1–0 FC 서울 1–1 0–1 3–2 인천 유나이티드 0–1 2–1 3–1 전남 드래곤즈 1–2 0–1 2018년 12월 1일까지 치른 모든 경기를 대상으로 함.출처: K리그 1 공식 웹사이트색상: 파랑 = 홈팀 승; 노랑 = 무승부; 빨강 = 원정 팀 승.아직 치러지지 않은 경기 중 a표시는 그에 대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표시함. 승강 플레이오프[편집]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그 11위는 K리그2 2018 플레이오프 승자와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을 치루어 우승 시 잔류하고, 패배 시 강등한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의 규칙은 K리그 2016의 규칙을 준용하여 K리그 클래식 11위 팀을 기준으로 1차전을 원정 경기, 2차전을 홈 경기로 치른다.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1차전 리그2 vs. 리그1 2018년 12월 6일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1 - 3 FC 서울 (K리그 1 11위) 구덕운동장, 부산 19:00 UTC+9 호물로 23' 조영욱 59'고요한 79'정현철 89' 관중 수: 10,127명 심판: 김우성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20182차전 리그1 vs. 리그2 2018년 12월 9일 FC 서울 (K리그 1 11위) 1 - 1 부산 아이파크 (K리그 2 승격PO 승자)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 14:10 UTC+9 박주영 90+4' 김진규 33' 강등[편집] K리그1 12위에 머문 전남 드래곤즈는 K리그2로 강등되었다. K리그1 11위를 기록한 FC 서울은 부산 아이파크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 K리그1 잔류를 확정지었다.. 시즌 리그 11위 리그 12위 구단 강등 여부 구단 강등 여부 2018년 FC 서울 잔류 전남 드래곤즈 강등 개인 기록[편집] 득점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득점 (pk) 도움 경기 교체 1 말컹 경남 26 (4) 5 31 13 2 제리치 강원 24 4 36 13 3 주니오 울산 22 (3) 1 32 12 4 무고사 인천 19 (2) 4 35 9 5 문선민 인천 14 6 37 22 6 로페스 전북 13 (1) 6 31 10 7 데얀 수원 13 (2) 3 33 18 8 이동국 전북 13 (3) 4 35 27 9 김신욱 전북 11 3 33 23 10 허용준 전남 9 2 23 18 도움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도움 득점 경기 교체 1 세징야 대구 11 8 25 5 2 아길라르 인천 10 3 35 12 3 이용 전북 9 0 32 2 4 홍철 상주,수원 8 1 30 5 5 한승규 울산 7 5 31 28 6 네게바 경남 7 5 36 16 7 한교원 전북 6 7 23 13 8 이창민 제주 6 3 23 8 9 이승기 전북 6 1 27 13 10 권순형 제주 6 2 29 11 무실점경기 순위[편집] 순위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1 송범근 전북 19 30 18 85 2 이창근 제주 16 35 39 101 3 손정현 경남 10 25 25 82 4 강현무 포항 9 38 49 129 4 이범영 강원 9 30 42 90 6 양한빈 서울 8 37 46 124 7 신화용 수원 7 17 17 47 8 유상훈 상주,서울 5 14 17 29 8 오승훈 울산 5 17 20 55 8 노동건 수원 5 21 33 65 아래는 5회 이상 출전 골키퍼들의 기록 이름 소속 무실점 경기 경기 실점 선방 이범수 경남 2 13 19 49 김용대 울산 1 14 20 29 조수혁 울산 4 8 6 14 조현우 대구 4 28 42 75 최영은 대구 3 10 13 35 김호준 강원 1 6 10 16 정산 인천 3 18 28 61 이진형 인천 2 13 27 42 이태희 인천 1 7 14 23 윤보상 상주 4 15 25 41 이호승 전남 4 28 44 65 장대희 전남 0 5 13 15 해트트릭 (Hat-trick)[편집] 선수 소속 경기 결과 날짜 비고 말컹 경남 경남 3:1 상주 3월 4일 이후 퇴장. 1부 데뷔전[2] 제리치 강원 강원 4:1 전남 4월 21일 마그노 제주 제주 3:5 강원 5월 2일 소속팀은 짐 이석현 포항 포항 5:2 전북 8월 15일 말컹 경남 경남 3:0 포항 8월 18일 제리치 강원 강원 7:0 인천 8월 19일 4골 *최종 업데이트: 2018년 12월 2일 (출처: K리그 공식 홈페이지) *득점/도움 수가 같을 경우 경기 수가 적은 선수가, 경기 수도 같을 경우 교체 횟수가 많은 선수가 윗 순위가 된다. 수상[편집] KEB하나은행 K리그 어워즈 2018[편집] K리그1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부문 수상자 구단 최우수선수상 말컹[3] 경남 FC 감독상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영 플레이어상 한승규 울산 현대 축구단 최다 득점상 말컹 경남 FC 최다 도움상 세징야 대구 FC 베스트11 GK 조현우 대구 FC DF 홍철 수원 삼성 블루윙즈 리차드 울산 현대 축구단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이용 전북 현대 모터스 MF 네게바 경남 FC 최영준 경남 FC 아길라르 인천 유나이티드 FC 로페스 전북 현대 모터스 FW 말컹 경남 FC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 클럽상[4] 팬 프렌들리 클럽상 : 부산 아이파크 풀 스타디움상 : 전북 현대 플러스 스타디움상 : 경남FC 그린 스타디움상 : 안산 그리너스 페어플레이상 : 상주 상무 유소년 클럽상 : 울산 현대 ▲ 특별상[5] 사랑나눔상 : 전남 드래곤즈, 안산 그리너스 감사패 : K리그 홍보대사 감스트 전경기 전시간 출장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김영광 (서울 이랜드) 베스트 포토상 : 말컹 (경남 FC) 아디다스 탱고어워드 : 강현무 (포항 스틸러스), EA Sports 피파온라인4 Most Selected Player : 조현우 (대구 FC) ▲ 심판상 최우수 주심상 : 김대용 최우수 부심상 : 김계용 라운드별 MVP[편집] 라운드 MVP 소속 기록 1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3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4 말컹 경남 FC 2득점 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6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7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8 제리치 강원 FC 3득점 9 이기제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도움 10 권순형 제주 유나이티드 FC 2득점 11 제리치 강원 FC 2득점 12 안델손 FC 서울 2득점 13 김승대 포항 스틸러스 1득점 14 임선영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5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16 홍정운 대구 FC 1득점 17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2득점 18 염기훈 수원 삼성 블루윙즈 2득점 1도움 19 제리치 강원 FC 2득점 라운드 MVP 소속 기록 20 말컹 경남 FC 2득점 1도움 21 김대원 대구 FC 2득점 22 티아고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1도움 23 이석현 포항 스틸러스 3득점 24 제리치 강원 FC 4득점 25 문선민 인천 유나이티드 FC 2득점 1도움 26 주니오 울산 현대 축구단 2득점 27 세징야 대구 FC 2득점 28 한교원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도움 29 에드가 대구 FC 2득점 1도움 30 김도형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1 이진현 포항 스틸러스 1득점 32 김인성 울산 현대 축구단 1득점 1도움 33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4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1득점 35 무고사 인천 유나이티드 FC 1득점 1도움 36 데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득점 1도움 37 이창근 제주 유나이티드 FC 무실점 38 윤빛가람 상주 상무 축구단 1도움 관중 수[편집] 이 문단은 비어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같이 보기[편집] 2018년 대한민국 축구 전체 2018년 대한민국의 축구 201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 국가대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8 시즌 2018년 대한민국 프로/아마 리그와 FA컵 대회 1부 (프로) K리그1 2018 2부 (프로) K리그2 2018 3부격 (세미프로, 한국실업축구연맹 주관) 내셔널리그 2018 4부격 (아마추어) K3리그 어드밴스 2018 5부격 (아마추어) K3리그 베이직 2018 FA컵 FA컵 2018 각주[편집] ↑ 대구 FC가 KEB하나은행 FA컵 2018 시즌을 우승하였다. ↑ K리그 최초의 개막전 해트트릭이기도 하다. ↑ 2017년에 K리그2, 2018년에 K리그1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잇달아 받아 K리그 최초로 1부와 2부의 최다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석권한 선수가 되었다.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구단 수상 목록 ↑ 이런 종류의 상 발자취는 ☞ K리그 개인 수상 목록 vdeh K리그1 시즌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vdeh 2018년 대한민국 축구 « 2017 2019 » 국내 리그 K리그 K리그1 (경기 결과) K리그2 R리그 승강PO 이적시장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K3리그 어드밴스 K3리그 베이직 WK리그 국내 컵 FA컵 결승전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챌린저스 컵 유소년 대학 리그 K리그 주니어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고등 중등 초등 아시안 대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결선 토너먼트 결승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풋살FK리그 (2016-17 · 2017-18) · FK컵클럽 시즌K리그 클래식 강원 FC 경남 FC 대구 FC 상주 상무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광주 FC 대전 시티즌 부산 아이파크 부천 FC 1995 서울 이랜드 FC 성남 FC 수원 FC 아산 경찰청 안산 그리너스 FC FC 안양 대한민국 축구 협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K리그1_2018&oldid=24385715" 분류: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틀K리그1 시즌2018 축구 리그2018년 대한민국숨은 분류: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LietuviųРусский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5일 (수) 22:2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K리그1 2018에서 울산 현대가 경남 팀과 대결했을 때의 경기 결과는 어떨까? |
개성·문산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개성·문산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개성, 문산 전투한국 전쟁의 일부날짜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장소경기도 개성, 문산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교전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휘관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1]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고한조 제1대대장 대위 정영홍 제2대대장 소령 김재명 제3대대장 소령 전성호 제12연대장 대령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2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3대대장 소령 김익열 제13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윤천태 제2대대장 소령 유재성 제3대대장 소령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이창권 제3연대장 총좌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김순진 제13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김현기 제15연대장 대좌 vdeh한국 전쟁 북의 공세 폭풍 작전 춘천 제1차 서울 고랑포 개성·문산 대한해협 옹진 의정부 수원 비행장 공중전역 안동 주문진항 오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평택 천안 조치원 대전 상주 영동 황간 하동 노치 부산 교두보 마산 포항 대구 제1차 낙동강 볼링장 전투고지 경주 함안 남강 가산 다부동 영산 제2차 낙동강 UN군의 반격 해주 인천 제2차 서울 282 고지 1950년 10월 12일 사리원 평양 영변 구진 정주 중공군 개입 온정 은산 박천 청천강 와원 장진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제3차 서울 의정부 채궁현 제1, 2차 원주 선더볼트 작전 쌍둥이굴 횡성 지평리 제3차 원주 주암리 원산 봉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매화산 코리지어스 작전 토마호크 작전 러그드 작전 불굴 작전 춘계공세 임진강 율동 가평 소양강 전선 교착 피의 능선 민덴 작전 펀치볼 단장의 능선 한강 코만도 작전 제1차 마량산 학당리 보통비행 작전 제2차 마량산 이리 고지 올드발디 고지 섬광 작전 백마고지 삼각고지 제1차 후크 고지 제2차 후크 고지 잣골 베가스 전초기지 포크찹 고지 제3차 후크 고지 해리 전초기지 금성 사미천 정전 협정 공중전 북한 폭격 MIG 협곡 순천 교살 작전 수풍댐 폭격 전후 분쟁 D.M.Z. 분쟁 1·21 사태 EC-121 격추 사건 판문점 강릉 무장공비 서해교전 여수 제1차 연평 제2차 연평 대청 천안함 제3차 연평 판문점 선언 개성, 문산 전투(開城汶山戰鬪)는 한국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2]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운 방어전투이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 휘하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 km, 제13연대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 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동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 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3] 제12연대를 좇아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6월 28일) 목차 1 전투 준비 1.1 한국군 1.2 북한군 2 전투 과정 2.1 청단-백천 철수 2.2 개성 철수 2.3 문산 전투 2.4 파평산 전투 2.5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3 결과 및 영향 4 각주 전투 준비[편집] 한국군[편집]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방어진지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제1사단의 교육훈련 진도는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즉 제 11, 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紫霞里)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과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의 경각심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런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의 경우 80여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제12연대 제3대대(대대장 소령 이무중(李茂重))는 서쪽으로는 청단군 금학리 부근의 하천인 읍천(邑川)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錢浦里)[4] 까지의 직선거리 54 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는 서쪽으로는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靑鶴洞)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3연대는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大院里)[5]~ 소반고개~판문점 북측 지역~ 두매리 ~ 조금리 ~ 고랑포리 ~ 원당리(元堂里)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에는 60mm 및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4월 22일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소재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고,[6][7]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북한군[편집] 북한군의 배치현황을 보면, 적성 북쪽의 △137로부터 서쪽으로 △282(대원리—송악산(개성) —△325(백천)—△120(연안 북쪽) —△98(청단 북쪽)등을 연하는 38˚선상의 감제지형을 따라 진지를 편성하고 특히 지역내의 개성시가를 완전히 감제할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강력한 방어진지(방카)를 구축하여 남침의 발판을 굳히는 한편, 제1 · 제2 · 제3 경비여단을 엄호하듯 그 후방 남천에는 제1사단(사단장, 최광 소장)이 위치하여 그 예하에 제1, 제2, 제3연대와 포병연대를 두고 있었다.[8] 제1사단 및 제6사단의 병력은 도합 21,000명 내외이며 장비 122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그 밖에 그들의 총사령부 직할의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전차 40대와 기타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의 지원거리내에 집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9] 전투 과정[편집]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를 받았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이 백선엽이 받은 6.25 전쟁에 대한 제1보였다.[10] 청단-백천 철수[편집] 한국전쟁 직전, 제12연대 제3대대의 배치 제12연대 3대대가 지키는 청단~개풍 간 54 km 구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3대대는 국지적으로 적을 지연시키다가 용매도(用媒島) → 청룡 반도(靑龍半島) → 백석포 → 강화도 → 김포 반도를 경유하여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분산되었다. 개성 철수[편집]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 15연대(연대장 김현기(金顯基) 대좌) 는 전차 5~6대의 선도하에 국도 제1호선을 따라,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가 방어하고 있는 개성 시내로 진격하였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2대대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白源淡) 중위가 전사하고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개성 시내의 만월국민학교에는 전날(24일) 밤 11시쯤 국군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야영을 하고 있다가 밤이 깊어지자 시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격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미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11] 개풍군 여현리 일대를 경비하던 제2대대 제5중대도 개성이 함락된 상황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하였으며, 개성 송악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하던 제7중대도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7시경) 제2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子男山)으로 철수하게 되었다.(9시경)[12] 한편 제12연대장 전성호(全盛鎬) 대령은 이날 09:00쯤 상황을 종합 분석한 끝에 국도 제1호선이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제2대대는 개성 북쪽 일대에서 철수중인 병력을 수습하면서 제1대대가 배치된 개풍군 고남리(古南里)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제2대대장(한순화)과 만난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제2대대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연대예비인 제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철수부대인 제2대대에 연대장이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전성호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그 후임으로 김점곤(金點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제2대대장(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시내 남대문으로 접근하다가 행군대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領井浦)를 경유, 김포 반도의 강녕포(康寧浦)[13] 로 도하하여 통진(通津)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김포반도 전투) 문산 전투[편집]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연대(연대장 대령 최경록(崔慶祿)) 는 6월 25일 08:30에 출동하여 11:00~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행군한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리(赤田里)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馬井里)의 제1호 국도 좌우측에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 2대대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적전리에 집결 보유하였다. 이렇듯 연대가 방어배치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줄을 이어 귀대하였으므로 연대병력은 1,500명으로 증가되었다. 제11연대장은 개성지구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백선엽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그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군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경의도로를 주병참선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도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한국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전차를 국도 제1호선 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17:00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국도 제1호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격퇴되었다. 그 뒤에도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한국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파평산 전투[편집] 제1사단의 우전방으로서,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던 제13연대(연대장 대령 김익렬(金益烈))는 제 1, 2의 2개 대대를 파평면 파평산에 투입하여, 북한군이 백학면 노곡리[14] 가여울 - 적성면 - 문산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던 중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하다가 국군의 살상지대에서 격멸되었다. 날이 바뀐 6월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청송로)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육박하였다. 이에 맞선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지만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여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제1대대장 김진위(金振暐)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겁을 먹은 듯 적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고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에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근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편집]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6월 26일에는 주저항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 진전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측(右側) 인접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德亭)-축석령(祝石嶺)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아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한국군 제 1사단의 주저항선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기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북한군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6월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운 보·전·포 협동부대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상황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으나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적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호기라고 간파한 제 11연대장은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역습을 단행함으로써 지역 내의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바로 이 무렵 우측방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방으로 육박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 1사단은 야간철수를 계획하였으나 북한군의 압박이 가중되어 위급한 국면이 전방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국군은 철수명령을 하달하였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국민학교로 이동 설치하였다. 결과 및 영향[편집] 북한군의 군단들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그 남단에 있는 영정리(영정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제6사단 예하의 부대로 추단되었는데,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포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김포 하성면 봉성리의 봉성산(129m)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월동에 있는 지양산(138m)을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불시 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각주[편집] ↑ 이하의 지휘관 명단은 모두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2쪽. 참조. ↑ 당시에는 장단군 장남면이었으며, 현재는 연천군 장남면에 속한 고랑포리이다.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현재는 개풍군 연강리이다. ↑ 현재의 개성특급시 룡흥동의 일부이다. ↑ “參謀副長에 金大領就任”. 경향신문. 1950년 4월 23일. ↑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988년 6월 24일.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4쪽. ↑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988년 6월 24일. ↑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개성에서 내려온 전경대원들에 의하면 24일밤 11시쯤 개성경찰서로부터 불과 40여m 떨어져있는 만월국민학교교정에 국군복장을 한 1개대대병력의 일부가 야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이들 국군복을 입은 자들이 시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더라는 것. 그러나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외출중이었고 경찰서에도 20여명정도가 야근을 하고 있을뿐이어서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국군복으로 위장한 적은 이미 공격시간에 맞추기 위해 만월국민학교에서 야영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김씨[김억순]는 술회했다. ↑ “6․25를 회고하는 戰地의 敵”. 동아일보. 1973년 6월 25일. ↑ 현재의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 당시의 노곡리는 38선 경계 바로 밑, 즉 최북단 지역이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개성·문산_전투&oldid=23464361" 분류: 1950년 남북 관계1950년 분쟁한국 전쟁의 전투대한민국의 전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투개성특급시의 역사파주시의 역사1950년 6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PolskiPortuguê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14일 (월) 11: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김포 봉성리에 있는 봉성산은 해발 몇미터인가? |
개성·문산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개성·문산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개성, 문산 전투한국 전쟁의 일부날짜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장소경기도 개성, 문산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교전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휘관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1]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고한조 제1대대장 대위 정영홍 제2대대장 소령 김재명 제3대대장 소령 전성호 제12연대장 대령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2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3대대장 소령 김익열 제13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윤천태 제2대대장 소령 유재성 제3대대장 소령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이창권 제3연대장 총좌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김순진 제13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김현기 제15연대장 대좌 vdeh한국 전쟁 북의 공세 폭풍 작전 춘천 제1차 서울 고랑포 개성·문산 대한해협 옹진 의정부 수원 비행장 공중전역 안동 주문진항 오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평택 천안 조치원 대전 상주 영동 황간 하동 노치 부산 교두보 마산 포항 대구 제1차 낙동강 볼링장 전투고지 경주 함안 남강 가산 다부동 영산 제2차 낙동강 UN군의 반격 해주 인천 제2차 서울 282 고지 1950년 10월 12일 사리원 평양 영변 구진 정주 중공군 개입 온정 은산 박천 청천강 와원 장진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제3차 서울 의정부 채궁현 제1, 2차 원주 선더볼트 작전 쌍둥이굴 횡성 지평리 제3차 원주 주암리 원산 봉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매화산 코리지어스 작전 토마호크 작전 러그드 작전 불굴 작전 춘계공세 임진강 율동 가평 소양강 전선 교착 피의 능선 민덴 작전 펀치볼 단장의 능선 한강 코만도 작전 제1차 마량산 학당리 보통비행 작전 제2차 마량산 이리 고지 올드발디 고지 섬광 작전 백마고지 삼각고지 제1차 후크 고지 제2차 후크 고지 잣골 베가스 전초기지 포크찹 고지 제3차 후크 고지 해리 전초기지 금성 사미천 정전 협정 공중전 북한 폭격 MIG 협곡 순천 교살 작전 수풍댐 폭격 전후 분쟁 D.M.Z. 분쟁 1·21 사태 EC-121 격추 사건 판문점 강릉 무장공비 서해교전 여수 제1차 연평 제2차 연평 대청 천안함 제3차 연평 판문점 선언 개성, 문산 전투(開城汶山戰鬪)는 한국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2]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운 방어전투이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 휘하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 km, 제13연대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 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동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 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3] 제12연대를 좇아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6월 28일) 목차 1 전투 준비 1.1 한국군 1.2 북한군 2 전투 과정 2.1 청단-백천 철수 2.2 개성 철수 2.3 문산 전투 2.4 파평산 전투 2.5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3 결과 및 영향 4 각주 전투 준비[편집] 한국군[편집]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방어진지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제1사단의 교육훈련 진도는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즉 제 11, 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紫霞里)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과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의 경각심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런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의 경우 80여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제12연대 제3대대(대대장 소령 이무중(李茂重))는 서쪽으로는 청단군 금학리 부근의 하천인 읍천(邑川)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錢浦里)[4] 까지의 직선거리 54 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는 서쪽으로는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靑鶴洞)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3연대는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大院里)[5]~ 소반고개~판문점 북측 지역~ 두매리 ~ 조금리 ~ 고랑포리 ~ 원당리(元堂里)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에는 60mm 및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4월 22일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소재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고,[6][7]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북한군[편집] 북한군의 배치현황을 보면, 적성 북쪽의 △137로부터 서쪽으로 △282(대원리—송악산(개성) —△325(백천)—△120(연안 북쪽) —△98(청단 북쪽)등을 연하는 38˚선상의 감제지형을 따라 진지를 편성하고 특히 지역내의 개성시가를 완전히 감제할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강력한 방어진지(방카)를 구축하여 남침의 발판을 굳히는 한편, 제1 · 제2 · 제3 경비여단을 엄호하듯 그 후방 남천에는 제1사단(사단장, 최광 소장)이 위치하여 그 예하에 제1, 제2, 제3연대와 포병연대를 두고 있었다.[8] 제1사단 및 제6사단의 병력은 도합 21,000명 내외이며 장비 122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그 밖에 그들의 총사령부 직할의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전차 40대와 기타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의 지원거리내에 집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9] 전투 과정[편집]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를 받았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이 백선엽이 받은 6.25 전쟁에 대한 제1보였다.[10] 청단-백천 철수[편집] 한국전쟁 직전, 제12연대 제3대대의 배치 제12연대 3대대가 지키는 청단~개풍 간 54 km 구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3대대는 국지적으로 적을 지연시키다가 용매도(用媒島) → 청룡 반도(靑龍半島) → 백석포 → 강화도 → 김포 반도를 경유하여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분산되었다. 개성 철수[편집]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 15연대(연대장 김현기(金顯基) 대좌) 는 전차 5~6대의 선도하에 국도 제1호선을 따라,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가 방어하고 있는 개성 시내로 진격하였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2대대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白源淡) 중위가 전사하고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개성 시내의 만월국민학교에는 전날(24일) 밤 11시쯤 국군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야영을 하고 있다가 밤이 깊어지자 시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격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미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11] 개풍군 여현리 일대를 경비하던 제2대대 제5중대도 개성이 함락된 상황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하였으며, 개성 송악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하던 제7중대도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7시경) 제2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子男山)으로 철수하게 되었다.(9시경)[12] 한편 제12연대장 전성호(全盛鎬) 대령은 이날 09:00쯤 상황을 종합 분석한 끝에 국도 제1호선이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제2대대는 개성 북쪽 일대에서 철수중인 병력을 수습하면서 제1대대가 배치된 개풍군 고남리(古南里)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제2대대장(한순화)과 만난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제2대대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연대예비인 제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철수부대인 제2대대에 연대장이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전성호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그 후임으로 김점곤(金點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제2대대장(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시내 남대문으로 접근하다가 행군대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領井浦)를 경유, 김포 반도의 강녕포(康寧浦)[13] 로 도하하여 통진(通津)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김포반도 전투) 문산 전투[편집]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연대(연대장 대령 최경록(崔慶祿)) 는 6월 25일 08:30에 출동하여 11:00~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행군한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리(赤田里)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馬井里)의 제1호 국도 좌우측에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 2대대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적전리에 집결 보유하였다. 이렇듯 연대가 방어배치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줄을 이어 귀대하였으므로 연대병력은 1,500명으로 증가되었다. 제11연대장은 개성지구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백선엽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그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군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경의도로를 주병참선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도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한국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전차를 국도 제1호선 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17:00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국도 제1호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격퇴되었다. 그 뒤에도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한국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파평산 전투[편집] 제1사단의 우전방으로서,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던 제13연대(연대장 대령 김익렬(金益烈))는 제 1, 2의 2개 대대를 파평면 파평산에 투입하여, 북한군이 백학면 노곡리[14] 가여울 - 적성면 - 문산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던 중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하다가 국군의 살상지대에서 격멸되었다. 날이 바뀐 6월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청송로)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육박하였다. 이에 맞선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지만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여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제1대대장 김진위(金振暐)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겁을 먹은 듯 적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고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에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근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편집]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6월 26일에는 주저항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 진전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측(右側) 인접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德亭)-축석령(祝石嶺)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아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한국군 제 1사단의 주저항선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기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북한군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6월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운 보·전·포 협동부대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상황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으나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적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호기라고 간파한 제 11연대장은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역습을 단행함으로써 지역 내의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바로 이 무렵 우측방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방으로 육박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 1사단은 야간철수를 계획하였으나 북한군의 압박이 가중되어 위급한 국면이 전방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국군은 철수명령을 하달하였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국민학교로 이동 설치하였다. 결과 및 영향[편집] 북한군의 군단들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그 남단에 있는 영정리(영정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제6사단 예하의 부대로 추단되었는데,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포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김포 하성면 봉성리의 봉성산(129m)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월동에 있는 지양산(138m)을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불시 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각주[편집] ↑ 이하의 지휘관 명단은 모두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2쪽. 참조. ↑ 당시에는 장단군 장남면이었으며, 현재는 연천군 장남면에 속한 고랑포리이다.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현재는 개풍군 연강리이다. ↑ 현재의 개성특급시 룡흥동의 일부이다. ↑ “參謀副長에 金大領就任”. 경향신문. 1950년 4월 23일. ↑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988년 6월 24일.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4쪽. ↑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988년 6월 24일. ↑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개성에서 내려온 전경대원들에 의하면 24일밤 11시쯤 개성경찰서로부터 불과 40여m 떨어져있는 만월국민학교교정에 국군복장을 한 1개대대병력의 일부가 야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이들 국군복을 입은 자들이 시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더라는 것. 그러나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외출중이었고 경찰서에도 20여명정도가 야근을 하고 있을뿐이어서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국군복으로 위장한 적은 이미 공격시간에 맞추기 위해 만월국민학교에서 야영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김씨[김억순]는 술회했다. ↑ “6․25를 회고하는 戰地의 敵”. 동아일보. 1973년 6월 25일. ↑ 현재의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 당시의 노곡리는 38선 경계 바로 밑, 즉 최북단 지역이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개성·문산_전투&oldid=23464361" 분류: 1950년 남북 관계1950년 분쟁한국 전쟁의 전투대한민국의 전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투개성특급시의 역사파주시의 역사1950년 6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PolskiPortuguê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14일 (월) 11: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북한군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공격을 개시한 날짜는? |
개성·문산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개성·문산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개성, 문산 전투한국 전쟁의 일부날짜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장소경기도 개성, 문산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교전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휘관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1]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고한조 제1대대장 대위 정영홍 제2대대장 소령 김재명 제3대대장 소령 전성호 제12연대장 대령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2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3대대장 소령 김익열 제13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윤천태 제2대대장 소령 유재성 제3대대장 소령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이창권 제3연대장 총좌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김순진 제13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김현기 제15연대장 대좌 vdeh한국 전쟁 북의 공세 폭풍 작전 춘천 제1차 서울 고랑포 개성·문산 대한해협 옹진 의정부 수원 비행장 공중전역 안동 주문진항 오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평택 천안 조치원 대전 상주 영동 황간 하동 노치 부산 교두보 마산 포항 대구 제1차 낙동강 볼링장 전투고지 경주 함안 남강 가산 다부동 영산 제2차 낙동강 UN군의 반격 해주 인천 제2차 서울 282 고지 1950년 10월 12일 사리원 평양 영변 구진 정주 중공군 개입 온정 은산 박천 청천강 와원 장진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제3차 서울 의정부 채궁현 제1, 2차 원주 선더볼트 작전 쌍둥이굴 횡성 지평리 제3차 원주 주암리 원산 봉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매화산 코리지어스 작전 토마호크 작전 러그드 작전 불굴 작전 춘계공세 임진강 율동 가평 소양강 전선 교착 피의 능선 민덴 작전 펀치볼 단장의 능선 한강 코만도 작전 제1차 마량산 학당리 보통비행 작전 제2차 마량산 이리 고지 올드발디 고지 섬광 작전 백마고지 삼각고지 제1차 후크 고지 제2차 후크 고지 잣골 베가스 전초기지 포크찹 고지 제3차 후크 고지 해리 전초기지 금성 사미천 정전 협정 공중전 북한 폭격 MIG 협곡 순천 교살 작전 수풍댐 폭격 전후 분쟁 D.M.Z. 분쟁 1·21 사태 EC-121 격추 사건 판문점 강릉 무장공비 서해교전 여수 제1차 연평 제2차 연평 대청 천안함 제3차 연평 판문점 선언 개성, 문산 전투(開城汶山戰鬪)는 한국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2]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운 방어전투이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 휘하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 km, 제13연대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 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동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 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3] 제12연대를 좇아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6월 28일) 목차 1 전투 준비 1.1 한국군 1.2 북한군 2 전투 과정 2.1 청단-백천 철수 2.2 개성 철수 2.3 문산 전투 2.4 파평산 전투 2.5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3 결과 및 영향 4 각주 전투 준비[편집] 한국군[편집]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방어진지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제1사단의 교육훈련 진도는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즉 제 11, 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紫霞里)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과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의 경각심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런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의 경우 80여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제12연대 제3대대(대대장 소령 이무중(李茂重))는 서쪽으로는 청단군 금학리 부근의 하천인 읍천(邑川)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錢浦里)[4] 까지의 직선거리 54 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는 서쪽으로는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靑鶴洞)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3연대는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大院里)[5]~ 소반고개~판문점 북측 지역~ 두매리 ~ 조금리 ~ 고랑포리 ~ 원당리(元堂里)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에는 60mm 및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4월 22일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始興)소재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고,[6][7]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북한군[편집] 북한군의 배치현황을 보면, 적성 북쪽의 △137로부터 서쪽으로 △282(대원리—송악산(개성) —△325(백천)—△120(연안 북쪽) —△98(청단 북쪽)등을 연하는 38˚선상의 감제지형을 따라 진지를 편성하고 특히 지역내의 개성시가를 완전히 감제할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강력한 방어진지(방카)를 구축하여 남침의 발판을 굳히는 한편, 제1 · 제2 · 제3 경비여단을 엄호하듯 그 후방 남천에는 제1사단(사단장, 최광 소장)이 위치하여 그 예하에 제1, 제2, 제3연대와 포병연대를 두고 있었다.[8] 제1사단 및 제6사단의 병력은 도합 21,000명 내외이며 장비 122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그 밖에 그들의 총사령부 직할의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전차 40대와 기타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의 지원거리내에 집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9] 전투 과정[편집]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를 받았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이 백선엽이 받은 6.25 전쟁에 대한 제1보였다.[10] 청단-백천 철수[편집] 한국전쟁 직전, 제12연대 제3대대의 배치 제12연대 3대대가 지키는 청단~개풍 간 54 km 구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3대대는 국지적으로 적을 지연시키다가 용매도(用媒島) → 청룡 반도(靑龍半島) → 백석포 → 강화도 → 김포 반도를 경유하여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분산되었다. 개성 철수[편집]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 15연대(연대장 김현기(金顯基) 대좌) 는 전차 5~6대의 선도하에 국도 제1호선을 따라, 제12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가 방어하고 있는 개성 시내로 진격하였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2대대 제6중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白源淡) 중위가 전사하고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개성 시내의 만월국민학교에는 전날(24일) 밤 11시쯤 국군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야영을 하고 있다가 밤이 깊어지자 시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격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미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11] 개풍군 여현리 일대를 경비하던 제2대대 제5중대도 개성이 함락된 상황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하였으며, 개성 송악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하던 제7중대도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7시경) 제2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子男山)으로 철수하게 되었다.(9시경)[12] 한편 제12연대장 전성호(全盛鎬) 대령은 이날 09:00쯤 상황을 종합 분석한 끝에 국도 제1호선이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제2대대는 개성 북쪽 일대에서 철수중인 병력을 수습하면서 제1대대가 배치된 개풍군 고남리(古南里)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제2대대장(한순화)과 만난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제2대대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연대예비인 제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철수부대인 제2대대에 연대장이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전성호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그 후임으로 김점곤(金點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제2대대장(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시내 남대문으로 접근하다가 행군대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領井浦)를 경유, 김포 반도의 강녕포(康寧浦)[13] 로 도하하여 통진(通津)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김포반도 전투) 문산 전투[편집]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연대(연대장 대령 최경록(崔慶祿)) 는 6월 25일 08:30에 출동하여 11:00~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행군한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리(赤田里)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馬井里)의 제1호 국도 좌우측에 제1대대를,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 2대대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적전리에 집결 보유하였다. 이렇듯 연대가 방어배치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줄을 이어 귀대하였으므로 연대병력은 1,500명으로 증가되었다. 제11연대장은 개성지구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백선엽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그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한군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경의도로를 주병참선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도 북한군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한국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전차를 국도 제1호선 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17:00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국도 제1호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격퇴되었다. 그 뒤에도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한국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파평산 전투[편집] 제1사단의 우전방으로서,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던 제13연대(연대장 대령 김익렬(金益烈))는 제 1, 2의 2개 대대를 파평면 파평산에 투입하여, 북한군이 백학면 노곡리[14] 가여울 - 적성면 - 문산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던 중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하다가 국군의 살상지대에서 격멸되었다. 날이 바뀐 6월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청송로)에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육박하였다. 이에 맞선 국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지만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여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제1대대장 김진위(金振暐)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겁을 먹은 듯 적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고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에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근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편집] 국군 제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6월 26일에는 주저항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 진전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측(右側) 인접부대인 제7사단이 덕정(德亭)-축석령(祝石嶺)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사단은 아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한국군 제 1사단의 주저항선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기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북한군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6월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운 보·전·포 협동부대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상황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으나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적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호기라고 간파한 제 11연대장은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역습을 단행함으로써 지역 내의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바로 이 무렵 우측방의 제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방으로 육박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 1사단은 야간철수를 계획하였으나 북한군의 압박이 가중되어 위급한 국면이 전방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국군은 철수명령을 하달하였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국민학교로 이동 설치하였다. 결과 및 영향[편집] 북한군의 군단들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그 남단에 있는 영정리(영정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제6사단 예하의 부대로 추단되었는데,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포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 전에 행주와 개화동 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김포 하성면 봉성리의 봉성산(129m)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월동에 있는 지양산(138m)을 장악하여 김포 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불시 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각주[편집] ↑ 이하의 지휘관 명단은 모두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2쪽. 참조. ↑ 당시에는 장단군 장남면이었으며, 현재는 연천군 장남면에 속한 고랑포리이다.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현재는 개풍군 연강리이다. ↑ 현재의 개성특급시 룡흥동의 일부이다. ↑ “參謀副長에 金大領就任”. 경향신문. 1950년 4월 23일. ↑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988년 6월 24일.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4쪽. ↑ “백선엽 회고록 : 군과 나 <1>”. 경향신문. 1988년 6월 24일. ↑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개성에서 내려온 전경대원들에 의하면 24일밤 11시쯤 개성경찰서로부터 불과 40여m 떨어져있는 만월국민학교교정에 국군복장을 한 1개대대병력의 일부가 야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이들 국군복을 입은 자들이 시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우익인사들을 색출하더라는 것. 그러나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외출중이었고 경찰서에도 20여명정도가 야근을 하고 있을뿐이어서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국군복으로 위장한 적은 이미 공격시간에 맞추기 위해 만월국민학교에서 야영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김씨[김억순]는 술회했다. ↑ “6․25를 회고하는 戰地의 敵”. 동아일보. 1973년 6월 25일. ↑ 현재의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 당시의 노곡리는 38선 경계 바로 밑, 즉 최북단 지역이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개성·문산_전투&oldid=23464361" 분류: 1950년 남북 관계1950년 분쟁한국 전쟁의 전투대한민국의 전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투개성특급시의 역사파주시의 역사1950년 6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PolskiPortuguês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14일 (월) 11:1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사단과 6사단 병력은 대략 얼마일까? |
저비스베이 준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비스베이 준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저비스베이 준주 지도 저비스베이 준주(Jervis Bay Territory)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준주 중 하나이다. 1915년에 연방 정부에서 수도 캔버라의 바다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뉴사우스웨일스주로부터 구입했다. 이 곳은 1989년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가 주 자치 정부를 세우고 국토부 장관에 의한 분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수도 준주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곳은 수도 준주의 하원들의 수도 준주의 선거구인 프레이저 선거구에 포함되어 아직도 수도 준주의 한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목차 1 역사 2 행정 3 지리 4 거주 5 HMAS 크레스웰 6 원자력 발전소 부지 역사[편집] 저비스베이의 이름은 영국 제독 존 저비스, 1대 세인트 빈센트 공작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저비스를 자비스라고 읽어야 된다고 하지만, 그의 후손들과 거주민의 대부분은 저비스라고 읽는다. 1819년 존 옥슬리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찾아왔었다. 행정[편집]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와 저비스베이 준주의 위치 대략 611명(2001년 인구 통계)이 준주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기지인 HMAS 크레스웰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준주의 90% 이상의 땅이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에 속하며, 부데리 국립공원안의 렉 베이에 거주지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정부가 대부분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나, 보통의 사소한 것들이나, 초등 학교의 교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경찰 인력들은 저비스베이 행정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거주민은 수도 준주 법원에 설 수 있으나, 수도 준주 양원 의회에는 저비스베이 준주를 대표해 나올 수는 없다. 저비스베이 준주는 수도 준주의 한 선거구인 프레이저 선거구와 수도 준주의 두 연방 상원 아래에 있다. 방위군 강령 조항 단락 62번에 따라 모든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과 군무원은 범법 행위를 한 장소에 관계 없이 저비스베이 준주의 형법을 따른다. 이런 법적인 장치는 방위군이 장소에 관계없이, 국외에서 저지는 위법 행위에 대해서도 1914년 형법 조항(Cth), 1995년 형법 규범 조항(Cth),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형법에 적용되게 하게끔이다. 이 행정구역과 가장 가까운 마을은 준주 경계 북쪽 3km에 있는 인구 2,750 명의 빈센티아다. 지리[편집] 저비스베이에 선착해 있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군함들 저비스베이는 남북으로 16km, 동서로는 10km의 동쪽으로 태평양을 마주보는 자연적인 항구이다. 이 항만은 시드니 남쪽 150km,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숄해븐 강이 지나고 있는 나우라로, 준주로부터 40km 근방에 있다. 부데리 국립공원의 바다에서는 잘피로 이루어진 해저 들판, 돌고래를 볼 수 있다. 써던 버웨리 반도 끝인 거버너스 헤드는 처음으로 부데리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던 곳으로 도로를 통해 갈 수 있다. (부데리는 원주민 말로 풍요의 만, 풍부한 어장이라는 뜻이다.) 만의 북쪽 해안 비크로프트 반도의 퍼펜디쿨러 곶에는 등대가 있으며, 이 부근 일대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함포 사격장으로 쓰이고 있다. 보웬 섬은 51 헥타르의 크기이며, 바다표범과 쇠푸른펭귄의 서식지가 섬 북쪽에 있다. 만 주위에 마을로는 하이암스 비치, 빈센티아, 허스키슨, 쿨버라, 콜랄라 베이, 콜랄라 비치, 묠라가 있다. 저비스베이 남서쪽에 있는 세인트 조지 베이신은 분지에는 커다란 호수와 삼각강이 있다. 부데리 국립공원은 80 헥타르의 면적으로 1951년 맥켄지 호수 근처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내셔널 보타닉 가든의 냉해 피해에 대한 대비를 위해 지정되었다. 거주[편집] 저비스베이에는 3개의 작은 마을이 있으며, 우편 번호는 2541로 통일되어 있다. 저비스베이 빌리지 (250 명) 그린패치 (30 명) 레크 베이 빌리지 (215 명) HMAS 크레스웰[편집] 부데리 국립공원 근처의 HMAS 크레스웰 기지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아버지인 윌리엄 루크 크레스웰 경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대학도 있다. 근처의 저비스베이 비행장에서는 칼카라라고 불리는 무인 비행기 (Beech /BAe MQM-107 E)이 해군의 사격 훈련의 표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부지[편집] 저비스 베이의 남동쪽 머레이 비치 근처의 저비스베이 핵 발전소는 1971년 계획이 취소됨에 따라 메워진 이곳은 현재 도로와 머레이 비치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저비스베이 준주 vdeh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와 준주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빅토리아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태즈메이니아주 퀸즐랜드주 준주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노던 준주 저비스베이 준주 특별 지역 노퍽섬 산호해 제도 애시모어 카르티에 제도 코코스 제도 크리스마스섬 허드 맥도널드 제도 오스트레일리아령 남극 준주 (영유권 주장 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저비스베이_준주&oldid=22413871" 분류: 저비스베이 준주월경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Cebuanoکوردی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Gaelgעבריתहिन्दीHrvatski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gureLietuvi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6일 (일) 01: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보웬 섬의 크기는? |
저비스베이 준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저비스베이 준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저비스베이 준주 지도 저비스베이 준주(Jervis Bay Territory)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준주 중 하나이다. 1915년에 연방 정부에서 수도 캔버라의 바다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뉴사우스웨일스주로부터 구입했다. 이 곳은 1989년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가 주 자치 정부를 세우고 국토부 장관에 의한 분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수도 준주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곳은 수도 준주의 하원들의 수도 준주의 선거구인 프레이저 선거구에 포함되어 아직도 수도 준주의 한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목차 1 역사 2 행정 3 지리 4 거주 5 HMAS 크레스웰 6 원자력 발전소 부지 역사[편집] 저비스베이의 이름은 영국 제독 존 저비스, 1대 세인트 빈센트 공작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저비스를 자비스라고 읽어야 된다고 하지만, 그의 후손들과 거주민의 대부분은 저비스라고 읽는다. 1819년 존 옥슬리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찾아왔었다. 행정[편집]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와 저비스베이 준주의 위치 대략 611명(2001년 인구 통계)이 준주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기지인 HMAS 크레스웰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준주의 90% 이상의 땅이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에 속하며, 부데리 국립공원안의 렉 베이에 거주지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정부가 대부분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나, 보통의 사소한 것들이나, 초등 학교의 교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경찰 인력들은 저비스베이 행정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거주민은 수도 준주 법원에 설 수 있으나, 수도 준주 양원 의회에는 저비스베이 준주를 대표해 나올 수는 없다. 저비스베이 준주는 수도 준주의 한 선거구인 프레이저 선거구와 수도 준주의 두 연방 상원 아래에 있다. 방위군 강령 조항 단락 62번에 따라 모든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과 군무원은 범법 행위를 한 장소에 관계 없이 저비스베이 준주의 형법을 따른다. 이런 법적인 장치는 방위군이 장소에 관계없이, 국외에서 저지는 위법 행위에 대해서도 1914년 형법 조항(Cth), 1995년 형법 규범 조항(Cth),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형법에 적용되게 하게끔이다. 이 행정구역과 가장 가까운 마을은 준주 경계 북쪽 3km에 있는 인구 2,750 명의 빈센티아다. 지리[편집] 저비스베이에 선착해 있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군함들 저비스베이는 남북으로 16km, 동서로는 10km의 동쪽으로 태평양을 마주보는 자연적인 항구이다. 이 항만은 시드니 남쪽 150km,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숄해븐 강이 지나고 있는 나우라로, 준주로부터 40km 근방에 있다. 부데리 국립공원의 바다에서는 잘피로 이루어진 해저 들판, 돌고래를 볼 수 있다. 써던 버웨리 반도 끝인 거버너스 헤드는 처음으로 부데리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던 곳으로 도로를 통해 갈 수 있다. (부데리는 원주민 말로 풍요의 만, 풍부한 어장이라는 뜻이다.) 만의 북쪽 해안 비크로프트 반도의 퍼펜디쿨러 곶에는 등대가 있으며, 이 부근 일대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함포 사격장으로 쓰이고 있다. 보웬 섬은 51 헥타르의 크기이며, 바다표범과 쇠푸른펭귄의 서식지가 섬 북쪽에 있다. 만 주위에 마을로는 하이암스 비치, 빈센티아, 허스키슨, 쿨버라, 콜랄라 베이, 콜랄라 비치, 묠라가 있다. 저비스베이 남서쪽에 있는 세인트 조지 베이신은 분지에는 커다란 호수와 삼각강이 있다. 부데리 국립공원은 80 헥타르의 면적으로 1951년 맥켄지 호수 근처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내셔널 보타닉 가든의 냉해 피해에 대한 대비를 위해 지정되었다. 거주[편집] 저비스베이에는 3개의 작은 마을이 있으며, 우편 번호는 2541로 통일되어 있다. 저비스베이 빌리지 (250 명) 그린패치 (30 명) 레크 베이 빌리지 (215 명) HMAS 크레스웰[편집] 부데리 국립공원 근처의 HMAS 크레스웰 기지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아버지인 윌리엄 루크 크레스웰 경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대학도 있다. 근처의 저비스베이 비행장에서는 칼카라라고 불리는 무인 비행기 (Beech /BAe MQM-107 E)이 해군의 사격 훈련의 표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부지[편집] 저비스 베이의 남동쪽 머레이 비치 근처의 저비스베이 핵 발전소는 1971년 계획이 취소됨에 따라 메워진 이곳은 현재 도로와 머레이 비치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저비스베이 준주 vdeh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와 준주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빅토리아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태즈메이니아주 퀸즐랜드주 준주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노던 준주 저비스베이 준주 특별 지역 노퍽섬 산호해 제도 애시모어 카르티에 제도 코코스 제도 크리스마스섬 허드 맥도널드 제도 오스트레일리아령 남극 준주 (영유권 주장 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저비스베이_준주&oldid=22413871" 분류: 저비스베이 준주월경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ragonésÆnglisc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Mìng-dĕ̤ng-ngṳ̄CebuanoکوردیČeština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FryskGalegoGaelgעבריתहिन्दीHrvatski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igureLietuviųМонголमराठीBahasa MelayuNederlandsNorskਪੰਜਾਬੀ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6일 (일) 01: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01년 인구 통계에 따르면 저비스베이 준주에 사는 인구는 대략 몇 명이야? |
석유 산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석유 산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석유 산업(石油産業, 영어: petroleum industry)은 석유를 탐사·개발 및 채굴·수송·정제·판매하는 산업이다. 19세기 중엽(1859년) 미국에서 탄생한 근대 석유 산업은 20세기 초에는 1차 에너지 공급량의 10% 미만을 담당하였던 것이 1980년대에는 80% 수준을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영 규모와 체제를 지니는 산업 형태의 출발이 되었다. 즉, 탄소(炭素)성분인 광물성 연료로 에너지 산업[1]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석유산업은 자원으로서의 부존 상태가 지구상에 편재되어 있는 한편, 에너지의 소비 성향에 따라 산업적 여건에 차이가 있어 산유국과 소비국[2]의 구분이 있고, 국제적인 대규모 사업체가 성립되고 있다. 목차 1 석유 생산국과 소비국 1.1 석유 수출국 기구의 공세 2 국제 석유 자본 3 석유 자원의 분포 4 석유 자원의 산업적 특성 4.1 원료·제품의 유동성 4.2 석유 발견의 불확실성 4.3 물성·용도의 다양성 5 석유 산업의 경영 형태 5.1 선진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 5.2 신흥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 5.3 석유 산업의 다국적화 6 공해 대책 7 대한민국의 석유 산업 7.1 역사 7.2 석유 자원의 개발 8 같이 보기 9 참고 및 관련 문헌 10 각주 석유 생산국과 소비국[편집] 석유 생산국은 보통 산유국 또는 석유 수출국으로 불리는 국가로서, 베네수엘라·이란·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라크·리비아·알제리·인도네시아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석유 수입에 의존하여 개발 도상 국가 나아가서는 세계 상위의 개인 평균 소득 국가로 진출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Oranization of Petroleum Export Country)를 결성, 외국자본이 지배하던 석유회사의 국유화, 이익 배분율의 상향 조정 등을 취하고 있으며, 산유국들의 자국정제주의 채택은 석유 수출국에서 석유 제품 수출국으로의 전환이 전망되고 있다. 석유 생산국에 대하여 시장을 제공하는 국가들인 소비국 또는 수입국은 산유국 이외의 모든 국가가 해당된다 하겠으나, 일반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것으로 믿어지는 소련·중국·캐나다·멕시코·미국 등을 제외한 유럽 제국과 한국·일본 등 동양 국가를 말한다. 그러나 미국은 1960년 이후 국내 석유 수요의 격증으로 수입비율이 증대, 국내 수요 중 1970년대에는 60%, 1980년대에는 80%를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어, 국내 대륙붕 석유 개발이나 새로운 에너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최대 석유수입국으로 반전하였다. 석유 수출국 기구의 공세[편집] 중동 지역을 주축으로 한 산유국의 공동 기구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최종적인 확인매장량은 물론 연간생산량과 수요의 균형에서 공급 부족 현상에 있음을 고려, 산유국의 이익 배당 비율과 석유의 수출 가격을 매년 인상하기 위한 협의를 제기하고 있어 석유소비국으로서는 이를 OPEC의 공세라 부르고 있다. 연례적인 OPEC 공세는 석유 산업의 원가 상승을 불가피하게 하는 한편, 조정 협의의 장기화로 인한 공급상의 불안정을 초래, 산유국과 소비국 사이의 장기적인 타결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국제 석유 자본[편집] 자원의 편재와 세계적인 수요의 증가 및 개발 자금의 대규모성 등으로 인한 석유 산업의 특성은 국제적인 규모의 기업을 이루게 하고 있다. 따라서 메이저 컴퍼니(international major oil companies)로 불리는 국제석유자본들은 그들의 자본·기술·경영력을 바탕으로 산유국과 소비국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경영력과 정치정세의 판단력으로써 낮은 원가의 원유와 빈틈없는 시장성(market position)을 세계 주요지역에서 유지, 세계 석유 산업의 지배 계급으로 인정되고 있는 국제 석유 자본도 1970년대에 산유국과 소비국의 자국화주의에 부딪혀 시련을 받게 되었다. 주요 국제 석유 자본으로서 메이저 컴퍼니로 인정되는 회사로는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텍사코(Texaco Inc.), 걸프 오일(Gulp Oil Corp.),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of California)을 미롯, 영국의 브리티시 석유(British Petroleum Co. Ltd),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회사인 로열 더치 셸(Royal Dutch Shell Petroleum Co.) 및 프랑스의 프랑스 석유(CFP, Cie Francaise Des Petroles) 등이 있다. 석유 자원의 분포[편집] 1993년 말 현재 전 세계의 원유 확인 매장량은 9,991억 2,400만 배럴이다. 원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전 세계 매장량의 25.2%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 지역 매장량이 65.2%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1996년 말 현재 가맹국이 5대 산유국을 포함, 12개국인 석유수출기구(OPEC)가 세계 석유매장량의 70%, 생산량의 38%를 차지하고 있다. 석유 자원의 산업적 특성[편집] 원료·제품의 유동성[편집] 석유는 매장된 상태에서 정제되어 최종제품으로 소비단계에 이르기까지 유체의 상태를 지니고 있어, 토지소유자는 인접지 지하에 있는 유전에서 흘러들어온 석유를 자기가 만든 유정에서 퍼 올리는 권리가 포획의 원칙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석유의 유동성은 똑같이 지하에서 채취하는 석탄이 광부를 통하여 채탄작업을 거쳐야 하는 데 비하여 낮은 비용으로 손쉽게 채취할 수 있고, 판매와 수송에 있어서도 대량수송이 용이하다. 유조선(탱커)·저유조(탱크)·유조차(탱크 롤리)·저유소(가솔린 스테이션)·비축기지(센트럴 터미널 스테이션)·송유관(파이프 라인)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한 원가절감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용시설의 소요는 유전개발에서 제품판매에 이르는 석유산업에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어 전형적인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이 되게 하며, 시설의 대규모화와 함께 높은 조업률과 시장 및 원료의 확보를 지상 과제로 삼음으로써 원료, 즉 유전개발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통합의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석유 발견의 불확실성[편집] 석유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전탐사 또는 시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는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므로 국제자본의 참여가 불가피하다. 에너지 산업부문의 개발중 위험률이 가장 높은 석유개발은 탐사·시추에 의한 경제적 석유채취 가능성에 있어서도 성공률이 극히 낮다는 것과 함께, 석유개발에 투입된 대규모 자본의 빠른 회수를 위한 석유생산은 소비국의 최종 제품수요·정제시설·수송수단 등이 증대하지 않는 한 공급과잉으로 인한 석유(원유)가격 하락을 초래한다는 가격의 불안정성에 있어서도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석유산업의 안정성을 위하여 국제석유자본이나 각국의 정부가 공급의 조절, 가격의 안정 등을 통한 조정역을 담당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성·용도의 다양성[편집] 원유는 증발성·유용성과 불순도가 다양한 탄화수소의 혼합물로, 화학적 융통성이 매우 커서 석유정제의 기술도 증류식을 비롯하여 분해·개질·중합 등 다채롭다. 초기에 조명용 등유와 기계용 윤활유로 사용되었던 석유는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가솔린시대에 접어들어 보일러·선박용 중유, 디젤유, 항공유, 제트연료 등 용도가 확대되었으며, 1950년대 이후 원유유분의 완전히 용법의 하나로 개발된 나프타(납사)는 석유화학의 원료로써 석유화학계열산업이란 새 분야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3] 또한 1960년대부터 석유화학의 연구과제로 나타난 식료품까지 고려할 때 앞으로 석유산업은 에너지뿐 아니라, 의식주 분야의 원료로서 더욱 중요한 비중을 지니게 되며, 다른 산업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용도가 계속 증가될 것이다. 석유 산업의 경영 형태[편집] 국제적인 상관성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했던 근대 석유산업은 수요·공급·자금과 생산방법 등에서 다른 산업에 볼 수 없는 경영상의 특성을 나타내게 하고 있다. 근대적인 석유산업은 석유를 채취, 최종소비자에게 공급하기까지에는 다음 4부문의 기능으로 성립된다. ① 원유의 생산 석유를 발견하기 위한 탐광시추·유전개발·석유채취 등 3단계로 구분된다. ② 원유의 정제 원유를 휘발유·등유·경유의 제품으로 분류하는 일로서 석유화학도 포함될 수 있다. ③ 제품의 판매 공장도판매·도매·소매를 포함하며, 제품을 정유공장에서 대수요처·주유소 등에 공급하는 과정으로 저장시설이 따르게 된다. ④ 원유 및 제품의 수송 ①의 원유생산과 ②의 석유정제, 또는 석유정제와 ③의 제품판매를 연결시키는 과정 석유산업의 경영형태는 이러한 기능적 부문의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은 2가지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다. 수직적 통합 석유의 생산·정제·판매·수송 등 4개 기능부문 중 2개 기능 이상을 담당하고 있을 때 이를 '수직적 통합' 또는 '기능적 통합'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수직적 통합은 석유정제와 이에 관련된 수송수단으로서의 파이프라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며, 4개 기능부문을 모두 경영하는 완전통합 회사도 있다. 수평적 통합 앞에서 말한 석유산업의 기능 가운데 동일부문을 전국적 또는 국제적으로 대규모화하거나 계열화 경영체제로 운영하는 것을 '수평적 통합' 또는 '지리적 통합'이라 하는데, 선진 석유산업국이라 할 미국에 있어서는 석유정제의 경우 상위(上位) 20개 회사가 전체의 85% 수준을 점유하고 있으며, 일본에 있어서도 27개 석유정제회사 중 상위 6개사가 55%의 집중도를 나타내고 있다. 선진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편집] 미국·영국·네덜란드 등 석유산업부문의 선진국가들은 국내는 물론 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유전개발·석유생산에 자본·기술면에서 참여함으로써 원유의 생산에서 최종제품의 판매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일관체제를 형성, 각사의 계열·방계회사로서 세계 각지에 석유회사와 판매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인 수송 선단을 보유하거나 석유수송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진 석유산업국들은 석유자원의 편재성과 매장량에 비한 세계수요의 증가 등에 비추어 새로운 유전의 개발에 적극적인 자본참여를 행하고 있어, 이들 선진국의 경영형태는 전 세계적인 경영요인과 석유산업 및 관련부문 전반에 걸친 규모와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흥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편집] 선진국가로부터 석유정제제품을 수입하던 개발도상국가들은 에너지 수요의 증가와 석유제품 비중의 증대에 따라 자국정제주의를 채택, 국제석유자본의 소비지정제주의와 함께 점차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석유산업을 발흥시켰다. 그러나 석유산업에 있어서의 국제석유자본·선진국가의 지배력 또는 영향력에 의해 대부분의 신참국가들은 국제석유자본 또는 그 산하의 계열회사들과 합작투자방식으로 정제공장을 건설, 원유의 공급·수송 등 상류사업부문은 전적으로 국제석유자본에 의존하는 실태에 있다. 따라서 석유산업에 있어서 원유의 공급·수송이 갖는 비중의 크기와 자본집약적 산업이란 특징 때문에 이들 신참 석유산업국에 있어서의 석유회사는 50대 50의 주식비율로 설립되었다 하더라도 실제적인 경영면에 있어서는 국제석유자본들이 중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신참 석유산업국에 있어서는 민족자본에 의한 석유산업기반의 육성이 중요한 산업정책과제로 되어 있다. 석유 산업의 다국적화[편집] 석유자원의 편재성과 대규모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이란 특성은 국제적인 자본의 참여를 초래할 뿐 아니라 산유국과 소비국에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제3국의 참여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주로 메이저컴퍼니간에 이루어지는 자본·기술·생산·판매 등의 합작이나 공동참여는 새로 설립되는 회사를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즉 A국과 B국의 공동출자로 C국에 석유생산부문의 회사를 설립하면서 C국의 자본을 약간 참여시킴으로써 C국 국적을 얻어 설립된 K회사는 다시 F국의 정제공장에 원유공급을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G국의 회사와 F국의 정유공장에 공동출자로 참여하는 경우, 실질적으로는 A·B·C·F·G등 5개국의 공동출자가 되며, 이들 5개국 기업은 이익처분·위험부담 등의 목적에서 서로가 공동출자국을 이용할 수 있다는 데서 다국적 기업이 출현하고 있다. 특히 석유산업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석유산업이 주요 산유국이 아닌 수개 선진국에 의하여 발전되었다는 점과 후진국가들이 특정 단일국에만 의존하는 석유산업 발족을 기피함으로써 다국적 기업의 출현을 촉진하고 있다. 공해 대책[편집] 석유 산업은 제품 생산을 위한 정제 과정에서의 매연·폐수 등 공기와 수질의 오염만이 아니라 대형 유조선에 의한 원유 수입, 연안 해운을 이용한 국내 해상수송 등에 있어서 유조선의 장기 계선으로 인한 해상 교통의 정체와 유류의 하역 작업이나 선박 사고에 의한 해수 오염(海水汚染) 등 공해성 요인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석유화학계열 산업이나 최종 제품으로서의 휘발유·디젤유 등의 에너지 및 비(非)에너지용의 소비 과정에서 많은 공해 발생 요인을 지니고 있어 이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석유산업의 원가상승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공해성 요인을 이유로 하여 석유정제 및 석유화학계열 산업이 이웃에 건설되는 것을 반대하는 국제적 경향은 석유 산업의 입지난을 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석유 산업[편집] 역사[편집] 한국 최초의 정유사업체는 1935년 6월 일본 제국이 설립한 조선석유주식회사의 원산정유공장이었다. 연간 원유처리능력 40만 톤 규모로 1944년 고산의전읿획를 수립, 추진되는 도중에 광복을 맞게 되었다. 미 군정 당시에는 군정청 석유배급 대행회사를 통해 군용석유제품이 공급되었고, 1949년 1월 대한석유저장회사가 설립되어 석유류의 저장 및 판매사업을 담당했다. 1955년 5월 한·미 석유운영협정 체결 이후 동사가 AID 원조자금으로 석유제품을 수입, 대리점을 통하여 각 시·도별로 배정·판매하였는데 이 시기가 통제배급 시기이다. 환언하면 한국은 정제된 완제품을 수입, 소비하였다는 것이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되면서 그 일환으로 정유공장 건설계획이 수립되어 한국의 석유산업은 전기를 맞게 된다. 1962년 10월 대한석유공사[4]가 설립되었고 난고 끝에 1963년 7월 걸프(Gulf)사와 합작계약(지분 25%, 1970년 50%로 확대)을 체결, 동년 12월 울산공단 내에 하루생산량 3만 5,000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이 국내 최초로 준공되어 1964년 4월 상업생산을 시작함으로써 석유제품의 국내 자립화가 시작되었다. 1966년 12월 생산시설을 분산하고 원유도입을 다원화하며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제2의 정유회사 설립이 추진되어 칼텍스(Caltex)사와 50대 50의 지분으로 민간베이스에 의한 호남정유주식회사가 설립되어 1967년 5월 여수에 정유공장을 준공하였는데,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6만 배럴 규모였다. 1968년 3월에는 유니언(Union)사와 50대 50의 지분으로 민간베이스에 의한 경인에너지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1971년 5월 인천에서 일산 원유처리능력 6만 배럴의 정유공장이 가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정유3사가 본격 가동됨으로써 석유류의 자급이 이루어졌고 정제과정에서 분류되는 중간재를 원료로 하는 석유화학공업·비료공업 등 관련사업에 대한 파급효과는 전산업부문에 걸쳐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도산업으로서의 역할은 100% 수입의존이라는 비산유국의 현실과 국제석유재벌과의 합작이라는 내부적·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규모 시설투자에 필요한 자금·기술의 부재, 그리고 원유공급원의 안정적 확보라는 한국경제의 현실 때문에 빚어진 메이저와의 합작은 철저한 불평등조약이었으며 저들이 온갖 이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원유도입에서 정제·판매에 이르기까지 메이저들은 이중적 폭리를 취하였으며 엄청난 규모의 과실송금으로 투자액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다. 더욱이 경영권까지 메이저에 귀속되어서 한 마디로 한국의 석유산업은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경영권 환수와 지분회수를 위한 각 사의 노력이 가시화 되었다. 대한석유공사는 1980년 8월 걸프사의 지분을 회수하였고, 동년 12월 (주)선경이 석유공사 주식 50%와 경영권을 인수, 민영화가 시작되었으며 1982년 7월 주식회사 유공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는데, 1995년 12월 현재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61만 배럴이다. 경인에너지는 1983년 5월 유니언사의 지분을 회수, 100% 국내 자본화하였는데 1995년 한화에너지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1995년 12월 현재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27만5천 배럴이다. 호남정유는 1974년 8월 증자를 계기로 해서 경영권 환수노력을 시작, 운영권을 회수하였고 1996년 LG정유로 상호를 변경했다.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1995년 현재 38만 배럴로 증가하였다. 1964년 11월 100% 국내자본으로 설립된 극동정유는 1980년대 초까지 일산 원유 처리 능력은 1만배럴 규모였으나 시설확장으로 1995년 말 현재 11만 배럴로 증가하였다. 1993년 7월 현대정유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이들 4사 외에 1980년대 중 상업 생산을 시작한 쌍용정유가 일산 44만5천배럴 규모로, 5사를 합한 국내 정유회사의 일산 원유처리 시설능력은 1995년 말 현재 181만8천 배럴 규모로 확대되었다. 석유 자원의 개발[편집]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국제 원유 시장의 변동에 따라 경제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이에 대체 에너지개발, 소비절약, 비축분 확대 등 각종의 에너지 공급기반 강화가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적극적인 방안으로 자주적 조달기반 확보를 위한 국내외 유전개발 투자·참여가 추진되고 있다. 1979년 6월 한·일 대륙붕 공동 개발 협정의 비준으로 대륙붕 탐사가 시작되었고, 1986년 5월 한국석유개발공사법이 제정·공포되어 한국석유개발공사를 설립, 해외유전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석유 나라별 석유 국제석유자본(en:Seven Sisters (oil companies)) 참고 및 관련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석유 산업의 경영 형태"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Ordons Oil & Gas Information & News Robert Sobel The Money Manias: The Eras of Great Speculation in America, 1770-1970 (1973) reprinted (2000). Daniel Yergin,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and Power, (Simon and Schuster 1991; paperback, 1993), ISBN 0-671-79932-0. Matthew R. Simmons, Twilight in the Desert The Coming Saudi Oil Shock and the World Economy, John Wiley & Sons, 2005, ISBN 0-471-73876-X. Matthew Yeomans, Oil: Anatomy of an Industry (New Press, 2004), ISBN 1-56584-885-3. Smith, GO (1920): Where the World Gets Its Oil: National Geographic, February 1920, pp 181–202 각주[편집] ↑ 1970년대부터 원자력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급격히 부상하였으나 양자는 본질적으로 효용이 다르다. ↑ 석유는 거의 대부분이 일본·미국·유럽 등 선진 공업국가들에서 소비되고 있다. ↑ 석유는 에너지 자원으로서만 아니라 화학 공업의 원료로도 중요한 자원이다. ↑ 약칭 유공(油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석유_산업&oldid=22823922" 분류: 석유 산업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ietuvių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1일 (일) 06: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석유 제품의 원가 상승요인중 하나는? |
석유 산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석유 산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석유 산업(石油産業, 영어: petroleum industry)은 석유를 탐사·개발 및 채굴·수송·정제·판매하는 산업이다. 19세기 중엽(1859년) 미국에서 탄생한 근대 석유 산업은 20세기 초에는 1차 에너지 공급량의 10% 미만을 담당하였던 것이 1980년대에는 80% 수준을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영 규모와 체제를 지니는 산업 형태의 출발이 되었다. 즉, 탄소(炭素)성분인 광물성 연료로 에너지 산업[1]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석유산업은 자원으로서의 부존 상태가 지구상에 편재되어 있는 한편, 에너지의 소비 성향에 따라 산업적 여건에 차이가 있어 산유국과 소비국[2]의 구분이 있고, 국제적인 대규모 사업체가 성립되고 있다. 목차 1 석유 생산국과 소비국 1.1 석유 수출국 기구의 공세 2 국제 석유 자본 3 석유 자원의 분포 4 석유 자원의 산업적 특성 4.1 원료·제품의 유동성 4.2 석유 발견의 불확실성 4.3 물성·용도의 다양성 5 석유 산업의 경영 형태 5.1 선진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 5.2 신흥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 5.3 석유 산업의 다국적화 6 공해 대책 7 대한민국의 석유 산업 7.1 역사 7.2 석유 자원의 개발 8 같이 보기 9 참고 및 관련 문헌 10 각주 석유 생산국과 소비국[편집] 석유 생산국은 보통 산유국 또는 석유 수출국으로 불리는 국가로서, 베네수엘라·이란·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라크·리비아·알제리·인도네시아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석유 수입에 의존하여 개발 도상 국가 나아가서는 세계 상위의 개인 평균 소득 국가로 진출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Oranization of Petroleum Export Country)를 결성, 외국자본이 지배하던 석유회사의 국유화, 이익 배분율의 상향 조정 등을 취하고 있으며, 산유국들의 자국정제주의 채택은 석유 수출국에서 석유 제품 수출국으로의 전환이 전망되고 있다. 석유 생산국에 대하여 시장을 제공하는 국가들인 소비국 또는 수입국은 산유국 이외의 모든 국가가 해당된다 하겠으나, 일반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것으로 믿어지는 소련·중국·캐나다·멕시코·미국 등을 제외한 유럽 제국과 한국·일본 등 동양 국가를 말한다. 그러나 미국은 1960년 이후 국내 석유 수요의 격증으로 수입비율이 증대, 국내 수요 중 1970년대에는 60%, 1980년대에는 80%를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어, 국내 대륙붕 석유 개발이나 새로운 에너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최대 석유수입국으로 반전하였다. 석유 수출국 기구의 공세[편집] 중동 지역을 주축으로 한 산유국의 공동 기구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최종적인 확인매장량은 물론 연간생산량과 수요의 균형에서 공급 부족 현상에 있음을 고려, 산유국의 이익 배당 비율과 석유의 수출 가격을 매년 인상하기 위한 협의를 제기하고 있어 석유소비국으로서는 이를 OPEC의 공세라 부르고 있다. 연례적인 OPEC 공세는 석유 산업의 원가 상승을 불가피하게 하는 한편, 조정 협의의 장기화로 인한 공급상의 불안정을 초래, 산유국과 소비국 사이의 장기적인 타결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국제 석유 자본[편집] 자원의 편재와 세계적인 수요의 증가 및 개발 자금의 대규모성 등으로 인한 석유 산업의 특성은 국제적인 규모의 기업을 이루게 하고 있다. 따라서 메이저 컴퍼니(international major oil companies)로 불리는 국제석유자본들은 그들의 자본·기술·경영력을 바탕으로 산유국과 소비국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경영력과 정치정세의 판단력으로써 낮은 원가의 원유와 빈틈없는 시장성(market position)을 세계 주요지역에서 유지, 세계 석유 산업의 지배 계급으로 인정되고 있는 국제 석유 자본도 1970년대에 산유국과 소비국의 자국화주의에 부딪혀 시련을 받게 되었다. 주요 국제 석유 자본으로서 메이저 컴퍼니로 인정되는 회사로는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텍사코(Texaco Inc.), 걸프 오일(Gulp Oil Corp.),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Co. of California)을 미롯, 영국의 브리티시 석유(British Petroleum Co. Ltd),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회사인 로열 더치 셸(Royal Dutch Shell Petroleum Co.) 및 프랑스의 프랑스 석유(CFP, Cie Francaise Des Petroles) 등이 있다. 석유 자원의 분포[편집] 1993년 말 현재 전 세계의 원유 확인 매장량은 9,991억 2,400만 배럴이다. 원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전 세계 매장량의 25.2%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 지역 매장량이 65.2%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1996년 말 현재 가맹국이 5대 산유국을 포함, 12개국인 석유수출기구(OPEC)가 세계 석유매장량의 70%, 생산량의 38%를 차지하고 있다. 석유 자원의 산업적 특성[편집] 원료·제품의 유동성[편집] 석유는 매장된 상태에서 정제되어 최종제품으로 소비단계에 이르기까지 유체의 상태를 지니고 있어, 토지소유자는 인접지 지하에 있는 유전에서 흘러들어온 석유를 자기가 만든 유정에서 퍼 올리는 권리가 포획의 원칙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석유의 유동성은 똑같이 지하에서 채취하는 석탄이 광부를 통하여 채탄작업을 거쳐야 하는 데 비하여 낮은 비용으로 손쉽게 채취할 수 있고, 판매와 수송에 있어서도 대량수송이 용이하다. 유조선(탱커)·저유조(탱크)·유조차(탱크 롤리)·저유소(가솔린 스테이션)·비축기지(센트럴 터미널 스테이션)·송유관(파이프 라인)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한 원가절감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용시설의 소요는 유전개발에서 제품판매에 이르는 석유산업에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어 전형적인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이 되게 하며, 시설의 대규모화와 함께 높은 조업률과 시장 및 원료의 확보를 지상 과제로 삼음으로써 원료, 즉 유전개발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통합의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석유 발견의 불확실성[편집] 석유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전탐사 또는 시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는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므로 국제자본의 참여가 불가피하다. 에너지 산업부문의 개발중 위험률이 가장 높은 석유개발은 탐사·시추에 의한 경제적 석유채취 가능성에 있어서도 성공률이 극히 낮다는 것과 함께, 석유개발에 투입된 대규모 자본의 빠른 회수를 위한 석유생산은 소비국의 최종 제품수요·정제시설·수송수단 등이 증대하지 않는 한 공급과잉으로 인한 석유(원유)가격 하락을 초래한다는 가격의 불안정성에 있어서도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석유산업의 안정성을 위하여 국제석유자본이나 각국의 정부가 공급의 조절, 가격의 안정 등을 통한 조정역을 담당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성·용도의 다양성[편집] 원유는 증발성·유용성과 불순도가 다양한 탄화수소의 혼합물로, 화학적 융통성이 매우 커서 석유정제의 기술도 증류식을 비롯하여 분해·개질·중합 등 다채롭다. 초기에 조명용 등유와 기계용 윤활유로 사용되었던 석유는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가솔린시대에 접어들어 보일러·선박용 중유, 디젤유, 항공유, 제트연료 등 용도가 확대되었으며, 1950년대 이후 원유유분의 완전히 용법의 하나로 개발된 나프타(납사)는 석유화학의 원료로써 석유화학계열산업이란 새 분야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3] 또한 1960년대부터 석유화학의 연구과제로 나타난 식료품까지 고려할 때 앞으로 석유산업은 에너지뿐 아니라, 의식주 분야의 원료로서 더욱 중요한 비중을 지니게 되며, 다른 산업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용도가 계속 증가될 것이다. 석유 산업의 경영 형태[편집] 국제적인 상관성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했던 근대 석유산업은 수요·공급·자금과 생산방법 등에서 다른 산업에 볼 수 없는 경영상의 특성을 나타내게 하고 있다. 근대적인 석유산업은 석유를 채취, 최종소비자에게 공급하기까지에는 다음 4부문의 기능으로 성립된다. ① 원유의 생산 석유를 발견하기 위한 탐광시추·유전개발·석유채취 등 3단계로 구분된다. ② 원유의 정제 원유를 휘발유·등유·경유의 제품으로 분류하는 일로서 석유화학도 포함될 수 있다. ③ 제품의 판매 공장도판매·도매·소매를 포함하며, 제품을 정유공장에서 대수요처·주유소 등에 공급하는 과정으로 저장시설이 따르게 된다. ④ 원유 및 제품의 수송 ①의 원유생산과 ②의 석유정제, 또는 석유정제와 ③의 제품판매를 연결시키는 과정 석유산업의 경영형태는 이러한 기능적 부문의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은 2가지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다. 수직적 통합 석유의 생산·정제·판매·수송 등 4개 기능부문 중 2개 기능 이상을 담당하고 있을 때 이를 '수직적 통합' 또는 '기능적 통합'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수직적 통합은 석유정제와 이에 관련된 수송수단으로서의 파이프라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며, 4개 기능부문을 모두 경영하는 완전통합 회사도 있다. 수평적 통합 앞에서 말한 석유산업의 기능 가운데 동일부문을 전국적 또는 국제적으로 대규모화하거나 계열화 경영체제로 운영하는 것을 '수평적 통합' 또는 '지리적 통합'이라 하는데, 선진 석유산업국이라 할 미국에 있어서는 석유정제의 경우 상위(上位) 20개 회사가 전체의 85% 수준을 점유하고 있으며, 일본에 있어서도 27개 석유정제회사 중 상위 6개사가 55%의 집중도를 나타내고 있다. 선진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편집] 미국·영국·네덜란드 등 석유산업부문의 선진국가들은 국내는 물론 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유전개발·석유생산에 자본·기술면에서 참여함으로써 원유의 생산에서 최종제품의 판매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일관체제를 형성, 각사의 계열·방계회사로서 세계 각지에 석유회사와 판매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인 수송 선단을 보유하거나 석유수송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진 석유산업국들은 석유자원의 편재성과 매장량에 비한 세계수요의 증가 등에 비추어 새로운 유전의 개발에 적극적인 자본참여를 행하고 있어, 이들 선진국의 경영형태는 전 세계적인 경영요인과 석유산업 및 관련부문 전반에 걸친 규모와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흥 석유 산업국의 경영 형태[편집] 선진국가로부터 석유정제제품을 수입하던 개발도상국가들은 에너지 수요의 증가와 석유제품 비중의 증대에 따라 자국정제주의를 채택, 국제석유자본의 소비지정제주의와 함께 점차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석유산업을 발흥시켰다. 그러나 석유산업에 있어서의 국제석유자본·선진국가의 지배력 또는 영향력에 의해 대부분의 신참국가들은 국제석유자본 또는 그 산하의 계열회사들과 합작투자방식으로 정제공장을 건설, 원유의 공급·수송 등 상류사업부문은 전적으로 국제석유자본에 의존하는 실태에 있다. 따라서 석유산업에 있어서 원유의 공급·수송이 갖는 비중의 크기와 자본집약적 산업이란 특징 때문에 이들 신참 석유산업국에 있어서의 석유회사는 50대 50의 주식비율로 설립되었다 하더라도 실제적인 경영면에 있어서는 국제석유자본들이 중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신참 석유산업국에 있어서는 민족자본에 의한 석유산업기반의 육성이 중요한 산업정책과제로 되어 있다. 석유 산업의 다국적화[편집] 석유자원의 편재성과 대규모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이란 특성은 국제적인 자본의 참여를 초래할 뿐 아니라 산유국과 소비국에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제3국의 참여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주로 메이저컴퍼니간에 이루어지는 자본·기술·생산·판매 등의 합작이나 공동참여는 새로 설립되는 회사를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즉 A국과 B국의 공동출자로 C국에 석유생산부문의 회사를 설립하면서 C국의 자본을 약간 참여시킴으로써 C국 국적을 얻어 설립된 K회사는 다시 F국의 정제공장에 원유공급을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G국의 회사와 F국의 정유공장에 공동출자로 참여하는 경우, 실질적으로는 A·B·C·F·G등 5개국의 공동출자가 되며, 이들 5개국 기업은 이익처분·위험부담 등의 목적에서 서로가 공동출자국을 이용할 수 있다는 데서 다국적 기업이 출현하고 있다. 특히 석유산업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석유산업이 주요 산유국이 아닌 수개 선진국에 의하여 발전되었다는 점과 후진국가들이 특정 단일국에만 의존하는 석유산업 발족을 기피함으로써 다국적 기업의 출현을 촉진하고 있다. 공해 대책[편집] 석유 산업은 제품 생산을 위한 정제 과정에서의 매연·폐수 등 공기와 수질의 오염만이 아니라 대형 유조선에 의한 원유 수입, 연안 해운을 이용한 국내 해상수송 등에 있어서 유조선의 장기 계선으로 인한 해상 교통의 정체와 유류의 하역 작업이나 선박 사고에 의한 해수 오염(海水汚染) 등 공해성 요인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석유화학계열 산업이나 최종 제품으로서의 휘발유·디젤유 등의 에너지 및 비(非)에너지용의 소비 과정에서 많은 공해 발생 요인을 지니고 있어 이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석유산업의 원가상승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공해성 요인을 이유로 하여 석유정제 및 석유화학계열 산업이 이웃에 건설되는 것을 반대하는 국제적 경향은 석유 산업의 입지난을 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석유 산업[편집] 역사[편집] 한국 최초의 정유사업체는 1935년 6월 일본 제국이 설립한 조선석유주식회사의 원산정유공장이었다. 연간 원유처리능력 40만 톤 규모로 1944년 고산의전읿획를 수립, 추진되는 도중에 광복을 맞게 되었다. 미 군정 당시에는 군정청 석유배급 대행회사를 통해 군용석유제품이 공급되었고, 1949년 1월 대한석유저장회사가 설립되어 석유류의 저장 및 판매사업을 담당했다. 1955년 5월 한·미 석유운영협정 체결 이후 동사가 AID 원조자금으로 석유제품을 수입, 대리점을 통하여 각 시·도별로 배정·판매하였는데 이 시기가 통제배급 시기이다. 환언하면 한국은 정제된 완제품을 수입, 소비하였다는 것이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되면서 그 일환으로 정유공장 건설계획이 수립되어 한국의 석유산업은 전기를 맞게 된다. 1962년 10월 대한석유공사[4]가 설립되었고 난고 끝에 1963년 7월 걸프(Gulf)사와 합작계약(지분 25%, 1970년 50%로 확대)을 체결, 동년 12월 울산공단 내에 하루생산량 3만 5,000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이 국내 최초로 준공되어 1964년 4월 상업생산을 시작함으로써 석유제품의 국내 자립화가 시작되었다. 1966년 12월 생산시설을 분산하고 원유도입을 다원화하며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제2의 정유회사 설립이 추진되어 칼텍스(Caltex)사와 50대 50의 지분으로 민간베이스에 의한 호남정유주식회사가 설립되어 1967년 5월 여수에 정유공장을 준공하였는데,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6만 배럴 규모였다. 1968년 3월에는 유니언(Union)사와 50대 50의 지분으로 민간베이스에 의한 경인에너지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1971년 5월 인천에서 일산 원유처리능력 6만 배럴의 정유공장이 가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정유3사가 본격 가동됨으로써 석유류의 자급이 이루어졌고 정제과정에서 분류되는 중간재를 원료로 하는 석유화학공업·비료공업 등 관련사업에 대한 파급효과는 전산업부문에 걸쳐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도산업으로서의 역할은 100% 수입의존이라는 비산유국의 현실과 국제석유재벌과의 합작이라는 내부적·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규모 시설투자에 필요한 자금·기술의 부재, 그리고 원유공급원의 안정적 확보라는 한국경제의 현실 때문에 빚어진 메이저와의 합작은 철저한 불평등조약이었으며 저들이 온갖 이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원유도입에서 정제·판매에 이르기까지 메이저들은 이중적 폭리를 취하였으며 엄청난 규모의 과실송금으로 투자액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다. 더욱이 경영권까지 메이저에 귀속되어서 한 마디로 한국의 석유산업은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경영권 환수와 지분회수를 위한 각 사의 노력이 가시화 되었다. 대한석유공사는 1980년 8월 걸프사의 지분을 회수하였고, 동년 12월 (주)선경이 석유공사 주식 50%와 경영권을 인수, 민영화가 시작되었으며 1982년 7월 주식회사 유공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는데, 1995년 12월 현재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61만 배럴이다. 경인에너지는 1983년 5월 유니언사의 지분을 회수, 100% 국내 자본화하였는데 1995년 한화에너지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1995년 12월 현재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27만5천 배럴이다. 호남정유는 1974년 8월 증자를 계기로 해서 경영권 환수노력을 시작, 운영권을 회수하였고 1996년 LG정유로 상호를 변경했다. 일산 원유처리능력은 1995년 현재 38만 배럴로 증가하였다. 1964년 11월 100% 국내자본으로 설립된 극동정유는 1980년대 초까지 일산 원유 처리 능력은 1만배럴 규모였으나 시설확장으로 1995년 말 현재 11만 배럴로 증가하였다. 1993년 7월 현대정유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이들 4사 외에 1980년대 중 상업 생산을 시작한 쌍용정유가 일산 44만5천배럴 규모로, 5사를 합한 국내 정유회사의 일산 원유처리 시설능력은 1995년 말 현재 181만8천 배럴 규모로 확대되었다. 석유 자원의 개발[편집]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국제 원유 시장의 변동에 따라 경제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이에 대체 에너지개발, 소비절약, 비축분 확대 등 각종의 에너지 공급기반 강화가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적극적인 방안으로 자주적 조달기반 확보를 위한 국내외 유전개발 투자·참여가 추진되고 있다. 1979년 6월 한·일 대륙붕 공동 개발 협정의 비준으로 대륙붕 탐사가 시작되었고, 1986년 5월 한국석유개발공사법이 제정·공포되어 한국석유개발공사를 설립, 해외유전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석유 나라별 석유 국제석유자본(en:Seven Sisters (oil companies)) 참고 및 관련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석유 산업의 경영 형태"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Ordons Oil & Gas Information & News Robert Sobel The Money Manias: The Eras of Great Speculation in America, 1770-1970 (1973) reprinted (2000). Daniel Yergin,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and Power, (Simon and Schuster 1991; paperback, 1993), ISBN 0-671-79932-0. Matthew R. Simmons, Twilight in the Desert The Coming Saudi Oil Shock and the World Economy, John Wiley & Sons, 2005, ISBN 0-471-73876-X. Matthew Yeomans, Oil: Anatomy of an Industry (New Press, 2004), ISBN 1-56584-885-3. Smith, GO (1920): Where the World Gets Its Oil: National Geographic, February 1920, pp 181–202 각주[편집] ↑ 1970년대부터 원자력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급격히 부상하였으나 양자는 본질적으로 효용이 다르다. ↑ 석유는 거의 대부분이 일본·미국·유럽 등 선진 공업국가들에서 소비되고 있다. ↑ 석유는 에너지 자원으로서만 아니라 화학 공업의 원료로도 중요한 자원이다. ↑ 약칭 유공(油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석유_산업&oldid=22823922" 분류: 석유 산업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anskEnglishEsperantoEspañolEestiفارسیFrançais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ietuviųBahasa Melayuမြန်မာဘာသာ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Oʻzbekcha/ўзбекч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1일 (일) 06:3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실질적으로 주요 사업의 의결 권한이 있는 주체는? |
한중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중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중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중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그 일대에 있던 옛 군에 대해서는 한중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汉中市 Hànzhōng 약자: 陕F 한중 시의 야경 행정 단위 지급시 청사소재지 한타이 구 면적 27,246km² 인구 (2007년) 인구밀도 3,780,000 139/km² 지역전화 916 우편번호 723000 시차 UTC+8 웹사이트: www.hanzhong.gov.cn 한중(한중,중국어 간체자: 汉中, 정체자: 漢中, 병음: Hànzhōng; Wade-Giles: Hanchung)은 중국 산시 성의 서남부에 있는 지급시(地级市)이다. 면적은 27,246km이고, 인구는 약 370만 명이다. 목차 1 역사 2 지리 3 행정 구역 4 경제 5 볼거리 6 교통 7 각주 8 외부 링크 역사[원본 편집] 중국 한나라 지방의 중심지였다. 진나라의 붕괴 후 초패왕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다툴 때는 유방이 항우를 피해 험난한 지형을 가진 이곳에서 힘을 비축하였다. 3세기 삼국 시대에는 조조가 다스리던 위와 유비의 촉나라의 국경 지대였으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황충(한승)이 위나라를 치러 갈 때, 하후연(묘재)의 20만 군대과 부딪혔던 곳으로, 하후연은 결국 이곳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한중을 정벌하러 온 조조는 한중을 가리켜 계륵(鷄肋)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지리[원본 편집] 바오허 북위 33°2—33°22, 동경 106°51—107°10 사이에 위치한다. 해발고도 500~600m의 평지가 전체 면적의 34.62%를 차지하고 601~800m의 구릉이 28.1%, 701~2038m의 산지가 37.2%를 차지한다. 한중 시내는 해발고도 500m 지점에 놓여있다. 한중의 지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은 촉도난(蜀道難)이다. 북쪽으로는 친링 산맥(중국어 간체자: 秦岭, 정체자: 秦嶺) 산맥을 경계로 하며, 남쪽으로는 파산(巴山)을 경계로 한다. 물산이 풍부하며, 경치가 수려하다. "촉나라로 가는 길은 힘들어서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힘들더라!"(蜀道之難難於上靑天) 연평균 기온은 14.2~14.6 °C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00~1700mm이다. Hanzhong (1971−200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20.3 (68.5) 21.9 (71.4) 29.4 (84.9) 32.5 (90.5) 36.1 (97) 37.0 (98.6) 38.4 (101.1) 38.0 (100.4) 36.8 (98.2) 31.4 (88.5) 24.8 (76.6) 18.2 (64.8) 38.4 (101.1) 평균최고기온 °C (°F) 6.8 (44.2) 9.5 (49.1) 14.1 (57.4) 20.8 (69.4) 25.2 (77.4) 28.2 (82.8) 29.7 (85.5) 29.9 (85.8) 24.4 (75.9) 19.1 (66.4) 13.0 (55.4) 7.9 (46.2) 19.1 (66.3) 일평균기온 °C (°F) 2.4 (36.3) 4.9 (40.8) 9.2 (48.6) 15.2 (59.4) 19.6 (67.3) 23.3 (73.9) 25.2 (77.4) 25.0 (77) 20.1 (68.2) 14.8 (58.6) 8.7 (47.7) 3.6 (38.5) 14.3 (57.7) 평균최저기온 °C (°F) −0.6 (30.9) 1.5 (34.7) 5.5 (41.9) 10.8 (51.4) 15.3 (59.5) 19.3 (66.7) 21.7 (71.1) 21.3 (70.3) 17.0 (62.6) 11.9 (53.4) 5.7 (42.3) 0.6 (33.1) 10.8 (51.5) 최저기온기록 °C (°F) −10.1 (13.8) −8.4 (16.9) −4.8 (23.4) −1.1 (30) 5.7 (42.3) 10.0 (50) 15.1 (59.2) 14.1 (57.4) 7.9 (46.2) −1.3 (29.7) −3.9 (25) −10 (14) −10.1 (13.8) 평균 강수량 mm (인치) 8.7 (0.34) 10.1 (0.4) 31.6 (1.24) 57.0 (2.24) 94.0 (3.7) 97.5 (3.84) 175.2 (6.9) 125.4 (4.94) 139.5 (5.49) 73.5 (2.89) 32.0 (1.26) 8.2 (0.32) 852.7 (33.56) 평균강수일수 (≥ 0.1 mm) 5.2 5.5 9.1 10.5 11.7 12.5 13.8 11.1 13.1 12.4 8.0 5.0 117.9 평균 상대 습도 (%) 80 75 74 76 75 76 81 80 84 84 84 82 79 평균 월간 일조시간 87.7 86.1 105.6 153.7 174.3 177.2 193.5 204.2 122.0 100.9 82.5 81.5 1,569.2 가능 일조율 28 28 29 40 41 41 45 50 33 29 26 26 35 출처: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1] 행정 구역[원본 편집] 한중 시 현급 행정 구역 # 이름 간자 면적(km2) 인구(명) 시할구 1 한타이 구 汉台区 547.93 547,700 7 난정 구 南郑区 2,823.78 492,400 현 2 청구 현 城固县 2,216.08 468,200 3 양 현 洋县 3,197.53 395,700 4 포핑 현 佛坪县 1,267.21 32,900 5 시샹 현 西乡县 3,220.71 351,900 6 전바 현 镇巴县 3,413.63 240,300 8 닝창 현 宁强县 3,246.80 319,100 9 뤠양 현 略阳县 2,828.82 202,500 10 몐 현 勉县 2,382.24 410,200 11 류바 현 留坝县 1,956.66 43,900 경제[원본 편집] 지역 내 농업과 임업의 중심지이다. 한중 시의 전경 (2009) 한중은 대규모 공업 단지에서 국방 산업이 활발하며, 항공 산업은 중요한 산업과 경제 성장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샨시 비행 공업 (그룹) 유한 회사 (약칭 샨페이 그룹)은 중국 항공 공업 그룹에 속해 있으며, 국가에 의해 1969년 승인되었다. 샨시 항공기는 중국 AVIC산하 시안항공기등 9대 항공기 생산기지중하나다. 볼거리[원본 편집] 서촉의 관문 땅이기 때문에 초한지와 삼국지 관련 유적지가 많다. 전한 고조 유방이 활약을 하던 기원전 206년-기원 220년에 관련 유적지로는 고한대(古漢台)와 배장단(拜將台/拜将坛)이 있고, 3세기 촉나라 때 유적으로는 무후묘(武侯墓 제갈공명의 묘), 정군산(定軍山), 마초무덤(馬超), 명월협 고잔도(明月峽 古棧道), 무후사(武侯祠) 등이 있다. 교통[원본 편집] 한중은 촉도난(蜀道難)이라고 하여 예전부터 교통의 험지로 일컬어져 왔다. 샨시성 서안(西安)에서 접근을 하거나 쓰촨성 성도(成都)에서 접근을 하여야 했다. 시간도 4~6시간 이상 걸려서 실제로 한국인들은 좀처럼 접근을 하지 않는 지역이었으나, 2007년 9월 20일 서안과 한중 간에 서한고속도로(西漢高速公路) 개통됨으로써 2~3시간 이내로 줄어들었다. 중국 내에서도 가장 개발이 힘들었던 이곳은 2002년 착공해서 2007년 9월 30일이 되어서야 서안에서 한중까지 258km에 이르는 한중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다. 중국 내에서도 가장 난공사로 기록되며, 왕복 4차선이며, 산과 산 사이로 높은 교각을 세워 만들었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도 중국 내에서 가장 많은 총 136개의 터널을 가진 고속도로가 되었다. 공항으로는 한중 공항(IATA: HGZ, ICAO: ZLHZ)이 있다. 각주[원본 편집] ↑ “中国地面国际交换站气候标准值月值数据集(1971-2000年)”.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2013년 9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3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원본 편집] (중국어) 한중 시 정부 vdeh산시성 (섬서성)의 행정 구역 성도: 시안시 시안시 웨이양구 롄후구 신청구 베이린구 옌타구 바차오구 옌량구 린퉁구 창안구 가오링구 후이구 란톈현 저우즈현 퉁촨시 야오저우구 왕이구 인타이구 이쥔현 바오지시 진타이구 웨이빈구 천창구 치산현 펑샹현 룽현 타이바이현 린유현 푸펑현 첸양현 메이현 펑현 셴양시 친두구 웨이청구 양링구 싱핑시 빈저우시 리취안현 징양현 융서우현 싼위안현 쉰이현 창우현 첸현 우궁현 춘화현 웨이난시 린웨이구 화저우구 한청시 화인시 푸청현 퉁관현 바이수이현 청청현 허양현 푸핑현 다리현 옌안시 바오타구 안싸이구 뤄촨현 쯔창현 황링현 옌촨현 푸현 옌창현 간취안현 이촨현 즈단현 황룽현 우치현 한중시 한타이구 난정구 류바현 전바현 청구현 양현 닝창현 포핑현 몐현 시샹현 뤠양현 위린시 위양구 헝산구 선무시 칭젠현 쑤이더현 자현 푸구현 쯔저우현 징볜현 미즈현 우부현 딩볜현 안캉시 한빈구 쯔양현 란가오현 쉰양현 전핑현 핑리현 스취안현 닝산현 바이허현 한인현 상뤄시 상저우구 전안현 산양현 뤄난현 상난현 단펑현 자수이현 시안시는 부성급시이다. 전거 통제 GND: 6140483-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중시&oldid=24182890" 분류: 한중시산시성 (섬서성)의 지급시국가역사문화명성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Mìng-dĕ̤ng-ngṳ̄Cebuano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GĩkũyũMalagasy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2007년 한중에 개통된 고속도로는 무엇인가? |
한중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중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중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중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그 일대에 있던 옛 군에 대해서는 한중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汉中市 Hànzhōng 약자: 陕F 한중 시의 야경 행정 단위 지급시 청사소재지 한타이 구 면적 27,246km² 인구 (2007년) 인구밀도 3,780,000 139/km² 지역전화 916 우편번호 723000 시차 UTC+8 웹사이트: www.hanzhong.gov.cn 한중(한중,중국어 간체자: 汉中, 정체자: 漢中, 병음: Hànzhōng; Wade-Giles: Hanchung)은 중국 산시 성의 서남부에 있는 지급시(地级市)이다. 면적은 27,246km이고, 인구는 약 370만 명이다. 목차 1 역사 2 지리 3 행정 구역 4 경제 5 볼거리 6 교통 7 각주 8 외부 링크 역사[원본 편집] 중국 한나라 지방의 중심지였다. 진나라의 붕괴 후 초패왕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다툴 때는 유방이 항우를 피해 험난한 지형을 가진 이곳에서 힘을 비축하였다. 3세기 삼국 시대에는 조조가 다스리던 위와 유비의 촉나라의 국경 지대였으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황충(한승)이 위나라를 치러 갈 때, 하후연(묘재)의 20만 군대과 부딪혔던 곳으로, 하후연은 결국 이곳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한중을 정벌하러 온 조조는 한중을 가리켜 계륵(鷄肋)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지리[원본 편집] 바오허 북위 33°2—33°22, 동경 106°51—107°10 사이에 위치한다. 해발고도 500~600m의 평지가 전체 면적의 34.62%를 차지하고 601~800m의 구릉이 28.1%, 701~2038m의 산지가 37.2%를 차지한다. 한중 시내는 해발고도 500m 지점에 놓여있다. 한중의 지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은 촉도난(蜀道難)이다. 북쪽으로는 친링 산맥(중국어 간체자: 秦岭, 정체자: 秦嶺) 산맥을 경계로 하며, 남쪽으로는 파산(巴山)을 경계로 한다. 물산이 풍부하며, 경치가 수려하다. "촉나라로 가는 길은 힘들어서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힘들더라!"(蜀道之難難於上靑天) 연평균 기온은 14.2~14.6 °C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00~1700mm이다. Hanzhong (1971−200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20.3 (68.5) 21.9 (71.4) 29.4 (84.9) 32.5 (90.5) 36.1 (97) 37.0 (98.6) 38.4 (101.1) 38.0 (100.4) 36.8 (98.2) 31.4 (88.5) 24.8 (76.6) 18.2 (64.8) 38.4 (101.1) 평균최고기온 °C (°F) 6.8 (44.2) 9.5 (49.1) 14.1 (57.4) 20.8 (69.4) 25.2 (77.4) 28.2 (82.8) 29.7 (85.5) 29.9 (85.8) 24.4 (75.9) 19.1 (66.4) 13.0 (55.4) 7.9 (46.2) 19.1 (66.3) 일평균기온 °C (°F) 2.4 (36.3) 4.9 (40.8) 9.2 (48.6) 15.2 (59.4) 19.6 (67.3) 23.3 (73.9) 25.2 (77.4) 25.0 (77) 20.1 (68.2) 14.8 (58.6) 8.7 (47.7) 3.6 (38.5) 14.3 (57.7) 평균최저기온 °C (°F) −0.6 (30.9) 1.5 (34.7) 5.5 (41.9) 10.8 (51.4) 15.3 (59.5) 19.3 (66.7) 21.7 (71.1) 21.3 (70.3) 17.0 (62.6) 11.9 (53.4) 5.7 (42.3) 0.6 (33.1) 10.8 (51.5) 최저기온기록 °C (°F) −10.1 (13.8) −8.4 (16.9) −4.8 (23.4) −1.1 (30) 5.7 (42.3) 10.0 (50) 15.1 (59.2) 14.1 (57.4) 7.9 (46.2) −1.3 (29.7) −3.9 (25) −10 (14) −10.1 (13.8) 평균 강수량 mm (인치) 8.7 (0.34) 10.1 (0.4) 31.6 (1.24) 57.0 (2.24) 94.0 (3.7) 97.5 (3.84) 175.2 (6.9) 125.4 (4.94) 139.5 (5.49) 73.5 (2.89) 32.0 (1.26) 8.2 (0.32) 852.7 (33.56) 평균강수일수 (≥ 0.1 mm) 5.2 5.5 9.1 10.5 11.7 12.5 13.8 11.1 13.1 12.4 8.0 5.0 117.9 평균 상대 습도 (%) 80 75 74 76 75 76 81 80 84 84 84 82 79 평균 월간 일조시간 87.7 86.1 105.6 153.7 174.3 177.2 193.5 204.2 122.0 100.9 82.5 81.5 1,569.2 가능 일조율 28 28 29 40 41 41 45 50 33 29 26 26 35 출처: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1] 행정 구역[원본 편집] 한중 시 현급 행정 구역 # 이름 간자 면적(km2) 인구(명) 시할구 1 한타이 구 汉台区 547.93 547,700 7 난정 구 南郑区 2,823.78 492,400 현 2 청구 현 城固县 2,216.08 468,200 3 양 현 洋县 3,197.53 395,700 4 포핑 현 佛坪县 1,267.21 32,900 5 시샹 현 西乡县 3,220.71 351,900 6 전바 현 镇巴县 3,413.63 240,300 8 닝창 현 宁强县 3,246.80 319,100 9 뤠양 현 略阳县 2,828.82 202,500 10 몐 현 勉县 2,382.24 410,200 11 류바 현 留坝县 1,956.66 43,900 경제[원본 편집] 지역 내 농업과 임업의 중심지이다. 한중 시의 전경 (2009) 한중은 대규모 공업 단지에서 국방 산업이 활발하며, 항공 산업은 중요한 산업과 경제 성장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샨시 비행 공업 (그룹) 유한 회사 (약칭 샨페이 그룹)은 중국 항공 공업 그룹에 속해 있으며, 국가에 의해 1969년 승인되었다. 샨시 항공기는 중국 AVIC산하 시안항공기등 9대 항공기 생산기지중하나다. 볼거리[원본 편집] 서촉의 관문 땅이기 때문에 초한지와 삼국지 관련 유적지가 많다. 전한 고조 유방이 활약을 하던 기원전 206년-기원 220년에 관련 유적지로는 고한대(古漢台)와 배장단(拜將台/拜将坛)이 있고, 3세기 촉나라 때 유적으로는 무후묘(武侯墓 제갈공명의 묘), 정군산(定軍山), 마초무덤(馬超), 명월협 고잔도(明月峽 古棧道), 무후사(武侯祠) 등이 있다. 교통[원본 편집] 한중은 촉도난(蜀道難)이라고 하여 예전부터 교통의 험지로 일컬어져 왔다. 샨시성 서안(西安)에서 접근을 하거나 쓰촨성 성도(成都)에서 접근을 하여야 했다. 시간도 4~6시간 이상 걸려서 실제로 한국인들은 좀처럼 접근을 하지 않는 지역이었으나, 2007년 9월 20일 서안과 한중 간에 서한고속도로(西漢高速公路) 개통됨으로써 2~3시간 이내로 줄어들었다. 중국 내에서도 가장 개발이 힘들었던 이곳은 2002년 착공해서 2007년 9월 30일이 되어서야 서안에서 한중까지 258km에 이르는 한중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다. 중국 내에서도 가장 난공사로 기록되며, 왕복 4차선이며, 산과 산 사이로 높은 교각을 세워 만들었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도 중국 내에서 가장 많은 총 136개의 터널을 가진 고속도로가 되었다. 공항으로는 한중 공항(IATA: HGZ, ICAO: ZLHZ)이 있다. 각주[원본 편집] ↑ “中国地面国际交换站气候标准值月值数据集(1971-2000年)”.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2013년 9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3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원본 편집] (중국어) 한중 시 정부 vdeh산시성 (섬서성)의 행정 구역 성도: 시안시 시안시 웨이양구 롄후구 신청구 베이린구 옌타구 바차오구 옌량구 린퉁구 창안구 가오링구 후이구 란톈현 저우즈현 퉁촨시 야오저우구 왕이구 인타이구 이쥔현 바오지시 진타이구 웨이빈구 천창구 치산현 펑샹현 룽현 타이바이현 린유현 푸펑현 첸양현 메이현 펑현 셴양시 친두구 웨이청구 양링구 싱핑시 빈저우시 리취안현 징양현 융서우현 싼위안현 쉰이현 창우현 첸현 우궁현 춘화현 웨이난시 린웨이구 화저우구 한청시 화인시 푸청현 퉁관현 바이수이현 청청현 허양현 푸핑현 다리현 옌안시 바오타구 안싸이구 뤄촨현 쯔창현 황링현 옌촨현 푸현 옌창현 간취안현 이촨현 즈단현 황룽현 우치현 한중시 한타이구 난정구 류바현 전바현 청구현 양현 닝창현 포핑현 몐현 시샹현 뤠양현 위린시 위양구 헝산구 선무시 칭젠현 쑤이더현 자현 푸구현 쯔저우현 징볜현 미즈현 우부현 딩볜현 안캉시 한빈구 쯔양현 란가오현 쉰양현 전핑현 핑리현 스취안현 닝산현 바이허현 한인현 상뤄시 상저우구 전안현 산양현 뤄난현 상난현 단펑현 자수이현 시안시는 부성급시이다. 전거 통제 GND: 6140483-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중시&oldid=24182890" 분류: 한중시산시성 (섬서성)의 지급시국가역사문화명성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Mìng-dĕ̤ng-ngṳ̄Cebuano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GĩkũyũMalagasy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한중시의 현급 행정구역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
한중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중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중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중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그 일대에 있던 옛 군에 대해서는 한중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汉中市 Hànzhōng 약자: 陕F 한중 시의 야경 행정 단위 지급시 청사소재지 한타이 구 면적 27,246km² 인구 (2007년) 인구밀도 3,780,000 139/km² 지역전화 916 우편번호 723000 시차 UTC+8 웹사이트: www.hanzhong.gov.cn 한중(한중,중국어 간체자: 汉中, 정체자: 漢中, 병음: Hànzhōng; Wade-Giles: Hanchung)은 중국 산시 성의 서남부에 있는 지급시(地级市)이다. 면적은 27,246km이고, 인구는 약 370만 명이다. 목차 1 역사 2 지리 3 행정 구역 4 경제 5 볼거리 6 교통 7 각주 8 외부 링크 역사[원본 편집] 중국 한나라 지방의 중심지였다. 진나라의 붕괴 후 초패왕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다툴 때는 유방이 항우를 피해 험난한 지형을 가진 이곳에서 힘을 비축하였다. 3세기 삼국 시대에는 조조가 다스리던 위와 유비의 촉나라의 국경 지대였으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황충(한승)이 위나라를 치러 갈 때, 하후연(묘재)의 20만 군대과 부딪혔던 곳으로, 하후연은 결국 이곳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한중을 정벌하러 온 조조는 한중을 가리켜 계륵(鷄肋)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지리[원본 편집] 바오허 북위 33°2—33°22, 동경 106°51—107°10 사이에 위치한다. 해발고도 500~600m의 평지가 전체 면적의 34.62%를 차지하고 601~800m의 구릉이 28.1%, 701~2038m의 산지가 37.2%를 차지한다. 한중 시내는 해발고도 500m 지점에 놓여있다. 한중의 지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은 촉도난(蜀道難)이다. 북쪽으로는 친링 산맥(중국어 간체자: 秦岭, 정체자: 秦嶺) 산맥을 경계로 하며, 남쪽으로는 파산(巴山)을 경계로 한다. 물산이 풍부하며, 경치가 수려하다. "촉나라로 가는 길은 힘들어서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힘들더라!"(蜀道之難難於上靑天) 연평균 기온은 14.2~14.6 °C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00~1700mm이다. Hanzhong (1971−2000)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기온기록 °C (°F) 20.3 (68.5) 21.9 (71.4) 29.4 (84.9) 32.5 (90.5) 36.1 (97) 37.0 (98.6) 38.4 (101.1) 38.0 (100.4) 36.8 (98.2) 31.4 (88.5) 24.8 (76.6) 18.2 (64.8) 38.4 (101.1) 평균최고기온 °C (°F) 6.8 (44.2) 9.5 (49.1) 14.1 (57.4) 20.8 (69.4) 25.2 (77.4) 28.2 (82.8) 29.7 (85.5) 29.9 (85.8) 24.4 (75.9) 19.1 (66.4) 13.0 (55.4) 7.9 (46.2) 19.1 (66.3) 일평균기온 °C (°F) 2.4 (36.3) 4.9 (40.8) 9.2 (48.6) 15.2 (59.4) 19.6 (67.3) 23.3 (73.9) 25.2 (77.4) 25.0 (77) 20.1 (68.2) 14.8 (58.6) 8.7 (47.7) 3.6 (38.5) 14.3 (57.7) 평균최저기온 °C (°F) −0.6 (30.9) 1.5 (34.7) 5.5 (41.9) 10.8 (51.4) 15.3 (59.5) 19.3 (66.7) 21.7 (71.1) 21.3 (70.3) 17.0 (62.6) 11.9 (53.4) 5.7 (42.3) 0.6 (33.1) 10.8 (51.5) 최저기온기록 °C (°F) −10.1 (13.8) −8.4 (16.9) −4.8 (23.4) −1.1 (30) 5.7 (42.3) 10.0 (50) 15.1 (59.2) 14.1 (57.4) 7.9 (46.2) −1.3 (29.7) −3.9 (25) −10 (14) −10.1 (13.8) 평균 강수량 mm (인치) 8.7 (0.34) 10.1 (0.4) 31.6 (1.24) 57.0 (2.24) 94.0 (3.7) 97.5 (3.84) 175.2 (6.9) 125.4 (4.94) 139.5 (5.49) 73.5 (2.89) 32.0 (1.26) 8.2 (0.32) 852.7 (33.56) 평균강수일수 (≥ 0.1 mm) 5.2 5.5 9.1 10.5 11.7 12.5 13.8 11.1 13.1 12.4 8.0 5.0 117.9 평균 상대 습도 (%) 80 75 74 76 75 76 81 80 84 84 84 82 79 평균 월간 일조시간 87.7 86.1 105.6 153.7 174.3 177.2 193.5 204.2 122.0 100.9 82.5 81.5 1,569.2 가능 일조율 28 28 29 40 41 41 45 50 33 29 26 26 35 출처: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1] 행정 구역[원본 편집] 한중 시 현급 행정 구역 # 이름 간자 면적(km2) 인구(명) 시할구 1 한타이 구 汉台区 547.93 547,700 7 난정 구 南郑区 2,823.78 492,400 현 2 청구 현 城固县 2,216.08 468,200 3 양 현 洋县 3,197.53 395,700 4 포핑 현 佛坪县 1,267.21 32,900 5 시샹 현 西乡县 3,220.71 351,900 6 전바 현 镇巴县 3,413.63 240,300 8 닝창 현 宁强县 3,246.80 319,100 9 뤠양 현 略阳县 2,828.82 202,500 10 몐 현 勉县 2,382.24 410,200 11 류바 현 留坝县 1,956.66 43,900 경제[원본 편집] 지역 내 농업과 임업의 중심지이다. 한중 시의 전경 (2009) 한중은 대규모 공업 단지에서 국방 산업이 활발하며, 항공 산업은 중요한 산업과 경제 성장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샨시 비행 공업 (그룹) 유한 회사 (약칭 샨페이 그룹)은 중국 항공 공업 그룹에 속해 있으며, 국가에 의해 1969년 승인되었다. 샨시 항공기는 중국 AVIC산하 시안항공기등 9대 항공기 생산기지중하나다. 볼거리[원본 편집] 서촉의 관문 땅이기 때문에 초한지와 삼국지 관련 유적지가 많다. 전한 고조 유방이 활약을 하던 기원전 206년-기원 220년에 관련 유적지로는 고한대(古漢台)와 배장단(拜將台/拜将坛)이 있고, 3세기 촉나라 때 유적으로는 무후묘(武侯墓 제갈공명의 묘), 정군산(定軍山), 마초무덤(馬超), 명월협 고잔도(明月峽 古棧道), 무후사(武侯祠) 등이 있다. 교통[원본 편집] 한중은 촉도난(蜀道難)이라고 하여 예전부터 교통의 험지로 일컬어져 왔다. 샨시성 서안(西安)에서 접근을 하거나 쓰촨성 성도(成都)에서 접근을 하여야 했다. 시간도 4~6시간 이상 걸려서 실제로 한국인들은 좀처럼 접근을 하지 않는 지역이었으나, 2007년 9월 20일 서안과 한중 간에 서한고속도로(西漢高速公路) 개통됨으로써 2~3시간 이내로 줄어들었다. 중국 내에서도 가장 개발이 힘들었던 이곳은 2002년 착공해서 2007년 9월 30일이 되어서야 서안에서 한중까지 258km에 이르는 한중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다. 중국 내에서도 가장 난공사로 기록되며, 왕복 4차선이며, 산과 산 사이로 높은 교각을 세워 만들었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도 중국 내에서 가장 많은 총 136개의 터널을 가진 고속도로가 되었다. 공항으로는 한중 공항(IATA: HGZ, ICAO: ZLHZ)이 있다. 각주[원본 편집] ↑ “中国地面国际交换站气候标准值月值数据集(1971-2000年)”. Chin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2013년 9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3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원본 편집] (중국어) 한중 시 정부 vdeh산시성 (섬서성)의 행정 구역 성도: 시안시 시안시 웨이양구 롄후구 신청구 베이린구 옌타구 바차오구 옌량구 린퉁구 창안구 가오링구 후이구 란톈현 저우즈현 퉁촨시 야오저우구 왕이구 인타이구 이쥔현 바오지시 진타이구 웨이빈구 천창구 치산현 펑샹현 룽현 타이바이현 린유현 푸펑현 첸양현 메이현 펑현 셴양시 친두구 웨이청구 양링구 싱핑시 빈저우시 리취안현 징양현 융서우현 싼위안현 쉰이현 창우현 첸현 우궁현 춘화현 웨이난시 린웨이구 화저우구 한청시 화인시 푸청현 퉁관현 바이수이현 청청현 허양현 푸핑현 다리현 옌안시 바오타구 안싸이구 뤄촨현 쯔창현 황링현 옌촨현 푸현 옌창현 간취안현 이촨현 즈단현 황룽현 우치현 한중시 한타이구 난정구 류바현 전바현 청구현 양현 닝창현 포핑현 몐현 시샹현 뤠양현 위린시 위양구 헝산구 선무시 칭젠현 쑤이더현 자현 푸구현 쯔저우현 징볜현 미즈현 우부현 딩볜현 안캉시 한빈구 쯔양현 란가오현 쉰양현 전핑현 핑리현 스취안현 닝산현 바이허현 한인현 상뤄시 상저우구 전안현 산양현 뤄난현 상난현 단펑현 자수이현 시안시는 부성급시이다. 전거 통제 GND: 6140483-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중시&oldid=24182890" 분류: 한중시산시성 (섬서성)의 지급시국가역사문화명성숨은 분류: 중국어 정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Mìng-dĕ̤ng-ngṳ̄Cebuano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GĩkũyũMalagasy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venska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اردوTiếng ViệtWinaray中文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0일 (금) 22: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한중시의 1월 최고기온기록은 몇도인가요? |
AMD 크로스파이어X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AMD 크로스파이어X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ATI 크로스파이어X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AMD 크로스파이어X 로고 크로스파이어X(CrossFireX[1], 이전 이름: 크로스파이어, CrossFire)는 ATI 테크놀로지스의 다중 GPU 솔루션의 브랜드 이름으로 엔비디아의 스케일러블 링크 인터페이스 (SLI)와 경쟁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하나의 컴퓨터에 최대 4개의 그래픽 카드를 사용하여 그래픽 성능을 개선하고자 만든 것이다. 최근에 소비자 수준의 하드웨어용으로만 발표되었지만 이와 비슷한 기술인 AMD 멀티 렌더링(AMR)이 비행 시뮬레이터 등에 필요한 전문가용 카드에 채용되고 있다. ATI는 또 이전에 Fury MAXX라 불렸던 듀얼 레이지 128 소비자용 카드를 출시한 적이 있다. 목차 1 구성 1.1 1세대 1.2 2세대 (소프트웨어 크로스파이어) 1.3 현 세대 (크로스파이어X) 2 엔비디아 SLI과의 비교 2.1 이점 2.2 단점 3 멀티GPU 시스템의 문제점 3.1 다중 디스플레이 복제모드 문제 3.2 창모드 실행시 크로스파이어 해제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구성[편집] 1세대[편집] 크로스파이어는 2005년 9월 27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2] 시스템은 두 대의 AMD 레이디언 PCI 익스프레스 (PCIe) 그래픽 카드를 장착한 크로스파이어 호환 메인보드를 요구하였다. 레이디언 x800대, x850대, x1800대 및 x1900대는 일반 에디션과 크로스파이어 에디션으로 출시되었다. 크로스파이어 에디션은 뛰어난 기능을 하드웨어에 제공하였는데, 이 용어는 두 개의 카드의 출력을 하나로 합치는 5개의 특별한 영상 합성 칩을 가리킨다.[3] 하나를 마스터 카드로 구매하고 나머지 하나를 같은 시리즈의 일반 카드로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마스터 카드는 사유의 DVI Y 동글을 장착하였는데, 1차 DVI 포트를 두 개의 카드에 연결하고 모니터 케이블로 빼는 방식이다. 이 동글은 두 대의 카드 사이의 주된 연결의 역할을 함으로써 이들 사이에 서로 완전하지 않은 영상을 보내어 모니터에 영상을 완성시킨다. 저사양 레이디언 x1300 및 x1600 카드들은 크로스파이어 에디션이 없으나 메인보드 상의 표준 PCI 익스프레스 슬롯을 통하여 통신함으로써 소프트웨어를 통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AMD는 지금은 파이어GL 카드에 대한 크로스파이어 구성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두 대의 그래픽 카드는 모두 같은 계열의 카드를 사용하여야 했다. 2세대 (소프트웨어 크로스파이어)[편집] AMD의 크로스파이어 XPress 3200 메인보드 칩셋을 사용할 때 마스터 카드는 더 이상 모든 "크로스파이어 레디" 카드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레이디언 X1900 시리즈 제외) 크로스파이어 Xpress 3200으로 두 대의 일반 카드로 PCI-E를 사용하여 크로스파이어 구성을 할 수 있다. 이는 PCI 익스프레스를 사용하는 X1300 크로스파이어와 비슷하다.[4] 크로스파이어 마스터 카드는 매우 비쌌고 소매 시장에서 널리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시장 전략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현 세대 (크로스파이어X)[편집] 크로스파이어 사용의 예 - 두 대의 레이디언 HD 4850 카드 (레이디언 R700 GPU) 레이디언 X1950 프로(RV570 GPU)의 출시로 AMD는 완전히 크로스파이어의 연결 인프라를 개정하여 과거의 Y 동글/마스터 카드 및 슬레이브 카드 구성의 요구를 없애버렸다. AMD의 크로스파이어 커넥터는 이제 리본과 같은 커넥터로 각 그래픽 어댑터의 맨 위에 부착되어 있고 이는 엔비디아의 SLI 브리지와 비슷해 보이지만 물리/논리적인 태생은 다른 것이다.[5] 이에 따라 마스터 카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최대 성능을 위하여 요구 받지도 않는다. 두 개의 동글은 각 카드에 사용할 수 있다. 이들은 크로스파이어X의 출시로 완전한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크로스파이어X를 사용하기 위하여 레이디언 HD 2900 및 HD 3000 시리즈의 카드들은 같은 리본 커넥터를 사용하지만 HD 3800 시리즈의 카드들은 하나의 리본 커넥터만 사용한다.[6] 더 오래된 시리즈의 레이디언 카드들과 달리 다른 HD 3800 시리즈의 카드들은 개별적인 클럭 제어를 사용하여 크로스파이어로 연결할 수 있다. "스파이더"(Spider)라는 코드이름의 데스크톱 플랫폼이 2007년 11월 19일 AMD가 공개하였는데 790FX 칩셋을 통하여 크로스파이어 설정이 최대 4개의 그래픽 카드로 올라가게 되었다. 크로스파이어라는 브랜드는 "AMD 크로스파이어X"로 이름이 바뀌었다. AMD의 내부 테스팅에 따르면 이러한 설정은 컴퓨터 시스템에 엄청난 그래픽 성능을 사용하는 각 게임과 응용 프로그램에 적어도 3.2배의 성능 향상이 있다고 한다. 엔비디아 SLI과의 비교[편집] 이점[편집] AMD는 인텔에 크로스파이어 아키텍처를 개방함으로써 두 개의 16배속 PCI-E 가속 슬롯을 제공하는 크로스파이어가 특정 인텔 칩셋에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SLI는 SLI 인증을 받은 엔포스 칩셋이 장착된 메인보드를 요구한다. (엔포스 590 SLI, 엔포스 680i SLI) 스파이더 플랫폼에서 AMD 790FX 칩셋과 레이디언 HD 3800 시리즈 그래픽 카드와 함께 크로스파이어X를 이용하면 사용자는 다중 화면을 사용하고 크로스파이어 기능을 이용할 수 있지만 SLI과 크로스파이어X 이전 세대의 크로스파이어 설정은 하나의 디스플레이 출력으로 제한을 받는다.[7] SLI보다 효율이 더 좋다.[8] 단점[편집] 1세대 크로스파이어 기능 (레이디언 X800~X1900 시리즈)는 크로스파이어 모드를 동작시키려면 별도의 외부 y케이블/동글이 필요하다. 화면을 띄우기 위해선 특수 케이블을 통해 연결하여 화면을 띄울 수 있다. 멀티GPU 시스템의 문제점[편집] 다중 디스플레이 복제모드 문제[편집] 크로스파이어가 활성화 된 상태(HD 3870X2, HD 4870X2, HD5970과 같은 멀티GPU VGA포함)로 2개 이상의 디스플레이에서 복제(clone)모드로 출력할 때, 전체화면으로 게임을 실행하면 보조 디스플레이에는 검은 화면만 출력이 되고(보조 디스플레이로 신호가 출력되지 않음), 주 디스플레이에만 게임화면이 출력되는 문제점이 있다. 2007년부터 지속적으로 유저들이 개발진에 해당 문제를 보고해왔으나, 2011년 2월 현재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크로스파이어 자체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현재, 복제모드로 전체화면의 게임을 여러 디스플레이에 출력하기 위해서는, 크로스파이어 모드를 해제하거나(멀티GPU VGA는 불가), VGA의 출력포트를 하나만 사용하고 DVI 분배기와 같은 외부 장비를 연결하여 출력하는 수밖에 없다. 크로스파이어 사용시 3개 이상의 디스플레이로 동시 출력을 할 수 없다. (5000 시리즈부터 드라이버 업데이트로 크로스파이어 아이피니티를 지원하게 되었다) 창모드 실행시 크로스파이어 해제[편집] 게임용 크로스파이어X 에서는 전체화면이 아닌 창모드로 실행시 크로스파이어가 적용되지 않고 싱글 GPU의 성능으로만 동작한다. 2카드 한계를 가지는 크로스파이어 프로에서만 창모드시 크로스파이어 지원이 가능하다. 같이 보기[편집] 스케일러블 링크 인터페이스(SLI) 각주[편집] ↑ 2007년 11월 19일에 스파이더 데스크톱 플랫폼 출시 이후 이름 ↑ “ATI Launches Crossfire... Finally”. 《Slashdot》. 2005년 9월 26일. 2009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Tech Report article on CrossFire ↑ Anandtech article on the Xpress 3200 ↑ “AnandTech”. ↑ bit-tech review of the HD 3870, retrieved January 25, 2008 ↑ TechReport ↑ [1] 외부 링크[편집] AMD의 크로스파이어 공식 사이트 AMD 크로스파이어X 기술 정보 사이트 vdehAMD 그래픽스라데온 브랜드GPU 목록 (GPU 기능 틀) 및 APU 목록 (APU 기능 틀)고정 파이프라인 원더 마하 레이지 R100 R200 R300 R400 R500 All-in-Wonder 통합 셰이더테라스케일 HD 2000 HD 3000 HD 4000 HD 5000 HD 6000 통합 셰이더 & 메모리GCN HD 7000 HD 8000 Rx 200 Rx 300 400 500 베가 현행 기술 및 소프트웨어오디오/비디오 가속 통합 비디오 디코더 (UVD) 비디오 코딩 엔진 (VCE) 비디오 코어 넥스트 (VCN) 트루오디오 GPU 기술 아이피니티 프리싱크 파워튠 크로스파이어X 하이브리드 그래픽스 하이퍼메모리 HyperZ HSA 소프트웨어현재 AMD 라데온 소프트웨어 HD3D CodeXL GPU PerfStudio AMD APP SDK GPUOpen TressFX HLSL2GLSL 과거 카탈리스트 클로즈 투 메탈 CodeAnalyst 맨틀 기타 브랜드 및 제품워크스테이션 & 슈퍼컴퓨터 라데온 프로 라데온 인스팅트 파이어GL/파이어프로 파이어MV 파이어스트림 콘솔 플리퍼 (닌텐도 게임큐브) 제노스 (엑스박스 360) 할리우드 (Wii) 리버풀 (플레이스테이션 4) Durango (엑스박스 원) Neo (플레이스테이션 4) Scorpio (엑스박스 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AMD_크로스파이어X&oldid=22402602" 분류: ATI 테크놀로지스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Lietuvių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4: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스파이더 플랫폼이 공개한 기술의 의의는 무엇일까? |
AMD 크로스파이어X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AMD 크로스파이어X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ATI 크로스파이어X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AMD 크로스파이어X 로고 크로스파이어X(CrossFireX[1], 이전 이름: 크로스파이어, CrossFire)는 ATI 테크놀로지스의 다중 GPU 솔루션의 브랜드 이름으로 엔비디아의 스케일러블 링크 인터페이스 (SLI)와 경쟁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하나의 컴퓨터에 최대 4개의 그래픽 카드를 사용하여 그래픽 성능을 개선하고자 만든 것이다. 최근에 소비자 수준의 하드웨어용으로만 발표되었지만 이와 비슷한 기술인 AMD 멀티 렌더링(AMR)이 비행 시뮬레이터 등에 필요한 전문가용 카드에 채용되고 있다. ATI는 또 이전에 Fury MAXX라 불렸던 듀얼 레이지 128 소비자용 카드를 출시한 적이 있다. 목차 1 구성 1.1 1세대 1.2 2세대 (소프트웨어 크로스파이어) 1.3 현 세대 (크로스파이어X) 2 엔비디아 SLI과의 비교 2.1 이점 2.2 단점 3 멀티GPU 시스템의 문제점 3.1 다중 디스플레이 복제모드 문제 3.2 창모드 실행시 크로스파이어 해제 4 같이 보기 5 각주 6 외부 링크 구성[편집] 1세대[편집] 크로스파이어는 2005년 9월 27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2] 시스템은 두 대의 AMD 레이디언 PCI 익스프레스 (PCIe) 그래픽 카드를 장착한 크로스파이어 호환 메인보드를 요구하였다. 레이디언 x800대, x850대, x1800대 및 x1900대는 일반 에디션과 크로스파이어 에디션으로 출시되었다. 크로스파이어 에디션은 뛰어난 기능을 하드웨어에 제공하였는데, 이 용어는 두 개의 카드의 출력을 하나로 합치는 5개의 특별한 영상 합성 칩을 가리킨다.[3] 하나를 마스터 카드로 구매하고 나머지 하나를 같은 시리즈의 일반 카드로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마스터 카드는 사유의 DVI Y 동글을 장착하였는데, 1차 DVI 포트를 두 개의 카드에 연결하고 모니터 케이블로 빼는 방식이다. 이 동글은 두 대의 카드 사이의 주된 연결의 역할을 함으로써 이들 사이에 서로 완전하지 않은 영상을 보내어 모니터에 영상을 완성시킨다. 저사양 레이디언 x1300 및 x1600 카드들은 크로스파이어 에디션이 없으나 메인보드 상의 표준 PCI 익스프레스 슬롯을 통하여 통신함으로써 소프트웨어를 통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AMD는 지금은 파이어GL 카드에 대한 크로스파이어 구성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두 대의 그래픽 카드는 모두 같은 계열의 카드를 사용하여야 했다. 2세대 (소프트웨어 크로스파이어)[편집] AMD의 크로스파이어 XPress 3200 메인보드 칩셋을 사용할 때 마스터 카드는 더 이상 모든 "크로스파이어 레디" 카드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레이디언 X1900 시리즈 제외) 크로스파이어 Xpress 3200으로 두 대의 일반 카드로 PCI-E를 사용하여 크로스파이어 구성을 할 수 있다. 이는 PCI 익스프레스를 사용하는 X1300 크로스파이어와 비슷하다.[4] 크로스파이어 마스터 카드는 매우 비쌌고 소매 시장에서 널리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시장 전략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현 세대 (크로스파이어X)[편집] 크로스파이어 사용의 예 - 두 대의 레이디언 HD 4850 카드 (레이디언 R700 GPU) 레이디언 X1950 프로(RV570 GPU)의 출시로 AMD는 완전히 크로스파이어의 연결 인프라를 개정하여 과거의 Y 동글/마스터 카드 및 슬레이브 카드 구성의 요구를 없애버렸다. AMD의 크로스파이어 커넥터는 이제 리본과 같은 커넥터로 각 그래픽 어댑터의 맨 위에 부착되어 있고 이는 엔비디아의 SLI 브리지와 비슷해 보이지만 물리/논리적인 태생은 다른 것이다.[5] 이에 따라 마스터 카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최대 성능을 위하여 요구 받지도 않는다. 두 개의 동글은 각 카드에 사용할 수 있다. 이들은 크로스파이어X의 출시로 완전한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크로스파이어X를 사용하기 위하여 레이디언 HD 2900 및 HD 3000 시리즈의 카드들은 같은 리본 커넥터를 사용하지만 HD 3800 시리즈의 카드들은 하나의 리본 커넥터만 사용한다.[6] 더 오래된 시리즈의 레이디언 카드들과 달리 다른 HD 3800 시리즈의 카드들은 개별적인 클럭 제어를 사용하여 크로스파이어로 연결할 수 있다. "스파이더"(Spider)라는 코드이름의 데스크톱 플랫폼이 2007년 11월 19일 AMD가 공개하였는데 790FX 칩셋을 통하여 크로스파이어 설정이 최대 4개의 그래픽 카드로 올라가게 되었다. 크로스파이어라는 브랜드는 "AMD 크로스파이어X"로 이름이 바뀌었다. AMD의 내부 테스팅에 따르면 이러한 설정은 컴퓨터 시스템에 엄청난 그래픽 성능을 사용하는 각 게임과 응용 프로그램에 적어도 3.2배의 성능 향상이 있다고 한다. 엔비디아 SLI과의 비교[편집] 이점[편집] AMD는 인텔에 크로스파이어 아키텍처를 개방함으로써 두 개의 16배속 PCI-E 가속 슬롯을 제공하는 크로스파이어가 특정 인텔 칩셋에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SLI는 SLI 인증을 받은 엔포스 칩셋이 장착된 메인보드를 요구한다. (엔포스 590 SLI, 엔포스 680i SLI) 스파이더 플랫폼에서 AMD 790FX 칩셋과 레이디언 HD 3800 시리즈 그래픽 카드와 함께 크로스파이어X를 이용하면 사용자는 다중 화면을 사용하고 크로스파이어 기능을 이용할 수 있지만 SLI과 크로스파이어X 이전 세대의 크로스파이어 설정은 하나의 디스플레이 출력으로 제한을 받는다.[7] SLI보다 효율이 더 좋다.[8] 단점[편집] 1세대 크로스파이어 기능 (레이디언 X800~X1900 시리즈)는 크로스파이어 모드를 동작시키려면 별도의 외부 y케이블/동글이 필요하다. 화면을 띄우기 위해선 특수 케이블을 통해 연결하여 화면을 띄울 수 있다. 멀티GPU 시스템의 문제점[편집] 다중 디스플레이 복제모드 문제[편집] 크로스파이어가 활성화 된 상태(HD 3870X2, HD 4870X2, HD5970과 같은 멀티GPU VGA포함)로 2개 이상의 디스플레이에서 복제(clone)모드로 출력할 때, 전체화면으로 게임을 실행하면 보조 디스플레이에는 검은 화면만 출력이 되고(보조 디스플레이로 신호가 출력되지 않음), 주 디스플레이에만 게임화면이 출력되는 문제점이 있다. 2007년부터 지속적으로 유저들이 개발진에 해당 문제를 보고해왔으나, 2011년 2월 현재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크로스파이어 자체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현재, 복제모드로 전체화면의 게임을 여러 디스플레이에 출력하기 위해서는, 크로스파이어 모드를 해제하거나(멀티GPU VGA는 불가), VGA의 출력포트를 하나만 사용하고 DVI 분배기와 같은 외부 장비를 연결하여 출력하는 수밖에 없다. 크로스파이어 사용시 3개 이상의 디스플레이로 동시 출력을 할 수 없다. (5000 시리즈부터 드라이버 업데이트로 크로스파이어 아이피니티를 지원하게 되었다) 창모드 실행시 크로스파이어 해제[편집] 게임용 크로스파이어X 에서는 전체화면이 아닌 창모드로 실행시 크로스파이어가 적용되지 않고 싱글 GPU의 성능으로만 동작한다. 2카드 한계를 가지는 크로스파이어 프로에서만 창모드시 크로스파이어 지원이 가능하다. 같이 보기[편집] 스케일러블 링크 인터페이스(SLI) 각주[편집] ↑ 2007년 11월 19일에 스파이더 데스크톱 플랫폼 출시 이후 이름 ↑ “ATI Launches Crossfire... Finally”. 《Slashdot》. 2005년 9월 26일. 2009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Tech Report article on CrossFire ↑ Anandtech article on the Xpress 3200 ↑ “AnandTech”. ↑ bit-tech review of the HD 3870, retrieved January 25, 2008 ↑ TechReport ↑ [1] 외부 링크[편집] AMD의 크로스파이어 공식 사이트 AMD 크로스파이어X 기술 정보 사이트 vdehAMD 그래픽스라데온 브랜드GPU 목록 (GPU 기능 틀) 및 APU 목록 (APU 기능 틀)고정 파이프라인 원더 마하 레이지 R100 R200 R300 R400 R500 All-in-Wonder 통합 셰이더테라스케일 HD 2000 HD 3000 HD 4000 HD 5000 HD 6000 통합 셰이더 & 메모리GCN HD 7000 HD 8000 Rx 200 Rx 300 400 500 베가 현행 기술 및 소프트웨어오디오/비디오 가속 통합 비디오 디코더 (UVD) 비디오 코딩 엔진 (VCE) 비디오 코어 넥스트 (VCN) 트루오디오 GPU 기술 아이피니티 프리싱크 파워튠 크로스파이어X 하이브리드 그래픽스 하이퍼메모리 HyperZ HSA 소프트웨어현재 AMD 라데온 소프트웨어 HD3D CodeXL GPU PerfStudio AMD APP SDK GPUOpen TressFX HLSL2GLSL 과거 카탈리스트 클로즈 투 메탈 CodeAnalyst 맨틀 기타 브랜드 및 제품워크스테이션 & 슈퍼컴퓨터 라데온 프로 라데온 인스팅트 파이어GL/파이어프로 파이어MV 파이어스트림 콘솔 플리퍼 (닌텐도 게임큐브) 제노스 (엑스박스 360) 할리우드 (Wii) 리버풀 (플레이스테이션 4) Durango (엑스박스 원) Neo (플레이스테이션 4) Scorpio (엑스박스 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AMD_크로스파이어X&oldid=22402602" 분류: ATI 테크놀로지스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zərbaycancaБългарскиBosanski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Lietuvių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4: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크로스파이어가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사용된것은 몇년 몇월 며칠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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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의 예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大韓民國 政府- 財政)에 관한 사항을 다룬다. 목차 1 개요 1.1 2019년 재정총량 2 재정절차 2.1 편성 2.2 심사 2.3 집행 2.4 결산 3 종류 3.1 회계 3.2 기금 4 예산의 구분 5 역대 정부의 재정 6 비판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조주 9 참고문헌 개요[편집] 「국가재정법」 제1조에 의하면 재정은 국가의 예산·기금·결산·성과관리·국가채무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운용주체를 중심으로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운용수단을 중심으로 예산과 회계로, 성격을 중심으로 수입과 지출로 구분할 수 있다. 회계연도는 1월 1일에 시작하여 12월 31일에 종료한다.[내용 1][2][내용 2] 2019년 재정총량[편집] 재정총량은 일반적으로 총지출 개념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재정규모는 일반회계만을 의미하지만 특별회계의 규모도 크기 때문에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더한 값에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한 예산순계의 개념도 활용한다.[내용 3] 일반회계와 특별회계에 기금까지 더하여 내부거래를 제한 경우는 총지출이라고 한다.[내용 4]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이다. 하지만 한국은 관리재정수지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많은 선진국과 달리 연금이나 보험의 적립이 진행 중이라서 이로 인한 흑자로 인해 재정왜곡이 발생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총수입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수입 476.1조 원 447.2조 원 +28.9조 원 +6.46% 예산수입 321.4조 원 294.9조 원 +26.5조 원 +8.99% 기금수입 154.7조 원 152.2조 원 +2.5조 원 +1.64% 총지출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지출 469.6조 원 428.8조 원 +40.8조 원 +9.51% 예산 328.9조 원 295조 원 +33.9조 원 +11.49% 기금 140.7조 원 133.9조 원 +6.8조 원 +5.08% 항목별 세입·세출예산 세입예산 금액 비율 수입관 수입항 내국세 259조 655억 5000만 원 54.42% 소득세 80조 3678억 원 16.88% 법인세 79조 2501억 원 16.65% 상속세 7조 2279억 원 1.52% 부가가치세 68조 7519억 원 14.44% 개별소비세 10조 2995억 원 2.16% 주세 3조 4351억 5000만 원 0.72% 증권거래세 4조 5339억 원 0.95% 인지세 9439억 원 0.20% 기타내국세 4조 2554억 원 0.89% 관세 9조 557억 원 1.90% 교통·에너지·환경세 14조 7766억 원 3.10% 교육세 4조 8648억 원 1.02% 사회보장기여금 69조 7472억 3400만 원 14.65% 농어촌특별세 4조 1799억 원 0.88% 종합부동산세 2조 8494억 원 0.60% 기업특별회계영업수입 6조 8954억 6800만 1000원 1.45% 양곡사업수입 3902억 8000만 원 0.08% 우정사업수입 5조 7048억 8400만 원 1.20% 조달사업수입 2018억 5200만 원 0.04% 책임운영기관사업수입 5984억 5200만 원 0.13% 재산수입 28조 7596억 4700만 원 6.04% 관유물대여료 1조 224억 1500만 원 0.21% 정부출자수입 1조 6363억 5800만 원 0.34% 전대차관이자수입 2300만 원 0.00% 기타이자수입 및 재산수입 26조 1008억 5100만 원 5.48% 경상이전수입 37조 1831억 8590만 원 7.81% 연금수입 13조 4449억 1000만 원 2.82% 벌금, 몰수금 및 과태료 3조 1309억 8700만 원 0.66% 변상금 및 위약금 2549억 2700만 원 0.05% 가산금 9079억 9100만 원 0.19% 기타경상이전수입 19조 4443억 7090만 원 4.08% 재화 및 용역판매수입 9조 6428억 7900만 원 2.02% 병원수입 189억 9100만 원 0.00% 교도소수입 748억 900만 원 0.02% 입장료수입 1325억 800만 원 0.03% 면허료 및 수수료 1조 1927억 8400만 원 0.25% 입학금 및 수업료 88억 5500만 원 0.00% 항공, 항만 및 용수수입 2374억 1200만 원 0.05% 실습수입 43억 5600만 원 0.00% 잡수입 7조 9551억 6400만 원 1.67% 수입대체경비수입 3641억 2200만 원 0.08% 관유물대여료 2500만 원 0.00% 입장료수입 154억 6800만 원 0.00% 면허료 및 수수료 3013억 300만 원 0.06% 잡수입 473억 2000만 원 0.01% 관유물매각대 3조 994억 3400만 원 0.65% 고정자산매각대 1668억 9400만 원 0.04% 토지 및 무형자산매각대 1조 9651억 1900만 원 0.41% 재고자산매각대 및 유동자산 9674억 2100만 원 0.20% 융자 및 전대차관원금회수 25조 5632억 1300만 원 5.37% 융자원금회수 25조 5608억 2500만 원 5.37% 전대차관원금회수 23억 8800만 원 0.00% 차입금 및 여유자금회수 유가증권매각대 277억 6800만 원 0.01% 계 476조 569억 90만 원 100.00% 세출예산 금액 비율 분야 부분 일반·지방행정 76조 5596억 8440만 원 16.30% 입법 및 선거관리 1조 289억 350만 원 0.22% 국정운영 5861억 3200만 원 0.12% 지방행정·재정지원 53조 2630억 6300만 원 11.34% 재정·금융 18조 3262억 1890만 원 3.90% 정부자원관리 8425억 2800만 원 0.18% 일반행정 2조 5128억 3900만 원 0.54% 공공질서 및 안전 20조 1317억 4150만 원 4.29% 법원 및 헌재 2조 651억 9000만 원 0.44% 법무 및 검찰 2조 651억 9000만 원 0.86% 경찰 11조 3557억 9900만 원 2.42% 해경 1조 3844억 9650만 원 0.29% 재난관리 1조 2647억 3100만 원 0.27% 통일·외교 5조 647억 5000만 원 1.08% 통일 1조 3621억 1900만 원 0.29% 외교·통상 3조 7026억 3100만 원 0.79% 국방 45조 3436억 5900만 원 9.66% 병력운영 15조 8353억 1600만 원 3.37% 전력유지 13조 9100억 6600만 원 2.96% 방위력개선 15조 3651억 1400만 원 3.27% 병무행정 2331억 6300만 원 0.05% 교육 70조 6489억 9500만 원 15.05% 유아 및 초중등교육 59조 3831억 6500만 원 12.65% 고등교육 10조 2575억 7200만 원 2.18% 평생·직업교육 8771억 원 0.19% 교육일반 1311억 5800만 원 0.03% 문화 및 관광 7조 2495억 200만 원 1.54% 문화예술 3조 1068억 8000만 원 0.66% 관광 1조 4139억 6800만 원 0.30% 체육 1조 4646억 7400만 원 0.31% 문화재 9007억 5500만 원 0.19% 문화 및 관광일반 3632억 2500만 원 0.08% 환경 7조 3971억 8800만 원 1.58% 해양환경 2875억 2000만 원 0.06% 환경일반 4738억 7300만 원 0.10% 물환경 3조 9463억 4600만 원 0.84% 자원순환 및 환경경제 6707억 6300만 원 0.14% 기후대기 및 환경안전 1조 3807억 7600만 원 0.29% 자연환경 6379억 1000만 원 0.14% 사회복지 148조 8769억 2200만 원 31.70% 기초생활보장 12조 7046억 4100만 원 2.71% 취약계층지원 3조 4019억 2300만 원 0.72% 공적연금 50조 3116억 4600만 원 10.71% 보훈 5조 5587억 6300만 원 1.18% 주택 25조 7308억 5100만 원 5.48% 사회복지일반 1조 2958억 3300만 원 0.28% 아동·보육 8조 1296억 5100만 원 1.73% 노인 13조 9776억 3000만 원 2.98% 여성·가족·청소년 1조 474억 7500만 원 0.22% 고용 19조 4598억 2600만 원 4.14% 노동 6조 7137억 6100만 원 1.43% 고용노동일반 5449억 2200만 원 0.12% 보건 12조 1203억 2700만 원 2.58% 보건의료 2조 5929억 7900만 원 0.55% 건강보험 9조 187억 3500만 원 1.92% 식품의약안전 5086억 1300만 원 0.11% 농림수산 20조 303억 2900만 원 4.27% 농업·농촌 14조 9142억 7900만 원 3.18% 임업·산촌 2조 1742억 7900만 원 0.46% 수산·어촌 2조 2447억 5300만 원 0.48% 식품업 6970억 1800만 원 0.15% 산업·중소기업 및 에너지 18조 7641억 1800만 원 4.00% 산업금융지원 2000억 원 0.04% 무역 및 투자유치 6333억 4900만 원 0.15% 에너지 및 자원개발 3조 4194억 600만 원 0.73% 산업·중소기업일반 5720억 6701만 9000원 0.13% 산업혁신지원 3조 8048억 5100만 원 0.81% 창업 및 벤처 3조 2368억 7800만 원 0.69%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육성 6조 5330억 7100만 원 1.39% 지식재산일반 2848억 100만 원 0.06% 교통 및 물류 15조 6546억 1300만 0원 3.33% 도로 5조 8742억 2500만 원 1.25% 철도 5조 5162억 6900만 원 1.17% 해운·항만 1조 7171억 6600만 원 0.37% 항공·공항 1561억 1500만 원 0.03% 물류등기타 2조 3908억 3800만 원 0.51% 통신 7조 3319억 3100만 원 1.56% 방송통신 2962억 4700만 원 0.06% 우정 5조 7126억 5100만 원 1.22% 정보통신 1조 3230억 3300만 원 0.28% 국토 및 지역개발 4조 984억 9600만 원 0.87% 수자원 1조 7311억 4000만 원 0.37% 지역 및 도시 2조 204억 8100만 원 0.43% 산업단지 3468억 7500만 원 0.07% 과학기술 7조 3029억 2100만 원 1.56% 과학기술연구지원 3조 7659억 800만 원 0.80% 과학기술일반 4843억 3000만 원 0.10% 과학기술인력 및 문화 2229억 3400만 원 0.05% 과학기술연구개발 2조 8297억 4900만 원 0.60% 예비비 3조 원 0.64% 계 469조 5751억 7690만 원 100.00% 연도별 재원배분 구분 2019년 2018년 2017년 2016년 2015년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보건·복지·고용 161조 원 △ 11.3% 144조 7000억 원 △ 11.7% 129조 5000억 원 △ 4.9% 123조 8828억 원 △ 6.2% 115조 6824억 원 △ 8.5% 교육 70조 6000억 원[내용 5] △ 10.1% 64조 2000억 원[내용 6] △ 11.8% 57조 4000억 원[내용 7] △ 7.9% 53조 2613억 원[내용 8] △ 0.5% 52조 9187억 원[내용 9] △ 4.6% 문화·체육·관광 7조 2000억 원 △ 12.2% 6조 5000억 원 ▽ 6.3% 6조 9000억 원 △ 4.0% 6조 6780억 원 △ 7.5% 6조 1201억 원 △ 10.4% 환경 7조 4000억 원 △ 7.2% 6조 9000억 원 ▽ 0.3% 6조 9000억 원 △ 0.8% 6조 9424억 원 △ 0.4% 6조 8119억 원 △ 4.0% R&D 20조 5000억 원 △ 4.4% 19조 7000억 원 △ 1.1% 19조 5000억 원 △ 1.9% 19조 1363억 원 △ 0.2% 18조 8900억 원 △ 5.9%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8조 8000억 원 △ 15.1% 16조 3000억 원 △ 1.5% 16조 원 ▽ 1.5% 16조 3000억 원 ▽ 2.0% 16조 4216억 원 ▽ 7.0% SOC 19조 8000억 원 △ 4.0% 19조 원 ▽ 14.2% 22조 1000억 원 ▽ 6.6% 23조 7119억 원 ▽ 6.0% 24조 8069억 원 △ 3.0% 농림·수산·식품 20조 원 △ 1.5% 19조 7000억 원 △ 0.6% 19조 6000억 원 △ 1.2% 19조 4165억 원 △ 0.1% 19조 3065억 원 △ 3.0% 국방 46조 7000억 원 △ 8.2% 43조 2000억 원 △ 7.0% 40조 3000억 원 △ 4.0% 38조 8556억 원 △ 4.0% 37조 4560억 원 △ 5.2% 외교·통일 5조 1000억 원 △ 7.2% 4조 7000억 원 △ 3.5% 4조 6000억 원 ▽ 2.4% 4조 7693억 원 △ 3.9% 4조 4956억 원 △ 6.9% 공공질서·안전 20조 1000억 원 △ 5.5% 19조 1000억 원 △ 5.1% 18조 1000억 원 △ 3.7% 17조 5562억 원 △ 3.0% 16조 9431억 원 △ 7.1% 일반·지방행정 76조 6000억 원[내용 10] △ 10.9% 69조 원[내용 11] △ 8.9% 63조 3000억 원[내용 12] △ 6.4% 59조 5751억 원[내용 13] △ 4.9% 58조 264억 원[내용 14] △ 3.4% 계 469조 9000억 원 △ 9.5% 428조 8000억 원 △ 7.1% 400조 5000억 원 △ 3.7% 386조 4000억 원 △ 3.0% 375조 4000억 원 △ 5.7% 재정수지 및 국가채무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6.5조 원 18.5조 원 +11.9조 원 관리재정수지 37.6조 원 28.3조 원 -9.3조 원 -2.0% 국가채무 748.8조 원 708.2조 원 +40.6조 원 +39.4% 재정절차[편집] 편성[편집] 예산편성은 정부의 사업과 계획에 사용될 재원을 추계하고 각종 사업을 지원할 지출 규모를 확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편성은 전년도 12월까지 기획재정부가 중기사업계획 수립지침을 각 부처에 통보하면서 시작된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1월 31일까지 당해 회계연도부터 5회계연도 이상의 기간 동안의 신규사업 및 주요 계속사업에 대한 중기사업계획서를 기재부에 제출하고 예산실은 개략적인 거시예산 규모를 전망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산안편성지침을 마련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3월 31일까지 각 부처에 통보한다. 예산안편성지침은 예산안 편성의 기초가 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각 부처가 공통적으로 준수할 예산편성의 원칙과 기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거쳐 부처별로 지출한도액을 통보하게 된다. 예산안편성지침과 지출한도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실국별로 예산요구서를 작성하며 이를 기획조정실 혹은 기획관리관실에서 취합하여 부처 차원의 예산요구서를 작성하여 5월 31일까지 기재부에 제출한다. 예산실은 부처별로 제출받은 예산요구서를 취합하여 예산안편성지침에 어긋나는 예산요구를 삭감하는 등 조정을 거친 뒤 예산심의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처음부터 남겨두었던 여유재원을 바탕으로 장관 협의, 당정 협의를 거쳐 신규사업에 대한 검토를 수행하게 된다. 당정 협의를 거친 뒤에는 예산실에 의해 예산안이 완성되고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친 뒤 9월 3일까지 국회에 송부된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예산편성에서 과거에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사업정책 단위, 비목유형 및 기준단가 등 예산안편성지침을 세세한 정보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높은 구속력을 가져 사실상 기재부가 전체 예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총액배분 자율편성(top-down) 방식을 도입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은 기재부가 총지출규머와 분야별 지출한도 및 재정투자 방향과 같은 거시적 기준과 정보만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사업의 예산 배분이나 원칙은 각 부처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다. 과거의 상향식 방식은 기재부가 세부사업 하나하나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이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을 도입한 이후에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도입하여 이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하고 국무위원,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하여 정책방향과 투자계획, 총수입 및 총지출 규모와 재원배분방향 등을 토의한다. 이 회의는 4월 말에서 5월 초에 열리는데, 분야별·부처별 지출한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심사[편집] 예산심사는 행정부가 작성한 예산안을 국회가 심의하는 작업을 말한다. 심사는 정부로부터 예산안이 제출[내용 15]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출된 예산안은 본회의에 보고되고 이후 정부의 시정연설[내용 16]을 거쳐 상임위원회의 예비심사를 받게 된다. 상임위 차원의 예비심사는 보통 국정감사와 추석연휴가 지난 10월에 이루어지는데 기본적인 사항만 심사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질의가 이루어진다. 소위원회의 결정을 상임위가 승인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이관되며 여기서는 종합적인 정책질의가 이루어진다. 원칙적으로는 예결위만이 정부예산안에 대한 수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예산안 편성의 마지막 단계가 된다. 예결위에서 합의를 보게 되면 곧 본희외에 보고되고 이후 의결을 거쳐 정식으로 예산을 확정하게 된다. 「대한민국헌법」에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2월 2일)까지 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세입예산안 부수법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도 정부의 예산안이 회계연도가 새로 시작하는 날까지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하면 정부는 준예산을 짜서 최소한의 행정활동을 하게 된다. 만약 예산안이 국회 의결을 받았더라도 세입예산과 관련된 법률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지 못하면 예산대로 집행하는 것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2012년 「국회법」을 개정하여 2014년부터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정부의 예산안과 세입예산 부수법안임을 표시한 법안[내용 17]을 11월 30일까지 심사를 마치도록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12월 1일 자동적으로 본회의에 부의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집행[편집]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출하는 작업을 집행이라 한다. 집행은 세금이나 기금에 납입된 현금, 금융자산과 같은 국고금의 징수와 수납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납된 재원은 각 부처가 작성한 예산배정요구서에 따라 기재부가 할당[내용 18]되고 각 부처는 세출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출원인행위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집행이다. 세출예산은 예산에서 규정된 목적 외의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효율성과 신축성을 제고하기 위해 예외를 인정된다. 전용(轉用)은 기재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세항 또는 목의 금액의 금액을 상호 융통하는 제도이며, 이용(移用)은 법률상 지출의무의 이행에 필요한 필수적 경비의 부족액이 발생하거나 재해대책 재원 등으로 사용할 시급한 필요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장·관·항 간에 상호 융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법령의 제정 및 개정, 폐지로 중앙행정기관의 직무와 권한에 변동이 있을 때에는 사업의 이관에 따라 예산을 이체(移替)할 수 있으며, 세목 간 상호 융통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조정을 할 수 있다.[내용 19] 결산[편집] 한 회계연도 내에서 세입예산의 모든 수입과 세출예산의 모든 지출을 계수로 표시하는 작업을 결산이라 한다. 이때, 회계연도는 12월 31일에 끝나지만 세입과 세출의 출납에 관한 사무는 다음 연도 2월 10일까지 완결한다. 각 부처는 회계와 기금을 통합한 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2월 마지막 날까지 기재부에 제출하고 기재부는 이를 취합한 국가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10일까지 감사원에 제출한다. 이후 감사원은 세입세출 결산·재무제표 검사·성과보고서 검사를 거친 뒤 5월 20일까지 기재부에 송부하고 기재부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5월 31일까지 국회에 보고한 뒤 국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국회의 의결 과정은 예산안 처리 과정과 비슷하다. 성인지 결산서 정부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예산의 수혜를 받고 예산이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집행되었는지를 평가하는 보고서이다. 집행실적, 성평등 효과분석 및 평가 등을 포함한다. 종류[편집] 회계[편집] 회계는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로 구분한다.[3] 일반회계 조세수입 등을 주요 세입으로 하여 국가의 일반적인 세출에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회계다.[4] 행정부 뿐 아니라 입법부 및 사법부 등 특정 세입이 없는 기관들의 예산은 모두 일반회계에 포함된다. 특별회계 국가에서 특정한 사업을 운영하고자 할 때, 특정한 자금을 보유하여 운용하고자 할 때, 특정한 세입으로 특정한 세출에 충당함으로써 일반회계와 구분하여 회계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로써 설치하는 회계다.[5] 기업형태로 운영되는 정부사업 관련 기업특별회계[내용 20]와 개별 법률에 근거하여 설치된 기타특별회계로 구분된다. 이름 소관부처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교도작업특별회계 법무부 「교도작업의 운영 및 특별회계에 관한 법률」 제8조제1항 1268억 1700만 원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기획재정부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제30조 10조 7485억 3100만 원 우편사업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1호 4조 9197억 5400만 원 우체국예금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2호 3조 928억 7700만 원 양곡관리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3호 2조 748억 3400만 원 조달특별회계 조달청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4호 3942억 1000만 원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법」 11조 9029억 6500만 원 등기특별회계 대법원 「등기특별회계법」 3146억 7400만 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 특별회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44조제1항 2997억 3700만 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특별회계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제42조제1항 804억 7600만 원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 6조 205억 5900만 원 우체국보험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체국보험특별회계법」 9887억 4400만 원 주한미군기지이전특별회계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9조제1항 4933억 1800만 원 책임운영기관특별회계 행정안전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조 855억 6300만 원 환경개선특별회계 환경부 「환경정책기본법」 제45조제1항 4조 7670억 6500만 원 국방·군사시설이전특별회계 국방부 「국방·군사시설이전 특별회계법」 7921억 4100만 원 혁신도시건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33조제1항 2646억 3200만 원 교통시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교통시설특별회계법」 15조 7898억 4800만 원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 교육부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법」 3조 8153억 3800만 원 기금[편집]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하여 설치하는 자금으로 정부출연금이나 일반회계로부터의 전입금을 수입원으로 한다.[6] 특정한 재정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관리·운영하는 사업성기금, 연금지출과 보험지출에 대비하여 기여금과 보험료 등의 작므을 운용하는 사회보험성기금, 특정사업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증·보험 등을 제공하여 금융활동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금융성기금, 특정 자금을 모아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주체에게 전달하는 계정성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름 유형 소관부처 관리주체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고용보험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고용보험법」 제78조제1항 17조 659억 900만 원 공공자금관리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2조 175조 1957억 9400만 원 공무원연금기금 보험성 인사혁신처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법」 제73조제1항 21조 2478억 2300만 원 공적자금상환기금 계정성 금융위원회 「공적자금상환기금법」 제3조제1항 8조 7228억 4600만 원 과학기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기본법」 제22조제1항 1651억 6000만 원 관광진흥개발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관광진흥개발기금법」 제2조제1항 1조 2370억 1100만 원 국민건강증진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증진법」 제22조제1항 4조 2307억 5200만 원 국민연금기금 보험성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법」 제101조제1항 119조 1652억 1900만 원 국민체육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육진흥공단 「국민체육진흥법」 제19조제1항 2조 3492억 9400만 원 군인복지기금 사업성 국방부 「군인복지기금법」 제3조 8563억 7200만 원 군인연금기금 보험성 국방부 「군인연금법」 제37조제1항 3조 4267억 2800만 원 근로복지진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기본법」 제87조 3593억 4900만 원 금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금강수계위원회 「금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1318억 100만 원 기술보증기금 금융성 중소벤처기업부 기술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법」 제12조제1항 2조 5923억 8100만 원 낙동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낙동강수계위원회 「낙동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3조 2525억 1000만 원 남북협력기금 사업성 통일부 「남북협력기금법」 제3조 1조 4902억 9800만 원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협중앙회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법」 제4조제1항 1조 7218억 8600만 원 농산물가격안정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제54조 2조 4025억 2400만 원 농어가목돈마련저축장려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어가목돈마련저축에 관한 법률」 제7조제1항 720억 5600만 원 농어업재해보험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업재해보험법」 제21조 4094억 8900만 원 대외경제협력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기금법」 제3조 1조 3673억 8300만 원 문화예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법」 제16조제1항 4685억 3300만 원 방송통신발전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제24조 1조 2579억 500만 원 보훈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보훈기금법」 제3조제1항 8039억 5000만 원 복권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복권 및 복권기금법」 제21조제1항 5조 6373억 2800만 원 사립학교교직원 연금기금 보험성 교육부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53조의2제1항 12조 1104억 3200만 원 산업기반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기획재정부 신용보증기금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제30조제1항 5813억 6900만 원 산업재해보상보험및예방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5조제1항 15조 1137억 7000만 원 무역보험기금 금융성 산업통상자원부 한국무역보험공사 「무역보험법」 제30조 3조 9799억 4700만 원 언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4조제1항 269억 7800만 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신용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법」 6조 9969억 7500만 원 농업소득보전직접지불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업소득의 보전에 관한 법률」 제19조 2760억 3900만 원 양곡증권정리기금 계정성 농림축산식품부 「양곡관리법」 제25조제1항 4300억 1100만 원 수산발전기금 사업성 해양수산부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제46조 7524억 8100만 원 양성평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기본법」 제42조제1항 3911억 9500만 원 영산강·섬진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영산강·섬진강수계위원회 「영산강·섬진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913억 8100만 원 예금보험기금채권상환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예금보험공사 「예금자보호법」 제26조의3제1항 3조 6451억 2200만 원 산업기술진흥및사업화촉진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혁신 촉진법」 제37조의2 1504억 7200만 원 외국환평형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외국환거래법」 제13조제1항 99조 2428억 원 원자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자력 진흥법」 제17조제1항 4274억 2600만 원 응급의료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19조제1항 3665억 3500만 원 임금채권보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임금채권보장법」 제17조 8769억 원 자유무역협정 이행지원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3조제1항 7117억 4400만 원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 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68조 1조 757억 400만 원 전력산업기반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사업법」 제48조 3조 8168억 700만 원 정보통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산업 진흥법」 제41조 1조 3066억 1400만 원 주택도시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주택도시기금법」 제3조 77조 3937억 6200만 원 중소기업창업 및 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진흥공단 「중소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63조 7조 9623억 4300만 원 지역신문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지역신문발전지원 특별법」 제13조제1항 86억 4900만 원 청소년육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청소년 기본법」 제53조제1항 1576억 700만 원 축산발전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축산법」 제43조제1항 1조 170억 7800만 원 한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한강수계위원회 「한강수계 상수원수질개선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20조 5571억 2300만 원 국제교류기금 사업성 외교부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교류재단법」 제13조제1항 1762억 7200만 원 농지관리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제31조 3조 1374억 9600만 원 사학진흥기금 사업성 교육부 한국사학진흥재단 「한국사학진흥재단법」 제17조 5293억 5200만 원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법」 제55조 6조 6483억 800만 원 영화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3조제1항 2649억 5000만 원 순국선열·애국지사사업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550억 1400만 원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28조 5조 973억 200만 원 문화재보호기금 사업성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법」 제3조 1307억 7000만 원 석면피해구제기금 사업성 환경부 「석면피해구제법」 제24조제1항 331억 원 범죄피해자보호기금 사업성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 제3조 1011억 200만 원 국유재산관리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국유재산법」 제26조의2 1조 5110억 8300만 원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 2조 9019억 4200만 원 사법서비스진흥기금 사업성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탁법」 제28조 745억 6700만 원 자동차사고 피해지원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제39조의11 2335억 2900만 원 국제질병퇴치기금 사업성 외교부 「국제질병퇴치기금법」 제3조제1항 858억 7200만 원 예산의 구분[편집] 본예산 행정부가 편성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을 말한다. 수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이 국회에서 의결되기 전에 예산안의 일부를 수정하여 제출한 예산이다.[내용 22] 추가경정예산에 대해서도 수정예산 제출이 가능하다. 1970년과 1981년, 2009년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내용 23] 추가경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하고 국회를 통과한 예을 추가·변경하는 예산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경기침체 등의 이유로 편성되는데 본예산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의결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주로 임시국회에서 심의되기 때문에 심도 있는 심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준예산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국회에서 예산이 성립되지 못할 경우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도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서 설치된 기관 또는 시설의 유지·운영, 법률상의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이라는 경우에만 집행이 가능하도록 「대한민국헌법」 제54조제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회의 동의 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집행이 가능하다. 후에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면 준예산으로 지출한 부분은 본예산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간주한다. 새 회계연도가 개시되어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가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 가예산은 첫 1개월 동안 집행할 예산만 우선적으로 국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제도인데, 한국은 1960년까지 사용하고 이후 준예산 제도로 변경되었다. 가예산은 실제로 편성한 예가 있지만 준예산은 실제로 집행한 적은 없다. 역대 정부의 재정[편집] 다음은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정부의 예산액과 부채액을 표시한 것이다.[내용 24] 구분 회계연도 예산 결산 부채 예산액 통과일 결산액 통과일 제1공화국 1949년 2119억 원 1949년 5월 3일[7] - - - 1950년 1055억 8518만 5700원 1950년 4월 22일[8] - - - 1951년 7357억 원 1951년 4월 30일[9] - - - 1952년 9819억 3365만 6400원 1952년 4월 18일[10] - - - 1953년 284억 2318만 6389환 1953년 4월 30일[11] - - - 1954년 1088억 환 1954년 3월 31일[12] - - - 1955년 1679억 8700만 환 1955년 7월 31일[13] - - - 1957년 2185억 환 1956년 12월 31일[14] - - - 1958년 3360억 환 1957년 12월 31일[15] - - - 1959년 3900억 환 1958년 12월 24일[16] - - - 제2공화국 1960년 4237억 6950만 1100환 1959년 12월 31일[17] - - - 1961년 5050억 4000만 환 민의원: 1960년 12월 8일[18] 참의원: 1960년 12월 28일[19] - - - 1962년 6891억 환 1961년 12월 31일[내용 25][20] - - - 1963년 768억 6600만 원 1962년 11월 14일[내용 25][21] - - - 제3공화국 1964년 698억 5335만 400원 1963년 12월 10일[내용 25][22] - - - 1965년 848억 5379만 5700원 1964년 12월 1일[23] - - - 1966년 1219억 7268만 9500원 1965년 12월 4일[24] - - - 1967년 1643억 4694만 400원 1966년 12월 8일[25] - - - 1968년 2214억 8228만 6800원 1967년 12월 29일[26] - - - 1969년 3243억 5203만 5500원 1968년 12월 2일[27] - - - 1970년 4327억 2200만 원 1969년 12월 22일[28] - - - 1971년 5242억 원 1970년 12월 19일[29] - - - 1972년 6472억 원 1971년 12월 2일[30] - - - 제4공화국 1973년 6593억 원 1972년 12월 2일[31] - - - 1974년 8477억 원 1973년 12월 2일[32] - - - 1975년 1조 2920억 원 1974년 12월 2일[33] - - - 1976년 2조 61억 7800만 원 1975년 12월 2일[34] - - - 1977년 2조 6593억 9700만 원 1976년 12월 2일[35] - - - 1978년 3조 5170억 원 1977년 12월 2일[36] - - - 1979년 4조 5338억 3600만 원 1978년 11월 14일[37] - - - 1980년 5조 8040억 6100만 원 1979년 12월 1일[38] - - - 제5공화국 1981년 7조 8511억 원 1980년 11월 29일[내용 26][39] - - - 1982년 9조 5781억 원 1981년 12월 2일[40] - - - 1983년 10조 4167억 원 1982년 12월 2일[41] - - - 1984년 10조 3862억 8900만 원 1983년 12월 2일[42] - - - 1985년 12조 2751억 1500만 원 1984년 12월 1일[43] - - - 1986년 13조 8500억 원 1985년 12월 2일[44] - - - 1987년 15조 5596억 2900만 원 1986년 12월 2일[45] - - - 노태우 정부 1988년 17조 4644억 2900만 원 1987년 10월 30일[46] - - 18조 9000억 원 1989년 19조 2284억 원 1988년 12월 2일[47] - - 21조 1000억 원 1990년 22조 6894억 원 1989년 12월 19일[48] - - 24조 5000억 원 1991년 26조 9798억 원 1990년 12월 18일[49] - - 27조 7000억 원 1992년 33조 2000억 원 1991년 12월 3일[50] - - 31조 원 김영삼 정부 1993년 38조 500억 원 1992년 11월 18일[51] - - 32조 8000억 원 1994년 43조 2500억 원 1993년 12월 7일[52] - - 34조 4000억 원 1995년 54조 8243억 원 1994년 12월 1일[53] - - 35조 6000억 원 1996년 62조 9626억 원 1995년 12월 2일[54] - - 45조 6000억 원 1997년 71조 4600억 원 1996년 12월 12일[55] - - 60조 3000억 원 김대중 정부 1998년 70조 2636억 원 1997년 11월 18일[56] - - 80조 4000억 원 1999년 84조 9376억 원 1998년 12월 9일[57] - - 98조 6000억 원 2000년 92조 6576억 원 1999년 12월 18일[58] - - 111조 2000억 원 2001년 100조 2246억 원 2000년 12월 26일[59] - - 121조 8000억 원 2002년 111조 9767억 원 2001년 12월 27일[60] - - 133조 8000억 원 노무현 정부 2003년 111조 7000억 원 2002년 11월 8일[61] - - 165조 8000억 원 2004년 118조 3000억 원 2003년 12월 30일[62] - - 203조 7000억 원 2005년 134조 3704억 원 2004년 12월 31일[63] - - 247조 9000억 원[64] 2006년 144조 8076억 원 2005년 12월 30일[65] - - 282조 7000억 원[64] 2007년 237조 140억 6812만 4000원 2006년 12월 27일[66] 196조 9046억 6666만 280원 2008년 11월 24일[67] 299조 2000억 원[64] 이명박 정부 2008년 257조 1656억 9077만 1000원 2007년 12월 28일[68] 222조 8935억 2299만 6690원 2009년 9월 29일[69] 309조 원[64] 2009년 284조 5339억 568만 1000원 2008년 12월 13일[70] 252조 1824억 4817만 4550원 2010년 10월 1일[71] 359조 6000억 원[64] 2010년 292조 8158억 6074만 1000원 2009년 12월 31일[72] 248조 6533억 5034만 5540원 2011년 8월 31일[73] 392조 2000억 원[64] 2011년 309조 566억 9289만 6000원 2010년 12월 8일[74] 258조 9457억 3869만 9850원 2012년 9월 3일[75] 420조 5000억 원[64] 2012년 325조 4076억 3178만 7000원 2011년 12월 31일[76] 274조 7611억 4728만 9670원 2013년 11월 28일[77] 443조 1000억 원[64] 박근혜 정부 2013년 341조 9677억 2593만 6000원 2013년 1월 1일[78] 286조 4050억 6544만 1620원 2014년 10월 2일[79] 489조 8000억 원[64] 2014년 355조 8051억 1905만 8000원 2014년 1월 1일[80] 291조 5113억 3122만 8140원 2015년 9월 8일[81] 533조 2000억 원[64] 2015년 375조 4032억 7755만 4000원 2014년 12월 2일[82] 319조 3906억 7642만 5020원 2016년 9월 2일[83] 591조 5000억 원[64] 2016년 386조 3995억 9937만 4000원 2015년 12월 3일[84] 332조 2108억 2030만 1720원 2017년 12월 5일[85] 626조 9000억 원[64] 문재인 정부 2017년 400조 5459억 4617만 2000원 2016년 12월 3일[86] 342조 8788억 4090만 510원 2018년 12월 7일[87] 660조 2000억 원[64] 2018년 428조 8339억 1256만 7000원 2017년 12월 6일[88] 708조 2000억 원[64] 2019년 469조 5751억 7690만 원 2018년 12월 8일[89] 741조 원[64] 비판[편집] 예결위는 예산과 결산을 동시에 맡는데 이 경우 예산안에만 관심을 보이며, 결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졸속 결산이라는 비판이 있다.[90] 또한 특별위원회로 설치되어 있다보니, 1년마다 위원들이 바뀌어 전문성이 떨어지고 졸속심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91]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의 대치로 인해 헌법에 규정한 법정 처리기한을 넘겨서 통과시키고 있다.[92][93] 같이 보기[편집]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의 조세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다만, 교육기관의 회계연도는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다음 해 2월 말일에 종료한다.[1] ↑ 정부 수립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회계연도가 4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이후 「재정법」의 개정으로 인해 1954회계연도는 1954년 4월 1일부터 1955년 6월 30일까지, 1955회계연도는 1955년 7월 1일부터 1956년 6월 30일까지, 1956회계연도는 1956년 7월 1일부터 1957년 12월 31일까지였으며, 1958년부터 지금처럼 회계연도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정해졌다. ↑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예산총계가 되는데, 이는 이중계산의 문제를 안고 있다. ↑ 내부거래 뿐 아니라 보전지출도 제하는데 보전지출이란 국채의 발행 또는 상환, 차입 또는 차입금의 상환 등 재정수지를 보전해 주는 것을 뜻한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55조 2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9조 6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2조 9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1조 3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39조 4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52조 5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6조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0조 7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6조 1694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4조 8881억 원이다. ↑ 세입세출예산안 총계표 및 순계표, 세입세출예산사업별 설명서, 계속비 명세서, 국고채무부담행위 설명서, 예산정원표와 예산안 편성기준 단가, 성과계획서, 국가재정운용계획 등 여러 부차적인 첨부서류도 함께 제출된다. 예산안과 첨부서류는 그 양이 막대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분석과 검토는 국회예산정책처와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실에서 실시된 뒤, 국회의원들에게 보고된다. ↑ 대통령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관행적으로 국무총리의 대독이 이루어진다. ↑ 세수의 증감을 초래하는지, 세입예산안에 반영이 되어 있는지 등을 살펴서 국회예산정책처의 의견을 참고해 국회의장이 지정한다. ↑ 이를 할당이라 하는데, 중앙행정기관이 다시 소속기관에 할당하는 것을 재배정이라 한다. 배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가 제출하고 기재부가 종합한 월별 자금계획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와 대통령의 승인을 거친 뒤 이루어진다. ↑ 전용, 이용, 이체는 「국가재정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조정은 예산집행지침에만 나와 있다. ↑ 「정부기업예산법」에 따른 네 개의 특별회계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한 개의 특별회계가 있다. ↑ 가 나 총계 기준 ↑ 국회 의결 전에 제출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는 예산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수정한 것이 된다. ↑ 1980년에는 추가경정예산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 ↑ 2006년까지는 일반회계만을 표시하였으며, 2007년부터는 특별회계와 기금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 가 나 다 국회가 아니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 국회가 아니라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참조주[편집] ↑ 「유아교육법」 제19조의8제1항, 「초·중등교육법」 제30조의3제1항,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 제11조제5항,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9조제2항,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8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2조 및 「국가회계법」 제5조 ↑ 「국가재정법」 제4조제1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3항 ↑ 「국가재정법」 제5조제1항 ↑ “今年度政府豫算遂通過”. 《경향신문》. 1949년 5월 3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總豫算案通過를보고”. 《경향신문》. 1950년 4월 25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今年度總豫算遂通過 財經委削減額中五億圓復活”. 《동아일보》. 1951년 5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国会 豫算案完全通過”. 《경향신문》. 1953년 4월 20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民議院 赤字外援獲得前提 86年度豫算案昨日通過”. 《동아일보》. 1953년 5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八七年度豫算案通過”. 《동아일보》. 1954년 4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31日밤 總豫算案通過”. 《경향신문》. 1955년 8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90年度豫算遂成立”. 《동아일보》. 1957년 1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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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0087919. 하연섭 (2016년 1월 25일). 《정부예산과 재무행정》. 다산출판사. 58 ~ 198쪽. ISBN 978897110454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_정부의_재정&oldid=23408332" 분류: 대한민국 정부재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일 (목) 15: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한민국에서 맨 처음으로 수정예산을 짠 해는 몇 년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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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의 예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大韓民國 政府- 財政)에 관한 사항을 다룬다. 목차 1 개요 1.1 2019년 재정총량 2 재정절차 2.1 편성 2.2 심사 2.3 집행 2.4 결산 3 종류 3.1 회계 3.2 기금 4 예산의 구분 5 역대 정부의 재정 6 비판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조주 9 참고문헌 개요[편집] 「국가재정법」 제1조에 의하면 재정은 국가의 예산·기금·결산·성과관리·국가채무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운용주체를 중심으로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운용수단을 중심으로 예산과 회계로, 성격을 중심으로 수입과 지출로 구분할 수 있다. 회계연도는 1월 1일에 시작하여 12월 31일에 종료한다.[내용 1][2][내용 2] 2019년 재정총량[편집] 재정총량은 일반적으로 총지출 개념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재정규모는 일반회계만을 의미하지만 특별회계의 규모도 크기 때문에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더한 값에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한 예산순계의 개념도 활용한다.[내용 3] 일반회계와 특별회계에 기금까지 더하여 내부거래를 제한 경우는 총지출이라고 한다.[내용 4]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이다. 하지만 한국은 관리재정수지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많은 선진국과 달리 연금이나 보험의 적립이 진행 중이라서 이로 인한 흑자로 인해 재정왜곡이 발생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총수입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수입 476.1조 원 447.2조 원 +28.9조 원 +6.46% 예산수입 321.4조 원 294.9조 원 +26.5조 원 +8.99% 기금수입 154.7조 원 152.2조 원 +2.5조 원 +1.64% 총지출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지출 469.6조 원 428.8조 원 +40.8조 원 +9.51% 예산 328.9조 원 295조 원 +33.9조 원 +11.49% 기금 140.7조 원 133.9조 원 +6.8조 원 +5.08% 항목별 세입·세출예산 세입예산 금액 비율 수입관 수입항 내국세 259조 655억 5000만 원 54.42% 소득세 80조 3678억 원 16.88% 법인세 79조 2501억 원 16.65% 상속세 7조 2279억 원 1.52% 부가가치세 68조 7519억 원 14.44% 개별소비세 10조 2995억 원 2.16% 주세 3조 4351억 5000만 원 0.72% 증권거래세 4조 5339억 원 0.95% 인지세 9439억 원 0.20% 기타내국세 4조 2554억 원 0.89% 관세 9조 557억 원 1.90% 교통·에너지·환경세 14조 7766억 원 3.10% 교육세 4조 8648억 원 1.02% 사회보장기여금 69조 7472억 3400만 원 14.65% 농어촌특별세 4조 1799억 원 0.88% 종합부동산세 2조 8494억 원 0.60% 기업특별회계영업수입 6조 8954억 6800만 1000원 1.45% 양곡사업수입 3902억 8000만 원 0.08% 우정사업수입 5조 7048억 8400만 원 1.20% 조달사업수입 2018억 5200만 원 0.04% 책임운영기관사업수입 5984억 5200만 원 0.13% 재산수입 28조 7596억 4700만 원 6.04% 관유물대여료 1조 224억 1500만 원 0.21% 정부출자수입 1조 6363억 5800만 원 0.34% 전대차관이자수입 2300만 원 0.00% 기타이자수입 및 재산수입 26조 1008억 5100만 원 5.48% 경상이전수입 37조 1831억 8590만 원 7.81% 연금수입 13조 4449억 1000만 원 2.82% 벌금, 몰수금 및 과태료 3조 1309억 8700만 원 0.66% 변상금 및 위약금 2549억 2700만 원 0.05% 가산금 9079억 9100만 원 0.19% 기타경상이전수입 19조 4443억 7090만 원 4.08% 재화 및 용역판매수입 9조 6428억 7900만 원 2.02% 병원수입 189억 9100만 원 0.00% 교도소수입 748억 900만 원 0.02% 입장료수입 1325억 800만 원 0.03% 면허료 및 수수료 1조 1927억 8400만 원 0.25% 입학금 및 수업료 88억 5500만 원 0.00% 항공, 항만 및 용수수입 2374억 1200만 원 0.05% 실습수입 43억 5600만 원 0.00% 잡수입 7조 9551억 6400만 원 1.67% 수입대체경비수입 3641억 2200만 원 0.08% 관유물대여료 2500만 원 0.00% 입장료수입 154억 6800만 원 0.00% 면허료 및 수수료 3013억 300만 원 0.06% 잡수입 473억 2000만 원 0.01% 관유물매각대 3조 994억 3400만 원 0.65% 고정자산매각대 1668억 9400만 원 0.04% 토지 및 무형자산매각대 1조 9651억 1900만 원 0.41% 재고자산매각대 및 유동자산 9674억 2100만 원 0.20% 융자 및 전대차관원금회수 25조 5632억 1300만 원 5.37% 융자원금회수 25조 5608억 2500만 원 5.37% 전대차관원금회수 23억 8800만 원 0.00% 차입금 및 여유자금회수 유가증권매각대 277억 6800만 원 0.01% 계 476조 569억 90만 원 100.00% 세출예산 금액 비율 분야 부분 일반·지방행정 76조 5596억 8440만 원 16.30% 입법 및 선거관리 1조 289억 350만 원 0.22% 국정운영 5861억 3200만 원 0.12% 지방행정·재정지원 53조 2630억 6300만 원 11.34% 재정·금융 18조 3262억 1890만 원 3.90% 정부자원관리 8425억 2800만 원 0.18% 일반행정 2조 5128억 3900만 원 0.54% 공공질서 및 안전 20조 1317억 4150만 원 4.29% 법원 및 헌재 2조 651억 9000만 원 0.44% 법무 및 검찰 2조 651억 9000만 원 0.86% 경찰 11조 3557억 9900만 원 2.42% 해경 1조 3844억 9650만 원 0.29% 재난관리 1조 2647억 3100만 원 0.27% 통일·외교 5조 647억 5000만 원 1.08% 통일 1조 3621억 1900만 원 0.29% 외교·통상 3조 7026억 3100만 원 0.79% 국방 45조 3436억 5900만 원 9.66% 병력운영 15조 8353억 1600만 원 3.37% 전력유지 13조 9100억 6600만 원 2.96% 방위력개선 15조 3651억 1400만 원 3.27% 병무행정 2331억 6300만 원 0.05% 교육 70조 6489억 9500만 원 15.05% 유아 및 초중등교육 59조 3831억 6500만 원 12.65% 고등교육 10조 2575억 7200만 원 2.18% 평생·직업교육 8771억 원 0.19% 교육일반 1311억 5800만 원 0.03% 문화 및 관광 7조 2495억 200만 원 1.54% 문화예술 3조 1068억 8000만 원 0.66% 관광 1조 4139억 6800만 원 0.30% 체육 1조 4646억 7400만 원 0.31% 문화재 9007억 5500만 원 0.19% 문화 및 관광일반 3632억 2500만 원 0.08% 환경 7조 3971억 8800만 원 1.58% 해양환경 2875억 2000만 원 0.06% 환경일반 4738억 7300만 원 0.10% 물환경 3조 9463억 4600만 원 0.84% 자원순환 및 환경경제 6707억 6300만 원 0.14% 기후대기 및 환경안전 1조 3807억 7600만 원 0.29% 자연환경 6379억 1000만 원 0.14% 사회복지 148조 8769억 2200만 원 31.70% 기초생활보장 12조 7046억 4100만 원 2.71% 취약계층지원 3조 4019억 2300만 원 0.72% 공적연금 50조 3116억 4600만 원 10.71% 보훈 5조 5587억 6300만 원 1.18% 주택 25조 7308억 5100만 원 5.48% 사회복지일반 1조 2958억 3300만 원 0.28% 아동·보육 8조 1296억 5100만 원 1.73% 노인 13조 9776억 3000만 원 2.98% 여성·가족·청소년 1조 474억 7500만 원 0.22% 고용 19조 4598억 2600만 원 4.14% 노동 6조 7137억 6100만 원 1.43% 고용노동일반 5449억 2200만 원 0.12% 보건 12조 1203억 2700만 원 2.58% 보건의료 2조 5929억 7900만 원 0.55% 건강보험 9조 187억 3500만 원 1.92% 식품의약안전 5086억 1300만 원 0.11% 농림수산 20조 303억 2900만 원 4.27% 농업·농촌 14조 9142억 7900만 원 3.18% 임업·산촌 2조 1742억 7900만 원 0.46% 수산·어촌 2조 2447억 5300만 원 0.48% 식품업 6970억 1800만 원 0.15% 산업·중소기업 및 에너지 18조 7641억 1800만 원 4.00% 산업금융지원 2000억 원 0.04% 무역 및 투자유치 6333억 4900만 원 0.15% 에너지 및 자원개발 3조 4194억 600만 원 0.73% 산업·중소기업일반 5720억 6701만 9000원 0.13% 산업혁신지원 3조 8048억 5100만 원 0.81% 창업 및 벤처 3조 2368억 7800만 원 0.69%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육성 6조 5330억 7100만 원 1.39% 지식재산일반 2848억 100만 원 0.06% 교통 및 물류 15조 6546억 1300만 0원 3.33% 도로 5조 8742억 2500만 원 1.25% 철도 5조 5162억 6900만 원 1.17% 해운·항만 1조 7171억 6600만 원 0.37% 항공·공항 1561억 1500만 원 0.03% 물류등기타 2조 3908억 3800만 원 0.51% 통신 7조 3319억 3100만 원 1.56% 방송통신 2962억 4700만 원 0.06% 우정 5조 7126억 5100만 원 1.22% 정보통신 1조 3230억 3300만 원 0.28% 국토 및 지역개발 4조 984억 9600만 원 0.87% 수자원 1조 7311억 4000만 원 0.37% 지역 및 도시 2조 204억 8100만 원 0.43% 산업단지 3468억 7500만 원 0.07% 과학기술 7조 3029억 2100만 원 1.56% 과학기술연구지원 3조 7659억 800만 원 0.80% 과학기술일반 4843억 3000만 원 0.10% 과학기술인력 및 문화 2229억 3400만 원 0.05% 과학기술연구개발 2조 8297억 4900만 원 0.60% 예비비 3조 원 0.64% 계 469조 5751억 7690만 원 100.00% 연도별 재원배분 구분 2019년 2018년 2017년 2016년 2015년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보건·복지·고용 161조 원 △ 11.3% 144조 7000억 원 △ 11.7% 129조 5000억 원 △ 4.9% 123조 8828억 원 △ 6.2% 115조 6824억 원 △ 8.5% 교육 70조 6000억 원[내용 5] △ 10.1% 64조 2000억 원[내용 6] △ 11.8% 57조 4000억 원[내용 7] △ 7.9% 53조 2613억 원[내용 8] △ 0.5% 52조 9187억 원[내용 9] △ 4.6% 문화·체육·관광 7조 2000억 원 △ 12.2% 6조 5000억 원 ▽ 6.3% 6조 9000억 원 △ 4.0% 6조 6780억 원 △ 7.5% 6조 1201억 원 △ 10.4% 환경 7조 4000억 원 △ 7.2% 6조 9000억 원 ▽ 0.3% 6조 9000억 원 △ 0.8% 6조 9424억 원 △ 0.4% 6조 8119억 원 △ 4.0% R&D 20조 5000억 원 △ 4.4% 19조 7000억 원 △ 1.1% 19조 5000억 원 △ 1.9% 19조 1363억 원 △ 0.2% 18조 8900억 원 △ 5.9%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8조 8000억 원 △ 15.1% 16조 3000억 원 △ 1.5% 16조 원 ▽ 1.5% 16조 3000억 원 ▽ 2.0% 16조 4216억 원 ▽ 7.0% SOC 19조 8000억 원 △ 4.0% 19조 원 ▽ 14.2% 22조 1000억 원 ▽ 6.6% 23조 7119억 원 ▽ 6.0% 24조 8069억 원 △ 3.0% 농림·수산·식품 20조 원 △ 1.5% 19조 7000억 원 △ 0.6% 19조 6000억 원 △ 1.2% 19조 4165억 원 △ 0.1% 19조 3065억 원 △ 3.0% 국방 46조 7000억 원 △ 8.2% 43조 2000억 원 △ 7.0% 40조 3000억 원 △ 4.0% 38조 8556억 원 △ 4.0% 37조 4560억 원 △ 5.2% 외교·통일 5조 1000억 원 △ 7.2% 4조 7000억 원 △ 3.5% 4조 6000억 원 ▽ 2.4% 4조 7693억 원 △ 3.9% 4조 4956억 원 △ 6.9% 공공질서·안전 20조 1000억 원 △ 5.5% 19조 1000억 원 △ 5.1% 18조 1000억 원 △ 3.7% 17조 5562억 원 △ 3.0% 16조 9431억 원 △ 7.1% 일반·지방행정 76조 6000억 원[내용 10] △ 10.9% 69조 원[내용 11] △ 8.9% 63조 3000억 원[내용 12] △ 6.4% 59조 5751억 원[내용 13] △ 4.9% 58조 264억 원[내용 14] △ 3.4% 계 469조 9000억 원 △ 9.5% 428조 8000억 원 △ 7.1% 400조 5000억 원 △ 3.7% 386조 4000억 원 △ 3.0% 375조 4000억 원 △ 5.7% 재정수지 및 국가채무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6.5조 원 18.5조 원 +11.9조 원 관리재정수지 37.6조 원 28.3조 원 -9.3조 원 -2.0% 국가채무 748.8조 원 708.2조 원 +40.6조 원 +39.4% 재정절차[편집] 편성[편집] 예산편성은 정부의 사업과 계획에 사용될 재원을 추계하고 각종 사업을 지원할 지출 규모를 확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편성은 전년도 12월까지 기획재정부가 중기사업계획 수립지침을 각 부처에 통보하면서 시작된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1월 31일까지 당해 회계연도부터 5회계연도 이상의 기간 동안의 신규사업 및 주요 계속사업에 대한 중기사업계획서를 기재부에 제출하고 예산실은 개략적인 거시예산 규모를 전망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산안편성지침을 마련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3월 31일까지 각 부처에 통보한다. 예산안편성지침은 예산안 편성의 기초가 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각 부처가 공통적으로 준수할 예산편성의 원칙과 기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거쳐 부처별로 지출한도액을 통보하게 된다. 예산안편성지침과 지출한도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실국별로 예산요구서를 작성하며 이를 기획조정실 혹은 기획관리관실에서 취합하여 부처 차원의 예산요구서를 작성하여 5월 31일까지 기재부에 제출한다. 예산실은 부처별로 제출받은 예산요구서를 취합하여 예산안편성지침에 어긋나는 예산요구를 삭감하는 등 조정을 거친 뒤 예산심의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처음부터 남겨두었던 여유재원을 바탕으로 장관 협의, 당정 협의를 거쳐 신규사업에 대한 검토를 수행하게 된다. 당정 협의를 거친 뒤에는 예산실에 의해 예산안이 완성되고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친 뒤 9월 3일까지 국회에 송부된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예산편성에서 과거에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사업정책 단위, 비목유형 및 기준단가 등 예산안편성지침을 세세한 정보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높은 구속력을 가져 사실상 기재부가 전체 예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총액배분 자율편성(top-down) 방식을 도입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은 기재부가 총지출규머와 분야별 지출한도 및 재정투자 방향과 같은 거시적 기준과 정보만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사업의 예산 배분이나 원칙은 각 부처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다. 과거의 상향식 방식은 기재부가 세부사업 하나하나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이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을 도입한 이후에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도입하여 이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하고 국무위원,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하여 정책방향과 투자계획, 총수입 및 총지출 규모와 재원배분방향 등을 토의한다. 이 회의는 4월 말에서 5월 초에 열리는데, 분야별·부처별 지출한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심사[편집] 예산심사는 행정부가 작성한 예산안을 국회가 심의하는 작업을 말한다. 심사는 정부로부터 예산안이 제출[내용 15]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출된 예산안은 본회의에 보고되고 이후 정부의 시정연설[내용 16]을 거쳐 상임위원회의 예비심사를 받게 된다. 상임위 차원의 예비심사는 보통 국정감사와 추석연휴가 지난 10월에 이루어지는데 기본적인 사항만 심사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질의가 이루어진다. 소위원회의 결정을 상임위가 승인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이관되며 여기서는 종합적인 정책질의가 이루어진다. 원칙적으로는 예결위만이 정부예산안에 대한 수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예산안 편성의 마지막 단계가 된다. 예결위에서 합의를 보게 되면 곧 본희외에 보고되고 이후 의결을 거쳐 정식으로 예산을 확정하게 된다. 「대한민국헌법」에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2월 2일)까지 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세입예산안 부수법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도 정부의 예산안이 회계연도가 새로 시작하는 날까지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하면 정부는 준예산을 짜서 최소한의 행정활동을 하게 된다. 만약 예산안이 국회 의결을 받았더라도 세입예산과 관련된 법률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지 못하면 예산대로 집행하는 것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2012년 「국회법」을 개정하여 2014년부터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정부의 예산안과 세입예산 부수법안임을 표시한 법안[내용 17]을 11월 30일까지 심사를 마치도록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12월 1일 자동적으로 본회의에 부의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집행[편집]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출하는 작업을 집행이라 한다. 집행은 세금이나 기금에 납입된 현금, 금융자산과 같은 국고금의 징수와 수납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납된 재원은 각 부처가 작성한 예산배정요구서에 따라 기재부가 할당[내용 18]되고 각 부처는 세출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출원인행위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집행이다. 세출예산은 예산에서 규정된 목적 외의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효율성과 신축성을 제고하기 위해 예외를 인정된다. 전용(轉用)은 기재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세항 또는 목의 금액의 금액을 상호 융통하는 제도이며, 이용(移用)은 법률상 지출의무의 이행에 필요한 필수적 경비의 부족액이 발생하거나 재해대책 재원 등으로 사용할 시급한 필요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장·관·항 간에 상호 융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법령의 제정 및 개정, 폐지로 중앙행정기관의 직무와 권한에 변동이 있을 때에는 사업의 이관에 따라 예산을 이체(移替)할 수 있으며, 세목 간 상호 융통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조정을 할 수 있다.[내용 19] 결산[편집] 한 회계연도 내에서 세입예산의 모든 수입과 세출예산의 모든 지출을 계수로 표시하는 작업을 결산이라 한다. 이때, 회계연도는 12월 31일에 끝나지만 세입과 세출의 출납에 관한 사무는 다음 연도 2월 10일까지 완결한다. 각 부처는 회계와 기금을 통합한 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2월 마지막 날까지 기재부에 제출하고 기재부는 이를 취합한 국가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10일까지 감사원에 제출한다. 이후 감사원은 세입세출 결산·재무제표 검사·성과보고서 검사를 거친 뒤 5월 20일까지 기재부에 송부하고 기재부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5월 31일까지 국회에 보고한 뒤 국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국회의 의결 과정은 예산안 처리 과정과 비슷하다. 성인지 결산서 정부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예산의 수혜를 받고 예산이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집행되었는지를 평가하는 보고서이다. 집행실적, 성평등 효과분석 및 평가 등을 포함한다. 종류[편집] 회계[편집] 회계는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로 구분한다.[3] 일반회계 조세수입 등을 주요 세입으로 하여 국가의 일반적인 세출에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회계다.[4] 행정부 뿐 아니라 입법부 및 사법부 등 특정 세입이 없는 기관들의 예산은 모두 일반회계에 포함된다. 특별회계 국가에서 특정한 사업을 운영하고자 할 때, 특정한 자금을 보유하여 운용하고자 할 때, 특정한 세입으로 특정한 세출에 충당함으로써 일반회계와 구분하여 회계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로써 설치하는 회계다.[5] 기업형태로 운영되는 정부사업 관련 기업특별회계[내용 20]와 개별 법률에 근거하여 설치된 기타특별회계로 구분된다. 이름 소관부처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교도작업특별회계 법무부 「교도작업의 운영 및 특별회계에 관한 법률」 제8조제1항 1268억 1700만 원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기획재정부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제30조 10조 7485억 3100만 원 우편사업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1호 4조 9197억 5400만 원 우체국예금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2호 3조 928억 7700만 원 양곡관리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3호 2조 748억 3400만 원 조달특별회계 조달청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4호 3942억 1000만 원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법」 11조 9029억 6500만 원 등기특별회계 대법원 「등기특별회계법」 3146억 7400만 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 특별회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44조제1항 2997억 3700만 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특별회계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제42조제1항 804억 7600만 원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 6조 205억 5900만 원 우체국보험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체국보험특별회계법」 9887억 4400만 원 주한미군기지이전특별회계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9조제1항 4933억 1800만 원 책임운영기관특별회계 행정안전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조 855억 6300만 원 환경개선특별회계 환경부 「환경정책기본법」 제45조제1항 4조 7670억 6500만 원 국방·군사시설이전특별회계 국방부 「국방·군사시설이전 특별회계법」 7921억 4100만 원 혁신도시건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33조제1항 2646억 3200만 원 교통시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교통시설특별회계법」 15조 7898억 4800만 원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 교육부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법」 3조 8153억 3800만 원 기금[편집]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하여 설치하는 자금으로 정부출연금이나 일반회계로부터의 전입금을 수입원으로 한다.[6] 특정한 재정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관리·운영하는 사업성기금, 연금지출과 보험지출에 대비하여 기여금과 보험료 등의 작므을 운용하는 사회보험성기금, 특정사업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증·보험 등을 제공하여 금융활동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금융성기금, 특정 자금을 모아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주체에게 전달하는 계정성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름 유형 소관부처 관리주체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고용보험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고용보험법」 제78조제1항 17조 659억 900만 원 공공자금관리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2조 175조 1957억 9400만 원 공무원연금기금 보험성 인사혁신처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법」 제73조제1항 21조 2478억 2300만 원 공적자금상환기금 계정성 금융위원회 「공적자금상환기금법」 제3조제1항 8조 7228억 4600만 원 과학기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기본법」 제22조제1항 1651억 6000만 원 관광진흥개발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관광진흥개발기금법」 제2조제1항 1조 2370억 1100만 원 국민건강증진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증진법」 제22조제1항 4조 2307억 5200만 원 국민연금기금 보험성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법」 제101조제1항 119조 1652억 1900만 원 국민체육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육진흥공단 「국민체육진흥법」 제19조제1항 2조 3492억 9400만 원 군인복지기금 사업성 국방부 「군인복지기금법」 제3조 8563억 7200만 원 군인연금기금 보험성 국방부 「군인연금법」 제37조제1항 3조 4267억 2800만 원 근로복지진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기본법」 제87조 3593억 4900만 원 금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금강수계위원회 「금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1318억 100만 원 기술보증기금 금융성 중소벤처기업부 기술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법」 제12조제1항 2조 5923억 8100만 원 낙동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낙동강수계위원회 「낙동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3조 2525억 1000만 원 남북협력기금 사업성 통일부 「남북협력기금법」 제3조 1조 4902억 9800만 원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협중앙회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법」 제4조제1항 1조 7218억 8600만 원 농산물가격안정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제54조 2조 4025억 2400만 원 농어가목돈마련저축장려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어가목돈마련저축에 관한 법률」 제7조제1항 720억 5600만 원 농어업재해보험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업재해보험법」 제21조 4094억 8900만 원 대외경제협력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기금법」 제3조 1조 3673억 8300만 원 문화예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법」 제16조제1항 4685억 3300만 원 방송통신발전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제24조 1조 2579억 500만 원 보훈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보훈기금법」 제3조제1항 8039억 5000만 원 복권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복권 및 복권기금법」 제21조제1항 5조 6373억 2800만 원 사립학교교직원 연금기금 보험성 교육부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53조의2제1항 12조 1104억 3200만 원 산업기반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기획재정부 신용보증기금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제30조제1항 5813억 6900만 원 산업재해보상보험및예방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5조제1항 15조 1137억 7000만 원 무역보험기금 금융성 산업통상자원부 한국무역보험공사 「무역보험법」 제30조 3조 9799억 4700만 원 언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4조제1항 269억 7800만 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신용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법」 6조 9969억 7500만 원 농업소득보전직접지불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업소득의 보전에 관한 법률」 제19조 2760억 3900만 원 양곡증권정리기금 계정성 농림축산식품부 「양곡관리법」 제25조제1항 4300억 1100만 원 수산발전기금 사업성 해양수산부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제46조 7524억 8100만 원 양성평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기본법」 제42조제1항 3911억 9500만 원 영산강·섬진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영산강·섬진강수계위원회 「영산강·섬진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913억 8100만 원 예금보험기금채권상환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예금보험공사 「예금자보호법」 제26조의3제1항 3조 6451억 2200만 원 산업기술진흥및사업화촉진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혁신 촉진법」 제37조의2 1504억 7200만 원 외국환평형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외국환거래법」 제13조제1항 99조 2428억 원 원자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자력 진흥법」 제17조제1항 4274억 2600만 원 응급의료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19조제1항 3665억 3500만 원 임금채권보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임금채권보장법」 제17조 8769억 원 자유무역협정 이행지원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3조제1항 7117억 4400만 원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 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68조 1조 757억 400만 원 전력산업기반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사업법」 제48조 3조 8168억 700만 원 정보통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산업 진흥법」 제41조 1조 3066억 1400만 원 주택도시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주택도시기금법」 제3조 77조 3937억 6200만 원 중소기업창업 및 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진흥공단 「중소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63조 7조 9623억 4300만 원 지역신문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지역신문발전지원 특별법」 제13조제1항 86억 4900만 원 청소년육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청소년 기본법」 제53조제1항 1576억 700만 원 축산발전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축산법」 제43조제1항 1조 170억 7800만 원 한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한강수계위원회 「한강수계 상수원수질개선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20조 5571억 2300만 원 국제교류기금 사업성 외교부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교류재단법」 제13조제1항 1762억 7200만 원 농지관리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제31조 3조 1374억 9600만 원 사학진흥기금 사업성 교육부 한국사학진흥재단 「한국사학진흥재단법」 제17조 5293억 5200만 원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법」 제55조 6조 6483억 800만 원 영화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3조제1항 2649억 5000만 원 순국선열·애국지사사업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550억 1400만 원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28조 5조 973억 200만 원 문화재보호기금 사업성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법」 제3조 1307억 7000만 원 석면피해구제기금 사업성 환경부 「석면피해구제법」 제24조제1항 331억 원 범죄피해자보호기금 사업성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 제3조 1011억 200만 원 국유재산관리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국유재산법」 제26조의2 1조 5110억 8300만 원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 2조 9019억 4200만 원 사법서비스진흥기금 사업성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탁법」 제28조 745억 6700만 원 자동차사고 피해지원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제39조의11 2335억 2900만 원 국제질병퇴치기금 사업성 외교부 「국제질병퇴치기금법」 제3조제1항 858억 7200만 원 예산의 구분[편집] 본예산 행정부가 편성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을 말한다. 수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이 국회에서 의결되기 전에 예산안의 일부를 수정하여 제출한 예산이다.[내용 22] 추가경정예산에 대해서도 수정예산 제출이 가능하다. 1970년과 1981년, 2009년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내용 23] 추가경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하고 국회를 통과한 예을 추가·변경하는 예산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경기침체 등의 이유로 편성되는데 본예산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의결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주로 임시국회에서 심의되기 때문에 심도 있는 심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준예산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국회에서 예산이 성립되지 못할 경우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도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서 설치된 기관 또는 시설의 유지·운영, 법률상의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이라는 경우에만 집행이 가능하도록 「대한민국헌법」 제54조제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회의 동의 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집행이 가능하다. 후에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면 준예산으로 지출한 부분은 본예산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간주한다. 새 회계연도가 개시되어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가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 가예산은 첫 1개월 동안 집행할 예산만 우선적으로 국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제도인데, 한국은 1960년까지 사용하고 이후 준예산 제도로 변경되었다. 가예산은 실제로 편성한 예가 있지만 준예산은 실제로 집행한 적은 없다. 역대 정부의 재정[편집] 다음은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정부의 예산액과 부채액을 표시한 것이다.[내용 24] 구분 회계연도 예산 결산 부채 예산액 통과일 결산액 통과일 제1공화국 1949년 2119억 원 1949년 5월 3일[7] - - - 1950년 1055억 8518만 5700원 1950년 4월 22일[8] - - - 1951년 7357억 원 1951년 4월 30일[9] - - - 1952년 9819억 3365만 6400원 1952년 4월 18일[10] - - - 1953년 284억 2318만 6389환 1953년 4월 30일[11] - - - 1954년 1088억 환 1954년 3월 31일[12] - - - 1955년 1679억 8700만 환 1955년 7월 31일[13] - - - 1957년 2185억 환 1956년 12월 31일[14] - - - 1958년 3360억 환 1957년 12월 31일[15] - - - 1959년 3900억 환 1958년 12월 24일[16] - - - 제2공화국 1960년 4237억 6950만 1100환 1959년 12월 31일[17] - - - 1961년 5050억 4000만 환 민의원: 1960년 12월 8일[18] 참의원: 1960년 12월 28일[19] - - - 1962년 6891억 환 1961년 12월 31일[내용 25][20] - - - 1963년 768억 6600만 원 1962년 11월 14일[내용 25][21] - - - 제3공화국 1964년 698억 5335만 400원 1963년 12월 10일[내용 25][22] - - - 1965년 848억 5379만 5700원 1964년 12월 1일[23] - - - 1966년 1219억 7268만 9500원 1965년 12월 4일[24] - - - 1967년 1643억 4694만 400원 1966년 12월 8일[25] - - - 1968년 2214억 8228만 6800원 1967년 12월 29일[26] - - - 1969년 3243억 5203만 5500원 1968년 12월 2일[27] - - - 1970년 4327억 2200만 원 1969년 12월 22일[28] - - - 1971년 5242억 원 1970년 12월 19일[29] - - - 1972년 6472억 원 1971년 12월 2일[30] - - - 제4공화국 1973년 6593억 원 1972년 12월 2일[31] - - - 1974년 8477억 원 1973년 12월 2일[32] - - - 1975년 1조 2920억 원 1974년 12월 2일[33] - - - 1976년 2조 61억 7800만 원 1975년 12월 2일[34] - - - 1977년 2조 6593억 9700만 원 1976년 12월 2일[35] - - - 1978년 3조 5170억 원 1977년 12월 2일[36] - - - 1979년 4조 5338억 3600만 원 1978년 11월 14일[37] - - - 1980년 5조 8040억 6100만 원 1979년 12월 1일[38] - - - 제5공화국 1981년 7조 8511억 원 1980년 11월 29일[내용 26][39] - - - 1982년 9조 5781억 원 1981년 12월 2일[40] - - - 1983년 10조 4167억 원 1982년 12월 2일[41] - - - 1984년 10조 3862억 8900만 원 1983년 12월 2일[42] - - - 1985년 12조 2751억 1500만 원 1984년 12월 1일[43] - - - 1986년 13조 8500억 원 1985년 12월 2일[44] - - - 1987년 15조 5596억 2900만 원 1986년 12월 2일[45] - - - 노태우 정부 1988년 17조 4644억 2900만 원 1987년 10월 30일[46] - - 18조 9000억 원 1989년 19조 2284억 원 1988년 12월 2일[47] - - 21조 1000억 원 1990년 22조 6894억 원 1989년 12월 19일[48] - - 24조 5000억 원 1991년 26조 9798억 원 1990년 12월 18일[49] - - 27조 7000억 원 1992년 33조 2000억 원 1991년 12월 3일[50] - - 31조 원 김영삼 정부 1993년 38조 500억 원 1992년 11월 18일[51] - - 32조 8000억 원 1994년 43조 2500억 원 1993년 12월 7일[52] - - 34조 4000억 원 1995년 54조 8243억 원 1994년 12월 1일[53] - - 35조 6000억 원 1996년 62조 9626억 원 1995년 12월 2일[54] - - 45조 6000억 원 1997년 71조 4600억 원 1996년 12월 12일[55] - - 60조 3000억 원 김대중 정부 1998년 70조 2636억 원 1997년 11월 18일[56] - - 80조 4000억 원 1999년 84조 9376억 원 1998년 12월 9일[57] - - 98조 6000억 원 2000년 92조 6576억 원 1999년 12월 18일[58] - - 111조 2000억 원 2001년 100조 2246억 원 2000년 12월 26일[59] - - 121조 8000억 원 2002년 111조 9767억 원 2001년 12월 27일[60] - - 133조 8000억 원 노무현 정부 2003년 111조 7000억 원 2002년 11월 8일[61] - - 165조 8000억 원 2004년 118조 3000억 원 2003년 12월 30일[62] - - 203조 7000억 원 2005년 134조 3704억 원 2004년 12월 31일[63] - - 247조 9000억 원[64] 2006년 144조 8076억 원 2005년 12월 30일[65] - - 282조 7000억 원[64] 2007년 237조 140억 6812만 4000원 2006년 12월 27일[66] 196조 9046억 6666만 280원 2008년 11월 24일[67] 299조 2000억 원[64] 이명박 정부 2008년 257조 1656억 9077만 1000원 2007년 12월 28일[68] 222조 8935억 2299만 6690원 2009년 9월 29일[69] 309조 원[64] 2009년 284조 5339억 568만 1000원 2008년 12월 13일[70] 252조 1824억 4817만 4550원 2010년 10월 1일[71] 359조 6000억 원[64] 2010년 292조 8158억 6074만 1000원 2009년 12월 31일[72] 248조 6533억 5034만 5540원 2011년 8월 31일[73] 392조 2000억 원[64] 2011년 309조 566억 9289만 6000원 2010년 12월 8일[74] 258조 9457억 3869만 9850원 2012년 9월 3일[75] 420조 5000억 원[64] 2012년 325조 4076억 3178만 7000원 2011년 12월 31일[76] 274조 7611억 4728만 9670원 2013년 11월 28일[77] 443조 1000억 원[64] 박근혜 정부 2013년 341조 9677억 2593만 6000원 2013년 1월 1일[78] 286조 4050억 6544만 1620원 2014년 10월 2일[79] 489조 8000억 원[64] 2014년 355조 8051억 1905만 8000원 2014년 1월 1일[80] 291조 5113억 3122만 8140원 2015년 9월 8일[81] 533조 2000억 원[64] 2015년 375조 4032억 7755만 4000원 2014년 12월 2일[82] 319조 3906억 7642만 5020원 2016년 9월 2일[83] 591조 5000억 원[64] 2016년 386조 3995억 9937만 4000원 2015년 12월 3일[84] 332조 2108억 2030만 1720원 2017년 12월 5일[85] 626조 9000억 원[64] 문재인 정부 2017년 400조 5459억 4617만 2000원 2016년 12월 3일[86] 342조 8788억 4090만 510원 2018년 12월 7일[87] 660조 2000억 원[64] 2018년 428조 8339억 1256만 7000원 2017년 12월 6일[88] 708조 2000억 원[64] 2019년 469조 5751억 7690만 원 2018년 12월 8일[89] 741조 원[64] 비판[편집] 예결위는 예산과 결산을 동시에 맡는데 이 경우 예산안에만 관심을 보이며, 결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졸속 결산이라는 비판이 있다.[90] 또한 특별위원회로 설치되어 있다보니, 1년마다 위원들이 바뀌어 전문성이 떨어지고 졸속심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91]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의 대치로 인해 헌법에 규정한 법정 처리기한을 넘겨서 통과시키고 있다.[92][93] 같이 보기[편집]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의 조세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다만, 교육기관의 회계연도는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다음 해 2월 말일에 종료한다.[1] ↑ 정부 수립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회계연도가 4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이후 「재정법」의 개정으로 인해 1954회계연도는 1954년 4월 1일부터 1955년 6월 30일까지, 1955회계연도는 1955년 7월 1일부터 1956년 6월 30일까지, 1956회계연도는 1956년 7월 1일부터 1957년 12월 31일까지였으며, 1958년부터 지금처럼 회계연도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정해졌다. ↑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예산총계가 되는데, 이는 이중계산의 문제를 안고 있다. ↑ 내부거래 뿐 아니라 보전지출도 제하는데 보전지출이란 국채의 발행 또는 상환, 차입 또는 차입금의 상환 등 재정수지를 보전해 주는 것을 뜻한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55조 2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9조 6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2조 9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1조 3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39조 4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52조 5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6조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0조 7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6조 1694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4조 8881억 원이다. ↑ 세입세출예산안 총계표 및 순계표, 세입세출예산사업별 설명서, 계속비 명세서, 국고채무부담행위 설명서, 예산정원표와 예산안 편성기준 단가, 성과계획서, 국가재정운용계획 등 여러 부차적인 첨부서류도 함께 제출된다. 예산안과 첨부서류는 그 양이 막대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분석과 검토는 국회예산정책처와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실에서 실시된 뒤, 국회의원들에게 보고된다. ↑ 대통령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관행적으로 국무총리의 대독이 이루어진다. ↑ 세수의 증감을 초래하는지, 세입예산안에 반영이 되어 있는지 등을 살펴서 국회예산정책처의 의견을 참고해 국회의장이 지정한다. ↑ 이를 할당이라 하는데, 중앙행정기관이 다시 소속기관에 할당하는 것을 재배정이라 한다. 배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가 제출하고 기재부가 종합한 월별 자금계획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와 대통령의 승인을 거친 뒤 이루어진다. ↑ 전용, 이용, 이체는 「국가재정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조정은 예산집행지침에만 나와 있다. ↑ 「정부기업예산법」에 따른 네 개의 특별회계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한 개의 특별회계가 있다. ↑ 가 나 총계 기준 ↑ 국회 의결 전에 제출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는 예산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수정한 것이 된다. ↑ 1980년에는 추가경정예산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 ↑ 2006년까지는 일반회계만을 표시하였으며, 2007년부터는 특별회계와 기금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 가 나 다 국회가 아니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 국회가 아니라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참조주[편집] ↑ 「유아교육법」 제19조의8제1항, 「초·중등교육법」 제30조의3제1항,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 제11조제5항,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9조제2항,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8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2조 및 「국가회계법」 제5조 ↑ 「국가재정법」 제4조제1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3항 ↑ 「국가재정법」 제5조제1항 ↑ “今年度政府豫算遂通過”. 《경향신문》. 1949년 5월 3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總豫算案通過를보고”. 《경향신문》. 1950년 4월 25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今年度總豫算遂通過 財經委削減額中五億圓復活”. 《동아일보》. 1951년 5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国会 豫算案完全通過”. 《경향신문》. 1953년 4월 20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民議院 赤字外援獲得前提 86年度豫算案昨日通過”. 《동아일보》. 1953년 5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八七年度豫算案通過”. 《동아일보》. 1954년 4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31日밤 總豫算案通過”. 《경향신문》. 1955년 8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90年度豫算遂成立”. 《동아일보》. 1957년 1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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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0087919. 하연섭 (2016년 1월 25일). 《정부예산과 재무행정》. 다산출판사. 58 ~ 198쪽. ISBN 978897110454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_정부의_재정&oldid=23408332" 분류: 대한민국 정부재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일 (목) 15: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기재부는 국가결산보고서를 어느 기관에 제출해야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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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의 예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大韓民國 政府- 財政)에 관한 사항을 다룬다. 목차 1 개요 1.1 2019년 재정총량 2 재정절차 2.1 편성 2.2 심사 2.3 집행 2.4 결산 3 종류 3.1 회계 3.2 기금 4 예산의 구분 5 역대 정부의 재정 6 비판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조주 9 참고문헌 개요[편집] 「국가재정법」 제1조에 의하면 재정은 국가의 예산·기금·결산·성과관리·국가채무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운용주체를 중심으로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운용수단을 중심으로 예산과 회계로, 성격을 중심으로 수입과 지출로 구분할 수 있다. 회계연도는 1월 1일에 시작하여 12월 31일에 종료한다.[내용 1][2][내용 2] 2019년 재정총량[편집] 재정총량은 일반적으로 총지출 개념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재정규모는 일반회계만을 의미하지만 특별회계의 규모도 크기 때문에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더한 값에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한 예산순계의 개념도 활용한다.[내용 3] 일반회계와 특별회계에 기금까지 더하여 내부거래를 제한 경우는 총지출이라고 한다.[내용 4]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이다. 하지만 한국은 관리재정수지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많은 선진국과 달리 연금이나 보험의 적립이 진행 중이라서 이로 인한 흑자로 인해 재정왜곡이 발생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총수입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수입 476.1조 원 447.2조 원 +28.9조 원 +6.46% 예산수입 321.4조 원 294.9조 원 +26.5조 원 +8.99% 기금수입 154.7조 원 152.2조 원 +2.5조 원 +1.64% 총지출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지출 469.6조 원 428.8조 원 +40.8조 원 +9.51% 예산 328.9조 원 295조 원 +33.9조 원 +11.49% 기금 140.7조 원 133.9조 원 +6.8조 원 +5.08% 항목별 세입·세출예산 세입예산 금액 비율 수입관 수입항 내국세 259조 655억 5000만 원 54.42% 소득세 80조 3678억 원 16.88% 법인세 79조 2501억 원 16.65% 상속세 7조 2279억 원 1.52% 부가가치세 68조 7519억 원 14.44% 개별소비세 10조 2995억 원 2.16% 주세 3조 4351억 5000만 원 0.72% 증권거래세 4조 5339억 원 0.95% 인지세 9439억 원 0.20% 기타내국세 4조 2554억 원 0.89% 관세 9조 557억 원 1.90% 교통·에너지·환경세 14조 7766억 원 3.10% 교육세 4조 8648억 원 1.02% 사회보장기여금 69조 7472억 3400만 원 14.65% 농어촌특별세 4조 1799억 원 0.88% 종합부동산세 2조 8494억 원 0.60% 기업특별회계영업수입 6조 8954억 6800만 1000원 1.45% 양곡사업수입 3902억 8000만 원 0.08% 우정사업수입 5조 7048억 8400만 원 1.20% 조달사업수입 2018억 5200만 원 0.04% 책임운영기관사업수입 5984억 5200만 원 0.13% 재산수입 28조 7596억 4700만 원 6.04% 관유물대여료 1조 224억 1500만 원 0.21% 정부출자수입 1조 6363억 5800만 원 0.34% 전대차관이자수입 2300만 원 0.00% 기타이자수입 및 재산수입 26조 1008억 5100만 원 5.48% 경상이전수입 37조 1831억 8590만 원 7.81% 연금수입 13조 4449억 1000만 원 2.82% 벌금, 몰수금 및 과태료 3조 1309억 8700만 원 0.66% 변상금 및 위약금 2549억 2700만 원 0.05% 가산금 9079억 9100만 원 0.19% 기타경상이전수입 19조 4443억 7090만 원 4.08% 재화 및 용역판매수입 9조 6428억 7900만 원 2.02% 병원수입 189억 9100만 원 0.00% 교도소수입 748억 900만 원 0.02% 입장료수입 1325억 800만 원 0.03% 면허료 및 수수료 1조 1927억 8400만 원 0.25% 입학금 및 수업료 88억 5500만 원 0.00% 항공, 항만 및 용수수입 2374억 1200만 원 0.05% 실습수입 43억 5600만 원 0.00% 잡수입 7조 9551억 6400만 원 1.67% 수입대체경비수입 3641억 2200만 원 0.08% 관유물대여료 2500만 원 0.00% 입장료수입 154억 6800만 원 0.00% 면허료 및 수수료 3013억 300만 원 0.06% 잡수입 473억 2000만 원 0.01% 관유물매각대 3조 994억 3400만 원 0.65% 고정자산매각대 1668억 9400만 원 0.04% 토지 및 무형자산매각대 1조 9651억 1900만 원 0.41% 재고자산매각대 및 유동자산 9674억 2100만 원 0.20% 융자 및 전대차관원금회수 25조 5632억 1300만 원 5.37% 융자원금회수 25조 5608억 2500만 원 5.37% 전대차관원금회수 23억 8800만 원 0.00% 차입금 및 여유자금회수 유가증권매각대 277억 6800만 원 0.01% 계 476조 569억 90만 원 100.00% 세출예산 금액 비율 분야 부분 일반·지방행정 76조 5596억 8440만 원 16.30% 입법 및 선거관리 1조 289억 350만 원 0.22% 국정운영 5861억 3200만 원 0.12% 지방행정·재정지원 53조 2630억 6300만 원 11.34% 재정·금융 18조 3262억 1890만 원 3.90% 정부자원관리 8425억 2800만 원 0.18% 일반행정 2조 5128억 3900만 원 0.54% 공공질서 및 안전 20조 1317억 4150만 원 4.29% 법원 및 헌재 2조 651억 9000만 원 0.44% 법무 및 검찰 2조 651억 9000만 원 0.86% 경찰 11조 3557억 9900만 원 2.42% 해경 1조 3844억 9650만 원 0.29% 재난관리 1조 2647억 3100만 원 0.27% 통일·외교 5조 647억 5000만 원 1.08% 통일 1조 3621억 1900만 원 0.29% 외교·통상 3조 7026억 3100만 원 0.79% 국방 45조 3436억 5900만 원 9.66% 병력운영 15조 8353억 1600만 원 3.37% 전력유지 13조 9100억 6600만 원 2.96% 방위력개선 15조 3651억 1400만 원 3.27% 병무행정 2331억 6300만 원 0.05% 교육 70조 6489억 9500만 원 15.05% 유아 및 초중등교육 59조 3831억 6500만 원 12.65% 고등교육 10조 2575억 7200만 원 2.18% 평생·직업교육 8771억 원 0.19% 교육일반 1311억 5800만 원 0.03% 문화 및 관광 7조 2495억 200만 원 1.54% 문화예술 3조 1068억 8000만 원 0.66% 관광 1조 4139억 6800만 원 0.30% 체육 1조 4646억 7400만 원 0.31% 문화재 9007억 5500만 원 0.19% 문화 및 관광일반 3632억 2500만 원 0.08% 환경 7조 3971억 8800만 원 1.58% 해양환경 2875억 2000만 원 0.06% 환경일반 4738억 7300만 원 0.10% 물환경 3조 9463억 4600만 원 0.84% 자원순환 및 환경경제 6707억 6300만 원 0.14% 기후대기 및 환경안전 1조 3807억 7600만 원 0.29% 자연환경 6379억 1000만 원 0.14% 사회복지 148조 8769억 2200만 원 31.70% 기초생활보장 12조 7046억 4100만 원 2.71% 취약계층지원 3조 4019억 2300만 원 0.72% 공적연금 50조 3116억 4600만 원 10.71% 보훈 5조 5587억 6300만 원 1.18% 주택 25조 7308억 5100만 원 5.48% 사회복지일반 1조 2958억 3300만 원 0.28% 아동·보육 8조 1296억 5100만 원 1.73% 노인 13조 9776억 3000만 원 2.98% 여성·가족·청소년 1조 474억 7500만 원 0.22% 고용 19조 4598억 2600만 원 4.14% 노동 6조 7137억 6100만 원 1.43% 고용노동일반 5449억 2200만 원 0.12% 보건 12조 1203억 2700만 원 2.58% 보건의료 2조 5929억 7900만 원 0.55% 건강보험 9조 187억 3500만 원 1.92% 식품의약안전 5086억 1300만 원 0.11% 농림수산 20조 303억 2900만 원 4.27% 농업·농촌 14조 9142억 7900만 원 3.18% 임업·산촌 2조 1742억 7900만 원 0.46% 수산·어촌 2조 2447억 5300만 원 0.48% 식품업 6970억 1800만 원 0.15% 산업·중소기업 및 에너지 18조 7641억 1800만 원 4.00% 산업금융지원 2000억 원 0.04% 무역 및 투자유치 6333억 4900만 원 0.15% 에너지 및 자원개발 3조 4194억 600만 원 0.73% 산업·중소기업일반 5720억 6701만 9000원 0.13% 산업혁신지원 3조 8048억 5100만 원 0.81% 창업 및 벤처 3조 2368억 7800만 원 0.69%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육성 6조 5330억 7100만 원 1.39% 지식재산일반 2848억 100만 원 0.06% 교통 및 물류 15조 6546억 1300만 0원 3.33% 도로 5조 8742억 2500만 원 1.25% 철도 5조 5162억 6900만 원 1.17% 해운·항만 1조 7171억 6600만 원 0.37% 항공·공항 1561억 1500만 원 0.03% 물류등기타 2조 3908억 3800만 원 0.51% 통신 7조 3319억 3100만 원 1.56% 방송통신 2962억 4700만 원 0.06% 우정 5조 7126억 5100만 원 1.22% 정보통신 1조 3230억 3300만 원 0.28% 국토 및 지역개발 4조 984억 9600만 원 0.87% 수자원 1조 7311억 4000만 원 0.37% 지역 및 도시 2조 204억 8100만 원 0.43% 산업단지 3468억 7500만 원 0.07% 과학기술 7조 3029억 2100만 원 1.56% 과학기술연구지원 3조 7659억 800만 원 0.80% 과학기술일반 4843억 3000만 원 0.10% 과학기술인력 및 문화 2229억 3400만 원 0.05% 과학기술연구개발 2조 8297억 4900만 원 0.60% 예비비 3조 원 0.64% 계 469조 5751억 7690만 원 100.00% 연도별 재원배분 구분 2019년 2018년 2017년 2016년 2015년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보건·복지·고용 161조 원 △ 11.3% 144조 7000억 원 △ 11.7% 129조 5000억 원 △ 4.9% 123조 8828억 원 △ 6.2% 115조 6824억 원 △ 8.5% 교육 70조 6000억 원[내용 5] △ 10.1% 64조 2000억 원[내용 6] △ 11.8% 57조 4000억 원[내용 7] △ 7.9% 53조 2613억 원[내용 8] △ 0.5% 52조 9187억 원[내용 9] △ 4.6% 문화·체육·관광 7조 2000억 원 △ 12.2% 6조 5000억 원 ▽ 6.3% 6조 9000억 원 △ 4.0% 6조 6780억 원 △ 7.5% 6조 1201억 원 △ 10.4% 환경 7조 4000억 원 △ 7.2% 6조 9000억 원 ▽ 0.3% 6조 9000억 원 △ 0.8% 6조 9424억 원 △ 0.4% 6조 8119억 원 △ 4.0% R&D 20조 5000억 원 △ 4.4% 19조 7000억 원 △ 1.1% 19조 5000억 원 △ 1.9% 19조 1363억 원 △ 0.2% 18조 8900억 원 △ 5.9%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8조 8000억 원 △ 15.1% 16조 3000억 원 △ 1.5% 16조 원 ▽ 1.5% 16조 3000억 원 ▽ 2.0% 16조 4216억 원 ▽ 7.0% SOC 19조 8000억 원 △ 4.0% 19조 원 ▽ 14.2% 22조 1000억 원 ▽ 6.6% 23조 7119억 원 ▽ 6.0% 24조 8069억 원 △ 3.0% 농림·수산·식품 20조 원 △ 1.5% 19조 7000억 원 △ 0.6% 19조 6000억 원 △ 1.2% 19조 4165억 원 △ 0.1% 19조 3065억 원 △ 3.0% 국방 46조 7000억 원 △ 8.2% 43조 2000억 원 △ 7.0% 40조 3000억 원 △ 4.0% 38조 8556억 원 △ 4.0% 37조 4560억 원 △ 5.2% 외교·통일 5조 1000억 원 △ 7.2% 4조 7000억 원 △ 3.5% 4조 6000억 원 ▽ 2.4% 4조 7693억 원 △ 3.9% 4조 4956억 원 △ 6.9% 공공질서·안전 20조 1000억 원 △ 5.5% 19조 1000억 원 △ 5.1% 18조 1000억 원 △ 3.7% 17조 5562억 원 △ 3.0% 16조 9431억 원 △ 7.1% 일반·지방행정 76조 6000억 원[내용 10] △ 10.9% 69조 원[내용 11] △ 8.9% 63조 3000억 원[내용 12] △ 6.4% 59조 5751억 원[내용 13] △ 4.9% 58조 264억 원[내용 14] △ 3.4% 계 469조 9000억 원 △ 9.5% 428조 8000억 원 △ 7.1% 400조 5000억 원 △ 3.7% 386조 4000억 원 △ 3.0% 375조 4000억 원 △ 5.7% 재정수지 및 국가채무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6.5조 원 18.5조 원 +11.9조 원 관리재정수지 37.6조 원 28.3조 원 -9.3조 원 -2.0% 국가채무 748.8조 원 708.2조 원 +40.6조 원 +39.4% 재정절차[편집] 편성[편집] 예산편성은 정부의 사업과 계획에 사용될 재원을 추계하고 각종 사업을 지원할 지출 규모를 확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편성은 전년도 12월까지 기획재정부가 중기사업계획 수립지침을 각 부처에 통보하면서 시작된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1월 31일까지 당해 회계연도부터 5회계연도 이상의 기간 동안의 신규사업 및 주요 계속사업에 대한 중기사업계획서를 기재부에 제출하고 예산실은 개략적인 거시예산 규모를 전망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산안편성지침을 마련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3월 31일까지 각 부처에 통보한다. 예산안편성지침은 예산안 편성의 기초가 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각 부처가 공통적으로 준수할 예산편성의 원칙과 기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거쳐 부처별로 지출한도액을 통보하게 된다. 예산안편성지침과 지출한도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실국별로 예산요구서를 작성하며 이를 기획조정실 혹은 기획관리관실에서 취합하여 부처 차원의 예산요구서를 작성하여 5월 31일까지 기재부에 제출한다. 예산실은 부처별로 제출받은 예산요구서를 취합하여 예산안편성지침에 어긋나는 예산요구를 삭감하는 등 조정을 거친 뒤 예산심의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처음부터 남겨두었던 여유재원을 바탕으로 장관 협의, 당정 협의를 거쳐 신규사업에 대한 검토를 수행하게 된다. 당정 협의를 거친 뒤에는 예산실에 의해 예산안이 완성되고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친 뒤 9월 3일까지 국회에 송부된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예산편성에서 과거에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사업정책 단위, 비목유형 및 기준단가 등 예산안편성지침을 세세한 정보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높은 구속력을 가져 사실상 기재부가 전체 예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총액배분 자율편성(top-down) 방식을 도입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은 기재부가 총지출규머와 분야별 지출한도 및 재정투자 방향과 같은 거시적 기준과 정보만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사업의 예산 배분이나 원칙은 각 부처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다. 과거의 상향식 방식은 기재부가 세부사업 하나하나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이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을 도입한 이후에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도입하여 이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하고 국무위원,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하여 정책방향과 투자계획, 총수입 및 총지출 규모와 재원배분방향 등을 토의한다. 이 회의는 4월 말에서 5월 초에 열리는데, 분야별·부처별 지출한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심사[편집] 예산심사는 행정부가 작성한 예산안을 국회가 심의하는 작업을 말한다. 심사는 정부로부터 예산안이 제출[내용 15]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출된 예산안은 본회의에 보고되고 이후 정부의 시정연설[내용 16]을 거쳐 상임위원회의 예비심사를 받게 된다. 상임위 차원의 예비심사는 보통 국정감사와 추석연휴가 지난 10월에 이루어지는데 기본적인 사항만 심사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질의가 이루어진다. 소위원회의 결정을 상임위가 승인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이관되며 여기서는 종합적인 정책질의가 이루어진다. 원칙적으로는 예결위만이 정부예산안에 대한 수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예산안 편성의 마지막 단계가 된다. 예결위에서 합의를 보게 되면 곧 본희외에 보고되고 이후 의결을 거쳐 정식으로 예산을 확정하게 된다. 「대한민국헌법」에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2월 2일)까지 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세입예산안 부수법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도 정부의 예산안이 회계연도가 새로 시작하는 날까지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하면 정부는 준예산을 짜서 최소한의 행정활동을 하게 된다. 만약 예산안이 국회 의결을 받았더라도 세입예산과 관련된 법률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지 못하면 예산대로 집행하는 것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2012년 「국회법」을 개정하여 2014년부터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정부의 예산안과 세입예산 부수법안임을 표시한 법안[내용 17]을 11월 30일까지 심사를 마치도록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12월 1일 자동적으로 본회의에 부의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집행[편집]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출하는 작업을 집행이라 한다. 집행은 세금이나 기금에 납입된 현금, 금융자산과 같은 국고금의 징수와 수납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납된 재원은 각 부처가 작성한 예산배정요구서에 따라 기재부가 할당[내용 18]되고 각 부처는 세출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출원인행위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집행이다. 세출예산은 예산에서 규정된 목적 외의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효율성과 신축성을 제고하기 위해 예외를 인정된다. 전용(轉用)은 기재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세항 또는 목의 금액의 금액을 상호 융통하는 제도이며, 이용(移用)은 법률상 지출의무의 이행에 필요한 필수적 경비의 부족액이 발생하거나 재해대책 재원 등으로 사용할 시급한 필요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장·관·항 간에 상호 융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법령의 제정 및 개정, 폐지로 중앙행정기관의 직무와 권한에 변동이 있을 때에는 사업의 이관에 따라 예산을 이체(移替)할 수 있으며, 세목 간 상호 융통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조정을 할 수 있다.[내용 19] 결산[편집] 한 회계연도 내에서 세입예산의 모든 수입과 세출예산의 모든 지출을 계수로 표시하는 작업을 결산이라 한다. 이때, 회계연도는 12월 31일에 끝나지만 세입과 세출의 출납에 관한 사무는 다음 연도 2월 10일까지 완결한다. 각 부처는 회계와 기금을 통합한 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2월 마지막 날까지 기재부에 제출하고 기재부는 이를 취합한 국가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10일까지 감사원에 제출한다. 이후 감사원은 세입세출 결산·재무제표 검사·성과보고서 검사를 거친 뒤 5월 20일까지 기재부에 송부하고 기재부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5월 31일까지 국회에 보고한 뒤 국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국회의 의결 과정은 예산안 처리 과정과 비슷하다. 성인지 결산서 정부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예산의 수혜를 받고 예산이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집행되었는지를 평가하는 보고서이다. 집행실적, 성평등 효과분석 및 평가 등을 포함한다. 종류[편집] 회계[편집] 회계는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로 구분한다.[3] 일반회계 조세수입 등을 주요 세입으로 하여 국가의 일반적인 세출에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회계다.[4] 행정부 뿐 아니라 입법부 및 사법부 등 특정 세입이 없는 기관들의 예산은 모두 일반회계에 포함된다. 특별회계 국가에서 특정한 사업을 운영하고자 할 때, 특정한 자금을 보유하여 운용하고자 할 때, 특정한 세입으로 특정한 세출에 충당함으로써 일반회계와 구분하여 회계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로써 설치하는 회계다.[5] 기업형태로 운영되는 정부사업 관련 기업특별회계[내용 20]와 개별 법률에 근거하여 설치된 기타특별회계로 구분된다. 이름 소관부처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교도작업특별회계 법무부 「교도작업의 운영 및 특별회계에 관한 법률」 제8조제1항 1268억 1700만 원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기획재정부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제30조 10조 7485억 3100만 원 우편사업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1호 4조 9197억 5400만 원 우체국예금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2호 3조 928억 7700만 원 양곡관리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3호 2조 748억 3400만 원 조달특별회계 조달청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4호 3942억 1000만 원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법」 11조 9029억 6500만 원 등기특별회계 대법원 「등기특별회계법」 3146억 7400만 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 특별회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44조제1항 2997억 3700만 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특별회계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제42조제1항 804억 7600만 원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 6조 205억 5900만 원 우체국보험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체국보험특별회계법」 9887억 4400만 원 주한미군기지이전특별회계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9조제1항 4933억 1800만 원 책임운영기관특별회계 행정안전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조 855억 6300만 원 환경개선특별회계 환경부 「환경정책기본법」 제45조제1항 4조 7670억 6500만 원 국방·군사시설이전특별회계 국방부 「국방·군사시설이전 특별회계법」 7921억 4100만 원 혁신도시건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33조제1항 2646억 3200만 원 교통시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교통시설특별회계법」 15조 7898억 4800만 원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 교육부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법」 3조 8153억 3800만 원 기금[편집]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하여 설치하는 자금으로 정부출연금이나 일반회계로부터의 전입금을 수입원으로 한다.[6] 특정한 재정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관리·운영하는 사업성기금, 연금지출과 보험지출에 대비하여 기여금과 보험료 등의 작므을 운용하는 사회보험성기금, 특정사업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증·보험 등을 제공하여 금융활동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금융성기금, 특정 자금을 모아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주체에게 전달하는 계정성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름 유형 소관부처 관리주체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고용보험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고용보험법」 제78조제1항 17조 659억 900만 원 공공자금관리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2조 175조 1957억 9400만 원 공무원연금기금 보험성 인사혁신처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법」 제73조제1항 21조 2478억 2300만 원 공적자금상환기금 계정성 금융위원회 「공적자금상환기금법」 제3조제1항 8조 7228억 4600만 원 과학기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기본법」 제22조제1항 1651억 6000만 원 관광진흥개발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관광진흥개발기금법」 제2조제1항 1조 2370억 1100만 원 국민건강증진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증진법」 제22조제1항 4조 2307억 5200만 원 국민연금기금 보험성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법」 제101조제1항 119조 1652억 1900만 원 국민체육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육진흥공단 「국민체육진흥법」 제19조제1항 2조 3492억 9400만 원 군인복지기금 사업성 국방부 「군인복지기금법」 제3조 8563억 7200만 원 군인연금기금 보험성 국방부 「군인연금법」 제37조제1항 3조 4267억 2800만 원 근로복지진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기본법」 제87조 3593억 4900만 원 금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금강수계위원회 「금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1318억 100만 원 기술보증기금 금융성 중소벤처기업부 기술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법」 제12조제1항 2조 5923억 8100만 원 낙동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낙동강수계위원회 「낙동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3조 2525억 1000만 원 남북협력기금 사업성 통일부 「남북협력기금법」 제3조 1조 4902억 9800만 원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협중앙회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법」 제4조제1항 1조 7218억 8600만 원 농산물가격안정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제54조 2조 4025억 2400만 원 농어가목돈마련저축장려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어가목돈마련저축에 관한 법률」 제7조제1항 720억 5600만 원 농어업재해보험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업재해보험법」 제21조 4094억 8900만 원 대외경제협력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기금법」 제3조 1조 3673억 8300만 원 문화예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법」 제16조제1항 4685억 3300만 원 방송통신발전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제24조 1조 2579억 500만 원 보훈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보훈기금법」 제3조제1항 8039억 5000만 원 복권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복권 및 복권기금법」 제21조제1항 5조 6373억 2800만 원 사립학교교직원 연금기금 보험성 교육부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53조의2제1항 12조 1104억 3200만 원 산업기반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기획재정부 신용보증기금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제30조제1항 5813억 6900만 원 산업재해보상보험및예방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5조제1항 15조 1137억 7000만 원 무역보험기금 금융성 산업통상자원부 한국무역보험공사 「무역보험법」 제30조 3조 9799억 4700만 원 언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4조제1항 269억 7800만 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신용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법」 6조 9969억 7500만 원 농업소득보전직접지불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업소득의 보전에 관한 법률」 제19조 2760억 3900만 원 양곡증권정리기금 계정성 농림축산식품부 「양곡관리법」 제25조제1항 4300억 1100만 원 수산발전기금 사업성 해양수산부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제46조 7524억 8100만 원 양성평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기본법」 제42조제1항 3911억 9500만 원 영산강·섬진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영산강·섬진강수계위원회 「영산강·섬진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913억 8100만 원 예금보험기금채권상환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예금보험공사 「예금자보호법」 제26조의3제1항 3조 6451억 2200만 원 산업기술진흥및사업화촉진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혁신 촉진법」 제37조의2 1504억 7200만 원 외국환평형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외국환거래법」 제13조제1항 99조 2428억 원 원자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자력 진흥법」 제17조제1항 4274억 2600만 원 응급의료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19조제1항 3665억 3500만 원 임금채권보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임금채권보장법」 제17조 8769억 원 자유무역협정 이행지원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3조제1항 7117억 4400만 원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 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68조 1조 757억 400만 원 전력산업기반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사업법」 제48조 3조 8168억 700만 원 정보통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산업 진흥법」 제41조 1조 3066억 1400만 원 주택도시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주택도시기금법」 제3조 77조 3937억 6200만 원 중소기업창업 및 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진흥공단 「중소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63조 7조 9623억 4300만 원 지역신문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지역신문발전지원 특별법」 제13조제1항 86억 4900만 원 청소년육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청소년 기본법」 제53조제1항 1576억 700만 원 축산발전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축산법」 제43조제1항 1조 170억 7800만 원 한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한강수계위원회 「한강수계 상수원수질개선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20조 5571억 2300만 원 국제교류기금 사업성 외교부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교류재단법」 제13조제1항 1762억 7200만 원 농지관리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제31조 3조 1374억 9600만 원 사학진흥기금 사업성 교육부 한국사학진흥재단 「한국사학진흥재단법」 제17조 5293억 5200만 원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법」 제55조 6조 6483억 800만 원 영화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3조제1항 2649억 5000만 원 순국선열·애국지사사업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550억 1400만 원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28조 5조 973억 200만 원 문화재보호기금 사업성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법」 제3조 1307억 7000만 원 석면피해구제기금 사업성 환경부 「석면피해구제법」 제24조제1항 331억 원 범죄피해자보호기금 사업성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 제3조 1011억 200만 원 국유재산관리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국유재산법」 제26조의2 1조 5110억 8300만 원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 2조 9019억 4200만 원 사법서비스진흥기금 사업성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탁법」 제28조 745억 6700만 원 자동차사고 피해지원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제39조의11 2335억 2900만 원 국제질병퇴치기금 사업성 외교부 「국제질병퇴치기금법」 제3조제1항 858억 7200만 원 예산의 구분[편집] 본예산 행정부가 편성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을 말한다. 수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이 국회에서 의결되기 전에 예산안의 일부를 수정하여 제출한 예산이다.[내용 22] 추가경정예산에 대해서도 수정예산 제출이 가능하다. 1970년과 1981년, 2009년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내용 23] 추가경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하고 국회를 통과한 예을 추가·변경하는 예산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경기침체 등의 이유로 편성되는데 본예산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의결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주로 임시국회에서 심의되기 때문에 심도 있는 심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준예산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국회에서 예산이 성립되지 못할 경우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도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서 설치된 기관 또는 시설의 유지·운영, 법률상의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이라는 경우에만 집행이 가능하도록 「대한민국헌법」 제54조제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회의 동의 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집행이 가능하다. 후에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면 준예산으로 지출한 부분은 본예산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간주한다. 새 회계연도가 개시되어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가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 가예산은 첫 1개월 동안 집행할 예산만 우선적으로 국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제도인데, 한국은 1960년까지 사용하고 이후 준예산 제도로 변경되었다. 가예산은 실제로 편성한 예가 있지만 준예산은 실제로 집행한 적은 없다. 역대 정부의 재정[편집] 다음은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정부의 예산액과 부채액을 표시한 것이다.[내용 24] 구분 회계연도 예산 결산 부채 예산액 통과일 결산액 통과일 제1공화국 1949년 2119억 원 1949년 5월 3일[7] - - - 1950년 1055억 8518만 5700원 1950년 4월 22일[8] - - - 1951년 7357억 원 1951년 4월 30일[9] - - - 1952년 9819억 3365만 6400원 1952년 4월 18일[10] - - - 1953년 284억 2318만 6389환 1953년 4월 30일[11] - - - 1954년 1088억 환 1954년 3월 31일[12] - - - 1955년 1679억 8700만 환 1955년 7월 31일[13] - - - 1957년 2185억 환 1956년 12월 31일[14] - - - 1958년 3360억 환 1957년 12월 31일[15] - - - 1959년 3900억 환 1958년 12월 24일[16] - - - 제2공화국 1960년 4237억 6950만 1100환 1959년 12월 31일[17] - - - 1961년 5050억 4000만 환 민의원: 1960년 12월 8일[18] 참의원: 1960년 12월 28일[19] - - - 1962년 6891억 환 1961년 12월 31일[내용 25][20] - - - 1963년 768억 6600만 원 1962년 11월 14일[내용 25][21] - - - 제3공화국 1964년 698억 5335만 400원 1963년 12월 10일[내용 25][22] - - - 1965년 848억 5379만 5700원 1964년 12월 1일[23] - - - 1966년 1219억 7268만 9500원 1965년 12월 4일[24] - - - 1967년 1643억 4694만 400원 1966년 12월 8일[25] - - - 1968년 2214억 8228만 6800원 1967년 12월 29일[26] - - - 1969년 3243억 5203만 5500원 1968년 12월 2일[27] - - - 1970년 4327억 2200만 원 1969년 12월 22일[28] - - - 1971년 5242억 원 1970년 12월 19일[29] - - - 1972년 6472억 원 1971년 12월 2일[30] - - - 제4공화국 1973년 6593억 원 1972년 12월 2일[31] - - - 1974년 8477억 원 1973년 12월 2일[32] - - - 1975년 1조 2920억 원 1974년 12월 2일[33] - - - 1976년 2조 61억 7800만 원 1975년 12월 2일[34] - - - 1977년 2조 6593억 9700만 원 1976년 12월 2일[35] - - - 1978년 3조 5170억 원 1977년 12월 2일[36] - - - 1979년 4조 5338억 3600만 원 1978년 11월 14일[37] - - - 1980년 5조 8040억 6100만 원 1979년 12월 1일[38] - - - 제5공화국 1981년 7조 8511억 원 1980년 11월 29일[내용 26][39] - - - 1982년 9조 5781억 원 1981년 12월 2일[40] - - - 1983년 10조 4167억 원 1982년 12월 2일[41] - - - 1984년 10조 3862억 8900만 원 1983년 12월 2일[42] - - - 1985년 12조 2751억 1500만 원 1984년 12월 1일[43] - - - 1986년 13조 8500억 원 1985년 12월 2일[44] - - - 1987년 15조 5596억 2900만 원 1986년 12월 2일[45] - - - 노태우 정부 1988년 17조 4644억 2900만 원 1987년 10월 30일[46] - - 18조 9000억 원 1989년 19조 2284억 원 1988년 12월 2일[47] - - 21조 1000억 원 1990년 22조 6894억 원 1989년 12월 19일[48] - - 24조 5000억 원 1991년 26조 9798억 원 1990년 12월 18일[49] - - 27조 7000억 원 1992년 33조 2000억 원 1991년 12월 3일[50] - - 31조 원 김영삼 정부 1993년 38조 500억 원 1992년 11월 18일[51] - - 32조 8000억 원 1994년 43조 2500억 원 1993년 12월 7일[52] - - 34조 4000억 원 1995년 54조 8243억 원 1994년 12월 1일[53] - - 35조 6000억 원 1996년 62조 9626억 원 1995년 12월 2일[54] - - 45조 6000억 원 1997년 71조 4600억 원 1996년 12월 12일[55] - - 60조 3000억 원 김대중 정부 1998년 70조 2636억 원 1997년 11월 18일[56] - - 80조 4000억 원 1999년 84조 9376억 원 1998년 12월 9일[57] - - 98조 6000억 원 2000년 92조 6576억 원 1999년 12월 18일[58] - - 111조 2000억 원 2001년 100조 2246억 원 2000년 12월 26일[59] - - 121조 8000억 원 2002년 111조 9767억 원 2001년 12월 27일[60] - - 133조 8000억 원 노무현 정부 2003년 111조 7000억 원 2002년 11월 8일[61] - - 165조 8000억 원 2004년 118조 3000억 원 2003년 12월 30일[62] - - 203조 7000억 원 2005년 134조 3704억 원 2004년 12월 31일[63] - - 247조 9000억 원[64] 2006년 144조 8076억 원 2005년 12월 30일[65] - - 282조 7000억 원[64] 2007년 237조 140억 6812만 4000원 2006년 12월 27일[66] 196조 9046억 6666만 280원 2008년 11월 24일[67] 299조 2000억 원[64] 이명박 정부 2008년 257조 1656억 9077만 1000원 2007년 12월 28일[68] 222조 8935억 2299만 6690원 2009년 9월 29일[69] 309조 원[64] 2009년 284조 5339억 568만 1000원 2008년 12월 13일[70] 252조 1824억 4817만 4550원 2010년 10월 1일[71] 359조 6000억 원[64] 2010년 292조 8158억 6074만 1000원 2009년 12월 31일[72] 248조 6533억 5034만 5540원 2011년 8월 31일[73] 392조 2000억 원[64] 2011년 309조 566억 9289만 6000원 2010년 12월 8일[74] 258조 9457억 3869만 9850원 2012년 9월 3일[75] 420조 5000억 원[64] 2012년 325조 4076억 3178만 7000원 2011년 12월 31일[76] 274조 7611억 4728만 9670원 2013년 11월 28일[77] 443조 1000억 원[64] 박근혜 정부 2013년 341조 9677억 2593만 6000원 2013년 1월 1일[78] 286조 4050억 6544만 1620원 2014년 10월 2일[79] 489조 8000억 원[64] 2014년 355조 8051억 1905만 8000원 2014년 1월 1일[80] 291조 5113억 3122만 8140원 2015년 9월 8일[81] 533조 2000억 원[64] 2015년 375조 4032억 7755만 4000원 2014년 12월 2일[82] 319조 3906억 7642만 5020원 2016년 9월 2일[83] 591조 5000억 원[64] 2016년 386조 3995억 9937만 4000원 2015년 12월 3일[84] 332조 2108억 2030만 1720원 2017년 12월 5일[85] 626조 9000억 원[64] 문재인 정부 2017년 400조 5459억 4617만 2000원 2016년 12월 3일[86] 342조 8788억 4090만 510원 2018년 12월 7일[87] 660조 2000억 원[64] 2018년 428조 8339억 1256만 7000원 2017년 12월 6일[88] 708조 2000억 원[64] 2019년 469조 5751억 7690만 원 2018년 12월 8일[89] 741조 원[64] 비판[편집] 예결위는 예산과 결산을 동시에 맡는데 이 경우 예산안에만 관심을 보이며, 결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졸속 결산이라는 비판이 있다.[90] 또한 특별위원회로 설치되어 있다보니, 1년마다 위원들이 바뀌어 전문성이 떨어지고 졸속심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91]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의 대치로 인해 헌법에 규정한 법정 처리기한을 넘겨서 통과시키고 있다.[92][93] 같이 보기[편집]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의 조세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다만, 교육기관의 회계연도는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다음 해 2월 말일에 종료한다.[1] ↑ 정부 수립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회계연도가 4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이후 「재정법」의 개정으로 인해 1954회계연도는 1954년 4월 1일부터 1955년 6월 30일까지, 1955회계연도는 1955년 7월 1일부터 1956년 6월 30일까지, 1956회계연도는 1956년 7월 1일부터 1957년 12월 31일까지였으며, 1958년부터 지금처럼 회계연도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정해졌다. ↑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예산총계가 되는데, 이는 이중계산의 문제를 안고 있다. ↑ 내부거래 뿐 아니라 보전지출도 제하는데 보전지출이란 국채의 발행 또는 상환, 차입 또는 차입금의 상환 등 재정수지를 보전해 주는 것을 뜻한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55조 2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9조 6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2조 9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1조 3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39조 4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52조 5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6조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0조 7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6조 1694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4조 8881억 원이다. ↑ 세입세출예산안 총계표 및 순계표, 세입세출예산사업별 설명서, 계속비 명세서, 국고채무부담행위 설명서, 예산정원표와 예산안 편성기준 단가, 성과계획서, 국가재정운용계획 등 여러 부차적인 첨부서류도 함께 제출된다. 예산안과 첨부서류는 그 양이 막대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분석과 검토는 국회예산정책처와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실에서 실시된 뒤, 국회의원들에게 보고된다. ↑ 대통령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관행적으로 국무총리의 대독이 이루어진다. ↑ 세수의 증감을 초래하는지, 세입예산안에 반영이 되어 있는지 등을 살펴서 국회예산정책처의 의견을 참고해 국회의장이 지정한다. ↑ 이를 할당이라 하는데, 중앙행정기관이 다시 소속기관에 할당하는 것을 재배정이라 한다. 배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가 제출하고 기재부가 종합한 월별 자금계획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와 대통령의 승인을 거친 뒤 이루어진다. ↑ 전용, 이용, 이체는 「국가재정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조정은 예산집행지침에만 나와 있다. ↑ 「정부기업예산법」에 따른 네 개의 특별회계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한 개의 특별회계가 있다. ↑ 가 나 총계 기준 ↑ 국회 의결 전에 제출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는 예산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수정한 것이 된다. ↑ 1980년에는 추가경정예산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 ↑ 2006년까지는 일반회계만을 표시하였으며, 2007년부터는 특별회계와 기금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 가 나 다 국회가 아니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 국회가 아니라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참조주[편집] ↑ 「유아교육법」 제19조의8제1항, 「초·중등교육법」 제30조의3제1항,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 제11조제5항,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9조제2항,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8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2조 및 「국가회계법」 제5조 ↑ 「국가재정법」 제4조제1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3항 ↑ 「국가재정법」 제5조제1항 ↑ “今年度政府豫算遂通過”. 《경향신문》. 1949년 5월 3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總豫算案通過를보고”. 《경향신문》. 1950년 4월 25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今年度總豫算遂通過 財經委削減額中五億圓復活”. 《동아일보》. 1951년 5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国会 豫算案完全通過”. 《경향신문》. 1953년 4월 20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民議院 赤字外援獲得前提 86年度豫算案昨日通過”. 《동아일보》. 1953년 5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八七年度豫算案通過”. 《동아일보》. 1954년 4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31日밤 總豫算案通過”. 《경향신문》. 1955년 8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90年度豫算遂成立”. 《동아일보》. 1957년 1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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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0087919. 하연섭 (2016년 1월 25일). 《정부예산과 재무행정》. 다산출판사. 58 ~ 198쪽. ISBN 978897110454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_정부의_재정&oldid=23408332" 분류: 대한민국 정부재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일 (목) 15: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집행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 정부의 예산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문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大韓民國 政府- 財政)에 관한 사항을 다룬다. 목차 1 개요 1.1 2019년 재정총량 2 재정절차 2.1 편성 2.2 심사 2.3 집행 2.4 결산 3 종류 3.1 회계 3.2 기금 4 예산의 구분 5 역대 정부의 재정 6 비판 7 같이 보기 8 각주 8.1 내용주 8.2 참조주 9 참고문헌 개요[편집] 「국가재정법」 제1조에 의하면 재정은 국가의 예산·기금·결산·성과관리·국가채무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운용주체를 중심으로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운용수단을 중심으로 예산과 회계로, 성격을 중심으로 수입과 지출로 구분할 수 있다. 회계연도는 1월 1일에 시작하여 12월 31일에 종료한다.[내용 1][2][내용 2] 2019년 재정총량[편집] 재정총량은 일반적으로 총지출 개념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재정규모는 일반회계만을 의미하지만 특별회계의 규모도 크기 때문에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더한 값에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한 예산순계의 개념도 활용한다.[내용 3] 일반회계와 특별회계에 기금까지 더하여 내부거래를 제한 경우는 총지출이라고 한다.[내용 4]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이다. 하지만 한국은 관리재정수지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많은 선진국과 달리 연금이나 보험의 적립이 진행 중이라서 이로 인한 흑자로 인해 재정왜곡이 발생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총수입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수입 476.1조 원 447.2조 원 +28.9조 원 +6.46% 예산수입 321.4조 원 294.9조 원 +26.5조 원 +8.99% 기금수입 154.7조 원 152.2조 원 +2.5조 원 +1.64% 총지출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증감률 총지출 469.6조 원 428.8조 원 +40.8조 원 +9.51% 예산 328.9조 원 295조 원 +33.9조 원 +11.49% 기금 140.7조 원 133.9조 원 +6.8조 원 +5.08% 항목별 세입·세출예산 세입예산 금액 비율 수입관 수입항 내국세 259조 655억 5000만 원 54.42% 소득세 80조 3678억 원 16.88% 법인세 79조 2501억 원 16.65% 상속세 7조 2279억 원 1.52% 부가가치세 68조 7519억 원 14.44% 개별소비세 10조 2995억 원 2.16% 주세 3조 4351억 5000만 원 0.72% 증권거래세 4조 5339억 원 0.95% 인지세 9439억 원 0.20% 기타내국세 4조 2554억 원 0.89% 관세 9조 557억 원 1.90% 교통·에너지·환경세 14조 7766억 원 3.10% 교육세 4조 8648억 원 1.02% 사회보장기여금 69조 7472억 3400만 원 14.65% 농어촌특별세 4조 1799억 원 0.88% 종합부동산세 2조 8494억 원 0.60% 기업특별회계영업수입 6조 8954억 6800만 1000원 1.45% 양곡사업수입 3902억 8000만 원 0.08% 우정사업수입 5조 7048억 8400만 원 1.20% 조달사업수입 2018억 5200만 원 0.04% 책임운영기관사업수입 5984억 5200만 원 0.13% 재산수입 28조 7596억 4700만 원 6.04% 관유물대여료 1조 224억 1500만 원 0.21% 정부출자수입 1조 6363억 5800만 원 0.34% 전대차관이자수입 2300만 원 0.00% 기타이자수입 및 재산수입 26조 1008억 5100만 원 5.48% 경상이전수입 37조 1831억 8590만 원 7.81% 연금수입 13조 4449억 1000만 원 2.82% 벌금, 몰수금 및 과태료 3조 1309억 8700만 원 0.66% 변상금 및 위약금 2549억 2700만 원 0.05% 가산금 9079억 9100만 원 0.19% 기타경상이전수입 19조 4443억 7090만 원 4.08% 재화 및 용역판매수입 9조 6428억 7900만 원 2.02% 병원수입 189억 9100만 원 0.00% 교도소수입 748억 900만 원 0.02% 입장료수입 1325억 800만 원 0.03% 면허료 및 수수료 1조 1927억 8400만 원 0.25% 입학금 및 수업료 88억 5500만 원 0.00% 항공, 항만 및 용수수입 2374억 1200만 원 0.05% 실습수입 43억 5600만 원 0.00% 잡수입 7조 9551억 6400만 원 1.67% 수입대체경비수입 3641억 2200만 원 0.08% 관유물대여료 2500만 원 0.00% 입장료수입 154억 6800만 원 0.00% 면허료 및 수수료 3013억 300만 원 0.06% 잡수입 473억 2000만 원 0.01% 관유물매각대 3조 994억 3400만 원 0.65% 고정자산매각대 1668억 9400만 원 0.04% 토지 및 무형자산매각대 1조 9651억 1900만 원 0.41% 재고자산매각대 및 유동자산 9674억 2100만 원 0.20% 융자 및 전대차관원금회수 25조 5632억 1300만 원 5.37% 융자원금회수 25조 5608억 2500만 원 5.37% 전대차관원금회수 23억 8800만 원 0.00% 차입금 및 여유자금회수 유가증권매각대 277억 6800만 원 0.01% 계 476조 569억 90만 원 100.00% 세출예산 금액 비율 분야 부분 일반·지방행정 76조 5596억 8440만 원 16.30% 입법 및 선거관리 1조 289억 350만 원 0.22% 국정운영 5861억 3200만 원 0.12% 지방행정·재정지원 53조 2630억 6300만 원 11.34% 재정·금융 18조 3262억 1890만 원 3.90% 정부자원관리 8425억 2800만 원 0.18% 일반행정 2조 5128억 3900만 원 0.54% 공공질서 및 안전 20조 1317억 4150만 원 4.29% 법원 및 헌재 2조 651억 9000만 원 0.44% 법무 및 검찰 2조 651억 9000만 원 0.86% 경찰 11조 3557억 9900만 원 2.42% 해경 1조 3844억 9650만 원 0.29% 재난관리 1조 2647억 3100만 원 0.27% 통일·외교 5조 647억 5000만 원 1.08% 통일 1조 3621억 1900만 원 0.29% 외교·통상 3조 7026억 3100만 원 0.79% 국방 45조 3436억 5900만 원 9.66% 병력운영 15조 8353억 1600만 원 3.37% 전력유지 13조 9100억 6600만 원 2.96% 방위력개선 15조 3651억 1400만 원 3.27% 병무행정 2331억 6300만 원 0.05% 교육 70조 6489억 9500만 원 15.05% 유아 및 초중등교육 59조 3831억 6500만 원 12.65% 고등교육 10조 2575억 7200만 원 2.18% 평생·직업교육 8771억 원 0.19% 교육일반 1311억 5800만 원 0.03% 문화 및 관광 7조 2495억 200만 원 1.54% 문화예술 3조 1068억 8000만 원 0.66% 관광 1조 4139억 6800만 원 0.30% 체육 1조 4646억 7400만 원 0.31% 문화재 9007억 5500만 원 0.19% 문화 및 관광일반 3632억 2500만 원 0.08% 환경 7조 3971억 8800만 원 1.58% 해양환경 2875억 2000만 원 0.06% 환경일반 4738억 7300만 원 0.10% 물환경 3조 9463억 4600만 원 0.84% 자원순환 및 환경경제 6707억 6300만 원 0.14% 기후대기 및 환경안전 1조 3807억 7600만 원 0.29% 자연환경 6379억 1000만 원 0.14% 사회복지 148조 8769억 2200만 원 31.70% 기초생활보장 12조 7046억 4100만 원 2.71% 취약계층지원 3조 4019억 2300만 원 0.72% 공적연금 50조 3116억 4600만 원 10.71% 보훈 5조 5587억 6300만 원 1.18% 주택 25조 7308억 5100만 원 5.48% 사회복지일반 1조 2958억 3300만 원 0.28% 아동·보육 8조 1296억 5100만 원 1.73% 노인 13조 9776억 3000만 원 2.98% 여성·가족·청소년 1조 474억 7500만 원 0.22% 고용 19조 4598억 2600만 원 4.14% 노동 6조 7137억 6100만 원 1.43% 고용노동일반 5449억 2200만 원 0.12% 보건 12조 1203억 2700만 원 2.58% 보건의료 2조 5929억 7900만 원 0.55% 건강보험 9조 187억 3500만 원 1.92% 식품의약안전 5086억 1300만 원 0.11% 농림수산 20조 303억 2900만 원 4.27% 농업·농촌 14조 9142억 7900만 원 3.18% 임업·산촌 2조 1742억 7900만 원 0.46% 수산·어촌 2조 2447억 5300만 원 0.48% 식품업 6970억 1800만 원 0.15% 산업·중소기업 및 에너지 18조 7641억 1800만 원 4.00% 산업금융지원 2000억 원 0.04% 무역 및 투자유치 6333억 4900만 원 0.15% 에너지 및 자원개발 3조 4194억 600만 원 0.73% 산업·중소기업일반 5720억 6701만 9000원 0.13% 산업혁신지원 3조 8048억 5100만 원 0.81% 창업 및 벤처 3조 2368억 7800만 원 0.69%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육성 6조 5330억 7100만 원 1.39% 지식재산일반 2848억 100만 원 0.06% 교통 및 물류 15조 6546억 1300만 0원 3.33% 도로 5조 8742억 2500만 원 1.25% 철도 5조 5162억 6900만 원 1.17% 해운·항만 1조 7171억 6600만 원 0.37% 항공·공항 1561억 1500만 원 0.03% 물류등기타 2조 3908억 3800만 원 0.51% 통신 7조 3319억 3100만 원 1.56% 방송통신 2962억 4700만 원 0.06% 우정 5조 7126억 5100만 원 1.22% 정보통신 1조 3230억 3300만 원 0.28% 국토 및 지역개발 4조 984억 9600만 원 0.87% 수자원 1조 7311억 4000만 원 0.37% 지역 및 도시 2조 204억 8100만 원 0.43% 산업단지 3468억 7500만 원 0.07% 과학기술 7조 3029억 2100만 원 1.56% 과학기술연구지원 3조 7659억 800만 원 0.80% 과학기술일반 4843억 3000만 원 0.10% 과학기술인력 및 문화 2229억 3400만 원 0.05% 과학기술연구개발 2조 8297억 4900만 원 0.60% 예비비 3조 원 0.64% 계 469조 5751억 7690만 원 100.00% 연도별 재원배분 구분 2019년 2018년 2017년 2016년 2015년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예산액 증감률 보건·복지·고용 161조 원 △ 11.3% 144조 7000억 원 △ 11.7% 129조 5000억 원 △ 4.9% 123조 8828억 원 △ 6.2% 115조 6824억 원 △ 8.5% 교육 70조 6000억 원[내용 5] △ 10.1% 64조 2000억 원[내용 6] △ 11.8% 57조 4000억 원[내용 7] △ 7.9% 53조 2613억 원[내용 8] △ 0.5% 52조 9187억 원[내용 9] △ 4.6% 문화·체육·관광 7조 2000억 원 △ 12.2% 6조 5000억 원 ▽ 6.3% 6조 9000억 원 △ 4.0% 6조 6780억 원 △ 7.5% 6조 1201억 원 △ 10.4% 환경 7조 4000억 원 △ 7.2% 6조 9000억 원 ▽ 0.3% 6조 9000억 원 △ 0.8% 6조 9424억 원 △ 0.4% 6조 8119억 원 △ 4.0% R&D 20조 5000억 원 △ 4.4% 19조 7000억 원 △ 1.1% 19조 5000억 원 △ 1.9% 19조 1363억 원 △ 0.2% 18조 8900억 원 △ 5.9%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8조 8000억 원 △ 15.1% 16조 3000억 원 △ 1.5% 16조 원 ▽ 1.5% 16조 3000억 원 ▽ 2.0% 16조 4216억 원 ▽ 7.0% SOC 19조 8000억 원 △ 4.0% 19조 원 ▽ 14.2% 22조 1000억 원 ▽ 6.6% 23조 7119억 원 ▽ 6.0% 24조 8069억 원 △ 3.0% 농림·수산·식품 20조 원 △ 1.5% 19조 7000억 원 △ 0.6% 19조 6000억 원 △ 1.2% 19조 4165억 원 △ 0.1% 19조 3065억 원 △ 3.0% 국방 46조 7000억 원 △ 8.2% 43조 2000억 원 △ 7.0% 40조 3000억 원 △ 4.0% 38조 8556억 원 △ 4.0% 37조 4560억 원 △ 5.2% 외교·통일 5조 1000억 원 △ 7.2% 4조 7000억 원 △ 3.5% 4조 6000억 원 ▽ 2.4% 4조 7693억 원 △ 3.9% 4조 4956억 원 △ 6.9% 공공질서·안전 20조 1000억 원 △ 5.5% 19조 1000억 원 △ 5.1% 18조 1000억 원 △ 3.7% 17조 5562억 원 △ 3.0% 16조 9431억 원 △ 7.1% 일반·지방행정 76조 6000억 원[내용 10] △ 10.9% 69조 원[내용 11] △ 8.9% 63조 3000억 원[내용 12] △ 6.4% 59조 5751억 원[내용 13] △ 4.9% 58조 264억 원[내용 14] △ 3.4% 계 469조 9000억 원 △ 9.5% 428조 8000억 원 △ 7.1% 400조 5000억 원 △ 3.7% 386조 4000억 원 △ 3.0% 375조 4000억 원 △ 5.7% 재정수지 및 국가채무 구분 2019년 예산 2018년 예산 증감액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6.5조 원 18.5조 원 +11.9조 원 관리재정수지 37.6조 원 28.3조 원 -9.3조 원 -2.0% 국가채무 748.8조 원 708.2조 원 +40.6조 원 +39.4% 재정절차[편집] 편성[편집] 예산편성은 정부의 사업과 계획에 사용될 재원을 추계하고 각종 사업을 지원할 지출 규모를 확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편성은 전년도 12월까지 기획재정부가 중기사업계획 수립지침을 각 부처에 통보하면서 시작된다. 이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1월 31일까지 당해 회계연도부터 5회계연도 이상의 기간 동안의 신규사업 및 주요 계속사업에 대한 중기사업계획서를 기재부에 제출하고 예산실은 개략적인 거시예산 규모를 전망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산안편성지침을 마련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3월 31일까지 각 부처에 통보한다. 예산안편성지침은 예산안 편성의 기초가 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각 부처가 공통적으로 준수할 예산편성의 원칙과 기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거쳐 부처별로 지출한도액을 통보하게 된다. 예산안편성지침과 지출한도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실국별로 예산요구서를 작성하며 이를 기획조정실 혹은 기획관리관실에서 취합하여 부처 차원의 예산요구서를 작성하여 5월 31일까지 기재부에 제출한다. 예산실은 부처별로 제출받은 예산요구서를 취합하여 예산안편성지침에 어긋나는 예산요구를 삭감하는 등 조정을 거친 뒤 예산심의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처음부터 남겨두었던 여유재원을 바탕으로 장관 협의, 당정 협의를 거쳐 신규사업에 대한 검토를 수행하게 된다. 당정 협의를 거친 뒤에는 예산실에 의해 예산안이 완성되고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친 뒤 9월 3일까지 국회에 송부된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예산편성에서 과거에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사업정책 단위, 비목유형 및 기준단가 등 예산안편성지침을 세세한 정보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높은 구속력을 가져 사실상 기재부가 전체 예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총액배분 자율편성(top-down) 방식을 도입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은 기재부가 총지출규머와 분야별 지출한도 및 재정투자 방향과 같은 거시적 기준과 정보만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사업의 예산 배분이나 원칙은 각 부처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다. 과거의 상향식 방식은 기재부가 세부사업 하나하나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이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을 도입한 이후에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도입하여 이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하고 국무위원,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하여 정책방향과 투자계획, 총수입 및 총지출 규모와 재원배분방향 등을 토의한다. 이 회의는 4월 말에서 5월 초에 열리는데, 분야별·부처별 지출한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심사[편집] 예산심사는 행정부가 작성한 예산안을 국회가 심의하는 작업을 말한다. 심사는 정부로부터 예산안이 제출[내용 15]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출된 예산안은 본회의에 보고되고 이후 정부의 시정연설[내용 16]을 거쳐 상임위원회의 예비심사를 받게 된다. 상임위 차원의 예비심사는 보통 국정감사와 추석연휴가 지난 10월에 이루어지는데 기본적인 사항만 심사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질의가 이루어진다. 소위원회의 결정을 상임위가 승인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이관되며 여기서는 종합적인 정책질의가 이루어진다. 원칙적으로는 예결위만이 정부예산안에 대한 수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예산안 편성의 마지막 단계가 된다. 예결위에서 합의를 보게 되면 곧 본희외에 보고되고 이후 의결을 거쳐 정식으로 예산을 확정하게 된다. 「대한민국헌법」에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2월 2일)까지 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세입예산안 부수법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도 정부의 예산안이 회계연도가 새로 시작하는 날까지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하면 정부는 준예산을 짜서 최소한의 행정활동을 하게 된다. 만약 예산안이 국회 의결을 받았더라도 세입예산과 관련된 법률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지 못하면 예산대로 집행하는 것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2012년 「국회법」을 개정하여 2014년부터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정부의 예산안과 세입예산 부수법안임을 표시한 법안[내용 17]을 11월 30일까지 심사를 마치도록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12월 1일 자동적으로 본회의에 부의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집행[편집]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출하는 작업을 집행이라 한다. 집행은 세금이나 기금에 납입된 현금, 금융자산과 같은 국고금의 징수와 수납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납된 재원은 각 부처가 작성한 예산배정요구서에 따라 기재부가 할당[내용 18]되고 각 부처는 세출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출원인행위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집행이다. 세출예산은 예산에서 규정된 목적 외의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효율성과 신축성을 제고하기 위해 예외를 인정된다. 전용(轉用)은 기재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세항 또는 목의 금액의 금액을 상호 융통하는 제도이며, 이용(移用)은 법률상 지출의무의 이행에 필요한 필수적 경비의 부족액이 발생하거나 재해대책 재원 등으로 사용할 시급한 필요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장·관·항 간에 상호 융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법령의 제정 및 개정, 폐지로 중앙행정기관의 직무와 권한에 변동이 있을 때에는 사업의 이관에 따라 예산을 이체(移替)할 수 있으며, 세목 간 상호 융통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조정을 할 수 있다.[내용 19] 결산[편집] 한 회계연도 내에서 세입예산의 모든 수입과 세출예산의 모든 지출을 계수로 표시하는 작업을 결산이라 한다. 이때, 회계연도는 12월 31일에 끝나지만 세입과 세출의 출납에 관한 사무는 다음 연도 2월 10일까지 완결한다. 각 부처는 회계와 기금을 통합한 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2월 마지막 날까지 기재부에 제출하고 기재부는 이를 취합한 국가결산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10일까지 감사원에 제출한다. 이후 감사원은 세입세출 결산·재무제표 검사·성과보고서 검사를 거친 뒤 5월 20일까지 기재부에 송부하고 기재부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5월 31일까지 국회에 보고한 뒤 국회의 의결을 받게 된다. 국회의 의결 과정은 예산안 처리 과정과 비슷하다. 성인지 결산서 정부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예산의 수혜를 받고 예산이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집행되었는지를 평가하는 보고서이다. 집행실적, 성평등 효과분석 및 평가 등을 포함한다. 종류[편집] 회계[편집] 회계는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로 구분한다.[3] 일반회계 조세수입 등을 주요 세입으로 하여 국가의 일반적인 세출에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회계다.[4] 행정부 뿐 아니라 입법부 및 사법부 등 특정 세입이 없는 기관들의 예산은 모두 일반회계에 포함된다. 특별회계 국가에서 특정한 사업을 운영하고자 할 때, 특정한 자금을 보유하여 운용하고자 할 때, 특정한 세입으로 특정한 세출에 충당함으로써 일반회계와 구분하여 회계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로써 설치하는 회계다.[5] 기업형태로 운영되는 정부사업 관련 기업특별회계[내용 20]와 개별 법률에 근거하여 설치된 기타특별회계로 구분된다. 이름 소관부처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교도작업특별회계 법무부 「교도작업의 운영 및 특별회계에 관한 법률」 제8조제1항 1268억 1700만 원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기획재정부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제30조 10조 7485억 3100만 원 우편사업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1호 4조 9197억 5400만 원 우체국예금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2호 3조 928억 7700만 원 양곡관리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3호 2조 748억 3400만 원 조달특별회계 조달청 「정부기업예산법」 제3조제4호 3942억 1000만 원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촌구조개선 특별회계법」 11조 9029억 6500만 원 등기특별회계 대법원 「등기특별회계법」 3146억 7400만 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 특별회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44조제1항 2997억 3700만 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특별회계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제42조제1항 804억 7600만 원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 6조 205억 5900만 원 우체국보험특별회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체국보험특별회계법」 9887억 4400만 원 주한미군기지이전특별회계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9조제1항 4933억 1800만 원 책임운영기관특별회계 행정안전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조 855억 6300만 원 환경개선특별회계 환경부 「환경정책기본법」 제45조제1항 4조 7670억 6500만 원 국방·군사시설이전특별회계 국방부 「국방·군사시설이전 특별회계법」 7921억 4100만 원 혁신도시건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33조제1항 2646억 3200만 원 교통시설특별회계 국토교통부 「교통시설특별회계법」 15조 7898억 4800만 원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 교육부 「유아교육지원특별회계법」 3조 8153억 3800만 원 기금[편집]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하여 설치하는 자금으로 정부출연금이나 일반회계로부터의 전입금을 수입원으로 한다.[6] 특정한 재정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관리·운영하는 사업성기금, 연금지출과 보험지출에 대비하여 기여금과 보험료 등의 작므을 운용하는 사회보험성기금, 특정사업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증·보험 등을 제공하여 금융활동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금융성기금, 특정 자금을 모아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주체에게 전달하는 계정성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름 유형 소관부처 관리주체 근거법률 2018년 세출예산[내용 21] 고용보험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고용보험법」 제78조제1항 17조 659억 900만 원 공공자금관리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2조 175조 1957억 9400만 원 공무원연금기금 보험성 인사혁신처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법」 제73조제1항 21조 2478억 2300만 원 공적자금상환기금 계정성 금융위원회 「공적자금상환기금법」 제3조제1항 8조 7228억 4600만 원 과학기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기본법」 제22조제1항 1651억 6000만 원 관광진흥개발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관광진흥개발기금법」 제2조제1항 1조 2370억 1100만 원 국민건강증진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증진법」 제22조제1항 4조 2307억 5200만 원 국민연금기금 보험성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법」 제101조제1항 119조 1652억 1900만 원 국민체육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육진흥공단 「국민체육진흥법」 제19조제1항 2조 3492억 9400만 원 군인복지기금 사업성 국방부 「군인복지기금법」 제3조 8563억 7200만 원 군인연금기금 보험성 국방부 「군인연금법」 제37조제1항 3조 4267억 2800만 원 근로복지진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기본법」 제87조 3593억 4900만 원 금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금강수계위원회 「금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1318억 100만 원 기술보증기금 금융성 중소벤처기업부 기술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법」 제12조제1항 2조 5923억 8100만 원 낙동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낙동강수계위원회 「낙동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3조 2525억 1000만 원 남북협력기금 사업성 통일부 「남북협력기금법」 제3조 1조 4902억 9800만 원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협중앙회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법」 제4조제1항 1조 7218억 8600만 원 농산물가격안정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제54조 2조 4025억 2400만 원 농어가목돈마련저축장려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농어가목돈마련저축에 관한 법률」 제7조제1항 720억 5600만 원 농어업재해보험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어업재해보험법」 제21조 4094억 8900만 원 대외경제협력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기금법」 제3조 1조 3673억 8300만 원 문화예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법」 제16조제1항 4685억 3300만 원 방송통신발전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제24조 1조 2579억 500만 원 보훈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보훈기금법」 제3조제1항 8039억 5000만 원 복권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복권 및 복권기금법」 제21조제1항 5조 6373억 2800만 원 사립학교교직원 연금기금 보험성 교육부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53조의2제1항 12조 1104억 3200만 원 산업기반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기획재정부 신용보증기금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제30조제1항 5813억 6900만 원 산업재해보상보험및예방기금 보험성 고용노동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5조제1항 15조 1137억 7000만 원 무역보험기금 금융성 산업통상자원부 한국무역보험공사 「무역보험법」 제30조 3조 9799억 4700만 원 언론진흥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4조제1항 269억 7800만 원 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신용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법」 6조 9969억 7500만 원 농업소득보전직접지불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농업소득의 보전에 관한 법률」 제19조 2760억 3900만 원 양곡증권정리기금 계정성 농림축산식품부 「양곡관리법」 제25조제1항 4300억 1100만 원 수산발전기금 사업성 해양수산부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제46조 7524억 8100만 원 양성평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기본법」 제42조제1항 3911억 9500만 원 영산강·섬진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영산강·섬진강수계위원회 「영산강·섬진강수계 물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 913억 8100만 원 예금보험기금채권상환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예금보험공사 「예금자보호법」 제26조의3제1항 3조 6451억 2200만 원 산업기술진흥및사업화촉진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혁신 촉진법」 제37조의2 1504억 7200만 원 외국환평형기금 계정성 기획재정부 「외국환거래법」 제13조제1항 99조 2428억 원 원자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원자력 진흥법」 제17조제1항 4274억 2600만 원 응급의료기금 사업성 보건복지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19조제1항 3665억 3500만 원 임금채권보장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임금채권보장법」 제17조 8769억 원 자유무역협정 이행지원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13조제1항 7117억 4400만 원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 기금 사업성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68조 1조 757억 400만 원 전력산업기반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사업법」 제48조 3조 8168억 700만 원 정보통신진흥기금 사업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산업 진흥법」 제41조 1조 3066억 1400만 원 주택도시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주택도시기금법」 제3조 77조 3937억 6200만 원 중소기업창업 및 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진흥공단 「중소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63조 7조 9623억 4300만 원 지역신문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지역신문발전지원 특별법」 제13조제1항 86억 4900만 원 청소년육성기금 사업성 여성가족부 「청소년 기본법」 제53조제1항 1576억 700만 원 축산발전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축산법」 제43조제1항 1조 170억 7800만 원 한강수계관리기금 사업성 환경부 한강수계위원회 「한강수계 상수원수질개선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20조 5571억 2300만 원 국제교류기금 사업성 외교부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교류재단법」 제13조제1항 1762억 7200만 원 농지관리기금 사업성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제31조 3조 1374억 9600만 원 사학진흥기금 사업성 교육부 한국사학진흥재단 「한국사학진흥재단법」 제17조 5293억 5200만 원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금융성 금융위원회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법」 제55조 6조 6483억 800만 원 영화발전기금 사업성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3조제1항 2649억 5000만 원 순국선열·애국지사사업기금 사업성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27조제1항 1550억 1400만 원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 사업성 산업통상자원부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28조 5조 973억 200만 원 문화재보호기금 사업성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법」 제3조 1307억 7000만 원 석면피해구제기금 사업성 환경부 「석면피해구제법」 제24조제1항 331억 원 범죄피해자보호기금 사업성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 제3조 1011억 200만 원 국유재산관리기금 사업성 기획재정부 「국유재산법」 제26조의2 1조 5110억 8300만 원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사업성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 2조 9019억 4200만 원 사법서비스진흥기금 사업성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탁법」 제28조 745억 6700만 원 자동차사고 피해지원기금 사업성 국토교통부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제39조의11 2335억 2900만 원 국제질병퇴치기금 사업성 외교부 「국제질병퇴치기금법」 제3조제1항 858억 7200만 원 예산의 구분[편집] 본예산 행정부가 편성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을 말한다. 수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이 국회에서 의결되기 전에 예산안의 일부를 수정하여 제출한 예산이다.[내용 22] 추가경정예산에 대해서도 수정예산 제출이 가능하다. 1970년과 1981년, 2009년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내용 23] 추가경정예산 행정부가 제출하고 국회를 통과한 예을 추가·변경하는 예산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경기침체 등의 이유로 편성되는데 본예산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의결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주로 임시국회에서 심의되기 때문에 심도 있는 심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준예산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국회에서 예산이 성립되지 못할 경우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도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서 설치된 기관 또는 시설의 유지·운영, 법률상의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이라는 경우에만 집행이 가능하도록 「대한민국헌법」 제54조제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회의 동의 없이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집행이 가능하다. 후에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면 준예산으로 지출한 부분은 본예산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간주한다. 새 회계연도가 개시되어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가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 가예산은 첫 1개월 동안 집행할 예산만 우선적으로 국회로부터 승인을 받는 제도인데, 한국은 1960년까지 사용하고 이후 준예산 제도로 변경되었다. 가예산은 실제로 편성한 예가 있지만 준예산은 실제로 집행한 적은 없다. 역대 정부의 재정[편집] 다음은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정부의 예산액과 부채액을 표시한 것이다.[내용 24] 구분 회계연도 예산 결산 부채 예산액 통과일 결산액 통과일 제1공화국 1949년 2119억 원 1949년 5월 3일[7] - - - 1950년 1055억 8518만 5700원 1950년 4월 22일[8] - - - 1951년 7357억 원 1951년 4월 30일[9] - - - 1952년 9819억 3365만 6400원 1952년 4월 18일[10] - - - 1953년 284억 2318만 6389환 1953년 4월 30일[11] - - - 1954년 1088억 환 1954년 3월 31일[12] - - - 1955년 1679억 8700만 환 1955년 7월 31일[13] - - - 1957년 2185억 환 1956년 12월 31일[14] - - - 1958년 3360억 환 1957년 12월 31일[15] - - - 1959년 3900억 환 1958년 12월 24일[16] - - - 제2공화국 1960년 4237억 6950만 1100환 1959년 12월 31일[17] - - - 1961년 5050억 4000만 환 민의원: 1960년 12월 8일[18] 참의원: 1960년 12월 28일[19] - - - 1962년 6891억 환 1961년 12월 31일[내용 25][20] - - - 1963년 768억 6600만 원 1962년 11월 14일[내용 25][21] - - - 제3공화국 1964년 698억 5335만 400원 1963년 12월 10일[내용 25][22] - - - 1965년 848억 5379만 5700원 1964년 12월 1일[23] - - - 1966년 1219억 7268만 9500원 1965년 12월 4일[24] - - - 1967년 1643억 4694만 400원 1966년 12월 8일[25] - - - 1968년 2214억 8228만 6800원 1967년 12월 29일[26] - - - 1969년 3243억 5203만 5500원 1968년 12월 2일[27] - - - 1970년 4327억 2200만 원 1969년 12월 22일[28] - - - 1971년 5242억 원 1970년 12월 19일[29] - - - 1972년 6472억 원 1971년 12월 2일[30] - - - 제4공화국 1973년 6593억 원 1972년 12월 2일[31] - - - 1974년 8477억 원 1973년 12월 2일[32] - - - 1975년 1조 2920억 원 1974년 12월 2일[33] - - - 1976년 2조 61억 7800만 원 1975년 12월 2일[34] - - - 1977년 2조 6593억 9700만 원 1976년 12월 2일[35] - - - 1978년 3조 5170억 원 1977년 12월 2일[36] - - - 1979년 4조 5338억 3600만 원 1978년 11월 14일[37] - - - 1980년 5조 8040억 6100만 원 1979년 12월 1일[38] - - - 제5공화국 1981년 7조 8511억 원 1980년 11월 29일[내용 26][39] - - - 1982년 9조 5781억 원 1981년 12월 2일[40] - - - 1983년 10조 4167억 원 1982년 12월 2일[41] - - - 1984년 10조 3862억 8900만 원 1983년 12월 2일[42] - - - 1985년 12조 2751억 1500만 원 1984년 12월 1일[43] - - - 1986년 13조 8500억 원 1985년 12월 2일[44] - - - 1987년 15조 5596억 2900만 원 1986년 12월 2일[45] - - - 노태우 정부 1988년 17조 4644억 2900만 원 1987년 10월 30일[46] - - 18조 9000억 원 1989년 19조 2284억 원 1988년 12월 2일[47] - - 21조 1000억 원 1990년 22조 6894억 원 1989년 12월 19일[48] - - 24조 5000억 원 1991년 26조 9798억 원 1990년 12월 18일[49] - - 27조 7000억 원 1992년 33조 2000억 원 1991년 12월 3일[50] - - 31조 원 김영삼 정부 1993년 38조 500억 원 1992년 11월 18일[51] - - 32조 8000억 원 1994년 43조 2500억 원 1993년 12월 7일[52] - - 34조 4000억 원 1995년 54조 8243억 원 1994년 12월 1일[53] - - 35조 6000억 원 1996년 62조 9626억 원 1995년 12월 2일[54] - - 45조 6000억 원 1997년 71조 4600억 원 1996년 12월 12일[55] - - 60조 3000억 원 김대중 정부 1998년 70조 2636억 원 1997년 11월 18일[56] - - 80조 4000억 원 1999년 84조 9376억 원 1998년 12월 9일[57] - - 98조 6000억 원 2000년 92조 6576억 원 1999년 12월 18일[58] - - 111조 2000억 원 2001년 100조 2246억 원 2000년 12월 26일[59] - - 121조 8000억 원 2002년 111조 9767억 원 2001년 12월 27일[60] - - 133조 8000억 원 노무현 정부 2003년 111조 7000억 원 2002년 11월 8일[61] - - 165조 8000억 원 2004년 118조 3000억 원 2003년 12월 30일[62] - - 203조 7000억 원 2005년 134조 3704억 원 2004년 12월 31일[63] - - 247조 9000억 원[64] 2006년 144조 8076억 원 2005년 12월 30일[65] - - 282조 7000억 원[64] 2007년 237조 140억 6812만 4000원 2006년 12월 27일[66] 196조 9046억 6666만 280원 2008년 11월 24일[67] 299조 2000억 원[64] 이명박 정부 2008년 257조 1656억 9077만 1000원 2007년 12월 28일[68] 222조 8935억 2299만 6690원 2009년 9월 29일[69] 309조 원[64] 2009년 284조 5339억 568만 1000원 2008년 12월 13일[70] 252조 1824억 4817만 4550원 2010년 10월 1일[71] 359조 6000억 원[64] 2010년 292조 8158억 6074만 1000원 2009년 12월 31일[72] 248조 6533억 5034만 5540원 2011년 8월 31일[73] 392조 2000억 원[64] 2011년 309조 566억 9289만 6000원 2010년 12월 8일[74] 258조 9457억 3869만 9850원 2012년 9월 3일[75] 420조 5000억 원[64] 2012년 325조 4076억 3178만 7000원 2011년 12월 31일[76] 274조 7611억 4728만 9670원 2013년 11월 28일[77] 443조 1000억 원[64] 박근혜 정부 2013년 341조 9677억 2593만 6000원 2013년 1월 1일[78] 286조 4050억 6544만 1620원 2014년 10월 2일[79] 489조 8000억 원[64] 2014년 355조 8051억 1905만 8000원 2014년 1월 1일[80] 291조 5113억 3122만 8140원 2015년 9월 8일[81] 533조 2000억 원[64] 2015년 375조 4032억 7755만 4000원 2014년 12월 2일[82] 319조 3906억 7642만 5020원 2016년 9월 2일[83] 591조 5000억 원[64] 2016년 386조 3995억 9937만 4000원 2015년 12월 3일[84] 332조 2108억 2030만 1720원 2017년 12월 5일[85] 626조 9000억 원[64] 문재인 정부 2017년 400조 5459억 4617만 2000원 2016년 12월 3일[86] 342조 8788억 4090만 510원 2018년 12월 7일[87] 660조 2000억 원[64] 2018년 428조 8339억 1256만 7000원 2017년 12월 6일[88] 708조 2000억 원[64] 2019년 469조 5751억 7690만 원 2018년 12월 8일[89] 741조 원[64] 비판[편집] 예결위는 예산과 결산을 동시에 맡는데 이 경우 예산안에만 관심을 보이며, 결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졸속 결산이라는 비판이 있다.[90] 또한 특별위원회로 설치되어 있다보니, 1년마다 위원들이 바뀌어 전문성이 떨어지고 졸속심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91] 예산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의 대치로 인해 헌법에 규정한 법정 처리기한을 넘겨서 통과시키고 있다.[92][93] 같이 보기[편집]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의 조세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다만, 교육기관의 회계연도는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다음 해 2월 말일에 종료한다.[1] ↑ 정부 수립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회계연도가 4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이후 「재정법」의 개정으로 인해 1954회계연도는 1954년 4월 1일부터 1955년 6월 30일까지, 1955회계연도는 1955년 7월 1일부터 1956년 6월 30일까지, 1956회계연도는 1956년 7월 1일부터 1957년 12월 31일까지였으며, 1958년부터 지금처럼 회계연도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정해졌다. ↑ 회계 간 내부거래를 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예산총계가 되는데, 이는 이중계산의 문제를 안고 있다. ↑ 내부거래 뿐 아니라 보전지출도 제하는데 보전지출이란 국채의 발행 또는 상환, 차입 또는 차입금의 상환 등 재정수지를 보전해 주는 것을 뜻한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55조 2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9조 6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2조 9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41조 3000억 원이다. ↑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39조 4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52조 5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6조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40조 7000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6조 1694억 원이다. ↑ 지방교부세는 34조 8881억 원이다. ↑ 세입세출예산안 총계표 및 순계표, 세입세출예산사업별 설명서, 계속비 명세서, 국고채무부담행위 설명서, 예산정원표와 예산안 편성기준 단가, 성과계획서, 국가재정운용계획 등 여러 부차적인 첨부서류도 함께 제출된다. 예산안과 첨부서류는 그 양이 막대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분석과 검토는 국회예산정책처와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실에서 실시된 뒤, 국회의원들에게 보고된다. ↑ 대통령이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관행적으로 국무총리의 대독이 이루어진다. ↑ 세수의 증감을 초래하는지, 세입예산안에 반영이 되어 있는지 등을 살펴서 국회예산정책처의 의견을 참고해 국회의장이 지정한다. ↑ 이를 할당이라 하는데, 중앙행정기관이 다시 소속기관에 할당하는 것을 재배정이라 한다. 배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가 제출하고 기재부가 종합한 월별 자금계획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와 대통령의 승인을 거친 뒤 이루어진다. ↑ 전용, 이용, 이체는 「국가재정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조정은 예산집행지침에만 나와 있다. ↑ 「정부기업예산법」에 따른 네 개의 특별회계와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한 개의 특별회계가 있다. ↑ 가 나 총계 기준 ↑ 국회 의결 전에 제출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는 예산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수정한 것이 된다. ↑ 1980년에는 추가경정예산에 수정예산을 짠 적이 있다. ↑ 2006년까지는 일반회계만을 표시하였으며, 2007년부터는 특별회계와 기금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 가 나 다 국회가 아니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 국회가 아니라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의결을 받았다. 참조주[편집] ↑ 「유아교육법」 제19조의8제1항, 「초·중등교육법」 제30조의3제1항,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 제11조제5항,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9조제2항,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8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2조 및 「국가회계법」 제5조 ↑ 「국가재정법」 제4조제1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2항 ↑ 「국가재정법」 제4조제3항 ↑ 「국가재정법」 제5조제1항 ↑ “今年度政府豫算遂通過”. 《경향신문》. 1949년 5월 3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總豫算案通過를보고”. 《경향신문》. 1950년 4월 25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今年度總豫算遂通過 財經委削減額中五億圓復活”. 《동아일보》. 1951년 5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国会 豫算案完全通過”. 《경향신문》. 1953년 4월 20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民議院 赤字外援獲得前提 86年度豫算案昨日通過”. 《동아일보》. 1953년 5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八七年度豫算案通過”. 《동아일보》. 1954년 4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31日밤 總豫算案通過”. 《경향신문》. 1955년 8월 2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90年度豫算遂成立”. 《동아일보》. 1957년 1월 1일. 2018년 1월 1일에 확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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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0087919. 하연섭 (2016년 1월 25일). 《정부예산과 재무행정》. 다산출판사. 58 ~ 198쪽. ISBN 978897110454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대한민국_정부의_재정&oldid=23408332" 분류: 대한민국 정부재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1월 3일 (목) 15: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대한민국 정부의 제정 중 교도작업특별회계를 담당하고있는 부서는 어디일까? |
고려 창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 창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려 창왕高麗 昌王 지위 고려 제33대 국왕 재위 1388년 6월 9일 ~ 1389년 11월 15일 전임자 우왕 후임자 공양왕 섭정 왕대비 죽주 안씨(1388년 6월 ~ 1388년 7월) 이색(1388년 7월 ~ 1388년 10월) 이성계(1388년 10월 ~ 1389년 11월) 부왕 우왕 이름 휘 왕창(王昌) 신상정보 출생일 1380년 9월 6일(1380-09-06) 사망일 1389년 12월 31일 (9세) 부친 우왕 모친 근비 이씨 배우자 無 자녀 無 종교 불교 → 유교(성리학) → 무종교 창왕(昌王, 1380년 9월 6일(음력 8월 7일) ~ 1389년 12월 31일(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3대 국왕(재위: 1388년 (음력 6월 9일)[1]~ 1389년 (음력 11월 15일)[2])이다. 목차 1 이력 2 즉위와 폐위 배경 3 치세 4 생애 4.1 출생과 유년기 4.2 즉위 4.3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 4.4 외교와 국방 4.5 폐위와 죽음 5 기타 6 가계 6.1 신돈의 손자설 7 창왕이 등장한 작품 8 각주 이력[편집] 휘는 창(昌)이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식 시호는 없다. 이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연관이 있다. 후에 고려의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그밖에 후폐왕(後廢王)이라 부르기도 한다.[3] 즉위와 폐위 배경[편집]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인 왕창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건이 발각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집행관 유순(柳珣)에게 시해되었다. 치세[편집] 1388년 6월에서 1389년 11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388년 6월에서 1388년 7월까지 왕대비 안씨가 1개월간 섭정하였고 1388년 7월에서 1388년 10월까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3개월간 섭정하였으며 1388년 10월에서 1389년 11월까지 이성계(李成桂)가 1년 1개월간 섭정을 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창왕의 이름은 창(昌)으로, 우왕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고성(固城)로 개경유수를 지낸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사건 직후 이성계(李成桂), 정몽주, 정도전 등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제 폐위되고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9세였다. 즉위[편집] 그러나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이성계의 섭정 체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판단을 하여 정사를 수행하려 하였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권문세족들이 장악하여 유명무실화된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고, 공물 징수를 다시 조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들로부터 사적인 목적으로 선물이나 공물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주게 하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는 계속 자신들의 개혁 정책을 왕에게 상주하여 허락할 때까지 엎드려 있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를 피휘하여 이를 고치게 하여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전제(田制)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상서(上書)하였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농지를 농민에게 줄 것을 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편집] 군부의 성장을 염려하여 무신정권의 상설기구인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자 수용하였고,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의 개혁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들을 내심 경계하던 그는 근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부왕 우왕의 복위운동을 추진한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여주시)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신진사대부들의 주장을 그는 수용하게 되었고 조정은 신진사대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1389년초 그해 사관(史官) 최견 등이 상소하여 기록 보존을 위해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직과 충수찬(充修撰) 이하는 견문록(見聞錄)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이때부터 왕의 근처에는 사관이 항상 상주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후일 창왕과 우왕이 신씨로 몰리게 되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외교와 국방[편집] 왜구가 남해안을 자주 노략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되자 그는 1389년 1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에게 명하여, 병선 100척을 내주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게 하였다. 1389년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사신 옥지(玉之)를 고려에 보내자 직접 사신을 인견하고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상소로 각 주·군(州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을 후히 대접한 뒤 창왕 역시 같은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사신으로 유구국에 보내어 답례하게 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용한다. 신진사대부들의 일방적인 개혁안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진사대부들의 급격한 세력 확장을 경계하게 된다.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여성의 재가를 금하고, 판사(判事, 정3품)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게 하자는 신진사대부의 과부 재가 금지 정책을 수용한다. 1389년 그가 부왕 우왕의 복위를 비밀리에 기도하려 했다는 것이 신진사대부에 의해 드러나면서 우왕은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겨졌다. 폐위와 죽음[편집] 우왕 복위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89년 초 이성계, 정도전 등은 창왕 역시 가짜 왕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고 따라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그를 폐위시켰다. 이에 정몽주 등도 1389년(창왕 2년)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영립(迎立)하는데 동조한다. 1389년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참수형이 집행,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성계는 창왕을 내쫓은 후, 제20대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그를 내쫓고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고려 태조의 개국 이래 34대 474년만에 멸망하였다. 기타[편집]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없는 낭설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廢假入眞),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4]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5]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5]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가계[편집] 조부 :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년~1374년) 부왕 :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년~1388년) 모후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신돈의 손자설[편집] 조부 : 신돈(辛旽, 1322~1371) 부왕 :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년~1388년) 모후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창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개국》(KBS, 1983년, 배우:김알음) 《추동궁 마마》 1983년~1983년 MBC,배우 : 전현 《용의 눈물》(KBS, 1996년~1998년, 배우:윤동원) 《정도전》(KBS, 2014년, 배우:김준성) 《육룡이 나르샤》(SBS, 2015년~2016년, 배우:황재원) 각주[편집] ↑ 《高麗史》《고려사》137권 및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33권 ↑ 《高麗史》《고려사》45권 및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34권 ↑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개성왕씨 성원록에는 우왕을 폐왕, 창왕을 후폐왕이라 각각 칭하였다.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24페이지 ↑ 가 나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전임아버지 우왕 제33대 고려왕1388년 - 1389년 후임친척 공양왕 전임우왕 한반도의 국가 원수1388년 ~ 1389년 후임공양왕 vdeh고려의 역대 국왕추존 (국조) (의조) (세조) (필영왕) (문원왕) (대종) (안종) (정간왕) (양헌왕)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영종(사실상) 원종(복위)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려_창왕&oldid=23977623" 분류: 고려의 왕1380년 태어남1389년 죽음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폐위된 군주참수된 사람유군불교 이탈자조선 태조신돈14세기 한국 사람14세기 한국의 군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Englishفارسی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NorskРусскийไทย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6일 (토) 16: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고려 창왕의 생애 중 즉위 후의 정치적 생애는 어떠했는가? |
고려 창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 창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려 창왕高麗 昌王 지위 고려 제33대 국왕 재위 1388년 6월 9일 ~ 1389년 11월 15일 전임자 우왕 후임자 공양왕 섭정 왕대비 죽주 안씨(1388년 6월 ~ 1388년 7월) 이색(1388년 7월 ~ 1388년 10월) 이성계(1388년 10월 ~ 1389년 11월) 부왕 우왕 이름 휘 왕창(王昌) 신상정보 출생일 1380년 9월 6일(1380-09-06) 사망일 1389년 12월 31일 (9세) 부친 우왕 모친 근비 이씨 배우자 無 자녀 無 종교 불교 → 유교(성리학) → 무종교 창왕(昌王, 1380년 9월 6일(음력 8월 7일) ~ 1389년 12월 31일(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3대 국왕(재위: 1388년 (음력 6월 9일)[1]~ 1389년 (음력 11월 15일)[2])이다. 목차 1 이력 2 즉위와 폐위 배경 3 치세 4 생애 4.1 출생과 유년기 4.2 즉위 4.3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 4.4 외교와 국방 4.5 폐위와 죽음 5 기타 6 가계 6.1 신돈의 손자설 7 창왕이 등장한 작품 8 각주 이력[편집] 휘는 창(昌)이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식 시호는 없다. 이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연관이 있다. 후에 고려의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그밖에 후폐왕(後廢王)이라 부르기도 한다.[3] 즉위와 폐위 배경[편집]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인 왕창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건이 발각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집행관 유순(柳珣)에게 시해되었다. 치세[편집] 1388년 6월에서 1389년 11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388년 6월에서 1388년 7월까지 왕대비 안씨가 1개월간 섭정하였고 1388년 7월에서 1388년 10월까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3개월간 섭정하였으며 1388년 10월에서 1389년 11월까지 이성계(李成桂)가 1년 1개월간 섭정을 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창왕의 이름은 창(昌)으로, 우왕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고성(固城)로 개경유수를 지낸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사건 직후 이성계(李成桂), 정몽주, 정도전 등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제 폐위되고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9세였다. 즉위[편집] 그러나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이성계의 섭정 체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판단을 하여 정사를 수행하려 하였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권문세족들이 장악하여 유명무실화된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고, 공물 징수를 다시 조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들로부터 사적인 목적으로 선물이나 공물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주게 하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는 계속 자신들의 개혁 정책을 왕에게 상주하여 허락할 때까지 엎드려 있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를 피휘하여 이를 고치게 하여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전제(田制)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상서(上書)하였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농지를 농민에게 줄 것을 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편집] 군부의 성장을 염려하여 무신정권의 상설기구인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자 수용하였고,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의 개혁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들을 내심 경계하던 그는 근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부왕 우왕의 복위운동을 추진한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여주시)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신진사대부들의 주장을 그는 수용하게 되었고 조정은 신진사대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1389년초 그해 사관(史官) 최견 등이 상소하여 기록 보존을 위해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직과 충수찬(充修撰) 이하는 견문록(見聞錄)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이때부터 왕의 근처에는 사관이 항상 상주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후일 창왕과 우왕이 신씨로 몰리게 되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외교와 국방[편집] 왜구가 남해안을 자주 노략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되자 그는 1389년 1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에게 명하여, 병선 100척을 내주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게 하였다. 1389년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사신 옥지(玉之)를 고려에 보내자 직접 사신을 인견하고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상소로 각 주·군(州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을 후히 대접한 뒤 창왕 역시 같은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사신으로 유구국에 보내어 답례하게 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용한다. 신진사대부들의 일방적인 개혁안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진사대부들의 급격한 세력 확장을 경계하게 된다.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여성의 재가를 금하고, 판사(判事, 정3품)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게 하자는 신진사대부의 과부 재가 금지 정책을 수용한다. 1389년 그가 부왕 우왕의 복위를 비밀리에 기도하려 했다는 것이 신진사대부에 의해 드러나면서 우왕은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겨졌다. 폐위와 죽음[편집] 우왕 복위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89년 초 이성계, 정도전 등은 창왕 역시 가짜 왕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고 따라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그를 폐위시켰다. 이에 정몽주 등도 1389년(창왕 2년)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영립(迎立)하는데 동조한다. 1389년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참수형이 집행,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성계는 창왕을 내쫓은 후, 제20대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그를 내쫓고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고려 태조의 개국 이래 34대 474년만에 멸망하였다. 기타[편집]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없는 낭설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廢假入眞),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4]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5]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5]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가계[편집] 조부 :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년~1374년) 부왕 :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년~1388년) 모후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신돈의 손자설[편집] 조부 : 신돈(辛旽, 1322~1371) 부왕 :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년~1388년) 모후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창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개국》(KBS, 1983년, 배우:김알음) 《추동궁 마마》 1983년~1983년 MBC,배우 : 전현 《용의 눈물》(KBS, 1996년~1998년, 배우:윤동원) 《정도전》(KBS, 2014년, 배우:김준성) 《육룡이 나르샤》(SBS, 2015년~2016년, 배우:황재원) 각주[편집] ↑ 《高麗史》《고려사》137권 및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33권 ↑ 《高麗史》《고려사》45권 및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34권 ↑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개성왕씨 성원록에는 우왕을 폐왕, 창왕을 후폐왕이라 각각 칭하였다.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24페이지 ↑ 가 나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전임아버지 우왕 제33대 고려왕1388년 - 1389년 후임친척 공양왕 전임우왕 한반도의 국가 원수1388년 ~ 1389년 후임공양왕 vdeh고려의 역대 국왕추존 (국조) (의조) (세조) (필영왕) (문원왕) (대종) (안종) (정간왕) (양헌왕)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영종(사실상) 원종(복위)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려_창왕&oldid=23977623" 분류: 고려의 왕1380년 태어남1389년 죽음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폐위된 군주참수된 사람유군불교 이탈자조선 태조신돈14세기 한국 사람14세기 한국의 군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Englishفارسی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NorskРусскийไทย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6일 (토) 16: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1389년 초 사관 최견 등이 상소한 내용에는 사관을 몇 명 두자고 주장하였을까? |
고려 창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 창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고려 창왕高麗 昌王 지위 고려 제33대 국왕 재위 1388년 6월 9일 ~ 1389년 11월 15일 전임자 우왕 후임자 공양왕 섭정 왕대비 죽주 안씨(1388년 6월 ~ 1388년 7월) 이색(1388년 7월 ~ 1388년 10월) 이성계(1388년 10월 ~ 1389년 11월) 부왕 우왕 이름 휘 왕창(王昌) 신상정보 출생일 1380년 9월 6일(1380-09-06) 사망일 1389년 12월 31일 (9세) 부친 우왕 모친 근비 이씨 배우자 無 자녀 無 종교 불교 → 유교(성리학) → 무종교 창왕(昌王, 1380년 9월 6일(음력 8월 7일) ~ 1389년 12월 31일(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3대 국왕(재위: 1388년 (음력 6월 9일)[1]~ 1389년 (음력 11월 15일)[2])이다. 목차 1 이력 2 즉위와 폐위 배경 3 치세 4 생애 4.1 출생과 유년기 4.2 즉위 4.3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 4.4 외교와 국방 4.5 폐위와 죽음 5 기타 6 가계 6.1 신돈의 손자설 7 창왕이 등장한 작품 8 각주 이력[편집] 휘는 창(昌)이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식 시호는 없다. 이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연관이 있다. 후에 고려의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그밖에 후폐왕(後廢王)이라 부르기도 한다.[3] 즉위와 폐위 배경[편집]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인 왕창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건이 발각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집행관 유순(柳珣)에게 시해되었다. 치세[편집] 1388년 6월에서 1389년 11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388년 6월에서 1388년 7월까지 왕대비 안씨가 1개월간 섭정하였고 1388년 7월에서 1388년 10월까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3개월간 섭정하였으며 1388년 10월에서 1389년 11월까지 이성계(李成桂)가 1년 1개월간 섭정을 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창왕의 이름은 창(昌)으로, 우왕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고성(固城)로 개경유수를 지낸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사건 직후 이성계(李成桂), 정몽주, 정도전 등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제 폐위되고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9세였다. 즉위[편집] 그러나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이성계의 섭정 체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판단을 하여 정사를 수행하려 하였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권문세족들이 장악하여 유명무실화된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고, 공물 징수를 다시 조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들로부터 사적인 목적으로 선물이나 공물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주게 하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는 계속 자신들의 개혁 정책을 왕에게 상주하여 허락할 때까지 엎드려 있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를 피휘하여 이를 고치게 하여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전제(田制)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상서(上書)하였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농지를 농민에게 줄 것을 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편집] 군부의 성장을 염려하여 무신정권의 상설기구인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자 수용하였고,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의 개혁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들을 내심 경계하던 그는 근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부왕 우왕의 복위운동을 추진한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여주시)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신진사대부들의 주장을 그는 수용하게 되었고 조정은 신진사대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1389년초 그해 사관(史官) 최견 등이 상소하여 기록 보존을 위해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직과 충수찬(充修撰) 이하는 견문록(見聞錄)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이때부터 왕의 근처에는 사관이 항상 상주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후일 창왕과 우왕이 신씨로 몰리게 되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외교와 국방[편집] 왜구가 남해안을 자주 노략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게 되자 그는 1389년 1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에게 명하여, 병선 100척을 내주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게 하였다. 1389년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사신 옥지(玉之)를 고려에 보내자 직접 사신을 인견하고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상소로 각 주·군(州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을 후히 대접한 뒤 창왕 역시 같은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사신으로 유구국에 보내어 답례하게 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자 이를 수용한다. 신진사대부들의 일방적인 개혁안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진사대부들의 급격한 세력 확장을 경계하게 된다.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여성의 재가를 금하고, 판사(判事, 정3품)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게 하자는 신진사대부의 과부 재가 금지 정책을 수용한다. 1389년 그가 부왕 우왕의 복위를 비밀리에 기도하려 했다는 것이 신진사대부에 의해 드러나면서 우왕은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겨졌다. 폐위와 죽음[편집] 우왕 복위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89년 초 이성계, 정도전 등은 창왕 역시 가짜 왕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고 따라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그를 폐위시켰다. 이에 정몽주 등도 1389년(창왕 2년)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영립(迎立)하는데 동조한다. 1389년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참수형이 집행,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성계는 창왕을 내쫓은 후, 제20대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그를 내쫓고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고려 태조의 개국 이래 34대 474년만에 멸망하였다. 기타[편집]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없는 낭설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廢假入眞),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4]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5]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5]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가계[편집] 조부 :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년~1374년) 부왕 :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년~1388년) 모후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신돈의 손자설[편집] 조부 : 신돈(辛旽, 1322~1371) 부왕 :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년~1388년) 모후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창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개국》(KBS, 1983년, 배우:김알음) 《추동궁 마마》 1983년~1983년 MBC,배우 : 전현 《용의 눈물》(KBS, 1996년~1998년, 배우:윤동원) 《정도전》(KBS, 2014년, 배우:김준성) 《육룡이 나르샤》(SBS, 2015년~2016년, 배우:황재원) 각주[편집] ↑ 《高麗史》《고려사》137권 및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33권 ↑ 《高麗史》《고려사》45권 및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34권 ↑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개성왕씨 성원록에는 우왕을 폐왕, 창왕을 후폐왕이라 각각 칭하였다.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24페이지 ↑ 가 나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전임아버지 우왕 제33대 고려왕1388년 - 1389년 후임친척 공양왕 전임우왕 한반도의 국가 원수1388년 ~ 1389년 후임공양왕 vdeh고려의 역대 국왕추존 (국조) (의조) (세조) (필영왕) (문원왕) (대종) (안종) (정간왕) (양헌왕)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영종(사실상) 원종(복위)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후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려_창왕&oldid=23977623" 분류: 고려의 왕1380년 태어남1389년 죽음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폐위된 군주참수된 사람유군불교 이탈자조선 태조신돈14세기 한국 사람14세기 한국의 군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Englishفارسی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NorskРусскийไทยTiếng Việt中文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6일 (토) 16: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고려왕조는 개국 이래 몇 년간 지속되었습니까? |
플라보노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플라보노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플라보노이드 기본골격 플라본 백본 (2-phenyl-1,4- benzopyrone)의 분자 구조 이소플라본 구조 네오플라보노이드 구조 플라보노이드(또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노랗다는 뜻의 라틴어 flavus에서 유래함)는 식물이나 균류의 이차대사산물의 일종이다. 화학적으로 플라보노이드는 두 개의 페닐 고리(A와 B)와 헤테로 사이클릭 고리(C)로 구성된 15개의 탄소 골격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탄소 구조는 C6-C3-C6으로 축약 될 수있다. IUPAC 명명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분류 될 수 있다.[1][2] 플라보노이드 또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 3-페닐 크로몬(3-페닐-1,4-벤조 피론) 구조로부터 유도된 이소플라보노이드 4-페닐 쿠마린(4-페닐-1,2-벤조 피론) 구조로부터 유도된 네오플라보노이드 위의 세 가지 플라보노이드는 모두 케톤 함유 화합물이며, 따라서 안토잔틴(플라본 및 플라보놀)이다. 이 화합물들이 최초로 바이오플라보노이드라고 불렸다. 플라보노이드 및 바이오플라보노이드라는 용어는, 정확하게는 플라바노이드(flavanoid)라고 불리는 비-케톤 폴리 하이드록시 폴리페놀 화합물을 가리키는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플라보노이드 백본의 3개의 사이클 또는 헤테로사이클은 일반적으로 고리 A, B, C로 불린다. 고리 A는 일반적으로 플로로글루시놀(phloroglucinol) 치환 패턴을 나타낸다. 목차 1 종류 1.1 안토잔틴 (Anthoxanthin) 1.2 플라바논 (Flavanone) 1.3 플라바노놀 (Flavanonol) 1.4 플라반 (Flavan) 1.5 안토시아니딘 (Anthocyanidin) 1.6 이소플라본 (isoflavone) 2 공급원이 되는 식품 2.1 파슬리 2.2 블루베리 2.3 홍차 2.4 감귤류 2.5 코코아 2.6 땅콩 3 연구 3.1 인 비트로 3.2 항산화 4 같이 보기 5 참고 자료 종류[편집] 5000 가지가 넘는 천연 플라보노이드가 다양한 식물로부터 확인되었다. 그 화합물들은 화학 구조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대개 다음 하위 그룹으로 나뉜다.(참고 자료:[3]) 안토잔틴 (Anthoxanthin)[편집] 플라본: 아피제닌의 구조 플라보놀: 쿼세틴의 구조 안토잔틴은 두 개의 군으로 나뉜다. [4]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본 Flavone 2-phenylchromen-4-one ✗ ✗ en:Luteolin, en:Apigenin, en:Tangeritin 플라보놀 Flavonol또는3-hydroxyflavone 3-hydroxy-2-phenylchromen-4-one ✓ ✗ en:Quercetin, en:Kaempferol, en:Myricetin, en:Fisetin, en:Galangin, en:Isorhamnetin, en:Pachypodol, en:Rhamnazin, en:Pyranoflavonols, en:Furanoflavonols, 플라바논 (Flavanone)[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바논입니다.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바논 Flavanone 2,3-dihydro-2-phenylchromen-4-one ✗ ✓ en:Hesperetin, en:Naringenin, en:Eriodictyol, en:Homoeriodictyol 플라바노놀 (Flavanonol)[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바노놀입니다. 군 기본골격 예시 설명 작용기 구조식 3-hydroxyl 2,3-dihydro 플라바노놀 Flavanonol또는3-Hydroxyflavanone또는2,3-dihydroflavonol 3-hydroxy-2,3-dihydro-2-phenylchromen-4-one ✓ ✓ en:Taxifolin (또는 en:Dihydroquercetin), en:Dihydrokaempferol 플라반 (Flavan)[편집] 플라반의 구조 단위체: (+)-카테킨의 구조 이 부분의 본문은 플라반입니다. 기본골격 이름 en:Flavan-3-ol (flavanol) en:Flavan-4-ol en:Flavan-3,4-diol (leucoanthocyanidin) Flavan-3-ols (플라바놀) Flavan-3-ols은 2-페닐-3,4-디하이드로-2H-크로멘-3-올 골격을 사용한다. 예시: 카테킨 (C), en:Gallocatechin (GC), en:Catechin 3-gallate (Cg), en:Gallocatechin 3-gallate (GCg), 에피카테킨(카테킨 (EC)), en:Epigallocatechin (EGC), en:Epicatechin 3-gallate (ECg),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 (EGCg) en:Theaflavin 예시: en:Theaflavin-3-gallate, en:Theaflavin-3'-gallate, en:Theaflavin-3,3'-digallate en:Thearubigin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은 플라바놀의 중합체 또는 이합체, 삼합체, 올리고머의 형태이다 안토시아니딘 (Anthocyanidin)[편집] 안토시아니딘의 플라비리움 골격 안토사이아닌 안토시아니딘은 안토시아닌의 아글리콘(aglycone)이다. 기본 골격은 플라빌륨(2-페닐크로메닐륨) 이온이다. 예시: en:Cyanidin, en:Delphinidin, en:Malvidin, en:Pelargonidin, en:Peonidin, en:Petunidin 이소플라본 (isoflavone)[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소플라본입니다. 아이소플라본 공급원이 되는 식품[편집] 파슬리는 플라본 공급원이다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니딘의 공급원이 되는 식품이다. 그레이프푸르트를 포함한 귤속 과일에는 다양한 플라보노이드가 있다. 플라보노이드 (특히 카테킨, 플라바놀과 같은 플라노보이드는 "인간의 식이에서 가장 흔한 폴리페놀 화합물이며, 거의 모든 식물에 포함되어 있다.") [5] 쿼세틴과 같은 바이오플라보노이드는 플라보놀이라고도 불리며, 이 역시 많은 식물에 포함되어 있으나 양은 비교적 적다. 다른 활성 식물 화합물(예를 들면 알칼로이드)에 비해 플라보노이드는, 그 다양성 및 상대적으로 낮은 독성, 광범위한 분포는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의 식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보노이드 함량이 높은 식품은 파슬리 [6], 양파[6], 블루베리 및 딸기류, 홍차[6], 녹차 및 우롱차[6], 바나나, 모든 감귤류, 은행, 적포도주, 바다 갈매나무, 다크 초콜릿(코코아 함량 70 % 이상)등이 있다. 플라보노이드의 식이 공급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미국 농무부 플라보노이드 데이터베이스에서 얻을 수 있다. [6] 파슬리[편집] 파슬리, 날 것과 말린 것 모두 플라본을 포함한다.[6] 블루베리[편집]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니딘의 공급원이다.[6][7] 홍차[편집] 홍차는 플라바놀의 풍부한 공급원이다.[6] 감귤류[편집] 감귤류의 플라보노이드에는 헤스페리딘(flavanone hesperetin의 배당체), 쿼시트린, 플라보놀 쿼세틴의 두 가지 배당체인 루틴(rutin) 및 플라본 탠저리틴이 포함된다. 코코아[편집] 플라보노이드는 코코아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쓴 맛이 있기 때문에 초콜렛, 심지어는 다크 초콜릿에서도 종종 제거된다. [8] 밀크 초콜릿에도 플라보노이드가 함유되어 있지만 우유는 흡수를 방해 할 수 있다고 한다. [9][10] 그러나 이 결론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11] 땅콩[편집] 땅콩의 빨간 껍질에는 플라보노이드를 포함한 중요한 폴리 페놀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12] [13] 식품 플라본 플라보놀 플라바논 적 양파 0 4 - 100 0 파슬리, 날 것 24 - 634 8 - 10 0 백리향, 날 것 56 0 0 레몬 주스, 날 것 0 0 - 2 2 - 175 [14] 연구[편집] 개별 플라보노이드의 건강에 대한 잠재적인 긍정적 효과에 대해, 진행중인 연구가 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 식품 안전청(EFSA)은 플라보노이드에 대한 건강 유익 표시를 승인하지 않았고 플라보노이드를 의약품으로 승인하지도 않았다.[15][16][17] 게다가 몇몇 회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강 유익 표시에 대해 FDA로부터 주의를 받았다.[18][19][20][21] 인 비트로[편집] 플라보노이드는 인 비트로 연구에서 광범위한 생물학적 및 약리학적 활성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항알레르기,[22] 항염증,[22][23] 항산화 물질,[23] 항미생물(항균,[24][25] 항진균,[26][27] 항바이러스[26][27]), 암,[23][28] 설사 방지 활성 등이 있다.[29] 플라보노이드는 또한 DNA 회전효소를 억제하고[30][31] 인 비트로 연구에서 mixed-lineage leukemia(MLL) 유전자에서 DNA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2] 그러나 위의 사례의 대부분에서 인 비보 또는 후속 임상시험이 수행되지 않아 이러한 활동이 인체 건강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없다. 더 깊이 조사 된 생물학적 및 약리학 적 활동은 아래에서 설명한다. 항산화[편집]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Linus Pauling Institute)와 유럽 식품 안전청(EFSA)의 연구에 따르면 플라보노이드는 인체에 흡수되기 어렵고(5% 미만), 흡수되는 물질의 대부분은 신속하게 대사되고 배설된다.[17][33][34] 이러한 결과는 플라보노이드가 가진 항산화 활성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며,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한 식품을 섭취한 후에 나타나는 혈액의 항산화 능력이 플라보노이드에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플라보노이드의 분해와 배설 활동으로 인한 요산의 생산 때문이다.[35] 같이 보기[편집] 피토케미컬 식물화학 이차대사산물 참고 자료[편집] ↑ McNaught, Alan D; Wilkinson, Andrew; IUPAC (1997), 〈IUPAC Compendium of Chemical Terminology〉, 《IUPAC Compendium of Chemical Terminology》 2판, Oxford: Blackwell Scientific, ISBN 0-9678550-9-8, doi:10.1351/goldbook.F02424 ↑ “The Gold Book”.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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