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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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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것은 국민일보-월드리서치가 11월 25일 실시한 결과에서의 30.4%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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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0.4%보다 낮을 시 그 조사 결과는 무효 처리하도록 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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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 방식 등 쟁점 사항에 있어 통큰 양보를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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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의 방식은 합의되었으나, 여론조사의 설문 내용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는데,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가 더 마음에 드느냐'는 지지도 질문에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반면, '어느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경쟁력 질문에는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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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 캠프는 조율을 거친 결과 지지도 질문과 경쟁력 질문을 조금씩 섞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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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후보는 여론조사 실시에 앞서 텔레비전 토론을 가지기로 했는데,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사전 선거 운동이 될 수 있다며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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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한 차례에 한해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하였고, 두 후보 간 토론은 11월 22일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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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는 11월 24일 오후 1시부터 8시 30분까지 7시간 반에 걸쳐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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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는 월드리서치와 리서치앤리서치, 2개 업체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한 업체가 각각 2,000명, 총 4,000명을 상대로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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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과 통합21은 11월 24일 자정 공동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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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앤리서치 조사는 응답자 중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32.1%가 나와, 무효 처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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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무효화 기준인 30.4%에 미달하여 무효 처리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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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를 얻음으로써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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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효 처리된 월드 리서치 조사 결과 또한 노무현 후보가 38.8%, 정몽준 후보가 37.0%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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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서 패배함에 따라 사퇴를 선언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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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계기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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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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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2위를 했던 이인제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데 이어 이틀 뒤인 12월 3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으며, 입당과 동시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지명을 받아 총재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2
1
이인제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할 계획으로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김종필 총재의 강력한 의지로 자민련은 12월 12일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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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당원 및 당직자들이 개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막지 않기로 해,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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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역시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긴급 발표를 통해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를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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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은 지지 철회 발표문에서 그 날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한 것에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의식에 문제를 느껴 지지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3
2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정몽준의 자택 앞까지 찾아갔으나, 정몽준 대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전파를 타며 당시 진보 진영이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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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거는 대한민국 정치를 이끈 3김 시대의 종식과 대한민국 정치계의 본격적인 세대 교체론의 대두와 함께 노사모의 등장 등 인터넷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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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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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결국 임기 중이던 2003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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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지만,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고 총선에서 참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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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무소속 신분으로 표류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는 집권여당 열린우리당으로 입당했고 대통령 탄핵을 극복하여 총선에서 압승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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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제1야당 한나라당는 선거에서 패배하며 정권 교체를 실패하며 계속 야당시절을 보내게 된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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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출범 이후 원내 의석수을 악용해 압박하여 참여정부에게 향한 견제를 하기 시작했지만 2003년 11월 그러나 대선 차떼기 사건으로 역풍을 맞게되고 한나라당는 최악의 위기를 맞게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민심의 역풍을 맞게되었지만 총선에서 원내 1당 지위를 상실했지만 개헌저지선 100석 이상 사수을 하며 선전하여 보수우파의 자존심을 사수하는데 만족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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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은퇴와 한나라당의 실질적 뿌리 민정계 인사들의 퇴장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친박계과 친이계이란 거대한 파벌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59
3
이후 두 사람는 17대 대선과 18대 대선에서 나란히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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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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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이다.
함석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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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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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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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을 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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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였다가 중기에는 기독교였으나 후기에는 장로회로 바꾼것이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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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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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당숙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덕일소학교(德一小學校)에 입학, 1914년에 덕일소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1916년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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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1 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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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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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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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때 안창호, 이승훈, 이광수, 조만식 등과도 알게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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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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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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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유석동(柳錫東), 양인성(楊仁性)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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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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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역사과 수석)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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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1935년에 동인지 《성서조선》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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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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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평안남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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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聖書朝鮮) 제 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함석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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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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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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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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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함석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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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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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함석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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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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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함석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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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함석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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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 하나는 화제가 되었다.
함석헌
25
0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함석헌
25
1
그는 또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함석헌
25
2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함석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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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함석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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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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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있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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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국 국무성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함석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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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파(Quaker敎派) 인사들과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돌아왔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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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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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출범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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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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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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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함석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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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함석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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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간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함석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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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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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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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함석헌
36
1
1980년 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함석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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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함석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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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어오고 있다.
함석헌
38
0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함석헌
38
1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함석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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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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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함석헌
39
2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함석헌
39
3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함석헌
39
4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석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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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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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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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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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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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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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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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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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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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